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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엄경론 제4권
12. 술구품(述求品) ①[1]
[믿음으로써 여러 법을 구함]
이미 가지가지의 믿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믿음으로써 여러 법을 구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경과 율과 논의 3장]
게송으로 말한다.
삼장(三藏)과 혹은 이(二)로 섭수한다.
삼(三)은 이루는 데 아홉 가지의 인이 있으니
훈습과 깨달음과 적정과 통달로
생사의 일을 해탈한다.
[釋] ‘삼장과 혹은 이(二)로 섭수한다’고 함에서 삼장은, 이른바 수다라장(修多羅藏:經藏)과 비니장(毗尼藏:律藏)과 아비담장(阿毗曇藏:論藏)이다.
‘혹은 이(二)에 섭수한다’고 함은 이른바 이 세 가지는 하승(下乘)과 상승(上乘)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는 이(二)라 함은 성문장(聲聞藏)과 보살장(菩薩藏)이다.
[문] 저 삼(三)과 이(二)를 어찌해서 장이라 이릅니까?
[답] 섭수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이른바 마땅히 알아야 할 일체의 뜻을 섭수하였기 때문이다.
[문] 무엇을 일러 삼(三)을 이룬다고 합니까?
[답] 삼(三)을 이루는 데는 아홉 가지의 인이 있다.
경[修多羅]을 세운 것은 의혹(疑惑)을 대치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사람이 뜻에 있어서 곳곳에 의심을 일으킨다면 그러한 사람들로 하여금 결정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계율[毗尼]을 세운 것은 수용하는 데 두 가지 변(邊)을 대치하기 위함이다.
즐거운 행의 변을 벗어나기 위하여 허물이 있는 수용을 막았고,
괴로운 행의 변을 벗어나기 위하여 허물이 없는 수용을 들어 주었으며,
논[阿毗曇]을 세운 것은 자기 마음의 견취(見取)를 대치하기 위한 것이니,
전도되지 않은 법의 모양을 이것이 능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는 경을 세운 것은 3학(學)을 설하기 위함이요,
계율을 세운 것은 계학(戒學)을 이루기 위함이니, 심학(心學)은 계율을 지님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뉘우치지 아니하고, 뉘우치지 않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순서에 따라 정을 얻는다.
논을 세운 것은 혜학(慧學)을 이루기 위함이니, 전도되지 않은 뜻을 이것이 능히 가려 주기 때문이다.
또는 경을 세운 것은 바로 법과 뜻을 설하기 위함이다.
계율을 세운 것은 법과 뜻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그것은 방편을 부지런히 함으로 말미암아 번뇌가 멸하기 때문이다.
논을 세운 것은 법과 뜻을 통달하기 위함이니, 그것은 가지가지의 간택(簡擇)으로 말미암아 방편을 삼기 때문이다.
이 아홉 가지의 인으로 말미암기에 삼장을 세운 것이다.
[문] 따로[別] 쓰면 이와 같지만 통하여[通] 쓰려면 어떻게 합니까?
[답] 훈습과 깨달음과 적정과 통달로 생사의 일을 해탈한다고 함은, 생사를 해탈함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생사를 해탈하는 것이 그 통용임을 밝힌 것이다.
들음으로 말미암아 훈습하고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깨닫고 그침으로 말미암아 적정하고 관(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통달한다.
이 네 가지의 뜻으로 말미암아 생사의 모든 일에서 영원히 해탈함을 얻게 된다.
게송으로 말한다.
경과 율과 논에
각기 네 가지의 뜻이 있으니
갖추어 알면 일체종지를 이루고
한 게송만 알아도 누진(漏盡)을 얻는다.
[釋] 만일 간추려서 말하면 삼장의 하나하나에 각기 네 가지의 뜻이 있다.
그러니 보살이 능히 이 뜻을 요달(了達)하면 곧 일체종지를 성취하게 되고, 만일 성문이 한 게송만 알아도 곧 여러 번뇌[漏]가 길이 다함을 얻을 것이다.
[문] 무엇을 일러 하나하나에 네 가지의 뜻이 있다고 합니까?
[답] 게송으로 말한다.
의지하기 때문이요, 모양이기 때문이요,
법이기 때문이요, 뜻이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뜻,
이를 경[修多羅]의 뜻이라고 말한다.
[釋] 경에는 네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의지함이요, 둘째는 모양이요, 셋째는 법이요, 넷째는 뜻이다.
‘의지한다’고 함은 이곳과 이 사람과 이 작용이다.
이른바 이것은 어느 국토에 따르고, 이것은 어느 부처님에 따르고, 어느 중생에 따르는가 함이다.
여래께서 이 세 가지에 의지하여 경장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양’이라고 함은 이른바 세제(世諦)의 모양과 제일의제의 모양이다.
‘법’이라고 함은 이른바 다섯 가지의 음(陰)과 열여덟 가지의 계(界)와 열두 가지의 입(入)과 열두 가지의 연기(緣起)와 네 가지의 제(諦)와 식(食) 등의 법이다.
‘뜻’이라고 함은 이른바 그 까닭을 해석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대치하기 때문이요, 헤아리기 때문이요,
조복시키기 때문이요, 이해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네 가지의 뜻
이를 논장의 뜻이라고 한다.
[釋] 논[阿毗曇]에는 네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대치하는 것[對]이요, 둘째는 헤아리는 것[數]이요, 셋째는 조복시키는 것[伏]이요, 넷째는 이해하는 것[解]이다.
‘대치한다’고 함은 이는 열반을 향하는 것으로서 보리의 분과 해탈의 문 등을 말하기 때문이다.
‘헤아린다’고 함은 서로 있는 법으로서 하나하나의 법에서 색(色)과 색이 아님과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의 차별이 한량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조복시킨다’고 함은 뛰어나고 위가 되는 법이어서 쟁론(諍論)하는 무리 가운데 법의 뜻을 결정ㆍ판단하여 그들의 주장을 물리치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함은 뜻을 해석하는 법이니 논장을 의지하여 경의 뜻을 쉽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죄(罪)와 기(起)와 정(淨)과 출(出) 때문이요,
인(人)이요 제(制)요 해(解)요 판(判)이기 때문이니
네 가지의 뜻에 다시 네 가지의 뜻을
계율의 뜻이라고 말한다.
[釋] 계율에는 두 가지 종류의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처음 네 가지 뜻은 첫째로 죄(罪)요, 둘째로 기(起)요, 셋째로 정(淨)이요, 넷째로 출(出)이다.
죄라고 함은, 죄의 자기 성품이니 이른바 다섯 가지의 죄이다.
기라고 함은 죄의 연기(緣起)이니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무지(無知)요, 둘째는 방일(放逸)이요, 셋째는 번뇌가 빠르고 날카로움이요, 넷째는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정이라 함은, 죄가 다시 청정해지는 것이니 이는 착한 마음 때문이고 벌주어 다스림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출이라 함은,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이른바 죄의 이어짐을 영원히 막는 것이다.
둘째는 교(敎)에 순종하는 것이니, 이른바 학갈마(學羯磨)를 주어서 벌로 다스리는 것이다.
셋째는 열어 허락하는 것이니, 앞의 때에는 이미 제정하였으나 뒤의 때에 다시 여는 것이다.
넷째는 다시 사(捨)하는 것이니, 이른바 승가가 화합하여 공부하는 자에게 사하도록 하는 것이니, 이때에는 이전에 범한 것이 다시 청정함을 얻게 된다.
다섯째는 전의(轉依)이니, 이른바 비구ㆍ비구니가 남녀의 근을 교전하면 불공죄를 범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실관(實觀)이니, 이른바 법의 우타나(憂陀那)를 뛰어나게 관찰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일곱째는 성품을 얻는 것이니, 이른바 네 가지의 제(諦)를 볼 때에 미세한 죄는 체가 없으니, 법이 공함을 증득했기에 법이 그러한 것이다.
다시 네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째는 인(人)이요, 둘째는 제(制)요, 셋째는 해(解)요, 넷째는 판(判)이다.
인(人)이라고 함은, 이른바 죄를 범한 사람이다.
제(制)라고 함은, 이른바 그 죄를 범한 사람을 의지해서 화상이 대중을 모아 그의 허물과 실수를 말하여 규칙을 제정하여 세우는 것이다.
해(解)라고 함은, 이른바 제정하여 세운 것을 다시 자세히 분별하는 것이다.
판(判)이라고 함은, 이른바 무엇을 일러 죄를 얻었다고 하고 무엇을 일러 죄를 얻지 않는 것이라고 하여 이와 같이 마땅히 가져야 한다.
[구하는 인연]
이미 구하는 법을 말했으니,
다음에는 구하는 인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소연(所緣)의 법은
마땅히 안과 밖, 그리고 함께 함을 알아야 한다.
둘이면서 둘이 없는 뜻을 얻으면
둘도 또한 얻을 수 없다.
[釋]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소연(所緣)의 법은 마땅히 안과 밖, 그리고 함께 함을 알아야 한다’고 함은 부
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체 소연의 법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이요, 둘째는 밖이요, 셋째는 안과 밖이 함께 함이다.
저 능취(能取)의 자기 성품의 몸으로 안을 삼고,
소취(所取)의 자기 성품의 몸으로 밖을 삼으며,
이 둘의 자기 성품의 몸을 합쳐서 함께 라고 한다.
‘둘이면서 둘이 없는 뜻을 알면 둘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함은 이 안과 밖의 두 인연이 그의 순서와 같아서 둘이 없는 뜻을 얻는다.
[문] 무엇을 일러 얻는다고 합니까?
[답] 만일 소취(所取)의 뜻이 능취(能取)의 뜻과 더불어 다르다는 관찰이 없고, 만일 능취의 뜻이 소취의 뜻과 더불어 다르다는 관찰이 없는 것이다.
또는 이 둘을 합하여 하나를 만드니, 그것은 안과 밖의 두 인연이 여여(如如)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아서 그 둘이 두 가지 뜻이 있지 않으면 곧 이 두 인연도 또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문] 이미 얻는 인연을 말하였으니, 무엇을 일러 얻는 지혜라고 합니까?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 인연에서 세 가지의 지혜를 얻어
청정하게 뜻과 말의 경계를 지니고
뜻과 빛을 요달하여 마치면
안심할 것이 오직 이름뿐이다.
[釋] ‘세 가지의 인연’이라고 함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안과 밖, 그리고 안과 밖을 함께 하는 세 경계이다.
‘세 가지의 지혜’라고 함은 이른바 듣고 생각하고 닦는 세 지혜이다. 이 세 가지의 인연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세 가지의 지혜를 얻는다.
[문] 어떻게 해서 얻습니까?
[답] 만일 세 가지의 인연에서 깨끗하게 뜻과 말의 경계를 가지면 이는 곧 들음의 지혜[聞慧]를 얻은 것이고,
이때 뜻과 말이라고 함은 분별이며,
깨끗하다고 함은 결정을 믿는 것이고,
가진다고 함은 그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들음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만일 세 가지의 인연에서 뜻과 빛을 요별하여 마치면 곧 생각하는 지혜[思慧]를 얻으니, 이른바 뜻과 빛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과 말에서 다르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세 가지의 인연에서 안심하여 오직 이름뿐이라면 곧 닦는 지혜[修慧]를 얻은 것이다. 이른바 뜻과 빛이 다만 오직 이름뿐임을 아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닦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먼저 말한 것과 같이 두 가지의 인은 가히 얻을 수 없다.
그러기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저 세 가지의 인연이라고 함은, 들음과 생각과 닦음, 세 가지 지혜의 의지가 되는 것이다.
[구하는 뜻 지음]
이미 구하는 인연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구하는 뜻 지음[作意]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최초로 말한 종성과
짓는 것과 의지와
믿고 안심함과 욕망이 남과
정을 의지함과 또한 지혜를 의지함과
특별한 인연과 가지가지의 인연
통달함과 닦음과 종류
자기 성품과 공력
받아들임과 방편
자재와 작은 것과 큰 것 등
이와 같이 열여덟 가지가 있어서
모든 작의(作意)에 다 섭수되어
수행하는 자가 마땅히 부지런히 닦아야 한다.
[釋] ‘열여덟 가지의 작의’라 함은
첫째는 종성(種性)의 작의요, 둘째는 소작(所作)의 작의요, 셋째는 의지의 작의요, 넷째는 믿고 편안한 작의요, 다섯째는 욕생(欲生)의 작의요, 여섯째는 정에 의지하는 작의요, 일곱째는 지혜에 의지하는 작의요, 여덟째는 특별한 인연의 작의요, 아홉째는 가지가지 인연의 작의요, 열째는 통달(通達)의 작의요, 열한째는 닦음과 종류의 작의요, 열두째는 자기 성품의 작의요, 열셋째는 공력의 작의요, 열넷째는 받아들이는 작의요, 열다섯째는 방편의 작의요, 열여섯째는 자재의 작의요, 열일곱째는 작은 작의요, 열여덟째는 큰 작의이다.
‘종성의 작의’라 함은 성문들의 3승의 종성이 결정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소작의 작의’라 함은 복과 지혜의 두 무더기가 원만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의지의 작의’라 함은 재가자(在家者)와 출가(出家)한 이와 박책(迫迮)한 이와 박책하지 않은 이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믿고 안심하는 작의’라 함은 염불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욕생의 작의’라 함은 염불을 따를 때에 신심과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정을 의지하는 작의’라 함은 깨달음이 있고 관이 있는 등 세 가지의 삼매와 서로 응하기 때문이다.
‘지혜를 의지하는 작의’라 함은 듣고 생각하고 닦는 방편이 순서대로 생겨나기 때문
이다.
‘특별한 인연의 작의’라 함은 다섯 가지가 있으니
경장과 우다나(憂陀那)와 가타아바타나(伽陀阿波陀那)에서
첫째는 받고, 둘째는 가지고, 셋째는 읽고, 넷째는 생각하고, 다섯째는 설하기 때문이다.
‘가지가지 인연의 작의’라 함은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명연(名緣)이요, 둘째는 구연(句緣)이요, 셋째는 자연(字緣)이요, 넷째는 인무아(人無我)의 연이요, 다섯째는 법무아(法無我)의 연이요, 여섯째는 색의 연이요, 일곱째는 무색(無色)의 연이다.
여기서 색의 연이라고 함은 이른바 몸의 연이요,
무색의 연이라 함은 이른바 수(受)와 심(心)과 법(法)의 연이다.
‘통달의 작의’라 함은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건을 통달함이니 이른바 고(苦)의 체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뜻을 통달함이니 이른바 고와 무상(無常)과 공과 무아의 뜻을 아는 것이요,
셋째는 과를 통달함이니 이른바 해탈을 아는 것이요,
넷째는 깨달음을 통달하는 것이니 이른바 해탈의 지혜를 아는 것이다.
‘닦음과 종류의 작의’라 함은 네 가지의 닦음과 서른일곱 가지 종류의 닦음이 있다.
네 가지의 닦음이라 함은, 이른바 인무아의 종수(種修)와 법무아의 종수와 견(見)의 종수와 지혜의 종수이다.
서른일곱 가지의 닦음이라 함은, 이른바 부정(不淨)과 고와 무상과 무아의 네 가지의 닦음이니, 이를 4념처(念處)의 종수라고도 한다.
또는 득(得)과 습(習)과 단(斷)과 대치(對治)의 네 가지 종수가 있으니, 이를 4정근(正勤)의 종수라고 한다.
또는 만족할 줄 아는 것[知足]과 어지러운 뜻[亂疑]과 흔들림[掉動]과 침몰(沈沒)의 네 가지 장애를 대치하기 위하여 욕(欲)과 진(進)과 염(念)과 혜(慧)의 네 가지를 닦으니, 이를 4신족(神足)의 종수라고도 한다.
또는 마음을 주한다고 함은 출세간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신(信)과 근(勤)과 불망(不忘)과 심주(心住)와 간택(簡擇)의 다섯 가지 닦음을 일으키니, 이를 5근(根)의 종수라고도 한다.
또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닦음이 능히 다섯 가지의 장애를 대치하기에 곧 힘이라고 이르니, 이를 5력(力)의 종수라고 이른다.
또는 보리에 있어서 정억(正憶)과 간택(簡擇)과 용맹(勇猛)과 경열(慶悅)과 조유(調柔)와 심주(心住)와 평등의 일곱 가지 수가 있으니, 이를 7각분(覺分)의 종수라고 한다.
또는 결정을 얻었기 때문이요, 지업(地業)을 청정하게 가짐을 이루어서 사유ㆍ분별하기 때문이요, 성인이 받는 것의 세 가지 계를 능히 가지기 때문이요, 먼저 얻는 것의 도를 부지런히 익히기 때문이요, 법이 머무는 모양을 잊지 않기 때문이요, 생각 없는 마음으로 전의(轉依)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의 닦음을 8도분(道分)의 종수라고 이른다.
‘자기 성품의 작의’라 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마타(奢摩他)요,
또 하나는 비발사나(毗鉢舍那)이니,
이 두 가지는 도의 자기 성품이기 때문이다.
‘공력(功力)의 작의’라고 함은 힘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훈습을 뽑아내어 없애는 것이요,
또 하나는 상견(相見)을 뽑아내어 없애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작의’라 함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가르침을 받음에 있어 법의 흐름을 다 받아 가지기 때문이다.
‘방편의 작의’라 함은 정을 행하는 처소에 방편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수(數)를 해석하는 방편이니 이름과 글귀와 글자의 수를 다 통달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해석을 갖춘 방편으로서 갖춤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분량(分量)을 갖춤이니 이른바 여러 글자들이요,
또 하나는 분량이 아닌 갖춤이니 이른바 이름과 글귀들이다.
셋째는 해석하여 분별하는 방편으로서 분별하는 데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이름을 의지하여 뜻을 분별함이요,
또 하나는 뜻을 의지하여 이름을 분별함이다. 분별이 아닌 것은 글자이다.
넷째는 해석하는 차례의 방편이니, 이른바 먼저 이름을 취하고 뒤에 전하여 뜻을 취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해석이 통달한 방편이다.
통달에는 열한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객진(客塵)을 통달하고, 둘째는 경계와 빛을 통달하고, 셋째는 뜻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통달하고, 넷째는 얻을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을 통달하고, 다섯째는 법계를 통달하고, 여섯째는 인무아를 통달하고, 일곱째는 법무아를 통달하고, 여덟째는 하열한 마음을 통달하고, 아홉째는 거만하여 뽐내는 큰마음을 통달하고, 열째는 얻는 것의 법을 통달하고, 열한째는 세운 것의 법을 통달함이다.
‘자재의 작의’라 함은 자재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혹장(惑障)이 극히 청정한 것이요,
둘째는 혹과 지혜의 두 장애가 극히 청정한 것이요,
셋째는 공덕이 극히 청정한 것이다.
‘작은 작의’라 함은 말하자면 처음이 청정한 것이다.
‘큰 작의’라 함은 이른바 뒤의 둘이 청정한 것이다.
[구하는 진실의 뜻]
이미 구하는 작의를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구하는 진실의 뜻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둘을 벗어나거나 의지함이 미혹하거나
말할 것도 없고 희론(戱論)도 없어
세 가지로 응하고 둘이 깨끗하니
둘이 깨끗한 것은 세 가지 비유로 나타난다.
[釋] 둘을 벗어나거나 의지함이 미혹하거나 말할 것도 없고 희론도 없다고 함은, 이 가운데 3성(性)이 함께 진실함을 알겠다.
‘둘을 벗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분별의 성품이 진실한 것이니 능취(能取)와 소취(所取)가 필경에 없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의지함이 미혹하다’고 함은 이른바 의타의 성품이 진실한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고 희론도 없다’고 함은 이른바 진실의 성품이 진실한 것이니 자기의 성품에는 희론이 없고 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 가지로 응하고 둘이 깨끗하니 둘이 깨끗한 것을 세 가지의 비유로 나타난다고 함에서
‘세 가지의 응함’은 이른바 처음이 진실한 것이니 마땅히 알아야 하고, 제2의 진실함은 마땅히 끊어야 하고 제3의 진실함은 마땅히 청정해야 한다.
‘둘이 깨끗하다’고 함은 이른바
첫째는 자기의 성품이 청정한 것이니 본래 청정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요,
둘째는 때가 없는 청정이니 객진(客塵)의 번뇌에서 벗어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둘의 청정이 세 가지의 비유로 말미암아 나타남을 얻으니,
이른바 허공[空]과 금(金)과 물[水]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비유는,
첫째로 모두 자기의 성품을 청정한 것에 비유하였으니, 허공 등은 자기의 성품이 청정하지 않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비유는 모두 때가 없는 청정에 비유하였으니, 허공 등이 객진의 번뇌를 떠난 청정 아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법계와 세간은
일찍이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중생들은 어리석음이 성하기 때문에
없는 데 집착하여 있음을 버린다.
[釋] ‘법계와 세간은 일찍이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함은 법계와 세간이 조금도 다름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의 성품과 여러 법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어리석음이 성하기 때문에 없는 데 집착하여 있음을 버린다’고 함은 중생들은 어리석음이 치성하기 때문에 세간에 있어서 법에 마땅히 집착할 것이 없는데도 집착을 일으키고, 여여(如如)한 데 있어서 법을 마땅히 버릴 것이 없는데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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