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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입능가경 제4권
3. 무상품 ①[2]
[유견과 무견]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일체법의 있고 없는 모양을 설하시어 저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모양에서 떠나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대혜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세간 중생은 대개 두 가지 견해에 떨어지나니,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이다.
두 가지 견해에 떨어지기 때문에 세간을 벗어나지 않고도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견해인가?
실제로 인연이 있어서 모든 법이 생기며 진실로 있지 아니함이 아니며, 실제로 모든 법이 있어 인연에서 생기며, 없는 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대혜여, 이와 같이 설하는 이는 곧 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없다는 견해인가?
탐ㆍ진ㆍ치를 받아 알고 나서 허망하게 헤아려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대혜여, 또 그는 있는 모양[有相]을 분별하되 모든 법이 있다고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다시 모든 여래ㆍ성문ㆍ연각은 탐ㆍ진ㆍ치의 성품이 없다고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헤아려 있지 않다[非有]고 하나니, 이 가운데 누가 무너지는 자[壞者]가 되느냐?”
대혜가 아뢰었다.
“탐ㆍ진ㆍ치의 성품이 있다고 말하고, 뒤에 없는 것을 가짐을 무너지는 자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다. 너는 내가 묻는 것을 알고 있구나.
이 사람이 단지 탐ㆍ진ㆍ치가 없다고 해서 무너지는 자가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여래ㆍ성문ㆍ연각도 무너지게 한다.
왜냐하면 번뇌는 안과 밖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요,
체성(體性)이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아니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여, 탐ㆍ진ㆍ치의 성품은 안이나 밖이나 다 얻을 수 없나니,
체성이 없기 때문이요, 취할 수 없기 때문이요,
성문ㆍ연각ㆍ여래의 본성인 해탈은 능히 얽매거나 또 얽매는 원인[縛因]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여, 만약 능히 얽매는 것과 얽매는 인연이 있다면 곧 얽매이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무너지는 자라 이름하나니 이것은 모양이 없음이니라.
나는 이 뜻에 의하여 비밀의 뜻을 설하기를,
‘차라리 나라는 견해를 일으켜 수미산과 같을지라도 공하다는 견해[空見]를 일으켜 증상만을 품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이런 견해를 일으키면 무너지는 자[壞者]라고 이름할 것이다.
자견(自見)과 공견(共見)을 원하여 구하는[樂欲] 가운데 떨어져서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나타낸 것임을 깨닫지 못하며,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까닭에 외법(外法)이 찰나에도 무상(無常)하게 끊임없이 옮겨 차별하고 온(蘊)ㆍ계(界)ㆍ처(處)의 모양이 상속하여 유전하여 일어났다가 도로 없어지는 것을 보고 허망하게 분별하면 문자의 모양[文字相]을 떠나도 또한 무너지는 자가 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있다 없다는 두 가지 치우침이요
나아가 마음이 행하는 것[心所行]에 이르기까지
그 행하는 것 깨끗이 없애면
평등하여 마음 적멸하리라.
경계(境界)를 취하지도 아니하니
멸하여 없어지지도 아니하고
진여라는 미묘한 물건 있으니
모든 성인 행하는 바와 같으니라.
본래 없으나 생김[生]이 있고
생하고는 다시 없어져
인연이 있고 없는 것은
나의 법에 있지 않느니라.
외도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다른 중생도 아니나
능히 인연[緣]으로 유(有)가 이뤄진다면
어떻게 무(無)를 얻겠는가?
누가 인연으로 유를 이루고
다시 무라 말하는가?
나쁜 견해[惡見]로 생(生)을 말하고
망상으로 유ㆍ무를 헤아리느니라.
만약 생긴 것 없음과
또한 멸할 것도 없음 알고
세상을 모두 공적하게 보면
유ㆍ무를 둘 다 떠나리라.
[두 가지 근본 법[宗法]의 모양]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청하여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오직 원하옵건대 종취(宗趣:근본 취지)의 모양을 말씀하시어 저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이 뜻을 잘 통달하여 일체의 온갖 삿되고 허망한 해석을 따르지 아니하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해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대혜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일체 2승과 모든 보살은 두 가지 근본 법[宗法]의 모양이 있나니,
어떤 것이 둘이냐?
이른바 종취법의 모양[宗趣法相]과,
말하는 법의 모양[言說法相]이다.
종취법상이란 스스로 깨닫는 바의 수승한 모양이니, 문자 언어의 분별을 떠나 무루계에 들어가 자지행(自地行)을 이루고, 일체의 바르지 못한 생각과 깨달음을 뛰어넘으며, 마(魔)와 외도를 항복받고 지혜의 광명을 내는데,
이것을 종취법상이라 한다.
언설법상이란 9부(部)의 갖가지 교법(敎法)을 말하나니,
같음ㆍ다름ㆍ있음ㆍ없음 등의 모양을 떠나 선교방편으로 중생의 마음을 따라 이 법에 들어오나니,
이것을 언설법상이라 한다.
너와 모든 보살은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종취(宗趣)와 언설
자증(自證)과 교법(敎法)을
만약 능히 잘 알고 보면
다른 허망한 해석이 따르지 않으리라.
어리석은 이가 분별하는 것은
진실한 모양 아니거늘
그들은 어찌 해탈[度]을 구하지 않고
무법(無法)에서 얻으려 하는가?
모든 유위(有爲)를 관찰하면
생멸(生滅) 등이 상속하여
2견(見)을 자라게 하나
전도(顚倒)되면 아는 것 없느니라.
열반은 마음과 뜻 떠났음에
오직 이 한 법만 진실할 뿐
세상 보면 모두 허망하여
환(幻) 같고 꿈 같으며 파초 같으니라.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도 없고
또한 다시 사람도 없고
애욕에서 모든 온(蘊) 생기니
꿈에서 보는 것과 같으니라.
[분별]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를 위하여 허망한 분별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이 허망한 분별은 어떻게 생기며, 왜 생기며,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생기며, 누가 생기게 한 것이며, 무슨 까닭으로 허망 분별이라 이름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너는 세간의 하늘 사람을 가엽게 여겨 이 뜻을 물었으니 이익되는 바가 많고 안락한 바도 많다.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그것을 잘 생각하고 기억하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한다.”
대혜가 “예” 하고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일체 중생은 갖가지 경계에서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을 깨달아 통달하지 못하고,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헤아려 허망하게 집착하여 모든 분별을 일으켜 유무(有無)의 견해에 떨어져서 외도의 허망한 견해와 습기를 더욱 자라나게 한다.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이 상응하여 일어날 때 밖의 뜻[外義:外相]에서 갖가지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집착하여 나와 내 것을 헤아려 집착한다.
그러므로 허망분별이라 이름한다.”
대혜가 아뢰었다.
“만약 이와 같다면 밖의 갖가지 뜻과 성품은 유무(有無)를 떠난 것인데 모든 견해의 모습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제일의제(第一義諦:구경의 진리)도 또한 그와 같아 모든 근(根)ㆍ량(量:분별)ㆍ종(宗)ㆍ인(因)ㆍ비유를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으로 갖가지 뜻에서 분별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시고, 제일의 가운데서는 분별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십니까?
또 세존의 말씀하신 바가 이치에 어긋남이 없습니까?
한 곳에서는 분별을 일으킨다고 말씀하시고, 한 곳에서는 말씀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또 허망한 분별은 유(有)ㆍ무(無)의 견해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셨고, 비
유하면 요술은 갖가지가 진실이 아닌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분별도 또한 그러하여 유ㆍ무의 모양을 떠났거늘, 어떻게 두 견해에 떨어진다고 말씀하십니까?
이 말은 어찌 세속의 견해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분별은 생기는 것도 아니요 멸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유ㆍ무의 분별한 모양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고,
보는 밖의 법은 모두 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니,
오직 자기 마음이 나타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자기 마음으로 갖가지 모든 법을 분별하여 여러 가지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에 이렇게 설하여, 보는 것이 모두 자기 마음임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나와 내 것의 일체 견해와 집착을 끊게 하고,
지음[作]과 지은 것[所作] 모든 나쁜 인연을 떠나 오직 마음임을 깨닫게 하고,
그 의요(意樂:意欲)를 바꾸어 모든 지[諸地]를 잘 밝혀 부처님 경계에 들어가게 하고,
오법ㆍ자성(自性)ㆍ모든 분별의 견해를 버리게 한다.
이런 까닭에 나는 허망한 분별로 갖가지 자기 마음에 나타난 모든 경계에 집착이 생긴다고 말하나니, 실답게 깨달아 알면 곧 해탈을 얻을 것이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인(因)과 연(緣)으로
세간이 생겼나니
4구(句)와 상응하면
나의 법을 알지 못하리라.
세간은 유ㆍ무에서 생김이 아니요
또한 갖춤도 갖추지 못함도 아닌데
어떻게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인연에서 일어난다 분별하는가?
유(有)도 아니요 또 무(無)도 아니며
또다시 유ㆍ무도 아니라고
이같이 세간을 관찰하면
마음 바뀌어 무아(無我)를 깨달으리라.
일체법 생기지 않았으니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까닭이고
모든 인연이 지은 것과
지은 법은 생김이 아니니라.
과(果)는 스스로 과를 생(生)하지 못하나니
2과(果)의 잃음이 되는 까닭이고
2과가 없는 까닭에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모든 유위법(有爲法) 관찰하니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을 떠나 있고
결정코 오직 이 마음뿐이니라.
그래서 나는 심량(心量:분별)을 설하노라.
분별[量]의 자성처(自性處)에서
인연과 법 둘을 다 떠나
구경에 미묘하고 청정한 일이나
나는 심량(心量)이라 이름하느니라.
가명(假名)으로 나를 시설하나
실제는 얻을 수 없고
모든 온(蘊)도 가명이요
모두 진실한 일 아니니라.
네 가지 평등 있어
상(相)과 인(因)과 생김[所生]과
무아(無我)가 네 번째이니
수행자는 잘 관찰하라.
일체 모든 견해와
능ㆍ소의 분별 떠나면
얻을 수도 없고 또 생김도 없어
나는 이것을 심량(心量)이라 설하느니라.
유(有)도 아니요 또 무(無)도 아니니
유ㆍ무 둘 다 떠나고
이와 같이 마음도 역시 떠나면
나는 이것을 심량이라 말하느니라.
진여ㆍ공ㆍ실제
열반과 법계
갖가지 의성신(意成身),
나는 이것을 심량이라 말하느니라.
망상습기에 얽매임은
갖가지 마음에서 생겨나는데
중생의 소견은 밖의 법이라 하나
나는 이것을 심량이라 말하느니라.
밖에 보이는 것 있는 것 아니라
마음이 갖가지 나타내도다.
몸ㆍ재물과 머무는 곳,
나는 이것을 심량이라 말하느니라.
[말과 뜻]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설한 바와 같이 너와 모든 보살은 말에 의지하지 말고 그 뜻을 취하라’고 하셨는데,
세존이시여, 무슨 까닭에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을 취해야 하며, 무엇을 말이라 하고 뜻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설하리라.”
대혜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혜여, 말이란 말하자면 분별하는 습기가 원인이 되어 목구멍ㆍ혀ㆍ입술ㆍ잇몸ㆍ치아ㆍ광대뼈에 의하여 갖가지 음성이 나와 문자로 서로 상대하여 말하는 것을 말이라 한다.
무엇을 뜻이라 하는가?
보살마하살이 홀로 한 고요한 곳에 머물러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로 사유하고 관찰하며,
열반도의 스스로의 지혜 경계를 향하여 모든 습기를 바꾸어 모든 지(地)의 갖가지 행상(行相)을 행하는 것을 이름하여 뜻이라 한다.
또한 대혜여, 보살마하살은 말과 뜻을 잘 알아야 한다.
말과 뜻은 같지도 아니하고, 다르지도 아니함을 잘 알아야 한다.
뜻과 말은 또한 다시 이와 같아 만약 뜻이 말과 다르다면 곧 반드시 말로 인하여 뜻을 나타내지 못하겠지만,
말로 인하여 뜻을 아는 것이 마치 등불로 물체를 비추는 것과 같다.
대혜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등불을 가지고 물건을 비추면 물건이 그와 같이 이 같은 곳에 있는 것을 알 듯이,
보살마하살도 또한 이와 같아 말의 등불을 인하여 말을 떠나 스스로 깨달은 경계에 들어간다.
또한 대혜여, 만약 불생불멸ㆍ자성ㆍ열반ㆍ2승ㆍ1승ㆍ5법ㆍ모든 마음의 자성(自性) 등에서 말과 같이 뜻을 취하면 곧 일으켜 세움[建立]과 비방하는 견해에 떨어지나니 거기에서 다른 것(의견)을 일으켜 분별하는 까닭이다.
요술을 보고 헤아려 진실이라고 함과 같이,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의 견해이지, 성현의 견해는 아니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만약 말을 따라 뜻 취하여
모든 법을 세우면
그것을 세우는 까닭으로
죽어 지옥에 떨어지리라.
온(蘊) 가운데는 ‘나’가 없고
온은 곧 ‘나’가 아니니
그 분별함과도 같지 않고
또다시 없지도 않느니라.
어리석은 범부 분별함과 같이
일체가 모두 성품 있어
만약 그들이 보는 바와 같다면
모두 마땅히 진실로 보아야 하리라.
일체 물들고[染:번뇌] 깨끗한 법은
모두 다 체성(體性)이 없어
그들 보는 바와 같지 않나니
또한 없는 것도 아니니라.
[지혜의 모양과 식의 모양]
또한 대혜여, 나는 반드시 너를 위하여 지혜의 모양과 식의 모양[智識相]을 설한다.
너와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약 지혜의 모양과 식의 모양을 깨달아 알면 곧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지혜의 세 가지]
대혜여, 지혜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세간의 지혜[世間智]와,
출세간의 지혜[出世間智]와,
출세간의 상상지[出世間上上智:부처님 지혜]이다.
어떤 것이 세간의 지혜인가?
일체 외도의 어리석은 범부가 유ㆍ무의 법을 헤아리는 것이다.
어떤 것이 출세간의 지혜인가?
일체 2승(乘)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집착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출세간상상지인가?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일체법이 모두 모양이 없고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님을 관찰하여 법무아(法無我)를 깨달아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는 것이다.
대혜여, 다시 세 가지 지혜가 있으니,
자상과 공상을 아는 지혜,
생멸을 아는 지혜,
불생불멸을 아는 지혜이다.
다시 다음에 대혜여, 생멸은 식(識)이고 불생불멸은 지혜[智]이며,
상(相)ㆍ무상(無相)과 유(有)ㆍ무(無)의 갖가지 모양의 인(因)에 떨어지는 것은 식(識)이고,
상ㆍ무상과 유ㆍ무의 인을 떠난 것은 지(智)이다.
쌓아 모은 모양[積集相]이 있으면 이것은 식이요, 쌓아 모은 모양이 없으면 이것은 지이다.
경계의 모양에 집착하면 식이요, 경계의 모양에 집착하지 않으면 지이다.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상응하여 생기면 식이고, 걸림없이 상응하는 자성상(自性相)은 지요,
얻음이 있는 상은 식이요, 얻음이 없는 상(相)은 지이니,
스스로 바른 지혜를 깨달아 행하는 경계는 물속의 달과 같아 들어간 것도 아니요, 나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세존께서 거듭 게송으로 설하셨다.
캐고 모으는 업은 마음이고
법을 관찰하는 것은 지혜이며
지혜는 능히 무상(無相)을 깨닫고
자재한 위광이 따른다.
경계에 얽힘은 마음이요
깨달은 생각이 생김은 지혜이며
무상(無相)과 더욱 수승한 지혜는
그 가운데서 생기리라.
마음 뜻과 식이
모든 분별의 생각 떠나고
분별 없는 법 얻으면
불자(佛子:보살)요, 성문이 아니니라.
적멸하고 수승한 인(忍)
여래의 청청한 지혜가
훌륭한 승의(勝義:第一義)에서 생기어
모든 행 멀리 떠나리.
나에게 세 가지 지혜 있으니
성자(聖者)는 능히 밝게 비추어
모든 모양 분별하여
일체 법 열어 보이니라.
나의 지혜는 모든 모양 떠나
2승(乘)을 뛰어넘었느니라.
모든 성문들은
온갖 법 있다 집착하나
여래의 지혜는 더러움 없나니
오직 마음뿐임을 요달하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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