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중권
13. 이 경을 수지 독송하고 연설하는 복덕,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항하(恒河)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몸과 목숨이 다하도록 보시하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이 법문(法門)과 나아가 4구게(句偈) 등을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그 복은 더욱 많아서 한량없는 아승기와 같을 것이다.”
그때 수보리가 이 경의 설법을 듣고 그 깊은 이치를 이해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다가 눈물을 닦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매우 드문 일입니다. 바가바(婆伽婆)시여, 매우 드문 일입니다.
수가타(修伽陀)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매우 심오한 법문을 설명하시니, 제가 예전부터 오늘날까지 얻었던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법문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신심(信心)이 청정해졌다면 실상(實相)이 생길 것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가장 으뜸가는 희유(希有)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은 곧 모습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이것을 실상, 실상이라고 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와 같은 법문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기는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만약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 어떤 중생이 이 법문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은 가장 보기 드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나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오래 산다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나라는 모습은 곧 모습이 아니며, 남이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오래 산다는 모습도 곧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모습을 여의는 것을 곧 부처라고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서 놀라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매우 드문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은 제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여래께서 말씀하신 제일바라밀은 저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들께서도 바라밀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을 일컬어 제일바라밀이라고 하느니라.”
【論】
여기서부터 아래의 경문(經文)은 저 복덕 중에 이 복덕이 더욱 뛰어나다는 것을 거듭 밝힌 것이다.
그 뜻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몸은 괴롭지만 저것보다 훌륭한 것은
희유(希有)하고 뛰어난 이치인
저 지혜의 언덕인데 헤아려 알기 어렵고
또한 다른 법과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견실하고 심오한 이치이므로
다른 수다라(修多羅)보다 뛰어나다.
큰 원인 있고 청정하기 때문에
복 가운데 어느 복덕보다 뛰어나다.
이 두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이 귀중한 보배를 보시하여 자생(資生)하는 것보다 더 중하지만 이와 같이 한량없는 신명을 버려서 얻은 과보의 복덕인 저 복덕보다 이 복이 더 뛰어나다. 왜냐하면 저 신명을 버리는 것이 신심(身心)을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구나 법을 위해 보시를 행하는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이 몸은 괴로운 것임을 깨닫고 혜명(慧命) 수보리는 법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슬피 울면서 눈물을 흘린 것이니,
경에서
“그때 수보리가 이 경의 설법을 듣고 깊은 이치를 이해하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 울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 법문은 매우 드문 것이다.
왜냐하면 존자 수보리가 비록 지혜의 눈을 가지긴 했지만 옛날부터 지금껏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매우 드문 것이니,
마치 경에서
“제가 예전부터 오늘날까지 얻었던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법문은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 법문은 가장 으뜸가는 것이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설명하기 위한 까닭이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최상의 이치를 성취할 수 있는가?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께서 설하신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왜 저 지혜의 언덕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하였는가?
저 지혜의 언덕은 사람들이 능히 헤아려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이 법문은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는 실상(實相)이 있기 때문이요, 그밖에 다른 것에는 실상이 없기 때문이다.
불법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는 실상이 없기 때문에 그 이치를 일찍이 없었던 것이요, 일찍이 믿음을 내지 못했던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경에서
“세존이시여,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게 되어 신심이 청정해지면 실상이 생길 것이니,
이러한 사람은 가장 으뜸가고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사람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법문은 견실하고 매우 심오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경전을 받아 지녀서 생각하여 헤아려보고 닦아 익히면 나[我]라는 따위의 모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나라는 따위의 모습이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취해야 할 경계가 뒤바뀜이 없는 모습임을 보인 것이요,
‘나라는 따위의 모습은 곧 모습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경계를 취하는 사람도 뒤바뀜이 없는 모습임을 보인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나라는 것도 공(空)하고 법이라는 것도 공하여 아지(我智)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와 같은 차례는 경에서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나라는 모습, 남이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오래 산다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나라고 하는 모습은 곧 모습이 아니며, 남이라는 모습, 중생이라는 모습, 오래 산다는 모습도 곧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이 일체의 모습을 여의면 곧 모든 부처라 부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여래께서 수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은 이치를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놀란다’는 것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 하여 생겨나는 두려움이니, 바른 도가 아닌 것을 행하여 꾸짖음을 받게 되기 때문이요,
‘무섭다’는 것은 마음과 몸이 무서워하기 때문이니, 의심을 끊어 없애지 못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며,
‘두려워한다’는 것은 한결같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끝내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떨어지기 때문이니,
이러한 곳에서 멀리 떠나는 것으로서 경에서
“놀라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법문은 다른 수다라보다 훨씬 수승하니,
마치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제일바라밀은 제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법문은 큰 원인[大因]이라고 부르니,
마치 경에서
“여래께서 제일바라밀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법문을 청정하다고 일컬으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 다 같이 말씀하신 법문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저 한량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서도 바라밀을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을 제일바라밀이라고 부른다”라고 한 것과 같다.
저 진귀한 보배를 보시하는 것 따위는 이와 같은 공덕이 없으니, 그런 까닭에 저 복덕보다는 이 복덕이 훨씬 뛰어나다는 이런 이치가 성립되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 아래 경문은 또 다른 의심을 끊기 위한 것이다.
어떤 의심인가?
“앞에서 이 몸은 괴로운 것임을 깨달아 그 몸을 희사하는 것은 고통 받는 몸의 과보(果報)이므로 그 복은 열등한 것이다”라고 말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이 법문을 받아 지녀서 다른 사람에게 연설할 때, 여러 보살들이 고행(苦行)을 행하는 그러한 고행도 역시 괴로움의 과보라고 해야 할 터인데,
왜 이 법문에서는 괴로움의 과보가 되지 않는가?
이런 의심이 생길 것이므로 이 의심을 끊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