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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식론(顯識論)
[무상론(無相論)에서 나왔다]
진제(眞諦) 한역
송성수 번역
1. 현식과 분별식, 아리야식
일체 세 세계[三界]엔 다만 식(識)이 있을 뿐이니, 어떤 것이 식인가?
세 세계엔 두 가지 식이 있다.
하나는 현식(顯識)이고,
다른 하나는 분별식(分別識)이다.
현식이란 곧 본식(本識)이 그것이니, 이 본식이 일어나 다섯 가지 대경[五塵]과 네 가지 원소[四大] 등을 지어낸다.
분별식이란 곧 의식[想識]이 그것이니, 현식 가운데에서 사람ㆍ하늘과 길고 짧음과, 크고 작음과, 남자ㆍ여자와 나무ㆍ등나무 등 모든 물체를 분별해 지어내고, 일체 법을 분별하는지라,
이 의식 덩어리가 법과 또는 대경을 분별하는 것을 이르되, 분별식이라 한다.
마치 거울을 의지해 물체의 그림자와 물체의 빛이 일어나게 되는 것처럼, 이와 같이 형식을 반연하여 분별식이 일어나게 된다.
이 분별식이 만약 일어나면 아리야식(阿梨耶識)에 훈습(熏習)하는 힘을 내세우는지라,
[是分別若起, 安立熏習力, 於阿梨耶識]
이 훈습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본식(本識)이 미래에 나게 되고,
이 미래의 현식(顯識)을 반연하여 미래의 분별식(分別識)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생사가 앞뒤가 없으며, 이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부처님께서 해절경(解節經) 가운데 게송을 설하여 말씀하시었다.
현식이 분별을 일으키고
분별이 훈습을 일으키며
훈습이 또 분별을 일으키니
이 때문에 생사에 돌아다니네.
2. 훈습의 두 가지 기능
이른바 훈습이란,
첫째 분별하는 성품에 집착하는 것이고,
둘째 진실한 성품을 관습(觀習)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에 훈습이라고 한다.
첫째의 훈습은 아리야식(阿梨耶識)을 증장(增長)하나니,
[‘훈습을’을 ‘훈습은’으로 고쳤다. 第一熏習者, 增長阿梨耶識]
아리야식이 증장됨으로써 모든 기능을 구족하여 능히 여섯 갈래[六道]에 태어나 모든 식(識)을 받아 나는지라, 이러한 이치이기 때문에 생사가 원만한 것이다.
둘째의 훈습인 이른바 진실한 성품을 관습하는 것이란, 이 훈습이 능히 분별하는 성품에 집착하는 것을 제거할 수 있으니,
첫째의 훈습이 손실과 파괴를 당하기 때문에 아리야식도 손실을 당하고,
[‘훈습을’을 ‘훈습이’고 고쳤다. 是第一熏習被損壞故, 阿梨耶識, 亦被損]
아리야식도 손실을 당하기 때문에 받아 나는 식도 손실을 당하고,
아리야식으로써 능히 세 세계에 나지만 손실을 당하기 때문에 세 세계에 유전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지해 전의(轉依)하는 이치가 다섯 가지를 갖추었으니, 멸차별상(滅差別相) 가운데에 해설한 그대로이다.
3. 현식과 분별식의 종류
1) 현식 아홉 가지와 분별식 두 가지
그리고 현식(顯識)에 아홉 가지 있으니,
몸의 식[身識]이 그 첫째이고,
대경 의식[塵識]이 그 둘째이고,
작용하는 식[用識]이 그 셋째이고,
세상의 식[世識]이 그 넷째이고,
기세간의 식[器識]이 그 다섯째이고,
셈하는 식[數識]이 그 여섯째이고,
네 가지 말하는 식[四種言說識]이 그 일곱째이고,
자타의 다른 식[自他異識]이 그 여덟째이고,
좋고 나쁜 생사의 식[善惡生死識]이 그 아홉째이다.
그 다음에 분별식(分別識)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몸을 지니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받는 식이다.
2) 현식 아홉 가지
앞의 아홉 가지 식 가운데,
첫째의 이른바 몸의 식이란,
그 유전해 일어나는 것이 몸과 같기 때문에 이 식의 이름을 몸의 식이라고 함이니,
같다는 말은 몸의 상모(相貌)에 집착하는 것과 같음이다.
몸과 같이 진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몸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식의 유전해 일어나는 것이 몸과 같기 때문에 몸의 식이라고 이르는 것이니,
곧 다섯 가지 감관[五根]이 그것이다.
다른 대경[塵]의 여덟 가지 식[八識]도 그러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식 뿐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몸의 식이란 눈[眼]의 감관과 경계 등 이러한 다섯 가지를 몸의 식이라고 함이니, 모두가 이 다섯 가지 감관에 공통되는 것이다.
다음 둘째의 이른바 대경의 식이란,
여섯 가지가 있으니,
형상 세계[色界] 등 내지 의식의 대경을 통틀어 응수식(應受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의 이른바 작용하는 식이란,
여섯 가지 안식(眼識)의 경계 등 곧 여섯 가지 식이 그것이니,
이를 크게 논(論)하여 정수식(正受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넷째의 이른바 세상의 식이란,
세 가지 식이 있으니,
곧 세 세상[三世]인 과거세ㆍ미래세ㆍ현재세가 그것이고,
또 생사가 상속하여 끊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섯째의 이른바 기세간(器世間)의 식이란,
크게 논하자면 처소의 식[處識]이고,
줄어서는 기세간이니,
바깥으론 네 가지 원소[四大]와 다섯 가지 대경[五塵]이고,
넓게는 열 방위[十方]와 세 세계[三界] 등을 말하는 것이다.
여섯째의 이른바 셈하는 식이란,
계산하고 측량하고 척도를 재는 이러한 등류를 말하는 것이다.
일곱째의 네 가지 이른바 말하는 식이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이 네 가지가 그것이다.
일체의 말이 이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지라,
만약에 본 것을 말하지 않으면 곧 들은 것을 말하기 마련이니, 깨닫고 아는 것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여덟째의 이른바 타자의 다른 식이란,
의지하는 처소가 각각 다르고 여섯 가지 갈래[六趣]가 같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의지하는 처소가 몸이니만큼 여섯 가지 갈래의 몸이 곧 자타의 다른 식인 것이다.
아홉째의 이른바 좋고 나쁜 갈래 생사의 식이란,
일체 생사가 이 좋고 나쁜 두 갈래를 떠나지 않는지라,
좋은 갈래란, 사람이거나 하늘이고, 나쁜 갈래란 그 나머지 네 갈래이니,
이 좋고 나쁜 갈래가 생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곧 나기도 하고, 곧 사라지기도 하여 그치거나 머무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3) 분별식 두 가지
또 몸을 지니는 것의 식이란, ‘아견(我見)’에 덮인 것이니,
이 식은 ‘아견’의 탐애(貪愛)에 덮이기 때문에 여섯 갈래의 태어남을 받아서 이 식이 생사의 몸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이 식이 있으면 곧 몸을 지니는 식이고, 이 식이 만약 다 되면 생사의 몸도 다 되는 것이다.
‘아견’은 일체 살[肉]의 미혹을 내고, 탐애는 일체 가죽[皮]의 미혹을 내기 때문에 생사의 몸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탐애와 ‘아견’을 여읜다면 곧 가죽과 살의 번뇌가 없을 것이고,
가죽과 살의 번뇌가 없다면, 곧 세 세계의 몸이 없으리니, 이 때문에 몸의 식이 생사를 받는 것이다.
다음 몸을 받는 것의 식이란, 뜻의 경계[意界]를 받는 식이라 하나니,
곧 세 가지 의식이 그것이다.
[二受者識意界名受者, 識卽三種意識]
첫째는 이른바 아리야식(阿梨耶識)이니,
이 식은 세품(細品)의 의식으로서 항상 과보(果報)를 받되 좋은 과보와 나쁜 과보에 통하지 않은 채 다만 무부무기[無覆無記: 무기법(無記法) 중에서 성도(聖道)를 방해하고 심성(心性)을 가리어 부정케 하는 일이 없는 것]일 뿐이다.
둘째는 타나식(陀那識)이니,
이 식은 중품(中品)의 의식으로서 다만 범부 몸의 과보를 받을 뿐이다.
셋째는 항상 밝히는바 의식이니,
이 식은 추품(麤品)의 의식으로서 좋고 나쁨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세 가지 성품의 과보를 통해 받는 것이다. 다섯 가지 식[五識]이 역시 그러하지만, [그러하다.]
이 세 가지 품의 의식은 공통으로 과보를 수용(受用)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이제 흥폐(興廢)를 근거로 하여 말하기 때문에 아리야식을 일컬어 받는 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아리야식은 이 범부가 계교하는바 ‘나’의 처소라, 타나(陀那)의 집착으로 말미암아 아리야식이 ‘나’의 경계를 짓나니,
집착하는 그것이 바로 타나식이기 때문이고,
일곱 가지식이 곧 ‘아견’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4) 의근
그리고 분별식(分別識)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몸을 지니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받는 식이다.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의근(意根)이라 하나니,
첫째, 본래부터 의근을 더럽힌 것이 곧 타나식이고,
둘째, 차례로 반연한 의근의 체가 곧 본식(本識)을 반연하여 ‘나’의 경계를 지음이니, 스스로가 저 반연의 모양과 그림자를 내는 것이며,
현식(顯識)이 아홉 가지가 있는 것은, 위와 같은 형식이 다만 아리야식일 뿐이다.
만약에 분별식이라면, 이는 타나식이고 또 의식일 것이니,
타나식은 ‘나’를 분별하고,
의식은 만법(萬法)을 분별하는 것이어서,
의식은 세 가지 분별이 있고,
다섯 가지 식은 다만 제 성품[自性]의 분별이 있을 뿐이다.
[훈습의 네 가지 방법]
다음은 훈습(熏習)에 네 가지 방법이 있으니,
첫째 알음[忍]이고,
둘째 이름이고,
셋째 모양이고,
넷째 세간의 제1 법이다.
[첫째의 알음의 두 가지]
첫째의 알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널리 관해 알음이고,
다른 하나는 줄여서 관함이다.
일체 중생은 다 진실한 성품에 미(迷)한지라, 이제 닦아 익힘에 있어서 먼저 널리 관하는 것을 짓고, 그 다음에 줄여서 관하는 것을 지어서 진실한 성품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널리 관함]
이른바 널리 관함이란, 곧 네 가지 진리[四諦]를 관하는 것이니, 괴로움과 쌓임은 곧 범부를 세속의 진리이고 사라짐과 도는 곧 성인의 진여의 진리이다.
이것이 각각 아홉 가지가 있으니,
괴로움을 관하는 아홉 가지는, 세 세계[三界]에 각각 세 세상[三世]이 있어서 아홉 가지를 이룩하는 것이다.
또는 욕심 세계[欲界]가 한 존재요, 형상 세계[色界]가 네 존재요, 무형 세계[無色界]가 네 존재이기 때문에 아홉 가지라 하는 것이다.
쌓임의 진리 아홉 가지는 곧 아홉 가지 번뇌[九結]가 그것이며, 이 아홉 가지 번뇌 없애는 것을 아홉 가지 사라짐의 진리라 하는 것이다.
도의 진리 아홉 가지는 곧 아홉 차례의 삼마디이니, 이른바 아홉 차례의 선정[九次第定]이 그것이다.
[줄여서 관하는 것]
그리고 줄여서 관하는 것이란,
먼저 괴로움의 진리를 관하는 것이 여덟 가지이니, 네 가지 원소[四大]와 네 가지 이름[四名]을 관함이 그것이다.
네 가지 원소는 곧 물질의 쌓임[色陰]이고, 네 가지 이름은 곧 네 가지 쌓임이니, 이것을 여덟 가지 괴로움이라고 한다.
쌓임에 여덟 가지가 있는 것은 곧 여덟 가지 삿됨[八邪]이니,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聖道]를 어기는 것이다.
사라짐의 진리 여덟 가지는 이 여덟 가지 삿됨을 없애는 것이니, 곧 여덟 가지 사라짐이라 하고,
도의 진리 여덟 가지는 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 닦는 것을 곧 도의 진리라 한다.
다시 줄여서 관하는 것이 일곱 가지 이니, 괴로움의 일곱 가지는 여섯 갈래[六趣]와 또는 중음(中陰)이 그것이다.
쌓임의 일곱 가지는 곧 일곱 가지 부림[七使]이니,
일곱 가지 부림이란, 탐욕ㆍ진심ㆍ우치와 교만ㆍ의심ㆍ견(見)과 욕심 세계의 욕심은 욕심의 부림이라 한다.
형상 세계ㆍ무형 세계는 존재[有]의 부림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것을 합하여 일곱 가지 부림이라고 하고,
이 일곱 가지 부림을 없애는 것을 일곱 가지 사라짐이라고 한다.
도의 진리 일곱 가지는 곧 일곱 가지 깨달음[七覺分]이 그것이다.
다음은 줄여서 관하는 것이 여섯 가지이니, 괴로움의 여섯 가지는 이른바 여섯 가지 안의 느낌[內入]이 그것이다.
쌓임의 여섯 가지는 이른바 여섯 가지 탐애[貪愛]이니, 곧 여섯 가지 대경[六塵]에서 생기는 여섯 가지 탐애가 그것이다.
사라짐의 여섯 가지는 이 탐애의 여섯 가지를 없애는 것이다.
도의 여섯 가지는 곧 여섯 가지 벗어나는 경계이니,
남을 죽이는 진심을 벗어나서 인자한 마음을 닦는 경계가 그 하나이고,
남을 괴롭히는 진심을 벗어나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는 경계가 그 둘이고,
남을 질투하는 진심을 벗어나서 기쁨을 닦는 경계가 그 셋이고,
탐욕을 벗어나서 버림[捨]을 닦는 경계가 그 넷이고,
머트러운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을 벗어나서 드나드는 숨[出入息]을 닦는 경계가 그 다섯이고,
무명(無明)의 미혹을 벗어나서 무아(無我)를 닦는 경계가 그 여섯이므로 이 여섯 가지 닦는 것을 벗어나는 경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줄여서 관하는 것이 다섯 가지이니,
괴로움의 다섯 가지는 곧 다섯 가지 쌓임이 그것이고,
쌓임의 다섯 가지는 곧 다섯 가지 가림[五蓋]이 그것이고,
사라짐의 다섯 가지는 곧 이 다섯 가지를 없애는 것이고,
도의 다섯 가지는 곧 다섯 가지 뿌리[五根]이니,
다섯 가지 힘[五力] 따위가 그것이다.
다음은 줄여서 관하는 것이 네 가지이니,
괴로움의 네 가지는 곧 네 가지 생각 두는 대상[四念處]으로서 이른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이 그것이고,
쌓임의 네 가지는 곧 네 가지 잡음[四取]과 또는 네 가지 흐름[四流]이니,
네 가지 잡음이란,
그 잡음이 다만 탐욕뿐이어서 네 가지 탐욕 있는 그것이 바로 네 가지 잡음이라 욕심의 잡음(欲取)이 그 하나이고,
견의 잡음[見取]이 그 둘이고,
계금의 잡음[戒禁取]이 그 셋이고,
내 말의 잡음[我語取]이 그 넷이니,
내 말의 잡음이란, 이 안으로 잡는 것이어서 안의 다섯 가지 쌓임을 반연해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 여덟 가지 선정의 난법을 탐하는 것을 내 말의 잡음이라 하고, 또는 그 중에 무엇이건 잡은 것은 내 말의 잡음이라 한다.
만약에 욕심 세계의 대경[塵]을 탐한다면 이를 바깥 법이라 하고 이 바깥 법을 욕심의 잡음이라 하나니, 욕심의 잡음은 이 ‘단견(斷見)’의 중생이고, 내 말의 잡음은 이 상견(常見)의 중생이다.
이 두 법은 일을 반연하여 견의 잡음과 계금의 잡음을 일으키고, ‘상견’의 잡음은 이치를 반연하여 이 네 가지 잡음을 일으키나니, 이것이 느낌의 자량(資糧)이다.
느낌의 탐애가 세 가지 있는 것을 밝히건대,
첫째는 탐애를 멀리 여읨이니, 곧 일체 세 갈래[三途]의 중생들이고,
둘째는 탐애를 구해 얻음이니, 곧 사람ㆍ하늘과 또한 세 가지 ‘공’한 것이고,
셋째는 탐애에 편히 머묾이니, 곧 생각도 아니고 생각 아님도 아닌[非想非非想], 이른바 열반이 그것이다.
네 가지 잡음을 일컬어 네 가지 쌓임이라 하는 것처럼 이 네 가지 잡음을 없애는 것을 네 가지 사라짐의 진리라 한다.
그리고 도의 진리 네 가지는 이른바 네 가지 생각 두는 대상[四念處]으로서 곧 네 가지 반야(般若)가 그것이니, 몸을 관함은 괴로움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다.
느낌을 관함은 쌓임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고,
마음을 관함은 사라짐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고,
법을 관함은 도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다.
또 몸을 추중(麤重)한 것으로 관함은 세 세계[三界] 몸의 추중함을 괴로운 것으로 관함이다.
이를테면 욕심 세계 몸의 차갑거나 뜨거움을 괴로운 것으로 관하고,
형상 세계 몸의 네 가지 위의[四威儀]를 괴로운 것으로 관하고,
무형 세계 마음의 찰나찰나에 머물지 않음을 괴로운 것으로 관하는 이러한 것이 바로 반야이다.
또 느낌을 관하여 쌓임의 진리를 통하는 것이란, 중생들의 일체 탐애가 느낌을 반연하여 일어나는지라 만약에 느낌이 없다면 탐애가 생겨나지 않으리니, 이 때문에 느낌을 관하여 쌓임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다.
마음을 관하여 사라짐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란, 일체 중생들이 마음 가운데에 ‘아견’을 내세우는지라,
이 때문에 중생들이 ‘아견’에 집착하여 사라짐 있음을 믿지 아니하나니, 이는 다만 타나식(陀那識)으로 말미암아 아리야식(阿梨耶識)이 하나이고, 항상하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나’의 체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거늘 마음이 ‘나’가 아님을 관하기 때문에 사라짐이 있는 것을 믿으리라.
‘아견’을 버리고서 사람과 법의 두 가지가 다 ‘나’없는 것임을 관하기 때문에 마음을 관하여 사라짐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다.
법을 관하여 도의 진리를 통달하는 것이란, 그 법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품이고, 둘째는 부정한 품이다.
부정한 품을 관하는 것을 괴로움과 쌓임이라 하는 반면,
청정한 법을 사라짐과 도라 하고,
또 부정한 품은 일체의 미혹이고,
청정한 품은 온갖 미혹을 대치하는 길이니,
이 때문에 반듯이 도의 진리를 통달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은 줄여서 관하는 것이 세 가지이니,
괴로움의 세 가지는 곧 세 세계를 괴로운 것으로 관하되 욕심 세계를 괴로움의 괴로움[苦苦]으로 관한다.
형상 세계를 무너지는 괴로움[壞苦]으로 관하니, 나고 머묾이 쉬지 않고 즐거움이 무너질 때가 곧 괴롭기 때문에 무너지는 괴로움으로 관하는 것이다.
무형 세계를 지어가는 괴로움[行苦]으로 관 하나니, 나고 머물고 무너지는 이 세 때가 다 괴로움이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들은 두 갈래가 있을 뿐이어서 나쁜 갈래를 괴로움이라 하고, 좋은 갈래를 즐거움이라 하고, 이 두 가지 치우침을 버리는 것을 이르되, 열반이라 하나니, 이 마음이 지어감이 있고 움직임이 있어서 무상(無常)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그리고 쌓임이 세 가지 있는 것은 곧 탐욕과 진심과 우치가 그것이고,
또 세 가지는 몸의 견[身見]과 계율의 잡음[戒取]과 의혹이 그것이다.
몸의 견이란, 중생들이 몸의 견에 집착하여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이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생사에 머물러서 세간을 뛰어난 도를 닦지 않는 것이다.
계율의 잡음이란, 바른 도 닦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고,
의혹이란, 이 의혹 때문에 결코 사라짐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번뇌를 없애는 것이 곧 세 가지 사라짐의 진리이니, 세 가지란 이른바 계율ㆍ선정ㆍ지혜가 그것이다.
다음은 줄여서 괴로움을 관함에 두 가지이니, 이른 바 몸과 마음이거나 또는 이름과 물질이 그것이고,
쌓임의 두 가지는 열두 가지 인연 가운데, 무명(無明)과 탐애(貪愛)가 그것이고,
사라짐의 두 가지는 이 무명과 탐애의 두 가지를 없애는 것이고,
도의 진리 두 가지는 곧 선정과 지혜가 그것이다.
다음은 줄여서 관하는 것이 한 가지이니,
괴로움의 한 가지는 이른바 무상(無常)한 것을 괴로움이라 하고,
쌓임의 한 가지는 바르지 못한 생각이 그것이고,
사라짐의 한 가지는 이 바르지 못한 생각을 없애는 것이고,
도의 한 가지는 이른바 몸에 생각 두는 것이다.
곧 네 가지 생각 두는 대상[四念處]을 통틀어 관하여 몸에 생각 두는 것이라 한다.
또 한편으론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을 도의 진리라 하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쌓임의 진리라 하나니,
실다운 지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이 때문에 널리 관하고 줄여서 관하는 두 가지 관을 말함이다.
괴로움을 관함에 있어서 일체 법이 아홉 가지로부터 또한 한가지까지 있고, 나머지 세 가지 진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언어와 분별의 훈습]
언어와 분별의 훈습(熏習)이 네 가지 방편의 곳이 있으니,
언어의 훈습은 알음[忍]과 이름으로부터 또한 제성품 법의 곳이다. 이른바 곳이란, 곧 처소를 말하는 것이고, 또는 경계를 처소라 하는 것이다.
분별의 훈습은 모양으로부터 또한 제1의 일체 닦아 얻는 법이고, 일체 닦아 얻는 법의 곳은 하품(下品)으로부터 상품(上品)에 이르기까지 모양과 제1의 일체를 곳이라 한다.
만약에 이름을 의지하여 생각해 고르는 사람이라면, 이는 언어의 훈습인 것이고,
이름과 글귀를 떠나서 바로 이치를 생각해 고르는 사람이라면, 이는 분별의 훈습이다.
이 현식(顯識)이 뒤의 두 가지 식을 나타내나니,
두 가지 식이란,
첫째 네 가지 언어의 식이고,
둘째 자타(自他) 차별의 식이니,
이 두 가지 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나머지 일곱 가지 식과 분별의 식인 이 여덟 가지 식은 언어의 훈습을 반연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 두 가지 식은 첫째 몸의 식과 둘째 몸을 받는 식이고, 또는 자타의 다른 식이니, 몸의 견[身見]의 훈습을 반연하여 나게 되는 것이며,
또 좋고 나쁜 생사의 식은 그 훈습이 있음을 반연하여 일어나게 되는 것이니, 이러한 여러 가지 식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온갖 세계에는 다만 식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일체 세계엔 식이 있을 뿐이다]
≪논≫ 일체 세계엔 다만 식이 있을 뿐이다.
【문】 일체 법이 다만 세 세계뿐이라면 어째서 두 가지 세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까?
【답】 두 가지 뜻이 있는지라,
하나는 분단(分段)을 지어 말하는 세 세계이니, 변해 바꿔지는 이 세계 바깥의 네 가지 생사가 일체이다.
다른 하나는 널리 말하는 일체이니,
어떤 것을 시방(十方)이라 하는가?
시방은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일체 세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다만 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은 위의 일곱 가지 생사가 다만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식을 떠나선 따로 체(體)가 없으니, 이 때문에 세 세계엔 다만 식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세계란 것은 제 성품의 뜻이다.
제 성품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서로 뒤섞이지 않는 뜻이니,
이를테면 욕심 세계의 성품이 형상 세계와 다르고 형상 세계는 무형 세계가 아닌 것이다.
둘째는 성품이 변하지도 않고 바뀌지도 않는 것을 그 뜻으로 삼음이니,
이를테면 욕심 세계는 욕심세계가 되고, 형상 세계는 형상 세계가 되고, 무형 세계는 무형 세계가 되는지라, 좋고 나쁨도 그러한 것이어서 세 성품이 다 변하지 않는 것으로써 그 뜻을 삼는다.
다만 식이 있을 뿐이란 것은 이 식을 떠나선 딴 대경이 없기 때문이다.
식으로 말미암아 유사(有似)한 대경이 있음을 보는 것이고, 식을 떠나선 그 대경이 체(體)가 없는 것이다.
[식은 세 세계이다]
≪논≫ 어떤 것을 식이라 하는가? 이른바 세 세계가 그것이다.
≪해석≫ 앞서는 식을 떠나서 세 세계가 없는 것을 밝혔고, 여기엔 세 세계를 떠나서 식이 없는 것을 밝혔으며, 또 앞서는 두 가지 식의 작용을 밝히었다.
[식의 두 가지, 현식과 분별식]
≪논≫ 식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은 첫째 현식(顯識)이고, 둘째 분별식(分別識)이 그것이다.
≪해석≫ 맨 처음의 하나가 본식(本識)이니, 본식은 여섯 대경[六塵]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다음의 하나가 여섯 식[六識]이니, 여섯 식은 이것이 저것과 다름을 분별하는 것이다.
또 앞의 하나는 반연할 것을 밝히고, 뒤의 하나는 반연하는 것을 밝힘이다.
그리고 현식(顯識)에 나아가선 두 가지 회전(廻轉)하는 것이 있으니,
첫째의 회전은 여섯 가지 대경을 일으키고,
둘째의 회전은 다서 가지 감관[五根]을 일으키며,
그 다음 분별식의 회전은 ‘나’와 같음을 일으키나니, 이러한 의식의 집착하는 두 가지 식이 ‘나’를 계교하는 것이다.
이는 곧 타나[陀那]와 의식이 ‘아견(我見)’을 함께 일으킴이니,
타나는 본식에 집착하여 ‘나’의 체상(體相)을 일으키고,
의식의 분별은 ‘나’를 계교하여 갖가지 차별의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일체 법은 잇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지라, 여섯 가지 대경으로 말미암아 여섯 가지 식이 있으니, 결코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여섯 가지 식을 떠나선 여섯 가지 대경이 없으니, 결정코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도 일체 법은 결코 있다고 말할 수 없고 결코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지라,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나’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고,
사람과 법의 두 가지 ‘공’함이 진실하기 때문에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이치로 보아서 일체 법은 반드시 있기도 하고 반드시 없기도 한지라,
사람과 법이 반드시 없는 것인가 하면, 이 사람과 법의 두 가지 ‘공’함을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는 죄다 세속을 나타낼 경우엔 있는 것이고, 진여를 나타낼 경우엔 없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바로 식의 작용을 밝힘이다.
[훈습의 힘]
≪논≫ 이 분별식이 만약 일어나면, 훈습(薰習)의 힘을 아리야식 가운데에 내세우는 것이다.
≪해석≫ 훈습의 힘이란, 마치 향을 사르면 그 향이 옷에 스며들어서 향 덩어리는 없어지겠지만, 향기는 오히려 옷 속에 있으므로, 이를 옷을 훈습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음이다.
이 향을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향 덩어리가 없어졌기 때문이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은 향기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훈습이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섯 가지 식이 선과 악을 일으키는 것도 그 훈습의 힘이 본식(本識) 가운데 남아 있어서 능히 미래의 과보를 얻으므로, 이를 종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승(小乘)의 뜻인 정량부(正量部)에서는 잃어버림이 없다고 하나니,
마치 문서의 약속[券約]과 같기도 한지라,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설하시었다.
모든 업은 잃어버리지 않아
무수한 겁에 그대로 있다가
어쩌다가 모일 때에 이르러선
중생들의 과보를 주는 것이네
마하승기부(摩訶僧祈部)에서는 이것을 섭식(攝識)이라고 하였으니, 곧 상응(相應)하지 않는 행(行)이다.
마치 경(經)을 외우는데, 맨 처음 한번에는 외워지지 않지만, 두 번째 가선 앞의 첫 번째 것을 외워 섭수하고 이와 같이 열 번째에 이르러 외워 통달할 적엔 앞의 아홉 번째 것까지를 곧 통달해 섭수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맨 처음의 식이 능히 변해 달라지는 것도 첫째에 있고, 이와 같이 또한 아홉째의 변해 달라지는 것이 열째 가운데 있는지라,
열째가 능히 앞의 아홉을 섭수하는 것이 곧 이 열째의 변해 달라지는 작용이므로, 이것을 섭식이라고 하나니, 앞의 아홉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앞의 아홉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같이 따라 얻는 것[同隨得]이라고 하였으니,
같음이란 그 수량과 처소와 시기 등을 더불어 서로가 어울려서 자라나는 것이다.
따름이란, 세 가지 성품과 더불어 서로가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얻음이란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며,
같음이란,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뜻이고,
따름이란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뜻이다.
마치 마두루(摩斗樓)와 같음이니, 여기에 느릅나무 꽃[楡花]을 말하건대 낙가[洛柯] 즙[汁]의 붉은 빛 집을 취하여, 마두루 꽃 수염에 찍어 넣으면, 그 꽃 수염과 붉은 빛이 함께 함으로써 뒷날 열매가 맺어 성숙될 적엔 곧 붉은 빛이 나오기 마련이니, 이것을 이르되 같은 때에 닦아 얻는 것이라고 한다.
붉은 빛이 열매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같다는 것이고, 앞서와 같이 붉은 빛이 나오기 때문에 같이 닦아 얻음이라는 것이다. 붉은 빛이 열매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다는 것이고, 앞서부터 뒤에 이르기까지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 따름이 최후에 나타나기 때문에 얻음이라는 것이다.
[비리야부의 유분식(有分識)]
만약 비리야부(毘梨耶部)의 경우라면, 이것을 유분식(有分識)이라 하나니,
유(有)란 세 가지 유[三有]인 곧 세 가지 세계[三界]가 그것이다.
또 일곱 가지 유가 있으니,
첫째 중간의 유[中有]이고,
둘째 태어나는 유[生有]이고,
셋째 업의 유[業有]이고,
넷째 죽음의 유[死有]이니,
앞의 세 가지 유를 합하여 일곱 가지 유라고 한다.
욕심 세계와 형상 세계의 두 세계인 네 가지 유를 갖추었고,
무형 세계엔 중간 유가 없나니,
중간의 유는 앞으로 태어날 곳을 바로 말하는 것이고,
그 곳이란, 인연이 있는 것을 곳이라 함이니, 열두 가지 인연이 다 갈래가 있는 것과 같음이다. 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생겼기 때문에 이 일이 생기는 것이니, 있다는 그것이 바로 원인이다.
원인이 두 가지가 있으니,
앞의 원인이 그 하나이고,
같은 때의 원인이 그 둘이다.
마치 귤(橘) 종자가 싹이 나는 것과 같음은 이 앞 때의 원인이고, 싹이 나면, 곧 아울러 귤이 있는 것은 같은 때의 원인이다.
지어감[行]이 의식을 반연하고 의식이 이름과 물질[名色]을 반연한다.
이름과 물질이 여러 가지 느낌[六八]을 반연하고 여러 가지 느낌이 닿임[觸]과 느낌[愛]을 반연하는 이러한 것이 곧 같은 때이니, 그러므로 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 이것은 외도들의 이른바 태어나는 유[生有]의 뜻을 파괴하기 위해서다.
외도들은 이르기를,
‘일체 중생이 자재천(自在天)으로부터 ‘나’가 있기 때문에 생사가 있는 것’이라 한다.
이 말 내용이 뜻과 같이 이제 앞 원인의 태어남을 말미암아 이 때문에 태어나게 되는 것을 파괴한다면, 그 때 자재천은 있는 것이 없어 생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이 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을 얻지 못하고, 이 있는 것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뜻을 내세워,
‘이 일이 있음은 곧 나는 것이 있음’이라고 하셨다.
그대들 자재천의 있는 것은 이 나는 것이 아니니 만큼, 나는 것이 우리의 뜻과 같지 않고 세간의 성품과 가는 티끌 따위로부터 난다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또 외도들은 내세우기를,
‘원인이 없어도 결과는 있으니 결과는 자연히 나는 것’이라고 하니,
이 때문에 외도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 물체는 이 원인의 있음이 있기 때문에 결과의 일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뜻을 밝히는 까닭은 인연이 갖추었기 때문에 나게 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니, 이 물체가 있기 때문에 이 물체가 있는 것은 연(緣)을 밝힘이다.
이 물체가 나기 때문에 물체가 나는 것은 인(因)의 뜻을 밝힘이다.
유분(有分)이란 것은 그 나는 곳이 곧 나는 인(因)이고, 나는 연(緣)이니, 이것이 유분식(有分識)의 체(體)이다. 이 과보는 법의 결정이고, 이 제 성품[自性]은 선도 악도 없는 것이다.
네 가지 유(有)는 식의 갈래[識支]로부터 여섯 살에 이르기까지가 이 태어나는 유(有)이며,
일곱 살로부터 그 이상 생숙(生熟)을 분별하고 탐욕을 일으켜 목숨을 버리지 않을 때까지가 이 업의 유[業有]이다.
죽음의 유[死有]는 다만 한 찰나이며, 중간의 유[中有]는 곧 중음(中陰)이 그것이다.
그리고 업의 유 가운데, 나아가 여섯 가지 식이 세 가지 업을 일으키니,
선함과 선하지 않음과 변동하지 않는 등 세 가지 업의 함이 있는 음이라, 함이 있는 유분식이 여섯 가지 식을 거둬 가짐으로서 여섯 가지 식이 저절로 없어지나니, 유분식의 거둬 가지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 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분식을 내세우는 까닭]
【문】 무엇 때문에 유분식을 내세우는 것입니까?
【답】 한 기간의 생(生) 가운데 항상 하나의 경계를 반연하는지라, 사람이나 하늘에 태어날 경우엔 이 식이 누관(樓觀) 등 일의 과보를 보나니, 만약에 여섯 가지 의식 작용의 추부(追覆)한 장애를 일으킨다면, 이 식의 작용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나쁜 갈래에 태어날 경우엔 이 식이 다만 볼 수레[火車] 따위를 볼 뿐이니, 만약에 그 과보가 여섯 가지 의식 작용의 강함을 일으킨다면 이 식의 작용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욕심 세계의 여섯 가지 의식은 욕심의 경계를 반연하는 것이어서 법무로선 깨달을 수 없고, 또한 무형 세계도 그러한지라,
만약 무형 세계의 모든 식이 사라지고 이 유분식이 작용한다면, 그 나타나는 것이 아리야식 또는 의식과 같은 것이다.
이른바 종자란 것은 상속하고 변천하여 능히 미래의 과보를 감응하는지라, 이것을 이름하여 종자가 상속하여 변천하는 것이 없음이라고 한다.
또한 종자가 아니고 다만 변천만 하면 상속하는 것이 없고,
또한 종자가 아니니 상속과 변천이 서로가 떠나지 않기 때문에 종자를 이룩하는 것이다.
마치 소라[螺]와 흰 빛이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과 같음이다.
만약에 흰 빛이 바로 소라라면, 소라는 세 가지 대경[三塵]이 없겠고,
만약에 흰 빛이 소라와 다르다면, 흰 빛을 보고서 소라를 얻지 못한지라,
이 때문에 결정코 다르다고 말할 수 없으니,
다르지 않기 때문에 흰 소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상속과 변천도 그러하기 때문에 종자를 이룩하나니, 이 훈습(熏習)의 힘으로 말미암아 본식(本識)이 미래에 나게 되는 것이다.
≪해석≫ 훈습의 힘을 반연하여 종자가 만약 이룩되면 본식이 나게 되고,
미래의 현식(顯識)을 반연하여 미래의 분별하는 여섯 가지 식이 나게 되는지라,
이 때문에 생사는 앞뒤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번뇌와 업을 떠난다면, 날 수가 없고 만약에 생사가 앞부분의 중생 처소가 있어서 번뇌와 업을 일으킨 것이 앞부분의 처소에 감응되겠거늘, 이미 앞부분 중생의 업을 일으킨 것이 없으니 만큼 앞부분의 생사도 없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알지니 생사는 시초가 없는 것이다.
[생사는 처음이 없다]
네 가지 뜻으로써 처음이 없음을 밝히건대,
첫째는 근본이 아니라, 만약에 중생이 처음엔 없고 뒤에 있다면, 이 없음을 근본 있는 것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이 두 가지 과실이 있다.
만약 처음이 없었다면 뒤에 나는 것이 없겠고,
만약 나는 것이 있다면 없는 것이 아니리니, 이것이 하나의 과실이요,
만약 허공에 꽃이 나는 일이 있다면, 없는 데로부터 있는 것을 낼 수 있으리니, 이것이 또 하나의 평등한 과실이다.
둘째는 욕심 여읜 중생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사가 처음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생사가 처음에는 탐욕 따위가 없던 것이 뒤에 가서 바야흐로 탐욕 따위가 있다면, 욕심을 여읜 아라한(阿羅漢)들도 그 욕심이 없다가도 욕심을 내어야 하겠는데, 이 아라한으로선 다시 욕심을 내지 않으니, 이 때문에 알라. 생사를 처음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범행(梵行)을 수행하여도 소용이 없을 터이니, 이 때문에 생사가 처음이 없는 것이다. 일체 성인들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행[八聖行]을 닦는 것은 멸(滅)을 위해 생(生)하지 않게 하는 것이어서 범행을 닦아 욕심을 여읜 사람으로선 다시 생멸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알라. 생사는 처음이 없는 것이다.
넷째는 생사가 두 가지 있으니, 나쁜 갈래가 그 하나이고, 좋은 갈래가 그 둘이다.
이 좋고 나쁜 갈래는 좋고 나쁜 두 가지 인(因)으로 말미암아 인이 없을 수 없나니, 이 생사의 시초를 좋은 갈래라 하겠는가, 나쁜 갈래가 하겠는가.
만약에 좋은 갈래라면 좋은 인이 있지 않을 것이고, 나쁜 갈래라면 나쁜 인이 있지 않을 것이고, 좋고 나쁜 두 가지 갈래를 떠나선 다시 제3의 갈래가 없으리니, 이 때문에 알라. 생사는 처음이 없는 것이다.
≪논란≫ 처음이란, 자연 인연을 쓰지 않고 뒤에 가선 반드시 인연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만약 그럴진댄 이 이치가 옳지 않으니, 두 가지 과실이 있다.
첫째는 이치가 곧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인과(因果)가 서로 같지 않음이라,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생사가 처음엔 인(因)을 말미암지 않지만 뒤엔 인을 말미암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평등하지 않음이니, 처음과 뒤가 다 생사이거늘, 어째서 하나는 인을 말미암고 하나는 인을 말미암지 않는가.
둘째는 서로가 같지 않는 것이란, 과(果)도 인이 있고 인도 인이 있어서 인과가 다 인이 있기 때문에 서로 같을 수 있으며, 서로가 같음으로써 같은 종류를 낼 수 있거늘,
그대가 만약 앞에는 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 때문에 뒤에도 인이 없어야 하리니,
앞에는 인이 없는데 뒤에는 인이 있는 것이라면 같은 종류를 낼 수 없을지라.
만약 낼 수가 있다면 콩이 보리를 낼 수도 있고 보리가 콩을 낼 수도 있어야 하겠는데 그렇지를 않으니, 이 때문에 알라.
그대들의 주장하는바,
‘앞의 뒤의 과를 위해 인을 짓는다’는 그 앞의 인이 인을 이룩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리야식, 훈습, 인과 과, 생사의 윤전]
부처님이 설하신 게송의 첫 글귀 현식(顯識)은 곧 아리야식(阿梨耶識)이다.
아리야식은 곧 과보의 식이고, 분별식(分別識)은 곧 번뇌의 식이니,
이는 과보의 식으로부터 번뇌의 식을 일으킴이다.
번뇌의 식은 곧 타나식(陀那識)인 것이다.
다음의 글귀는 번뇌로부터 식을 일으키고, 식이 훈습(熏習)을 일으킴을 밝힘이니,
훈습은 곧 업의 공능(功能)이 본식(本識)을 전환 변천하여 종자의 식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글귀는 업으로부터 과보를 일으키는 것이며,
그 다음의 글귀는 생사의 윤전(輪轉)을 통틀어 맺음이니, 윤전이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인(因)이 전환하여 과(果)를 일으키고, 혹은 과가 전환하여 인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른바 훈습이 두 가지가 있는 것은 이 아래 두 가지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첫째는 생사의 방편 나타내는 것을 이르되 삿됨이라 하고, 또는 위역(違逆)이라 하며,
둘째는 열반의 방편 나타내는 것을 이르되, 바르다 하고, 또는 수순(隨順)이라 한다.
[집착하는 분별의 세 성품]
그리고 집착하는 분별의 성품이란 일체 법이 세 종류의 성품이 있으니,
분별하는 성품이 그 하나이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 그 둘이고,
진실한 성품이 그 셋이다.
분별하는 성품이란, 이름과 말로서 모든 법을 나타내는 것이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란, 일체 법의 인과와 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진실한 성품이란 일체 법의 그대로인 성품이며,
또 분별이란, 상(相)없는 것으로써 그 성품이 되고, 남을 의지함이란 생멸 없는 것이 그 성품이다.
이른바 성품이란, 자체가 다섯 가지 뜻이 있는지라,
첫째는 제 성품 종류의 뜻이니,
일체 병(甁)이나 옷[衣] 따위도 네 가지 원소[四大]를 떠나지 않은 종류의 뜻이므로, 이 네 가지 원소의 성품과 같은 그것이 바로 제 성품의 뜻이다.
둘째는 인(因) 성품의 뜻이니,
일체 네 가지 생각 두는 대상[四念處]이 다 성스러운 법의 반연하는바 도리이므로, 이 도리를 반연하여 능히 성스러운 법을 내는 그것이 또한 인의 뜻이다.
셋째는 나는 뜻이니,
만약 물체가 나지 않는다면, 그 성품을 볼 수 없겠고, 나는 이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성품도 따라 나는 것이라, 다섯 가지 법신[五分法身]이 바로 나는 성품의 뜻이다.
여래의 바른 말씀을 중생들이 믿어 즐겨하여 세 가지 믿음을 내나니,
진실한 도리가 있는 것을 믿음이 그 하나이고,
다섯 가지 법신의 공덕 얻는 것을 믿음이 그 둘이고,
자기를 이롭게 하여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을 믿음이 그 셋이다.
다섯 가지 법신을 갖춰 닦아서 다섯 가지 법신이 난다면, 이는 부처님 지위에 이르는[至得]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다섯 가지 법신의 나는 것이 이것으로써 그 성품의 뜻을 삼음이다.
넷째는 무너지지 않는 뜻이니,
이 성품은 범부에 있어서 더럽지 않고 성인에 있어서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비밀의 뜻이고, 또는 감추는 뜻이니,
친근하면 그 행이 깨끗하고 어기면 멀리 떠나는 지라, 이 법을 얻기가 어려워 깊숙이 숨었기 때문에 비밀이라 하고, 또는 감춤이라 하는 것이다.
[나는 것의 네 종류]
다음은 나는 것이 네 종류가 있으니,
첫째 닿아서 나는 것이니, 남녀가 교접하여 자식을 낳는 그러한 것이다.
둘째 냄새로서 나는 것이니, 소와 양 같은 종류의 암컷ㆍ수컷이 욕심을 내어 수컷이 암컷의 음부[根]에 코로써 냄새를 맡으면, 곧 새끼를 갖는 그러한 것이다.
셋째 알로서 나는 것이니, 닭과 참새 같은 종류의 암컷ㆍ수컷이 욕심을 일으켜 몸을 흙이나 모래 속에 문질러서 알을 가져 새끼를 낳는 그러한 것이다.
넷째 소리로써 나는 것이니, 학(鶴)과 공작(孔雀)같은 종류가 욕심을 내면, 암컷이 수컷의 우는 소리를 듣고서 역시 알을 가져 새끼를 낳는 그러한 것으로서, 일체 낳는 알은 먹지 않고 다 새끼를 두는 것이다.
분별하는 성품이란, ‘공’함이 없는 것이니, 얻을 법 없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란, ‘공’함과는 같지 않는 것이니, 이와 같이 집착할 것을 깨뜨리고,
진실한 성품이란, 제 성품의 ‘공’한 것이니, 사람과 법의 두 가지 ‘나[我]’없는 그것이 곧 제 성품의 ‘공’한 것이다.
다시 분별하는 성품이란, 마치 허공의 꽃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고,
남을 의지하는 성품이란 허공의 꽃과는 다른 것이어서, 마치 눈흘림[幻化]이 ‘공’하거나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님과 같음이다.
남을 의지하는 성품을 관하되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 것으로 관하기 때문에 능히 도를 얻어 성인을 이룩하나니, ‘공’하다거나 없다는 것은 단견[斷]의 관이므로 ‘공’하고 없음은 도를 얻어 성인을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일체 번뇌의 분별에 집착하는 것이 분별하는 성품이고,
일체 법의 욕락(欲樂)으로 관습(觀習)하는 것이 진실한 성품이며,
집착하고 관습하는 이 두 가지가 남을 의지하는 성품에 속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을 일컬어 훈습(熏習)이라 하나니,
번뇌 종자의 훈습이고, 둘째도 종자의 훈습이다.
[一煩惱種子熏習, 二道種子熏習也]
둘째의 훈습이 본식(本識)을 증장(增長)하는 것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본식에 그 대로의 진리[如如]를 반연하여 네 가지 비방[四謗]을 일으킴은 이 허망한 훈습의 종자이니, 번뇌가 다 같이 이 허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훈습이 능히 본식을 증장하는 것은, 마치 단맛[甛]의 물질이 담담한 맛을 증장하면 역시 단맛인 것처럼, 같은 성품이기 때문에 증장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능력을 구속함]
그리고 모든 능력을 구속함이란, 그 업이 네 가지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첫째 업을 짓는 것이 될지언정 업을 늘리게 되는 것은 아니니,
마치 영리한 지혜와는 사람이 나쁜 맛을 만나서 불선한 업을 짓는다면, 이는 업을 짓기는 하되 곧 다시 후회하기 때문에 늘리게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음이다.
둘째 업을 늘리게 하는 것이 될지언정 짓게 되는 것은 아니니,
마치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남을 따라 선한 업을 수행한다면, 더 늘리기는 하되 스스로가 일으켜서 마음에 일부러 짓지 않음이 아닌 것과 같음이다.
셋째 업을 짓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는 것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선한 업을 짓고서 다시 항상 자주자주 익힌다면, 이는 선한 업을 더욱 광대하게 하는 것과 같음이다.
넷째 짓지도 않고 늘리지도 않는 것이니,
곧 번뇌 없는 선한 업이 만약 생사의 과보를 더욱 증강한다면 이는 짓는 것이라 하겠지만, 번뇌 없는 선한 업이 능히 생사의 짓는 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늘리지 않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업이고 뒤의 한 가지는 업이 아니니,
앞의 세 가지 중에 나아가서 셋째의 구절을 취하는 것이 이른바 짓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업을 구족하여 능히 갈래[六趣]에 날 수 있다고 말함은, 곧 여섯 갈래 생사의 과보를 얻을 수 있어서 아리야식(阿梨耶識)의 인(因)을 내는 것이다.
이 생사의 원만한 몸이 훈습의 방편을 인하여 이 때문에 생사가 이룩되고, 이 때문에 인의 뜻인 생사의 원만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관습하는 진실한 성품]
둘째의 관습하는 진실한 성품이란, 세 가지 성품 없음을 관하는 것을 이르되,
관습하는 진실한 성품이라 하나니, 관이 네 가지 작용이 있다.
제거하는 관이 그 하나이고,
멸(滅)하는 관이 그 둘이고,
증(證)하는 관이 그 셋이고,
닦는 관이 넷이다.
그대로의 진리를 관하되 괴로움 진리[苦諦]의 성품으로 관하는 것처럼, 쌓임과 사라짐과 도의 세 가지 진리도 그러한 것이어서, 네 가지 진리를 관하는 그대로의 진리가 네 가지 작용을 갖춤이다.
이를테면, 그대로의 진리를 관하는 것이 곧 사라짐을 증하는 것이며, 그대로의 진리를 아는 것이 곧 도를 닦는 것이다.
능히 집착하는 분별의 성품을 제거하는 것이란, 그 분별이 없는 가운데에 있음을 짓는 것이고,
진실한 관이란 그 있고 없음이 제 성품을 더불어 서로가 어긋나는 것을 나타냄이니, 이 때문에 제거라고 이르는 것이며,
분별하는 성품인 이 제1의 훈습이 손실과 파괴를 입는 것이란 현재에 손실을 입고 미래에 파괴를 입음이니,
만약 쌓임의 진리를 손실한다면 괴로움도 역시 손실을 입는 것이다.
아리야식이 손실을 입는 것이란, 본래 일곱 겹[七重]의 괴로움 진리가 있는데, 세 세계[三界]가 곧 세 겹이니, 세 겹이 손실을 입고 나면 아리야식이 과보의 근본을 받는지라,
비록 미혹된 업에 끌리는 것이 없어 다시 세 세계에 들어가 나지는 않더라도, 유전 없는 경계 가운데 존재하여 네 가지 생사 속에 태어남을 받고, 이와 같이 하여 또는 생사의 지위가 없는 것이다.
아리야식이 손실을 입기 때문에 태어남을 받는 것도 손실을 입는다.
왜냐하면 현식(顯識)이 곧 분별식(分別識)인 만큼, 현식이 손실을 입기 때문에 분별식도 손실을 입는 것인 줄을 알지니,
이 분별이 바로 남과 나, 또는 여섯 대경[六塵] 따위의 식인 것이다.
또 이미 아무것도 없을진대 어찌 손실을 입을 뿐이겠는가.
이제 손실을 입는다고 말함은 청정한 품을 근거로 하여 말함이니,
이는 본식(本識)을 더불어 함께 다하는 것이며,
아리야식의 이하(以下)것은 다 멸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