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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경록 제98권
3. 인증장[12]
[화상, 거사, 고승 등의 법]
지공(志公)화상이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의 근원을 단번에 깨치면 보배 광이 열리고
숨음 드러남의 신령한 자취는 참 모습을 내며
혼자 가고 혼자 앉되 늘 뛰어나나니
백억의 화신(化身)은 수량도 없네.
설사 꽉 막혀 허공에 찼다 해도
볼 적에 작은 티끌 모양도 보이지 않으니
우습다 물건이 ≺공≻이라 비교할 것 없고
이에서 뱉는 명주(明珠) 빛이 번쩍거리며
평소에 보고 말을 하되 불가사의하고
한 마디로 종(宗)을 표시하면 그 말 끝에 만난다.
방 거사(龐居士)의 게송에서 말했다.
만법은 마음에서 일어나므로
마음이 생기면 만법이 생기나니
생기고 생김이 끝없이 있으면
오고 가며 억울하게 허탕만 치리라.
도를 닦는 사람에게 말을 전하노니
≺공≻에서는 생기고 존재에선 안 생긴다
만일 이 이치 통달할 수 있으면
꼼짝 않고도 깊은 구덩이서 나오리라.
한산자(漢山子)의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남아 대장부야
일을 짓거든 소홀하게 하지 말라
곧장 철썩 같은 마음 지니어
보리(菩提)의 길을 바로 취하라.
삿된 길은 가서는 안 되며
가게 되면 반드시 모진 고통 있으리라
부처의 과위도 구할 필요 없나니
심왕(心王)인 주인을 알고 취하라.
나찬(懶瓚)화상은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질없이 참 부처를 구하지 말라
참 부처는 볼 수 없는 것
묘한 성품이요 신령한 대[靈臺]거늘
어찌 수련의 영향을 받으랴.
마음 이것은 일 없는 마음이요
얼굴은 어머니가 낳은 얼굴이니
겁의 돌[劫石]은 움직일 수 있지만
이 속에 것은 고치거나 변함이 없네.
나에게 한 마디의 말씀이 있는데
생각이 끊기고 반연을 잊었으며
교묘한 말로도 얻지 못하나니
마음으로써만 전할 뿐이네.
다시 한 마디의 말이 있으니
곧장 일러 주는 것만 못하며
털끝보다도 가늘고
크기는 방소가 없어
본래부터 뚜렷이 이루어져서
아무런 손질을 빌리지 않네.
등등(騰騰)화상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도를 닦되 도는 닦을 것이 없고
법을 묻되 법은 물을 것이 없다
미혹한 사람은 물질과 ≺공≻을 모르지만
깨달은 이에겐 본래 거슬림과 좇음이 없네.
8만 4천 가지 법문의
지극한 이치가 마음에 있나니
번뇌 그것은 바로 보리요
깨끗한 꽃은 흙탕에서 난다
자기 집 성읍(城邑)을 알려 할지언정
부질없이 딴 고을을 쏘다니지 말라.
고승(高僧) 석법희(釋法喜)가 임종(臨終) 때에 대중에게 이르기를,
“3계(界)는 허망하며 이 한 마음일 뿐이다”고 하고, 단정히 앉아서 갔다.
고승 석영윤(釋靈潤)이 이르되,
“바깥 대경의 삿된 고집을 버리고 뜻 속 말의 분별[意言分別]을 얻으며, 유식(唯識)의 생각을 버리고 참된 법계를 얻을지니,
먼저 모양 없음을 관하여 바깥 대경의 모양을 버리고 나중에 생김 없음을 관하여 유식의 생각을 버리라”고 했다.
또, 일찍이 도반(道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 유람하고 있었는데, 들에서 난 불이 사방으로 타 들어오자 다른 이들은 다 흩어지며 달아났지마는 영윤스님만은 편안히 가는 것이 마치 늘 다니던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여러 권속들에게 말하기를,
“마음 밖에는 불이 없고 불은 실로 자기의 마음이다. 불에서 도망할 수는 있으나 불을 면하려 할 것은 없나니, 불은 습기 있는데 이르면 저절로 사그라지느니라”고 했다.
고승 석법공(釋法空)은 오대산(五臺山)의 깊숙한 데로 들어가 살면서 매양 청아한 소리로 부르기를, ‘공선(空禪)아’ 하였는데, 이렇게 하기를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 뒤부터 법공은 그것이 자기 마음의 경계임을 알고 법을 버려 없애자 마침내 편안하고 고요하여졌다. 처음은 선(禪)으로써 닦고 나중에는 대경의 장애를 다스리다가 드디어는 대승을 배워 모양을 여의었고, 따라 배우는 이들에게도 다 같이 이로써 가르쳤으며, 법으로써 친한 이를 삼고 법으로써 벗을 삼았다.
고승 석정매(釋靖邁)는 임종할 때에 이르기를,
“마음은 도(道)의 밖이 아니고 행은 말 앞에 있도다” 하고,
말을 마치자마자 앉아서 갔다.
고승 석통달(釋通達)은, 나무로 흙덩이를 때리다가 흙덩이가 부서지면서 형상이 소멸되는 이런 변화를 보고서 탁 틔어 마음의 자취를 크게 깨쳤다.
고승 석전명(釋轉明)은, 무릇 묻는 학자(學者)가 있으면 언제나 평등한 마음일 뿐인 한 법에 뜻을 두어서 받들게 했다.
고승 석도영(釋道英)은, 물에 들어가거나 눈 위에 누워 있으면서도 추워하는 고통이 없었고 이렇게 일을 따라 법으로 대(對)하면서 마음대로 자재하였으나 고난으로 여기지 아니했다.
진실로 유식의 뜻으로 말미암아 마음 속을 환히 꿰뚫어 알았거늘, 바깥일인 물질이 어찌 장애가 되었겠는가?
기신론(起信論)을 강하다가 심진여문(心眞如門)의 대목에 이르자 갑작스럽게 정(定)에 들었다.
고승 석도세(釋道世)가 이르되,
“부지런하고 용맹스럽게 참회하는 이는 비록 도리에 의지할 줄은 알았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마음의 허망한 동요임을 알고 앞의 경계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
경에서 이르되,
‘마치 고운 비단 천 근(斤)이라도 진금 한 량(兩)보다는 못하다’고 했나니,
마음을 힘써 관하는 것이 곧 죄를 힘써 소멸시킨다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고 했다.
복타(伏陁)선사가 이르되,
“교(敎)를 빌려서 종(宗)을 밝히되, 종생은 동일한 참 성품이요 범부와 성인은 한 길이라는 것을 깊이 믿고 굳게 머물러 옮아가지 않으면서 다른 교법을 따르지 아니하면, 도(道)와 더불어 명합되고 고요하여지면서 함이 없어지리니, 진리에 든 것이라고 한다”고 했다.
고승 석지통(釋智通)이 이르되,
“만일 대승을 찾고 가까이하면서 바른 관(觀)을 닦는 이가 작은 티끌만큼의 본제(本際)를 살피고 한 생각의 첫 근원을 헤아린다면 문득 가시나무가 무상하다는 음성을 퍼뜨리고 올빼미가 심히 깊은 법을 설할 수 있으리니, 시방의 정토도 반드시 여기서는 더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고승 석담수(釋曇遂)가 늘 말하기를,
“삼계는 허망하고 이 한 마음일 뿐이다. 바깥 경계를 따라 구하면 아직 깨치지도 못하고 쉬기도 어려우리라”고 했다.
고승 해탈(解脫)화상은 화엄(華嚴)에 의하여 불광관(佛光觀)을 짓고 있는데, 청명한 달밤에 광명 가운데서 갑자기 변화한 부처님이 나타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처님들 비밀하고 심히 깊은 법을
오랜 겁에 수행타가 이제야 얻었나니
사람이 이 법문을 열고 밝힌다면
온갖 부처님들 모두 따라 기뻐하리라.
해탈화상은 예배하고는 물었다.
“이 법문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겠나이까?”
변화한 부처님은 마침내 몸을 숨기며 보이지 않으면서 공중에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방편의 지혜로 등불을 삼아
마음의 경계를 비추어 보나니
진실한 법을 알고자 하면
온갖 것이 보이는 바 없을 것이다.
태원(太原)화상이 이르되,
“무릇 발심하여 도에 들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본 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자기의 본 마음을 알지 못하면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나니, 사자왕이 아니다.
선지식이 곧장 마음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지금 말을 하는 것이 너의 마음이니, 거동하고 하는 일이 이 누구겠느냐?
이것을 제외하면 다시는 따로 마음이 없다. 만일 따로 있다고 한다면 마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머리를 찾는 것과 같다.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청정함을 믿으면 곧 참 모습[實相]이 생긴다’고 했다.
또 경에서 이르되,
‘의지함 없는 이것이 부처의 어머니요 부처는 없는 곳에서 생긴다’고 했다”고 했다.
천황(天皇) 화상이 이르되,
“지금의 몸과 마음 그대로가 성품일 뿐이니, 몸과 마음은 얻을 수도 없고 곧 삼계도 얻을 수가 없다. 또한 성품이 있고 성품이 없음은 모두 다 얻을 수 없으며 부처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스승도 없고 제자도 없나니, 마음도 ≺공≻하고 삼계도 모두 ≺공≻하다.
요점을 들어 말하건대, 삼계의 안팎에서부터 개미의 꿈틀거리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하나의 티끌 안에 있으며, 저것과 이것들이 모두 다 같다. 하나하나가 다 그와 같되 저마다 서로가 방애하지 아니하며, 온갖 법문의 천 가지 만 종류가 다만 성품 보는 것만을 밝혔을 뿐이요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다”고 했다.
흥선(興善)화상이 이르되,
“위로부터 조사와 부처가 서로 하나의 마음을 전하였고 마음으로써 마음에 인(印)을 찍은 것이요 그 밖의 법은 전하지 않았다.
초조(初祖)가 곧장 말한 것은, 마치 용이 물을 토하면 나라에 이르고, 나루가 가득 차면 강물에 이르고, 이리하여 큰 바다까지 이르게 됨과 같나니, 용은 바로 물의 근원이다.
지금 이후의 학인들은 한 마음의 법을 서로서로 전하는 것 이것이 다 간요(簡要)한 설명임을 알면서, 마음이라 할적에는 따로 부처를 찾지 말 것이요 부처일 때에는 마음을 구하지 말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자기 마음이 부처인 줄 믿는다면 이 사람의 온갖 하는 말은 법 바퀴를 굴리는 것이요 ,만일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믿지 않는다면 이 사람의 온갖 하는 말은 다 방등(方等)의 대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되,
‘성품 밖에서 보리를 얻는데 마치 모래를 짜며 기름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했나니,
이것이 기름이 되는 바른 인[正因]이 아니다”고 했다.
옹(顒)선사가 문답을 두면서,
“물었다.
‘열반경(涅槃經)에서 ≺중생이 곧 불성이요 불성이 곧 중생이다≻고 하셨는데, 시기를 달리하므로써 청정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을 뿐이다. 비정(非情)도 역시 중생인가?’
대답했다.
‘경에 이르되, 문수가 금색녀(金色女)에게 물었다.
≺그대 몸에도 5음(陰)ㆍ12입(入)ㆍ18계(界)가 있는가? >
여인이 대답했다.
≺나의 몸에도 5음ㆍ12입ㆍ18계가 있습니다≻고 했다.
범망경(梵網經)에서 이르되,
≺온갖 땅과 물은 바로 나의 전생 몸이요, 온갖 불과 바람은 바로 나의 본체다≻고 했다.
또 의보(依報)ㆍ정보(正報)의 두 몸은 서로서로가 의지하여 성립된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되,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이것이 곧 부처의 참 본체다≻고 했고,
경에서는,
≺만일 신령한 지혜의 마음 이것이 항상 한 물질이요, 이것이 망그러지는 무상한 것이다고 헤아리면 곧 외도의 단견(斷見)ㆍ상견(常見)이다≻고 했다.
화엄에서도,
≺중생 경계가 곧 부처의 경계요 부처의 경계가 곧 법 경계이니, 법 경계 이외에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만법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그 본체는 언제나 같다.
만일 같아지는 체성과 작용에서 헷갈리지 아니하면 항상 둘이 없나니, 둘이 없다는 종지는 대개 세간을 벗어나는 요긴한 나루이어서 한 생각과 상응하여 범부와 동떨어지지 않고 성인이 된다’”고 했다.
와륜(臥輪)선사가 이르되,
“그 심성을 살피건대 잔잔하기 마치 허공과 같아서 본래 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않거늘, 어찌 거두며 누르겠는가?
다만 마음이 일어나는 것만을 깨달아서 곧 안을 향하여 마음 근원을 도리켜 비추어라. 근본도 없고 곧 나는 데도 없으며 나는 데가 없기 때문에 곧 고요하여져서 모양도 없고 함도 없다”고 했다.
남천(南泉)화상이 이르되,
“연등불(燃燈佛)도 말씀하여 마쳤다. 만일 마음으로 생각하여 모든 법을 출생하는 것이라면 거짓이 합치고 모인 것이라 그것은 다 진실하지 않다. 왜냐 하면, 마음조차도 없나니 어디서 출생하겠는가?
만일 모든 법을 취한다면 마치 허공을 분별하는 것과 같고 마치 사람이 소리를 가져다 상자 안에다 놓아두는 것과도 같으며 마치 그물에다 공기를 가득차게 하려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
또 이르되,
“지금에 일여(一如)의 이치만을 알아 곧장 수행하여라”고 했고
또 이르되,
“한량없는 겁 동안에 성품은 변하지 않았던 것만을 알라. 그것이 곧 수행이니라”고 했다.
분주(汾州) 무업(無業)화상이, 처음마조(馬祖)에게 물었다.
“3승의 지극한 이치를 대강이나마 연구도 하다가 늘 선사의 ‘마음이 바로 부처다’고 함을 듣고는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원컨대 지시하여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곧 그대의 알지 못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요 다시는 다른 물건이 없다. 알지 못했을 때는 미혹된 것이요 알았을 때에는 깨친 것이니, 역시 손이 주먹이 되고 주먹이 손이 되는 것과 같느니라.”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와서 은밀하게 전한 심인(心印)입니까?”
“대덕이여, 지금은 시끄러우니 잠시 갔다가 다른 때에 오라”고 하였으므로,
한 발을 문지방에 막 걸치는데 조사가 말했다.
“대덕이여, 얼른 머리를 돌려 보라”고 하고는,
조사가 “이것이 무엇인가”고 하자,
마침내 크게 환히 깨쳤다.
도제(徒弟)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사께서 이 땅에 와서 중생들을 관찰했더니 대승의 근성이 있었으므로 오직 심인만을 전하여 그대들 여러 사람의 헷갈려 있는 뜻에 도장을 친 것이다.
그것을 얻었다면 범부와 성인이니 어리석다거나 지혜롭다고 논하지 않겠지만, 많이 빈 것은 적게 찬 것만은 못하다.
대장부들아, 곧장 쉬어버리는 것이 좋느니라. 단번에 만 가지 인연을 쉬면, 생사의 흐름이 끊어져서 통상의 격식을 멀리 벗어나 신령한 광명이 홀로 비추고 물건들에 구애 받지 아니하며 우뚝 뛰어나 당당하게 3계를 홀로 거닐겠거늘, 하필 키가 한 길 여섯 자가 되어 자마(紫磨) 금빛으로 빛나고 목에 원광(圓光)을 차며 혀 몸매가 길고 넓을 것이 있겠는가?
만일 빛깔로 나를 본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설사 권속의 장엄이 있다 해도 구하지 않는데 저절로 이른 것이며, 산하(山河)ㆍ대지(大地)는 눈빛을 장애하지 않고 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쳐서 큰 총지(摠持)를 얻으리라”고 했다.
또 임종 때에 대중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의 보고 듣고 알고 깨닫는 성품은 허공과 수명이 같다.
마치 금강과 같아서 파괴할 수 없지만, 온갖 모든 법은 그림자와 같고 메아리와 같아서 진실한 것이 없다.
경에서 이르되,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이요 나머지 둘은 곧 진실이 아니다’고 했다”고 하고, 말을 마치면서 갑작스럽게 갔다.
진각(眞覺)대사가 이르되,
“무릇 심성은 신령하게 통하여 움직임과 고요함의 근원은 둘이 없으며,
진여는 생각이 끊어져서 반연하거나 헤아리는 생각이 다르지 않다.
미혹된 소견이 분주히 내달리나 끝가지 추궁하면 하나의 고요함 뿐이요,
신령스런 근원은 형상이 아니나 그를 비추면 천 가지로 차별된다.
천 가지 차별이 같지 않으므로 법안(法眼)이란 이름이 저절로 붙여지고,
하나의 고요함은 다른 것이 아니므로 혜안(慧眼)이란 이름이 있게 되며,
이(理)와 양(量)이 함께 사라지므로 불안(佛眼)의 공덕이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이치[三諦]가 한 경계이어서 법신의 이치는 항상 청정하고,
세 가지 지혜[三智]가 한 마음이므로 반야의 광명이 항상 비치며,
경계와 지혜가 명합하므로 해탈의 감응이 근기를 따르고 세로도 아니고 가로도 아니므로 원이(圓伊)의 도가 현묘하게 모인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다. 세 가지 덕[三德]의 묘한 성품이 뚜렷하여 어긋남이 없고, 한 마음이 깊고 넓어서 생각하기 어렵거늘 어찌 벗어남에서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에 즉(卽)하여 도를 구하는 이는 흐름을 찾아 근원을 얻는 것이라 하겠다”고 했다.
신수(神秀)화상이 이르되,
“온갖 비정(非情)은 이 마음이 똑같이 나타나기 때문이요,
더러움과 깨끗함은 마음을 따라 바뀜이 있기 때문이요,
그 밖의 성품은 반드시 연(緣)에 의지하여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모두 제 성품이 없는지라 ≺공≻과 존재[有]가 함께하지 아니한다.
곧 유정(有情)이 막 있을 때에는 비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이요 다른 것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다른 것의 성품이 없는 것을 자기가 만들었기 때문이니, 곧 유정이 닦고 증득하는 이것은 비정의 닦고 증득한 것이다.
경에 이르되, ‘그 몸은 두루하고 평등하여 참된 법계이다’고 했나니, 이미 법계가 평등하면 비정의 문은 ≺공≻이로되 이것은 부처이기 때문이다.
또 비정이 막 있을 때는 유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이요 자기는 곧 다른 이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자기의 성품 없는 것을 다른 것이 만들었기 때문이니, 곧 비정의 닦음도 없고 증득도 없는 이것은 유정의 닦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 것이다.
선재(善財)가 누각을 보았을 적에 법계에 두루한지라 유정의 문은 ≺공≻이로되 완전한 하나의 누각이기 때문이다.
경에 이르되,
‘중생이 온갖 세계를 어기지 아니하고 세계도 모든 중생을 어기지 아니한다’고 했나니,
비록 있고 없음이 때를 같이한다고 말하나 모양을 나누면 이것이 있다”고 했다.
수조(隋朝) 명(命)대사의 융심론(融心論)에 이르되,
“원만한 근기가 교(敎)를 대하면 교마다 원만하지 아니함이 없고 본체[理]의 마음이 현상[事]을 간섭하면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다.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거늘 어찌하여 산란하면서 안정되지 아니하겠는가?
산란함마다 안정되지 아니함이 없다면 안정됨과 산란함이 둘 다 없어지고, 현상마다 본체 아님이 없기 때문에 현상과 본체는 다 함께 끊어진다.
또한, 비록 두 치우침을 여읜다 하더라도 치우침이 있어서 여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은 4구(句)가 없어지므로 실로 글귀로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곳은 그윽하고 오묘하여 마음이 융화(融和)해야 알 수 있다.
만일 마음으로써 마음이 융화하면 마음이 융화한 것 아니니, 마음은 언제나 여실(如實)하거늘, 어찌 융화할 바리요, 실로 마음이라 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융화함을 말하는 것이다”고 했다.
지달(智達)선사의 심경송(心境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계가 성립되면 마음이 문득 있고
마음이 없으면 경계가 안 생긴다
만일 마음으로 경계 얽어맨다면
마음과 경계는 둘 다 장님된다.
경계와 마음이 제 각기 머무르면
마음과 경계 성품 언제나 청정하며
경계 깨치면 마음 일어남 없고
마음 헷갈리면 경계 함께 행하여진다.
만일 헷갈리면 마음이 경계지어
마음과 경계는 제멋대로 산란하며
경계를 깨치면 마음 원래 청정하여
마음과 경계 본래가 청정함을 알리라.
마음을 알게 되면 경계 성품이 없고
경계를 환히 알면 마음에 형상 없다
경계 비면 마음이 고요하디 고요하고
마음으로 비추면 경계는 차디차다.
감천(甘泉)화상이 이르되,
“무릇 발심하여 도에 들고자 하면 먼저 자기의 본심을 알아야 하나니, 마음이란 만법과 중생의 근본이요 삼세의 모든 부처님ㆍ조사와 12부경(部經)의 종(宗)이다.
비록 관찰할 때 그의 형상을 보지는 못하나 응용이 자재하고 하는 일마다 걸림이 없으며 환히 꿰뚫리어 분명하고 또렷또렷하여 다름이 없다.
만일 알지 못한 이면 믿음으로 우선을 삼을지니, 믿는다면 무엇을 믿는가? 마음 이것이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비롯함이 없는 무명(無明)으로 바퀴 돌 듯 생사하면서 4생(生)과 6도(道)에 갖가지 형상을 받는 것은 다만 자기 마음만이 부처임을 감히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마음을 알면 마음 밖에는 다시는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는 따로 마음이 없다.
또한 거동하고 하는 일이 다시 누구이겠는가? 이 마음을 제외하면 다시는 따로의 마음이 없다.
만일 따로 있다고 한다면 그대들은 곧 연야달다(演若達多)로서 머리를 가지고 머리를 찾는 것과도 같으리라. 천경만론(千經萬論)이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서 연유함일 뿐이지만,
만일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분명히 안다면 온갖 것이 임시로 붙인 거짓 이름뿐이거늘 하물며 다시 3유(有)가 있겠는가?
곧 밝은 거울은 얼굴을 비출 수 있고 대승은 마음을 환히 나타낼 수 있다”고 했다.
또 이르되,
“경전을 구하고 부처를 찾는 것은 진리로 마음을 살피는 것보다는 못하다.
만일 자기 마음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다고 살필 수 있으면, 본래부터 스스로 있는 것을 닦을 필요도 없으며 경전으로 인하여 얻지 않거늘 어찌하여 알게 되겠는가?
경에 이르되,
‘수다라교(修多羅敎)는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고 했나니,
만일 달을 보았다면 가리킨 바를 분명히 안 것이다.
만일 이렇게 알았다면 한생각과 상응하여 곧 부처라고 한다”고 했다.
보안(普眼)대사가 이르되,
“큰 도[大道]는 공허하고 넓되 하나의 참 마음일 뿐이니, 선이나 악이나 생각치 말라.
신령하고 맑아 물건으로서 표시되거늘 다시 무엇을 근심하랴”고 했다.
위산(潙山)화상이 이르되,
“안팎의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변화로 생기며 그것은 다 임시 붙인 이름인 줄 알아서 그의 법 성품에 맡겨 두루 흐르면서 끊지도 말고 잇지도 말라”고 했다.
임제(臨濟)화상이 이르되,
“지금의 여러분은 옛 성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으며, 그대들은 또한 어떤 것이 모자라겠는가?
6도(道)의 신령한 빛은 일찍이 쉬었다 일어났다 함이 없다. 만일 이러할 수 있으면 이것은 일생 동안 일이 없는 사람일 뿐이다.
조사와 부처와 구별되지 않으려면 바깥을 향해 내닫거나 구하지만 말라.
그대들의 한 생각의 청정한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법신불이요,
그대들의 한 생각의 분별이 없는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보신불이여,
그대들의 한 생각의 차별된 빛은 바로 그대 집 속의 화신불이니,
이 세 가지 몸 그것이 곧 오늘 눈앞에서 법을 듣는 사람이다.
이 세 가지가 바로 명목[名]과 언구[言]이며, 분명히 아는 이것이 빛[光]과 그림자[影]이다.
대덕들이여, 반드시 빛과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모든 부처의 근원이요 이것이 온갖 도 무리의 돌아갈 집이다.
그대의 4대(大)ㆍ6근(根)과 허공은 법을 듣거나 법을 설할 줄 모른다.
이것이 무슨 물건이겠는가? 뚜렷한 자리에서 외로이 밝으면서도 모양이 없는 이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그런 까닭에,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5음인 몸 밭 안을 향하면 무위 진인(無爲眞人)이 있다. 당당하게 드러나서 실 터럭만큼도 사이가 없거늘 어찌 알지 못하는가?
대덕들이여, 마음의 법은 형상이 없되 10방을 꿰뚫으며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나니, 본래 이는 하나의 정밀한 광명이로되 분류하면 여섯 가지로 화합을 이룬다.
마음이 만일 나지 아니하면 어느 곳이나 해탈이니라”고 했다.
관계(灌溪)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5음 산중의 옛 불당(佛堂)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가 밤낮 원만한 빛을 낸다
이 속을 환히 알면 같음과 다름도 아니어서
이것이 곧 화엄(華嚴)의 변시방(遍十方)이니라.
석두(石頭)화상이 이르되,
“그대들 마음의 본체는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항상한 것도 아니다. 성품은 더럽거나 청정한 것도 아니고 잔잔하여 원만하며 범부와 성인에게도 똑같고 응용에는 끝이 없나니, 3계(界)와 여섯 갈래가 자기 마음으로 나타날 뿐이요 물 속의 달과 거울 속의 형상에 생멸이 있겠는가?
그대들이 그를 알 수 있으면 구비하지 않는 바가 없다.
모든 성인들이 인간에 오셔서 모범을 드리우고 널리 근거 없는 말들을 진술한 까닭은, 대개가 법신의 본래 고요함을 나타내어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려 할 뿐이니라”고 했다.
황벽(黃蘗)화상이 이르되,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한 마음을 전한 것은 곧장 모든 중생의 마음이 본래 부처임을 가리킨 것이니, 수행을 빌릴 것도 없고 다만 이제 자기 마음을 알고 자기 본래 성품을 볼 뿐이요 따로 법을 구하지 말 것이다.
어떻게 자기 마음 그대로가 여(如)임을 알 것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다. 만일 말을 하지 아니하면 작용하지도 아니한다.
마음의 본체는 마치 허공과 같아서 실로 모양이 없고 또한 방소도 없으며 또한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을 뿐이다“고 했다.
또 이르되,
“한 마음만을 깨치면 다시는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으며 이것이 곧 참 부처이다.
부처와 중생의 한 마음은 다른 것이 없나니, 이 말 끝에 스스로가 본래 법을 인정한 것이 더 낫다.
이 법이 곧 마음이요 마음 밖에는 법이 없고, 이 마음이 곧 법이요 법 밖에는 마음이 없다”고 했다.
단하(丹霞)화상이 이르되,
“그대들이 보호하고 있는 한 신령한 물건은 그대들이 조작하여 얻은 것도 아니고 그대들이 기록하여 아득하게 얻은 것도 아니다.
우리의 이 자리는 부처도 없고 열반도 없으며 닦아야 할 도도 없고 증득해야 할 법도 없다.
도는 있고 없음에 속하지 않거늘 다시 무슨 법을 닦겠는가?
이것만이요 그 밖의 광명이 있는 곳이면 그것이 큰 도니라”고 했다.
수료(水潦)화상이 이르되,
“만일 하나의 법을 말한다면, 10방의 부처님들께서 하나의 법 안에 거두어 들고 백천 가지 묘한 문은 한 털끝 위에 있으며 천 성인이 같은 길이어서 결정코 구별되지 아니하고 10방을 널리 비춤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나니,
마음 자리가 밝아지면 온갖 일이 모두 다 간파(看破)된다. 위로부터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이니, 본래의 마음 이것이 곧 법이다”고 했다.
앙산(仰山)화상이 이르되,
“자기 마음이 모양이 없어 마치 허공과 같음을 단번에 깨치고는 그 근원에 붙여 밝혀 내라.
곧 본래 마음은 항하 모래만큼 많은 묘한 작용을 갖추어서 따로 지니는 바도 없고 따로 벌려 선 것도 없으며 그것이 본래의 자리요 그것이 본래 땅이다”고 했다.
대전(大顚)화상이 이르되,
“노승이 왕년에 석두(石頭)화상을 뵈었더니 물었다.
‘무엇이 그대의 마음인가?’
대답하기를
‘말하는 이 놈입니다.’
선사가 할(喝)을 하여 내쫓으므로, 며칠 지난 뒤에 도리어 물었다.
‘먼저번에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면 이것을 제외하고 어느 것이 이 마음입니까?’
‘양미동목(揚眉動目)의 온갖 일을 제외하고 곧장 마음을 가져 오너라.’
‘가져 올 만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대가 먼저 와서는 마음이 있다더니, 어찌 하여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고, 마음이 없다면 모두 비방하는 것이니라’고 하시기에,
나는 이때 이 말 끝에 크게 깨치고서 곧 대답하기를,
‘저로 하여금 양미동목의 온갖 일을 없애게 하셨으므로 화상께서도 없애버려야 하십니다.’
‘나는 이미 없애버렸느니라.’
‘화상에게 가져다 보였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가져다 보인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화상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의 일과는 상관없느니라.’
‘본래 물건이 없는 것입니까?’
‘그대에게도 물건이 없느니라.’
‘이미 물건이 없다면 곧 참된 물건입니다.’
‘참된 물건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니, 그대 마음의 현량(現量)의 뜻은 그와 같느니라. 모름지기 크게 수호하고 지녀야 하느니라’고 했다”고 했다.
삼평(三平)화상의 게송에서 말했다.
보고 듣는 것은 보고 듣는 것 아니요
그대에게 바칠 수 있는 다른 성색(聲色)도 없다
이 속에서 만일 알면 모두 일이 없나니
체성과 작용은 나눔과 나누지 않음에 방해함 없다.
또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고 듣고 알고 깨달음은 본래 인(因)이 아니요
그 체성 오묘하여 허망과 진실 끊어졌고
모양 보며 어리석은 탐애 내지 아니하면
환히 밝아 이는 완전히 석가의 몸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