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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은 집행 절차도 인권을 보호하는 법의 정신대로 해야 하는가 봅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시국 사태는 법대로 법을 다스려서 법을 어긴 자는 누구든지 법대로 처리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국 사태를 해결하여 나가는 우리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한국 현대사 110년 동안의 큰 역사를 이분법으로 집약하면 이렇게 볼 수도 있다.
(1) 3월과 4월은 다수의 약자가 소수의 강자에게 뜻을 펴고자 일어난 달이다. 이것을 좋게 보면 ‘민중 저항 운동’, 나쁘게 보면 ‘민중봉기’라고나 할까? 한국 현대사에서 3.1절, 4.19가 대표적 사건이며, 지역에 국한된 사건으로는 제주의 4·3사태가 있었다.
(2) 5월과 6월은 소수의 강자가 다수(국민)를 통치하기 위하여 일어난 달이다. 힘을 동원한 쿠데타 또는 정변이었다. 남쪽에서는 5.16, 5.18이 있었고, 북쪽은 남한을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을 침략하여 6.25사변을 일으켰다. 목적이 선하든, 악하든 소수가 무력을 동원하여 다수를 일정기간 제압했었다. 6.25사변은 현대사 110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남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이었다. 이 나라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정변이었다.
(3) 현대사 110년을 돌아보며, 지금의 시국 사태를 점쟁이가 점괘를 내듯이 풀어보면, 이러하다. 3,4월은 다수의 뜻이 이긴다. 그러나 5,6월이면 소수의 힘이 나설 수가 있다. 이런 시국의 진단은 18년을 지속한 박정희 대통령 통치시대가 끝이 난 10.26사태 직후의 시국을 연상하면 이해가 가능하다. 이때는 박정희 통치시대 다음에 등장한 소위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정치인이 주축이 되어 ‘서울의 봄’을 맞이한 시기였다. 그러나 각자가 대권에 대한 야망이 강하여 서로 양보 없는 다투기를 하다가 힘을 가진 소수(전두환 신군부)가 들고일어나 세상을 평정했던 시대를 말한다.
(4) 그러므로 2025년 봄을 맞은 우리도 한국의 110년 역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시국 사태가 3월과 4월에는 다수 약자가 주인 정치를 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지금의 다수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1980년 ‘서울의 봄’처럼 위기를 맞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정치에서 3월과 4월이 오더라도 지금처럼 나라의 혼란이 계속된다면, 5월과 6월에는 선거를 하지 못하는 경우의 수가 생길 수 있다. 선거에 앞서서 소수의 힘을 가진 자들이 먼저 일어날 수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견해는 이분법적 접근이고, 사실과 맞지 않을 수 있다(이런 예측은 사실과 맞지 않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독자들을 호도하는 말이 될 수도 있다. 3,4월은 다수의 약자, 5,6월에 소수의 힘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도 논리의 비약이며, 하나의 상상에 불과하다. 5,6월에는 5.18민주화운동, 6,29 선언, 6.10만세 사건과 6.10항쟁도 있었다. 이런 사건은 ‘소수의 힘(무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필자가 말하는 소수와 다수, 약자와 강자의 대비는 그냥 시국 사태를 빗대어서 한번 해보는 소리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여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러므로 지금 3,4월과 5,6월에 있었던 몇몇 사건을 비교하여 미래를 말하는 것은, 점쟁이 점술이나 점괘와 같다.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110년 현대사에서 3,4월과 5,6월이 보여주는 이 나라의 역사는 한번 되새겨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점술과 무속은 역사성, 객관성(과학성, 합리성), 사회성이 (거의) 없다.
시국이 혼랍스럽거나 선거 때가 되면, 어김 없이 점쟁이나 무속들이 정치 이면에 나타나게 된다. 필자는 시국이 급박하게 돌고 있어서 평소에 보지 않던 유튜브를 보게 되었다. 강한 표현과 미확인 돌출 뉴스를 생성해 내는 어느 유튜브(유튜버)를 클릭하여 계엄령과 계몽령 소리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 그 소리가 톤이 너무 강하고 내용은 없어서 식상한 상태이었다. 우연히 옆(밑)에 눈길을 돌려보니 광고문 같은 시국 사태를 제목으로 뽑아서 점쟁이 점술을 소개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중순에 나온 점술인데 **스님 같은 수염도사가 그분의 운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은 춥고 험난한 겨울을 맞았지만, 음력설만 쇠면 봄소식이 오듯이 그분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금 본 어떤 여성 점술사는 외국에서 카드로 점괘를 뽑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3월은 그분에게 운이 아주 좋지 않다” 라고 한다. 카드로 점을 치는 점술과 수염도사의 점괘는 서로 상반되게 나오고 있다. 시국 사태와 그분의 미래에 대한 점괘가 서로 다르게 나온 것이다. 어느 것이 맞을까?
정치에서 점술은 초등학생도 괘를 뽑아낼 수 있는 토정비결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쟁이 점술이 기대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점술이란 토정비결에서 괘를 찾아서 자신의 1년 운세를 내다보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필자는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조금 알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 우리 집에는 이지함이 쓴(전수한) <토정비결>이 있었다. 책에는 보는 방법이 있어서 직접 나의 운세를 찾아보고, 살펴보기도 했다. 이웃 할머니들께는 나이와 생년월일을 알려주면, 괘를 계산하여 뽑고, 내용을 찾아서 읽어드리기도 했었다. 할머니들은 정초가 되면, 한 해의 미래를 생각하며, 토정비결을 보고싶어 하는데,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보아야 했다. 그런데 공짜로 보여주니 동네 할머니들이 고마워하며, 칭찬을 하기도 했었다.
토정비결은 나이와 해의 간지(干支)로 8로 나누어 태세수인 상괘를 뽑아내고, 태어난 달의 간지로 6으로 나누어 월건수인 중괘를 뽑고, 그리고 태어난 날짜와 간지에 3을 나누어서 일진수인 하괘를 뽑아낸다. 그러면 세 단위의 수로 된 토정비결의 삼괘가 나온다. 여기서 나온 괘는 “3월은 동방에서 귀인이 와서 도울 것이다”, “5월은 서쪽에 액운(횡액)이 있으니 큰일을 도모하지 말라”, “7월은 구설수가 있으니 언행을 조심해라”라는 말과 유사한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이것이 나의 운세에 관련이 있을까 하여 한 해를 살면서 토정비결이 알려준 운세와 실제를 비교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한마디로 “뻥”이었다. 이런 운세는 아무것도 맞는 것이 없었다. 이지함 선생이 쓴 점괘는 그냥 글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대로 음향오행설이나 주역의 규칙에 근거하여 그 해의 운세를 상상과 주관을 따라서 써놓은 것에 불과했다. 흡사 인생에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각종 사례들을 모아놓고, 이를 연도별, 월별로 나열하여 시를 읊듯이 읊어놓은 것이었다.
3,4월과 5,6월의 미래는 맞고 틀림을 떠나서 역사성을 가진다.
필자가 3,4월과 5,6월에 대한 예상은 지난 3,4월과 5,6월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시국 사태와 관련시켜 예상한 것이므로 점쟁이 점술과 유사하다고 했다.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허황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함에도 필자가 말하는 3,4월과 5,6월의 대비하여 미래를 보는 것은 점쟁이 점술과는 다른 점이 있다. 역사성이 있다는 뜻이다. 역사는 과거를 보면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점쟁이 점술은 미래를 말하기는 하나 이러한 역사성이 없다. 점술은 객관성(이성적 판단, 과학)도 거의 없다. 지극히 개인적(사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점술은 사회성이 없다. 있어도 아주 빈약하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3,4월과 5,6월의 비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미래를 보는 것이다. 미래의 예상이 맞고 틀릴 확률은 점괘와 유사하지만, 그 예상이 알려주는 속내를 찾아보는 접근 방식은 다르다.
2025년 '한국의 봄'과 1980년 '서울의 봄'
지금은 시국 사태를 두고, 세상 정치는 이분법으로 편을 갈라서 서로를 판단하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필자도 이렇게 3,4월과 5,6월을 같은 이분법으로 비교를 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말하는 이분법 미래는 예측의 결과보다 이런 예측에 사용된 실제 역사와 그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 더 중요하다. 필자가 본 점괘나 이분법은 2025년 “한국의 봄”이 과거의 ‘서울의 봄’과 정치적 상황에서 유사점이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끄집어 낸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거슬러올라가면 해방 직후에 이 나라가 겪었던 좌우의 이념 대립과도 시대 양상이 비슷하다. 그때에도 좌우 대립이 심했다. 좌우 대립이 심한 갈등의 상태에서 나라의 정치 문제를 우리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하였다. 그 결과는 조국이 남북으로 쪼개진 것이다. 해방 전에도 정치는 당쟁을 일삼고 싸우기만 하다가 이웃 나라에게 국권를 빼앗겼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또 이런저런 이유로, 싸우고 있다. 자기 나름의 정치적 또는 이념적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며, 서로 나누어지기를 좋아하고, 승리만을 부르짖고 있다. 자기 이념이 아니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정치에서 이런 양상이 오히려 이념을 지키려고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아무튼, ‘3,4월’과 ‘ 5,6월’, ‘다수의 약자’와 ‘소수의 강자’와 같은 이분법적 분류는 극단적 주장의 빌미가 될 수 있고, 계급적 투쟁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도 있다. 또한, 이런 성향의 미래의 예측은 토정비결이나 점괘처럼 실제로 맞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렇지만, 한국 현대사 110년 역사에서 3,4월과 5,6월의 역사가 보여준 사건들은,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과 닮아 있다. 이런 예측이 실제와 맞지는 않더라도 그 역사적 의미는 있다. 지금의 시국에 대한 인식은 이런 역사적 관점이 중요하다.
점쟁이 점술과 선지자의 예언, 토정비결과 성경, 무엇이 다른가?
시국과 점술
세상에는 미래의 예측을 점쟁이가 하기도 한다. 지금의 시국 사태에 대한 예측도 점쟁이를 찾아서 듣는다. 비상 계엄을 일으킨 주체들 가운데 세 손가락 안에 들것 같은 어느 한 사람은, 불미스로운 일로 조기 퇴직한 후 직접 점집을 차려서 운영을 해왔다고 한다. 거사를 치르고 나면 돌아올 사후의 보상과 자기 처신이 궁금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점술업을 하면서도 자기보다 용한 어느 여성 점쟁이를 찾아서 충청도 서해안까지 몇 차례 다녀오기도 했었다. 이것이 시국 사태, 정치, 선거 등에서 점쟁이 점술이 관련되는 하나의 사례다.
그런데 점쟁이들의 말은 믿을 수가 없다. 점쟁이 점술은 역사성, 합리성, 사회성이 없다. 점쟁이들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이 있은 때로부터 3개월 후에 있을 운세도 나오는 점괘가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은 음력설을 쇠면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좋지 않은 점괘를 뽑아내고 있다. 신통력을 가졌다는 점쟁이들이 같은 한 사람,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도 예측은 서로 상충되고 있다. 맞지 않다.
점술 같은 정치
그런데 정치에도 신분은 점쟁이가 아니지만, 점쟁이 같은 행세를 하거나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금의 정치처럼 과도한 이념 대립이나 선거에서 지나친 경쟁 의식이 생기면, 그러한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법을 전공한 법조인들이 법의 해석과 적용이 점쟁이 주술 같이 저급하다. 역사가의 역사적 평가와 종교인의 말과 처세와 행동이 그러하다. 터무니 없는 가짜 뉴스까지 만들어 내고 유포시킨다. 종교인들이 대중들에게 거짓말을 해도 양심의 가책마저 없다. 자기 편과 자기 이념을 지키기 위해서는 상대를 파멸시켜야 한다.
군중 심리를 이용하는 격한 감정, 강한 어투, 여기에 극한 행동들이다. 시국 사태에 대한 강한 주장들이 흥분한 군중 심리가 발동하면 그 분위기는 어느 쪽 구분 없이 흡사 무당 굿판을 보는 것과 다를게 있나 싶다. 물론 길거리 의사표현들이 무당 굿판은 아니다. 그러나 무당 굿판은 위험하지 않지만, 지금의 길거리 정치판은 무당 굿판보다 더 위험한 면이 있다는 뜻이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시국과 점술의 인과관계나 상관관계는 다음 글을 참고하면 좋은 것이다. 계엄과 무속의 관련성을 석 달이 넘은 이제서야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돌비뉴스] "무속 빠지지 말라 경고했건만"…윤 축복하던 개신교 '작심 비판'
시국에 대한 점쟁이 점술과 성경 예언
그런데 이런 점쟁이 점술이나 이념의 절대적 신봉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책이 하나 있다. 바로 성경이다. 성경은 점쟁이들보다는 방법과 내용에서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 월등한 예언을 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선지자 또는 예언자들을 말한다. 선지자들이 하는 말은 신빙성이 있다. 틀리지를 않는다. 성경은 모든 말씀이 서로서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고, 그 내용은 서로 짝을 이루거나 연동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 말씀 안에는 세상 문제를 풀어주고, 삶의 복을 가져다 주는 복음이 들어있다.
성경의 예언과 점쟁이의 점술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다. 이런 비교는 고성능 우주선과 어린아이 장난감을 서로 비교하는 것보다 더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성경은 보지 않고, 점쟁이의 점술을 믿는 자들이 많다. 또 시국을 풀어가는 해법이 점쟁이 점술처럼 하고 있어서, 이렇게 비근한 예를 들어서라도 비교해 보는 것이다.
(1) 성경의 예언은 점쟁이 점괘처럼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르게 말하거나 틀리는 예측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은 성부, 성자, 성령이 3위가 하나이신 삼위일체 유일신이다. 신내림 굿으로 죽은 자의 영을 받은(신접한) 무당이나 점쟁이와는 신적 세계의 차원이 다르다. 삼위일체의 유일신은 같은 유일신관이지만 단일신을 섬기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도 신의 역할은 다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신이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거나 죽어주는 역할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독생자인 아들을 희생시켜서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그 구원의 원리는 사람들이 경제생활에서 해야 하는 토지를 팔고 사거나 빚을 대신 갚아주는 무르기의 시장원리를 따라서 은혜를 베푸신다.
성경에서 예언자는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다. 성경도 한두 권이 아니라 신구약을 합하여 66권이나 된다. 그런 성경의 예언이 이 사람과 저 사람, 구약과 신약, 이 책과 저 책에서 서로 어긋나지를 않는다. 그 내용은 예언과 성취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고 할 만큼 서로 서로 물고 물리며 고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얼핏 보면 엉성하고 맞지 않는 것 같으나 파고들면 기가 막히게 잘 맞으며, 흠이 없는 진리(진실) 체계다.
그러나 점쟁이 점술은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지만, 살아보고 겪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궤변이고, 사람을 미혹하는 미신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각자가 주장하고 있는 자기편 이념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틀림 없이 맞을 것 같고 옳을 것 같지만, 성경 말씀에 비추어보면 궤변이고, 미신 같은 주장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2) 성경의 예언은 실제 사건인 역사성을 가진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지금 시점에서 700년 후에 있을 예언을 하는 자들이다. 선지자 미가는 700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아기 예수를 예언하였다(미 5:2).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시기에 희년을 선포하실 메시아를 예언하였다(사 61:1~3). 선지자들의 예언은 미래를 예측해도 뽑아낸 점괘와는 다르다.
700년 후에 있을 사건의 예측이 700년 전에 있었던 모세오경이 가르쳐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미가나 이사야는 모세오경이 주어진 이래 700년의 역사를 지나오며 실제로 경험한 성경 말씀과 이스라엘의 역사, 그리고 이방 나라의 역사적 사례들을 근거로 예언을 한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세상의 죄악을 경고하고,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예언은 반드시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BC 1446년 유월절 어린 양이 희생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날부터(출 12:6) 정확한 연수와 날짜를 따라서(계산을 통하여) 때가 도래한 유월절기에 자신이 친히 어린 양의 신분으로 희생이 되어서 인류의 죗값을 모두 치르고, 대신하여 치르셨다(요 19:30,31).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로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 사건은 1,474년의 연수와 일수, 연대와 날짜, 절기와 요일, 7의 주기 76,910주, 210 안식년 주기, 30회 희년주기, 예수 공생애 만 3년 156주 등을 모두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처럼 정확하게 맞추어 성취된 예언이다. 이 예언은 기록으로 남겨진 성경 말씀이며, 인간 역사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3) 성경에서 선지자들의 예언은 강한 사회성을 가진다. 성경은 개개인의 삶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회의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으며, 강한 사회 질서와 규범을 갖는다. 선지자 또는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우상을 섬겨서 종교가 병들고, 사회는 정의가 훼손되었을 때 하나님이 직접 불러 세운 사역자들이다. 기존의 지도자들에게 맡겨놓은 종교(제사와 예배)와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니 하나님이 그 대안으로 다시 세운 지도자가 선지자들이다.
(4) 성경은 강한 육적, 영적 윤리성을 가진다. 음란을 죄악시하며, 한국의 전통 관습처럼 혼전 순결을 중시한다. 영적으로도 점술과 무속 같은 것을 엄하게 다스린다. 길거리 터줏대감을 **자로 칭하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어느 외국 소재 여성 **의 말을 들어보았다. 그런 사람에게도 바른 영성과 이성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일까? 마귀의 올무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런 시각과 기도와 행동에는 성경이 가르쳐준 윤리성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교회에서도 지도자에 대하여 의문을 품거나 불신이 있으면 분쟁이 생긴다. 이 분쟁 해결에는 신앙을 걸기 때문에 서로 양보가 없다. 그래서 갈라질 때까지 싸운다. 이것이 교회에 임한 하나님의 영성일까? 교회의 이런 분쟁에는 영성은커녕 윤리성마저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교회는 웬만하면 싸움판에 나서지 말아야 하는가보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가르쳐준 희년법 자유시장과 경제 질서를 뿌리에서 없애버리고, 유대교를 타락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패망하게 한 신들이 있다. 그런데 그 신들 중에 가장 사악하고 교활한 신이 바로 가나안 농경신(사사시대) 바알과 페니키아 상업신(왕정시대) 바알이었다. 성경을 보면 그 시대에 지도자들은, 이런 교활한 속성을 가진 바알과 입을 맞추며(왕상 19:18, 호 16:2), 바알이 가르쳐준 제도를 따라서 그 사회를 통치하거나 주도하여 왔다.
(5) 성경이 가르치는 사회 공동체는 가정 조직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가정은 부모를 공경하며, 부부 중심으로 한 가족과 가정을 소중하게 지키도록 하고 있다. 성경 희년법 토지 무르기(레 25:24~28)는 한 가족의 생존과 자유와 복지와 평안을 영구로 보장하기 위한 경제 수단이었다. 부속 제도인 계대결혼(신 25:5~10), 상속제도(민 27:1~11) 등은 모두 사회 기초 단위인 가정을 영구로 보존하기 위한 사회 안전망이었다. 이러한 사회 안정 장치는 중간에 끊겨지지 않고 이어진다.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가정의 안정 장치(희년법)로 지켜서 이어온 가정(누가복음 족보)의 혈통과 기업을 따라서 이 땅에 오셨다.
(6) 성경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긴다.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한다(마 16:26). 이 생명을 살리고자 구주가 이 땅에 오셨고, 직접 생명 값을 대신하여 치르셨다.
(7) 성경의 선지자는 부자나 권력자의 불의한 행위를 배격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 사역하였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왕을 세우고자 할 때, 백성(다수의 약자)을 대변할 선지자 사무엘을 불러 세우고, 왕들이 하게 될 억압과 수탈 정치를 먼저 알려주면서 왕정시대를 열게 하셨다(삼상 8장).
(8) 성경은 사랑이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런데 정치가 나의 생각과 이권, 내편의 이념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하면, 상대편의 생명과 인권을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지금의 길거리 정치에서 보여주는 시대적 흐름은, 우리편 아닌 상대는 짓밟아할 대상자, 없애버려야 할 인격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기독교에서 하나님 사랑이 없으면 그 종교는 우상이며, 하나님이 있어도 이웃 사랑이 없으면 헛것이나 다름이 없다. 기독교가 정치나 이념, 율법과 종교로 빠져들면, 자기 생각이 화석처럼 굳어진다. 그래서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을 잊거나 버리게 된다. 기독교가 사랑이 없으면 선교와 복음 전파의 동력을 잃게 된다. 시국을 맞은 지금, 일부에서 시국에만 너무 집착하고 연연하다보니 기독교가 가져야 할 본질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된다.
길거리에서 이성을 잃고 흥분한 관중들 사이에서 기독인이 가져야 할 본성(영성과 이성)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기독교가 중세에 있었던 '마녀사냥'처럼 특정인을 지목하여 타도의 대상자로 악마화하거나 종교 청소를 하려고 했던 십자군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과 말씀에 들어있는 예언들은 대충 살펴보아도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의 예언을 점쟁이 점술과 비교한 것은,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점쟁이 점술을 믿으며, 점술 같은 위험한 정치를 하는 위정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국 사태도, 선거도 성경대로 해결하고, 겸손하게 대의를 구해야 한다.
지금도 시국 사태를 보면 점쟁이 점술 같은 사고와 행동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기대하는 부류들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을 알면, 점쟁이가 보여주는 점술은 버려야 할 쓰레기 같은 것이다. 그리고 정치다운 정치, 지도자 다운 지도자가 되려면, 성경이 알려주는 예언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불의하면, 그러한 불의는 하나님이 직접 담당하시는 영역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그런 죄는 신분이나 소속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도 인간의 공동체에서 해결해야 할 법적, 경제적 문제는 공동체 스스로 해결을 해야 한다. 이것마저 하나님이 직접 해결하여 주시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금의 시국 사태를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봐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국 사태를 직접 해결하여 달라는 간구를 해야한다. 우리가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전능자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여 해결 받은 시국 사태는 그 결과에 대하여 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앞으로 있을 선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원하는 정당,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선거와 정치는 나와 다른 상대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을 받은 사람은 내가 원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인정하고, 승복해야 한다. 4년전 미국 대통령 선거 때처럼 선거를 하고 나서 결과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하여 폭력을 쓰는 것과 같은 저질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생각대로, 우리 편이 생각하는 이념만을 고집하며 극으로 내달리면, 그것이 비록 옳다고 하더라도 그런 행동은 위험하다. 선거이든, 시국 사태이든, 내 생각대로, 우리 집단의 의도대로 되어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내가 옳다는 고집, 그것이 문제 해결에 독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사고나 행동이 뭉치고 커지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름길 역할을 하게 된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그 결과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 하나님은 공의의 주인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어느 특정 계층, 특정 정당, 특정 이념의 대변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살아 숨쉬는 모든 자의 주인이시고, 사람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몸도 내어주는 구세주이시다.
홍원식 - 이영훈 목사 "편가가르기로 나라 쪼개지면 완돼.. : 카카오스토리
이번의 시국 사태는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번에 있게 될 선거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어야 한다.
정치는 민주주의로 한다. 민주주의는 '가장 덜 나쁜 제도'일뿐 완전하지 않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은 그 제도보다 더 불합리하거나 나쁠 수도 있다. 선진 정치는 사람이 하기보다 법과 시스템이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정치를 이렇게 생각하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야 편하게 살 수 있다. 이런 자세로 선거도 임하고, 결과에도 승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용기이며, 지혜다. 시국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길이다. 이것이 나라를 살리는 방법이며, 모두가 승리하는 상생의 원리다. 공동체에서 모두가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기독교와 교회, 그리스도인과 성도들은 이런 일을 위해 나서야 하고, 쓰임을 받아야 한다. 필자는 전능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드릴 뿐이다. 길거리로 나서는 이쪽 저쪽 사람들,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를 떠나서 각자의 생각이나 행동은 소중하다.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나라를 생각하는 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님께서도 목사님 사인을 받은 성경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말고, 생명책이므로 읽고 읽고 또 읽어서 거듭남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족에게는 점술이 든 *문은 버리고, 성경 말씀에서 영성을 체험한 새글, 새 *문을 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이 내가 살고, 가족이 살며, 나라와 세상을 바꾸는데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계몽령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