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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사행정학회 (Bisa AFPA) 원문보기 글쓴이: 정은영
시골의 삶과 사유를 형상화한 윤재환 시인의 시 세계
1
윤재환 시인을 안 지 10여년이 된다. 그는 평소 별로 말이 없고 그냥 잘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필자의 초등학교 및 중학교 후배로 그는 또한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공무원이기도 하다. 모두들 도시로, 도시로 가기를 원하는 세태에서 윤 시인도 왜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마는, 그는 여전히 시골을 지키며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시골에서 보고 듣고 느낀 삶을 그만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윤 시인이 며칠 전 갑자기 전화를 했다.
“형님, 긴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소”
“형님, 제 시가 경남문학의 「이 작가를 주목 한다」에 실리는데 시평을 부탁드립니다.”
그가 경남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생각하니 내심 기분이 참 좋았다. 그래서 얼떨결에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하고 말았다. 승낙할 때는 몰랐는데,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부담감이 밀려오면서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윤 시인이 보내준 작품을 차근차근 읽어보았다. 오래전 그가 보내준 시집도 꺼내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의 시에서 시골의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었다.
2
윤 시인이 보낸 대표 시 다섯 편과 최근 시 다섯 편을 중심으로 윤 시인의 시 세계를 몇 가지로 나눠 그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철두철미한 자기 성찰(省察)
시는 철두철미한 자기 성찰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는 문학 장르이다. 스스로에게 늘 의문을 던지면서 비판해야 한다. 시인들을 두고 ‘시인은 시대를 20년 거슬러 가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시인은 현재적 위치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다.
윤 시인은 스스로 시골에서 살기로 작정하면서 도시인들이 도시의 삶에서 놓치기 쉬운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시를 만들어내는 고독한 작업을 평생 해오고 있다. 이는 윤 시인이 철두철미한 자기 성찰을 통해서 생산해 내는 시의 재발견이다. 자연을 노래한 시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서 자연을 노래한 시인들이 주류를 이룬다.
윤 시인의 시는 시골에 살면서 느끼는 자연에 대한 순수한 감정들이 서정적으로 이어진다. 또 그의 시에서는 이른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도 허투루 보지 않는, 즉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매우 돋보인다. 전체 시에 흐르는 진한 서정성이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윤 시인의 시를 읽으면 윤 시인이 아니고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연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쉬운 시어(詩語)의 선택
흔히 시를 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전업 시인이나 또는 중앙 문단에 이름을 날리는 시인들의 시를 보면 이해하기가 어려운 시들이 무수히 많다. 시인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윤 시인의 시는 쉽게 잘 읽히면서도 청량감이 있다. 그는 늘 주변에서 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를 골라서 시어로 쓴다. 쉬운 시어들은 소박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분이 들게 한다.
시어 선택에서 문장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주변의 사물을 세밀한 관찰력으로 살핀 나름의 시어 선택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이다.
윤 시인의 시가 후자에 해당한다. 그는 고급스런 시어 선택보다는 주변의 소박한 자연의 언어들을 시 속에 끌어 들임으로서 독특한 언어의 미적 세계를 만들어 내고 또 한 그것이 어느 시인도 흉내 내거나 할 수 없는 윤 시인의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노래하다
윤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청보리’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청보리’ 라는 시는 시골에 살면서 시인이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담고 나서 쏟아낸 산하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끼게 해 주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겨우내 서릿발 내린
흙에 묻혀서
근근히 땅을 헤집고 싹을 틔워
낮은 자세로 찬바람 맞다가
봄이 되어
푸름으로 일어난다.
산수유보다 먼저 봄을 전하는
청보리는
배부른 사람들의 시선 멀리서
고운 햇살 안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자란다
보리는
한겨울을 보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에
배고픈 사람만이
수확의 의미를 품는다
「청보리」에서
이 시에서 윤 시인이 태어났던 시대의 어렵고 힘들었던 시골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1963년생이다. 6.25 동란이후 태어난 그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들 배가 고팠다. 학교에 가면 절반의 학생들이 영양실조로 머리와 얼굴에 마른버짐이 피었다. 아마 윤 시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보릿고개가 빈 말이 아니다. 봄이 되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이들은 논두렁을 타고 다니며 잔디 뿌리를 캐서 단물을 빨아 먹었다. 산에 나무하러간 큰 아이들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서 껍질을 벗기고 송기를 빨아 먹었다. 어른들은 송기를 가져와서 곡기도 없는 송기떡을 해서 아이들을 먹였다. 극심한 춘궁기의 배고픔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청보리는 한 시대의 절절했던 배고픔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서릿발과 언 땅, 산수유 등의 사물을 적절히 등장시키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이 시의 매력이다. “겨우내 서릿발 내린/ 흙에 묻혀서/ 근근히 땅을 헤집고 싹을 틔워/ 낮은 자세로 찬바람 맞다가/ 봄이 되어/ 푸름으로 일어난다.”는 부분에서 보듯이 배는 고픈데 보리밭은 아직도 서릿발이 서 있다. 아이들은 그 배고픔을 어떻게 견뎌야 했을까.
그 시절, 대부분의 가정이 그랬지만 가난으로 인한 배고픔은 일상의 일이었다. 왜 그리도 배고픈 봄날은 길기만 하던지, 어른들이 사방공사를 가고나면 아이들은 하루 종일 들판에서 배고픔을 달랬다. 배가 고파서 집으로 달려간 아이들은 키의 절반만큼이나 큰 무쇠 솥뚜껑을 열어본다. 양재기에 고구마라도 몇 개 담겨 있으면 그런 황홀한 기분은 없다. 그러나 늘 솥은 비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찬물 한바가지를 떠서 마셨다. 그렇게 배고픔을 넘겼던 시절이 윤 시인에게도 있었음을 본다.
이 시 중간에 보면 “청보리는/ 배부른 사람들의 시선 멀리서/ 고운 햇살 안고/ 굶주리는 사람들의 희망으로/ 자란다.”고 했다. 청보리는 6월 망종이 돼서 누렇게 익어야 배고픔을 들 수 있는데 계절은 더디게 간다는 시적화자의 배고픔에 대한 절절함이 잘 드러나 있다.
윤 시인은 시작 노트에서 그는 모교인 초등학교 앞 들판의 시퍼런 보리밭을 보면서 어릴 적 그 때를 떠올렸다고 고백했다. ‘청보리’를 자꾸 읽다보면 배가 고파진다. 그리고 암울했던 보릿고개 시절에 대한 슬픔이 깊은 사유를 일으켜 준다.
깊이 있는 사유의 결정(結晶)
윤 시인의 시 중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라는 작품은 2008년 출판된 그의 여섯 번째 시집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에 실린 제목이기도 하다. 그만큼 그의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는 지나온 삶에 대한 끈질긴 고뇌를 담은 성찰이 묻어난다.
나는
알았습니다
유능하다고 뽐낸 내게도
무능함이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알아냈습니다.
「…중략」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쁜 장미도
아름다운 사람도
미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에서
이 시는 2002년 윤 시인이 마흔 살이 된 후 그해 12월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사랑에 대한 고뇌와 삶에 대한 의미가 새로워지는 것을 느끼고 시로 쓴 작품이다. 흔히들 말하기를 마흔 살을 불혹이라고 한다.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에나오는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에서 온 말이다.
윤 시인은 불혹의 나이를 지나면서 또 한 번 정신적 방황을 거쳐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에서 시인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어찌 보면 세상살이에 달관한 듯 한 생각도 슬쩍 엿보인다. 시인 자신이 한때는 뽐내고 잘났다는 생각도 했는데 살고 보니, 아니 불혹의 나이에 이르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도 담겨 있다. 깨달은 자에게서 느끼는 깊고도 무거움 같은 것이 있다.
한때는 사랑에 울고 웃었던 시절도 세월이 지나면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그래서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다. 만약 추억이 아름답지 않다면 애써 추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누구도 과거를 들추기 싫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쁜 장미도/ 아름다운 사랑도/ 미울 때가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솔직 담백하게 고백했다. 이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는 시가 아니다. 그 나이를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회고록을 쓰듯, 때로는 가슴을 쥐어짜듯 하면서 쓴 시이다. 시간이 멈추지 않고 흘러가버린 세월의 저편에서 홀로 앉아 소주잔 기울이며 할 수 있는 솔직 담백한 삶이 묻어나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고백이다.
그의 또 다른 시를 보자. 「밤을 줍는다」라는 시에서 시인은 앞에서 밝힌 대로 현장감 있는 시어의 선택을 자유롭게 했다. 밤 밭에서의 일상이 고스란히 노출되는 기분이 든다. 노출이 심해서 햇빛에 타버린 사진보다 더한 노출로 독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산에 가서 밤을 줍는다
토실토실 알밤이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다
고개를 숙이고 밤을 줍는다
이리저리
밤이 잇는 곳으로 눈이 가고
눈이 가는 길 따라 손이 간다
「… 중략」
본능적으로
밤이 있는 곳에 눈이 가고
눈길 따라 손이 간다
해질 무렵엔 널브러져 있는 밤도
다 줍지 못한다
일찍이 그랬더라면 하고 생각을 해보지만
밤 따라 허둥지둥 보낸 시간을 되돌리지 못한다
밤은 낮으로 헤매이게 하다가
어둡게 묻힌다
「밤을 줍는다」에서
이 시는 단순하게 밤을 줍는 것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밤을 줍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대상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시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는 길」을 떠올리게 한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몸이 하나니 두 갈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한참을 서서/ 낮은 수풀로 꺾여 내려가는 한쪽 길을/ 멀리 끝까지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선택했습니다 ….
프로스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의 젊은 날 고민을 훗날 모든 것이 거의 마무리 됐을 때 돌아보며 혼자 하는 자조적 독백이다.
윤 시인도 이 시에서 오래전, 과거로의 회상에 젖는다. 젊은 날의 고민들이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시에서의 느낌은 시인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독백일 수도 있다. 아니면 치열하게 살지 못한 삶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다.
이 시의 마지막 부문을 보자.
“해질 무렵엔 널브러져 있는 밤도/ 다 줍지 못한다/ 일찍이 그랬더라면 하고 생각을 해보지만/ 밤 따라 허둥지둥 보낸 시간을 되돌리지 못한다/ 밤은 낮으로 헤매이게 하다가/ 어둠에 묻힌다.”
이 시에서 해질 무렵과 인생을 연관 지을 수 있다. 해질 무렵엔 널브러져 있는 밤도 다 줍지 못한다고 했다. 황혼기를 맞은 인생에 대한 절묘한 표현이다. 그가 만나는 현장은 늘 시가 되고 있고 그는 늘 시 정신으로 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연륜이 만들어내는 농익은 삶의 노래
윤 시인은 또 2012년 12월 의령문화에 실린 「쉼표」라는 시에서 여전히 치열한 시 정신을 엿보게 한다. 2002년 나이 마흔에 쓴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시가 불혹의 나이를 지나면서 방황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꼭 10년만인 오십 나이, 하늘의 뜻에 따르라는 지천명의 나이에 들면서 들려주는 농익은 삶의 노래다.
한글 몇 줄 읽다보면
쉼표가 나온다
글 몇 줄 읽는 것도 힘들까봐
쉬어가도록 표시를 해 둔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글 몇 줄 읽는 것과 비교가 될까마는
쉼표 다음에 마침표가 있듯
하나의 일을 정리하려면
쉼표의 의미에 충실해야 한다
쉼표가 필요한 건
어디 글과 일 뿐이랴
「쉼표」에서
마흔의 나이를 지나고 50의 나이에 들면서 윤 시인은 성숙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독자들에게 바짝 다가선다. 치열하게 산 40대, 그리고 이제는 휴식이 필요한 50대에 들면서 스스로 살아온 날을 뒤돌아보게 된다.
「쉼표」, 이 얼마나 무섭고 또한 아름다운 말인가. 인생의 어떤 것들도 쉼표라는 용광로를 거치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윤 시인이 이 후부터 쓰는 시들에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디딤돌」이라는 시는 시인이 쉰 살이 되어 쓴 것으로, 그의 인생관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어제
길을 가다가
돌멩이 하나를 만났습니다
걸림돌이라고
궁시렁궁시렁
투정을 부리며 지나갔습니다
오늘 생각해보니
디딤돌이었습니다
「디딤돌」에서
이 시는 윤 시인이 성매매 여성 시설에 가서 글짓기 수업을 하러 갔다가 벽에 걸린 「걸림돌에서 디딤돌로」라는 서각 작품을 보고 썼다고 했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상에서 윤 시인의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애정을 느끼게 한다.
이 시는 사회적 정의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사고를 필요로 한다. 시인이 사회를 향해 외치는 큰 목소리가 나처럼 세상의 모두에게 자기반성을 필요로 하게 한다.
3
이제 그의 최근 시들을 살펴보자. 「등불」이라는 시에서 지난해부터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갑과 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윤 시인은 이 시에서 자신이 주눅 들어 하는 모습을 싫어한다. 절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면서도 갑과 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윤 시인은 시라는 도구를 통해 촌철살인의 묘미를 보여준다.
등불은
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불을 지피면
활활 타오르기도 합니다
기름만 부어주면
「등불」에서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도구다. 그러나 등불이 어둠을 밝히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시인은 역설적으로 시라는 도구를 통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쏟아내는 것이다. 짧은 시이지만, 그러나 느끼는 감정은 깊고 무게감이 있다.
「사랑새와 사랑나무」라는 시에서 윤시인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의 계절 오월
큰 뜻을 품은 하늘에서
따스한 햇살을 내리고
비를 내리고
바람을 만들어
자연을 말고 정갈하게 그려준다
그 자연 속에
나무가 푸릇푸릇 잎을 틔우고
그 나무에 새가 한 마리 날아와서
맑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중략」
새와 나무는
사랑새와 사랑나무란 이름으로
푸르른 숲을 아름다운 자연으로 지켜간다
「사랑새와 사랑나무」에서
이 시는 지인의 결혼 축시로 쓴 시라고 한다. 따뜻한 정이 새록새록, 새봄, 나목에 새잎이 돋아나듯 한다.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는 윤 시인의 속내를 잘 알 수 있다.
사랑새와 사랑나무는 서정적 감성이 풍부하게 내포돼 있다. 신혼부부를 사랑새와 사랑나무로 비유한 점이 윤시인 스스로 초자연주의자임을 드러낸 것이다. 자연에서 사랑을 찾는 시적화자의 구도적 탐구, 또는 세밀한 사유가 일상에서 잃어버린 꿈을 찾아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형제 모두 서로 담을 쌓았다」 라는 시를 살펴보자.
아들 셋 딸 하나
우리 형제와 부부는
모두 서로 담을 쌓았다
「…중략」
우리 형제와 부부들이 서로 쌓은 담은
아버지의 영혼이 담겨있는 남은 돌담과
나란히 어울려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여 앉은 가족의 모습처럼
소담스러운 담이 되어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웠다
「우리형제 모두 서로 담을 쌓았다」에서
흙 담 이라는 소재는 시적화자의 사물에 대한 남다른 관찰력의 산물이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모여 앉은 가족들의 모습이 훤하게 보이는 듯하다. 윤 시인의 시가 쉽게 읽혀지지만 오랫동안 여운을 갖게 하는 이유다.
산업화 이후 핵가족화의 보편적 타당성이 전통적 대가족제도를 파괴하면서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가족해체의 위기에 노출돼 사회적문제가 되고 있다. 윤 시인의 「우리형제 모두 서로 담을 쌓았다」는 시는 시적화자가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소중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운 가족」이라는 시 역시 한 가족의 일상을 잘 드러낸 작품으로 훌륭하다.
날씨가 따뜻하고
여기저기에 꽃들이 피어나는
3월 하순 일요일
「… 중략」
그들은 아름다운 가족이란 이름으로
의병박물관에 봄꽃보다 고운 향기를 남겨놓고
희미한 어둠 사이로 멀어져 갔다
「아름다운 가족」에서
이 시는 윤 시인이 당직을 하고 있는 곳에 일하러 온 한 가족의 일상을 표현하고 이미지화 했다. 마지막 연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은 아름다운 가족이란 이름으로/ 의병박물관에 봄꽃보다 고운 향기를 남겨놓고/ 희미한 어둠 사이로 멀어져 갔다”는 가족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시라는 항아리에 담아낸 노력들이 돋보인다.
「기타 줄을 갈면서」 라는 시는 작가로서 윤 시인의 풍류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새해라고
낡은 기타 줄을 새 것으로 간다
한 줄 한 줄
정성들여서 갈아 끼운다
「… 중략」
조율이 완성된
여섯 가닥의 기타 줄에서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
공간을 타고 흐른다
「기타 줄을 갈면서」에서
이 시는 평소 자연과 벗하는 윤 시인의 느긋한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듯하다. 기타 줄에 인생을 담아내는 화자의 시적 노력들이 아름답다. 젊은 날 누구나 악기를 배우고자 했던 기억들이 있다. 그러나 연주가 가능하기 까지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시를 쓰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에 대한 감성이 기타 줄을 조율하듯 당기고 늦추고를 수없이 반복한 결과가 시가 되어서 독자들을 만난다. 윤 시인의 기타 줄 가는 것은 것도 시를 쓰는 작업의 연속이다.
4
윤 시인의 시 10편을 함께 읽었다. 그리고 함께 가슴에 담아보았다. 그의 시를 가만히 음미하다보면 도시에 있으면서도 맑은 산바람이 불어오는 정취를 느끼게 된다. 포장하기 위해 동원되는 아름다운 언어보다, 들일하러 나가는 머슴들이 지게 작대기를 두드리며 흥얼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가공되지 않은 언어들이 시에서 반짝인다. 이것은 시적화자가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시골에 대해 깊은 사람을 지녔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시인이 시골의 삶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시 그것을 철저한 시정신과 사유를 통해 드러냈기 때문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윤 시인의 시는 요즘과 같이 크고 거대하고 도시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고 미세하고 시골 냄새를 풍기는 소재들을 통해 독자들을 감동하게 한다. 작고 미세하고 시골 냄새를 풍기는 것은 과거 농경 사회로부터 비롯되는 우리문화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황사가 날리고 미세 먼지가 날리는 현실 속에서 윤 시인의 시편들은 눈동자를 씻어주고 마음을 개운하게 해 주는 청량감이 있다.
윤 시인의 시가 주는 시골의 풍경과 청량감에 젖어본 것은 필자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윤 시인의 시가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면서 더욱 깊고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며, 아울러 경남 시단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이 끌을 끝맺고자 한다.
첫댓글 내 글도 어수룩한데 남의 글을 평할려니 참으로 난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