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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7권
3. 변차별품③
3.6.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2]
4) 무상과(無想果)
이미 동분에 대해 분별하였다.
무상(無想)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상(無想)이란 무상천(天) 중에서
심ㆍ심소법이 소멸한 것으로
이숙과이며, 광과천(廣果天)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색계 제4선의 제3천인 광과천) 중에 태어나면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니, 이것을 일컬어 무상(無想)이라고 한다.
이것은 실유의 존재[實有物] 즉 실체로서 능히 미래의 심ㆍ심소법을 차단하여 잠시 생기하지 않게 하니, 마치 강물을 막는 방죽과도 같다.
이러한 법은 한결같이 바로 무상정(無想定)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異熟果)이다.
즉 그러한 무상유정천 중의 무상이나 색은 오로지 바로 이러한 무상정에 의해 초래된 이숙과이지만, 이러한 선정은 중동분이나 명근(命根)을 능히 인기(引起)할 수 없다.
중동분이나 명근은 오로지 유심(有心)의 제4정려에 의해 초래되는 이숙과로서, 그곳에서의 그 밖의 나머지 온도 바로 같은 이숙과이다.
그리고 무상유정천 중에 태어나더라도 무상에 들기 전과 무상에서 나온 후는 다시(多時)에 걸쳐 유심(有心)이지만, [그 중간의] 무심의 상태가 지극히 길기 때문에 무상천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33)
그렇다면 무상의 유정은 어떠한 처소에 거주하는 것인가?
광과천(廣果天)에 거주한다. 이를테면 광과천 중에는 중간정려의 그것처럼 높고 뛰어난 곳[高勝處]이 있으니, 이것을 무상천이라고 이름한 것이다.34) 그들(무상천의 유정)은 업이 낳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임지식(任持食,무상과를 지녀 지속하게 하는 힘)으로 삼는다. 즉 숙업에 의해 중동분이나 명근 등을 인기하는 것으로, 속생(續生)의 마음과, 무간에 무상과로 들어가는 마음이 견인(牽引)하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에도 역시 과거의 촉 등은 존재하여 임지식이 된다. 다시 말해 무심의 상태 중에서는 오로지 과거의 촉 등이 존재하여 식(食)이 되지만, 현재의 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유심의 상태 중에서는 두 종류가 함께 존재한다.
나아가 그곳의 온갖 유정은 상(想)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곳에서 몰(歿)하게 되며, 이미 몰하였으면 결정코 욕계에 태어나지 그 밖의 다른 처소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찍이 [욕계에서] 닦은 정행(定行,즉 무상정)에 의해 초래된 수명의 양이 그 세력을 다하였기 때문이며,
그곳(무상천)에서는 능히 다시 선정을 닦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허공으로 발사된 화살은 그 힘이 다하면 바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만약 온갖 유정으로서 마땅히 그곳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욕계의 순후수업(順後受業)을 지녀야 하니,
이는 마치 그러한 북구로주(北俱盧洲)에 태어나는 자는 반드시 하늘(즉 6欲天)에 태어나는 업을 지녀야 하는 것과 같다.35)
5) 무상정(無想定)
무상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두 가지 정(定)이란 무엇인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이 바로 그것이다.
앞의 무상정의 경우 그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와 마찬가지인 무상정은
최후의 정려로서,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며
선이며, 오로지 순생수업(順生受業)이며
성자의 것이 아니며, 일세(一世)의 그것만을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하였듯이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무상(無想)이라고 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시 별도의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일컬어 무상정(無想定)이라고 한다.
즉 [본송에서] ‘이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오로지 심과 심소를 소멸하는 이러한 선정이 무상[과]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성취하여 갖춘 것[成辦]이기 때문에,36) 혹은 지극히 잘 성취하여 갖춘 것이기 때문에 ‘정(定)’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유여사는 설하기를,
“참답고 평등하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이라고 이름한 것이니, 마음이 대종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행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무상자(無想者)의 선정이기 때문에 ‘무상정’이라고 이름하였다.
혹은 선정이 무상(無想)이기에 ‘무상정’이라 이름하였으니,37) 상(想)을 염괴(厭壞)함에 따라 이러한 선정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이생은 수(受)에 대해서는 능히 염괴하지 않으니, ‘수’에 탐착함으로써 이러한 선정에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상정은 어떠한 지(地)에 존재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최후의 정려 즉 제4정려에 존재하는 것으로, 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38)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본송에서]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선정은 능히 무상의 이숙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즉 이미 [무상정의 이숙과인] 무상의 유정이 광과천에 거주한다고 설하였으니, 응당 광과천이 최후의 정려에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면 어찌 다른 지에서 그 원인(즉 무상정)을 닦는다고 하겠는가?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일찍이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어떤 곳에서도 무상정이 무상과의 원인이 된다고는 설하지 않았다.
앞의 본송에서 ‘무상이란 이숙과이다’라고 어찌 설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것을 해석하면서도 무상정의 결과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 역시 그렇지 않다.
일찍이 어떤 ‘본송’에서도 이와 같은 설(무상정이 무상과의 이숙인이라는 설)을 지은 적이 없으므로 지금 설하여 바로 성취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선정을 이생의 선정[異生定]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해탈을 추구하여 이러한 선정을 닦고자 하기 때문이다.
곧 그들은 무상(無想)이 바로 참된 해탈이라고 주장하고, 무상정을 출리도(出離道)라고 주장하여 무상을 증득하기 위해 이러한 선정을 닦는 것이다.
그러나 일체의 성자는 이 같은 유루에 집착하여 그것을 참된 해탈이나 참된 출리도로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선정을 ‘이생의 선정[異生定]’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무상[과]는 바로 이숙과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무기성에 포섭된다는 사실은 논설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무상정은 한결같이 선이다.
이것은 바로 이숙인이기 때문에, 선성(善性)에 포섭된다는 사실을 설하지 않더라도 어찌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가?
이것은 무상유정천(광과천의 무상과)에 대해 원인이 되어 능히 5온의 이숙을 초래하는 것이다.39)
그렇지가 않으니,
본송 중에서는 [이것이 바로 무상유정천의 이숙인이라는 사실을] 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염오무기를 누가 다시 능히 부정할 것인가?4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본송)서 마땅히 ‘순전히 선[純善]’이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가 않으니,
말을 떠나 뜻을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으로, 이것은 마땅히 앞에서 설한 이생성에 준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다.41)
혹은 오로지 선이라고만 말하면, 이미 다른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정이 이미 이숙인이라고 하였으니, [그 과보는] 어떠한 수(受)에 따르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언제 그 과보를 받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오로지 순생수(順生受)일 뿐으로, 순현수(順現受)나 순후수(順後受), 순부정수(順不定受)가 아니다.42)
그런데 어떤 부류의 여러 논사들은 이러한 선정에 대해 주장하기를,
“이치상으로 볼 때 순생수와 부정수이다”고 하였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선정을 성취하는 자도 역시 정성이생에 들어갈 수 있으며, 들어가서는 반드시 이러한 선정을 현기(現起)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곧 현행에 근거하여 무상정을 이생의 선정이라고 말한 것이지 [이숙과를] 성취하는 것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43)
또한 이러한 선정은 바로 이러한 법(이생법)과 외도의 법에 통하는 것으로, 이생에 의해 획득되는 것일 뿐 성자가 획득하려는 바가 아니니, 모든 성자들은 무상정을 마치 깊은 구덩이[深坑]와 같다고 보아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즉 본송 중에서 이미 ‘해탈을 구하려는 것’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선정이 오로지 이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으며,
또한 다시 ‘성자의 것이 아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성자들에게는 무용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처음으로 획득할 때에는 [3세 중] 몇 세(世)의 그것을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44)
이것은 별해탈계와 마찬가지로 온갖 상태 중에서 찰나찰나에 걸쳐 개별적으로 획득된다.
즉 일찍이 획득한 일이 없기 때문에 제1찰나[念]에는 과거의 그것을 획득하지 않으며, 무심(無心)이기 때문에 미래의 그것도 닦지 않는다.
따라서 처음으로 무상정을 획득할 때에는 오로지 1세(世)의 그것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현재의 그것만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2찰나로부터 이후 아직 출정(出定)하기 전까지는 과거의 그것도 역시 성취하며, 이미 출정한 때로부터 아직 그것을 버리지 않은 동안은 오로지 과거의 그것을 성취할 뿐 천안(天眼)이나 천이(天耳)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그것을 닦는 일이 없으니, 오로지 가행득(加行得)일 뿐 이염득(離染得)이 아니기 때문이다.45)
6) 멸진정(滅盡定)
다음으로 멸진정(滅盡定)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멸진정도 역시 그러한 것으로
정주(靜住)를 위한 것이고, 유정(有頂)이고
선이고, 두 가지의 수(受)와 부정수(不定受)이며
성자가 추구하는 바로서, 가행(加行)에 의해 획득된다.
[부처는] 가행이 아니라 성불할 때 획득하니
34찰나[念]가 걸리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의 무상정과 마찬가지로 ‘멸진정도 역시 그러하다.’
즉 제3정려의 탐을 떠난 자에게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법으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무상정’이라고 이름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탐을 떠난 자에게 어떤 법이 있어 능히 심ㆍ심소법으로 하여금 소멸되게 하는 것을 ‘멸진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의 차별상은 이러하다.
앞의 무상정의 경우 해탈을 구하기 위해 상(想)을 염괴(厭壞)하여 먼저 출리상(出離想)의 작의(作意)를 닦아 증입(證入)을 획득하려는 것이라면,
지금의 멸진정은 정주(靜住,śānta vihāra,마음이 산란을 떠나 고요히 머무는 것)를 구하기 위해 마음의 산란 동요를 염괴하여 먼저 지식상(止息想)의 작의를 닦아 증입을 획득하려는 것이다.
또한 앞의 무상정이 색계 변지(邊地,즉 제4정려)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지금의 멸진정은 무색계의 변지(즉 非想非非想處)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같이 비상비비상처에 존재하며 생을 받은 소의신은 최상의 업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에 유정(有頂)이라고도 이름한다.
혹은 가장 끝[邊際]에 존재하기 때문에 유정이라고도 이름하니,
이를테면 나무의 가장 끝을 설하여 나무의 꼭대기, 즉 수정(樹頂)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
오로지 이러한 경지(즉 비상비비상처)에만 멸진정이 존재한다고 하니, 어떠한 이유에서 하지(下地)에는 이러한 선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일체의 마음을 싫어하여 등지고[厭背], 아울러 가장 끝자리의 마음[邊際心,여기서는 무소유처의 마음]을 끊어야 비로소 능히 이러한 뛰어난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이유에서 이러한 해탈을 설정한 것이니,
첫째는 일체의 마음을 싫어하여 등졌기 때문이고,
둘째는 가장 끝자리의 마음을 잠시 끊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하지에 이러한 선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모든 종류의 마음을 싫어하여 등지는 것이 아니니, 아직은 능히 상지의 마음을 싫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가장 끝자리의 마음을 끊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니, 상지의 마음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하지에서의 선정은] 일부의 마음만을 싫어하여 등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며, 역시 또한 마땅히 중간자리[中際]의 마음만을 끊은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선정(무상정)과 이러한 멸진정은 다 같이 삼성(三性) 중 오로지 선성일 뿐 염오무기가 아니다.46) 즉 모든 성자들은 마음의 산란과 동요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므로 염오무기를 취하여 고요히 머무는 것[寂靜住]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앞의 무상정은 능히 순생수(順生受)이고 아울러 부정수(不定受)였지만, 지금의 멸진정은 순생수ㆍ순후수(順後受), 그리고 부정수 모두와 통한다.
즉 이숙에 근거하여 볼 때 순생수이기도 하고, 혹은 순후수, 혹은 부정수이기도 하며, 혹은 그 과보를 완전히 받지 않는 경우[不受]도 있으니,47) 이를테면 만약 하지(下地)에서 이러한 선정을 일으키고서 상지에 태어나지 않고 바로 반열반하는 경우가 그러하다.48)
또한 이러한 멸진정은 능히 유정지(有頂地)의 네 가지 온의 이숙과만을 초래한다.49)
또한 앞의 무상정은 오로지 이생이 획득하는 바였지만, 이러한 멸진정은 오로지 성자만이 획득하는 것이다.
즉 온갖 이생은 능히 멸진정을 일으킬 수 없으니, 그들에게는 멸진정을 일으키는 것을 장애하는 자신의 경지(地)가 있어 아직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그들은 아직 유정지의 견소단의 번뇌[惑]를 초월하지 못하였기에 필경 멸진정을 일으킬 만한 공능이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이생은 유정지의 견소단의 혹을 능히 초월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성자만이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의 성자는 유정지를 획득할 때 모두 그와 같은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인가, 획득하지 않은 것인가?
마땅히 획득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이 같은 선정은 이염득(離染得)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멸진정은 무엇에 의해 획득되는 것인가?
가행에 의해 획득된다. 요컨대 가행에 의해 비로소 증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상정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증득할 때에는 오로지 현재의 그것만을 획득하고, 과거의 그것은 획득하지 않으며, 미래의 그것도 수득(修得)하지 않으니, 요컨대 심력(心力)에 의하여 비로소 능히 수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찰나 따위 이후 내지 아직 그것이 버려지지 않았을 때에는 과거의 그것도 역시 성취한다.50)
그렇다면 세존께서도 역시 가행으로써 멸진정을 획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획득하게 된 것인가?
성불(成佛)할 때 획득한다.
그런데 그(경주 세친)는 말하기를
“세존께서는 진지(盡智)를 성취할 때 (다시 말해 일체의 번뇌가 이미 다하였음을 알 때) 획득한다”고 하였다.51)
그러나 어찌 성불할 때 진지 역시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하물며 멸진정이 획득된다고 하겠는가?
즉 모든 보살은 금강유삼마지(金剛喩三摩地)에 머물 때 [비로소] 진지를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52) 득(得) 자체가 생겨날 때를 일컬어 ‘획득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불할 때, 진지는 가행에 의해 현재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마땅히 설해야 할 것이니, 잠시 욕락이 현재전할 때 일체의 원만한 덕성[圓德]도 그러한 욕락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으로, 불신(佛身) 중에 존재하는 공덕은 성불할 때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부처가 진지를 성취할 때 멸진정을 획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보살의 시절에 일체 번뇌의 염오함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불신 중의 공덕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니, 그래서 여래가 갖는 공덕은 모두 이염득(離染得)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말에는 역시 과실이 있다.
그를 위해 편의에 따라 두루 해석해 보면, 그것은 이를테면 근사(近事)에 대해 원성(遠聲)을 설한 것이거나 혹은 금강유삼마지에 있을 때 반드시 깨달음[佛]을 성취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성불’이라 말한 것으로, 무간의 찰나에 결정코 성불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이 같은 사실은 일단 차치하더라도 세존께서는 일찍이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진지를 획득할 때 구분해탈(俱分解脫)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53)
그것은 선정의 장애[定障,즉 불염오무지]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이며,
[멸진정의] 불성취를 버렸기 때문이며, 멸진정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자재를 획득하였기 때문이니, 그래서 이미 [멸진정을] 일으킨 자와 마찬가지로 구해탈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54)
그런데 서방사(西方師)는
“보살은 유학위(有學位)에서 먼저 이러한 선정(멸진정)을 일으키고, 그 후에 보리(菩提)를 증득한다”고 말하고 있다.55)
그렇지만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먼저 멸진정을 일으키고, 그 후에 비로소 진지를 낳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이 나라의 비바사사는 어떠한 근거에서 [진지를 낳기] 전에 [멸진정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며, 어째서 서방사가 제기한 논거에 대해 책망하지 않는 것인가?
바야흐로 우리 가습미라국에서도 34념(念,찰나)에 보리를 증득한다고 설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모든 보살은 결정코 먼저 무소유처에서 이탐(離貪)을 획득하고 나서 비로소 견제(見諦,즉 견도)에 들어가므로 다시 하지의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이 34념에 대(大) 보리를 증득하게 된다. 즉 4제를 현관(現觀)하는데 16념이 걸리며, 유정(有頂)의 탐(즉 수혹)을 떠나는데 18념이 걸리니, 이를테면 유정의 9품(品)의 번뇌를 끊음에 있어 9무간도(無間道)와 9해탈도(解脫道)가 바로 그것이다. 곧 이와 같은 18념에 앞의 16념을 더하여 34념이 되는 것이다.56)
그리고 이 중간에 동류가 아닌 마음[不同類心]을 일으키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57)
따라서 앞의 단계(즉 18념을 낳기 전의 단계)에서는 결정코 멸진정을 일으킬 리 없으니, 만약 앞의 단계에서 멸진정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바로 기심(期心)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보살은 결정코 기심을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58)
이와 같이 말할 때 34념에 보리를 증득한다고 하는 논의는 잘 성취되기 때문에, 앞서 [서방사가 제시한] 논거는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① 무상정과 멸진정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비록 두 가지 선정(무상정과 멸진정) 사이에 다수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고 이미 논설하였을지라도 여기에는 또 다른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리라.
두 가지 선정은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는 것으로
멸진정은 인취(人趣) 중에서 처음으로 [일어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두 가지 선정’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무상정과 멸진정을 가리키니,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욕계와 색계 두 곳에 의지하여야 현기(現起)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설하기를,
“오로지 아래 세 정려에 있을 때만 무상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제4정려에 있을 때에는 들어갈 수 없으니, 그래야 원인과 결과가 지극히 인접하여 서로를 핍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역시 제4정려에서도 무상정에 들어갈 수 있지만 무상천은 제외하니, 그 하늘에 태어날 때 그러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또한 유여사는 말하기를
“오로지 욕계에 있을 때에만 무상정에 들어갈 수 있으며, 색계에서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논(論)의 글귀에 위배되니, 이를테면 본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59) “혹 어떤 이는 바로 색유(色有,색계의 유정)이면서 이러한 유(有)의 5행(行,5온을 말함)이 아닌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색전(色纏,곧 색계)의 유정으로서 혹 어떤 경우 유상천(有想天)에 태어나 동류가 아닌 마음[不同類心]으로 머무르거나, 혹은 무상정에 들었거나, 혹은 멸진정에 들었거나, 혹은 무상천에 태어나서 이미 무상에 든 자가 그러하다.60) 이러한 이들을 바로 색유이면서 이러한 유의 5행이 아닌 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이와 같은 두 가지 선정은 다 같이 욕계와 색계에 의지하여야 현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니, 이것을 일러 두 가지 선정의 같은 점[同相]이라고 한다.
두 가지 선정의 다른 점[異相]이란, 이를테면
무상정은 욕계나 색계 모두에서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멸진정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인취(人趣) 중에서이다.
즉 멸진정은 오로지 인취 중에서만 최초로 닦아 일어날 수 있으니, 오로지 인취 중에만 [그것을] 설하는 자가 있고, 해석하는 자가 있으며, 아울러 강성한 가행력이 있기 때문이다.61)
그리고 인취 중에서 처음으로 닦아 획득하고서, 먼저 [그러한 선정에서] 물러남에 따라 바야흐로 색계에 태어나게 되면 색계의 소의신에 의지하여 그 후 다시 [이러한 선정을] 닦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62)
그러나 무색계에서는 능히 멸진정에 들 수 없으니, 소의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명근(命根)은 반드시 색심(色心)에 의지하여 일어나는데, 만약 무색계에 있으면서 멸진정에 들 경우 색심이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명근은 마땅히 끊어져야 하며, 제온(諸蘊)은 서로 의존하며 전전하고 머물기 때문에 유정으로서 오로지 1온을 갖춘 이도 없어야 한다.
또한 심ㆍ심소법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또한 유정으로서 오로지 3온을 갖춘 이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멸진정에 물러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인가?
『오타이계경(鄔陀夷契經)』뜻에 준거하였기 때문이니,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구수(具壽)여, 여러 필추(불환과를 획득한 비구)들이 있어 이들이 먼저 이러한 처소(욕계를 말함)에서 청정한 시라(尸羅,戒)를 갖추고, 삼마지(三摩地,定)를 갖추고, 반라야(般羅若,慧)를 갖추면 능히 자주 멸수상정(滅受想定)에 들고 날 수 있을 것이니, 이 처소에서는 그럴 수 있음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그가 현법(現法)에서나 혹은 임종의 단계에서 부지런히 닦았더라도 능히 [무학의] 승해(勝解)를 만족시킬 수는 없지만, 이러한 몸이 허물어짐에 따라 단식천(段食天)을 초월하며, 그에 따른 1처(處)인 의성천(意成天)의 몸을 받는데,63) 그곳에 태어나서도 다시 자주 멸수상정에 들고나니, 이 처소에서도 역시 그럴 수 있음을 마땅히 참답게 알아야 할 것이다.”
곧 이러한 의성천의 몸을 부처님께서는 바로 색계라고 설하셨으나, 멸수상정은 오로지 유정(有頂)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선정을 획득하여 반드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마땅히 색계로 가 생을 받을 수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64)
이와 같이 두 가지 선정의 다른 점에 대해 널리 해석하였다.
여기에는 모두 여섯 가지의 갈래가 있었으니, 이를테면 지(地)ㆍ가행ㆍ상속ㆍ이숙ㆍ순수(順受)ㆍ초기(初起)의 차별이 바로 그것이다.65)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멸진정 중에서는 일체의 심ㆍ심소법이 모두 소멸하는 것인데,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멸수상정(滅受想定)이라고만 말하는 것인가?
그러한 두 가지(즉 수와 상)를 싫어하고 거역[厭逆]하여 이 선정을 낳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수’와 ‘상’은 능히 견애(見愛)와 잡염(雜染)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것에 편중하여 싫어하고 거역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두 가지의 법은 온갖 허물이 많으니, 5온에 대해 논설하는 중에 널리 분별한 바와 같다.66) 따라서 그것에 편중하여 싫어하고 거역할 때 멸진정에 들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멸진정의 상태는 결정코 무심(無心)이니,67) 일체의 마음은 모두 ‘수’ ‘상’과 함께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으로, 계경에서
“안(眼)과 색(色)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을 낳으며, 세 가지의 화합인 촉은 수ㆍ상ㆍ사와 함께 일어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일찍이 제7식(識)이 존재한다고 말한 적도 없었거니와 그러한 식은 수ㆍ상을 떠나 생겨난다고 주장한 일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이 경에서의 ‘함께’라고 하는 말은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68) [계경에서] 갈대의 다발이 서로 의존하여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이것의 비유로 삼았기 때문이며, 심ㆍ심소는 그 생연(生緣)이 같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멸진정 중에서는 오로지 수ㆍ상만이 멸하는 것이 아니니,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의행(意行)이 멸한다고 역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마음이 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수ㆍ상의 두 종류도 마땅히 멸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그것(마음)은 능히 촉을 낳을 것이므로 [수ㆍ상] 역시 마땅히 존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69)
이에 따라 멸진정에는 필시 어떠한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출정 후 마음[定後心]이 다시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입정전의 마음[定前心]이 등무간연이 되어 인섭(引攝)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가행 중에 기약한 세력에 의해 낳아졌기 때문이다.70)
또한 멸진정은 그 자체 실유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마음을 차단 장애[遮礙]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71)
그런데 만약 “입정 전의 마음[定前心]이 능히 여타의 다른 마음(출정시의 마음, 곧 後起心)을 차단 장애하는 것이 [멸진정이다”고] 한다면, 여타의 다른 마음은 필경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만약 “유근신(有根身)이 능히 여타의 다른 마음을 일으킨다”고 한다면,72) 마땅히 모든 때에 걸쳐 모든 식(識)이 단박[頓]에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입정] 전의 마음에 근거하여 [출정] 후의 마음이 일어난다고 설한다면, 두 번째의 등무간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소의의 경계가 동시에 존재할지라도 모든 경계대상에 대한 식이 단박에 생겨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과 동류[自類]의 인연[전 찰나의 마음]에 근거하지 않고 유근신에 근거하여 식이 생겨난다고 주장한다면, 그러한 모든 상태, 모든 대상에 대한 식은 어떠한 법이 장애하여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마음(즉 입정전의 마음)에 근거하여 마음(출정심)이 일어난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전정심이 능히 여타의 다른 마음(출정심)을 차단 장애하는 것이 아니다.73)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입정 전의 마음을 떠나 그 밖의 별도의 법이 결정코 존재하여 능히 마음을 차단 장애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법으로 말미암아 무심의 상태에서는 비록 마음의 원인이 존재할지라도 마음은 일어나지 않게 되니, 이러한 개별적인 법을 멸진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그리고 멸진정 자체는 바로 유위로서 실유이지 가유가 아니니, 관행(觀行)을 닦은 자의 선정에 들기 전의 마음이 기약한 원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멸진정의 세력이 점차 미약해지거나 완전히 다한 상태에 이르러 차단 장애의 작용이 없어지게 되면, 의(意)와 법(法)을 연으로 하여 다시 의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앞의 무상정과 아울러 무상과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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