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구사론 제16권
4. 분별업품 ④
[업의 네 가지 종류]
또한 경 중에서 설하기를,
“업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어떤 업은 흑(黑)으로서 흑의 이숙을 초래하며,
혹은 다시 어떤 업은 백(白)으로서 백의 이숙을 초래하며,
혹은 다시 어떤 업은 흑백으로서 흑백의 이숙을 초래하며,
혹은 다시 어떤 업은 비흑비백(非黑非白)으로서 이숙을 초래하지 않으니, 능히 온갖 업을 멸진한 것이다”고 하였다.1)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흑흑 등의 차별에 의해
설해진 네 가지 종류의 업은
악과 색계ㆍ욕계의 선과
능히 그것이 다한 무루의 업이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흑ㆍ백ㆍ흑백ㆍ비흑비백이라고 이름하는 것임을.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는 업과 그 과보의 성질과 종류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과, 대치되는 것[所治]과 대치하는 것[能治]의 차별에 따라 흑흑(黑黑) 등의 네 가지 업을 설하였다.
즉 모든 불선업은 한결같이 ‘흑’이라고 이름하니, 염오성이기 때문이며,
그 이숙과도 역시 ‘흑’이라고 하니, 불가의(不可意)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색계의 선업은 한결같이 ‘백’이라고 이름하니, 어떠한 악(불선의 번뇌와 업)도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며,
그 이숙과도 역시 ‘백’이라고 하니, 바로 가의(可意)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무색계의 선은 ‘백’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만약 어떤 처소에 중유와 생유의 두 가지 이숙과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세 가지 업을 갖추고 있을 경우, 그곳에서는 [흑ㆍ백업을] 설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흑ㆍ백업을]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2)
그렇지만 계경 중의 어떤 곳에서는 ‘무색계의 선업을 백 등이라 한다’고 역시 설하고 있다.3)
욕계의 선업을 일컬어 ‘흑백’이라고 하는데, 악이 섞여 있기 때문이며,
그 이숙과도 역시 ‘흑백’이라고 이름하니,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흑백이라는 명칭은 상속에 의거하여 설정된 것으로서, 업 그 자체[自性]에 의거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다.4)
그 까닭이 무엇인가?
어떠한 업도, 어떠한 이숙과도 흑이면서 역시 백인 경우는 없으니, 상호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악업과 그 과보에도 선업과 그 과보가 섞여 있기 때문에 또한 마땅히 그것을 백흑업(白黑業)이라고도 이름해야 하거늘, 어찌 그렇게 이름하지 않는 것인가?5)
불선업과 그 과보에는 필시 선업과 그 과보가 섞여 있지 않을지라도 욕계 선업과 그 과보에는 필시 마땅히 악업과 그 과보가 섞여 있을 것이니,
욕계 중에서는 악이 선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6)
온갖 무루업으로서 앞의 세 가지 업을 능히 영원히 끊고 다한 것을 일컬어 ‘비흑(非黑)’이라 하니, 염오가 아니기 때문이며,
역시 또한 ‘비백(非白)’이라고도 이름하니, 능히 백(白)의 이숙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같은 ‘비백’이라고 하는 말은 밀의(密意)의 설이니,
부처님은 그의 『대공경(大空經)』 중에서 아난다에게,
“모든 무학의 법은 순선(純善) 순백(純白)으로 한결같이 무죄(無罪)이다”고 하였으며,7)
본론(本論)에서도 역시,
“무엇이 백법인가? 이를테면 모든 선법과 무부무기법이 바로 그것이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8)
그리고 [무루업이] 이숙을 초래하는 일이 없는 것은 [3]계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유전(流轉)의 법과는 그 성질이 상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갖 무루업은 모두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업을 능히 멸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 법지인(法智忍)과 욕계를 떠난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열 두 가지의 무루의 사업(思業)은
오로지 순흑(純黑)의 업만을 멸진한다.
욕계와 네 가지 정려의 염오를 떠난
제9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사업의 경우
한 가지는 흑백[雜]과 순흑의 업을 멸진하며
네 가지는 순백의 업을 멸진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견도(見道) 중에서는 네 가지 법지인(法智忍)과, 그리고 수도(修道) 중에서는 욕계의 염오를 떠난 상태인 앞의 여덟 가지 무간(無間)의 성도(聖道)와 함께 작용하는 열두 가지 사업(思業)은 오로지 순흑업(純黑業) 즉 흑흑업만을 멸진한다.9)
욕계의 염오를 떠나는 제9 무간의 성도와 함께 작용하는 한 가지 무루의 사업은 흑백업과 순흑업을 함께 멸진하니,
이 때에는 욕계의 선업이 모두 끊어지기 때문이며,
또한 제9품(즉 하하품)의 불선업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4정려지 각각의 염오를 떠나는 제9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무루의 사업 네 가지는 오로지 순백업, 즉 백백업만을 멸진한다.
어떠한 이유에서 온갖 지(地)의 유루의 선법은 오로지 최후의 도(즉 제9무간도)에 의해서만 능히 끊어지고 그 밖의 도에 의해서는 끊어지지 않는 것인가?10)
모든 선법은 자성단(自性斷)이 아니어서 [그 밖의 도에 의해] 이미 끊어졌더라라도 현재전(現在前)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소연으로 하는 번뇌가 끊어질 때 비로소 그 같은 선법이 끊어졌다고 일컬을 수 있으니, 그 때의 선법은 이계(離繫)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다.11)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것(즉 선법)을 소연으로 하는 번뇌가 일품이라도 남아있는 한 [그러한 선법이] ‘끊어졌다’고 하는 뜻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니,
그 때에도 선법은 아직 이계(離繫) 즉 번뇌의 계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지옥의 이숙을 받는 업과
그 밖의 욕계의 업이 흑흑업ㆍ흑백업이다’고 하였으며
또 어떤 이는 ‘욕계의 견도에 의해 소멸하는 업과
그 밖의 욕계의 업이 흑흑업ㆍ흑백업이다’고 설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흑흑업과 흑백업에 대한 이설로서]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지옥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順地獄受業]과 그 밖의 욕계 중에서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순서대로 이름하여 순흑업(즉 흑흑업)이라 하고,
뒤섞인 업[雜業, 즉 흑백업]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지옥의 이숙은 오로지 불선업만이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기에 적합한 업을 ‘순흑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지옥을 제외한 그 밖의 욕계 중의 이숙은 모두 오로지 선업ㆍ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기에 적합한 업을 ‘흑백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욕계의 업으로서 견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見所斷]과, 욕계 중에 존재하는 그 밖의 업(즉 修所斷의 업)을 순서대로 일컬어 순흑업과 ‘두 가지 모두의 업[俱業]’ 즉 흑백업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견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은 선업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순흑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욕계의 업으로서 수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은 선업과 불선업이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의 업’이라고 이름한 것이다”고 하였다.12)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모니(牟尼)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청정(淸淨)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다 같이 신(身)ㆍ어(語)ㆍ의(意)의 그것이다.13)
이러한 법의 각각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학의 신ㆍ어 업과
마음이 바로 세 가지 모니이며
세 가지 청정이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바로 세 가지의 온갖 묘행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무학(無學)의 신ㆍ어 업을 신(身)ㆍ어모니(語牟尼)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바로 의모니(意牟尼)란 무학의 마음[意]으로, 의업이 아니다.14)
그 까닭이 무엇인가?
승의의 모니는 오로지 마음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신ㆍ어의 두 업에 의해 추리하여 알[比知] 수 있을 뿐이다.15)
또한 신ㆍ어 업은 바로 원리(遠離, 즉 모든 악을 떠나는 것) 그 자체이지만 의업은 그렇지 않으니, 무표업이 없기 때문이다.
즉 ‘원리’의 뜻에 의해 ‘모니’라는 말을 설정한 것으로,
마음은 바로 신ㆍ어 업으로 말미암아 능히 [온갖 악으로부터] 떠나게 되기 때문에 ‘모니’라고 이름한 것이다.16)
어떠한 이유에서 모니는 오로지 무학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아라한은 바로 진실의 모니로서, 온갖 번뇌의 말이 영원히 적멸하여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신(身)ㆍ어(語)ㆍ의(意) 세 종류의 온갖 묘행(妙行)을 신ㆍ어ㆍ의 세 종류의 청정(淸淨)이라고도 이름하니,
일체의 악행과 번뇌구(煩惱垢)를 잠시동안 혹은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청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17)
그리고 이상과 같은 두 가지의 업을 설한 것은,
유정들이 사모니(邪牟尼)와 사청정(邪淸淨)을 [이 두 가지 업으로] 간주하려는 것을 종식시키기 위해서였다.18)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악행(惡行)이 있다’고 설하고 있으며,
또한 경 중에서는 ‘세 가지 묘행(妙行)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다 같이 신(身)ㆍ어(語)ㆍ의(意)의 그것이다.19)
이러한 법의 각각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의 신ㆍ어ㆍ의 업을 설하여
세 가지 악행이라고 이름하며,
아울러 탐ㆍ진ㆍ사견도 악행인데,
세 가지 묘행은 이와 반대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체의 불선인 신업과 어업과 의업을 순서대로 신ㆍ어ㆍ의 악행이라고 이름한다.
그런데 의악행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의업이 아닌 탐(貪)ㆍ진(瞋)ㆍ사견(邪見)이 바로 그것으로,
‘탐’ 등은 사(思, 즉 의업의 본질)와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비유자(譬喩者)는 말하기를,
“탐ㆍ진ㆍ사견은 바로 의업으로,
『고사경(故思經)』 중에서 이러한 세 가지 종류를 설하여 의업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2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업과 번뇌는 합해져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21)
번뇌가 바로 의업이라고 인정하였는데, 거기에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22)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것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수많은 교리와 상위하게 되는 크나큰 과실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즉 계경에서 [사업을] 바로 의업이라고 설한 것은, ‘사’가 그것을 방편[門]으로 삼아 일어난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법(불선의 3업과 탐ㆍ진ㆍ사견)으로 말미암아 능히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하기 때문에,
또한 이는 총명하고 슬기로운 이[聰慧者]가 꾸짖고 싫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행은 바로 악이니, 그래서 ‘악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세 가지 묘행은 이와 반대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신ㆍ어ㆍ의의 일체의 선업과 [의]업이 아닌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정견(正見)이 바로 그것이다.
정견과 사견은 이미 고의적인 의지[故思]로서 다른 이를 이익되게 하거나 손해를 끼치고자 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선과 악을 성취하겠는가?
능히 손해를 끼치고 이익되게 하는 데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10업도, 선/악의 업도]
또한 경 중에서 말하기를,
“10업도(業道)가 있으니, 선 혹은 악의 업도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23)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경에서] 설한 10업도는
악행과 묘행 중의 거친 것을
포섭하여 그 자성으로 삼은 것이니
상응하는 바에 따라 선과 악을 성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악행과 묘행 중에서 만약 거칠게 나타나 알기 쉬운 것이라면 그것을 포섭하여 ‘10업도’로 삼으니,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만약 선업이면 앞서 언급한 묘행이 여기에 해당하고,
불선의 업도이면 앞서 언급한 악행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어떠한 악행과 묘행이 10업도에 포섭되지 않는 것인가?
바야흐로 불선업 중에서 신(身) 악업도는 신악행의 일부를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가행과 후기와 그 밖의 불선의 신업, 즉 온갖 술을 마시거나 잡거나 때리거나 묶는 등의 업이 그러하니, 가행 등은 거칠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신악행으로서 다른 유정들로 하여금 목숨을 상실하게 하고, 재물을 상실하게 하고, 처첩을 상실하게 하는 등의 악행이라면 이를 설하여 업도라고 하니, 이로부터 멀리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語) 악업도의 경우 어악행의 가행과 후기 그리고 [그 과실이] 가벼운 업은 포섭하지 않으며,24)
그리고 의(意) 악업도의 경우 역시 의악행의 악한 의지[惡思]와 [그 과실이] 가벼운 탐 등은 포섭하지 않는다.
선업도 중에서도 신(身) 선업도는 신묘행의 일부를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가행과 후기, 그리고 그 밖의 선한 신업으로, 바로 이음주(離飮酒)와 공양을 베푸는 일 등이 바로 그것이다.25)
어(語) 선업도는 어묘행의 일부를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애어(愛語)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의(意) 선업도는 의묘행 중의 일부분을 포섭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온갖 선한 의지[善思]가 바로 그것이다.
10업도 가운데 앞의 일곱 가지 업도(신업의 세 가지와 어업의 네 가지)에는 모두 결정코 표업ㆍ무표업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업도의 여섯 가지에는 결정코 무표업이 존재하고
자신이 지은 그것과 사음에는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하며
수계에 의해 생겨난 일곱 선업도에도 두 가지 모두 존재하고
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에는 오로지 무표업만이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일곱 가지 악업도 중의 여섯 가지에는 결정코 무표업이 존재하니,
이를테면 살생(殺生)과 불여취(不與取)와 허광어(虛狂語)와 이간어(離間語)와 추악어(麤惡語)와 잡예어(雜穢語)가 바로 그것이다.
즉 만약 다른 이를 보내어 이와 같은 여섯 종류의 업을 짓게 되면, 근본업도가 성취될 때 자신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6)
그러나 만약 자신이 그러한 여섯 가지 업도를 짓게 될 경우, 여섯 가지에는 모두 표업ㆍ무표업의 두 가지 업이 존재하니, 이를테면 표업이 일어날 때 그가 바로 죽게 되는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 후에 비로소 죽게 되는 등의 경우에는, 다른 이를 보내어 죽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본업도를 성취할 때 오직 무표업만이 존재할 뿐이다.27)
그런데 오로지 욕사행(欲邪行, 즉 사음)만은 반드시 두 가지 모두를 갖추고 있다.
요컨대 이는 바로 궁극적으로 자신이 성취하는 바로서, 다른 이를 보내어 짓게 되면 스스로 행하는 것과 같은 기쁨을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곱 가지 선업도로서 수계[受]에 의해 생겨난 것은 반드시 두 가지(즉 표업과 무표업) 모두를 갖추고 있으니,
그것을 받음으로써 생겨난 시라(尸羅,계 즉 율의)는 반드시 표업(즉 맹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려와 무루에 포섭되는 율의를 정생(定生) 즉 ‘정려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오로지 무표업만이 존재하니, 이것은 다만 마음의 힘[心力]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행, 후기, 근본의 경도도 동일한 것인가]
근본업도[根本業道] 어떤 행위를 완성하는 순간에 생겨나는 표업(表業)과 무표업(無表業)이다. 업도란 업이 작용하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 업도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세 단계를 경과해야 하는데, 첫째 가행(加行)으로 행위이전의 예비적 단계를 가리키고, 둘째, 근본으로 행위를 완성하는 단계를 가리키고, 셋째 후기(後起)로 완성된 후에 다시 그에 따라 일어나는 행위를 하는 단계를 가리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본업도 [根本業道] (문화원형 용어사전, 2012.) |
가행(加行)과 후기(後起)의 경우도 근본업도와 동일한 것인가?28)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가행에는 결정코 표업이 존재하지만
무표는 혹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으며
후기는 이와 서로 반대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근본업도의 가행에는 결정코 표업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서 무표는 혹 어떤 경우에는 존재하지만 혹 어떤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으니,
맹리한 전(纏, 근본번뇌에서 파생된 수번뇌)과 순수하고 청정한 마음[淳淨心]에 의해 일어난 가행에는 무표가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후기에는 이와 반대로 결정코 무표업이 존재하지만,29) 이러한 상태에서의 표업은 혹 어떤 경우에는 존재하지만, 혹 어떤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만약 후시에 선행된 업도에 따라 업을 일으킨 경우에는 역시 표업이 존재하지만,30)
그렇지 않았을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업도 중에서 가행과 근본과 후기는 어떻게 건립한 것인가?
바야흐로 불선업 중의 첫 번째인 살생업의 경우,
예컨대 양을 도살하는 자는 장차 살생을 행하려고 할 때 먼저 살생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돈[價]을 들고 바로 양을 파는 상점으로 가 양의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돈을 치르고 끌고 와 우리에 가두어서 다시 사육한다.
그러다 장차 도살장에 들어갈 때면 손에 몽둥이나 칼을 들고서 혹은 때리기도 하고, 혹은 찌르기도 하며, 혹은 한 번을 그렇게 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반복하여 그렇게 하여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때까지를 모두 살생의 가행(加行, prayoga)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업에 따라 양의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의 표업과 무표업을 바로 살행의 근본업도(根本業道, maula karmapatha)라고 한다.
즉 모든 유정은 두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근본업도인 살생의 죄에 저촉되는 것이니,
첫 번째는 가행으로 말미암아서이며,
두 번째는 결과의 원만함에 의해서이다.
나아가 이 같은 찰나 이후에 살생의 무표업이 수전(隨轉)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을 살생의 후기(後起, pṛṣṭha)라고 이름한다.
아울러 그 후에 가죽을 벗기거나 자르며 바로 펴 씻고서 혹은 저울에 달기도 하고 혹은 팔기도 하며, 혹은 삼기도 하고 혹은 먹으며, 그 맛이 좋다고 예찬하여 말하는 등의 이와 같은 표업의 찰나도 역시 살생의 후기라고 이름한다.
그 밖의 여섯 가지 업도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세 부분(가행ㆍ근본ㆍ후기)이 동일하지 않으니, 이러한 예에 준하여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탐(貪)ㆍ진(瞋)ㆍ사견(邪見)의 경우는 잠시 현재전할 때를 설하여 근본업도라고 이름하는 것으로, 그래서 여기에는 가행과 후기의 차별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살생되는 자가 사유(死有)에 머물 때 능히 살생한 자의 그 같은 찰나의 표업과 무표업이 바로 업도를 성취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죽은 이후에 성취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에 허물이 있으니,
만약 살생되는 자가 바로 사유에 머물 때 능히 살생한 자의 업도가 성취된다고 한다면 능히 살생한 자가 살생된 자와 동시에 목숨을 마치는 경우에도 업도를 성취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유부]종에서는 그 같은 경우에 업도가 성취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31)
또한 만약 살생된 자가 목숨을 마친 이후에 비로소 능히 살생한 자의 업도가 성취된다고 한다면, 마땅히 앞에서 설한 것처럼 ‘이러한 표업에 따라 그의 목숨이 끊어지는 이러한 찰나의 표업과 무표업을 바로 살행의 근본업도라고 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비바사사(毘婆沙師)가 본론(本論) 중의 ‘가행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고 하는 말에 대해 해석한 것과도 어긋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본론에서 설하기를,
“이미 살아있는 것을 해치고서도 살생[의 업도]가 아직 소멸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이미 [다른 이의] 목숨을 끊고도 그 같은 가행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을 때이다”고 하였다.32)
이 문장에 대해 비바사사는,
“여기서는 후기를 가행이라는 말로 설한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만약 죽은 이후에 근본업도를 성취한다고 하면] 마땅히 근본업도를 가행이라는 말로 설해야 할 것이니,
목숨이 끊어진 후에도 근본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33)(이상 異說者의 힐난)
예컨대 그 어떤 허물도 없으니, 여기(앞서 인용한 본론)서도 마땅히 논설하고 있는 것이다.(비바사사의 답)
여기서는 무엇을 설하였기에 허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근본을 가행이라는 말로 설한 것이다.3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때 존재하는 표업은 어떻게 근본업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어째서 성취하지 못하는 것인가?
[목숨이 이미 끊어졌으므로 표업은] 아무런 작용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업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한다면] 무표업도 이에 대해 무슨 작용이 있을 것인가?35)
따라서 업도의 성취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가행과 결과가 원만하게 되었을 때 이러한 두 가지(표업ㆍ무표업)는 모두 근본업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업도는 서로서로를 비교하면 서로간에 가행과 후기가 되기도 한다.
지금 바야흐로 살생업도가 10업도를 가행으로 삼는 것에 대해 논설해 보면 이와 같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원적(怨賊)을 해치고자 온갖 모략과 계획을 세워 죽일 방도[緣]를 강구하면서 혹 어떤 경우 중생을 죽여서 도와주는 힘[助力]에 기청(祈請)하기도 하며,36)
혹은 다른 이의 재물을 훔쳐 죽이는 일의 밑천으로 삼기도 하며,
혹은 그의 부인과 사통하여 그의 남편을 죽이게 하기도 하며,
혹은 그의 친구로 하여금 그를 배반하여 떠나게 하기 위해 말의 네 가지 허물(語業 네 가지)을 일으켜 의심을 낳게 하고 설사 힘이 있을지라도 구호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기도 하며,37)
혹은 그의 재산에 대해 마음에 탐착을 낳기도 하며,
혹은 그에 대해 진에의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사견을 일으켜 살생의 업을 북돋우기도 하며,
그런 연후에 비로소 그를 죽일 경우 이와 같은 살생의 업은 10업도를 가행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원적을 죽이고 나서 그 후 다시 그의 친한 이를 죽이고, 그의 재물을 거두어들이고, 그가 아끼는 이와 사통하고, 내지는 다시 탐착과 진에와 사견을 일으켜 순서대로 현전시키니,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후기라고 한다.
나아가 그 밖의 업도에 대해서도 마땅히 상응하는 바대로 알아야 할 것이다.
탐 등은 마땅히 능히 가행이 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
오직 마음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는 가행이 성취되지 않으니, 오로지 마음만이 일어날 때는 아직 일(業)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이설)
또한 계경에서 설하기를,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살생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탐(貪)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둘째는 진(瞋)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며,
셋째는 치(癡)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내지는 사견에 세 종류가 있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38)
여기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떤 형태의 살생을 탐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가?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같이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온갖 업도가 모두 다 세 가지 근(根, 즉 3불선근)에 의해 구경(究竟)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의 가행(불선근)은 그것(근본업도)과 동일하지 않다.
어떻게 동일하지 않은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가행은 세 가지 근에 의해 일어나며
그것과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에
탐(貪) 등도 세 가지 근에 의해 생겨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불선업도]
불선업도의 가행이 생겨날 때에는 각기 세 가지 불선근에 의해 일어난다.
즉 그것은 선행한 법에 근거하여 등기(等起)된 것이기 때문으로, 다음과 같이 설할 수 있다.
살생의 가행으로서 탐욕[貪]에 의해 일어난 것이란,
이를테면 어떤 이가 그(살해되는 유정)의 몸의 한 부분[身分,고기나 가죽 따위]을 얻기 위하여, 혹은 재물을 획득하기 위하여, 혹은 기쁨과 즐거움을 위하여, 혹은 친지ㆍ친구와 자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탐욕으로부터 살생의 가행을 인기하는 것을 말한다.
진에[瞋]로부터 일어난 살생의 가행이란,
이를테면 원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낳아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우치[癡]로부터 일어난 살생의 가행이란,
이를테면 제사를 지내면서 ‘이것(희생)이 바로 [참다운] 법이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고,39)
또한 모든 왕들이 ‘세간의 법률에 의거하여 원적을 살육하고 나쁜 무리들을 베어내어 제거하면 큰 복을 성취한다’고 하면서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한 파랄사(波剌斯, Parasika,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한다.
‘부모가 늙고 병들었을 적에 목숨을 마치게 해 주면 바로 뛰어난 복을 낳게 된다’
또한 여러 외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뱀이나 전갈, 벌 따위는 사람들에게 유독한 해악을 끼치니, 만약 능히 그것들을 죽이는 자는 바로 뛰어난 복을 획득하게 되며, 양이나 사슴, 물소, 그리고 그 밖의 날고 기는 짐승 따위는 본래 먹는 데 이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여도 죄가 없다’
또한 [그 밖의] 사견(邪見)에 의해 중생을 살해하기도 하니,
이러한 등의 가행은 모두 우치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투도(偸盜)의 가행으로서 탐욕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란,
이를테면 필요에 의해 도둑질의 가행을 일으키기도 하며,
혹은 별도의 이익이나 공경과 명예를 위하여,
혹은 자신과 친구를 구제하기 위하여 탐욕으로부터 투도의 가행을 인기하는 것을 말한다.
진에로부터 일어난 투도의 가행이란,
이를테면 원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낳아 투도의 가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우치로부터 일어난 투도의 가행이란,
이를테면 모든 왕들이 ‘세간의 법률에 의거하여 악인의 재물을 빼앗는 것은 법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므로 투도의 죄가 없다’고 하면서 [투도의 가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바라문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세간의 재물은 겁초(劫初)의 시절에 대범천왕(大梵天王)이 모든 범지(梵志)들에게 나누어주었던 것으로, 그 후 범지의 세력이 미약해짐에 따라 온갖 비천한 종족들이 침탈하여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모든 범지가 세상의 다른 이의 재물을 빼앗거나 훔쳐서 의복으로 충당하고 먹거리로 충당하고 혹은 그 밖의 용도로 충당하고, 혹은 그것을 다시 다른 이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모두 [원래] 자기의 재물을 쓴 것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재물을 취할 때는 다른 이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밖의] 사견(邪見)에 의해 다른 이의 재물을 훔치기도 하니, 이러한 것은 모두 우치로부터 일어나는 투도의 가행인 것이다.
사음(邪婬)의 가행으로서 탐욕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란,
이를테면 다른 이의 아내 등에 대해 염착(染著)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혹은 다른 이의 재물과 명성과 지위와 공경을 [얻기] 위하여,
혹은 자신과 다른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탐착으로부터 사음의 가행을 인기하는 것을 말한다.
진에로부터 일어난 사음의 가행이란,
이를테면 원수를 제거하기 위하여 분노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낳아 사음의 가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우치로부터 일어난 사음의 가행이란,
이를테면 파랄사에서 어머니 등에 대해 비범행을 행하는 것을 찬양하고, 또한 모든 범지가 ‘소에게 제사 지내는 도중에 거기 모인 여러 여자와 남자가 우금(牛禁:소같이 사는 금계)을 수지하여 물을 마시고 풀을 뜯으며 혹 어떤 때는 머물기도 하고 혹 어떤 때는 가기도 하며 가깝고 먼 것에 관계없이 함께 만나고 함께 화합하는 것’을 찬양하면서 [사음의 가행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40)
또한 여러 외도(구역에서는 頻那柯外道)들은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절구과 같고, 꽃과 같고, 과일과 같고, 잘 익은 밥과 같고, 섬돌과 같고, 도로와 같고, 배다리[橋船]와 같으니, 세간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수용해야 하리라’
즉 이같이 생각하여 일으키는 사음의 가행은 우치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탐욕과 진에로부터 일어나는 허광어(虛狂語) 등의 네 가지 어(語) 업도의 가행에 대해서는 앞의 논설에 유추하여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41)
그렇지만 우치로부터 일어나는 허광어의 가행에 대해 외론(外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농담[戱]하며 웃음지을 때
시집갈 때나 아내를 맞을 때, 여인과 왕에 대해
그리고 목숨을 구하고 재물을 구하기 위해
허광어를 짓는 것은 죄가 아니다.
또한 사견에 의해 일어난 허광어와 이간어(離間語) 등에 존재하는 가행은 모두 우치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온갖 폐타(吠陀, Veda)와 그 밖의 사론(邪論)은 모두 잡예어(雜穢語)에 포섭되는 것으로, 그것의 가행은 우치로부터 생겨난다.
탐욕과 진에 등의 세 가지 불선근은 이미 가행이 없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탐욕 등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세 가지 불선근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에 탐욕 등도 세 가지 불선근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설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혹 어떤 때 탐욕으로부터 무간에 탐욕의 업도가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두 가지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며,
진에와 사견이 세 가지 불선근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불선의 업도는 세 가지 [불선]근으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선업도]
그렇다면 다시 선업도의 경우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선업도의 세 과정(가행ㆍ근본ㆍ후기)은
모두 세 가지 선근으로부터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선업도에 존재하는 가행ㆍ근본ㆍ후기는 모두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의 선근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선업도의 세 과정은 모두 바로 선심에 의해 등기(等起)된 것이기 때문이며,
선심은 반드시 세 가지 종류의 선근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업도의 세 과정은 그 상이 어떠한가?
말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불선업도의 세 과정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것[이 바로 선업도의 세 과정]으로서,
악의 가행을 떠날 때가 바로 선의 가행이며,
악의 근본을 떠나는 것이 바로 선의 근본이며,
악의 후기를 떠나는 것이 바로 선의 후기이다.
이를테면 이는 바야흐로 근책(勤策)이 구족계를 받을 때와 같다.
즉 근책이 계단(戒壇)에 들어가 필추중(衆)에게 예배하고, 지극한 말로써 친교사(親敎師)에서 수계를 청하며, 나아가 일백이갈마(一白二羯磨)하는 것 등을 모두 일컬어 선업도의 ‘가행’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3 갈마를 마치는 일찰나 중의 표업과 무표업을 ‘근본업도’라고 하며,42)
이로부터 이후 네 가지 의지처[四依]를 설할 때까지와,43)
그 밖의 전찰나에 근거하여 상속(相續) 수전(隨轉)하는 표업과 무표업을 모두 일컬어,
‘후기’라고 한다.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이 온갖 업도는 모두 세 가지 근으로 말미암아 구경(究竟)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44)
[업도의 구경에 이르는 근]
그렇다면 어떠한 근에 의해 어떠한 업도가 구경에 이르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살생과 추악어와 진에는
모두 ‘진’에 의해 구경에 이르고
투도와 욕사행과 그리고 탐욕은
모두 ‘탐’에 의해 구경에 이른다.
사견은 ‘치’에 의해 구경에 이르고
그 밖의 업도는 세 가지 근에 의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악업도 중의 살생과 추악어와 진에의 업도는 ‘진’에 의해 구경에 이른다.
요컨대 되돌아보는 일 없이 지극히 거칠고 악한 마음이 현전할 때에 이 같은 세 가지 업도가 성취되기 때문이다.45)
모든 불여취와 욕사행과 탐욕의 세 가지 업도는 ‘탐’에 의해 구경에 이른다.
요컨대 되돌아보는 일이 있는 지극히 염오한 마음이 현전할 때에 이 같은 세 가지 업도가 성취되기 때문이다.
사견이 구경에 이르게 되는 것은,
요컨대 우치로 말미암아서이니, 그것은 상품(上品)의 ‘치’가 현전함에 따라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허광어ㆍ이간어ㆍ잡예어의 세 가지 업도는 각기 세 가지 불선근에 의해 구경에 이르는 것이라 인정하니,
탐ㆍ진 등이 현전할 때 각각의 불선근은 능히 이 같은 세 가지 업도를 성취하기 때문이다.
온갖 악업도는 어떠한 처소에서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정과 자구(資具)와 명색(名色)과
명신(名身) 등의 처소에서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은 네 가지 품류의 업도, 즉 세 가지와 세 가지와 한 가지와 세 가지는 그 순서대로 유정 등의 네 가지 처소에서 생겨난다.46)
이를테면 살생 등의 세 가지 업도는 유정처에서 일어난다.47)
투도 등의 세 가지 업도는 온갖 자구[資具,자재와 도구]의 처소에서 일어난다.
오로지 사견 한 가지만은 명색의 처소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허광어 등의 세 가지 업도는 명신(名身) 등의 처소에서 일어난다.48)
가행을 일으켜 결정코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하였지만 죽임을 당하는 이와 함께 죽거나 혹은 그 이전에 먼저 죽었을 경우에도 역시 근본업도의 죄를 획득하는 일이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함께 죽거나 혹은 앞서 죽을 경우
근본업도가 없으니, 소의신이 다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능히 죽이는 자[能殺者]가 죽임을 당하는 자[所殺者]와 동시에 목숨이 끊어지거나 혹은 그보다 먼저 죽었을 경우, 그는 결정코 근본업도를 획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묻고 있는 것이다.
“능히 죽이는 자로서 살생의 가행을 일으키고 그 결과가 원만하게 되었을지라도 혹 그가 살생죄에 저촉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어떠한 경우인가?
능히 죽이는 자가 죽임을 당하는 자와 동시에 목숨이 끊어지거나 혹은 그보다 먼저 죽을 때이다.
어떠한 인연에 의해 그같이 되는 것인가?
죽임을 당하는 자의 목숨이 아직 남아있어 그 같은 능히 죽이는 자로 하여금 살생의 죄를 성취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능히 죽이는 자는 그의 목숨이 이미 끊어져 살생의 죄를 획득할 수 없으니, 다른 소의신(즉 중유신)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살생의 가행의 근거[依止]가 되었던 몸은 지금 이미 단멸하였으며, 비록 그것과 다른 종류의 신동분(身同分)이 생겨났을지라도 그것(중유신)은 살생죄의 근거가 되었던 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일찍이 살생의 가행을 일으킨 몸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살생의 업도를 성취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만약 다수의 사람이 모여 군대를 이루어 원적을 죽이고자 하거나,
혹은 짐승을 사냥하고자 하여 그 중의 한 명이 살생을 행하였을 경우,
어떠한 사람이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군대 등이 만약 다 같이 살생을 도모하였다면
죽인 자와 마찬가지로 모두가 살생의 업도를 성취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군대 등에서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살생을 저질렀다면, 직접 죽인 자와 마찬가지로 일체의 모든 이가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니, 그들은 다 같이 동일한 일을 도모할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
즉 동일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되풀이하여 서로에게 교시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들 중 한 명이 살생을 하면 다른 모든 이들도 살생의 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이의 힘에 핍박되어 거기에 들어갔을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로 인해 같은 마음이 되었다면 역시 살생의 죄를 성취한다.
그러나 만약 [불살생을] 맹서하고 요기(要期)한 자로서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구할 목적으로 거기에 들어갔지만 직접 살생을 행하지 않은 자는 예외이니,
다른 이의 힘에 핍박되어 거기에 들어갔을지라도 살생하려는 마음(즉 가행)이 없었기 때문에 살생의 죄를 획득하지 않는 것이다.
[업도를 성취하는 상]
이제 다음으로 업도를 성취하는 상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살생]
어떠한 근거[量]에 부합하여야 ‘살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며,
내지는 어떠한 근거에 부합하여야 ‘사견’이라고 이름하는 것인가?
바야흐로 먼저 살생의 상에 대해 분별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살생은 고의적인 의지[故思]와 다른 유정과,
다른 유정이라는 생각과 착오 없이 죽임에 의해 성취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살생이란] 요컨대 먼저 죽이려고 하는 고의적인 의지를 일으키고, 다른 유정에 대해, 다른 유정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생의 가행을 짓고, 그리고 착오 없이 죽이는 것―이를테면 오로지 그만을 죽이고 부질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이에 부합하는 업도를 일컬어 살생의 업도라고 한다.
그리고 의심[猶豫]하면서 죽일지라도 역시 살생을 성취한다.
이를테면 그는 먼저 죽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살아있는 것인가, 살아있지 않은 것인가?
만약 살아있는 것이라면 바로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이 아닌가?’하고 마음에 의심을 품는다.
그런 후 ‘만약 그 사람이든 그 사람이 아니든 나는 결정코 죽이리라’라고 결의한다.
그리고는 마음에 되돌아보는 일없이 유정을 죽인다면 이 역시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49)
찰나멸의 온(蘊)에 대해 어떻게 살생의 업도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인가?50)
식풍(息風, 즉 호흡)이 있는 것을 ‘생’이라 이름하니, 심신(心身)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람이나 손이] 등불이나 요령소리를 소멸시키듯이, 이것을 끊어 다시는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살생(殺)’이라고 한다.
혹은 다시 ‘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명근(命根, 즉 목숨)을 말하니, 이것을 끊어 더 이상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살생’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악심으로써 다른 이의 명근을 끊어 일 찰나라도 생상(生相)이 생겨나지 않게 하면, 다른 것(식풍의 단절)이 아닌 바로 이것(명근의 단절)에 의해 살생의 죄에 저촉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끊어지는 명근은 누구에게 소속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를테면 명근이 만약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죽은 자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제6전(轉, 소유격)의 말(즉 ‘누구에게’)로 나타냈으니, ‘나의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파아론(破我論)」 중에서 널리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설하신 게송에서 이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과 체온, 그리고 의식
이 세 가지 법이 몸을 버리게 될 때
그것이 버려진 몸은 나자빠지니
어떠한 생각도 없는 나무둥치와 같다.51)
따라서 유근신(有根身)을 일컬어 명근을 갖는 것이라고 하며,
명근이 없는 이를 ‘죽은 자’라고 이름하니, 그 이치는 결정코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이계자(離繫者)는 말하기를,
“생각 없이 죽이더라도 역시 살생의 죄를 획득하니,
비유컨대 불을 지를 경우, 설혹 일찍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역시 태워 해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5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우연히 남의 아내를 보고 혹 잘못하여 신체를 접촉하였을 경우에도 역시 마땅히 죄를 짓게 될 것이며,
또한 착한 마음을 지닌 자가 이계자의 머리카락을 뽑아 주는 것도,53) 혹은 스승이 자비의 마음에서 고행할 것을 권하는 것도,
혹은 시주(施主)에 의해 베풀어진 숙식(宿食)이 소화되지 않았을 경우에도,
이것들은 모두 다 다른 이를 괴롭게 한 죄를 획득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태아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었을 경우,
어머니와 태아에게는 마땅히 다른 이를 괴롭힌 죄가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죽임을 당하는 자가 이미 ‘죽음’과 화합하였으니,
역시 마땅히 불이 마치 자신의 근거(땔감)를 태우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단지 능히 죽이는 자만이 죄를 획득한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54)
또한 남을 시켜 살생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살생의 죄가 없어야 할 것이니,
이는 마치 어떠한 불도 불과 접촉하게 한 자는 태우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모든 나무 따위도 마땅히 죄에 저촉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집 등이 붕괴될 때 역시 살아있는 것을 해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단지 그 같은 비유만으로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살생에 대해 분별하였으니,
[불여취(不與取)]
이제 마땅히 불여취(不與取)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주지 않은 다른 이의 물건을 취하는 것이란
강제로, 혹은 슬며시 절취하여 자신에 소속시키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살생)에서 설한 ‘착오 없이’라고 하는 말은 그것이 상응하는 바대로 뒤(즉 욕사행)에까지 적용되기 때문에 되풀이하여 설하지 않은 것이다.
즉 요컨대 먼저 훔치려고 하는 고의적인 의지[故思]를 일으키고, 다른 이의 물건에 대해, 다른 이의 물건이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강제로, 혹은 슬며시 훔치려는 도둑질의 가행을 일으켜 착오 없이 취하여 자신에게 소속시키는 것,
이것을 일컬어 ‘불여취의 죄’라고 한다.
그런데 만약 솔도파(窣堵波, stūpa, 탑)의 물건을 훔쳐 취할 경우, 그는 여래에 대한 투도의 죄를 획득하게 되니,
그것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자 할 때 세간을 불쌍히 여겨 그들로부터 시여받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는 설하기를,
“불여취의 죄는 그것을 수호하는 자에 대한 것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주인 없이 숨겨진 곳간(이를테면 땅속의 매장물)을 발굴하여 취하는 경우 국주(國主)에 대해 투도의 죄를 획득하게 된다.
또한 회전물(廻轉物, 즉 죽은 비구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죽은 비구가] 만약 이미 갈마(羯磨)를 지은 자라면 결계(結界) 내의 스님들에 대해 투도의 죄를 획득하게 되지만,
갈마를 아직 성취하지 못한 자라고 한다면 모든 불제자(佛弟子) 들에 대해 투도의 죄를 획득하게 된다.55)
그리고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56)
불여취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욕사행(欲邪行, 사음)]
이제 마땅히 욕사행(欲邪行, 사음)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사행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不應行]을 행하는 것에는 모두 네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이것들을 모두 ‘욕사행의 죄’라고 일컬을 수 있다.
첫째는 행해야 할 대상이 아닌 이[非境]에 대해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다른 이에 의해 섭수(攝受, 보호)되고 있는 처첩이나 혹은 어미, 혹은 아비, 혹은 부모의 친척이나 나아가 왕에 의해 수호되는 자에 대해 행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행해야 할 곳이 아닌 곳[非道]으로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설사 자신의 처라고 할지라도 입이나 그 밖의 다른 곳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57)
셋째는 행해야 할 처소가 아닌 곳[非處]에서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를테면 사원 안에서나 제다(制多), 혹은 형처(逈處)에서 행하는 것을 말한다.58)
넷째는 행해야 할 때가 아닌 때[非時]에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을 행하는 것이다.
행할 때가 아닌 때란 언제를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임신하고 있을 때나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을 때, 재계(齋戒)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설사 자신의 처첩이라 할지라도 역시 욕사행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59)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만약 지아비가 재계받는 것을 허락하여 놓고도 범하였을 경우에 비로소 ‘때가 아닌 때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60)
또한 앞에서 이미 언급한 ‘착오 없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에도 역시 적용된다.
따라서 만약 다른 이의 부인을 바로 자신의 처인 줄 알고,
혹은 자신의 처를 다른 이의 부인이라고 하면서 행해야 할 곳이나 행해야 할 곳이 아닌 곳 따위로 행하였을지라도,
다만 착오로 행하였을 경우에는 업도가 아니다.
그러나 만약 다른 이의 부인에 대해 또 다른 어떤 이의 부인이라고 생각하고서 비범행을 행하였을 경우에는 업도를 성취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성취하니, 그것은 다른 이의 부인에 대해 사음의 가행을 일으킨 것이고 아울러 그것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설하기를,
“성취하지 않으니, 그것은 마치 살생의 업도가 여기서 가행을 일으키고 다른 곳에서 구경에 이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고 하였다.61)
그렇다면 필추니(苾芻尼)에 대해 비범행을 행하는 경우, 누구에 대해 업도를 성취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이는 국왕에 대해 업도를 성취하는 것이니, 그것을 인허(忍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처첩에 대해서도 재계를 받고 있는 동안에는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것이거늘 하물며 출가자에 대해 그러할 것인가?
만약 동녀(童女)에 대해 비범행을 행하였을 경우, 누구에 대해 업도를 성취한다고 해야할 것인가?
이미 다른 이와 [정혼을] 허락한 경우라면 허락한 이에 대해 업도를 성취하게 되지만,
아직 다른 이와 [정혼을] 허락하지 않은 경우라면 능히 그녀의 보호인에 대해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경우든 그 밖의 다른 경우든 모두 국왕에 대해서도 업도를 획득하게 된다.
욕사행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허광어(虛誑語, 거짓말)]
이제 마땅히 허광어(虛誑語, 거짓말)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심에서, 달리 생각하여 발언하고,
그 뜻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 허광어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설해야 할 것에 대해 달리 생각하여 발언하고,62) 아울러 속아넘어가는 자는 그렇게 설해진 말의 뜻을 이해하여 [말한 자의] 염오심과 어긋남이 없을 때 비로소 허광어의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속아넘어가는 자가 아직 그러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이러한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꾸며낸 말, 즉 잡예어(雜穢語, 구역은 無義語)일 뿐이다.
허광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발성된 말이며, 그러한 말은 다수의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어느 때 업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인가?
최후 찰나의 글자와 구생하는 표업으로서의 소리와, 아울러 그것의 무표업이 이러한 허광어의 업도를 성취한다.63)
혹은 어느 때에 따라서는 속아넘어 가는 자가 그 뜻을 이해할 때의 표업과 무표업이 바로 이러한 업도를 성취한다.
그리고 앞의 글자와 함께 작용하는 [표업ㆍ무표업]은 모두 이것의 가행이다.
앞에서 말한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은 결정코 어느 때에 근거한 것인가?
이미 듣고 나서 올바로 이해한 것[正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바로 들으면서 능히 이해한 것[能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한 것인가?6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는 것인가?
만약 ‘이미 듣고 나서 올바로 이해한 것[正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말하였다면, 말에 의해 드러난 뜻은 의식(意識)에 의해 알려진 것이다.
왜냐 하면 그 때 어표업은 이식과 동시에 소멸해 버렸기 때문으로, 이러한 업도는 마땅히 오로지 무표업에 의해서만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다.65)
그러나 만약 ‘바로 들으면서 능히 이해한 것[能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말하였다면 비록 과실은 없을지라도 아직 요지(了知)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바로 듣고있는 것을 능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의 뜻을 잘 이해하는 자는 미란(迷亂)의 인연이 없을 경우 이식(耳識)이 생겨나면 그것을 일컬어 ‘능히 이해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과실이 없는 쪽의 해석을 취하여 마땅히 종의로 삼아야 할 것이다.66)
그런데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온갖 말에는 간략히 열 여섯 가지가 있다.
이를테면 보지 않고[不見], 듣지 않고[不聞], 알지 못하고[不覺], 인식하지 못한 것[不知]에 대해 실제로 보았다는 등으로 말하고,
본 것 등에 대해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등의,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종류의 말을 일컬어 성인이 아닌 이의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지 않은 것 등에 대해 보지 않았다는 등으로 말하고,
본 것 등에 대해 실제로 보았다고 말하는 등의,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종류의 말을 일컬어 성인의 말이라고 한다.”67)
그 무엇을 일컬어 ‘보여진 것’ 등이라고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식ㆍ이식ㆍ의식과 아울러
다른 세 가지 식에 의해 증득된 것을
그 순서대로 일컬어
보고 듣고 인식하고, 아는 것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어떤 대상이 안식(眼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일컬어 ‘보여진 것[所見, dṛṣṭa]’이라 하고,
만약 어떤 대상이 이식(耳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일컬어 ‘들려진 것[所聞, śruta]’이라 하며,
만약 어떤 대상이 의식(意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일컬어 ‘인식된 것[所知, vijñāta]’이라 하며,
만약 어떤 대상이 비식(鼻識)과 설식(舌識) 및 신식(身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일컬어 ‘알려진 것[所覺, mata]’이라고 한다.
그러한 까닭은 향(香)ㆍ미(味)ㆍ촉(觸)의 세 가지는 무기성이기 때문에 죽어 감각[覺]이 없는 상태와 같으며, 그래서 능히 증득한 것에 대해 ‘안다[覺]’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68)
어떠한 논증으로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경증(經證)과 이증(理證)에 의해 그러함을 안다. 경증에 의해 그러함을 안다고 함이란, 이를테면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모(大母,경에서는 摩羅迦舅, Mālunkyā-putta)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그대가 지금 눈으로써 보는 것도 아니며, 그대가 일찍이 본 것도 아니며, 그대가 앞으로 볼 것도 아니며, 보려고 희구한 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욕(欲)을 일으키고, 탐(貪)을 일으키고, 친(親)를 일으키고, 애(愛)를 일으키고, 아뢰야(阿賴耶)를 일으키고, 니연저(尼延底)를 일으키고, 탐착을 일으킨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69)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그렇다면 존재하는 모든 소리로서 그대가 지금 귀로 들은 것도 아니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법(法, 즉 비감각적 대상)으로서 그대가 지금 의근으로써 인식한 것도 아니며, 내지 인식하려고 희구한 것도 아니라면,
그대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욕을 일으키고 내지 탐착을 일으킨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대덕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다시 대모에게 고하기를,
‘그대는 여기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보여진 것[所見]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들려진 것[所聞]ㆍ알려진 것[所知]ㆍ인식된 것[所覺]에는 오로지 들려진 것ㆍ알려진 것ㆍ인식된 것만이 존재할 뿐이다’고 하였다.”70)
즉 이 경에서 이미 색경ㆍ성경ㆍ법경에 대해 보여지는 것ㆍ들려지는 것ㆍ인식되는 것이라고 설하고 있으니,
이에 준거하여 향 등의 세 가지 경계에 대해서는 결정코 ‘알려지는 것’이라는 하나의 명칭으로 총합되어 건립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무엇을 ‘알려지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또한 향ㆍ미ㆍ촉은 ‘보여지는 것’ 등이 아니므로, 그러한 세 가지 대상에 대해서는 마땅히 언급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이니,71) 이것을 일컬어 이증이라 한다.
이러한 논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바야흐로 이 경은 논증의 근거가 되지 않으니, 경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이 경 중에서 세존은 ‘본다[見]’는 등의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상(相)을 결정짓고 구별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다.
이 경에서 설하고자 하였던 뜻을 살펴볼 것 같으면, 부처는 그에게 6경과, 아울러 ‘본다’는 등의 앞서 언급한 네 가지 사실에 대해 그것은 다만 ‘보여지고 [들려지고 인식되고 알려진] 것’이라고 말한 것일 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마땅히 애착하거나 애착하지 않는 등의 상을 증익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권고한 것이다.7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상을 ‘보여진 것’ 등으로 이름하는 것인가?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설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5근이 직접 지각한[現證] 대상이면 그것을 일컬어 ‘보여진 것’이라 하며,
만약 다른 이가 전하여 설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들려진 것’이라 하며,
만약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여 여러 가지의 이치로써 헤아려 인정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알려진 것’이라고 하며,
만약 의근에 의해 직접 지각된 것이면 그것을 일컬어 ‘이해된 것’이라고 한다.
즉 5경 각각에 대해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 네 종류의 언설(개념)이 생겨날 수 있으며,
제6 법경에 대해서는 ‘견’을 제외한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각’이라고 하는 말에도 보는 바가 없지 않으며, 향 등의 세 경계가 언급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따라서 그(비바사사)의 이증의 말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73)
그런데 선대 궤범사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안근에 의해 현견(現見)되는 것을 일컬어 ‘보여진 것’이라 하고,
다른 이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일컬어 ‘들려진 것’이라고 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움직여 구상[思構]한 온갖 것을 일컬어 ‘알려진 것[所覺]’이라고 하며,
스스로 내적으로 감수한 바와 아울러 스스로 증득한 바를 일컬어 ‘인식된 것[所知]’이라고 한다.”74)
바야흐로 이제 방론을 마치고 본론을 펼쳐나가야 할 것이다.
혹 말을 발함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써 생각과는 다른 뜻을 나타내어 허광어를 성취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러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논(論)에서 말하기를,
“혹 몸을 움직이지 않고 살생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말을 발하여 [살생한 경우이다].
혹 말을 발하지 않고 허광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몸을 움직여 [거짓말하는 경우이다].
혹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발하지도 않고서 이 같은 두 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는가?
그런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선인(仙人)이 마음으로 분(憤)을 품고 있거나 포쇄타(布灑他)할 때가 그러하다”고 하였던 것이다.75)
만약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또한 역시 말을 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욕계의 무표로서 표업을 떠난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이러한 두 가지의 경우는 어떻게 업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난문에 대해 마땅히 수고하여 힘써 보아야 할 것이다.
허광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세 가지 어업도(이간ㆍ추악ㆍ잡예어)]
이제 마땅히 그 밖의 세 가지 어업도(이간ㆍ추악ㆍ잡예어)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염오심에서 남을 허물어뜨리려는
말을 설하여 이간어라고 이름하며
좋지 않은 말이 추악어이며
온갖 더러운 말은 잡예어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세 가지 말과는 다른 염오한 말로서
아첨이나 노래, 사론(邪論) 등이 잡예어라고 설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염오심에서 다른 이를 허물어뜨리는 말을 발할 경우, 타인을 허물어뜨리든 허물어뜨리지 않든 이는 모두 이간어(離間語)를 성취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상대방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착오 없이’라고 하는 조건도 여기에 적용된다.76)
만약 염오심에서 좋지 못한 비애(非愛)의 말을 발하여 다른 이를 헐뜯고 욕할 경우, 이를 일컬어 추악어(麤惡語)라고 한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염오심’이라는 말은 여기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며,
따라서 상대방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착오 없이’라고 하는 조건이 적용되는 것도 역시 앞의 경우와 같다.77)
즉 본래 기약한 마음[期心]으로 매도하고자 한 자가 설한 바의 뜻을 이해할 때 [추악어의] 업도는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일체의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온갖 말을 잡예어(雜穢語)라고 이름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염오에 의해 낳아진 말은 모두 ‘더러움으로 뒤섞인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앞에서 언급한 ‘말[語]’라고 하는 말만이 여기에 적용되어야 한다.78)
그런데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허광어 등의 앞의 세 종류의 말(허광어ㆍ이간어ㆍ추악어)과는 다른 것으로서, 그 밖의 모든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말을 잡예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이를테면 아첨이나 노래나 삿된 논의[邪論] 등을 말한다.
여기서 ‘아첨’이란 어떤 필추가 사명(邪命)으로 살아가려고 생각하여 아첨의 말을 발하는 것을 말하고,
‘노래’란 세상 사람들이 염오심으로써 노래를 읊조려 서로 조화[相調]시키고 창기들이 다른 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염오심으로써 온갖 가사와 곡조를 짓는 것을 말하며,
‘삿된 논의’라고 하는 말은 온갖 부정견(不正見)에 의해 주장된 언사를 두루 변설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등’이란 이를테면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비탄이나 세속의 온갖 희론(戱論, 쓸데없는 말장난)의 언사를 말한다.
[요컨대] 염오심에 의해 낳아진 것으로서 앞의 세 종류의 말과는 다른 일체의 말은 모두 잡예어에 해당되는 것이다.”
전륜왕이 출현할 때에도 역시 노래를 읊는 경우가 있는데, 어떻게 이것은 잡예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인가?
그의 말(노래)은 출리(出離)의 마음에서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능히 출리를 인기(引起)하며 염오와는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그 때(전륜왕이 출현할 때)에도 역시 시집가고 장가드는 등의 일에서 비롯된 염오한 말이 있지만 그 허물이 가볍기 때문에 업도를 성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79)
그 밖의 세 가지 말(이간ㆍ추악ㆍ잡예어)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세 가지(애탐ㆍ진에ㆍ사견)]
이제 마땅히 의업의 세 가지(애탐ㆍ진에ㆍ사견)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남의 재물에 대한 사악한 욕심이 탐이며
유정을 미워하는 것이 진에(瞋恚)이며
선악 따위를 부정하는 견해를
일컬어 사견(邪見)의 업도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남의 재물에 대한 사악한 욕심이 탐(貪)이다.
이를테면 남의 재물에 대해 비리(非理)의 욕망을 일으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다른 이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소속시키기 위해 강제로, 혹은 슬그머니 취하려는 마음을 일으켜 다른 이의 재물을 탐착하고 희구하니,
이와 같은 사악한 욕심[惡欲]을 일컬어 ‘탐의 업도’라고 한다.
그런데 유여사는 말하기를,
“욕계의 온갖 애(愛)는 모두 탐의 업도이다”고 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오개경(五蓋經)』 중에서 탐욕개(貪欲蓋)에 의해 부처는 이 세간의 탐을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80) ‘탐’이라고 하는 명칭은 욕계의 ‘애’를 설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욕계의 애를 비록 모두 다 탐이라 이름할 수 있을지라도 그 모두가 업도를 성취한다고는 설할 수 없으니, 이러한 악행 중에는 추품(麤品)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륜왕의 시기와 북구로주에서 일으킨 욕탐은 탐업도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유정류에 대해 증오하고 성내는 것을 진에라고 이름하니,
이를테면 다른 유정에 대해 해코지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증오하고 성내는 것을 ‘진에의 업도’라고 한다.
악견(惡見)으로써 선악 등의 업을 부정하는 이러한 견해를 일컬어 ‘사견의 업도’라고 하니,
예컨대 경에서 “시여도 없고, [그에 따른] 애락(愛樂)도 없고, 제사도 없고, 묘행도 없고, 악행도 없고, 묘ㆍ악행업의 과보인 이숙(異熟)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화생(化生)의 유정도 없고, 세간에 사문 혹은 바라문도, 아라한도 없다”고 설하고 있는 것과 같다.81)
즉 이 경에서는 업을 비방하고 그 과보를 비방하며 현성(賢聖)을 비방하는 것을 사견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게송에서는 처음의 것(즉 선악)만을 열거하였지만, ‘따위’라는 말 속에 뒤의 것(업의 과보와 현성)을 포섭하고 있는 것이다.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