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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법집경 제5권
[뛰어나게 묘한 법집(2)]
[미륵보살, 바른 법을 취하고 자재함을 얻는 것]
이때에 미륵(彌勒)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겨를 버리고 쌀을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법이 아닌 것을 버리고 바른 법을 취하며,
또 보살은 아끼고 탐함을 버리고 보시를 취하며,
파계(破戒)를 버리고 지계(持戒)를 취하며,
성냄과 원한을 버리고 인욕을 취하며,
게으름을 버리고 정진을 취하며,
산란함을 버리고 선정(禪定)을 취하며,
어리석음을 버리고 반야를 취합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또 세존이시여, 구하는 것이 있으면 곧 법이 아닙니다.
만약 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취하지 않으며,
취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보호하지 않으며,
보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물들지 않으며,
물들지 않는 사람이라면 다투지 않으며,
다투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끼지 않으며,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면 손해 보지 않으며,
손해 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실천하지 않으며,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물러나지 않습니다.
만약 보살이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보살은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기별(記莂)을 주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법이라 하며,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또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는 마음을 내면 이러한 보살에게는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곧 수기(授記)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모든 번뇌는 구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구함을 멀리 여의면 번뇌를 여의었다고 하며 번뇌를 여읜 까닭으로 모든 부처님 여래께서 수기하십니다.
또 세존이시여,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기별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간의 허망한 말이다. 왜냐하면 기별을 받을 사람도 없고, 기별을 줄 사람도 또한 없기 때문이다. 둘이 함께 없는 것이라면 어느 곳에서 기별을 받을 것인가?’
예,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대비(大悲)로 세간을 수순하는 말일 뿐입니다.
만약 보살이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알면,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기별을 받는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요술쟁이가 허깨비에게 기별을 주지만 저 허깨비는 이와 같은 마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기별을 받았으니 정각을 성취할 것이다.’
세존이시여, 보살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저 허깨비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지만 보살은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보리는 증득할 수 있는 상(相)도 아니고 또한 버릴 수 있는 상도 아니며,
보리는 생겨나는 상도 아니고 또한 없어지는 상도 아니며,
보리는 몸으로 증득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마음으로 증득하는 것도 아니며,
보리는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며,
보리는 ‘나는 보리이니라. 보살이 나를 증득할 수 있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또 세존이시여, 보살은 환희지(歡喜地)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이구지(離垢地)에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명지(明地)에서 어둡지도 않고 밝지도 않으며,
염지(焰地)에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며,
난승지(難勝地)에서 이기는 것도 없고 지는 것도 없으며,
현전지(現前地)에서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깨닫지도 못하며,
원행지(遠行地)에서 가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부동지(不動地)에서 움직이지도 않고 분별하지도 않으며,
선혜지(善慧地)에서 성취하지도 못하고 또한 성취하고자 하지도 않으며,
법운지(法雲地)에서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지도 않으며
불지(佛地)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지만 모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래는 자연히 희론(戱論)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마하살의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하여 수순하는 지혜에 이르면 설법하는 가운데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설법자재(說法自在)라고 말합니까?
모든 언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청정자재(淸淨自在)를 얻습니다.
어찌하여 청정자재라고 말합니까?
모든 처소에서 물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요설자재(樂說自在)를 얻습니다.
어찌하여 요설자재라고 말합니까?
한 법의 자구(字句)에 의지하지만 잠깐도 쉬지 아니함을 말하니, 백천만 겁 동안 말해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지혜가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지자재(智自在)라고 말합니까?
낱낱 법의 자구로 백천만의 법문(法門)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태어남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생자재(生自在)라고 말합니까?
곳곳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곳으로 곳곳마다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또 삼매가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삼매자재(三昧自在)라고 말합니까?
생각할 때마다만약 삼매에 들려고 하면 곧 삼매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지함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주지자재(住持自在)라고 말합니까?
곳곳마다 주지하는 것이 늘어나기 때문이니, 사슴ㆍ새ㆍ짐승ㆍ초목ㆍ석벽이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권속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권속자재(眷屬自在)라고 말합니까?
헤아릴 수 없는 권속을 얻는데 파괴할 수 없는 권속이기 때문입니다.
또 견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견자재(見自在)라고 말합니까?
묘한 색깔을 보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들음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문자재(聞自在)라고 말합니까?
묘한 음성을 듣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코가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비자재(鼻自在)라 말합니까?
모든 냄새를 오직 묘한 법의 향기로 맡기 때문입니다.
또 혀가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설자재(舌自在)라고 말합니까?
법의 맛을 먹고 음식의 맛을 먹지 않음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몸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어찌하여 신자재(身自在)라고 말합니까?
음식을 먹는 몸이 아니고 법신을 성취하여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이 자재함을 얻습니다.
무엇을 심자재(心自在)라고 말합니까?
사람은 물론 등에나 개미 새끼에 이르기까지 행하는 것을 알고 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애요보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이때에 보고 있던 애요(愛樂)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실천[行]은 이러한 실천이니 중생이 보면 곧 기쁨을 일으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보살은 그 밖의 것은 짓는 것이 없이 오로지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근본인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까닭으로 보살은 당연히 좋아하는 법의 실천을 닦고 배웁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법이라 합니까?
보살에게 네 가지 사랑하고 좋아하는 법이 있습니다.
무엇이 네 가지입니까?
과보를 구하지 않고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보시하는 마음이며,
사랑스런 말로 모든 중생의 나쁜 실천을 막고,
이익을 보호하여 성취시키며,
모든 중생을 사랑하기를 마치 자신과 같이 여겨 동사(同事)함을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의 네 가지 사랑하고 좋아하는 법이라고 하며, 모든 중생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 보살마하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어찌하여 네 가지입니까?
많이 들어서 지혜로우나 교만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며,
설법하여 상(相)을 잊고 공양에 대한 마음을 떠났기 때문이며,
저 높은 분에게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지혜를 구하기 때문이며,
정진(精進)을 내고 행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짓는다고 합니다.
또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어찌하여 네 가지입니까?
맑고 깨끗한 계율을 성취하여 법보시로써 보시하기 때문이며,
지족(知足)을 성취하여 적정한 곳에 머물기 때문이며,
한가하고 말 없는 곳에 머물기 때문이며,
선정을 얻어 도회지나 시골에 잘 머물러 모든 위의와 경계를 깨뜨리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의 네 가지 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짓는다고 합니다.
또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진실하게 말하는 이가 말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법답게 말하는 이가 공(空)을 말하기 때문이며,
인욕으로 말하는 이가 평등한 마음으로 말하기 때문이며,
적멸(寂滅)하게 말하는 이가 모든 근(根)을 보호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살이 네 가지 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짓는다고 합니다.
또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어찌하여 네 가지입니까?
먼저 뜻을 좋은 말로써 묻기 때문이며,
그 뜻에 쉽게 만족하고 작은 일을 얻어 따르지만 만족한 줄 알기 때문이며,
아첨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말과 같이 행하기 때문이며,
다른 이를 속임이 없이 숲 속에 유행하며 모든 중생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네 가지 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짓는다고 합니다.
또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으니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어찌하여 네 가지입니까?
나쁜 마음을 내지 않으니 안으로 적정하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마음을 내지 않으니 밖으로 뒤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며,
아끼는 마음을 내지 않으니 모든 일이 무상(無常)함을 관하기 때문이며,
교만한 마음을 내지 않으니 여실하게 모든 법을 알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네 가지 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짓는다고 합니다.
또 보살에게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어떠한 것이 네 가지입니까?
매우 깊은 마음을 얻어 앞의 뜻을 캐묻기 때문이며,
멀리 애욕과 물듦을 여의고 부드러우며 연하고 사랑스런 말씨를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마음을 버렸지만 항상 보리심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며,
깊은 마음으로 제일의(第一義)에서 세제(世諦)를 수순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 네 가지 법으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짓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또 세존이시여, 보살은 제일공(第一空)을 얻고 큰 6통과 3명[通明]을 얻고 큰 자재를 얻고 잘 알면서 법집을 말하고 매우 깊은 법을 사랑하고 좋아하여 모든 중생을 수순하면 마침내 불가사의하며 희유한 법을 얻을 것이며, 유연한 법을 얻을 것이며, 큰 신통을 얻을 것이며, 큰 법사(法師)가 될 것이며, 큰 법왕(法王)이 될 것이며, 크게 짓는 사람이 될 것이며, 큰 중생의 의지할 곳이 될 것이며, 큰 신통을 얻어 떨치게 될 것이며, 중생을 교화함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도 나는 것이 아니며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지을 것을 이미 이루고 보리를 이루어, 해탈의 마음을 얻고 정진하여 열반에 들어서 만족함을 행하면 구해도 구함이 아니며, 일체지(一切智)를 수행하여 다른 이에게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바다는 헤아릴 수 있어도 저 보살마하살의 대승(大乘)인 지혜의 바다는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허공이 청정하다고 하여도 티끌이 있지만저 보살마하살의 마음은 물들일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바람은 비록 형체가 없지만 손으로써 잡을 수 있지만 저 보살마하살의 마음은 6진(塵)의 경계가 붙을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봄볕의 따뜻한 햇살이 이마를 어루만지지만 저 보살마하살은 나와 내 것이라는 마음은 얻을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고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
[선목보살, 보리심을 내는 것]
이때에 선목(善目)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보살이 모든 법을 닦음에 오직 보리심을 내는 것이 근본이 됩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모두 허망한데 오직 마음으로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체(體)에는 모든 물질이 없어 모든 물질을 여의었고, 요술같이 근본부터 없으며, 구하는 것을 따라 이루어지니 짓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멀리 여의면 그 성품은 머물지 않고 모든 머묾을 여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일체의 법은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으니 둘이 없고 둘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니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평등함이 저 법계와 같으니 나그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주인이 아니니 모든 탐욕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분별과 갖가지 분별을 여의었으니 취할 수 있는 것과 버리는 마음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니 오직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며 공함이 주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때에 저 어리석은 범부는 내가 없는 법 가운데 나라는 생각을 내며 중생이 없는 가운데 중생이라는 생각을 냅니다.
보살은 ‘나는 이와 같은 묘한 법으로써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게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보리심(菩提心), 모든 중생의 안온한 마음, 즐거운 마음, 더할 나위 없는 마음, 법계의 마음, 광명의 마음, 중생의 주지(住持)하는 마음이라고 하며,이와 같은 마음에 의지해서 내는 것을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합니다.
또 세존이시여, 단바라밀(檀波羅蜜)을 수행하니 적정심(寂靜心)이라고 하며,
시바라밀을 수행하니 이지러지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인욕바라밀을 수행하니 손해나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니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선바라밀을 수행하니 산란하지 않은 마음이라 하며,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니 분별하고 허망하지 않은 마음이라 하며,
대자(大慈)를 수행하니 유연한 마음이라 하며,
대비(大悲)를 수행하니 물러나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대희(大喜)를 수행하니 염족(厭足:물리거나 만족함)함이 없는 마음이라 하며,
대시(大施)를 수행하니 아끼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애행(愛行)을 수행하니 숲에 살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이익행(利益行)을 수행하니 평등한 마음이라 하며,
동사(同事)를 수행하니 최상의 마음이라 하며,
공혜(空慧)를 수행하니 분별이 없는 마음이라 합니다.
무상지(無相智)를 수행하니 생각이 없는 마음이라 하며,
무원(無願)을 수행하니 머물지 않는 마음이라 하며,
보리행(菩提行)을 수행하니 37보리분(菩提分)의 마음이라 하며,
진취행(進趣行)을 수행하니 염불(念佛)하는 마음이라 하며,
불파괴행(不破壞行)을 수행하니 염법(念法)하는 마음이라 하며,
법계심(法界心)을 수행하니 염승(念僧)하는 마음이라 하며,
무량심(無量心)을 수행하니 염계(念戒)하는 마음이라 하며,
불취심(不取心)을 수행하니 염사(念捨)하는 마음이라 하며,
염천심(念天心)을 수행하니 모든 선근(善根)을 생각한다고 이름합니다.
모든 선근을 모아서 장엄하는 까닭으로 저 뛰어난 곳에 태어나 보리심을 내고 모든 선근을 모으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보리심을 낸 것에 의지한 것을 말한다면 한 겁이나 헤아릴 수 없는 겁에도 다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보살은헤아릴 수 없는 인연을 모아서 보리심을 냅니다.
이런 까닭으로 세존이시여, 모든 선법(善法)을 추구하고자 하는 보살은 보리심을 낸 가운데서 알고 구함이 마땅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 이름합니다.”
[선생보살, 법의 근본]
이때에 선생(善生)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잘 생기는 것은 근본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이 모든 법의 근본이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공(空)을 근본으로 삼는데 저곳에는 모든 견(見)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상(相)이 없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데 저곳에는 모든 각관(覺觀)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무원(無願)을 근본으로 삼는데 저곳에는 삼계(三界)의 번뇌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무행(無行)을 근본으로 삼는데 저곳에는 지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무아(無我)를 근본으로 삼는데 저곳에는 나의 실천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중생을 여의는 것으로 근본을 삼으니, 저곳에는 중생의 실천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수명이 없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니 저곳에는 수명이 행해지지 못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생겨나지 않으니 저곳에는 상견(常見)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없어지지 않으니 저곳에는 단견(斷見)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에는 물질이 없으니 저곳에는 유견(有見)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열반과 같이 평등하니 저곳에는 유견을 여읨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보리와 같으니 저곳에는 부처님을 뵈옴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지을 것이 아니니 저곳에는 법을 봄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은 화합하지 않으니 저곳에는 스님을 뵘이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 합니다.”
[대도사보살, 대자대비]
이때에 대도사(大導師)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먼저 모든 중생과 더불어 대보리(大菩提)를 내고자 하면자신을 위하여 대보리를 증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보살이 업을 짓는다면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중생을 보지 못하더라도 대자대비한 마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살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보살의 대자대비입니까?
세존이시여, 만약 보살이 중생을 보지 못하지만 모든 선근의 수행을 버리지 않고 저 모든 선근을 대보리로 회향하면 이것을 대자(大慈)라 하며,
만약 보살이 모든 중생이 짓는 일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大悲)라 합니다.
만약 보살이 세간법이 곧 열반임을 보고 도를 모아 정진함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중생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라 이름합니다.
만약 자신이 보리심을 내면 이것을 대자라 이름합니다.
만약 모든 중생을 교화하면 이것을 대비라고 합니다.
만약 안팎의 모든 물질을 버리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안팎의 선근을 버리고 모든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보리를 얻어 더할 나위없는 도에 회향하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맑고 깨끗하게 일체 계율을 지켜 헐뜯지 않고 범하지 않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스스로 맑고 깨끗하게 계율을 지키고 중생들이 계율을 밝고 깨끗하게 함을 증장시키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스스로 안온하게 인욕을 수행하여 즐겁게 실천하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안온한 인욕으로 모든 중생과 함께 즐기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자신이 항상 정진의 실천을 수행하여 모든 부처님의 더할 나위 없는 보리를 얻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큰 정진의 행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정진을 얻게 한다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자신이 항상 적정함을 실천하면 이것을 대자라 합니다.
만약 적정한 실천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적정을 얻게 하면 이것을 대비라고 합니다.
만약 자신이 가득한 지혜를 닦으면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자신의 지혜로써 모든 중생의 지혜를 증장시키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수행하지 않거나 수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짓지 않거나 또한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태어났으되 죽지 않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가되 움직이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말하되 말이 없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집착하되 얽매이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얽매이되 얽매이지 않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열반에 들되 없어지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자신에게서 사리(舍利)가 나왔으되 뼈ㆍ살ㆍ힘줄ㆍ피가 없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저 신골(身骨)을 닦되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만약 버리고 보시하되 물건을 버리지 않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모든 얻을 것을 얻었지만 성취하지 않으면 이것을 대자라 하며
만약 증장했지만 높지 않으면 이것을 대비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을 이름하여 뛰어나게 묘한 법집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