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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6권
16. 신입품(身入品)
이때에 세존께서 최승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신입정, 몸읋 관하다]
“또 보살마하살은 도리어 자기의 몸을 관하고, 몸의 지[身持]와 몸의 입[身入]을 모두 다 분별하되 처소가 없는 줄 분명히 아느니라.
이때에 보살이 몸의 입ㆍ지의 법계정의(法界定意)에 들어가면, 모든 정(定) 가운데서 가장 자재하게 되나니,
몸의 모든 털구멍의 낱낱 털구멍마다 법계정의삼매에 들어가서 자재함을 얻느니라.
모든 법계에서 요술같은 법[幻法]을 나타내 보이고,
전세(前世)와 후세(後世)가 있음을 알고,
세상의 법을 분별하고, 세계의 억백천의 일을 분명히 알고,
수없고 한없는 아승기겁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안에 있는 좋고 나쁜 일을 모두 다 통달하여 알며,
등정각의 권속이 성취함을 관하고,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데서도 역시 모두 평등하여,
선법(善法)을 끊지 않고 대승이 손상되지 않으며,
마음과 뜻이 견고하여 다시는 이동하지 않느니라.
저 한 겁ㆍ백 겁ㆍ백천 겁ㆍ억 겁ㆍ백천억 겁의 한량없는 아승기는 헤아릴 수 없어서 산가지로써 계산할 바도 아니요 뜻으로 헤아릴 바도 아니니,
이와 같은 겁수 동안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정수삼매에 들어가 다시 그 안에서부터 일어나며,
이 세간의 정에 들어가서 저 세간의 정을 좇아 일어나며,
그 세계에 노닐면서 곧 거기 중생의 행을 성숙시키고 법계를 잃지 않고 정법을 체달하며 삼세를 왕래하되 걸리는 바가 없느니라.
설법하고 교화할 때에 한계나 걸림이 있으면 혜안(慧眼)에 귀취(歸趣)하는 쇄입법(碎入法)을 알아 모든 법계에서 자재할 수 있게 하고 괴이정(壞耳定)의 도무극을 구족하여 역시 걸림이 없으며,
비입의 정의[鼻入定意]에 들어가되 선권(善權)을 손상하지 않고 설근의 정의[舌根定意]에 들어가서 맛의 집착한 바를 알며,
쇄신정(碎身定)을 성취하여 왕래하는 데에 장애가 없고, 쇄의정(碎意定)에 들어가서 지식(智識)을 수순하나니, 저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은 관(觀)을 짓고 이와 같이 알 것이니라.
[십천억의 행]
이 신입정(身入定)에 머무르면 곧 보살로서의 십천억의 총지를 획득하고 세간에서 법륜을 굴리어 세속을 따라 들어가며,
다시 십천억의 협장(篋藏)의 행(行)을 얻나니,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으며,
다시 십천억의 근문(根門)을 얻나니, 온갖 지혜를 초월하고, 다시 십천억의 신통을 얻나니, 두루 돌아다니되 막힘이 없느니라.
다시 십천억의 정(定)을 얻나니, 온갖 정(定)을 초월하고,
다시 십천억의 신족을 얻나니, 끝없는 허공의 지경까지 노닐고 다니며,
다시 십천억의 힘을 얻나니, 모든 여러 가지 행(行)이 점차로 더욱더 늘며,
다시 십천억의 구망(救望)을 얻나니, 영원히 여러 가지 생각을 끊으며,
다시 십천억의 멈추는 곳[止處]을 얻나니, 있는 바가 없음을 나타내고,
다시 십천억의 위신(威神)과 변화를 얻나니, 앞에 나타나 있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아, 보살마하살은 이 십천억의 행을 얻어서 이지러지거나 손해남이 없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십천억의 지절(支節)의 영락(瓔珞)을 생각하고 수행하되 스스로 휘감아 싸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갖추어 중생을 제도할 것을 수행하여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탈 것[乘]을 수행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 탈 것을 타고 저 언덕에 이를 수 있게 해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염정삼매(炎定三昧)를 수행하여 세계를 환히 빛내어 어두운 데가 없어야 하며,
다시 십천억의 의변(義辯)을 얻어서 응(應)하거나 응하지 않음이 없으며,
다시 십천억의 큰 서원을 얻어서 와서 보는 이가 있어도 마음이 옮아가거나 동요하지 않으며,
다시 십천억의 믿음과 원(願)을 얻어서 삿되고 뒤바뀐 소견이 없으며,
다시 십천억의 바른 길을 얻어 보살이 왕래하되 두루 돌아다닐 곳에서 그 자취를 청정하게 하며,
다시 십천억의 광명을 얻어서 입[面門]으로부터 나오며,
다시 십천억의 가르침[典訓]을 얻어서 보살의 덕을 드러내며, 다시 십천억의 청정한 근본을 얻어서 도량을 청정하게 하느니라.
최승아,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공덕으로 써 스스로 휘감아 싸고 도수(道樹)를 장엄하되 본제(本際)를 잃지 않는 것이니,
이 모두는 보살이 도(道)에 나아가는 도구[具]이니라.
만일 보살이 이 여러 가지 도구를 성취하면,
곧 보살의 지위에 올라서 칭찬을 얻고,
덕향(德香)을 풍겨서 사람의 존경을 받으며,
행한 바 대중 가운데서 곧 이끗을 얻게 되고, 현재 세상의 덕업(德業)이 다함이 없느니라.
[정의자재 삼매]
만일 어떤 보살이 이 법계의 정의자재삼매(定意自在三昧)에 머무르면, 호족(豪族)의 집에 태어나서 비천한 데에 처하지 않고 많은 보살들을 권속으로 삼으며,
삼매에 머무른 뒤에는 동방으로 10억 아승기 등의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을 멀리서 뵈옵고 명호와 성씨와 국토의 크고 작음도 모두 다 분명해지며,
남방ㆍ서방ㆍ북방과 네 간방[四維]과 위아래의 십억 아승기의 모든 부처님 세계의 모든 여래께서 다 그 낱낱의 성씨와 명호를 알게 되고, 보살행을 세워 도의 문[道門]을 지시하여 그 보살들로 하여금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느니라.
여래의 몸은 한량없는 광명을 놓고 여래의 눈은 불가사의함을 나타내며,
여래의 이통(耳通)도 한량없고 여래의 비통(鼻通)도 갑절 더 헤아릴 수 없으며,
여래의 설통(舌通)도 광대하여 끝이 없고 여래의 심통(心通)도 형관(形觀)이 없는 것이 아니며,
여래의 신족은 위없는 법으로 제도하는 바가 한이 없느니라.
여래의 도(道)는 상ㆍ중ㆍ하가 없이 완전히 성취된 까닭이요,
여래의 명칭은 멀리까지 유포된 까닭이며,
여래의 법륜은 언제나 굴리거나 굴리지 않거나 간에 현재 세간에서 굴려지는 까닭이요,
여래를 공경하고 따르는 무리들이 현재 묻고 받고 하기 때문에 여래의 정법은 한량없어서 중도에 끊어짐이 없는 까닭이며,
여래의 선근은 현재에도 찬탄하는 까닭이요,
여래의 행은 두루하여 논(論)하여도 감당해 낼 수 없는 까닭이며,
여래의 종자는 삼세에 성취하였으니, 항복받지 않음이 없는 까닭이요,
여래는 온갖 법을 내셔서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널리 펴 보이시는 까닭이며,
여래는 법의 처소를 환히 나타내나니, 지혜가 밝은 까닭이니라.
최승아, 그러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나타내는 경계가 청정하여 처소를 세우게 되고,
부처님의 여러 겹 구름으로 법의 감로를 비처럼 내리며,
온갖 부처님의 경계는 언교가 있음을 보여 모든 부처님의 법을 나타내고,
모든 법성은 요술 같은 모양이요 진실하지 않는 줄 분명히 알며,
일어나는 것이 자연(自然)이요 동요하거나 전환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법의 형상으로 이치를 분별하며,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은 완전히 갖추어져서 한도 없고 끝도 없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물러 노니는 방소마다 걸리는 바가 없는 것이니라.
또 보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음(陰)ㆍ지(持)ㆍ입(入)에 노닐되, 역시 장애나 폐단이 없고 마음은 요술의 법이 되어, 양도 없고 한도 없고 끝도 없는 법을 알아서 모든 보살이 편안히 처하며,
이 정의자재삼매(定意自在三昧)에 머무르면 곧 모든 부처님ㆍ여래ㆍ등정각의 명호와 성씨를 능히 알되,
낱낱의 명호는 십억천 아승기 등의 모든 부처님 여래까지 이르고,
그 낱낱의 명호는 백천억의 부처님 세계에 이르게 되느니라.
보살의 몸은 모두 그 안에 머물러 편안히 처하되,
한량없는 마음의 생각과 뜻의 생각과 다시 무위의 교묘한 방편으로써 처소에 서게 되느니라.
온갖 법은 또한 망실되지 않나니, 도지견(度知見)을 얻기 때문이요,
언제나 지혜 바다[智海]를 친근하나니, 현지(現智)를 바라기 때문이다.
머무를 때는 역시 처소가 있으나, 모든 법은 처소가 없음을 나타내 보이느니라.
부처님의 처소를 세우기 위하여 널리 모든 법은 앞뒤가 없음을 보이고 나타내기 때문이며,
근문(根門)은 장애가 없고 지혜의 예리한 법으로 지혜를 잘 이용하되 분별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위의를 무너뜨리지 않고 모든 경계를 세우기 위하여 오고 감이 없기 때문이요,
지혜의 처소로 청정한 무애지(無碍智)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며,
등정각을 이룬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요,
법계를 빛내면서 더하거나 덜함이 없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되 곧 대승의 자취에 능히 나아가는 것이니라.
[열 가지 나아가는 바다의 문]
보살마하살은 다시 열 가지 나아가는 바다의 문[海門]을 닦아 익히되 만족해 함이 없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부처님의 바다[佛海]는 만족해 함이 없음을 나타내며,
사람의 바다[人海]는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교화할 적에 만족해 함이 없으며,
법의 바다[法海]는 더욱더 늘리되 만족해 함이 없으며,
착한 밭의 바다[善田海]는 만족함이 없음을 내되 없는 법에 머무르며,
또한 관행(觀行)과 신족도 없는 공덕의 바다[功德海]에 머물러서,
1지(地)로부터 1지에 이르기까지 지혜에 착란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뜻의 바다[心意海]에 머물러서,
모두 다 온갖 수행의 여러 가지 마음과 여러 가지 뜻을 깨달아 알고,
한량없는 마음은 더함도 있고 덜함도 있음을 알며,
수행하는 바다[修行海]에 머물러서 온갖 서원[衆願]을 완전히 갖추기 때문이며,
큰 서원의 바다[弘誓海]에 머물러서 반드시 마지막의 청정한 벗어남[出要]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이 삼매에 머무르면 곧 이 열 가지 나아가는 바다의 문을 얻으나 만족해 함이 없는 것이니, 보살 대사(大士)로서 수행할 바이니라.
[열 가지 제일가는 남이 없음]
보살마하살은 다시 열 가지 제일가는 남이 없음[無生]을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중생의 무리를 관찰하는 제일로서 첫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하늘의 뛰어난 존귀함[天豪尊]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두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맨 위의 범천(梵天)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세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세계를 지키는 마음[世護心]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네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중생에 있으면서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나 짝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다섯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악마들을 항복받아 마음이 안정되고 어지럽지 않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여섯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5취(趣)는 형상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일곱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모든 중생들은 역시 더러움에 물듦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여덟 번째 남이 없는 것이며,
높고 귀한 모든 부처님 법을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아홉 번째 남이 없는 것이요,
자재롭게 벗어나서 밝게 빛난다고 관찰하는 것이 제일로서 열 번째 남이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사유해야 할 열 가지 제일가는 남이 없음이니라.
[중생계가 나아가 태어나는 바의 열 가지 일]
보살은 다시 사유해야 하느니라.
중생계(衆生界)가 나아가 태어나는 바에는 열 가지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출가(出家)가 견고하여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며,
불퇴전에 서서 정진하는 힘을 행하며,
청정하고 집착이 없는 힘으로 더러움에 물듦이 없으며,
온갖 법이 공(空)하기 때문이며,
휴식하는 힘을 성취하여 모든 법이 자재하기 때문이며,
마음으로 굴리거나 굴리지 않는 힘을 성취하여 분별하고 의논하기 때문이며,
저절로 법의 힘을 두루 갖추어서 큰 지혜를 이루기 때문이며,
걸림이 없는 힘[無碍力]을 이루어 마치고 설법하기 때문이며,
두려움이 없는 힘[無畏力]이 성취되면 법을 위하여 처소를 세우기 때문이며,
의단의 힘[意斷力]으로 미지(未知)와 이지(已知)를 성취하며,
지혜가 성취되어도 두 가지의 힘이 없고 생멸이 없기 때문이니,
최승아,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의 힘을 사유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가장 큰 힘과, 견줄 데 없는 힘과,
위도 아니고 아래도 아닌 힘과, 한량없는 힘과,
기르고 부양하는 힘과, 동요하지 않는 힘과,
착한 길[善趣]에 나는 힘과, 성내지 않는 힘과,
지혜가 치성한 힘과, 힘쓰고 애쓰면서 행을 쌓는 힘으로,
이것이 바로 열 가지 힘이니 마땅히 생각하면서 수행해야 하느니라.
[보샇의 열 가지 힘]
또 보살은 마땅히 열 가지 힘을 잘 사유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이른바 공(空)에 잘 들어가는 힘과, 잘 청정하게 하는 힘과,
잘 미묘하게 하는 힘과, 선한 법신[善法身]의 힘과,
선한 세간법의 힘과, 잘 활활 타는 법의 힘과,
선근이 고요하게 되는 힘과, 일찍이 없었던 힘과,
잘 깨치는 힘과, 잘 초월하여 건너는 힘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이 열 가지 힘에 머무르면 곧 정의(定意)를 섭지(攝持)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보살의 20가지 힘]
보살마하살은 다시 20가지의 힘을 사유하여 정문(定門)에 이르게 되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20가지인가?
이른바 대인(大人)의 힘과,
선지식을 친근하는 힘과,
평등하고 바르게 깨닫는 마지막의 힘과,
본래부터 선근을 닦아 친근(親近)을 얻는 힘과,
한량없는 선근으로 향을 쪼이는 힘과,
여래의 제도하고 제도하지 않을 수 있는 힘과,
마음의 더러운 때[穢垢]를 항복받아 생멸이 없는 힘과,
보살의 생각을 더욱더 늘리면서 끊지 않는 힘과,
보살을 장엄하여 기쁨을 얻는 힘과,
보살의 선(善)을 도와 법을 끊지 않는 힘과,
보살의 마음을 제외하고는 연의 집착이 없는 힘[無緣着力]과,
보살의 서원이 충만하여 구하는 바가 없는 힘과,
보살의 뜻을 이루어 정을 사유하는 힘과,
보살의 근성을 얻어 착란이 없는 힘과,
법왕(法王)을 세우는 힘과,
집착이 없고 한량없는 몸의 힘과,
선권방편을 얻은 지혜의 힘과,
온갖 법에 대하여 두려움이나 어려움이 없는 힘과,
중생의 근본에 서서 새어 없어지지 않는 힘과,
모든 중생에서 홀로 걸으며 그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힘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로서 이 정(定)에 머무는 것이며,
비로소 있는 바가 없는 힘[無所有力]과 상응하나니,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위에 초월하여 이에 보살의 정의 힘[定力]에 들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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