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1
제3장. 해현노화상의 어머니 황태부인: 이 어머니가 아니면 이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 (非此母不生此子)
현공의 모친 황씨 노부인은 청나라 목종 동치 10년(1871년)에 태어나셨습니다. 노부인의 친정은 조상 대대로 사기현 주집향 자원초에서 사셨으며, 조상들은 모두가 본분에 만족할 줄 아는 성실한 농부셨습니다. 부모님이 독실한 불제자이셨기 때문에, 노부인은 어려서부터 오신채와 육식을 끊고 불문에 귀의하셨습니다. 17세 때에 황씨 부인은 당하현 소배사진 초사촌의 문씨 집안에 시집을 가셨으며, 부군의 이름은 문수근文修勤이었고, 나이가 부인보다 여덟 살이 더 많았습니다. 문씨 집안의 조상은 본래 학문을 하는 집안이었고, 가문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친 무수근의 대에 이르러 가문이 이미 몰락하여, 그저 먹고 살만한 중등정도의 생활수준이 되었습니다. 문씨 집안은 대대로 삼보를 공경하고 받드는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문수근의 부모님은 “선인善人”이란 명성이 있어 주변 사방 몇 십리 안에 사는 아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황씨 부인과 문수근은 비록 젊은 부부이었지만, 오히려 의기가 맞고 지향하는 것이 같아 서로 상대방을 존경할 줄 알았습니다. 황씨 부인은 시집오신 그 해에 바로 아들(현공의 맏형)을 낳았으며, 3년 뒤에는 딸(현공의 누이)을 낳았습니다. 그 후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황씨 부인의 유방에 종기가 자라서 아이에게 모유를 먹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둘째 아들을 친척에게 보내어 양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공이 태어났을 때 황씨 부인의 나이는 29세였습니다. 문씨 집안은 대가족이었으므로, 사촌형제 간의 장유의 서열에서 현공은 일곱째였습니다. 황씨 부인은 35세 때에 또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생긴 모습이 대단히 준수하였으며, 사촌간의 서열은 여덟 번째였습니다. 이 어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느 한 탁발승이 집에 와서 황씨 부인에게 이 아들은 비록 외모가 출중하고 준수하지만, 그러나 문씨 집안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과연 그 탁방승의 말대로 이 어린 아들은 태어난 후로 줄곧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고 재앙이 많아 걸핏하면 여기저기 넘어지고 부딪치면서 세 살까지 성장하였습니다. 황씨 부인은 이 어린 아들이 불쌍해서 남편과 상의한 후 자식이 없는 친정 쪽 친척에게 양자로 보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 해 동안 계속된 흉작과 도적의 환난은 원래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이 가정으로 하여금 급속도로 빨리 곤경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현공의 누이가 그 시절에는 치료하기 어려운 폐병에 걸리는 바람에, 이미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이 가정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친 문수근은 선조가 남겨주신 7묘의 척박한 밭을 팔고서 맏아들과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며 솜 타는 일을 하였으며, 나이가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된 현공까지도 부잣집에 보내 소치는 일을 하여 집안 살림에 보태었습니다.
현공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하남성은 큰 가뭄이 들어서 낱알조차도 수확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친 문수근이 고용살이하던 솜 타는 가게 역시 할 수 없이 장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부친 문수근은 하남성과 인접해 있는 호북성 수주에 가서 밥을 구걸하여 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나쁜 도적떼를 만나 타향에서 객사하셨습니다. 현공은 부친께서 해를 당하신 그해에 부친의 연세가 48세이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있어 큰 형이 또한 강제로 징집되어 군인이 되었으며, 그 후 형제가 다시 서로 만난 것은 이미 24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또한 뒤 이어 바로 현공의 둘째 형을 양자로 삼아 기르던 친척집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에, 부득이 15살이나 된 아이를 다시 문씨 집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둘째 형은 몸이 허약하고 걸핏하면 병을 앓았기 때문에,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도리어 집안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누나의 병이 다 완치되었으며, 또한 그 이듬해에 시집을 갔습니다.
집안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었으므로, 황씨 부인은 어쩔 수 없이 남의 집에 기대어 바느질하고 수선하고 옷을 빨아 풀을 먹이는 일들을 하였으며, 이러한 잡일을 하여 얻은 보잘 것 없는 품삯으로 이 만신창이가 된 가정을 힘겹게 지탱하셨습니다. 현공은 이전에 여러 차례 모친의 손재주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황씨 부인은 여자들이 하는 길쌈을 비롯해서 바느질과 수예 등을 대단히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늘 밤을 새워가며 술이 달린 허리끈(汗巾)에 수를 놓고, 꽃신에 수를 놓아 그것을 가지고 밖에 나가 팔아서 먹을 양식과 바꾸셨습니다. 현공은 어머니께서 너무나 힘들게 고생하시는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에, 어머니를 속이고 몰래 밖에 나가 밥을 구걸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집안 살림에 대한 어머니의 부담을 줄여드렸습니다. 3개월이 좀 더 지난 후에 결국에는 어머니에게 들켰으며,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 바탕 통곡하셨으며, 다시는 현공에게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집가朱集街에 성이 최씨인 음식점 주인이 현공의 효행孝行을 들은 후 대단히 감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 최씨는 자신이 친히 현공의 집에 찾아 와서 나이가 겨우 13살밖에 안 된 현공을 자신의 음식점에 와서 일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으며, 이때부터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현공은 그 음식점에서 5년 동안 일하였으며, 18세가 되던 그 해에 큰 병을 앓음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해회성현》 중에 이미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현공이 19살이 되던 그 해에 22살이었던 둘째 형이 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이 일은 막 생사生死의 대겁大劫을 경험한 현공으로 하여금 출가하여 수행할 결심을 철저하게 굳히게 하였습니다. 또한 바로 이 해에 양자로 보내졌던 동생이 양부모가 두 분 다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문씨 집안으로 돌아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현공이 모친을 떠나 동백산에 올라간 후, 황씨 부인은 어린 아들과 서로 의지하며 고생하며 어렵게 지내셨습니다. 현공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산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땅에 씨를 뿌리고 약초를 캐어 양식과 바꾼 후, 양식을 등에 짊어지고서 100리 길을 걸어 고향집에 가서 모친을 봉양하셨으며, 이렇게 하기를 9년 동안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민국 18년(1929년), 현공의 22살 된 어린 남동생이 또 불행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 인해 어머니를 보살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자, 현공은 이 일이 매우 마음에 걸렸으므로, 그래서 당장 어머니에게 자신과 함께 동백산 동화동에 가서 사실 것을 권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번 올라와 머무신 것이 27년 동안 함께 사셨습니다.
1957년, 막 중추절이 지났을 때, 황씨 부인께서는 별안간에 느닷없이 현공에게 고향집으로 돌아가 사시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공은 어머니에게 돌아가시지 말라고 권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향집은 이미 없어지고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기필코 돌아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여러 번 간곡하게 권유하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현공은 짐을 싸서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당하현 초사촌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를 우선 마을의 어느 한 이웃집에 지내도록 하신 다음, 현공은 촌장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촌의 지부支部의 동의를 거친 후 생산대 채지에 있는 세 칸짜리 초가집을 수리하였으며, 그렇게 한 후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옮겨 들어가 지내셨습니다. 현공 모자 두 분은 이곳에서 한편으로는 염불하셨으며, 또 한편으로는 생산대를 도와 채소를 가꾸셨습니다.
1957년 7월 4일 저녁에 황씨 부인은 손수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두를 빚어서 드셨으며, 그리고 현공에게 그의 누나와 손아래 사촌누이에게 편지를 갖다 주고, 그들에게 다음날 반드시 집에 와야 한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오전에 현공의 누나와 손아래 사촌누이가 백설탕과 통조림을 들고서 집에 왔습니다. 노부인은 너무나 즐거워하시면서 그녀들을 위해 손수 만두를 빚으셨고, 또 자신이 직접 통조림을 따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다 드셨으며, 또 설탕물을 한 사발 마시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 모두에게 말씀하시길, “난 배가 고프지 않으니, 오늘 점심은 먹지 않을게야.”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나가서 소변을 보셨습니다. 잠깐 지나서 또 대변을 보시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오셔서 침상 위에 잠시 누우셨으며, 혼자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길, “나는 다시 잠시 앉아야지!” 그리고 책상다리를 하고서 다시 잠깐 앉아계셨으며, 그렇게 하신 후에 길상와吉祥臥로 침상 위에 누워 숨을 한 번 길게 내시고는 왕생하셨습니다.
현공의 누나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어머니께서 왕생하신 불가사의함을 보았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데리고 함께 동백산에 가서 출가하여 수행하셨습니다.
이상은 바로 현공의 어머님 황씨 부인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총결이며, 이는 전부 현공께서 생전에 들려주신 것이며, 이 가운데 대부분은 참조할 수 있는 현공의 영상자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말학은 현공의 어머님의 일생에 대해 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사실 그대로 서술하였으며, 결코 조금의 의론도 그 안에 보태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학인學人들이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그 사람을 한 번 생각해보고, 또 사람이 정으로 느끼는 감정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로 미루어 헤아려 여러 번 숙고해 봄을 통해서 말학이 느끼는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말학이 여러 번 생각한 뒤 이런 저런 형용사들을 끌어다가 현공의 어머님을 찬탄해보았지만 결국에는 무색함을 느꼈으며, 저는 동진 시대에 범규范逵(생졸연대 미상)가 일찍이 도간(陶侃: 257~332년)의 어머니를 찬탄했던 “이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이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非此母不生此子)고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남양사범대학 섭진도교수가 시를 한 수 지어 현공의 어머님을 찬탄하셨습니다.
태어나 어지러운 세상 만나 육신이 뜻대로 되지 않고, 다섯 아들 두어 온갖 어려움과 고생 겪으셨네. (生逢亂世不由身, 有子五兮歷苦辛.)
중도에 아들들이 의지할 아버지 세상 떠나는 것 직접 보았나니, 어머니 홀로 외로운 배 노를 잡아 강나루 건너셨네. (中道眼看兒失怙, 孤舟獨掌渡河津.)
스스로 타고난 수명이 86세임을 아시고, 대청에 누워 자손들과 작별하셨네. (自知大限八十六, 臥寢中堂別子孫.)
정과正果를 마침내 성취한 효성스런 아들 있어, 훌륭하신 어머니 정토에 봉안하셨네. (正果終成有孝子, 足安淨土好娘親.)
(주) 정과正果 : 도를 닦아 증득하여 깨달은 것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글 속에 나오는 현縣의 이름과 향진鄕鎭의 이름은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지금 현재 속해 있는 지역에 의거해 기재한 것이니, 너무 얽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현공의 어머니는 실제로 래불사에 들어가 지내신 적이 없기 때문에, 정공노법사께서 “래불사의 세 분 성인”이라는 말씀을 언급하셨을 때, 말학은 인지법사를 대신하여 노법사님께 “세 분의 성인”이란 표현이 적합한지에 대해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노법사는 분명하게 밝혀주시며 말씀하시길, 래불사는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며, 단지 사원 안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학은 노법사의 가르침을 간파하였으며, 그 순간 바로 그 가르침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이에 즉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하마야摩訶摩耶”이며, 중국어로는 뜻이 “대환大幻”이며, 대환술大幻術을 잘 시연示演하여 항상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에, “마하마야”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
보살이 꿈에 들어와 연기하는 것은 꿈속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菩薩入夢來演戲, 爲喚沉迷夢中人.) ― 조과鳥窠선사가 향산香山거사에게 보낸 시 한 수를 지금 여기에 수록합니다.
(주) 조과鳥窠선사 : 753~833년.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 속성은 潘이고, 本號은 道林이고, 법명은 圓修이다.
(주) 향산香山거사 : 722~846년.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를 가리킨다.
올 때도 종적이 없고 갈 때 또한 자취가 없나니, 가고 올 때의 일이 하나이며 같네. (來時無跡去無蹤, 去與來時事一同.)
어찌 다시 뜬 구름 같은 삶의 일을 물을 필요가 있으랴! 단지 이 뜬 구름 같은 삶의 일은 꿈속의 일일뿐일세. (何須更問浮生事, 只此浮生是夢中.)
11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