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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편불보은경 제6권
8. 우파리품(優波離品)
[우파리의 출가]
그때에 여래께서는 대중들이 둘러싸고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였다.
아난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대중의 마음을 자세히 살폈더니 모두가 다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으므로,
“여래 세존이시여, 어떻게 우파리는 낮고 천한 사람이온데, 부처님을 따라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셨나이까?
그의 출가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모든 왕과 찰리(刹利)성바지들을 헐뜯고 욕보여서 공경하지 않는 마음을 더하고, 믿는 마음을 더럽혔기 때문에 영원히 복밭을 잃어버리며, 이에 백정왕(白淨王)의 아들 난다(難陀)비구에게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도록 하였나이다.”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은 여래에게 평등과 크게 가엾이 여김[大悲]과 3념처(念處)와 5지(智)며 삼매(三昧)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우파리비구가 진실로 낮고 천한 사람으로서 하천한 행과 하천한 서원과 하천한 정진을 닦아 익힌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너희들은 여래의 번뇌와 무상함과 변천함을 말할 수 있을지언정
우파리가 낮고 천한 이로서 출가하였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여래는 바르게 두루 아는 것으로 진실한 말을 널리 말하리니, 너희들은 응당 부처님의 말을 믿어서 받아야할 것이니라.
여래는 나고 죽음과 허물과 근심이며 홀로 깨달음과 부처가 된 이들을 알아보니,
우파리 또한 따라 출가하여 3명(明)ㆍ6통(通)과 8해탈을 갖추어서 천상과 인간의 대중들이 더욱 존경하고, 바른 법을 보호하며 계율을 지니는 데에 첫째이므로 공양 받을 만하여 중생들에게 세 가지 미묘한 과보인 현보(現報)와 생보(生報)와 후보(後報)를 성취하게 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알아야 하리라,
우파리는 기특하고 미묘한 행으로 두루 대비보살(大悲菩薩)이 되었으니,
이미 과거 한량없는 백천 만억의 부처님 처소에서 뭇 덕의 근본을 심었고,
또한 그 부처님 법 가운데서 계율을 지니는데 첫째였으며,
또한 석가모니부처님 법 중에서도 계율을 지니는데 첫째이니라.”
그때에 난타(難陀)비구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땅에 엎드려 대교진여(大憍陳如)의 발에 예를 올리고, 차례대로 하여 우파리 앞에 이르렀는데, 고개만 숙이고 쳐다보며 서서 합장하고 마치니,
여래께서 곧 난타를 위하여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난타야, 마땅히 알아야 한다.
너는 가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또한 부하고 귀하다고 높이지 말지니
출가자의 법은 응당 그러하니라.
난타는 부처님께서 보여 주고 가르쳐 주고 이롭게 하고 기쁘게 하는 갖가지 설법을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며 곧 의복을 바르게 하고 땅에 엎드려 우파리의 발에 예를 올리자
바로 그때에 하늘과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지며 자기의 이익을 얻어서 할 일을 다 마쳤다.
부처님께서 우파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빨리 삼보(三寶)와 4제(諦)며 집에 있거나 집을 떠나거나 한 일곱 가지 대중[七衆]들에게 차별 있는 3귀(歸)ㆍ5계(戒)와 내지 온갖 계율인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율[利益衆生戒]ㆍ번뇌를 깨끗이 하는 계율[淨煩惱戒]ㆍ위의를 조화롭게 다스리는 계율[調御威儀戒]ㆍ선정의 계율[禪戒]과 샘이 없는 계율[蕪漏戒]을 사자처럼 외쳐서 삼보를 매우 번성하게 할지니라.”
[삼보]
우파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거룩한 신력으로써 이끌어 도와주시면, 저는 조금 여쭈며 물을 수가 있겠습니다.
무엇을 삼보라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ㆍ가르침ㆍ승가이니, 삼보에 만약 성품[性]이 없다면 어떻게 가르침이니 승가니 하는 차별된 이름으로 분별하여 말씀하시오며, 삼보에 귀의하는 이는 어떻게 받들어 행하여야 합니까?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만약 하나라고 한다면 삼보라고 말하는 것은 마땅한 말씀이 아니오며, 만약 삼귀(歸)라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일곱 가지 대중이라고 이름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
이어서 우파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디에 귀의하는 것을 부처님께 귀의한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때에 여래께서 하나하나 알맞게 풀이하면서 대답하셨다.
“붓다[佛陀]라 함은 깨달았다[覺]는 것이니, 온갖 법의 모양을 깨달아 환히 알기 때문이며,
또 일체 중생들이 삼계(三界)에서 긴 잠을 자는지라 부처님은 도의 눈[道眼]을 이미 뜨시어 스스로 깨달았고 남도 깨닫게 하시기 때문에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온갖 법에서 온갖 것을 얻었고 온갖 것을 말씀할 수 있느니라.”
[법과 승]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온갖 것을 말씀하십니까?
때에 맞추어 모임에 맞게 마땅함을 따라 말씀하시나이까, 무리에 합당하게 서로 따르면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셨다.
“부처님은 만물을 따르면서 때에 맞게 온갖 법을 말하나니, 뒤에 여러 제자들은 법장(法藏)을 결집(結集)하되 같은 것끼리 기록하라.
부처님이 때로는 여러 제자들을 위하여 계율의 가볍고 무거움과 해독이 있는 것 해독이 없는 것을 제정하면 기록하여 율장(律藏)을 만들 것이며, 때로는 인과의 형상과 여러 번뇌의 생김이며 업의 모양을 말하면 모아서 아비담장(陀毘曇臧)을 만들라.
여러 하늘과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때를 따라 법을 말한 것은 모아서 증일(增一)을 만들 것이니, 이를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교화하여 익히도록 할 것이며,
영리한 근기를 지닌 중생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깊은 이치를 말한 것은 중아함(中阿含)이라 하여 이를 학문하는 이가 익히도록 할 것이며,
갖가지 선정의 법을 따라 말한 것은 바로 잡아함(雜阿含)이니
좌선하는 사람이 익힐 것이며, 모든 외도를 깨뜨리는 것은 바로 장아함(長阿含)이니라.”
물었다.
“부처님께서 만약 온갖 것을 말씀한다 하시면, 경전에서 말씀하시되
‘부처님께서 한 그루 나무 아래 앉아 한 나뭇가지의 잎을 붙잡고 제자에게 묻기를,
〈이 가지의 잎이 많으냐, 나무 위의 잎이 많으냐?〉하시자,
대답하기를,
〈나무 위의 잎이 많습니다〉라고 하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알고 있는 법은 나무 위의 잎과 같지만 내가 말할 수 있는 법은 손바닥 안의 잎사귀와 같으니라〉라고 하셨다.’라고 했으니,
어떻게 부처님께서 온갖 것을 말씀하신다 하시옵니까?”
대답하셨다.
“다른 모양[別相]의 온갖 것과 통하는 모양[總相]온갖 것이 있는데, 지금 말하는 것은 다른 모양의 온갖 것이니라.
말하자면, 부처님은 온갖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다만 중생들이 다 받아들일 수가 없을 뿐이지 부처님이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며,
또 말하자면, 온갖 아는 것을 곧이곧대로 말해야 마땅하나 말로 온갖 것을 다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성문ㆍ연각]
물었다.
“만약 부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을 말할 수 있다면, 성문ㆍ연각도 아는 것에 의지하여 말할 수 있거늘, 왜 부처님이라 부르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그렇지 않느니라.
부처님의 앎과 말함은 두루 다하나 2승(乘)의 앎과 말함은 법에 대하여 다하지 못하는 바가 있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부처님은 일체 법을 이해하므로 다 이름 지을 수 있지만 2승은 할 수가 없으며, 또 부처님은 그지없는 법을 얻었으므로 그지없는 말을 할 수 있지만 2승은 할 수가 없으며, 또 함께 할 수 있는 것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2승이 얻은 것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부처님이 얻은 것은 함께 할 수 없는 것이니라.
성문이 얻은 것은 3승(乘)이 같이 알고, 중승(中乘)이 얻은 것은 2승이 함께 알지만, 오직 부처님이 얻은 것은 2승이 모르며 부처님 자신만 아느니라.
또 상자가 크면 덮개도 크며 법이 크면 법의 모양도 그지없나니, 부처님은 그지없는 지혜의 힘으로써 그지없는 법을 알고 말하지만, 2승의 지혜는 끝이 있기 때문에 법의 모양을 일컫지 못하느니라.
다시 또 뿌리[根]와 뜻[義]에 있어서, 뿌리란 슬기의 뿌리요, 뜻이란 법을 반연한 슬기이니, 부처님은 뿌리와 뜻이 모두 원만하여 법을 반연한 슬기를 다하지 않음이 없지만 2승은 뿌리와 뜻이 둘 다 원만하지 않느니라.
또 부처님은 사실과 똑같이 아는 지혜[如實智]라는 이름을 얻었나니 일체 법의 모양을 사실과 꼭 같이 훤히 알기 때문이요, 2승이 아는 법은 근원과 밑바닥을 다하지 못할뿐더러 두루 하지 못하는 것이 있으므로 사실과 똑같이 아는 지혜라고 일컬을 수 없나니, 이런 갖가지 뜻 때문에 2승은 부처님이라 부를 수 없느니라.
바가바(婆伽婆)란 음성으로 전할 수 없고 뜻으로 풀이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 세존을 온갖 다스리는 법으로써 알 수 있겠느냐?
또 세상의 법과 말과 소리는 같지 않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서로가 알지 못하지만, 부처님은 모두 알기 때문에 세존이라 하느니라.
또 비구에게 당부하나니 무릇 2승 범부는 스스로 법을 얻었다 말하고 혹은 고요함과 잠잠함을 좋아하며 혹은 선정에 들기도 하고 혹은 남은 인연을 숨기고 아껴서 말하지 않기도 하지만, 부처님께서 얻으신 법은 사랑과 가엾이 여기시는 힘 때문에 즐거이 남을 위하여 말하느니라.
또 3독(毒)을 깨뜨렸으므로 세존이라 부르는 것이니라.”
[물러남의 세 가지]
물었다.
“2승 또한 3독을 깨뜨렸거늘 왜 세존이라 부르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그렇지 않느니라.
2승은 물러남이 있지만, 부처님은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니라.
물러남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과위에서 물러남[果退]과
과위 아닌 데서 물러남[不果退]과
쓰는 데에서 물러남[所用退]이니,
과위에서 물러남이란
성문이 세 가지 과위에서 물러나는 것이요, 아래 과위에서는 물러나지 않느니라.
중승에는 두 가지이니,
만약 백 겁 동안 익히고 행하여 벽지불의 과위를 이루었으면 물러나지 않거니와,
만약 본시 하승(下乘)의 세 가지 과위에서 벽지불이 되었다면 과위에서 물러남이 있느니라.
부처님은 과위에서 물러나지 않느니라.
과위 아닌 데서 물러난다는 것은,
만약 3승을 향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얻지 못하고 물러나는 것이요,
만약 비구로서 세 가지 업을 닦으면서 게을러 나아가지 못한다면 무릇 닦고 익히는 것에서 물러나 부지런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과위 아닌 데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이니라.
쓰는 데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얻은 바의 법을 바로 앞에서 다 쓰지 못하는 것이니,
마치 부처님의 10력과 소승의 열 가지 지혜는 하나를 쓰면 나머지는 곧 쓰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마치 10만 말씀의 경전을 외면서 만약 때 맞춰 다 외지 못한다면 이것을 쓰는 데에서 물러난다고 하는 것이니라.
하승은 과위 아닌 데서 물러나고,
중승도 과위 아닌데서 물러남이 있거니와
부처님은 과위 아닌 데서 물러남이 없으니, 일체의 행 가운데서 부지런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니라.
2승은 쓰는 데에서 물러남이 있거니와 부처님은 곧 일정하지 않느니라.
또 말하자면 10력(力) 가운데서 한 가지를 쓰게 되면 아홉 가지는 쓰지 않기 때문에 물러난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 말하자면 쓰지 못하여 물러남은 없으니,
마치 20만 말씀의 경전을 외울 적에 범부는 힘이 열약하기 때문에 혹 하루나 이틀 만에 외워 마치거니와 부처님은 즉시 외워 마칠 수 있는 것처럼
10력도 그러하여 쓰려고 하면 곧 쓸 수가 있어서 장애됨이 없기 때문에 쓰지 못하여 물러남이란 없는 것이니라.
또 말하자면, 부처님은 쓰지 못하여 물러남이 없다는 것은 마치 열반승(涅槃僧)을 곧바로 입지 않는 것과 같아서,
마치 범부들의 법은 모두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한 까닭에 쓰는 법에 이익이 있으면 쓰고 이익이 없으면 쓰지 않는 것과 같나니,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로되 일부러 쓸 필요는 없으면 물러나는 것이므로, 비록 각각 아는 바가 있다하더라도, 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니라.
부처님의 뜻이야말로 헤아릴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느니라.”
물었다.
“성문은 어째서 세 과위에서는 물러나고 아래의 과위에서는 물러나지 않나이까?”
대답하셨다.
“세 과위는 일찍이 얻었기 때문에 물러나거니와
아래의 과위는 아직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굶주리다가 좋은 음식을 먹으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것처럼 이 뜻도 또한 그러하니라.
또 말하자면, 아래 과위에서는 인(忍)은 걸림 없는 도[無礙道]를 짓고 지(智)는 해탈의 도를 짓는 것인데,
세 과위에서는 지가 걸림 없는 도도 짓고 지가 해탈의 도도 짓기 때문에 물러나는 것이니라.
또 말하자면, 견제도(見諦道)에는 물러남이 없지만 사유도(思惟道)에는 물러남이 있나니,
깨끗하지 못한 것을 깨끗하게 하려는 생각으로 번뇌를 끊기 때문에 사유도에는 핍박함이 있고 견제도에는 핍박함이 없으며,
견제도에 핍박함이 없다는 것은 견제의 번뇌에서 이치를 보는 것이요,
사유도는 미미하게 생기기 때문에 핍박하여 물러남이 없느니라.
또 말하자면 견제도의 지혜의 힘은 강하여 마치 큰 들보로 물건을 누르는 것과 같지만,
사유도의 지혜는 약하기 때문에 물러나느니라.
또 말하자면, 견제는 욕계(欲界)에서 인(忍)과 지(智)의 두 마음으로 9품(品)을 끊을 수 있고 위의 세계[上界]에서 인과 지의 두 마음으로 72품(品)을 끊어서 번뇌가 다한 무색계(無色界)이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런 뜻 때문에 홀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世尊]’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또 부처님은 습기(習氣)가 끊어졌고 2승은 습기를 다하지 못하였나니,
마치 우시비구(牛呞比丘)와 같이 언제나 소 풀 먹는 시늉을 하는 것은 세세생생 소였다가 왔기 때문이며,
어느 비구처럼 비록 번뇌가 다하였지만 항상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는 것은 세세생생 음녀(婬女)였다가 왔기 때문이며,
어느 비구처럼 그네뛰기를 하는 것은 세세생생 원숭이였다가 왔기 때문이니,
세존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는 말]
‘이와 같이 들었다[如是我聞]’고 말하는 것은 부처님이 계실 때 말씀하신 것이요,
‘내가 들었다[我聞]’고 하는 것은 열반하신 후이니, 법장을 기록하는 이가 ‘내가 들었다.’고 하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20년 동안 법을 말씀하실 적에 아난은 듣지 못했거늘, 어찌 ‘내가 들었다.’고 말할 수 있나이까?”
대답하셨다.
“여러 하늘이 아난에게 말하여 준 것이며,
또 부처님이 세속의 마음에 들어서 아난에게 알게 하시며,
또 여러 비구들 곁에서 들으며,
또 아난이 부처님께 청하여 원하길
‘원하옵나니, 부처님께서는 저에게 헌 옷을 주시지도 말고 남들이 저를 청하여 밥을 먹게도 하지 마시옵소서.
저는 법을 구하고 부처님을 공경하기 위함 때문에 부처님을 모실 필요가 있는 것이지 옷과 밥 때문이 아니오며,
여러 비구들은 아침 저녁 두 때에 세존을 만나 뵐 수 있으나 저만은 그렇지 않게 하시어 뵙고 싶으면 곧 뵈올 수 있으며,
또 부처님께서 20년 동안 말씀하신 법을 다 저에게 말씀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느니라.”
물었다.
“20년 동안에 말씀하신 법 구절을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까?”
대답하셨다.
“부처님은 교묘한 방편으로 하나의 법 구절 안에서도 한량없는 법을 펴며, 한량없는 법을 한 구절의 의미로도 만들 수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대략 그 단서를 보이시면 아난이 다 이미 알게 되었나니, 빠르고 영리하고 잘 기억하는 힘 때문이었느니라.
8만의 법이란 또 말하자면 마치 나무의 뿌리ㆍ줄기ㆍ가지ㆍ잎을 하나의 나무라고 하듯이 부처님도 중생들을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법을 말씀하였으되 이름은 하나의 갈무리[一藏]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8만에는 또 부처님이 한 자리에서 말씀한 법을 하나의 갈무리라고 하기도 하며,
이와 같은 8만에는 또 열여섯 글자로 반 구절의 게송이 되고 서른두 글자로 한 구의 게송이 되기도 하며,
이와 같은 8만에는 또 길고 짧은 게송으로 마흔 두 글자가 하나의 게송이 되기도 하느니라.
이와 같은 8만에는 또 반달마다 말한 계율이 하나의 갈무리로 되기도 하고,
이와 같은 8만에는 또 부처님 스스로가 말한 6만 6천의 게송이 하나의 갈무리로 되기도 하며,
이와 같은 8만에는 또 부처님이 말한 번뇌에 8만이 있고 법의 약에도 또한 8만이 있으므로, 8만의 법장이라고 하느니라.”
[율경의 ‘부처님께서’]
물었다.
“계경(契經)과 아비달마에는 ‘부처님께서’라고 처음이 되어 있지 아니하고, 율송(律誦)에서만이 ‘부처님께서’라고 처음에 되어 있나이다.”
대답하셨다.
“뛰어나기 때문이며, 부처님 홀로 제정하였기 때문이니라.
계경(契經)과 같은 것은 여러 제자들이 말한 법이니, 때로는 석제환인이 스스로 보시가 첫째라고 말하면서
‘무엇 때문인가? 나는 보시하였기 때문에 천왕이 되어 원한 바를 뜻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라.
‘부처님 말씀이 이와 같다[佛言如是]’라 함은, 때로 부처님은 변화로 화신불(化身佛)이 되어서 화신불로써 법을 말하였지만, 계율은 그렇지 않아서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인지라,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라고 함이 처음에 있느니라.
또 저 계경은 처소마다 결정한 것을 따랐지만 계율은 그렇지 않으니,
만약 집 안에서 일이 있었으면 곧바로 제정하지 못하고 반드시 바깥으로 나가야 했으며,
만약 속인 곁에서 일이 있었다면 반드시 대중들 가운데서 제정하였으며,
만약 마을에서 일이 있었으면 역시 대중들 가운데서 제정하였으며,
만약 다섯 대중[五衆] 곁에서 일이 있었으면 반드시 비구ㆍ비구니 곁에서 제정하였으니,
그 때문에 ‘부처님께서’라고 함이 처음에 있느니라.
비야리(毘耶離)라 함은, 혹은 어떤 나라 왕의 이름으로 삼기도 하고, 혹은 땅을 일컫기도 하며, 혹은 성(城)으로 부르기도 하니, 이 나라에서는 용(龍)을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니라.
가란타(迦蘭陀) 마을이라 함은 새 때문에 이름 지어진 것이며, 또 마을의 우두머리 이름이 수제나(須提那)인 것은 부모가 천신과 지기에게 청하여 얻었다 하여 그 때문에 이름이 ‘구하여 얻음[求提]’인 것이니라.
부귀(富貴)라 함은, 부자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들이요, 둘째는 중생 아닌 것이니라.
중생 아닌 것이란 금과 은과 칠보와 창고의 재물과 비단이며 밭과 집이 많이 있는 것이요,
중생들이라 함은 종ㆍ코끼리ㆍ말ㆍ소ㆍ양ㆍ마을과 봉읍(封邑)들이니, 그러므로 부자라고 하느니라.
귀하다 함은 혹은 봉읍의 주인이 되었거나 혹은 아름다운 덕을 지녀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이니, 그 때문에 귀하다고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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