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빛의- 작고- 시간을 잘 지키는 Pink—small—and punctual
by 에밀리 E. 디킨슨
분홍-그리고- 작은 것들 때맞춰-
향긋- 나지막이-
사월에 숨어 있더니-
오월에- 서슴없다-
이끼에게 소중하고-
작은 산이 알고 있고-
로빈새 옆에서
사람들 저마다의 마음 속에서-
당신으로 장식된-
작지만 대단한 아름다움에-
자연이 저버린-
고풍- (박혜란 옮김)
해석과 감상
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Emily E. Dickinson, 1830~1886. 이하 에밀리)은 미국 청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남북전쟁을 몸소 겪고 평생 흰색 옷만을 고집하며 칩거한 채 책과 정원가꾸기, 시와 편지쓰기를 즐겨했던 자존의, 고독한 시인이다. 원예가이기도 한 에밀리에게 시적 영감의 원천은 자신이 가꾼 정원의 식물들이다. 마타 맥다월의『에밀리 디킨슨, 시인의 정원』에는 이에 대한 많은 정보가 수록되어 있다. 자연에 대한 깊은 관찰과 시선, 인간-여성의 삶, 죽음과 불멸을 은유적으로 매개하는 식물(성)은 격물치지(格物致知)와 퓌시스(Phusis)의 중요한 토대이자, 더없는 상상과 심미적 사유의 촉매가 된다. 꽃은 아름다움과 생명력, 사랑과 유한한 존재의 본질을 상징하는 메타포로 기능한다. 꽃은 특유의 빛과 색, 향기로 인해 인간에게 심리적 안정과 순간의 영원을 표상한다. 식물세계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얻는다. 재난[disaster]이 별과 천체에서 떨어져[dis+astro,aster] 나온 데 기인한다면, 피난은 이들을 보다 가까이 하는 일이며, 문학의 생태학은 좋은 피난처가 될 것이다. 식물성의 세계는 지상의 별이고 달이며, 마음의 언덕이다. 우리나라 조선조 성리학자들이 추구하는 공부 중 하나가 자신의 삶의 주변에 실재하는 나무를 세면서 하나씩 그 이치를 깨닫는 것이라면, 식물성의 세계는 고요하며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그 세계는 자신이 주어진 공간에서 수직으로 뻗어 내려가거나 위로 부풀어 오른다. 지표가 경계를 이루고 그 위와 아래로 세계는 나뉜다. 그 어딘가에 지천으로 꽃이 핀다.(박영대,『식물성의 사유-식물성을 화두로 삼은 우리 미술 읽기』참조)
에밀리는 생전에 1,800편을 웃도는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된 시는 고작 10편 내외에 불과했다.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 여동생 라비니아 N. 디킨슨이 서랍 속에서 습작 노트인 파시클(fascicle)을 발견해 19세기 미국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한 명으로, 미국 현대시의 토대를 구축한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녀의 시는 제목이 따로 없고 첫 행이 대신하며 일련번호(토마스 존슨의 분류에 의하면, 이 시는 1357번)로 처리되어 있다. 기왕의 서정시에 기반해 있으면서도 대소문자의 병기(倂記), 쉼표나 마침표 대신 대쉬(-) 사용은 당시로선 파격적이다. 대쉬는 시의 리듬과 휴지를 만들어내면서 시인의 사유를 영원과 무한으로 이어지게 하는 시각적 장치에 속한다. 인용시의 경우는 봄날의 꽃을 노래하고 있으며, 짧지만 긴 여운과 격조가 있다. 우리의 진달래꽃, 솜양지꽃, 금낭화, 현호색, 수양버들, 제비꽃, 미선나무 등과는 달리, 에밀리의 정원에는 크로커스와 히야신스, 튤립과 매화오리나무, 살무사혀와 혈근초 등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식물도감에서 잊혀지지 않은 오월의 꽃(Mayflower/ Trailing Arbutus), 분홍꽃이 아름다운 것은 시중(時中)에 있다. 아직 때가 아닌 4월에는 나뭇가지에 숨어 있다가 5월이 되면 서슴없이 피어나 향기를 발하는 꽃. 작은 산이 언덕이 먼저 알고 자연의 시간을 잘 지키는 꽃. 이끼와 벗하며 로빈새-울새 다음으로 봄을 알리며, 그 옆에서 누군가의 마음 속에 살아있는 꽃. 그 "꽃(들)을 따서 말리고 압화로 만드는 과정이/ 시의 그물이 된다/ 에밀리의 시는/ 꽃을 따서 모은/ 생명의 노래이다."(김구슬,「1월의 여름- 에밀리의 정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 눈이 녹고 다시 꽃이 피는 것, 이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성실하다.『중용』의 저자는 이를 두고“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요, 성실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도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과 생명은 이렇듯 천지와 자연의 '성(誠)'을 따르는 데 있다.
마지막 연에서 작지만 대담한 그 꽃은‘당신[Thou]’이란 인격체로 거듭나 있다. 이는 마르틴 부버식으로 말하자면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의 만남이다. 근원어로서 나와 너는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꽃과 새, 나무 자체로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며 기쁨인가! 진정한 아름다움이자 사랑의 영혼인 당신은 자연이나 대상화된 자아이기도 하고, 그녀가 편지를 통해 교류했던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 대지는 지금 오월의 꽃으로 눈부시다. 대자연은 오랜 시간과 세월마저 잊어버린 채 젊고 생기가 넘치며 뒤나미스(dūnamis)로 가득차 있다.‘Pink—small—and punctual-, 이 세 마디 말은 에밀리의 특징적인 성격을 함의한다. 그녀의 고요한 열정과 내면의 순수에서 "기억은 선율처럼 영원히 분홍빛"이다. 그리고'돌/벌/새/꽃'처럼 작은 것들 낮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서, 천지의 운행에서 시인은 어떤 경이로움과 깊은 깨달음을 얻는다. 오랜 세월 외부와 단절되어 있으면서도 시간과 죽음을 초월한 가능성의, 무한한 세계를 시로 쓸 수 있었던 그녀. 시를 통해 생사와 자연의 이치를 보다 적확하고 간결하게, 정곡을 찌르듯 묘사할 수 있었던 그녀 앞에서 내 인생과 시에 있어 세 마디는? 자기만의 방과 정원에서 세상을 알고 느끼며 자연과 자아, 고통과 고독, 사랑과 죽음과 영원의 시를 쓰고자 했던 에밀리. 그녀의 감성과 지성 그리고 영성은 분홍의 시와 행간 속에 스며 있다. 이 분홍의 시 대척점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상처 입은 사슴이- 가장 높이 뛰어오른다-/ 사냥꾼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건 다만 죽음의 황홀경일 뿐-/ 그러고나면 덤불은 (다시) 고요해진다! A Wounded Deer- leaps highest-/ I've heard the Hunter tell-/ 'Tis but the Ecstasy of death-/ And then the Brake is still! (165번 부분) (김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