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龜州大捷)의 격전지를 찾아서!!
1.
고려태조 왕건은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백두산(알타이산)의 좌측 압록강(鴨綠江)을 따라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고려에 압력을 가해오던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거란(契丹)또한 고려의 북진정책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성종 12) 소손녕(蕭遜寧)이 이끄는 거란의 제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소손녕이 바보라서 서희의 말 한마디에 압록강 동쪽의 강동6주를 넘겨준 것이 아니라, 역사이래 그 지역이 고구려로부터 우리민족의 터전이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넘겨준 것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거란(契丹)은 발해(渤海)가 망한후 신라의 원산 덕원에서 대동강까지 경계지어졌던 신라 강역의 북쪽을 지배했던 것이고, 발해를 계승한 고려(高麗) 태조 왕건은 당연히 거란에 우리민족의 강역이었던 백두산 아래 압록강 주변의 비옥한 지역의 회복을 원했던 터이고, 이것은 곧 거란(契丹)과 고려(高麗)의 전쟁이 임박했음을 말함과 이에 거란은 거대한 고려와의 화전(和戰) 양면책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서희의 요구에 응했음을 유추할수 있는 것이다.
서희의 담판으로 회복했다는 강동6주란 바로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에서 고증한 백두산인 현 알타이산의 서남쪽 압록강이 모이는 현 자이산호를 기준으로 하여 동쪽으로 안주(安州)와 영변(寧邊)으로 이어지는 청천강(淸川江)을 따라 형성된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강동6주(州)의 반환을 통해 고려와의 우호관계를 바랬던 거란은 강동6가 오히려 군사적 거점이 되어 거란의 동쪽을 위협하게 되자 고려의 공격을 사전에 제어하고자 선제공격을 한 것으로 해석할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당시 거란이 위치했던 중앙아시아 즉 지금의 카자흐스탄 동부지역과 우랄산 동쪽의 거대한 스텝지역 그리고 모피의 산출과 진주의 산출이 막대했던 북압록 즉 송화강(松花江)과 흑룡강 지역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할 이유가 충분했던 거란으로서는 점점 강대해지는 고려를 견제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거란(契丹)은 화의(和議)의 목적으로 양도했던 압록강 이동을 제압할 목적을 가지고, 고려조정에서 일어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제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하였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남북 3천킬로미터에 달했던 고려의 강역을 생각해보면, 거란(契丹)의 고려의 심장부인 개경(開京)까지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가필로 보여지는 것이며, 거란이 공격했다면 청천강의 동쪽 끝에 위치했던 평양(平壤)이 마지노선이 되어야 타당한 분석이 된다.
고려의 북방이 거란의 침공에 시끄러운데 고려 조정이 가만 있을리는 만무한 일이며, 고려군의 북진(北進)과 거란측에서 전쟁의 확전보다는 고려측에 자신들의 의지를 알렸다는 판단하에 철수해 간것으로 보는 것이 정당한 역사의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2차 공략후 고려조정의 완강한 반발과 강대강의 전략에 결국 거란은 고려왕의 친조(親朝)와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3차 침략을 감행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방어하게 되었고, 거란군은 흥화진(興化鎭)을 통하여 내려오다가 그곳에서 패배했지만,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西京)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왔다고 조선사편수회는 기록하고 있지만, 말도 안되는 전투경과임을 우리는 명확히 간파해 낼수 있다.
흥화진에서 패배하고 다시 자주(慈州)에서 패했다면 후방이 끊긴 것인데, 그대로 공격해 내려왔다니 얼마나 거란은 멍청한 장수이길래 후방이 절단된 상태에서 계속 공격을 한단 말인가? 전투에서 후방이 강고해야 승리의 견인차가 됨은 병가(兵家)의 상식이다. 그런 상식도 몰랐다는 거란(契丹)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친일식민사학은 비상식을 상식으로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대단한 재주꾼(?)들임이 틀림없다.
이후 병력의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新恩)에서 회군하여 가다가 청천강 유역의 연주(漣州)·위주(渭州)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으며,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하였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하는데, 이를 놓고 보더라고 거란의 소배압(簫排押)은 정말 멍청한 장수임에 틀림없다. 또한 거란왕은 후원군을 보내지도 못하는 무능한 군주로 봐야 할 것이고, 우리가 날카로운 상식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우리 역사상의 전쟁기록은 모든것이 뒤죽박죽의 엉터리임을 명확히 파악해 낼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용골산은 일명 용호산이라고도 하는데, 군의 동쪽 8리에 있는 진산이다. 서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고, 북쪽으로 압록강을 바라보며, 강 밖에는 여러 산이 책상 앞에 있는 듯하여 가장 좋은 경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서쪽 큰 바다라 함은 바로 현 자이산호 즉 발해(渤海)로 보이며, 강밖의 여러 산이라 함은 청천강에서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동서강줄기의 북쪽에 있는 거대한 일천개의 봉우리를 지닌 백두산자락을 말하고 있음이리라.
이곳을 지나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글 한 수가 남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목은시고 제2권 / 시(詩)
양책역(良冊驛)
작은 여관은 황량하여 인마가 희소한데 / 小館荒涼人馬稀
사방 산 깊은 곳엔 석양이 비끼려 하네 / 亂山深處欲斜暉
괴이하다 역리는 마치 서로 아는 듯이 / 怪來郵吏如相識
쌀밥에 푸른 꼴로 나그네를 위로하누나 / 白飯靑芻慰遠歸
2.
귀주(龜州)는 조선때의 구성(龜城)도호부로 되었을 만큼 큰 읍이었으며, 바로 구한말 초혼(招魂)이라는 시를 통해 민족의 강제이주라는 슬픔을 노래한 김소월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 구성(龜城)의 우측에 운산(雲山)금광이 있었고 다시 그 우측 고지대에 영변(寧邊)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를 지도그림을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수 있다.
2020.10.21. 송계(松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