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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5. 동구불출
경봉의 은사 성해 화상은 화가 나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경봉이 거지가 다 된 꼴로 통도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출타를 미룬 채 안양암에서 기다렸다. 마산 포교당에 다녀올 생각을 접고 뒷짐을 진 채 헛기침을 하며 마당을 서성거렸다. 성격이 꼼꼼한 경봉에게 큰절(통도사) 재무 일을 경험하게 한 뒤, 때가 되면 선방으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자신에게 상의한 적도 없고 허락도 없이 야반도주했다가 2년 만에 다시 나타난 소행이 괘씸하기만 했다. 더구나 경봉이 해인사 선방에 있음을 알고 인편을 보내고 나중에는 합천경찰서 순사를 동원하여 속히 돌아오라고 지시했는데도 자신의 명을 거역한 제자인 것이었다.
‘중이란 한 발짝도 쓸데없이 걷지 않는 법인데 경봉은 벌써부터 제멋대로이니 망아지가 따로 없구나.’
성해는 경봉에 대해 어떤 중보다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러했으므로 오해는 기대한 만큼 컸다. 그는, 경봉이 산천경개 좋은 명산을 찾아 유람하고 온 줄 알고 있었다. 경봉이 해인사 선방에서만 몇 철 살다 왔다면 성해는 ‘참선 공부를 했겠지’ 하고 화를 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오고가는 객승들에게 들은 바지만 경봉이 2년 동안 해인사, 직지사, 마하연사, 석왕사를 잠시잠시 거쳤다가 이제야 통도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경봉은 통도사 적멸보궁으로 가 삼배를 한 다음 바로 계곡을 건너 안양암으로 갔다. 계곡 가에는 버들강아지가 눈을 뜨고 얼음이 녹은 물은 소리치며 흐르고 있었다. 각오는 했지만 은사가 불벼락을 내릴 것이 뻔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래도 경봉은 안양암 주위를 감싸고 있는 솔숲을 보자, 고향집 어머니를 만난 듯 포근함이 느껴졌다. 목을 축이곤 하던 돌샘물도 바위 사이로 돌돌 흐르고 있었다. 이른 봄인데도 하늘은 잿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지만 경봉의 마음속에는 봄날 같은 막연한 그리움이 솟구쳤다. 경봉은 댓돌에 놓인 고무신을 보고 합장을 했다. 고무신은 은사의 것으로 닳아진 코는 헝겊으로 기워져 있었다.
“경봉입니더.”
경봉은 은사가 머무는 방 앞에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조금 더 큰소리로 자신을 알렸다.
“스님, 경봉 왔십니더.”
인기척이 날 때까지 경봉은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한 참 만에야 방안으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너를 기다리고 있다.”
경봉은 은사에게 삼배를 올렸다. 그러나 은사는 삼배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혀를 차며 야단을 쳤다.
“쯧쯧쯧. 다 떨어진 장삼을 입고 있는 꼴을 보니 꼭 비루먹은 사냥개 같구나. 떨어진 장삼을 기워 입을 줄도 모르면서 무슨 공부를 한다고. 쯧쯧쯧. 네 걸망에는 바늘 한 개도 없다는 말이냐.”
“은사님을 한시라도 빨리 뵙고 싶어 돌아왔십니더.”
“통도사를 야반도주해서 그동안 뭘 했더냐. 거지같은 네 몰골을 보아하니 말하지 않아도 알만 하구나.”
경봉은 대꾸를 하지 않고 머리를 숙인 채 은사의 꾸중을 듣기만 했다.
“너는 도대체 뭣이 되려고 그러느냐. 고인이 말씀하기를 스스로 마음을 단박에 깨쳐서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대열에 들어간 분을 선승이라고 했다. 해오(解悟)와 수행을 동시에 행하여 세간의 흐름에 들어가지 않을 분을 고승이라고 했다. 계정혜를 고루 갖추어 설법솜씨가 뛰어난 분을 강승(講僧)이라고 했다. 견문이 깊고 알차서 옛일로 지금일을 검토하는 분을 문장승(文章僧)이라고 했다. 인과를 알고 자비와 위엄을 함께 쓰시는 분을 주사승(主事僧)이라고 했다. 열심히 공부에 정진하여 부처 종자를 기르는 분을 상승(常僧)이라고 했다. 자, 너는 어느 쪽이더냐. 어서 일러보아라.”
“선승의 길을 가고 싶습니더.”
“그리 발심했으면 통도사 영축산 골짜기라도 숨어 들어가 정진할 일이지 해인사, 직지사, 마하연사, 석왕사로 유람하듯 돌아다닐 일은 또 무어냐. 바위산 골짜기에 숨어 살아도 도력이 깊어지면 산짐승이 열매를 따와 발우에 바치기도 하고 날아가던 새가 와서 법문을 듣는다는 고인의 말씀을 잊어먹었느냐.”
경봉은 성해화상의 말이 꾸지람으로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을 절절하게 적시는 법우(法雨) 같았다. 성해화상은 만행 길에 삭막해진 경봉의 가슴에 법의 소낙비를 뿌리고 있었다. 경봉은 눈물이 나려고 하자 어금니를 꽉 물었다.
경봉이 성해화상으로부터 들은 얘기 중에 가장 반가웠던 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공부가 네 소원이라고 하니 오늘부터 안양암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말거라. 네 너에게 나무 한 짐, 마당에 난 풀 한 포기 뽑기를 원치 않을 터인즉 동구불출 정진하라.”
동구불출(洞口不出).
동구불출이란 한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정진하는 금족(禁足)의 수행을 말했다. 경봉은 은사 성해로부터 동구불출이란 말을 듣는 순간 고인의 한 말씀이 문득 떠올라 합장을 했다.
‘부처가 자기 마음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밖에서 찾고 있네. 값을 칠 수 없는 보배를 속에 지니고도 일생을 쉴 줄 모르네.’
성해는 다 떨어진 장삼을 입고 있는 경봉의 몰골이 측은했던지 벽장문을 열어 정갈한 무명 장삼을 꺼내어 건네주며 말했다.
“내 비록 덕행이 적은 사람이지만 몸단속은 허투로 안 한다. 누더기를 입더라도 신도가 보시한 정재이니 조심스럽고 깨끗하게 입을 줄 알아야 한다.”
찬 바람이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경봉의 등을 서늘하게 했다. 꽃샘추위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때때로 눈보라가 몰아쳐 나뭇가지에 비쭉 솟은 움이나 꽃망울을 얼게 하였다. 경봉은 밖으로 나와 마당가에 심어진 매화나무 아래 섰다. 수백 년 된 고목으로 꽃이 만개하여 설화(雪花)가 핀 듯하였다. 어린 사미승 하나가 빗자루를 들고서 매화 향기를 묻히고 다녔다.
골짜기에는 간밤의 꿈처럼 잔설이 희끗희끗했다. 경봉은 은사인 성해화상이 동구불출을 명했을 때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을 쏟을 뻔했는데, 매화나무 아래서야 참았던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성해는 그러한 경봉을 보고는 한 마디를 더하고는 휑하니 출타했다.
“비구가 비구법을 닦지 않으면 대천세계에 침 뱉을 곳이 없다고 했다. 또한, 승려가 되어 10과(十科)에 들지 못하면 부처님을 섬겨도 백년을 헛수고하는 것이다, 라고도 했다. 명심하거라.”
그 한 마디에 신심이 솟구친 경봉은 매화나무 아래의 바위에 앉아 좌선에 들어갔다. 성해화상이 건네준 장삼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누더기를 걸친 채 ‘이뭣고’를 붙잡았다. 찬 바람이 불어 매화꽃 이파리가 얼굴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어깨에 눈처럼 쌓였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아! 알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噫非知之難 行之爲難也), 라고 하지 않았던가. 은사님의 가르침대로 동구불출에다 장좌불와까지 더하여 가행정진할 것이다. 병이 난다 하더라도 결코 옆구리를 자리에 붙이지 않을 것이다.’
경봉은 그날부터 동구불출에다 누워 자지 않는 장좌불와 수행에 들어갔다. 단순히 눕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놓지 않아야 했다. 화두가 성성하지 않으면 동구불출이라도 그것은 거죽만 동구불출이요, 장좌불와라도 그것은 억지 장좌불와인 것이었다.
밤이 되어 바람이 멎더니 구름이 눈으로 바뀌어 내렸다. 처음에는 매화꽃 이파리처럼 한잎 두잎 내리더니 쌀가루처럼 떨어져 쌓였다. 경봉의 머리와 어깨, 무릎에도 눈이 쌓였다. 그러나 경봉은 눈이 쌓이는 줄도 모르고 좌선삼매에 빠져 있었다. 해담조실에게 사미계를 받은 사미승이 놀라 경봉에게 말했다.
“스님, 스님.”
그제야 경봉은 삼매에서 깨어나 사미승을 보았다. 오후와 초저녁이 한 순간에 흘러버린 듯했다. 시간을 잊어버린 경봉에게 깨어 있는 것이 있었다면 ‘이뭣고’라는 화두뿐이었다. 눈이 오는 것도, 멎은 것도 몰랐던 것이다.
“스님, 제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말해 보거래이.”
“날씨가 찹니다. 눈이 또 오려고 합니다.”
“괜찮다.”
“방에 드십시오. 암자에는 아무도 안 계십니다. 해담 큰스님도 양산 내원사 법문가시고 주지스님은 마산 포교당에 가셨습니다.”
사미승은 낮에 성해화상의 큰 목소리를 듣고는 경봉이 벌을 받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낮에는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다가 아무도 안 보이는 밤이 되어서야 마음 놓고 다가와 걱정하고 있었다.
“알았으니 먼저 가거래이.”
사미승이 돌아간 뒤, 경봉은 주변에 쌓였던 눈을 쓸고 다시 좌선에 들었다. 좌선에 깊이 들면 뱀이 물어도 독이 퍼지지 않는다는 얘기가 맞았다. 추위도 마찬가지였다. 추위가 경봉의 몸을 얼리거나 괴롭히지 못했다.
솔바람이 불어가는 듯 암자 처마 밑에서 풍경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사미승이 또 나와 울상이 다 되어 말했다.
“이러다 죽습니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셔요.”
“괜찮다카이.”
“주지스님도 무심하십니다. 너무 하십니다.”
“네 눈에는 내가 지금 벌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느냐.”
“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좌선삼매에 들면 생사도 초월하는데, 추위쯤이야 아무 것도 아이다.”
“정말입니까?”
“너도 수행해 보면 알 것이다. 이런 힘을 선정력(禪定力)이라 한다.”
그제야 사미승은 담요를 꺼내와 경봉의 몸에 두르고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정이 많은 동자승이었다. 누군가가 안양암에 맡겨 놓고 갔거나, 아니면 해담화상이 데리고 들어온 사미승이 분명했다. 덩치는 있으나 아직 어린애 목소리를 내었다. 사춘기도 지나지 않은 아이가 분명했다. 그러나 담요를 가져와 경봉의 몸에 둘러쳐주고 간 행동을 보면 아이답지 않았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해담화상이 아이의 그런 면이 마음에 들어 자식처럼 동자승으로 데리고 있을 터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해담화상에게 금강계단에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은 일이 떠올랐다. 통도사에서 운영한 명신학교를 졸업한 다음해이니까 20세 때의 일이었다. 그때 해담화상은 비구될 자격을 갖춘 사미승들에게 비구계를 여법하게 설한 후, 그날 밤 경봉만을 따로 안양암으로 불러놓고 일장 훈시를 했는데, 경봉은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대지(大智)율사가 지은 <비구정명(比丘正名)>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가슴에 잘 새기어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비구라는 말뜻은 이렇다. 범어로는 필추(苾?; 比丘)며 중국어로는 걸사(乞士)니 안으로는 법을 빌어 성품을 돕고 밖으로는 밥을 빌어 몸을 돕는다. 부모는 사람 중에 가장 가까이 할 사람이나 가장 먼저 그 인연을 끊고, 수염과 머리카락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모조리 깎아 없앤다. 칠보가 창고에 넘치는 부(富)도 초개같이 버리고 일품(一品) 벼슬에 달하는 명예도 구름이나 연기만도 못하게 보면서 무상함에 진저리를 내어 모든 현상의 근본을 깊이 캔다. 뜻을 높이고자 하면 반드시 몸을 낮추어야 하니 잡고 있는 주장자는 마른 찔레나무요, 들고 있는 발우는 깨진 그릇과 다를 바 없다. 어깨에 걸친 회색 옷은 다 덜어진 누더기며 팔꿈치에 둘러 멘 걸망은 영락없는 푸대자루다. 청정한 생활은 이미 팔정도에 맞고 검약한 처신은 사의행(四依行)에 맞으니 구주사해(九州四海)가 모두 내가 가는 길이며, 나무 밑 무덤 사이 모두 내가 쉬는 곳이다. 삼승(三乘)의 좋은 수레를 타고 부처님이 남기신 자취를 밟으며 거룩한 가르침을 어김없이 받아 가지니 진정한 불제자다. 세상 인연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으니 실로 대장부다. 마군과 싸워 이기고 번뇌 그물을 열어제쳐 만금의 훌륭한 공양도 받을 만하며 사생(四生)의 복밭이 되는 것도 헛된 것이 아니니 걸사라는 뜻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다음날.
마산을 다녀온 성해화상은 경봉에 대한 오해를 깨끗이 씻어버렸다. 그때까지도 경봉은 바위에 앉아 돌부처처럼 좌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해화상은 내심 크게 놀랐다.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그것도 추위가 가지 않은 해동머리에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좌선삼매에 든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물론 조사들의 행장을 보면 수없이 나오는 얘기지만 실제로 좌선삼매에 든 경봉을 마주대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장에 성해화상은 경봉을 존대하여 ‘수좌’라고 불렀다.
“경봉 수좌, 암자에 들어가시게. 오해를 한 내가 무안하지 않은가.”
해담화상도 내원사에서 돌아와 경봉을 반갑게 맞았다.
“경봉 수좌가 올 줄 알았지. 내가 머물던 방을 비워 줄 테니 무문관 삼아 정진하거라.”
성해화상이 “조실방을 내어주시다니요. 차라리 내 방을 비워주겠습니다.” 하고 만류했지만 해담화상은 작심한 듯 말했다.
“법문하러 다니느라 방을 자주 비우니 상관없네. 나야 인법당 뒷방에 거하면 어떤가.”
“조실채를 따로 지어 모시지 못한 것도 송구한 일인데 스님께서 인법당으로 가시겠다는 것은 법도가 아닙니다. 더구나 인법당은 신도들이 들락거려 어수선하지 않습니까?”
“조용한 방은 경봉 수좌처럼 참선 공부하는 스님이 사용해야지.”
해담화상은 끝내 법당이 딸린 방에서 자겠다고 우겼다. 그제야 성해화상은 경봉에게 준엄하게 당부하며 해담화상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여섯 자 몸뚱어리는 있어도 반야의 지혜가 없는 이를 부처님께서는 바보중이라 했다. 조실스님의 마음을 간곡하게 살피어 반드시 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네.”
경봉은 합장을 하며 맹세했다.
“그리하겠십니더.”
“나이 먹은 나를 안양암 조실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강승(講僧)에 불과하지. 경봉은 꼭 불(佛)을 이루어 영축산 도인이 되거라.”
경봉은 다음날부터 조실방에 문고리를 걸고 들어앉았다. 인법당에서 솔숲 쪽 외진 곳에 떨어진 작은 요사여서 하루 종일 소나무 그림자가 어린 곳이었다. 특별히 방이 넓은 것은 아니지만 양지바르고 다천(茶泉)이 가까워 목이 마르면 차를 달이기가 좋은 방이었다. 통도사 암자 중에서 큰절 지적에 있는 안양암 스님들은 사미승부터 차를 잘 우리는 전통이 있었다. 거기에는 통도사 부근에 자생하는 야생 차나무가 한몫을 했다. 곡우(穀雨)를 전후해서 다른 암자 스님들이 찻잎을 따기 전에 큰절과 가까운 안양암 스님들이 먼저 차지해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경봉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안양암 시절부터였다. 하루 종일 화두를 들고 있다 보면 정신이 흐려지고 정념(正念)이 느슨해졌다. 밤중에는 졸음과 잡념이 달려들어 화두가 성성치 못했다. 바로 그럴 때 한 잔의 차는 정신을 맑게 깨어나게 하고 피곤해진 몸에 활기를 주어 다시 선정삼매로 빠져들게 했다.
잠과 피로를 물리치는 데는 한 잔의 차처럼 요긴한 것이 따로 없었다. 훗날 경봉은 이때의 차 한 잔을 잊지 못하여 게송을 읊조릴 때 다음과 같은 구절을 넣곤 하였다.
차 달이는 곳에 옛길이 열렸네(茶煎分處古道通).
옛 길이란 과거의 조사들이 오도한 경지, 즉 깨달음을 말하는 것이니 선승에게 차 한 잔의 의미는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경지로 들어가는 이치였다. 묵언 정진 기간에 신도가 찾아왔다가 제자에게 면박을 당하고 돌아간 일이 있어 삼 일 동안이나 마음이 아파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는 가야산 해인사 지족암(知足庵)의 자비보살 일타(一陀)스님에게 보낸 게송도 그 구절을 넣었다.
가야산의 소식을 뉘라서 능히 말하랴
시냇물 잔잔한데 달은 동녘에 솟네
이때의 현묘한 뜻 말하지 말게
차 달이는 곳에 옛길이 열렸네.
伽倻消息誰能說
溪水潺潺月上東
莫道此時玄妙旨
茶煎分處古道通
어느 날부터는 해담화상이 경봉에게만은 조석 예불도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
“내가 무어라 했느냐. 내 방을 무문관으로 여기라 하지 않았더냐. 무문관이란 1인 선방이니라. 그러니 넌 누에가 집을 짓고 죽는 것처럼 자결할 각오로 용맹정진하거라. 그래도 조석 예불에 미련이 있다면 이것을 읽어 보거라. 젊은 날 선방을 돌아다닐 때 걸망에 넣고 다녔던 글로 신라 왕족이었던 무상(無相)선사의 말씀이니라.”
‘그대들은 진흙부처를 보았다 하면 절구에 쌀을 찧듯 절만 하고 아무 생각도 해보지 않으니, 자기 몸에 부처님이 한 분씩 있는 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허공을 타고 온 많은 석가와 관음이 밤낮으로 그대들의 육근에서 빛을 내뿜고 땅을 흔든다. 거닐고 서고 눕고 앉고 하는 사이에 언제나 함께 드나들면서 실오라기만큼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어째서 이 부처님에게 예불 드리고 배우지 않고 도리어 흙덩이한테 가서 살길을 찾고 있느냐. 그대들이 이 부처님에게 예불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 마음에 예불 드리는 것이다. 그대들 마음이 비록 뒤바뀐 헛된 마음이라 해도 그것은 본디부터 지금까지 넓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미혹하다 하나 한번도 미혹한 일이 없었고, 깨달았다 하나 한번도 깨달은 일이 없어 부처님보다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다만 바깥경계에 탐착하여 생멸과 미오(迷悟)가 있게 되었으니, 만일 한 생각에 회광반조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과 같아질 것이다.’
이처럼 경봉은 은사 성해화상과 안양암 조실 해담화상의 외호 아래 장좌불와 정진을 계속 밀고 나갔다. 잠을 자더라도 며칠 만에 앉아서 한두 시간 정도 조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화두를 든 채 눈을 붙이고 있어야 장좌불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좌불와를 시작한 지 보름이 지나면서부터는 눈사람처럼 몸이 무너지곤 했다. 입에서 흘러내린 침이 무릎 부근에 흥건하게 고이는 날도 많았다.
경봉은 새끼로 올가미를 만들어 천정 대들보에서 늘여뜨린 뒤, 올가미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좌선에 들었다. 졸 때마다 턱에 걸린 올가미가 목을 죄어 상처가 났다. 올가미를 느슨하게 해도 졸음으로 고개를 크게 꾸벅하면 목살이 벌겋게 벗겨졌다.
한번은 하루에 한 끼씩 마루에 밥을 놓고 가던 사미승이 방문을 열어보고는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눈을 부릅뜬 경봉이 목을 매단 모습으로 좌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 동구불출
무문관 수행에 들어간 지 2개월.
안양암 숲 속에서는 뻐꾸기가 한낮의 적막을 깨며 울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처음 듣는 뻐꾸기 울음 소리였다. 경봉은 뻐꾸기 울음소리로 고적한 안양암에도 오월이 왔음을 알았다. 벽에는 시계도 달력도 없기 때문에 세월이 가는 것을 철새 울음소리나 철 따라 피어나는 꽃향기로 짐작했다.
무문관에서 입을 닫고 묵언하다 보면 혀가 말려 벙어리처럼 말할 수 없게 되어 저잣거리로 실려 나가는 수행자도 있는데, 다행히 경봉은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지난해 선방에서 안거하는 동안 치열한 정진으로 얻어진 득력 때문이었다.
안양암은 법당이 작기 때문에 날이 화창하면 마당에서 법문을 가끔 했다. 그런 날이면 경봉의 외진 방까지 안양암 조실인 해담화상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선정삼매에 빠지는 순간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외부 자극에 의한 감각은 물론 한 생각이 시공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경봉은 자신도 모르게 해담화상의 법문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해담화상의 법문 중에서는 <화엄경> 강설이 통도사 학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는데, 그날은 임제선사로부터 발원하는 임제종 종맥(宗脈)에 대해서 긴 법문을 했다. 경봉으로서는 난생 처음 듣는 독특한 법문이었다. 경봉은 좌정한 후 눈을 감고 편안하게 경청했다. 해담화상의 목소리는 노승답지 않게 힘차고 쩌렁쩌렁 울렸다.
“여러 학인들에게 내가 불조 선맥(禪脈)을 얘기하는 것은 우리 스님네들의 뿌리를 알고자 함이다. 선대 조사 스님네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아야 살불살조의 경지로 나아갈 것이 아니겠느냐. 우리가 조사 스님네를 알고자 하는 것은 그분들을 닮고자 함이 아니라 극복하고자 함이다. 그래야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참나가 온전히 드러나지 않겠느냐. 불조 선맥은 부처님께서 마하가섭존자에게 정법을 안장한 이후, 훗날 달마대사는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이조 혜가에게 전한다. 혜가는 승찬에게, 삼조 승찬은 도신에게, 사조 도신은 홍인에게, 오조 홍인은 육조 혜능에게, 이후 마조 도일, 백장 회해, 황벽 희운, 임제 의현선사가 선맥을 크게 이룬다. 여기서 임제종 맥은 대혜 종고에 이르러 완성 확립되고 훗날 석옥 청공 때 비로소 우리 조선 불교의 선맥이 태동한다. 태고 보우선사가 인가를 받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임제선사의 18세 법손인 석옥 청공선사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았기 때문이다.”
몇 개월 후, 마산 포교당으로 가게 된 경봉은 그제야 불조 선맥의 법계도(法系圖)를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과연 조선 불교의 선맥은 중국의 임제종 법손이자 당시 중국의 대선승인 석옥 청공에게서 태고 보우스님으로 이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옥 청공(石屋 淸珙).
선사의 성은 온(溫)씨로 소주(蘇州)에서 태어나 본주의 승복사에 영유(永惟)화상에게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하다가 20세에 삭발하고 3년 후 비구계를 받는다. 선사는 우렛소리로 어리석은 중들의 고막을 찢곤 하던 임제선사의 18세 법손으로 급암 종신(及庵 宗信)선사의 법제자이다.
어느 날 한 운수승이 삿갓을 눌러 쓰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힘겹게 산길을 오르고 있는데, 앞서 가던 석옥이 다가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느 곳에 계시옵니까?”
“나는 지금 천목산 고봉 원묘스님을 뵈러 가는 길이네, 자네도 함께 가겠는가.”
두 사람은 말없이 산길을 걸어올라 고봉이 머무는 절에 당도했다. 고봉은 석옥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지키고 있다가 물었다.
“그대는 무엇 하러 왔는가.”
“큰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당돌한 석옥의 대답에 고봉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큰 법을 어찌 쉽게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석옥은 젊은 패기로 다시 따져 말했다.
“제가 오늘 큰스님을 뵈었는데 어찌 큰 법을 숨기십니까.”
고봉은 단번에 석옥이 법의 그릇임을 알고 방으로 불러들여 종이에 화두 하나를 점지해 주었다.
“오직 이것만을 의심하라.”
고봉이 석옥에게 내민 종이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라고 쓰여 있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 그 하나가 돌아간 곳은 어디냐는 화두였다.
석옥은 고봉 회상에서 3년을 정진하였지만 큰 진전이 없자, 다른 절로 떠나려 했다. 고봉은 석옥의 발걸음을 막지 않았다. 대신, 임제의 법손인 급암선사를 소개해 주었다.
“호주(湖州) 도장사(道場寺) 급암스님에게 가서 누가 보내서 왔냐고 물으면 나를 말하라.”
급암이 석옥을 보자마자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천목산에서 왔습니다.”
“음, 고봉 회상에서 왔군. 그래, 고봉선사가 무엇을 지시하던가.”
“만법귀일을 주셨습니다.”
급암은 만법귀일이 석옥의 근기에 맞지 않는 화두라는 것을 간파하고 즉시 버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사구(死句)니라.”
석옥은 고봉 회상에서 3년 공부한 것이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급암에게 다른 화두를 달라고 매달렸다. 그래도 급암은 시큰둥하게 석옥을 시험만 할 뿐이었다.
“부처님 계신 곳에 머물지 말고 부처님 없는 곳에 급히 달아나는 뜻이 무엇인가.”
석옥이 대답할 때마다 급암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 또한 사구니라.”
다음날에도 급암은 석옥을 만날 때마다 같은 질문을 하였다. 급암 회상에서 6년이 되었을 때 석옥은 지견을 얻어 급암에게 말했다.
“상마견로(上馬見路)입니다.”
마침내 말 위에 앉으니 길이 보인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급암은 석옥에게 실망하여 말했다.
“어찌 6년을 머물러도 아는 것이 이것뿐인가.”
석옥은 더 이상 급암 회상에 머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윽고 석옥은 만행 길에 나섰는데, 마침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오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묵연히 보는 순간 붙들고 있던 화두가 활연히 타파됐다. 석옥은 답답했던 가슴이 터지는 황홀감으로 말할 수 없는 법열을 느기며 바람처럼 한 걸음에 내달려 돌아와 급암에게 나아갔다. 석옥은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했다.
“부처님 계시는 곳에 머물지 않는 것도 사구요, 급히 지나침도 사구입니다. 저는 오늘 활구를 알았습니다.”
“네가 무엇을 알았단 말이냐.”
석옥은 게송으로 대답했다.
淸明時節雨初時
黃鶯枝上分明語
청명 시절에 비가 처음 올 때
꾀꼬리는 가지에서 분명하게 말하네.
그제야 급암은 석옥에게 법을 인가하였다. 석옥은 바로 하무산으로 들어가 초암을 짓고 천호암(天湖菴)라 이름하였다. 깊은 산으로 들어가 유유자적하면서 사는 산승의 모습이 산월(山月)이란 그의 시에 잘 그려져 있으니 다음과 같다.
돌아와서 발을 씻고 잠이 든 채로
달이 옮겨 가는 줄도 미처 알지 못했네
숲속의 새 우짖는 소리에 문득 눈떠 보니
한 덩이 붉은 해가 솔가지에 걸렸네.
歸來洗足上狀睡
困重不知山月移
隔林幽鳥忽喚醒
一團紅日掛松枝
산중에서 자재하는 석옥의 도력이 멀리 알려지자, 당호(堂湖)에서는 복원선사를 지어 선사를 주석케 하려 했으나 번번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평산림(平山林)화상이 선사를 찾아와 “승려란 마땅히 법을 펴는 것이 중대한 일이거늘 혼자서 한가히 지냄이 될 말입니까.” 하고 부탁하자, 선사는 번연히 일어나 후학들을 7년 간 지도하였다. 하무산 천호암과 복원선사가 천하의 선객들을 제접하는 무대가 되었다. 태고 보우를 만난 것도, 보우에게 자신의 의발을 전한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
경봉은 의문 하나가 강하게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땅 출신의 수많은 선객들을 제쳐두고 해동의 태고 보우에게 의발을 전수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회상에서 태고 보우스님을 불과 보름 동안 만나보고는 의발을 전수했다는 사실은 보통의 기연(奇緣)이 아니며 중국 선종사(禪宗史)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사건인 것이다. 태고 보우의 선지가 당시 석옥 회상에서 정진하던 선객들을 압도했던 것일까.
보우는 석옥을 만나 법거량을 ‘병의 물을 쏟는 거처럼’ 하였고 마지막에는 ‘이밖에 또 다른 도리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고 전해진다. 조그만 나라 해동에서 온 보우의 단도직입하는 물음에 석옥은 몹시 놀랐다고 한다.
“노승도 그랬고 3세 부처님과 조사들도 그러했다.”
석옥은 덧붙여 말하였는데,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는 보우를 수법제자로 점지해버렸다.
“그대의 360여 뼈마디와 8만 4천 털구멍이 오늘 다 열렸구나. 노승은 오늘 300근의 짐을 모두 내려 그대에게 대신 짊어지우고 이제 다리를 뻗고 잘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석옥은 자신의 법이 해동으로 흘러 들어감을 선언했다.
“불법이 동방으로 흘러들어가는구나!”
전등의 신표로서 자신이 평소에 사용하던 의발을 해동에서 온 보우에게 주면서 부탁했다.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니 끊어지지 않게 하라.”
보우는 은법사가 된 석옥과 이별하면서 깨달음의 노래인 자신의 게송 19수(首)로 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보여 주었다.
내가 사는 이 암자, 나도 모르나니
깊고 깊어 치밀하나 비좁지 않네
하늘과 땅을 싸안았으나 앞뒤가 없어
동서남북 어디에도 머물지 않네.
吾住此庵吾莫識
深深密密無壅塞
函蓋乾坤沒向背
不住東西與南北
<태고암가> 중에서도 경봉은 다섯 번째와 열 번째의 게송에 무릎을 쳤다. 마치 중국의 선객들이 즐겨 읊조리는 석두 희천의 <초암가(草庵歌)>와 견주어 보지만 털끝만큼도 손색이 없는 절창인 것이었다. 해동 선맥의 중흥조가 부른 깨달음의 노래인 것이었다.
맛없어도 음식이며 맛있어도 음식이니
누구든 식성 따라 먹기에 맡겨두네
‘운문의 떡’과 ‘조주의 차’여
이 암자의 맛없는 음식에 어이 비기리.
추也손細也손
任爾人人取次喫
雲門糊餠趙州茶
何似庵中無味食
이 누리 그 누가 내 노래에 화답하리
부처와 달마가 공연히 손뼉만 치네
그 누가 태고 적의 ‘줄 없는 거문고’를 들고 와
지금 ‘구멍 없는 내 피리 소리’에 응답하리.
편界有誰同唱和
靈山小室만相拍
誰將太古沒絃琴
應此今時無孔笛
석옥은 보우의 <태고암가> 19수를 단숨에 다 읽더니 감개무량하여 할말을 잃고 말았다. 보우에게 의발을 전수한 자신의 행동이 여법했다고 확신했다.
“아, 그랬었구나.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해 줄 스승이 해동에는 없었구나. 그래서 날 찾아온 것이었구나. 보우야말로 해동의 생불이 아닐 것인가.”
석옥은 보우의 청이 없었음에도 붓을 꺼내어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내려갔다. 붓은 춤을 추듯 날뛰었다.
‘고려 남경(南京)중흥만수선사(重興萬壽禪寺) 장로의 휘는 보우요 호는 태고이다. 그는 일찍이 하나의 큰일(一大事)에 뜻을 세우고 괴로이 공부한 뒤에 깨달은 바가 뛰어나, 뜻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을 벗어났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숨어살기 위해 삼각산에 암자를 짓고 자기의 호로써 그 현판을 붙이어 ‘태고(太古)’라 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도를 즐기고 산수의 경치에 마음을 놓아 <태고가(太古歌)>를 지었다.
병술년 봄에 고국을 떠나 이곳 대도(大都)에 이르자, 먼 길의 고역도 꺼리지 않고 자취를 찾아오다가, 정해년 칠월에 나의 산석암(山石庵)에 이르러서는, 쓸쓸히 서로 잊은 듯 반 달 동안 도를 이야기하였다. 그 동정을 보면 침착하고 조용하며 그 말을 들으면 분명하고 진실하였다.
이별할 때가 되자 전에 지었던 <태고가>를 내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밝은 창 앞에서 펴 보고 늙은 눈이 한층 밝아졌다. 그 노래를 외워 보면 순박하고 무거우며, 그 글귀를 음미해 보면 한가하고 맑았으니, 참으로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을 얻은 것으로서 요즘의 첨신(尖新)하고 현란한 것들에 비할 것이 아니었으니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수응(酬應; 남의 요구에 응함)을 끊었으나 붓이 갑자기 날뛰어 나도 모르게 종이 끝에 쓴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짓는다.
먼저 이 암자가 있은 뒤에 비로소 세계가 있었나니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
암자 안의 주인이야 있고 없고 관계없이
달은 먼 허공을 비추고 바람은 온갖 소리를 내리.
지정(至正) 7년 정해 8월 1일, 호주 하무산에 사는 석옥 노납(老衲)은 76세 때에 쓴다.’
태고 보우는 이미 깨달음을 이룬 상태에서 자신의 법을 점검하고 인가해 줄 스승을 고려에서는 찾지 못하고 중국 땅으로 건너갔는데, 하무산에 주석하고 있던 임제종의 거장 석옥을 만났던 것이다. 석옥은 해동의 각자(覺者) 보우를 보자마자 자신의 법이 해동으로 흘러들어갈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석옥으로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석옥은 보름 동안 보우와 법거량을 계속하였고, 그 결과 석옥 회상의 수백 명도 넘은 기라성 같은 중국의 선객들을 단 보름 만에 물리치고 보우에게 의발을 전수했던 것이다.
사명 연수(四明 延壽)선사 사문 원욱(元旭)이 찬한 <복원 석옥청공선사탑명>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석옥 스승의 제자에 태고 보우가 있으니 고려 사람이다. 친히 스승의 종지를 얻었기에 금린(金鱗)이 곧은 낚시에 걸려 올라온다, 라는 게송을 설하여 인가하였다.’ 이리하여 태고 보우는 불조 선맥을 해동으로 가져와 중흥조가 되었다.
보우의 법명은 보허(普虛)이고 본관은 홍주(洪州), 호는 태고, 시호는 원증(圓證) 국사이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법왕아(法王兒)로 불렸고, 13세에 출가하여 양주군 회암사 광지(廣智)화상에게 불법을 배우고 가지산 보림사에서 도를 닦았다. 19세에 만법귀일이란 화두를 몰래 들고 정진하는데, 구속을 싫어하는 성격에다 목소리가 우렁찼기 때문에 대중들이 꺼리므로 보우는 혼자 소요 자적하였다.
충숙왕 12년에 승과에 급제했으나 나아가지 않고 용문산 상원암과 개성의 감로사에서 고행하였다. 특히 1333년 가을 33세 때에는 감로사에 머물며 일대사 인연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7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잠자지도 않으며 용맹정진한 뒤에 비몽사몽 중에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 더운 물을 권해 마셨는데 감로수였다. 이때 홀연히 첫 깨달음을 얻었다.
37세 때는 <원각경>을 보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 한다’라는 구절에서 모든 소용없는 지해(知解; 알음알이)를 타파하였다. 이후 38세 때에는 사대부 채중원의 장원(莊園)인 전단원(栓檀園)에서 무자 화두로 들고서 오매일여의 경지로 나아가더니 새벽 시간에 활연 대오하고 깨달음의 법열을 노래했다.
튼튼한 관문 쳐부수고 나니
맑은 바람 태고에서 불어오네.
打破牢關后
淸風吹太古
태고의 법호는 이 깨달음의 노래에서 연유하게 된다. 이때, 그러니까 깨달음의 단계를 절절하게 경험한 보우는 훗날 일대사를 요달하려는 소선인(紹禪人)에게 자신이 닦은 바를 간곡하게 글로 써주어 경책한다.
‘생각 생각에 무자 화두를 들어라. 행주좌와 어느 때나 옷 입고 밥 먹을 때 항상 무자 화두를 들되, 고양이가 쥐를 잡고 닭이 알을 품듯 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무(無)’라고 하였는가를 의심하여 화두가 한 덩어리가 된 상태로 어묵동정에 항상 화두를 들면 점차 자나깨나 한결같은 경지에 이를 것이다. 그때 화두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 생각이 없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까지 의심이 이르면 금까마귀(태양)가 한밤중에 하늘을 날 것이다. 이때 희비의 마음을 내지 말고 눈 밝은 종사를 찾아 의심을 완전히 해결해야 한다.’
이후 보우는 남양주 초당으로 돌아가 1년 동안 어버이를 봉양하면서 1천7백 가지의 화두를 점검하며 보임하였는데, 이때 사대부들의 초청으로 41세에 삼각산 중흥사 주지로 주석하게 된다. 날마다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보우는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그곳에서 5년 동안 산거(山居)했다.
보우가 중국으로 건너 간 것은 46세 때의 일로 2년 동안 석옥 청공을 만나는 등 만행하며 다니던 중 원나라 순제로부터 특별한 예우를 받는다. 순제의 청에 의해 영녕사 개당설법을 해주자, 순제는 금란가사와 침향불자를 보우에게 하사한 것이다.
48세에 귀국한 보우는 경기도 가평 용문산에 소설암이란 암자를 짓고 정양(靜養)하던 중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56세 때 봉은사에 주석하는 동안 왕사로 책봉되었고, 왕이 나라 다스리는 일을 묻자, 이렇게 아뢰었다.
“인자한 마음이 바로 모든 교화의 근본이자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십시오. 그리고 시절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보우는 자신의 법을 환암 혼수(幻庵 混修)에게 은밀하게 전하고, 원륭부를 설치하여 구산선문을 통합하기 위해 힘썼으며 71세에는 국사로 책봉되는 등 왕사로 16년, 국사로 12년 동안 봉직하다가 82세에 용문산 소설암으로 다시 돌아가 그해 12월 23일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군수를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
과연 보우는 이튿날 새벽에 목욕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더니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세수 82세 법랍 69세였다.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 년이 봄날 꿈 속 같았네
죽음에 다다라 이제 가죽푸대 버리노니
둥글고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人生命若水疱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대
一輪紅日下西峰
보우의 시신을 다비하자, 빛살이 하늘로 뻗쳤다. 이른바 하늘을 놀처럼 벌겋게 물들이는 방광(放光)이었다. 제자들이 사리를 수습하며 놀랐다. 보우의 법을 이은 수법제자 환암은 눈물을 흘렸다. 영롱한 사리가 무수히 나왔고 특히 정수리에서 나온 사리들은 별처럼 맑은 빛을 냈다. 환암은 정성을 다하여 스승의 다비를 마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몸은 지쳤으나 정신은 자나깨나 깨어 있었다. 스승 보우를 다비하는 중에도 화두를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