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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 西 南 面
서남면은 본래 삭녕군(朔寧郡)의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서면(西面)과 남면(南面)의 두 개 지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곳이다.
서면은 옛 삭녕군 관아에서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면이라 하여 형천리(荊川里)· 가좌동리(加佐洞里)·냉정리(冷井里)·솔현리(率賢里)·석둔리(席屯里)·장항리(獐項里)·라외동리(羅外洞里) 등 7개 리를 관할해 오다,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가좌동리를 '佳佐洞里'로, 라외동리를 '羅鶴里'로 명칭 변경만 하여 기존의 7개 리를 관할했으나,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7개 리를 가천(佳川)·냉정(冷井)·솔현(率賢)·석둔(席屯)·장학(獐鶴)의 5개 리로 축소 폐합하여 남면과 병합, 서남면이 되면서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남면은 옛 삭녕군 관아에서 남쪽에 위치한다 하여 남면이라 하여 탄부리(炭釜里)· 고리동리(古里洞里)·오장대리(五壯垈里)·귀존리(貴存里) 등 4개 리를 관할해 오다,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오장대리를 '伍莊垈里'로 명칭만 변경하여 기존의 4개 리를 유지해 오다,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탄(伍炭)·고장(古莊)·귀존(貴存)의 3개 리로 축소 폐합하여 서면과 병합, 서남면이 되면서 연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서면과 남면이 병합되어 연천군에 편입된 서남면은 가천·냉정·솔현·석둔·장학·오탄·고장·귀존 등 8개 리를 관할하여 오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속해 있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서남면 전지역이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까지도 북한 지역에 놓여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서남면이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 6·25 전 서남면 소재지 : 연천군 서남면 귀존리 후평동
*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어 답사조사가 불능한 서남면 8개 법정리는 정부발행지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 지역 출신 원로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작성하였다.
* 제 보 자 : 이 보 의(73) 연천읍 차탄3리 7반
이 호 섭(68)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19 - 88
오 흥 만(66) 연천읍 통현1리
윤 여 신(66) 동두천시 생연1동 441 - 1 무지개아파트 C동 101호
이 경 휘(65) 연천읍 통현1리
윤 여 용(56) 전곡읍 전곡3리 전일주택 나동 201호
12. 귀존리(貴存里)
본래 삭녕군 남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이다.
6·25 전까지는 서남면의 행정·치안·교육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1 뒤밀(斗尾洞) : 작은뱅여울 남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작은 마을. '산골짜기'라는 뜻의 우리 고어인 '둠'의 연체형 '두미'가 '뒤밀'로 어휘가 변하여 아무 의미가 없는 한자 음차인 '斗尾'로 표기된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골짜기 마을'이라는 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2 큰뱅여울(大方洞) : 작은뱅여울 서쪽에 있었던 마을. 유래는 자세하지 않으나, 6 ·25 전에는 강릉 김씨 2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또한 이 마을 입구에는 황새· 백로·왜가리 등의 여름 철새도래지가 있어 서남면의 명물이 되었던 곳이다.
3 살대목 : 귀존리 중앙에 있던 큰 보(洑) 이름. 가천리의 가재울과 지어대에서 내려 오는 두 개울이 모여 소(沼)를 이루었는데, 이 곳에 모인 봇물은 물레방아를 돌리는데 이용되었다 한다.
4 도당골 : 살대목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도당(都堂)이 있었다 한다.
5 점말(店村) : 귀존리 가장 서쪽에 있던 마을.
6 비냥말 : 윗뒤뜨르 서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뒤편에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낭떠러지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양동(照陽洞)'으로도 불리웠던 곳이다.
7 윗뒤뜨르(上後坪洞) : 도당골 북쪽에 있었던 마을. 뒤뜨르 마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위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8·15 광복 전까지 전주 이씨들이 35호 집성촌을 이루었고 감리교회가 있던 마을이다.
8 아랫뒤뜨르(下後坪洞) : 귀존리 중앙에 있던 마을. 6·25 전까지 서남면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며 면사무소, 주재소(지서), 보통학교 ,여인숙 ,상점 등이 있었다 한다.
9 구진이(貴存里) : 후평동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요골 마을과 함께 전주 이씨 32호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10 국사봉(國思峰, 222m) : 구진이 마을 동쪽, 오탄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11 요골 : 구진이 동쪽, 국사봉에 딸린 골짜기 안에 있었던 작은 마을.
12 마대울고개(麻垈峴) : 요골에서 오탄리의 마대울(麻垈洞)로 넘어다니던 고개.
13 노루고개(獐峴) : 작은뱅여울과 오탄리의 마대울 사이에 있는 고개. 고갯마루의 지형이 '넓게 늘어져 있다'하여 '너르고개'로 불리웠던 곳이 '너르'가 '노루(獐)'로 음차되면서 엉뚱하게도 '노루고개'가 된 이름이다.
14 작은뱅여울(小方洞) : 큰뱅여울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들이 3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다.
13. 가천리(佳川里)
본래 삭녕군 서면의 지역으로,'가재울'이라는 마을이 있어 가좌동리(加佐洞里)라 하였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가좌동리를 '佳佐洞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좌동리와 형천리(荊川里)를 병합하여 가좌동리의 "佳"자와 형천리의 "川"자를 따서 가천리라 하여 서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양지울(陽地洞) : 지루터 동쪽에 있었던 마을. 하루 종일 햇볕이 잘드는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청주 한씨들이 10여호 살았다.
2 지루터(地於垈. 至於垈) : 양지울 서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호가 살았다 한다.
3 장거리 : 지루터 서쪽, 옛 장단군의 마성리로 넘어가기 전에 있었던 조그만 마을.
4 배랭이 : 가천리 가장 서쪽, 산 골짜기에 있었던 작은 마을.
5 손지터 : 배랭이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호가 살았으며, 지도상에는 '노동(弩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6 주을동(朱乙洞) : 가시내 서북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7 가시내(荊川洞) : 손지터 동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예전에 이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 옆에 가시나무가 무성히 자랐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오며, 6·25 전에는 10여호가 살았던 곳이다.
8 가시내개울 : 가시내 마을 앞을 지나 귀존리로 흘러가는 개울.
9 능말(陵村) : 가재울 동쪽에 있었던 마을. 조선 초 수양대군에 의해 단종의 왕위가 찬탈되는 정사의 어지러움에 회의를 느껴 서울에서 이 곳으로 낙향하여 일생을 마친 창신교위(彰信校尉) 이근생(李根生)의 묘가 있다 하여 능골로 이름지어진 곳이다. 조선 후기에는 궁궐의 내시들이 살았다 하여 '내시촌(內侍村)'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전해 오며, 6·25 전에는 약 20여호가 산촌(散村)을 이루었던 곳이다.
서남면 지역은 이 때 낙향한 이근생의 후손인 전주 이씨들이 크게 번성하여 6· 25 전까지 대성을 이루었다 한다.
10 가재울(佳佐洞. 加佐洞) : 능말 서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장사 유씨(長沙兪氏)들이 4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이 곳의 한자 표시인 '佳佐洞'은 가장자리를 뜻하는 방언인 '가쟁이'를 음차한 것으로 '가장자리 마을'이라는 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연천읍 차탄리 "가재울" 참고)
11 관음사지(觀音寺址) : 문화유적·유물편 "사지" 참고.
12 길마재 : 가재울에서 냉정리의 물미치로 넘어 다니던 고개. 고갯마루가 소 등에 얹는 길마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3 영원산(靈原山·靈源山. 271m) : 가천리·석둔리·장학리의 경계에 있는 산.
14. 냉정리(冷井里)
본래 삭녕군 서면 지역으로, 찬 우물이 있어 냉정리(冷井里)라 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 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안골 : 너더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2 응달말 : 안골 북쪽, 산골짜기 응달에 있었던 작은 마을.
3 웃말(上村洞) : 냉정리 가장 서쪽에 있었던 마을. 청룡동의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파평 윤씨가 15호 살았던 곳이다.
4 청룡동(靑龍洞) : 웃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20여호가 살았으며,'청룡안'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웠던 곳이다.
5 큰말(大開洞) : 응달말 북쪽에 있었던 냉정리에서 가장 큰 마을. 6·25 전에는 정선 전씨(旌善全氏)만 4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6 남성동(南星洞) : 응달말 동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남선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워졌었다.
7 아랫말(下村) : 냉정리 중앙에 있었던 마을. 남성동 마을의 아래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8 물미치(水峴) : 너더리 북쪽, 석둔리로 넘어 가는 긴 고개 이름. 이 고갯마루 부근에 있는 찬 샘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아 나와 이 부근 일대가 항상 물이 흔한 곳이 되어 물미치로 이름 지어졌고 냉정리의 유래 또한 이 우물로 인하여 지어졌다 한다. 6·25 전에는 이 고개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9 길마재 : 물미치에서 가천리의 가재울로 통하는 고개.(가천리편 참고)
10 너더리(板橋洞) : 아랫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삭녕과 장단의 구화장 사이를 연결하는 대로가 이 곳을 지나가 항상 인마의 통행이 빈번하여 이 곳을 가로 지르는 하천에 큰 나무다리를 놓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전해 오나, 원래의 뜻은 다리(板橋)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이 마을 주위 산속에 비교적 넓은 들이 위치하고 있어 '넓은 들'의 뜻인 '너덜'이 음차되면서 전혀 다른 한자식 이름을 낳게 되었다. 넓들(廣坪) > 널들 > 너들 > 너덜 > 너더리(板橋)
6·25 전에는 주막이 있어 '주막거리'라고도 불리웠고, 15호가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11 아랫너더리 : 너더리 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호가 살았던 곳이다.
15. 고장리(古莊里)
본래 삭녕군 남면의 고리동리(古里洞里)지역인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접해 있던 오장대리(伍莊垈里)의 일부를 병합하여 고리동리의 "古"자와 오장대리의 "莊"자를 따서 고장리라 하여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 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느릅소(楡沼) : 매봉재 동쪽, 임진강에 있는 소.
2 부엉데미 : 느릅소 북쪽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이 산에 부엉이가 나와 울면 꼭 비가 온다고 한다.
3 금정골 : 부엉데미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4 외정자 : 금정골 서쪽에 있던 수령 100년의 오리나무.
5 부군당(府君堂) : 외정자 서쪽에 있던 부군나무. 6·25 전에는 큰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고목이 있어 매년 동짓달이 되면 마을에서 부군제사를 지냈다 한다.
6 뾰족산 : 부군당 남쪽에 있는 뾰족한 모양의 산.
7 은골 : 고양대 남쪽에 있는 골짜기.
8 둔지봉 : 외정자 남쪽에 있는 봉우리.
9 매봉재 : 고양대 남쪽, 고잔하리와 경계에 있는 산.
10 안산 : 매봉재 북쪽에 있는 산. 고양대 지역에서 묘자리를 잡을 때 이 산을 안(案)으로 삼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1 오리번댕이 : 은골 서쪽에 있는 산 등.
12 기와골 : 은골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3 주록골(奏祿洞) : 안산 서쪽에 딸려 있는 골짜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4 수루네미(車踰峴) : 고장리에서 고잔하리로 넘어 가는 고개. 한자 지명인 수레 (車)와는 무관한 '산의 정상을 넘는 고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중면 마거리 "수루네미" 참고)
15 막터골구럼 : 막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땅이 움쑥 패어 들어간 곳을 가르키는 말인 '구렁'이 '구럼'으로 음이 변한 이름이다.
16 백산(白山) : 막터골 남쪽, 고장리·고잔상리·고잔하리 경계에 있는 산. 백씨의 소유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7 백산구럼 : 백산에서 막터골로 나 있는 골짜기.
18 점말고개 : 막터골에서 고잔상리로 넘어 다니던 마량산 밑에 있는 고개.
19 마량산(馬良山. 315m) : 막터골 서쪽, 고잔상리와 경계에 있는 뾰족한 산. (고잔상리 참고)
20 미량골 : 막터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마량산에 딸려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1 막터골(幕垈洞) : 마량산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15호 살았던 곳이다.
22 가산 : 막터골에 있는 산.
23 매학골(梅鶴洞) : 막터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24 양지곁 : 매학골 동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밭.
25 병목아지밭 : 양지곁 북쪽, 오목한 병모양의 골짜기 안에 있는 밭.
26 등제현(登悌峴) : 병목아지밭 북쪽에 있는 고개. '등드지고개'라고도 불리워지던 이 고개 정상에는 6·25 전까지 큰 벗나무와 함께 돌 서낭당이 있었다 한다.
27 공동묘지 : 등제현 옆에 있는 일제 때 조성된 공동묘지.
28 상산봉(上山峰) : 등제현 동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
29 약물터 : 고양대 서쪽, 작은 골짜기에 있는 약수터. 6·25 전까지 고양대 주민들의 기도처로 이용되었던 곳이다.
30 웃말 : 약물터 아래에 있던 마을. 고양대의 위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1 수리채고개 : 고양대에서 방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꼭데기'의 뜻인 '수리'에 고개의 뜻인 '재'가 합하여 '산 정상에 있는 고개'라는 뜻의 '수리재'가 되었다가 다시 '고개'를 덧 붙여 '수리재고개'로 불리웠으나, '재'가 '채'로 발음이 굳어져 버린 땅이름이다.
32 안고양대 : 수리채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 고양대 마을에서 안쪽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3 고양대(高陽垈) : 막터골 동쪽에 있던 고장리에서 가장 큰 마을.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6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34 도링곁산 : 고양대와 도링곁 사이에 있는 뾰족한 모양의 산. 지형이 모퉁이 처럼
돌아(回) 가는 옆(=곁)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5 도링곁(道論傍) : 고양대 동쪽에 있는 골짜기. 마을 밖에 있는 도링곁산 때문에 지어진 이름으로, '돈다(回)'는 뜻의 다른 말인 '돌은'이 '도링'으로 음이 변하였고 한자로 지명을 옮겨 쓰면서 '道論'이 된 곳이다.
36 빈대골 : 도링곁 안에 있는 작은 골짜기.
37 새터밭 : 고양대 동쪽에 있는 사흘갈이(4,500평) 넓이의 큰 밭.
38 마루거리 : 새터밭 동쪽에 있는 밭.
39 물방아터 : 고양대 동쪽, 임진강 가운데 있는 섬.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한다.
40 귓소 : 물방아터 위에 있는 소의 구유처럼 생긴 깊은 소(沼).
41 신피밭 : 고장리 산성 동쪽, 임진강변에 있는 밭. 땅이 질어 피만 심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2 부엉이굴 : 신피밭 서쪽, 부엉이가 서식했다는 바위 굴.
43 고장리 산성(古莊里 山城. 성재) : 고양대 동쪽, 산 정상에 있는 산성. 축조연대 및 규모는 자세하지 않지만 제보자들의 증언으로는 6·25 전까지 산 정상부를 퇴뫼식으로 쌓은 석성의 일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다. 지금은 휴전선과 바로 인접한 북한 지역이다.
44 무당소 : 신피밭 북쪽, 쐐미개울에 있는 소(沼).
45 밤골 : 고장리 산성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46 고지앗 : 밤골 북쪽, 쐐미개울 옆에 있는 밭. ('앗'은 밭(田)이라는 뜻을 가진 우리 고어이다)
47 방골 : 고지앗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받'이 '골(谷)'과 합하여 단순히 '산 골짜기'라는 뜻의 '받골'로 불리워지던 것이 음이 변하여 '방골'이 된 땅이름이다.
받골 > 밧골 > 반골 > 밤골 > 방골
48 패네미(牌踰) : 방골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49 막터골고개 : 되리뫼에서 막터골 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
50 마량골 : 되리뫼 남쪽, 마량산에 딸린 골짜기.
51 마골 : 되리뫼 서쪽에 있는 골짜기.
52 되리뫼(回山洞) : 고장리 가장 서쪽에 있었던 마을. 마량산에서 뻗어 내린 산부리끝을 둥글게 원을 그리며 돌아 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순흥 안씨들만 4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며, 지금은 북한의 선전마을이 있다.
53 당너머 : 되리뫼 동쪽, 2집이 살았던 작은 마을.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54 쐐미개울 : 고장리와 오탄리 경계에 흐르는 큰 개울 이름.
55 독골(獨谷) : 고려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山)의 옛말 '닫'이 음이 변한 단순히 '산 골짜기'라는 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일 뿐, '독'이 음차된 한자의 '獨'과는 무관한 땅이름이다. 6·25 전에는 한집이 살았던 곳이다.
닫(山) + 골(谷) = 닫골 > 닷골 > 돋골 > 독골
56 고려울(古里洞) : 고장리 북쪽에 있었던 큰 마을. '골짜기'의 뜻을 가진 '골'과 '마을'의 뜻인 '울'이 합쳐 이루어진 이름인데, '골'뒤에 '에','애','이'가 덧 붙어 아래와 같이 음이 변하고 한자식으로 지명이 음차되면서 '골짜기 마을'이라는 본래의 뜻이 엉뚱하게도 '古里洞'으로 되어버린 땅이름이다.
골(谷) + 울(洞) = 골울 > 골이울 > 고리울(古里洞) > 고려울
57 석숭앗 : 고려울 남쪽, 쐐미개울 옆에 있는 밭.
58 고려울벌 : 고려울 앞에 있는 넓은 벌판. 현재 북한의 집단농장이 되어 있다.
59 노리고지(nori高地) : 고려울 동쪽에 있는 산. 6·25 당시 이 고지를 두고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지어진 이름이다.
60 용의머리 : 노리고지 남쪽에 있는 산. 전설에 의하면 등천하던 용이 이 곳에 떨어졌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1 이내못 : 시욱이 북쪽에 있는 큰 못.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가고도 모자라는 깊이라 하며, 용이 이 물속에 산다 하여 '용못'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현재 중면 횡산리 태풍전망대에서 이 못이 관측된다.
62 시욱이나루(時郁津) : 고장리와 중면 중사리의 수오동 사이에 있던 임진강 나루터.
63 시욱이(時郁市) : 고려울벌 동쪽, 임진강변에 있었던 마을. 예전 삭녕군 때 장이 형성되어 '남면장거리'로도 불리웠던 곳이다.
64 귀룽앗 : 시욱이 서쪽에 있는 밭.
65 이레갈이 : 귀룽앗 동쪽에 있는 밭. 소로 1주일을 가는 넓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6 멍에아리 : 이레갈이 옆에 있는 밭.
67 청뒤앗 : 멍에아리 옆에 있는 밭.
68 동뫼산 : 시욱이 남쪽에 있는 조그만 산. 강변에 돌(石)이 많은 산이 되어 돌의 고어인 '돗'에 뒤에 산의 뜻인 '뫼'와 합하면서 '돗뫼'가 되었으나, '돗뫼'가 '독 뫼'로 음이 변하였고, 다시 자음동화로 인하여 '동뫼'가 되면서 뒤에 같은 뜻의 '산'이 덧붙어 이루어진 합성 지명이다.
16. 오탄리(伍炭里)
본래 삭녕군 남면의 오장대리(五壯垈里) 지역인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伍莊垈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탄부리(炭釜里)를 병합하여 오장대리의 "伍"자와, 탄부리의 "炭"자를 따서 오탄리라 하여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노루고개(獐峴) : 오탄리 마대울과 귀존리의 작은뱅여울 사이에 있는 고개. (귀존리편 참고)
2 마대울(麻垈洞) : 노루고개 동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에 삼(麻)을 많이 심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남평 문씨가 25호 살았던 곳이다.
3 망골 : 마대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4 벌말(坪村) : 망골 앞, 벌판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5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5 돌모루(石隅洞) : 벌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실제 이 곳 땅이름의 의미는 한자 표시의 '돌(石)'과는 거리가 멀고 '산 끝 모퉁이를 돌아가는 곳'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의 '돌(回)'로 풀이해야 옳다 하겠다. 6·25 전에는 박씨, 우씨 두 성씨가 살았던 곳이다.
6 쐐미개울 : 돌모루 앞에 흐르는 개울로 고장리와 경계가 된다.
7 오장터(伍莊垈) : 돌모루 동쪽에 있었던 마을. 유래는 자세하지 않지만 6·25 전에는 13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8 한세울 : 오장터 북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9 논사개 : 한세울 동쪽에 있는 골짜기.
10 옻나무재 : 어두니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 옻나무가 많이 자생했다 한다.
11 어두니고개 : 논사개에서 숯가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12 수나리재 : 아랫뒤골에서 숯가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13 아랫뒤골(下後洞) : 한세울 서쪽에 있던 마을. 오장터의 뒤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진주 하씨가 25호 살았던 곳이다.
14 윗뒤골(上後洞) : 아랫뒤골 서쪽에 있던 작은 마을.
15 승지물 : 윗뒤골에 있는 우물.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어떤 승지(承旨)가 이 물에 목욕을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16 중바위 : 윗뒤골 북쪽에 있는 바위로, 중과 닮은 형상이라 한다.
17 분투골고개 : 윗뒤골에서 국사봉 쪽으로 있는 고개.
18 한성판윤 윤 빈 묘(漢城判尹 尹賓 墓) : 분투골고개 옆에 있는 파평 윤씨의 묘. 묘역에는 망주석과 비석이 있었다 한다.
19 국사봉(國師峰, 烽火峰, 222m) : 숯가말 서쪽, 귀존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국사봉으로 명명된 내용은 자세하지 않지만 예전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하여 '봉화봉'이라고도 한다.
20 돈녕부도정 윤상규 묘(敦寧府都正 尹相珪 墓) : 조선 후기 돈녕부도정을 역임했던 윤상규(1825∼1899)의 묘. 옥개석을 갖춘 묘비와 상석·문관석·망주석 등의 석물이 있었다 한다.
21 장례원판결사 윤종남 묘(掌隷院判決事 尹宗男 墓) : 서당골에 있는 윤종남의 묘. 묘역에는 묘비와 상석이 있었다 한다.
22 서당골 : 숯가말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한다.
23 숯가말(炭釜洞) : 국사봉 동쪽에 있었던 큰 마을. 지형이 숯가마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약 500년 전에 정착한 파평 윤씨 42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4 재지봉 : 숯가말 북쪽에 있는 봉우리.
25 두멍터나루 : 오탄리와 중면의 적음리 사이에 있는 임진강 나루.
26 관모래기 : 재지봉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 부리.
27 고려장(高麗葬) : 관모래기 옆에 있는 작은 골짜기. 고려시대의 묘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고름장'으로도 어휘가 변하여 불리워졌던 곳이다.
28 쇠재(金峴洞) : 국사봉 북쪽에 있던 마을. 주위에 운모성분이 많아 금빛깔이 나는 바위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담고 있으나, 실제로는 '사이(間)'의 뜻인 '새'와(경기 북부 지방에서는 '새'가 '쇠'로 발음되는 현상이 많이 나타난다) 고개의 '재'가 합하여 '사이에 나 있는 고개'란 뜻의 '새재'였으나, 한자로 음차되면서 엉 뚱하게도 '쇠(金)'와 연관시켜 붙여진 이름이다.
29 우봉산(牛峰山. 251m) : 쇠재 북쪽, 장학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30 가둔지벌 : 고려장 북쪽에 있는 들판.
31 용못 : 두멍터나루 북쪽, 임진강 옆에 있는 못.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는 이무기가 나온다는 굴이 있다 하며, 물 색깔이 붉은빛을 띠었는데 붕어, 민물게가 많기로 이름났던 곳이다.
32 범데미 : 용못 서쪽에 있는 산. 6·25 전까지도 노루가 많이 서식하여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33 차돌소 : 범데미 북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34 가림자 : 용못 북쪽에 있는 섬. 임진강물이 이 섬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라진다하여 '갈리는 곳'을 뜻하는 말인 '갈'이 변한 땅이름이다.
17. 장학리(獐鶴里)
본래 삭녕군 서면의 지역으로, '장재울'이라는 마을이 있어 한자로 장항리(獐項里)라 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나학리(羅鶴里)를 병합하여 장항리의 "獐"자와 나학리의 "鶴"자를 따서 장학리라 하여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 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의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이다.
1 문비동(文備洞) : 장학리 남쪽, 귀존리와 경계가 되는 부근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25가구가 살았고, 연안 김씨·전주 이씨들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2 장재울(獐項洞) : 영원산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0가구가 살았던 작은 마을이다. 장학리의 유래가 되는 이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전형적인 산촌(山村) 마을로, 한자표시인 '獐項'과는 전혀 다른 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장재울은 원래 '작은 산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작다(小)는 뜻의 우리 말인 '잔'과 산(山)을 뜻하는 고어의 '자'에 '울(洞)'이 합쳐지면서 '잔자울'이 되었다가 아래와 같이 음의 변화를 거치면서 엉뚱한 한자이름인 '獐項'으로 바뀐 곳이다.
잔자울(小山村) > 장자울 > 장재울(獐項洞)
3 영원산(靈原山·靈源山. 271m) : 장학리·가천리·석둔리 경계에 있는 산.
4 막운골(幕雲洞) : 장학리 가장 서쪽에 있었던 마을. 13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5 수릉골(水龍洞) : 장재울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호가 살았다.
6 금산(錦山, 金屛山) : 삭녕시가지 남쪽, 임진강 남안(南岸)에 동서로 길게 펼쳐진 평풍 같은 산이름. 가을 단풍이 절경을 이룰 때면 개옻나무를 특징으로 하는 갖가지 활엽수종의 단풍이 곱게 수놓은 비단 병풍처럼 펼쳐져 가경(佳景)을 연출한다 하여 금산으로 이름지어졌다 하며, 삭녕 앞을 흐르는 임진강도 삭녕의 옛 지도에는 '錦江'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옛날에 어떤 장수가 이 부근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그 장수가 쓰던 투구가 이 산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7 놋다리나루 : 금산 동쪽, 장학리와 삭녕시가지를 왕래하던 임진강 나루.
8 이내못 : 놋다리나루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길고 수심이 깊은 못.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 풀어 놓은 소를 이무기가 잡아먹고 코뚜레만 남겨 놓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9 삼밭머리(蔘田洞) : 이내못 남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인삼재배를 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해주 최씨가 15호 살았었다.
10 나학골(羅鶴洞) : 삼밭머리 서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호가 살았던 곳이다.
11 우봉산(牛峰山. 257m) : 신복골 남쪽, 오탄리와 경계에 있는 산.
12 심복골(心服洞) ; 우봉산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3가구가 살았던 마을이다.
13 범바위나루 : 심복골에서 적음리의 구대동으로 건너다니던 임진강 나루. '문바위 나루'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워지던 곳이다.
18. 솔현리(率賢里)
본래 삭녕군 서면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이다.
1 야라울(也羅洞) : 임죽골 동남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의 지형이 '也'자 형국으로 되어 있다 한다. 6·25 전에는 해주 오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 광터(廣垈) : 야라울 남쪽에 있는 골짜기.
3 성가마골 : 광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
4 새절골(新寺洞) : 솔현리 가장 서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조선 후기에 창건되었던 신흥사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20여호가 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5 신흥사지(新興寺址) : 새절골에 있었던 절. ≪삭녕읍지≫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연혁은 자세하지 않다. 6·25 전까지 신흥사지는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한다.
6 수룡산(518m) : 신사동 서북쪽, 왕징면 덕적리와 황해도 경계에 있는 높은 산.
7 봉화재(烽火山. 285m) : 황해도 금천군 숙인면 두모리와 경계에 있는 산. 예전에 이 산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던 곳이며, 6·25 전까지도 석축기단 위에 흙으로 쌓은 봉수대의 유지가 남아 있었다 한다.
8 쑥골(蓬萊洞) : 봉화재 남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35가구가 있었으며, 남양홍씨들이 주성을 이루었다.
9 기와말(瓦洞) : 쑥골 동쪽에 있었던 마을. 옛날에 큰 기와집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파평 윤씨와 해주 오씨가 35가구 살았다.
10 밤골(栗洞) : 기와말 북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작은 마을.
11 임죽골(林竹洞) : 기와말 동쪽에 있었던 솔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 8·15 광복 당시에는 2년제의 간이학교와 감리교회, 한지를 만들었던 지업공장(紙業工場)이 있으며, 가구수는 총 45호였다.
19. 석둔리(席屯里)
본래 삭녕군 서면의 지역으로, 돗둔이라는 마을이 있어 한자로 옮겨 석둔리라 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서남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 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에 위치하여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왕징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벌말(坪村) : 석둔리 남쪽, 솔현리와 경계지점인 벌판에 있던 마을. 6·25 전까지 창호지의 명산지로 유명했고, 50여호가 살았다.
2 성말(城村) : 벌말 북쪽에 있던 마을. 석둔리 산성의 아래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 서낭당고개 : 성말과 새말 사이에 있는 고개. 정상에 돌서낭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석둔리 산성(席屯里 山城) : 성말 북쪽, 232m의 산 정상에 있는 산성. 문헌에 축성연대나 자세한 성의 규모가 전해 오지 않지만, 6·25 전까지도 정상부를 퇴뫼식으로 쌓은 석성의 윤곽이 뚜렷히 남아 있었다 한다.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어 조사가 불가능하다.
5 새말(新村, 윗돗둔이) : 서낭당고개 북쪽에 있던 마을.
6 능말(陵村) : 새말 위에 있던 마을. 조선 숙종조에 효행으로 온 고을을 감동시켰던 효자 백시형(白時亨)의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의 묘 아래에는 6· 25 전까지도 효자문이 있었다 한다.
7 아랫능말 : 능말 북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능말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8 돗둔이나루(度屯渡) : 능말 동쪽, 삭녕면 여척리로 건너 다니던 임진강 나루.
9 개목이나루 : 돗둔이나루 남쪽, 삭녕면 여척리와 연결되는 임진강에 있던 나루.
10 개목이고개 : 벌돗둔이에서 개목이나루로 넘어다니던 고개.
11 보리산(寶李山. 249m) : 새말 동쪽에 있는 산.
12 벌돗둔이(坪席屯洞) : 새말 남쪽, 벌판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7가구가 살았다 한다.
13 막운골고개(幕雲洞峴) : 벌돗둔이에서 장학리의 막운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14 물미치골(水峴洞) : 벌돗둔이 남쪽, 물미치고개 입구에 있던 작은 마을.
첫댓글 서남면은 계수나무(문대권)님과 고리울(조영환이사)님의 고향입니다. 오탄리의 마대울이라는 곳에 남평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하니 계수나무님의 고향인 것 같고요. 고리울이라는 닉을 쓰시는 조영환이사님은 고장리에 있는 고리울이라는 곳에서 사셨던 것 같네요. 지금은 갈 수 없는 고향이라 더욱 간절하시겠습니다.
전 읽어도 잘모르겠읍니다 마을 이름도 별난 지명 이름도 특이 하네요 수고 하셨읍니다
이준용님 어떻게 이렇게 상세한 자료를 구하셨는지요. 참 존경스럽 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어릴적의 감회가 새로뤄 지네요. 정말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