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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이다. 여호수아는 히브리어 예호슈아인데 예호와(자존자)와 야샤(해방하다, 구원하다)에서 유래했으며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의 뜻을 가진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 눈의 아들이며 가나안 땅 정탐꾼으로 활동하였다. 여호수아는 신광야에서 떠나 시내산 남부의 르비딤에서 아말렉 족속과 싸워서 이겼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서 아이성 전투를 제외하고는 승승장구한다. 이는 예수님의 승리의 삶을 예표하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회막에서 오래도록 기도하는 모습은 예수께서 기도에 늘 힘쓰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전쟁 때 여호와께서 지시한 대로 여리고 성을 돌며 순종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까지 온전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모습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천국으로 온전히 인도하실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모습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실 것을 보여준다. 여호수아가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아가는 모습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앞세우고 사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 여리고 부근에서 칼을 들고 서 있는 군대대장을 만났다. 여호수아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에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다고 답변하였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다. 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다. 여리고의 히브리어 예리호의 뜻은 달(달의 성읍), 질병, 혐오스러운 것, 진저리치게 하는 것이다. 여리고의 이러한 어원을 미루어 볼 때, 그 성읍은 월신 우상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이유로 우상의 도시 여리고는 가나안 땅에서 처음으로 파멸당하는 곳이 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였다(출3장). 따라서 가나안 땅 여리고에서 여호수아에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을 하는 분은 신적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하늘에서 온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다. 그가 하늘에서 오심으로 가나안 전쟁의 승리는 확보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수5:14에서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여호수아에게 지금 왔느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동사 왔느니라는 히브리어 바티인데 남성도 여성도 아닌 일인칭 단수 공성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사람이 아닌 신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 궤는 여호와의 궤, 하나님의 궤, 증거궤, 주의 권능의 궤, 거룩한 궤 등으로 불리운다. 언약의 히브리어 베리트는 자르다 혹은 선택하다의 뜻을 가진 바라에서 유래하였다. 베리트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의 집에서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언약궤 안의 십계명 돌판은 말씀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을 상징한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모습은 예수께서 그의 백성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모습을 예표한다. 제사장이 멘 언약궤가 앞서가니 요단강물이 멈추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칠일 동안 여리고성을 도니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렸다. 예수께서 앞서 행하시는 길에는 모든 대적이 무너져 내리며 인생의 모든 장애물이 해결된다. 언약궤가 블레셋의 다곤 신전에 있을 때는 다곤 신상이 떨어져 부서지고 몸둥이만 남았고 언약궤가 아스돗에 있을 때는 독한 종기의 재앙이 일어났고 언약궤가 가드에 있을 때는 성읍에 독한 종기가 일어났다. 오늘날 예수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재앙이 반드시 임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에게는 평안과 구원을 주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올무와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말씀하시는 곳은 지성소에 안치된 언약궤 위였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만나주신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언약궤에 대하여 말한 것이 구약에서는 마지막이다(렘3:16). 적어도 그 때까지는 언약궤가 성전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예루살렘에서 여호와의 언약궤가 사라지고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은 이 땅에 살다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다.
기생 라합의 붉은 줄에 대하여 에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한다. 라합이 기생이 아니라 여관집 주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히11:31과 약2:25에서 매춘부, 창녀를 뜻하는 기생의 단어 포르네를 사용하고 있기에 여관집 주인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기생의 히브리어 자나는 간음하다, 매춘하다의 뜻도 있으나 비유적으로 우상을 섬기다는 의미도 있기에 라합이 우상숭배자였다고 볼 수도 있다. 여리고는 달의 신을 섬기는 우상의 성읍이어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심판하신다. 라합은 넓은, 널찍한 혹은 넓게 하다, 넓히다의 히브리어 라하브에서 유래하였다. 라합은 우상의 성읍 여리고에 있었지만 그 마음이 열려서 상천하지의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빌립보에서 주께서 자색 옷감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믿도록 하신 것에 비견된다. 성경을 원어적으로 자세히 보면 정탐꾼이 성벽을 타고 내려간 줄과 구원의 증표로 기생 라합이 그의 창문에서 드리운 붉은 줄은 그 단어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명의 정탐꾼이 성벽에서 타고 내린 줄은 끈, 줄, 올가미, 덫을 뜻하는 히브리어 헤벨이다. 이는 단단히 감다, 묶다, 매다, 맹세하다, 보증하다, 전당잡히다의 뜻을 가진 하발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기생 라합이 구원의 증표로 성벽에 드리운 붉은 줄은 실, 줄, 끈을 뜻하는 히브리어 후트를 사용하고 있다. 줄의 명사 후트는 묶다, 결합하다, 기초를 개축하다, 수리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후트에서 유래하였다. 붉은 줄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연합된다는 것이다. 줄 곧 후트의 히브리어 상형적 의미는 십자가의 피가 보호하고 생명을 얻게 한다는 뜻이다.
7. 룻기
룻기에 나오는 고엘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모압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룻은 고향 땅 유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다. 참으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기를 원했다. 나오미는 희락이지만 마라는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고엘제도가 있어서 이러한 곤경에 처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에게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고 소개한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집안이 팔아넘긴 땅을 되사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기업을 무르는 자는 희생이 따르나 그 기업을 회복하는 자는 큰 위로가 된다. 기업을 무를 자의 히브리어 가알은 되사다, 속량하다, 구속하다, 근친의 역할을 행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자기 친족을 어려움이나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가난하거나 약한 자를 돌보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제도이다. 기업 무를 자 히브리어 가알의 상형적 의미는 해방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형제가 가난하여 땅을 팔았다면 가까운 친족이 와서 그 친족의 판 것을 되사주라는 것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친척의 기업을 무르는 자는 구속자이다. 기업 무르는 자(고엘) 보아스로 말미암아 나오미와 룻은 삶의 기쁨과 풍성을 회복하며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의 짐을 단번에 해결해주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롬5:8).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해방시켜시고 자유롭게 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8. 역대상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다. 다윗은 히브리어 다비드인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비드의 상형적 의미는 세상의 문에서 하늘의 문으로 연결하는 자이다.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블레셋의 가드, 아둘람 굴, 십 광야의 수풀, 마온 황무지, 엔게디 요새, 바란 광야, 하길라 산, 시글락 등을 다니며 사울 왕의 추격으로부터 피난생활을 하였다. 이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던 예수님의 광야생활의 고난을 보여준다. 다윗은 인생의 위기에 늘 기도하였다. 다윗이 바알브라심에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도 기도로 하나님께 물었다. 다윗이 시글락에서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할 때도 에봇을 입고 기도로 하나님께 물었다. 이러한 다윗의 기도는 그의 시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예수께서 새벽에도 기도하시고 밤에도 기도하시고 열두 명의 제자를 세우실 때도 기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기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심을 연상시킨다. 다윗이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 장수 골리앗과 대적하여 싸울 때 물매로 조약돌을 날려 그 이마에 맞혀서 단번에 승리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 금식 후에 마귀와 영적전쟁을 하여 완전히 승리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특별하였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키고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많은 성전건축 재료를 모았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성전의 설계도를 받아 그 아들 솔로몬에게 전달하였다. 이는 사십 육년 동안에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나 예수께서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을 삼일 만에 지으리라 하신 것을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자신을 삼키기도 하였다(요2:17). 다윗이 전쟁을 할 때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삼하8:6). 다윗은 역사적으로 줄기차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웃나라 블레셋, 모압, 아람, 에돔, 암논, 아말렉을 정복하였다. 이는 예수께서 죄와 사망과 마귀를 이기시고 모든 대적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시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을 때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게 하시고 그 능력을 기름 붓 듯이 하셔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게 하신 것을 연상시킨다. 다윗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감당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 곧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역할을 예표하는 것이다. 다윗 왕이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간 통치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삼십 삼년간 사셨던 생애와 일치하고 있다.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생애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의 서두에 대문짝만하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약속하셨다(삼하7:16). 이후로 다윗 왕국은 약 사백년간 지속되다가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한다. 따라서 다윗을 향한 언약은 메시야 언약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메시야는 그 왕위가 쇠하지 아니하고 영원한 것이다.
9. 에스더서
에스더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예표한다. 베냐민 자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외국 땅에서 포로가 된 신분으로서 매우 미약한 존재였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혀 온 것이다. 모르드개의 삼촌의 딸 하닷사 곧 에스더는 부모가 없어 모르드개가 양육하였다. 한편 예수께서도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시골생활을 하며 사람들의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였다. 악한 하만은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 곧 젊은이 늙은이 어린아이 여인들을 죽이고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하라는 왕의 조서를 하달하였다. 이에 에스더는 금식기도 후에 왕의 부름이 있어야 하지만 규례를 어기고 죽음을 무릅쓰고 왕의 뜰에 나아간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담대한 결단은 유다인을 구원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예수께서도 썩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준비한 오십 규빗 나무에 오히려 왕의 명령에 의하여 자신이 매달리는 신세가 되었다.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길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의 길인 것이다. 왕후 와스디는 쇠하나 에스더는 흥하고, 하만은 쇠하나 모르드개는 흥하고, 하만과 그 무리들은 쇠하나 이스라엘 백성은 흥하게 된다. 이는 이 땅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마침내 역전이 되어 승리하게 될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말렉의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악의 세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코자 하였다. 역사적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에돔과 아말렉은 대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족속들이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예표한다. 유다인은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에 부림일로 지킨다.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된 것을 기뻐하며 기념한다. 이는 예수를 믿는 자들이 죄인에서 의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누리는 것과 같다. 에스더는 히브리어 에스테르이며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하고 별을 뜻한다. 하닷사는 늘푸른 떨기나무인 식물이름 도금양을 말한다. 하만은 외래어에서 파생되었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다, 소란하다, 소동을 벌이다의 뜻이다. 부르 혹은 부림은 히브리어 명사 푸르인데 제비를 뜻하며 깨뜨리다, 부스러뜨리다의 뜻을 가진 동사 푸르에서 유래한다.
10. 욥기
욥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를 찾을 수 있다. 욥은 히브리어 ‘이요브’인데 미움을 받는 자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요브’의 상형적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이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다(1:1). 다시 한 번 이 표현이 그대로 1:8에서 사용된다.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에스겔 선지자는 노아, 다니엘, 욥 세 명의 의로운 자를 소개하는데 여기에 욥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히브리어 탐은 온전한 뜻을 가진 형용사인데 성경에서 야곱과 욥에게만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욥은 온전하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온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니는 사탄이 욥의 삶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다. 사탄은 욥에 대하여 공격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시험하였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과 로마 총독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다. 구약에서 사탄이 그의 이름으로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시행할 때와 대제사장 여호수아 앞에서 여호와께서 사탄을 책망하는 경우이다. 그러므로 욥기에서 사탄의 단어가 무려 십일 회나 사용되고 있음은 예사롭지 않다. 이처럼 욥에게 대적한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욥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징한다. 욥은 자녀와 재산을 잃어버리고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났다. 욥은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었다. 이처럼 욥의 고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과 더불어 엘리후까지 의롭다고 말하는 욥을 향하여 계속하여 인과응보의 논리로 정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예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내쫓을 때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향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것들의 예표라 할 수 있다. 욥은 구속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을 믿었다(19:25). 욥은 자신의 가죽이 썩음을 당하게 될지라도 육체가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을 믿었다(19:26). 이는 욥이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주셨다. 이는 욥의 축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영화를 드러내고 있다.
11. 시편
시편 2편은 메시야에 대한 내용이다. 2절에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마쉬아흐 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기름 붓다의 마샤흐에서 유래한다. 구약시대에 제사장, 왕, 선지자가 기름 부음을 받았던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예표하는 의식이었다.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대적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세상의 군왕들과 재판관들은 메시아의 교훈을 받으며 경외하며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에게 입을 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로 망하게 된다. 메시아의 통치는 이방 나라에까지 이르며 철장권세로 그들을 질그릇 같이 부수신다. 이 시는 일차적으로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이웃 나라의 정복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셨으며 시온에서 통치한다.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는 말일에 열방 족속들이 시온의 여호와의 전의 산으로 나아올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쟁을 종식시키는 평화의 통치자이다.
시편 16편은 메시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윗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역할을 하였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다윗을 선지자로 말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자로 소개한다. 메시야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다윗의 시편 16편을 인용하며 베드로는 설교하고 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였으며 그 자신 또한 부활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스올은 무덤, 구덩이, 죽은 자의 거처를 말하며 묻다, 질문하다의 뜻을 가진 샤알에서 유래한다. 거룩한 자는 히브리어 하씨드이며 사랑하다, 자비하다, 연모하다의 뜻을 가진 하싸드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거룩한 자는 남성 단수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는다의 히브리어 동사 나탄은 미완료시제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 거룩한 자가 멸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시편 22편은 다윗과 메시아에 대한 것이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으로 자신의 현실적인 고통을 그리스도가 미래에 받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계시하였다. 1절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하는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크게 소리를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것과 연결된다.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다. 6절에서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하는 표현은 예수께서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동안에 겪었던 수모를 예시하는 것이다. 로마 군병들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예수를 조롱하며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쳤다. 16절에서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하는 표현은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니 피와 물이 나오더라 하는 것과 연결된다. 18절에서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하는 표현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누며 제비를 뽑았다 하는 것과 연결된다. 사도 요한은 로마 군병들이 제비뽑는 장면을 말하면서 시편22:18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하였고(시16편)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고난의 모습도 분명하게 예언하였다.
시편 110편은 왕과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여기서 주는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죽음을 이기고 승천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시다. 다니엘서는 하나님께서 인자 같은 이 곧 예수께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셨다. 예수님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는 굴복하여 정복당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하였다. 여자의 후손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강력한 권세로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오신다. 장자 르우벤 지파가 아니라 유다 지파로부터 오신다. 예수께서는 레위지파의 대제사장을 따르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한다. 멜기세덱의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 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시다. 또한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 자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예수께서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처럼 죽지 아니하고 영원히 제사장으로 계시는 분이시다. 예수께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로 제사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자기의 몸으로 단번 제사를 드려 다시는 구약의 제사처럼 해마다 반복하여 드릴 필요가 없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시편 118편 22-24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표현이 메시야에 대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 버림받아 십자가 형벌을 받았다. 이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을 신성모독을 하였다고 정죄하며 사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스스로 증거하였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생수를 마셨다. 목마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수를 풍성하게 제공한 신령한 반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가르쳤다(고전10:4).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지 않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쳐서 물을 내는 불순종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시온의 한 돌이요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이라고 말한다(사28:16). 예수께서 성전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시편118:22을 인용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셨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사도 베드로는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의 문중을 향하여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하고 외쳤다. 또한 베드로는 이 모퉁이의 돌이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심판의 돌 곧 부딪치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고 하였다(벧전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