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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5권
3.2. 행의 마음을 성취함(6)
[살생을 여읜다는 뜻]
[문] 살생을 여읜다는 뜻을 말해야 하리라.
무슨 이치 때문에 여읜다고 이름할 수 있는가?
죽일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여읜다고 하게 되는가?
죽일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여읜다고 하게 되는가?
만약 죽일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여읜다고 한다면 여읜다는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습기를 지은 결과가 이루어졌기 때문인데 어떻게 살생을 여읜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죽일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여읜다고 한다면 살생을 여의는 복이 없으리니, 마치 토끼 뿔은 끊어낼 만한 것이 없는 것처럼 역시 여의고 끊는다는 이치가 없으리라.
또 살생을 여읜다 함은 살생하지 않는 일을 말하는가?
중생을 거두어 주기를 버리지 않는 일인가?
[답] 살생하지 않는 법을 받음으로써 본래 받은 마음에 의하여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저 살생하는 악한 일을 짓지 않고 살생 여의는 법을 받음으로써 선법을 일으킨다. 그 때문에 살생을 여의며 중생을 포섭하는 것을 여의지 않는다.
[문] 죽일 수 있는 중생의 쪽에서 살생을 여의게 되는가, 죽일 수 없는 중생의 쪽에서 살생을 여의게 되는가, 죽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없는 중생의 쪽에서 살생을 여의게 되는가?
[답] 죽일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없는 중생의 쪽에서 살생을 여읜다.
왜 그러한가?
나쁜 마음을 일으켜서 쉬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살생을 여읜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죽일 수 있는 중생의 쪽에서 살생을 여의고 죽일 수 없는 중생의 쪽에서는 살생을 여의지 못한다고 하면 여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또 무슨 뜻인가?
죽일 수 있는 중생의 쪽에서 죄를 여읨으로써 죽일 수 없는 중생의 쪽에서는 복을 이루게 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죽일 수 있는 중생의 쪽과 죽일 수 없는 중생의 쪽에서 살생을 여의는 복이 이루어진다.
만약 그와 같지 않다면 살생을 여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살생 버리는 일이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살생하는 일을 받지 않으면 응당 살생을 여의는 일이 얻어져야 한다.
만약 그와 같지 않다면, 받지 않으면 당연히 이는 여읜 것이어야 하고 받으면 당연히 이는 여의지 않은 것이다.
[문] 요는 현재의 5음ㆍ18계ㆍ12입의 쪽에 의하여 살생을 여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는 아닌가?
[답] 만약 아까와 같은 문답이라면 살생을 여읜다는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세 가지로 여읨]
[문] 살생을 여의는 데에 몇 가지로 여읨이 있는가를 말하여야 하리라.
[답] 세 가지로 여읨이 있는데,
첫째 이루어짐[成]이며,
둘째 의함[依]이며,
셋째 일어남[起]이다.
의한다 함과 이루어진다 함은 살생과 나쁜 말에는 중생에 의하여 성냄의 마음이 이루어지며,
도둑질과 삿된 음행에는 삶을 돕는 것에 의하여 탐냄의 마음이 이루어지며,
거짓말ㆍ이간질ㆍ꾸밈말에는 이름에 의하여 탐냄의 마음이 이루어지며,
삿된 소견에는 빛깔에 의하여 어리석은 마음이 이루어진다.
일어난다 함은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의 모두가 다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부터 일어난다.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살생을 일으킨다 함은 탐내는 마음으로 살생함이 혹은 가죽ㆍ살ㆍ힘줄ㆍ뼈ㆍ치아ㆍ뿔ㆍ돈ㆍ재물 따위를 위해서이기도 하며, 중생의 목숨을 끊음이 혹은 제 몸을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이기도 하나니, 하나하나가 세 가지의 일을 다 갖추었다.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살생을 일으킨다 함은 성내는 마음 때문에 원수를 죽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원수를 죽이나니,
그러므로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살생을 일으킨다고 한다.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살생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뱀과 전갈 따위는 비록 죽인다 하더라도 죄가 없다.
왜 그러한가?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고통을 내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만약 노루ㆍ사슴ㆍ물소ㆍ양 따위를 죽이면 죄의 과보가 없다.
왜 그러한가?
이는 중생들의 업으로 감수(感受)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또, 파라사(波羅斯)들은 말하기를
“늙은 부모와 병이 중한 이를 죽이면 죄의 과보가 없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것들을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살생을 일으킨다고 한다.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일으킨다 함은
‘이와 같고 이와 같은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와 같고 이와 같은 물건을 가지겠다’ 하며,
혹은 제 몸을 위해서 하기도 하고 다른 이의 몸을 위해서 하기도 하며, 음식을 위해서 하기도 하나니,
이를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일으킨다고 한다.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일으킨다 함은 성내는 사람의 곁에서 또는 성내는 사람이 사랑하는 그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이니,
이를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일으킨다고 한다.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일으킨다 함은 마치 바라문이 말하기를
“온 대지(大地)의 모든 물건은 오직 나만의 소유이다.
왜 그러한가?
저 국왕이 먼저 나에게 보시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힘이 없기 때문에 다른 성바지에게 나는 받아쓰는 것을 빼앗겼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는 것은 곧 자기의 물건이므로 도둑질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그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마음을 내기 때문에 이런 도둑질이 있는 것과 같다.
이를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도둑질을 일으킨다고 한다.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다 함은 중생에게 음심을 일으켜서 실답게 수행하지 않는 것을 말하나니,
이를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다고 한다.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다 함은 다른 이가 수호하거나 자기가 수호하거나 남이 수호하여 삶을 돕거나 간에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실답게 수행하지 않음을 일으킴은 마치 원수의 아내를 가까이 하고 원수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내를 가까이 하는 것과 같나니,
이를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다고 한다.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다 함은,
마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를테면, 방아ㆍ절구ㆍ잘 핀 꽃ㆍ익은 열매ㆍ음식ㆍ강물과 길 등도 여인과 같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와 같은 삿된 음행은 죄가 되지 않는다.
또, 마치 파라사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삿된 음행을 하는 따위와 같나니,
이를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삿된 음행을 일으킨다고 한다.
거짓말에 있어서, 탐내는 마음으로 낸다 함은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으킴이며,
성내는 마음으로 낸다 함은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으킴이며,
어리석은 마음으로 낸다 함은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간질ㆍ나쁜 말ㆍ꾸밈말 등의 모두가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탐냄은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다 함은 탐냄의 번뇌[貪結]에 의하여 내면 다음의 두 번째의 마음이 앞에 나타나나니,
이와 같은 것을 탐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다고 한다.
성냄의 번뇌[瞋結]에 의하여 내면 성내는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다 하고,
어리석음의 번뇌[癡結]에 의하여 내면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일으킨다고 하나니,
탐냄ㆍ성냄과 삿된 소견 같은 것의 모두가 역시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작위와 부작위의 모습과 무작위의 모습은 말하지 않는가?
결정코 어떠한 업 중에는 있고 어떠한 업 중에는 없는가?
[답] 삿된 음행만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가지 업의 길 중에는 모두 다 일정하지 않다.
이 이치는 무엇인가?
만약 자신이 지으면 작위의 업과 무작위의 업이 성취되며, 만약 남을 시켜서 지으면 부작위는 있지만 작위는 있을 수 없다.
삿된 음행 중에는 결정코 작위는 있지만 부작위는 있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이 삿된 음행은 마침내 자신이 짓는 것이며, 남을 시켜서 짓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셨다.
“아무튼 몸으로 짓는 업이 아니어도 살생죄가 성취하게 되나이까?”
대답하시기를
“입으로 남에게 시켜서 살생죄를 성취하게 함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아무튼 입의 업으로 짓지 아니하여도 거짓말의 죄가 성취하게 되나이까?” 하자,
대답하시기를
“되느니라. 몸의 업으로 지어도 입의 업인 거짓말의 죄가 성취되느니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아무튼 몸의 업으로 짓는 것이 아니고 입의 업으로 짓는 것이 아니어도 몸과 입의 업이 성취하게 되나이까?” 하자,
대답하시기를
“되느니라. 선인(仙人)이 성내는 마음에 의하는 일이니라”고 하셨다.
오직 욕심세계의 육신으로 만은 선한 업의 길 중에서 마침내 작위와 무작위가 있으며, 선정과 샘이 없는 계율[禪無漏戒]에는 무작계(無作戒)가 없다.
왜 그러한가?
마음에 의하기 때문이다.
중간선(中間禪)은 일정하지 않다.
만약 깊고 두터운 마음과 마침내 공경하는 마음으로 몸과 입의 업을 지으면 작위의 업과 무작위의 업이 성취되고,
만약 깊고 두터운 맺어 부림[結使]의 마음으로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면 역시 작위의 업과 무작위의 업이 성취된다.
만약 깊고 두터운 마음이 아니고 마침내 공경하는 마음이 아니면서 몸과 입의 업을 지으면 작위의 업만이 있고 무작위의 업은 없으며,
만약 깊고 두터운 맺어 부림의 마음이 아니면서 몸과 입의 업을 내면 역시 작위의 업만이 있고 무작위의 업은 없으며,
그리고 방편으로 업을 지으면 마음이 도리어 뉘우치는 이이므로 작위의 업만이 있고 무작위의 업은 없다.
[업의 길, 앞의 권속과 뒤의 권속]
[문] 업의 길 가운데서 어느 것이 앞의 권속(眷屬)이며, 어느 것이 뒤의 권속인가?
[답] 만약 살생의 방편을 일으킨다면 마치 백정이 양을 붙잡고 혹은 물건을 사서 도살장으로 데리고 가서 처음 한 번 칼을 내리치고 혹은 두 번 세 번 칼질을 하기도 할 적에 양의 목숨이 아직 끊어지기 전의 모든 악한 업은 앞의 권속이라고 한다.
내리침에 따라서 어느 칼로든지 그 목숨을 끊으면 곧 그 생각하는 때에 있었던 작위의 업과 무작위의 업은 이들을 모두 근본의 업길[根本業道]이라 하지만, 그 다음부터 하는 일로서 몸으로 행하는 작위의 업을 바로 살생에 있어서 뒤의 권속의 업이라고 하나니, 꾸밈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역시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그 나머지 탐냄ㆍ성냄ㆍ삿된 소견들 중에는 앞의 권속이 없나니, 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바로 그때에 근본의 업길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또, 몸과 입과 뜻의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에는 모두 다 앞과 뒤의 권속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이 마음을 일으켜서 이 중생의 목숨을 죽이려 하다가 그로 인하여 다시 다른 중생의 목숨을 끊는 것과 같으며,
또 하늘에 제사하려고 중생을 살해하면서 곧 남의 물건을 빼앗으며,
그 사람을 죽이려 하다가 다시 그 아내를 음행하며,
이와 같은 마음을 내다가 도리어 그의 아내를 시켜서 스스로 남편을 죽이게 하며,
또 갖가지 싸움과 어지러운 말로써 그의 친척들을 깨뜨리며,
때 없이 실답지 못하게 그 물건 가운데에 탐내는 마음을 내어 곧 그 사람에게 다시 성내는 마음을 내며,
그 사람을 살해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삿된 소견을 내고 삿된 소견을 더욱 늘리어 그의 목숨을 끊으며 다시 그의 아내와 아들딸을 죽이려고 하는 따위이다.
이와 같이 차례로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두루 갖추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의 업을 앞의 권속이라고 한다.
온갖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 모두가 역시 이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또, 선한 업의 길을 여의면 방편으로 선한 업의 길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니, 이 방편은 근본을 여의기 때문이며 방편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방편이라 함은, 마치 저 사미(沙彌)가 큰 계율을 받으려고 하여 계율 장소에 나아가서 여러 승가의 발에 예배하고 곧 화상에게 청하여 세 가지 옷을 받아 지니고서 처음 첫 번째 사룀[白]을 짓고
두 번째 사룀을 짓는 이와 같은 것은 모두 다 앞의 권속이라고 하고,
세 번째 사룀으로부터 갈마(羯磨)까지 마치면서 일으키게 되는 작위의 업과 그 생각을 할 때에 일으키는 무작위의 업은 이들 모두를 근본의 업 길이라 한다.
다음에는 네 가지의 의지함[四依]을 말하고 받은 것의 선한 행을 버리지 않는 데에 이르기까지의 몸과 입으로의 작위의 업과 무작위의 업인 이와 같은 것은 모두를 다 뒤의 권속(眷屬)이라 함과 같다.
[착하지 못한 업의 길]
[문]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말해야 하리라.
다섯 갈래[五道] 가운데서 어느 갈래에 두루 갖추어지고 어느 갈래에 두루 갖추어지지 않으며, 어느 갈래 중에 많고 어느 길 중에 적은가?
[답] 지옥에는 다섯 가지의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 있는데, 이간질ㆍ꾸밈말ㆍ탐냄ㆍ성냄ㆍ삿된 소견이다.
이 뜻이 무엇인가?
남을 살해하지 않기 때문에 살생이 없고,
남이 보호한다는 마음이 없으므로 도둑질이 없고,
보호되는 여인이 없기 때문에 삿된 음행이 없고,
바른 마음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이 없고,
언제나 바른 생각과 모습이 없으며 파괴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나쁜 말이 없다.
언제나 파괴하고 괴로움의 핍박에 의하기 때문에 이간질은 있고,
때 아닐 적에 말함이 있기 때문에 꾸밈말은 있고,
탐냄ㆍ성냄ㆍ삿된 소견은 마침내 있기 때문에 있다고 하지만 이는 나타나서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이치 때문에 한곳에서는 있다고도 말하고 한곳에서는 없다고도 말한다.
저 북쪽의 울단월(鬱單越)에는 앞의 여섯 가지는 없고 뒤의 네 가지가 있다.
목숨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살생이 없고
수호함이 없기 때문에 도둑질이 없고,
보호되는 여인이 없기 때문에 삿된 음행이 없다.
그 사람이 음행을 하려면 즐기고 싶을 때에 곧 여인을 붙잡고 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서 만약 나무가 가지를 굽혀서 그 사람들을 덮어 주면 곧 음행을 하게 되고,
음행을 하려 하여 즐기고 싶어 하여도 만약 나무가 그 사람을 덮어주지 않으면 부끄러워하면서 놓고 떠나간다.
다른 이를 속일 마음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이 없고,
항상 일정한 마음이기 때문에 이간질이 없고
언제나 부드러운 말이기 때문에 나쁜 말이 없지만
노래와 춤이 있기 때문에 꾸밈말이 있고 그 나머지 뜻의 업은 필경에는 있으나 이는 나타나서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울단월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 천하(天下)는 열 가지 업의 길을 받는다.
북쪽 울단월은 역시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여의며,
축생과 아귀와 욕심세계의 하늘 중에서도 역시 열 가지 업 길을 받는 것을 여의며,
욕심세계 중의 하늘은 계율을 받음은 없으나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은 여읜다.
비록 하늘이 하늘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은 역시 다른 갈래의 중생을 죽인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늘 중에서도 역시 손발 등을 자름이 있지만 즉시 도로 나게 되고, 만약 그 목을 끊거나 중간을 끊게 되면 곧 죽고 나지 않는다”고 한다.
역시 다른 이를 죽이고 다른 이의 물건을 도둑질함이 있으면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며,
형상세계와 무형세계의 하늘 안에는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 없다.
[문]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은 모든 갈래 중에서 저마다 몇 가지가 있는가?
[답] 지옥과 북쪽의 울단월에는 탐냄이 없고 성냄이 없고 삿된 소견이 없지만 마침내는 있어도 이는 나타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밖의 셋의 천하(天下)와 욕심세계의 하늘에는 받는 법(法)을 떠나기도 하고 받는 법이 있기도 하다.
또, 욕심세계의 하늘에는 착하고 샘이 없으므로 법을 받는 줄 알아야 하며 축생과 아귀에는 역시 받는 법이 없다.
형상세계의 하늘 안에는 받는 법이 있는데, 앞에 나타나서 선법을 받으며 섭취하기 때문이다.
또, 그곳에는 모든 성인이 산다 함은 샘이 없음에 의한 선한 업의 길이 있다.
무형세계 중에는 오직 마음의 업 길[心業道]만이 있어서 업이 성취되어도 이는 나타나서 있는 것이 아니며,
형상세계의 하늘 중에는 비록 또 성취된다 하더라도 이는 타나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모든 성인이 산다 함은 일체가 실제로 존재하나니, 샘이 없음에 의한 계율을 지닌 힘 때문이다.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의 결과]
[문]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의 결과와 따르는 원인을 말하여야 하리라.
[답] 세 가지의 결과가 있는데
첫째는 과보의 결과[果報果]이며,
둘째는 습기의 결과[習氣果]이며,
셋째는 더 왕성한 결과[增上果]이다.
낱낱의 업의 길에는 모두 세 가지가 있다.
이 뜻은 무엇인가?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의 하ㆍ중ㆍ상을 두루 갖추면 지옥에 나니, 이를 과보의 결과라고 한다.
습기의 결과라고 함은 지옥으로부터 물러나서 인간 중에 태어나면
살생 때문에 목숨을 끊길 과보가 있고, 도둑질 때문에 잘 사는 과보가 없고, 삿된 음행 때문에 아내를 수호할 수 없고,
거짓말 때문에 남이 비방하는 과보가 있고, 이간질 때문에 권속들이 파괴되고, 나쁜 말 때문에 좋은 소리를 못 듣고, 꾸밈말 때문에 남에게 불신을 당하고,
본래의 탐욕 때문에 탐하는 마음이 더욱 왕성하고, 본래의 성냄 때문에 성내는 마음이 더욱 왕성하며, 삿된 소견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이 더욱 왕성하나니,
이와 같은 온갖 것을 습기의 결과라고 한다.
더 왕성한 결과라 함은 저 열 가지 착하지 못한 업의 길에 의하면 온갖 바깥 물건은 기세가 없다. 이른바 토지의 높낮이와 참새ㆍ쥐ㆍ우박ㆍ가시나무와 먼지와 흙에서의 구린내며 뱀과 전갈이 많이 있고 곡식은 잘고 가늘며 열매가 작은 것과 쓴 열매인데,
이와 같은 온갖 것을 더 왕성한 결과라고 한다.
또, 서로 비슷한 결과[相以果]가 있다.
죽이는 이는 짐짓 해를 받는 중생에게 여러 가지 모든 고통을 주므로 그 고통으로 인하여 지옥에 나서 갖가지 고통을 받으며, 다른 이의 목숨을 끊은 뒤에 인간 중에 태어나도 목숨 짧은 과보를 얻고 다른 이의 난촉[暖觸]이 없다. 그러므로 온갖 바깥 물건과 생활에 기량(氣量)이 없다.
이와 같이 온갖 열 가지 업의 길 중에서 이치를 따라 서로가 응하게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물건을 겁탈하고 다른 이의 아내를 삿되게 음행하면, 비록 다른 이의 중한 핍박과 괴로움이 나지 않더라도 마음이 파괴되어 그 때문에 죄를 받으며 비록 파괴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나쁜 말이 아니어도 나쁜 마음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죄를 얻는다.
[문] 고의로 온갖 나쁜 행을 일으키고 지으면, 결정코 착하지 못한 나쁜 업이 성취되어 결정코 그 나쁜 갈래의 괴로운 과보를 받는가?
결정코 나쁜 업이 성취되지는 않아서 결정코 나쁜 갈래의 괴로움의 과보를 받지는 않는가?
만약 모든 나쁜 업을 결정코 받는다면, 나쁜 갈래의 죄업은 나무랄 수가 없으리라.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침내 나쁜 갈래의 죄업이 성취되어 나쁜 갈래 등에 떨어지나니, 5역죄(逆罪)를 제외하고는 끝없는 세상으로부터 오면서 익히고 지은 업은 나쁜 갈래의 죄를 쫓는다.
마침내 틀림없다 함은 온갖 나쁜 갈래는 나무랄 수가 없으며, 또 헛되이 맑은 행을 닦으며 또 수다라와 서로가 어긋난다는 것이다.
마치 여래의 수다라에서의 말씀과 같나니
“어떤 사람이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을 닦고 익히면 얻는 죄의 과보는 으레 지옥에서 받아야 하며, 그 사람은 곧 현재의 몸 동안에 받느니라”고 하신,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만약 저 5역죄 등의 과보는 마침내 지옥에 있으면서 받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나쁜 갈래의 죄업은 돌려 바꿀 수 있다”고 말하며,
무엇 때문에 “나쁜 갈래 등의 죄는 현재 몸 동안에서 받는다”고 말하는가?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만약 지옥 등의 나쁜 갈래의 죄업을 현재 몸 동안에 받는다 하면, 그렇다면 인과가 뒤섞여서 어지러우리라.
왜 그러한가?
때와 결과의 경하고 중함이 모두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답]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재의 몸 동안에 지옥의 죄를 받는다 함은 이 사람이 진리[實諦]를 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몸 동안에 조그마한 죄의 과보를 받는다”고 하지만,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업에는 자재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온갖 지은 죄업과 복업은 자재한 힘이 없으면서 어떠한 인연을 따라 화합하므로, 그 인연에 의하여 당연히 현재의 몸 동안에 받아야 할 것이지만 과보의 죄업을 후생의 몸 중에서 받으며, 후생의 몸으로 받아야 할 것이지만 과보의 죄업을 현재의 몸으로 받는 데에 훌륭한 이치가 있다.
만약 업이 즐거움의 과보를 받아야 하면 곧 즐거움의 결과를 받으며 괴로움의 과보를 받아야 하면 괴로움의 과보를 받지만, 이는 정하여지지 않은 업[不定業]에 의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또, 정하여지지 않은 서로 비슷한 업에 의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며 역시 정하여진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해탈의 결과를 얻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라한은 바라제목차의 계[波羅提木叉戒]와 선정의 계[禪定戒]와 샘이 없는 계[無漏戒]의 업을 받아서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의 동안에는 언제나 바라제목차의 계 등을 끊지 않았으므로 만약 과보가 있다면 해탈할 수가 없으리니,
그러므로 현재 정하여지지 않은 업의 과보를 받는다.
[문] 만약 그렇다면 모든 업은 정하여 진 것이 아닐뿐더러 수다라와도 서로가 어긋난다.
왜 그러한가?
여래의 수다라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익힌 업으로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그런 이치가 없으므로 그 익힌 것의 업은 현재의 몸 동안에서나 후생의 몸 동안에서 마침내 틀림없이 받으리라.
[답]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인연이 아직 화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직 과보를 받지 못하였다.
이 뜻이 무엇인가?
익히고 지은 모든 업은 비록 실로 현재의 몸으로써 받을 수 있는 과보라고 하더라도 현재에 받지 않았다.
왜 그러한가?
모든 인연이 아직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치 종자와 같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마치 종자가 땅 등의 인연이 화합함에 의하여 싹 따위를 낼 수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의식이 머무르는 인연이 화합함에 의하여 업의 깨끗하지 못한 의식 종자가 이름과 물질[名色]의 싹을 낼 수 있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만약 실다운 수행에 의하여 실다운 반야를 따르고 사실대로 함이 있는 행을 알아서 모든 번뇌를 끊는 때이면, 거룩한 도의 힘에 의하기 때문에 모든 공덕을 닦아 모아서 선한 뿌리의 싹을 나게 할 수 있다.
그때에는 비록 후생의 업을 받음이 있더라도 거기에는 번뇌의 벗이 없나니, 그러므로 후생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번뇌를 끊었기 때문에 비록 후생의 과보를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 착하지 못한 업의 길에 의한 것이어서 현재의 몸 동안에 조금은 익힌 과보를 받으며 그 때문에 마침내 나쁜 갈래 중에서는 받지 않는다.
수다라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받아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비록 적더라도 기쁨과 즐거움을 받으며 비록 적더라도 근심과 괴로움을 받으면서 착하고 착하지 못한 업이 바로 그때 받아서 다하면서 이에 조금의 머리 아픈 따위의 고통을 받기까지에 이르나니, 여기에 받는 조그마한 죄는 저 서로 비슷한 결과이다.
아까 ‘수다라와 서로가 어긋난다’고 말하였는데, 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정하여지지 아니한 과보에 의하고 아직 다스려지지 못했거나 다스려진 업에 의하기 때문이다.
수다라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만약 마침내 정하여진 마음으로 업을 짓고서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그리 될 수 있는 이치가 없느니라.”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아라한인 사람은 태어남과 뒤의 과보인 죄와 복 등의 업을 끊으므로 현재의 몸 동안에 과보를 받을 인연을 다시는 화합시키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저 아라한은 이 업의 길에 의하여 열반에 들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이치 때문에, 그대는 여래께서 말씀하신 수다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줄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