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방랑의 길
옥에서는 나왔으나 어디로 갈 바를 몰랐다. 늦은 봄 안개가 자욱한 데다가 인천은
연전 서울 구경왔을 때에 한 번 지났을 뿐이라, 길이 생소하여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물결소리를 더듬어서 모래사장을
헤매다가 훤히 동이 틀 때에 보니 기껏 달아난다는 것이 감리서 바로 뒤 용동
마루턱이에 와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휘휘 둘러보노라니 수십 보밖에 순검 한
명이 칼 소리를 제그럭제그럭 하고 내가 있는 데로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길가 어떤
가겟집 함실 아궁이를 덮은 널빤지 밑에 몸을 숨겼다. 순검의 흔들리는 환도집이 바로
코끝을 스칠 듯이 지나갔다.
아궁이에서 나오니 벌써 환하게 밝았는데, 천주교당의 뾰족집이 보였다. 그것이
동쪽인 줄 알고 걸어갔다.
나는 어떤 집에 가서 주인을 불렀다. 누구냐 하기로 "아저씨 나와 보세요."하였더니
그는 나와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김창수인데 간밤에 인천감리가
비밀히 석방하여 주었으나 이 꼴을 하고 대낮에 길을 갈 수가 없으니 날이 저물
때까지 집에 머물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주인은 안된다고 거절하였다. 또 얼마를
가노라니까 모군꾼 하나가 상투바람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소리를 하며 내려왔다. 그는
식전에 막걸리 집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또 사실을 말하고 빠져날갈 길을
물었더니, 그 사람은 대단히 친절하게 나를 이끌고 좁은 뒷골목 길로 요리조리 사람의
눈에 안띄게 화개동 마루터기까지 가서 이리 가면 수원이요, 저리 가면 시흥이니,
마음대로 어느 길로든지 가라고 일러주었다. 미처 그의 이름을 못 물어 본 것이
한이다.
나는 서울로 갈 작정으로 시흥 가는 길로 들어섰다. 내 행색을 보면 누가 보든지
참말로 도적놈이라고 할 것이다. 염병에 머리털은 다 빠져서 새로 난 머리카락을
노끈으로 비끌어 매어서 솔잎상투로 짜고 머리에는 수건을 동이고, 두루마기도 없이
동저고릿바람인데, 옷은 가난한 사람의 것이 아닌 새 것이면서 땅 밑으로 기어 나올
때에 군데군데 묻은 흙이 물이 들어서 스스로 살펴보아도 평상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아니하였다.
인천 시가를 벗어나서 5리쯤 가서 해가 떴다. 바람결에 호각소리가 들리고 산에도
사람이 희끗희끗 하였다. 내 이런 꼴로는 산에 숨더라도 수사망에 걸릴 것 같으므로
허허실실로 차라리 대로변에 숨으리라 하고 길가 잔솔밭에 들어가서 솔포기 밑에 몸을
감추고 드러누웠다. 얼굴이 감추어지지 않는 것은 솔가지를 꺾어서 덮어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칼찬 순검과 벙거지 쓴 압뢰들이 지껄이며, 내가 누워 있는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의 주고 받는 말에서 나는 조덕근은 서울로, 양봉구는 배로 달아난 것을 알았고,
내게 대해서는 "김창수는 장사니까 잡기 어려울 거야. 허기야 잘 달아났지. 옥에서
썩으면 무얼하게."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나는 다 알 수
있었다.
나는 온종일 솔포기 밑에 누워 있다가 순검이 누구누구며 압뢰 김장석 등이 도로 내
발부리를 지나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야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 나오니 벌써
황혼이었다. 나오기는 하였으나 어제 이른 저녁밥 이후로는 물 한 방울 못 먹어 보고
눈 한 번 못 붙인 나는 배는 고프고 몸은 곤하여 촌보를 옮기기가 어려웠다.
나는 가까운 동네 어떤 집에 가서, 황해도 연안에 가서 쌀을 사 가지고 오다가
북성고지 앞에서 배 파선을 한 서울 청파 사람이라고 말하고 밥을 좀 달라고 하였더니
주인이 죽 한 그릇을 내다 주었다. 나는 누구에게 정표를 받아서 몸에 지니고 있던
화류 면경을 꺼내어 그 집 아이에게 뇌물로 주고 하룻밤 드새기를 청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였다. 그러고 보니 죽 한 그릇에 엽전 한 냥을 주고 사먹은 셈이 되었다. 그때
엽전 한 냥이면 쌀 한 말 값도 더 되었다. 나는 또 한 집 사랑에 들어갔으나 또
퇴짜를 맞고 하릴없이 방앗간에서 자기로 하였다. 나는 옆에 놓인 짚단을 날라다가
깔고 덮고 드러누웠다. 인천 감옥 이태의 연극이 이에 막을 내리고 방앗간 잠이 둘째
막의 개시로구나, 하면서 소리를 내어서 "손무자"와 "삼략"을 외웠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지가 글을 다 읽는다."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또 어떤 사람이,
"예사 거지가 아니야. 아까 저 사랑에 온 것을 보니 수상한 사람이야."
하는 말에는 대단히 켕겼다. 그래서 나는 미친 사람의 모양을 하노라고 귀둥대둥 혼자
욕설을 퍼붓다가 잠이 들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버리고개를 향하고 소로로 가다가 밥을 빌어 먹을 생각으로
어떤 집 문전에 섰다. 나는 거지들이 기운차고 넌출지게 밥을 내라고 떠들던 양을
생각하고,
"밥 좀 주시우."
하고 불러 보았으나, 내깐에는 소리껏 외친다는 것이 개가 짖을 만한 소리밖에 안
나왔다. 주인은 밥은 없으니 숭늉이나 먹으라고 숭늉 한 그릇을 주었다. 그것을 얻어
먹고 또 걸었다.
오랫동안 좁은 세계에서 살다가 넓은 천지에 나와서 가고 싶은 대로 활활 갈 수
있는 것이 참으로 신통하고 상쾌하였다. 나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옥에서 배운 시조와
타령을 하면서 부평, 시흥을 지나 그날 당일로 양화도 나루에 다다랐다. 강만 건너면
서울이건마는 날은 저물고 배는 고프고, 또 나룻배를 탈래야 선가 줄 돈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동네 서당을 찾아 들어갔다.
선생과 인사를 청한즉 그는 내가 나이 어리고 의관이 분명치 못함을 봄인지 초면에
하대를 하였다. 나는 정색하고,
"선생이 이렇게 교만무례하고 어찌 남을 가르치겠소? 내가 일시 운수가 불길하여
길에서 도적을 만나 의관과 행리를 다 빼앗기고 이 꼴로 선생을 대하게 되었소마는
사람을 그렇게 괄시하는 법이 어디 있소. 허, 예절을 알 만한 이를 찾아온다는 것이,
어 참, 봉변이로고."
하고 일변 책하고 일변 빼었다. 선생은 곧 사과하고 다시 인사를 청하였다. 그러고는
그날 밤을 글 토론으로 지내고 아침에는 선생이 아이 하나에게 편지를 써 주기에
나룻배 주인에게 전하여 나를 선가 없이 건너게 하였다.
나는 옥에서 사귀었던 진오위장을 찾아갔다. 이 사람은 남영희궁에 청지기로 있는
사람으로서 배오개 유기장이 5, 6인과 짜고 배를 타고 인천 바다에 떠서 백동전을
사주하다가 깡그리 붙들려서 일년 동안이나 나와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그들은 내게
생전 못잊을 신세를 졌노라 하여 나에게 출옥하는 날에는 꼭 찾아 달라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내가 영희궁을 찾아간 것은 황혼이었다. 진오위장은 마루 끝에 나와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아이구머니, 이게 누구요?"
하고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내려 와서 내게 매달렸다. 그리고 내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서 내가 나온 곡절을 듣고는 일변 식구들을 불러서 내게 인사를 시키고 일변
사람을 보내어 예전 공범들을 청해 왔다. 그들은 내 행색이 수상하다 하여 '나는 갓을
사 오리다.' '나는 망건을 사 오겠소.' '나는 두루마기를 내리다.'하여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추렴을 모아서 나는 3, 4년 만에 비로소 의관을 하고 나니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진오위장 일파와 모여 놀며 며칠을 유련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조덕근을 두 번이나 찾아 갔으나, 이 핑계 저 핑계 하고 나를
전혀 만나주지 아니하였다. 중죄인인 나를 아는 체하는 것이 이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오위장 집에서 잘 먹고, 잘 놀고 수일을 쉬어서 여러 사람이 모아 주는 노자를 한
짐 잔뜩 걸머지고 삼남 구경을 떠나노라고 동작이 나루를 건넜다. 그때에 내 심회가
심히 울적하여 승방뜰이라는 데서부터 술 먹기를 시작하여 매일 장취로 비틀거리고
걷는 길이 수원 오산장에 다다랐을 때에 벌써 한 짐 돈을 다 써 버리고 말았다. 나는
오산장에서 서쪽에 있는 김삼척의 집을 찾기로 하였다. 주인은 삼척 영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아들이 6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맏아들인 김동훈이 인천항에서 장사를
하다가 실패한 관계로 인천옥에서 한 달 정도 고생을 할 때에 나와 절친하게
되었었다. 그가 옥에서 나올 때 내 손을 잡고 꼭 훗일에 서로 만나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나는 김삼척 집에서 대환영을 받아서 그 아들 6형제와 더불어 밤낮으로
술을 먹고 소리를 하며 며칠을 놀다가 노자까지 얻어 가지고 또 길을 떠났다.
강경에 공종렬을 찾으니 그도 인천옥에서 사귄 사람으로서 그 어머니도 옥에
면회하러 왔을 때에 알았으므로 많은 우대를 받고, 공종렬의 소개로 그의 매부
진선전을 전라도 무주에서 찾은 후, 나는 이왕 삼남에 왔던 길이니 남원에 김형진을
찾아 보리라 하고 이동을 찾아갔다. 동네 사람 말이 김형진의 집이 과연 대대로 이
동네에 살았으나 연전에 김형진이 동학에 들어서 가족을 끌고 도망한 후로는 소식이
없다고 했다. 나는 대단히 섭섭하였다.
전주 남문 안서에 약국을 하는 최군선이가 자기의 매부라는 말을 김형진한테
들었던 것을 기억하고 찾아갔으나 최는 대단히 냉냉하게, 그가 처남인 것은 사실이나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고 벌써 죽었다고 원망조로 말한 뿐이었다. 나는 비감을 누를
수 없어서 부중으로 헤매었다. 마침 그날이 전주 장날이어서 사람이 많았다. 나는 어떤
백목전 앞에 서서 백목을 파는 청년 하나를 보았다. 그의 모습이 김형진과
흡사하기로 그가 흥정을 하여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붙잡고,
"당신 김 서방 아니오?"
하고 물은즉, 그가 그렇다고 하기로 나는 다시,
"노형이 김형진씨 계씨 아니시오?"
하였더니 그는 무슨 의심이 났는지 머뭇머뭇하고 대답을 못했다. 나는,
"나는 황해도 해주 사는 김창수요. 노형 백씨 생전에 혹시 내 말을 못 들으셨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형이 생전에 노상 내 말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임종시에도 나를 못 보고 죽는 것이 한이라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다.
나는 그 청년을 따라서 금구 원평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조그마한 농가였다.
그가 그 어머니와 형수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고하니 집안에서는 곡성이 진동하였다.
김형진이 죽은 지 열 아흐레째 되는 날이었다.
나는 궤연(신주를 모신 곳)에 곡하고 늙은 어머니와 젊은 과수에게 인사를 하였다.
고인에게는 맹문이라는 8, 9세 되는 아들이 있고, 그의 아우에게는 맹렬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가버린 벗을 생각하여 수일을 더 쉬고 목포로 갔다. 그것도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의 목포는 아직 신개항지여서 관청의 건축도 채
아니 된 엉성한 곳이었다. 여기서 우연히 양봉구를 만났다. 나와 같이 탈옥한 넷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게서 나는 조덕근이가 다시 잡혀서 눈 하나가 빠지고 다리가
부러졌다는 말과 그때에 당직이던 김가가 아편인으로 옥에서 죽었단 말을 들었다.
내게 관한 소문은 못 들었다고 하였다. 양봉구는 약간의 노자를 내게 주고 이곳은
개항장이 되어서 팔도 사람이 다 모여드는 데니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 하여 어서
떠나라고 권하였다.
나는 목포를 떠나서 광주를 지나 함평에 이름난 육모정 이진사 집에 과객으로
하룻밤을 잤다. 이 진사는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육모정에는 언제나 빈객이
많았고 손님들께 조석을 대접할 때에는 이 진사도 손님들과 함께 상을 받았다. 식상은
주인이나 손님이나 일체 평등이요, 조금도 차별이 없었고 하인들이 손님들을 대하는
태도는 그 주인께 대하는 것과 꼭같이 하였다. 이것은 주인 이진사의 인격의
표현이어서 참으로 놀라운 규모요, 가풍이었다.
육모정은 이진사의 정자여니와 그 속에는 침실, 식당, 응접실, 독서실, 휴양실 등이
구비되었다. 그때에 글을 읽던 두 학동이 지금의 이재혁, 이재승 형제다.
나는 하룻밤을 쉬어 떠나려 하였으나 이 진사가 굳이 만류하여 얼마든지 더 묵어서
가라는 말에는 은근한 신정이 품겨 있었다. 나는 주인의 정성에 감동되어 육모정에서
보름을 묵었다.
내가 내일은 이 진사 집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 집으로 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다소 연장자인 장년의 한 선비로 내가 육모정에 묵는 동안 날마다 와서
담화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청을 물리칠 수가 없어서 저녁밥을 먹으러 그의 집으로 갔다. 집은 참말
게딱지와 같고 방은 단 한 칸 뿐이었다. 그 부인이 개다리 소반에 주인과 겸상으로
저녁상을 들여 왔다. 주발 뚜껑을 열고 보니 밥은 아니요, 무엇인지 모를 것이었다.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으니 맛이 쓰기가 곰의 쓸개와 같았다. 이것은 쌀겨와 팥으로
만든 겨범벅이었다. 주인은 내가 이 진사 집에서 매일 흰 밥에 좋은 반찬을 먹는 것을
보았지마는 조금도 안 되었다는 말도 없고 미안하다는 빛도 없이 흔연히 저도 먹고
내게도 권하였다. 나는 그의 높은 뜻과 깊은 정에 감격하여 조금도 아니 남기고 다
먹었다.
나는 함평을 떠나 강진, 고금도, 완도를 구경하고 장흥을 거쳐 보성으로 갔다.
보성서는 송곡면(지금은 득량면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득량리에 사는 종씨
김광언이라는 이를 만나 그 여러 댁에서 40여 일이나 묵고 떠날 때에는 그 동네에
사는 선씨 부인한테 필냥 하나를 신행 선물로 받았다.
보성을 떠나 나는 화순, 동복, 순창, 담양을 두루 구경하고 하동 쌍계사에 들러
칠자아자방을 보고 다시 충청도로 올라와 계룡산 갑사에 도착한 것은 감이 벌겋게
익어 달리고, 낙엽이 날리는 늦은 가을이었다. 나는 절에서 점심을 사먹고 앉았더니
동학사로부터 왔노라고 점심을 시켜 먹는 유산객 하나가 있었다. 통성명을 한즉, 그는
공주에 사는 이 서방이라고 하였다. 연기는 40이 넘은 듯한데 그가 들려 주는 자작의
시로 보거나 그의 말로 보거나 퍽 비관을 품은 사람이었다. 비록 초면이라도 피차가
다 허심탄회한 말이 서로 맞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기로, 나는 개성에서
생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일년이 장근하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가 40리 밖에 아니 되니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이 마곡사 팥죽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 동지 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길을 걸으면서 이 서방은 홀아비라는 것이며, 사숙의 훈장으로 여러 해 있었다는
것이며, 지금은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려 하니 나도 같이 하면 어떠냐고 하였다.
나도 중이 될 마음이 없지는 아니하나 돌연히 일어난 문제라 당장에 대답은
아니하였다.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유자비추풍'의 감회를 깊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 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 왔다. 저녁 예불을 알리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 같이 들렸다.
이 서방이 다시 다져 물었다.
"김형, 어찌하시려오? 세사를 다 잊고 나와 같이 중이 됩시다."
나는 웃으며,
"여기서 말하면 무엇하오?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안개를 헤치고 고개를 내려서 산문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갔다.
걸음마다 내 몸은 더러운 세계에서 깨끗한 세계로 지옥에서 극락으로,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옮아 가는 것이었다. 매화당을 지나 소리쳐 흐르는 내 위에 걸린 긴
나무다리를 건너 심검당에 들어가니 머리 벗어진 노승 한 분이 그림폭을 펴 놓고
보다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이 서방은 전부터 노승과 숙면이었고, 그는
포봉당이라는 이었다. 이 서방이 나를 심검당에 두고 자기는 다른 데로 갔다. 이윽고
나를 위하여 밥이 나왔다. 저녁상을 물리고 앉았노라니 어떤 하얗게 센 노승 한 분이
와서 내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나는 거짓말로 본래 송도 태생이던., 조실부모하고
강근지친도 없어서 혈혈단신이 강상 구경이나 다니노라고 말하였다. 그런즉 그 노승은
속성은 소씨요, 익산 사람으로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된 지가 50년이나 되노라 하고,
은근히 나더러 상좌가 되기를 청하였다. 나는 본시 재질이 둔탁하고 학식이 척박하여
노사에게 누가 될까 저어하노라 하고 겸사하였더니 그는 내가 상좌만 되면, 고명한
스승의 밑에서 불학을 공부하면 장차 큰 강사가 될지 아느냐고 강권하였다.
이튿날 이 서방은 벌써 머리를 달걀같이 밀고 와서 내게 문안을 하고 하는 말이,
하은당이 이 질 안에 갑부인 보경 대사의 상좌이니 내가 하은당의 상좌만 되면 내가
공부하기에 학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어서 삭발하기를 권하였다. 나도 하룻밤
청정한 생활에 모든 세상 잡념이 식은 재와 같이 되었으므로 출가하기로 작정하였다.
얼마 후에 나는 놋칼을 든 사제 호덕삼을 따라서 냇가로 나아가 쭈그리고 앉았다.
덕삼은 삭발진언을 송알송알 부르더니 머리가 선뜩하며 내 상투가 모래 위에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한 일이건마는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다.
법당에서는 종이 울렸다. 나의 득도식을 알리는 것이었다. 산내 각 암자로부터
착가사 장삼한 수백 명의 승려가 모여 들고 향적실에서는 공양주가 불공밥을 짓고
있었다. 나도 검은 장삼, 붉은 가사를 입고 대웅보전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곁에서
덕삼이가 배불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은사 하은당이 내 법명을 원종이라고 명하여
불전에 고하고 수계사 용담 회상이 경문을 낭독하고 내게 오계를 준다. 예불의 절차가
끝난 뒤에는 보경 대사를 위시하여 산중에 나이 많은 여러 대사들께 차례로 절을
드렸다. 그리고는 날마다 절하는 공부를 하고 진언집을 외우고 초발심자경문을 읽고
중의 여러 가지 예법과 규율을 배웠다. 정신 수양에 대하여는,
'승행에는 하심이 제일이라.'
하여 교만한 마음을 떼는 것을 주고 삼았다. 사람에게 대하여서만이 아니라 짐승.
벌레에 대하여서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다. 어젯밤 나더러 중이 되라고
교섭할 때에는 그렇게도 공손하던 은사 하은당이 오늘 낮부터는,
"얘, 원종아."
하고 말 해라를 하고,
"이놈 생기기를 미련하게 생겨 먹었으니 고명한 중은 될까 싶지 않다. 상판대기가
저렇게도 밉게 생겼을까. 어서 가서 나무도 해오고 물도 길어!"
하고 막 종으로 부리려 든다. 나는 깜짝 놀랐다. 중이 되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내가 망명객이 되어 사방으로 유리하는 몸은 되었지마는 영웅심도 있고
공명심도 있고 평생에 한이 되던 상놈의 껍질을 벗고 양반이 되어도 월등한 양반이
되어서 우리 집을 멸시하던 양반들을 한번 내려다 보겠다는 생각을 가슴 속에 감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중놈이 되고 보니 이러한 허영적인 야심은 불씨 문중에서는
터럭끝만치도 용서하지 못하는 악마여서 이러한 악념이 마음에 움틀 때에는
호법선신의 힘을 빌어서 일체법공의 칼로 뿌리째 베어 버려야 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데를 들어왔나 하고 혼자 웃고 혼자 탄식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기왕 중이
되었으니 하라는 대로 순종할 길밖에 없었다. 나는 장작도 패고 물도 긷고 하라는
것은 다하였다.
하루는 물을 길어오다가 물통 하나를 깨뜨린 죄로 스님한테 눈알이 빠지도록 야단을
맞았다. 어떻게 심하게 스님이 나를 나무라셨는지 보경당 노승님께서 한탄을 하셨다.
"전자에도 남들이 다 괜찮다는 상좌를 들여 주었건마는 저렇게 못 견디게 굴어서 다
내어 쫓더니 이제 또 저렇게 하니 원종인들 오래 붙어 있을 수가 있나. 잘 가르치면
제 앞쓸이는 할 만하건마는."하고 하은당을 책망하셨다. 이것을 보니 나는 적이 위로가
되었다.
나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이면 다른 사미들과 같이 예불하는 법이며 "천수경",
"심경" 같은 것을 외고 또 수계사이신 용담 스님께 "보각서장"을 배웠다. 용담은 다시
마곡에서 불학만이 아니라 유가의 학문도 잘 아시기로 유명한 이었다. 학식만이
아니라, 위인이 대체를 아는 이어서 누구나 존경할 만한 높은 스승이었다.
용담께 시중하는 상좌 혜명이라는 젊은 불자가 내게 동정이 깊었고 또 용담 스님도
하은당의 가풍이 괴상함을 가끔 걱정하시면서 나를 위로하셨다. '견월망지'라 달을
보면 그만이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야 아무러면 어떠냐 하는 말씀을 하시고, 또
칼날 같은 마음을 품어 성나는 마음을 끊으라 하여 '인'자의 이치를 가르쳐 주셨다.
하은당이 심하게 나를 볶으시는 것이 모두 내 공부를 도우심으로 알라는 뜻이다.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반 년의 세월이 흘러서 무술 년도 다 가고 기해년이
되었다. 나는 고생이 되지마는 다른 중들은 나를 부러워하였다. 보경당이나 하은당이
다 7, 80 노인이시니 그 분네만 작고하시면 그 많은 재산이 다 내 것이 된다는
것이었다. 추수기를 보면 백미로만 받는 것이 2백 석이나 되고, 돈과 물건으로 있는
것이 수십만 냥이나 되었다. 그러나 나는 청징적멸의 도법에 일생을 바칠 생각이
생기지 아니하였다. 인천옥에서 떠난 후에 소식을 모르는 부모님도 그 후에
어찌되셨는지 알고 싶고, 나를 구해 내려다가 집과 몸을 아울러 망쳐 버린 김주경의
간 곳도 찾고 싶고, 해주 비동에 고 후조 선생(후조는 고 선생의 당호다)도 뵙고 싶고,
그때에 천주학을 한다고 해서 대의의 반역으로 곡해하고 불평을 품고 떠난 청계동의
안 진사를 찾아 사과도 할 마음이 때때로 흉중에 오락가락하여 보경당의 재물에 탐을
낼 생각은 꿈에도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보경당께 뵈옵고,
"소승이 기왕 중이 된 이상에는 중으로서 배울 것을 배워야 하겠사오니 금강산으로
가서 경공부를 하고 일생에 충실한 불자가 되겠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보경당은 내 말을 들으시고,
"내 벌써 그럴 줄 알았다. 네 원이 그런데야 할 수 있느냐."
하시고 즉석에 하은당을 부르셔서 한참 동안 서로 다투시다가 마침내 나에게 세간을
내어주셨다. 나는 백미 열 말과 의발을 받아 가지고 하은당을 떠나 큰 방으로
옮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였다. 나는 그 쌀 열 말을 팔아서 노자를 만들어 마곡을
떠나 서울로 향하였다.
수일을 걸어 서울에 도착한 것은 기해년 봄이었다. 그때까지 서울성 안에는 승니를
들이지 않는 국금이 있었다. 나는 문 밖으로 이 절 저 절 돌아다니다가 서대문 밖
새절에 가서 하루 묵는 중에 사형 혜명을 만났다. 그는 장단 화장사에 은사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나는 금강산에 공부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혜명과 작별하고
나는 풍기 혜정이라는 중을 만났다. 그가 평양 구경을 가는 길이라 하기로 나와
동행하자고 하였다. 임진강을 건너 송도를 구경하고 나는 해주 감영을 보고 평양으로
가자 하여 혜정을 이끌고 해주로 갔다.
수양산 신광사 부근의 북암이라는 암자에 머물면서 나는 혜정에게 약간 내 사정을
통하고 그에게 텃골 집에 가서 내 부모와 비밀히 만나 그 안부를 알아오되, 내가 잘
있단 말만 사뢰고 어디 있단 것은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부탁해 놓고
혜정의 회보만 기다리고 있었더니 바로 4월 29일 석양에 혜정의 뒤를 따라 부모님
양주께서 오셨다. 혜정에게서 내 안부를 들으신 부모님은, 네가 내 아들이 있는 곳을
알 터이니 너만 따라가면 내 아들을 볼 것이다. 하고 혜정을 따라 나서신 것이었다.
북암에서 하루를 묵어서 양친을 모시고 나는 중의 행색으로 혜정과 같이 평양 길을
떠났다. 길을 가면서 한마디씩 하시는 말씀을 종합하건대, 무술년 3월 초아흐렛날
부모님은 해주 본향에 돌아오셨으나 순검이 뒤따라와서 두 분을 다 잡아다가 3월
13일에 인천옥에 가두었다. 어머니는 얼마 아니하여 놓으시고 아버지는 석 달 후에야
석방되셨다. 그로부터는 두 분이 꿈자리만 사나와도 종일 식음을 전폐하셨다. 그리하신
지 이태 만에 혜정이 찾아간 것이었다. 만나고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다행하나
중이 된 것은 슬프다고 하셨다.
5월 초나흗날 평양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여관에서 쉬고, 이튿날인 단오날에 모란봉
그네 뛰는 구경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 앞길에 중대한 영향을 준 사람을
만났다.
관동 골목을 지나노라니 어떤 집 사랑에, 머리에 지포관을 쓰고 몸에 심수의를 입고
두 무릎을 모으고 점잔하게 꿇어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문득 호기심을 내어
한 번 수작을 붙여 보리라 하고 계하에 이르러,
"소승 문안 드리오."
하고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그 학자님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들어오라고
하였다. 들어가 인사를 한즉 그는 간재 전우의 문인 최재학으로 호를 극암이라 하여
상당히 이름이 높은 이었다. 나는 공주 마곡사 중이란 말과 이번 오는 길에 천안
금곡에 전 간재 선생을 찾았으나 마침 출타하신 중이어서 못 만났다는 말과, 이제
우연히 고명하신 최 선생을 뵈오니 이만 다행이 없다는 말을 하고 몇 마디 도리의
문답을 하였더니 최 선생은 나를 옆에 앉은 어떤 수염이 좋고 위풍이 늠름한 노인에게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 진위대에 참령으로 있는 전효순이었다. 소개가 끝난 뒤에
최극암은 전참령에게,
"이 대사는 학식이 놀라우니 영천암 방주를 내이시면 영감 자제와 외손들의 공부에
유익하겠소. 영감 의향이 어떠시오?"
하고 나를 추천한다.
전참령은,
"거 좋은 말씀이요. 지금 곁에서 듣는 바에도 대사의 고명하심을 흠모하오. 대사
의향이 어떠시오? 내가 내 자식놈 하나와 외손자놈들을 최 선생께 맡겨서 영천암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지금 있는 주지승이 성행이 불량하여 술만 먹고 도무지 음식
제절을 잘 돌아보지를 아니하여서 곤란 막심하던 중이요."
하고 내 허락을 청하였다. 나는 웃으며,
"소승의 방랑이 본래 있던 중보다 더할지 어찌 아시오?"
하고 한번 사양했으나 속으로 다행히 여겼다. 부모님을 모시고 구걸하기도 황송하던
터이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고 싶었던 까닭이다.
전참령은 평양서윤 홍순욱을 찾아가더니 얼마 아니하여 '승 원종으로 영천사
방주를 차정함'하는 첩지를 가지고 와서 즉일로 부임하라고 나를 재촉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영천암 주지가 되었다.
영천암은 평양서 서쪽으로 약 40리, 대보산에 있는 암자로서 대동강 넓은 들과
평양을 바라보는 경치 좋은 곳에 있었다. 나는 혜정과 같이 영천암으로 가서 부모님을
조용한 방에 거처하시게 하고 나는 혜정과 같이 한 방을 차지하였다. 학생이란 것은
전효순의 아들 병헌, 그의 사위 김윤문의 세 아들 장손, 중손, 차손과 그 밖에 김동원
등 몇몇이 있었다. 전효순은 간일하여 좋은 음식을 평양에서 지워 보내고 또 산밑
신흥동에 있는 육고에서 영천사에 고기를 대기로 하여 나는 매일 내려가서 고기를 한
짐씩 져다가 끓이고 굽고 하여 중의 옷을 입은 채로 터놓고 막 먹었다. 때때로
최재학을 따라 평양에 들어가서도 사숭재에서 시인 황경환 등과 시화나 하고 고기로
꾸미한 국수를 막 먹었다. 그리고 염불은 아니하고 시만 외우니 불가에서 이르는 바
'손에 돼지 대가리를 들고 입으로 경을 읽는' 중이 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 시승
원종이라는 칭호는 얻었으나 같이 와 있던 혜정에게 실망을 주었다. 혜정은 내 심신이
쇠하고 속심만 증장하는 것을 보고 매우 걱정하였으나 고기 안주에 술 취한 중의 귀에
그런 충고가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는 내 불심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보고
영천암을 떠난다 하여 행리를 지고 나서서 산을 내려가다가는 차마 나와 작별하기가
어려워서 되돌아오기를 달포나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로 간다고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도 내가 다시 머리를 깎는 것을 원치 아니하셔서 나는 머리를 기르고 중노릇을
하다가 그 해 가을도 늦어서 나는 다리를 들여서 상투를 짜고 선비의 의관을 하고
부모를 모시고 해주 본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고, 창수가 돌아왔으니 또 무슨 일
저지르기를 하지나 않나 하고 친한 이는 걱정하고 남들은 비웃었다. 그 중에도 준영
계부는 아무리 하여도 나를 신임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지금은 마음을 잡아서 그
중씨이신 아버지께도 공순하고 농사도 잘하시건마는 내게 대하여는 도리없는 난봉으로
아시는 모양이어서,
"되지 못한 그놈의 글 다 내버리고 부지런히 농사를 한다면 장가도 들여 주고
살림도 시켜 주지만 그렇지 아니한다면 나는 몰라요."
하고 부모님께 나를 농군이 되도록 명령하시기를 권하셨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농군을 만드실 뜻이 없으셔서 그래도 무슨 큰 뜻이 있어 장래에 이름난 사람이 되려니
하고 내게 희망을 붙이시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내가 농군이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버지 형제분 사이에 논쟁이 되고 있는 동안에 기해년도 다 가고 경자년 봄
농사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계부는 조카인 나를 꼭 사람을 만들려고 결심하신 모양이어서 새벽마다 우리 집에
오셔서 내 단잠을 깨워서 밥을 먹여 가지고는 가래질터로 끌고 나갔다. 나는 며칠
동안 순순히 계부의 명령에 복종하였으나 아무리 하여도 마음이 붙지 아니하여 몰래
강화를 향하여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고 선생과 안 진사를 못 찾고 가는 것이
섭섭하였으나 아직 내어놓고 다닐 계제도 아니므로 생소한 곳으로 가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김두래라고 변명하고 강화에 도착하여서 남문 안 김주경의 집을 찾으니
김주경은 어디 갔는지 소식이 없다 하고 그 세째 아우 진경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나를
접대하였다.
"나는 연안 사는 김두래일세. 자네 백씨와 막역한 동지일러니 수년간 소식을 몰라서
전위해 찾아온 길일세."
하고 나를 소개하였다. 경진은 나를 반가이 맞아 그동안 지낸 일을 말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주경은 집을 떠난 후로 3, 4년이 되어도 음신이 없어서 진경이가 형수를 모시고
조카들을 기르고 있다고 했다. 집은 비록 초가나, 본래는 크고 넓게 썩 잘 지었는데
여러 해 거두지를 아니하여 많이 퇴락되었다.
사랑에는 평소에 주경이 앉았던 보료가 있고 신의를 어기는 동지를 친히 벌하기에
쓰던 것이라는 나무 몽둥이가 벽상에 걸려 있었다. 나와 노는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주경의 아들인데 이름이 윤태라고 했다.
나는 진경에게 모처럼 그 형을 찾아왔다가 그저 돌아가기가 섭섭하니 얼마 동안
윤태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소식을 기다리고 싶다고 하였더니 진경은, 그렇지 않아도
윤태와 그 중형의 두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었건마는 적당한 선생이 없어서
놀리고 있었다는 말을 하고, 곧 그 중형 무경에게로 가서 조카 둘을 데려왔다. 나는
이날부터 촌 학구가 된 것이었다. 윤태는 "동몽선습", 무경의 큰 아들은 "사략초권",
작은 놈은 "천자문"을 배우기로 하였다. 내가 글을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서 차차
학동이 늘어서 한 달이 못 되어 삼십 명이나 되었다. 나는 심혈을 다하여 가르쳤다.
이렇게 한 지 석 달을 지낸 어느 날, 진경은 이상한 소리를 혼자 중얼거렸다.
"글쎄 유인무도 우스운 사람이야. 김창수가 왜 우리 집에를 온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말에 가슴이 뜨끔하였으나 모르는 체하였다. 그래도 진경은
내게 설명하였다. 그 말은 이러하였다.__
유인무는 부평 양반으로서 연전에 상제로 읍에서 삼십 리쯤 되는 곳에 이우해 와서
3년쯤 살다가 간 사람인데, 그때에 김주경과 반상의 별을 초월하여 서로 친하게 지낸
일이 있었는데 김창수가 인천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후에 여러 번째 해주 김창수가
오거든 급히 알려 달라는 편지를 하였는데 이번에 통진 사는 이춘백이라는 김주경과도
친한 친구를 보내니 의심 말고 김창수의 소식을 말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진경이가 내 행색을 아나 떠보려고,
"김창수가 그래 한 번도 안 왔나?"
하고 물었다. 진경은 딱하다는 듯,
"형장도 생각해 보시오. 여기서 인천이 지척인데 피신해 다니는 김창수가 왜
오겠소?"
한다.
"그럼 유인무가 왜놈의 염탐군인 게지."
나는 이렇게 진경에게 물어 보았다. 진경은,
"아니오. 유인무라는 이는 그런 양반이 아니오. 친히 뵈온 적은 없으나, 형님 말씀이
유 생원은 보통 벼슬하는 양반과는 달라서 학자의 기풍이 있다고 하오."
하고 유인무의 인물을 극구 칭송한다. 나는 그 이상 더 묻는 것도 수상쩍을 것 같아서
그만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튿날 조반 후에 어떤 키가 후리후리하고 얼굴이 숨숨 얽은, 50세나 되었음직한
사람이 서슴지 않고 사랑으로 들어오더니 내 앞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윤태를 보고,
"그 새에 퍽 컸구나. 안에 들어가서 작은 아버지 나오시래라 내가 왔다고."
하는 양이 이춘백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윽고 진경이가 윤태를 앞세우고 나와서 그 손님에게 인사를 한다.
"백씨 소식 못 들었지?"
"아직 아무 소식 없습니다."
"허어, 걱정이로군. 유인무의 편지 보았지?"
"네, 어제 받았습니다."
주객간에 이런 문답이 있고는 진경이가 장지를 닫아서 내가 앉아 있는 방을 막고
둘이서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아니 듣고 두 사람의 말에만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문답은 이러하였다.
"유인무란 양반이 지각이 없으시지, 김창수가 형님도 안 계신 우리 집에 왜
오리라고 자꾸 편지를 하는 거야요?"
"자네 말이 옳지마는 여기밖에 알아 볼 데가 없지 아니한가. 그가 해주 본 고향에
갔을 리는 없고 설사 그 집에서 김창수 있는 데를 알기로서니 발설을 할 리가 있겠나.
유인무로 말하면 아랫녁에 내려가 살다가 서울 다니러 왔던 길에 자네 백씨가
김창수를 구해 내려고 가산을 탕진하고 부지거처로 피신했다는 말을 듣고 나네 백씨의
의기를 장히 여겨서 아무리 하여서라도 김창수를 건져 내야 한다고 결심하였으나,
법으로 백씨가 할 것을 다하여도 안 되었으니 인제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서
열 세 명 결사대를 조직하였던 것일세.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야. 그래서 인천항 중요한
곳 7,8처에 석유를 한 통씩 지고 들어가서 불을 놓고 그 소란통에 옥을 깨뜨리고
김창수를 살려 내기로 하고 유인무가 나에게 두 사람을 데리고 인천에 가서 감옥
형편을 알아오라 하기로 가 본즉, 김창수는 벌써 사흘전에 다른 죄수 네 명을 데리고
달아난 뒤라 말이야. 일이 이렇게 된 것일세. 그러니 유인무가 자네 백씨나 김창수의
소식을 알고 싶어 할 것이 아닌가. 그래 정말 김창수한테서 무슨 편지라도 온 것이
없나?"
"편지도 없습니다. 편지를 보내고 회답을 기다릴 만하면 본인이 오지요."
"그도 그러이."
"이 생원께서는 인제 서울로 가시렵니까?"
"오늘은 친구나 몇 찾고 내일 가겠네. 떠날 때에 또 옴세."
이러한 문답이 있고 이춘백은 가 버렸다.
나는 유인무를 믿고 그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내게 그처럼 성의를 가진 사람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설사 그가 성의를 가장한 염탐꾼일는지 모른다 하여도 군자는
가기이방이라 의리로 알고 속은 것이 내 허물은 아니다. 이만큼 하는 데도 안
믿는다면 그것은 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진경에게 이튿날 이춘백이 오거든
나를 그에게 소개하기를 청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나는 진경에게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자백하고 유인무를 만나기
위하여 이춘백을 따라서 떠날 것을 말하였다. 진경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형님이 과시 그러시면 제가 만류를 어찌합니까."
하고 인천옥에 사령반수로서 처음으로 김주경에게 내 말을 알린 최덕만은 작년에
죽었다는 말을 하고 학동들에게는 선생님이 오늘 본댁에를 가시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라 하여 돌려보냈다.
이윽고 이춘백이 왔다. 진경은 그에게 나를 소개하였다. 나도 서울을 가니
동행하자고 하였더니 이춘백은 보통 길동무로 알고 좋다고 하였다. 진경은 춘백의
소매를 끌고 뒷방에 들어가서 내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내 나는 이춘백과 함께 진경의 집을 떠났다. 남문통에는 30명 학동과 그
학부형들이 길이 메이도록 모여서 나를 전송하였다. 내가 도무지 아무 훈료도 아니
받고 심혈을 기울여서 가르친 것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모양이어서 나는 기뻤다.
우리는 당일로 공덕리 박진사 태병의 집에 도착하였다. 이춘백이 먼저 안사랑으로
들어가서 얼마 있더니 키는 중키가 못 되고 얼굴은 볕에 그을려 가무스름하고 망건에
검은 갓을 쓰고 검소한 옷을 입은 생원님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방으로 맞아 들였다.
"내가 유인무요, 오시기에 신고하셨소. 남아하처불상봉이라더니 마침내 창수 형을
만나고 말았소."
하고 유인무는 희색이 만면하여 춘백을 보며,
"무슨 일이고 한두 번 실패한다손 낙심할 것이 아니란 말일세. 끝끝내 구하면
반드시 얻는 날이 있단 말야. 전일에도 안 그러던가."
하는 말에서 나는 그네가 나를 찾던 심경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나는 유인무에게,
"강화 김주경 댁에서 선생이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허다한 근로하신 것을 알았고,
오늘 존안을 뵈옵거니와 세상에서 침소봉대로 전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제 실물로
보시니 낙심되실 줄 아오. 부끄럽소이다."
하였다.
"내가 내 과거를 검사하였더니 용두사미란 말요."
유인무는,
"뱀의 꼬리를 붙들고 올라가면 용의 머리를 보겠지요."
하고 웃었다.
주인 박태병은 유인무와 동서라고 하였다. 나는 박진사 집에서 저녁을 먹고 문안
유인무의 숙소로 가서 거기서 묵으면서 음식점에 가서 놀기도 하고 구경도 하고
돌아다녔다. 며칠을 지나서 유인무는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 나를 충청도 연산
광이다리 도림리 이천경의 집으로 지시하였다. 이천경은 흔연히 나를 맞아서 한
달이나 잘 먹이고 잘 이야기하다가 또 편지 한 장과 노자를 주어서 나를 전라도
무주읍에서 삼포를 하는 이시발에게 보냈다. 이시발의 집에서 하루를 묵고, 또
이시발의 편지를 받아 가지고 지례군 천곡 성태영을 찾아갔다. 성태영의 조부가 원주
목사를 지냈으므로 성 원주 댁이라고 불렀다. 대문을 들어서니 수청방, 상노방에
하인이 수십 명이요, 사랑에 앉은 사람들은 다 귀족의 풍이 있었다. 주인 성태영이
내가 전하는 이시발의 편지를 보더니 나를 크게 환영하여 상좌에 앉히니 하인들의
대우가 더욱 융숭하였다. 성태영의 자는 능하요, 호는 일주였다. 성태영은 나를 이끌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물을 캐며 혹은 물에 나아가 고기를 보는 취미있는 소일을 하고,
혹은 등하에 고금사를 문답하여 어언 일삭이 되었는데, 하루는 유인무가 성태영의
집에 왔다. 반가이 만나서 성태영 집에서 하룻밤을 같이 자고 이튿날 아침에 같은
무주 읍내에 있는 유인무의 집으로 같이 가서 그로부터는 거기서 숙식을 하였다.
유인무는 내가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불편하리라 하여 이름은 거북 구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 호를 연하라고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부를 때에는
연하라는 호를 썼다.
유인무는 큰 딸은 시집을 가고 집에는 아들 형제가 있는데, 맏이의 이름은
한경이었고 무주 군수 이탁도 그와 연척인 듯하였다.
유인무는 그동안 나를 이리저리로 돌린 연유를 설명하였다. 이천경이나 이시발이나
성태영이나 유인무와는 다 동지여서 새로운 인물을 얻으면 내가 당한 모양으로 이
집에서 한 달, 저 집에서 얼마, 이 모양으로 동지들의 집으로 돌려서 그 인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그 인물이 벼슬하기에 합당하면 벼슬을 시키고, 장사나
농사에 합당하면 그것을 시키도록 약속이 되어 있던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시험의
결과로 아직 학식이 천박하니 공부를 더 시키도록 하고 또 상놈인 내 문벌을 높이기
위하여 내 부모에게 연산 이천경의 가대를 주어 거기 사시게 하고 인근 몇 양반과
결탁하여 우리 집을 양반 축에 넣자는 것이었다.
유인무는 이런 설명을 하고,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문벌이 양반이 아니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하고 한탄하였다.
나는 유인무의 깊은 뜻에 감사하면서 고향으로 가서 2월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연산
이천경의 가대로 이사하기로 작정하였다. 유인무는 내게 편지 한 장을 주어서 강화
버드러지 주 진사 윤호에게로 보내었다. 나는 김주경 집 소식을 염문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주 진사는 내게 백동전으로 4천냥을 내어 주고 노자를
삼으라고 하였다. 대체 유인무의 동지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그들은 편지 한
장으로 만사에 서로 어김이 없었다. 주 진사 집은 바닷가여서 동짓달인데도 아직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생선이 흔하여서 수일간 잘 대접을 받았다. 나는
백동전 4천 냥을 전대에 넣어서 칭칭 몸에 둘러 감고 서울을 향하여 강화를 떠났다.
서울에 와서 유인무의 집에 묵다가 어느 날 밤에 아버지께서 황천이라고 쓰라시는
꿈을 꾸고 유인무에게 그 이야기를 하였다.
지난 봄에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계시다가 조금 나으신 것을 뵙고 떠나서 서울에 와서
탕약 보제를 지어 우편으로 보내 드리고 이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차에, 이러한
흉몽을 꾸니 하루도 지체할 수가 없어서 그 이튿날로 해주 길을 떠났다. 나흘만에
해주읍 비동 고 선생을 뵈오니 지나간 4, 5년간에 그다지 노쇠하셨는지, 돋보기가
아니고는 글을 못 보시는 모양이셨다. 나와 약혼하였던 선생의 장손녀는 청계동
김사집이란 어떤 농가집 며느리로 시집을 보내었다 하고, 나더러 아재라고 부르던
작은 손녀가 벌써 10여 세가 된 것이, 나를 알아 보고 여전히 아재라고 부르는 것이
감개무량하였다. 내가 왜를 죽인 일을 고 선생께서 유의암에게 말씀하여 유의암이
그의 저인 "소의신편"의 속편에 나를 의기남아라고 써 넣었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의병에 실패하고 평산으로 왔을 때, 고 선생은 내가 서간도에 다녀왔을 때에 보고했던
것을 말씀하여 의암이 그리로 가서 근거를 정하고 양병하기로 하였다는 말씀도
하셨다. 의암이 거기서 공자상을 모시고 무사를 모아서 훈련하니 나도 그리로 감이
어떠냐 하셨으나 존중화양이적이란 고 선생 일류의 사상은 벌써 나를 움직일 힘이
없었다. 나는 내 신사상을 힘써 말하였으나 고 선생의 귀에는 그것이 들어가지
아니하는 모양이어서,
"자네도 개화꾼이 되었네 그려."
하실 뿐이었다. 나는 서양 문명의 힘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하고, 이것은 도저히 상투와
공자왈 맹자왈만으로는 저항할 수 없으니 우리 나라에서도 그 문명을 수입하여
신교육을 실시하고 모든 제도를 서양식으로 개혁함이 아니고는 국맥을 보존할 수 없는
연유를 설명하였으나 차라리 나라가 망할지언정 이적의 도는 좇을 수 없다 하여 내
말을 물리치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선생은 이미 나와는 딴 시대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 선생 댁에서는 당 성냥 하나라도 외국 물건이라고는, 쓰지 않는 것이 매우
고상하게 보였다. 고 선생을 모시고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 떠난 것이 선생과 나와의
영결이 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 선생은 그 후 충청도 제천의 어느 일가
집에서 객사하셨다고 한다. 슬프고 슬프다. 이 말을 기록하는 오늘날까지 30여년에
나와 용심과 처사에 하나라도 옳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온전히 청계동에서 받은,
선생의 심혈을 쏟아서 구전심수하신 교훈의 힘이다. 다시 이 세상에서 그 자애가
깊으신 존안을 뵈올 수 없으니 아아, 슬프고 슬프다.
나는 고 선생을 하직하고 떠나서 당일로 텃골 본집에 다다르니 황혼이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께서 부엌으로 나오시며,
"아이 네가 오는구나. 아버지 병세가 위중하시다. 아까 아버지가 이 애가 왔으면
들어오지 않고 왜 뜰에 서서 있느냐 하시기로 헛소리로만 여겼더니 네가 정말
오는구나."
하셨다.
내가 급히 들어가 뵈오니 아버지께서 반가워하시기는 하나 병세는 과연 위중하였다.
나는 정성껏 시탕을 하였으나 약효를 보지 못하고 열 나흘만에 아버지는 내 무릎을
베고 돌아가셨다. 내 손목을 꼭 쥐셨던 아버지의 손에 힘이 스르르 풀리시더니 곧
운명하셨다.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나는 나의 평생의 지기인 유인무, 성태영 등의
호의대로 부모님을 연산으로 모시고 가서 만년에나 강씨, 이씨에게 상놈 대우를 받던
뼈에 사무치는 한을 면하시게 할까 하고 속으로 기대하였더니 이제 아주 다시 못
돌아오실 길을 떠나시니 천고의 유한이다.
집이 원래 궁벽한 산촌인 데다가 빈한한 우리 가세로는 명의나 영약을 쓸 처지도 못
되어서 나는 예전 할머니께서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가 단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나도
단지나 하여 일각이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붙들어 보리라 하였으나 내가 단지를 하는
것을 보시면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실 것이 두려워서 단지 대신에 내 넙적다리의 살을
한 점 베어서 피는 받아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고 살은 불에 구워서 약이라고 하여
아버지가 잡수시게 하였다. 그래도 시원한 효험이 없는 것은 피와 살의 분량이 적은
것인 듯하기로 나는 다시 칼을 들어서 먼저 것보다 더 크게 살을 떼리라 하고 어썩
뜨기는 떴으나 떼어 내자니 몹시 아파서 베어만 놓고 떼지는 못하였다. 단지나 할고는
효자나 할 것이지, 나 같은 불효로는 못할 것이라고 자탄하였다. 독신 상제로 조객을
대하자니 상청을 비울 수는 없고 다리는 아프고 설한풍은 살을 에이고 하여서 나는
다리 살을 벤 것을 후회하는 생각까지 났다.
유인무와 성태영에게 부고를 하였더니 유인무는 서울에 없었다 하여 성태영이 혼자
나귀를 달려 5백 리 먼 길에 조상을 왔다.
나는 집상 중에 아무 데도 출입을 아니하고 준영 계부의 농사를 도와 드렸더니
계부는 매우 나를 기특하게 여기시는 모양이어서 당신이 돈 2백 냥을 내어서 이웃
동네 어떤 상놈의 딸과 혼인을 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 아버지도 없는 조카를 당신의
힘으로 장가들이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또 큰 영광으로 아시는 준영 계부는 내가
돈을 쓰고 하는 혼인이면 정승의 딸이라도 나는 아니한다고 거절하는 것을 보시고
대로 하여 낫을 들고 내게 달려 드시는 것을, 어머니께서 가로 막아서 나를 피하게
하여 주셨다.
임인년 정월에 장연 먼 촌 일가 댁에 세배를 갔더니, 내게 할머니 되는 어른이 그
친정 당질녀로 17세 되는 처녀가 있으니 장가들 마음이 없는가고 물었다. 나는 세
가지 조건에만 맞으면 혼인한다고 말하였다. 세 가지라는 것은, 돈 말이 없을 것과
신부될 사람이 학식이 있을 것과 당자와 서로 대면하여서 말을 해볼 것 등이었다.
어떤 날 할머니는 나를 끌고 그 처자의 집으로 갔다. 그 처자의 어머니는 딸
4형제를 둔 과댁으로서, 위로 3형제는 다 시집을 가고 지금 나와 말이 되는 이는
여옥이라는 끝의 딸이었다. 여옥은 국문을 깨치고 바느질을 잘 가르쳤다고 하였다.
집은 오막살이여서 더할 수 없이 작은 집이었다.
나를 방에 들여 앉혀 놓고 세 사람이 부엌에서 한참이나 쑥덕거리더니, 다른 것은
다하여도 당자 대면 만은 어렵다고 하였다.
"나와 대면하기를 꺼리는 여자라면 내 아내가 될 자격이 없소."
하고 내가 강경하게 나간 결과로 처녀를 불러들였다.
나는 처자를 향하여 인사말을 붙였으나 그는 잠잠하였다.
나는 다시,
"당신이 나와 혼인할 마음이 있소?"
하고 물었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다.
나는 또,
"내가 지금 상중이니 일년 후에 탈상을 하고야 성례를 할 터인데, 그동안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내게 글을 배우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도 처녀의 대답 소리가 내 귀에는 아니 들렸는데, 할머니와 처녀의
어머니는 여옥이가 다 그런다고 대답하였다고 하였다. 이리하여서 그와 나와는 약혼이
되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처자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하여도 준영 계부는 믿지
아니하고 어머니더러 가서 보고 오시라고 하시더니 어머니께서 알아보고 오신 뒤에야
준영 계부가,
"세상에 어수룩한 사람도 있다."고 빈정거리셨다.
나는 여자 독본이라 할 만한 것을 한 권 만들어서 틈만 나면 내 아내될 사람을
가르쳤다.
어느덧 일년도 지나서 계묘년 2월에 아버지의 담제도 끝나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나를 성례시켜야 한다고 분주하실 때에 여옥의 병이 위급하다는 기별이 왔다. 내가
놀라서 달려갔을 때에는 아직도 여옥은 나를 반겨할 정신이 있었으나 내가 간 지
사흘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나는 손수, 그를 염습하여 남산에 안장하고 장모는 김동
김윤오 집에 인도하여 예수를 믿고 여생을 보내도록 하였다. 내 나이 30에 이 일을
당한 것이었다.
이 해 2월에 장연읍 사직동으로 반이하였다. 오진사 인형이 나로 하여금 집 걱정이
없이 공공사업에 종사케 하기 위하여 내게 준 가대로서 20여 마지기 전답에 산과
과수까지 낀 것이었다. 해주에서 종형 태수 부처를 옮겨다가 집일을 보게 하고 나는
오 진사 집 사랑에 학교를 설립하고 오 진사의 딸 신애, 아들 기원, 오봉형의 아들 둘,
오면형의 아들과 딸, 오순형의 딸 형제와 그 밖에 남녀 몇 아이를 모아서 생도로
삼았다.
방 중간을 병풍으로 막아 남녀의 자리를 구별하였다. 순형은 인형의 세째 아우로서
사람이 근실하고 예수를 잘 믿어 교육에 열심하여서 나와 함께 학생을 가르치고
예수교를 전도하여 일년 이내에 교회도 흥왕하고 학교도 차차 확장되었다. 당시에
주색장으로 출입하던 백남훈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어 봉양학교의 교원이 되게 하고
나는 공립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당시 황해도에서 학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공립으로 해주와 장연에 각각 하나씩 있었을 뿐인데, 해주에 있는 것은 이름만
학교여서 여전히 사서삼경을 가르치고 있었고, 정말 칠판을 걸고 산술, 지리, 역사 등
신학문을 가르친 것은 장연학교 뿐이었다.
여름에 평양 예수교의 주최인 사범 강습소에 갔을 적에 최광옥을 만났다. 그는
숭실중학교의 학생이면서 교육가로, 애국자로 이름이 높았고 나와도 뜻이 맞았다.
최광옥은 내가 아직 혼자라는 말을 듣고 안신호라는 신여성과 결혼하기를 권하였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영매로 나이는 스무 살, 극히 활발하고 당시 신여성 중에
명성이라고 최광옥은 말하였다.
나는 안 도산의 장인 이석관의 집에서 안신호와 처음 만났다. 주인 이씨와 최광옥과
함께였다. 회견이 끝나고 사관에 돌아왔더니 최광옥이 뒤따라와서 안신호의 승낙을
얻었다는 말을 전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신호와 혼인이 되는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이튿날 이석관과 최광옥이 달려와서 혼약이 깨졌다고 내게 알렸다. 그 까닭이라는
것은 이러하였다. 안 도산이 미국으로 가는 길에 상해 어느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양주삼에게 신호와의 혼인 말을 하고, 양주삼이 졸업하기를 기다려서 결정하라는 말을
신호에게도 편지로 한 일이 있었는데, 어제 나와 약혼이 된 뒤에 양주삼에게서 이제는
학교를 졸업하였으니 허혼하라는 편지가 왔다. 이 편지를 받고 밤새도록 고통한
신호는 두 손에 떡이라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기도 어려워 양주삼과 김구를
둘 다 거절하고 한 동네에 자라난 김성택(뒤에 목사가 되었다)과 혼인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가내하거니와 퍽 마음에 섭섭하였다. 그러자 얼마
아니하여 신호가 몸소 나를 찾아와서 미안한 말을 하고 나를 오라비라 부르겠다고
말하여 나는 그의 쾌쾌한 결단성을 도리어 흠모하였다.
한 번은 군수 윤구영이 나를 불러 해주에 가서 농상공부에서 보내는 뽕나무 묘목을
찾아오는 일을 맡겼다. 수리 정창극이 나를 군수에게 추천한 것이었다. 나는 2백 냥
노자를 타 가지고 걸어서 해주로 갔다. 말이나 교군을 타라는 것이었지만 아니 탔다.
해주에는 농상공부 주사가 특파되어 와서 묘목을 각군에 배부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전국에 양잠을 장려하노라고 일본으로부터 뽕나무 묘목을 실어 들여온 것이다.
묘목은 다 마른 것이었다. 나는 마른 묘목을 무엇하느냐고 아니 받는다고 하였더니
농상공부 주사는 대로하여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나도 마주
대로하여 나라에서 보내시는 묘목을 마르게 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아야 한다
하고 관찰부에 이 사유를 보고한다고 하였더니, 주사는 겁이 나는 모양이어서 나에게
생생한 것으로 마음대로 골라 가라고 간청하였다. 나는 이리하여 산 묘목 수천 본을
골라서 말에 싣고 돌아왔다. 노자는 모두 일흔 냥을 쓰고 일백 서른 냥을 정창극에게
돌렸다. 나는 집세기 한 켤레에 얼마, 냉면 한 그릇에 얼마, 이 모양으로 돈 쓴 데를
자세히 적어서 남은 돈과 함께 주었다. 정창극은 그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하여,
"사람들이 다 선생 같으면 나라 일이 걱정이 없겠소. 다른 사람이 갔더면 적어도
2백 냥은 더 청구했을 것이오."
하였다.
정창극은 실로 진실한 아전이었다. 당시 상하를 물론하고 관리라는 관리는 모두
나라와 백성의 것을 도적하는 탐관으로 되었건마는 정창극만은 일 푼도 받을 것
이외의 것을 받음이 없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군수도 감히 탐학을 못하였다.
얼마 후에 농상공부로부터 나를 종상위원으로 임명한다는 사령서가 왔다. 이것은 큰
벼슬이어서 관속들이며 천민들은 내가 지나가는 앞에서는 담뱃대를 감추고 허리를
굽히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태 동안이나 살던 사직동 집을 떠나지 아니하면 안되게 되었다.
그것은 오 진사와 내 종형이 죽은 때문이었다. 오 진사는 고기잡이 배를 부리기
이태만에 가산을 패하고 세상을 떠나니, 나는 사직동 가대를 그의 유족에게 돌리지
아니할 수 없었다. 또 종형은 본래는 낫 놓고 기억자도 몰랐었으나, 나를 따라 장연에
와서 예수를 믿은 뒤로는 국문에 능통하여 종교서적을 보고 강단에서 설교까지 하게
되었었는데, 불행히 예배보는 중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서 나는
종형수에게 개가하기를 허하여 그 친정으로 돌려 보내고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읍내로
떠났다. 내가 사직동에 있는 동안에 유인무와 주윤호가 다녀갔다. 그들은 예전 복간도
관리사 서상무와 합력하여 북간도에 한 근거지를 건설할 차로 국내에서 동지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지기들이라 하여 밤을 삶고 닭을 잡아서
정성으로 그들을 대접하셨다. 우리는 밤과 닭고기를 먹으면서 연일 밤이 늦도록
국사를 이야기하였다.
유, 주 두 사람에게 듣건대 김주경은 몸을 숨긴 후로 붓장사를 하여서 수만 금을
모았다가 금천에서 객사하였는데, 그 유산은 주경이 묵던 주막집 주인이 먹어 버리고
주경의 유족에게는 한 푼도 아니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김주경이 그렇게 돈을 모은
것은 필시 무슨 경륜이 있었으리라고 말하였다. 주경의 아우 진경도 전라도에서
객사하여서 그 집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심히 슬퍼하였다.
여러 번 혼약이 되고도 깨어지던 나는 마침내 신천 사평동 최준례와 말썽 많은
혼인을 하였다. 준례는 본래 서울 태생으로, 그 어머니 김씨 부인이 젊은 과부로서
길러 낸 두 딸 중의 막내 딸이었다. 김씨 부인은 그때 구리개에 임시로 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에 고용되어서 두 딸을 길러 맏딸은 의사 신창희에게
시집보내고 신창희가 신천에서 개업하매 여덟 살 된 준례를 데리고 신천에 와서 사위의
집에 우접하여 있었다. 나는 양성칙 영수의 중매로 준례와 약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가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준례의 어머니가 준례를
강성모라는 사람에게 허혼을 하였는데 준례는 어머니의 말을 아니 듣고 내게 허혼한
것이었다. 당시 18세인 준례는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었다. 미국 선교사 한위렴,
군예분 두 분까지 나서서 준례더러 강성모에게 시집가라고 권하였으나 준례는 당연히
거절하였다. 내게 대하여도 이 혼인을 말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나는 본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부모의 허혼을 반대한다 하여 기어이 준례와 혼인하기로 작정하고
신창희로 하여금 준례를 사직동 내 집으로 데려오게 하여 굳이 약혼을 한 뒤에 서울
정신여학교로 공부를 보내어 버렸다. 나와 준례는 교회에 반항한다는 죄로 책벌을
받았으나 얼마 후에 군예진 목사가 우리의 혼례서를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의 책벌을
풀었으니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혼인한 사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