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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증명하는 십자가와 부활
예언된 예수의 부활
예수께서는 자신이 돌아가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시겠다고 예언하셨다. 이러한 선언은 4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12제자들 모두를 데리고 가셨으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곳에서 인자가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인자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모욕을 주고 십자가에 못박으리라. 그리고 3째 날에 부활하리라."(마 16: 21 참고)고 하셨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부활과 기독교 신앙 자체는 같이 살던지 같이 죽는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하나만 간직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예수의 부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린도전서 15:13-17).
우리는 지혜로운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믿음으로 일부러 자신을 무식과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한 문제를, 고대 역사를 연구하듯, 공부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사실을 기초로 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으로 그들에게 실제적인 부활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누가는 tekmerion라는 단어를 썼는데 "제시할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Wolfhart Pennenberg는 독일에 있는 Munich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이다. 그는 믿음과 역사의 관계에 관한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께서 정말로 부활 하셨는지 아닌지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은 역사적인 증언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모든 증거들은 모든 선입견이 제거된 정직하고 역사적으로 공평한 방법으로 제시되어져야 한다."
6번의 재판에 대한 증거
예수께서는 총독 빌라도 앞에 재판 당하기 위하여 불려 나오셨다. 역사적인 증거를 통하여 총독 빌라도는 매우 잔인하고 무정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Philo는 기록하기를 "빌라도는 예심도 없이 행한 셀 수도 없는 포악한 행동과 사형집행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당하신 중요한 재판은 6번이었다. 대 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한번, 가이사 앞에서, 산헤드린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헤롯 앞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다. 산헤드린 회는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23명으로 구성된 회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이 있었고, 71명으로 구성된 다른 회는 정부 단체와, 대 제사장, 성전과 관련된 재판을 하는 기관이며, 중범 죄들은 다루지 않았다. 예수의 재판을 다룬 산헤드린 회는 유대 각 도시에 제정된 23명으로 구성된 그 회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 법정에서 3번, 로마 법정에서 3번 재판 받으시고 유대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형을 선언 받으셨으며, 특별 보호법을 적용, 돌아가신 후에 그의 무덤을 지켜 시체가 도둑맞지 못하도록 계획되었다.
존재하였던 십자가형
십자가형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알렉산더 대제이며, 지중해 연한 지방, 특별히 이집트와 카르타고에서 사용되었다. 로마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도입한 것은 카르타고 사람들의 영향일 것이라고 여러 자료들이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의한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참한 고문이다. 예루살렘 포위 때 티누스의 고문이었던 역사가 조세푸스는 십자가형을 직접 목격한 후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무참한 죽음이다"라고 적고 있다.
역사적 유물인 채찍
십자가형이 선고된 후 피고인은 법정에서 결박당하게 된다. 그리고 옷이 벗겨지고, 채찍 때리는 자에 의하여 심한 채찍을 맞게된다. 플래그룸이라고 불리는 채찍은 억센 손잡이와 가죽끈으로 되어있는데, 그 가죽끈에는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뼈들과 납덩이들이 달려있다.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40번 이상 채찍질을 할 수 없게 하였다. 40번 이상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바리세인들은 그들의 엄격한 규율준수 정신에 입각하여 39번 채찍질을 하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혹시 실수로 한번 더 때릴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제한됨 없이 마음대로 채찍질을 하였다. 이 채찍질은 단순히 살을 때리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가죽에 달려있는 뼈들과 납덩이들이 살을 가르고 근육을 갈라서 등 전체가 그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며, 뼈가 보이게 되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발굴된 십자가의 못
많은 사람들이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신약 성서의 기록에 대하여 의문을 표명하였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Harvard Theological Review에 J. W, Hewitt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십자가형을 집행 할 때에 죄인의 발에 못을 박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팔과 발을 십자가에 끈으로 매었을 뿐이다.... 신약 성경에 기록한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옳지 않은 기록이다. 그 때 당시 십자가형에 못을 썼다는 것은 전설적인 이야기다. 만약 못을 썼다면, 이 못이 살과 뼈를 갈라서 몸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8년 개혁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다. 고고학자 V. Tzaferis는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아래 예루살렘 북쪽 스코프스 산 가까이 있는 Giv'at ha-mivtar에서 네 개의 동굴 무덤을 발견하였다. 그곳 한 무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믿어지는 한 시신을 발견하였는데, 그 발 뼈는 7인치의 철 뼈로 뚫린 자국이 있으며, 무릎 뼈는 부서져 있었다. 이 발견으로 십자가형에 못이 쓰였다는 신약 성경의 기록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무릎 뼈를 꺾는 이유
십자가형 집행 시 보통 죄인의 무릎 뼈를 꺾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형에 대하여 연구를 해야만 한다. 군인들은 먼저 죄인의 손목 바로 앞 조금 들어간 자리에 못을 박는다. 그리고 다리를 같이 포개서 큰못을 그 위에 박는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sedecula라고 부르는 의자를 십자가 뒤에 붙여서 조금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한다.
Truman Davis 의사는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의 몸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팔에 힘이 빠지면서 온 몸의 근육에는 큰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고통은 몸을 위로 올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잔혹하다. 팔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으므로 흉근은 완전히 마비되고 늑간 근육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으나 내쉬지는 못한다. 예수는 몸을 들어올려 조금의 호흡을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결국에는 이산화탄소가 폐와 혈관을 가득 채우고, 고통은 부분적으로 가라앉는다. 가끔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위로 밀어서 숨을 내쉬고 조금의 산소를 들어 마신다."
얼마 후, 피 순환의 결핍으로 뇌와 심장의 기능이 마비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을 밀어서 몸을 위로 들어올려 피가 몸 위쪽으로 순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형 집행자가 이러한 고통의 시간을 줄이려 할 경우에는 형을 받는 사람의 무릎을 곤봉으로 쳐서 꺾어 빨리 숨이 끊어지도록 하는데, 그 이유는 무릎을 꺾어서 몸을 들어올려 흉근을 피지 못하게 함으로 질식시키기 위함이다.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모두 다리를 꺾였지만, 예수의 경우는 다리를 꺾기 전에 이미 숨지셨다.
피와 물이 나온 이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 Davis 의사는 이 현상을 심장 부근의 물 같은 액체가 터져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심낭에 있는 액이 심장을 압박함으로 심장이 파열되어 숨지셨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큰 돌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마태는 예수께서 장사된 무덤 입구를 큰돌을 굴려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 16장 1-4절에 이 돌이 아주 큰 것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영국 캠브리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Bezae 비문에 적힌 마가복음 16장 4절에 관한 삽입구에는 "예수가 무덤에 누여지니, 요셉이 무덤의 문을 20명의 남자도 굴릴 수 없는 큰돌로 막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 조지아 공업 대학 교수들이 이스라엘에 가서 직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쓰였던 무덤의 문의 크기는 4-1/2에서 5피트 정도이고 이 정도의 입구를 막으려면 적어도 1-1/2이나 2톤 무게의 바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돌을 어떻게 요셉 혼자서 옮겼을까? 이 질문의 답변은 간단하다. 요셉은 단지 돌을 한번 밀어 굴러 내려가게 했던 것이다. 이 돌은 무덤 입구를 바라보는 조금 경사진 곳에 쐐기를 써서 고정시켜놓았기 때문에, 단지 쐐기를 빼면 저절로 무덤입구로 굴러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무덤 문을 지켰던 로마 군인들의 숫자
유대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정치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행정자들 모두가 예수를 영원히 무덤에 있게 하고자 하였다. "주여 저 휴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3-65)
만약 이 파숫군들이 성전 호위병들이었다면 이들은 모두 270명이었다. 성전 호위군은 10명으로 구성된 27개의 소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앉아 있거나 기대어 있을 수도 없었고, 만약 근무 중 조는 경우에 발각되면 심하게 매맞고 옷에 불을 지르는 형을 받을 정도로 성전 호위군의 규율은 엄격하였다.
헬라 학자 A.T. Robertson의 의하면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면"이라고 빌라도가 한 말은 오직 로마 군병들을 가리키며 성전 호위병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라틴어 형태를 갖고 있는 koustodia는 Oxyrhynchus 파피루스에 기록된 대로 로마 군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군병들은 우리가 보통 성경이야기 책에서 볼 수 있는 사진에서처럼 무덤 옆에 한 두 명의 군인들이 치마를 입고 서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 호위병들은 4명에서 16명 단위의 소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 명이 6피트 지역을 방어하도록 훈련받았다. 16명 소대원이 한 쪽에 4명씩 사방을 지켜 총 36야드를 지키게 하였다.
인봉의 의미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6) 이 기록은 다니엘 6장 17절의 기록과 비슷하다.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함이었더라." (다니엘 6:17)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였으며 인도 최고위원회 회원인 Henry Sumner은 "인봉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법적 권위를 제정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봉하는 작업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중요성은, 이 인봉하는 일이 로마 정부가 그 안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는 증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빈 무덤에 대한 역사적 기록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한 사실은 바로 빈 무덤이다. 유대와 로마, 모두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기록들은 역사가 조세푸스의 글에서와, 15세기 Toledoth Jeshu라고 불리는 유대문학에서도 발견되어진다. Justin Martyr의 Dialogue With Trypho에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지중해 연한의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왜곡시키려 했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가 Ron Sider은 결론을 내리기를 "만약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모두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 빈 무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일요일 아침에 여인들이 향품을 갖고 무덤으로 갔다고 마가복음 16장에 기록하였다. 만약 이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로마 병정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그곳에 갔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이 여인들은 금요일에 예수의 시체가 십자가에서 내려져 매장지로 옮겨진 것을 보았지만, 로마 군인들이 시체를 확인하고 무덤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토요일 오후부터이기 때문에 베다니 외각에 살았던 이 여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부활의 증거와 증인들
어떤 사건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기록될 당시에 그 안에 기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3-6) 위 바울의 기록을 보면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위 글이 쓰여질 당시 살아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Wheaton 대학의 교수 Merrill C. Tenne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나타나심이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이들 중 어느 두 명도 비슷하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른 아침에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여행자에게는 오후에, 제자들에게는 저녁에 나타나셨다. 마리아에게는 밖에서 나타나셨으나 그 때 마리아는 혼자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다. 그 반응도 각각 달랐다. 마리아는 감정에 휩싸였으며, 제자들은 놀라움에 두려웠고, 도마는 처음에 믿지 않았으나 직접 본 후에 그를 경배하였다. 모든 경우가 각각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다른 성격의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 단지 평범한 전설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적의를 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 후 그의 제자들과 그를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을 함으로 그들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증인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사울이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는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바울은 그 때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에 관한 힘있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처음 나타나심이 여인들에게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한 여인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아마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투심를 일으켰을 것이며, 또한 유대 법으로 여인들은 법정에서 증인도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이 나타나심이 부활을 꾸미기 위하여 일부러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증거
부활을 증거 하는 가장 큰 증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그들의 생활을 변화시킨 초기 기독교인들일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어떠한 생각과 힘을 갖고 그토록 머나먼 지역까지 여행을 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하였을까? 그들에게 이렇게 함으로서 어떠한 이익이 있었을까? 그들의 노력이 그들에게 어떠한 부나 사회적 지위도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섭고 혹독한 핍박뿐이었다.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매서운 환난과 고난을 매일 통과하여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전에 경험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고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의 형제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창피하게 생각하였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바리세인들의 친구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예수를 우습게 생각하고 조롱하였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가족에게 망신을 주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후 어떠한 일이 그의 가족에게 생겨났는가? 우리는 그들을, 사도행전 1:13-14절에 기록한대로, 성령을 기다리며 모여있던 다락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의 글이 신약 성경의 한 편을 이루고 있는데 (야고보서) 그는 이렇게 그의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 1:1) 후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돌에 맞아 순교 당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야고보에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겁많은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겟세마네 뜰에서 군병들에게 붙잡히셨을 때 그의 모든 제자들은 도망가 버렸다. (마태복음 26:56 참고)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에 베드로는 3번이나 그를 부인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제자들은 다락방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이렇게 겁 많은 제자들의 모든 성격을 변화시키는 일이 일었났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담대함을 갖게 되었다. 예수를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만큼 그의 인생은 변화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후에 열두 제자에게...보이셨나니." (고린도전서 15:5-6)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하던 바울은 유대의 광신자요 그리스도인들을 혹독히 미워하던 자였다. 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잡고자 허가서를 발급 받았다. 그는 기독교회들을 참혹하게 파괴하였다. 그러나 그는 살인자에서 선교사로 변화함을 받았다. 그는 가장 혹독한 핍박자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 교회의 포교자로 바뀌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초기교회의 신자들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믿음은 단지 신화와 전래되는 이야기들 위에 쌓여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빈 무덤과 죽음에서 부활하사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 역사, 예언이 증명하는 성경
1. 사해사본이 증명하는 성경의 정확성
프레더릭 케뇬은 다음과 같이 구약 성경의 신빙성에 관하여 질문을 던졌다. "A.D. 100년경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되어지는, 마소레틱이라고 부르는 히브리 사본이 정말로 구약성서의 저자들이 지은 그 히브리 성경 원본의 내용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해사본이 발견되어지기 전에는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의 정확성에 관하여 이와 같은 많은 의혹들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은 이러한 질문들에 관하여 정확한 답변을 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가치
우리가 갖고 있는 히브리어 성경 사본은 주후 900년부터 복사되어진 것인데, 이 사본들이 예수님 당시인 A.D. 32년경에 쓰였던 성경과 같은 것이라고 증명하기는 어려웠었다. 그러나 사해사본을 발견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우리가 보아왔던 구약성서가 그 원본과 같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이 사해 사본들 가운데는 이사야서 전권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B.C. 125년경에 쓰여진 것으로서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지금까지 우리가 읽고 있었던 마소레틱 사본에 의한 이사야서와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해 사본으로 인하여,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과 예수께서 지상에서 봉사하시면서 사용하시던 성경이 동일하다는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사해사본은 약 4만개의 작은 단편들로서 이루어져 있다. 이 조각들로부터 500개 이상의 책들을 엮을 수 있었다. 이 사본들에서 성경에 포함된 책들 외에 다른 성서들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을 통하여 옛 쿰란 문화에 관한 새로운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서류들은 "자도카이트 문서", "사회 규율", "훈련 법칙"등을 포함하고 있어서 쿰란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일상 생활 문화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성경 주석에 도움을 주는 여러 중요한 문서들도 발견되었다.
2. 예언 성취를 통하여 증명된 성경의 정확성
에스겔서 26장의 예언의 성취
에스겔서 26장은 두로의 멸망에 관한 예언으로 B.C. 592-570년 사이에 주어졌다. "두로야 내가 저를 대적하여...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3절), 그들이 두로의 성벽을 훼파하며 그 망대를 헐 것이요... 말간 반석이 되게 하며(4절), 바다 가운데 그물 치는 곳이 되게 하리니(5절), 내가 열 왕의 왕 곧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로 북방에서 말과 병거와 기병과 군대와 백성의 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게 할 때에(7절),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 던질 것이라(12절), 너로 말간 반석이 되게 한즉 네가 그물 말리는 곳이 되고 다시는 건축되지 못하리니(14절), 내가 너를 패망케 하여 다시 있지 못하게 하리니 사람이 비록 너를 찾으나 다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리라(21절).
두로의 멸망이 예언되어진 후 3년이 지난 후 정말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포위하였다. 영국 대 백과사전은 "느브갓네살에 의하여 13년 동안(585-573B.C.) 포위되었던 두로는 마침내 침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느브갓네살의 침공 이후로 알렉산더의 공격이(332B.C.) 이어졌음은 "열국으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3절)"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역사가 Philip Myers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알렉산더 대제의 공격은 두로가 멸망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공격 후 폐허가 된 두로는 조금 그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으나 다시는 그 전과 같은 나라로 재건되지는 못했다. 한 때 크게 번창하였던 그 땅은 이제 바위의 표면처럼 썰렁하게 되었고, 지금과 같이 어부들이 그물을 펼쳐서 말리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알렉산더가 파괴된 잔해들을 물 속에 던져서 둑길을 만든 사건은 26장 12절의 예언을 성취하였다. "'네 돌들과 네 재목과 네 흙을 다 물 가운데 던질 것이라'(12절)는 에스겔의 예언은 알렉산더의 기술자들이 두로의 부서진 파편들을 물 가운데로 던져서 방파제를 만든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라고 역사가 Joseph Free는 말하였다.
시돈에 관한 예언의 성취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나니 네 가운데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하셨다 하라.... 내가 그에게 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니 사방에서 오는 칼에 상한 자가 그 가운데 엎드러질 것인즉.."(에스겔 28:22-23)
Floyd Hamilton은 주전 4세기에 일어난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가신으로 있었던 시돈은 B.C. 351년에 페르시아 왕을 반역하고 그들의 도시를 페르시아의 침공에서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시돈 왕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시돈을 배반하였다. 시돈 사람들은 페르시아의 왕의 보복이 얼마나 끔직한 것인 줄 알았기에 40,000명의 시민들이 자신의 집들에 불을 질러 자살을 하였다. 정말로 그의 거리에는 피가 흐르게 되었다."
George Davis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십자군 당시 시돈은 적들에 의하여 여러 번 공격당하였다. 십자군에 의하여 3번 사로 잡혔으며, 3번은 무슬람 군대에 의하여 공격당하였다.... 시돈의 역경은 현대까지 계속되어 1840년 영국과 프랑스, 터어키의 연합 군대에 의하여 폭격 당하였다."
사마리아에 관한 예언의 성취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이러므로 내가 사마리아로 들의 무더기 같게 하고 포도 심을 동산 같게 하며 또 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 그 지대를 드러내며"(호세아 13:16, 미가 1:6)
선지자 호세아는 사마리아 성이 형벌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고, 미가는 사마리아가 들의 무더기 같이 되어 포도밭으로 변할 것이며, 성을 쌓았던 돌들은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고 "그 지대를 드러"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국제 표준 성경백과에 따르면 사르곤이 B.C.722년과 331년에 사마리아를 정복한 사실을 볼 수 있다. 또한 알렉산더 대제와, B.C. 120년에는 하이르카누스에 의하여 정복당했는데 이 때에도 수많은 사마리아 시민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John Urquhart는 Henry Maundrell이 1697년에 목격한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바스테는 다윗의 집으로부터 반란을 일으킨 열 지파를 따라서 세워진 옛 사마리아 왕국이다. 이 훌륭했던 도시가 지금은 들의 밭으로 변하였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오직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 북쪽의 사각 광장과 동쪽에 흩어져 있는 큰 교회의 잔해뿐이다."
또한 Van de Velde의 기록은 미가서의 기록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고 있다. "약탈자들의 소굴이 되었던 누추한 집들로 이루어진 비참한 촌락, 몇 기둥만이 남아있어 옛 시절의 자리만 알리고 있는 곳, 사마리아는 지금 단지 커다란 돌들의 무덤이다. 도시의 토대는 발견되었으나 거리는 쟁기에 갈렸고 옥수수 밭과 올리브 농장으로 변한 사마리아! 도시는 파괴당하였고 쓰레기들은 골짜기에 던져졌으며 도시의 초석이었던 오므리와 아합의 사각기둥들은 골짜기 비탈에 흩어 버려졌도다."
가사와 아스돗에 관한 예언의 성취
"내가 또 아스돗에서 그 거민과 아스클론에서 홀 잡은 자를 끊고 또 손을 돌이켜 에그론을 치리니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가 다 멸망하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1:8) "가사가 삭발되었고 아스글론과 그들에게 남아 있는 평지가 멸망되었나니 네가 네 몸 베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예레미야 47:5) "가사가 버리우며 아스글론이 황폐되며 아스돗이 백주에 쫓겨나며 에그론이 뽑히우리라. 해변은 초장이 되어 목자의 움과 양떼의 우리가 거기 있을 것이며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스바냐 2:4,6-7)
위 성경절은 블레셋 나라가 끊어질 것이고, 가사가 불모로 변하며, 멸망이 아스글론에 이르러 유대의 양과 양치기들만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George Davi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스겔이 2,500년 전에 예언한 대로 아스글론만이 멸망되었던 것이 아니고 블레셋이 모두 끊어짐을 당하였다. 블레셋이 완전히 멸망당하여 현재 블레셋 사람들은 한 명도 살아있지 않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로 유대인들은 화려한 옛 도시, 아스글론이 서 있던 그 자리를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곳에 아름다운 이스라엘의 새 주를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예루살렘-포스트 신문은 새 아스글론이 '가든 시티"로서 디자인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가사에 대하여는 Peter Stoner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가사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가사에 관한 성경의 예언이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옛 가사의 자리를 정밀하게 조사한 결과 지금의 새 가사가 옛 가사의 자리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조사를 통하여 옛 가사가 다른 지역의 모래 언덕 아래 묻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옛 가사는 불모지로 삭발이 되어 있었다."
에돔에 관한 예언의 성취
성경은 6명의 선지자들 -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요엘, 아모스, 오바댜 -를 통하여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는 에돔이 피의 역사를 거쳐서 무역이 끊어지고 완전히 멸망당할 것이며, 야생 동물들만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라고 하였다. (이사야 34:6-7,10,13-15) 예레미야는 에돔에 다시는 사람이 살게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또한 놀라운 곳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예레미야 49:17-18) 에스겔은 에돔이 이스라엘과 또한 이교도들에 의하여 정복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앗시리아 제국의 멸망은 에돔의 멸망에 관한 성경 예언의 종결을 표시하고 있다. Nabeans 사람들이 바로 에스겔 25:4절에 말한 "동방의 사람" 사람들일 것이며 주전 6세기에 그들이 에돔의 공격을 저지하고 에돔의 수도 페트라를 정복하였다.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복한 사실에 대하여 Bernard Ramm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에돔을 정복한 사실은 I Maccabees 5:3과 Josephus' Antiquities 가 증명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John Hyrcanus와 게레사의 시몬의 지휘 아래 에돔을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에돔을 정복할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에돔의 수도 페트라는 번성된 도시였다. 그 당시에 살고 있었던 Citing Strabo는 "페트라는 크게 번영된 도시였으며 아시아로 통하는 상업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또한 아랍인들이 그들의 향신료와 유향을 파는 상업지역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로마제국 시절의 에돔은 유대인들과 합병한 상태였었다. 그 당시 에돔은 그리이스와 로마 사람들에 의하여 이두메아(Idumaea)라고 불렸으며 에돔 사람들은 로마 장군 타이터스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바로 직전에 예루살렘에 들어가 강도질와 도둑질로 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다. 이때로부터 에돔 사람들은 분산된 민족으로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Unger's Bible Dictionary)
Davis는 다음과 같이 에돔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다. "에돔의 수도 페트라는 고대도시의 놀라움을 갖고 있었다. 이 도시는 산 바위 위에 건설되어졌으며, 대부분의 건물들은 단단한 바위를 갈라 만들어졌다. 아름다운 장미 빛 색깔의 바위를 갈라 세운 건물들과 산 전체를 깎아서 만든 도시 페트라는 놀라운 경이를 나타내고 있다. 페트라는 정복될 수 없는 도시였다. 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단지 좁은 벼랑길 하나밖에 없었기에 적은 수의 병사들로도 어떠한 적의 침략을 무찌르기에 충분하였다."
오늘날 에돔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경에 나타난 에돔에 관한 모든 예언들은 정확한 성취를 보았다. 에돔을 방문하였던 Mangles 장군은 현대 에돔의 광경을 보고 기록하기를 "독수리들의 울부짖음과 매, 부엉이들만이 공중을 나르며 외로운 자신들의 둥지를 지키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방인들이 에돔을 정복하리라는 성경의 예언은 A.D. 6세기에 무슬람 군대가 에돔을 침으로 성취되었다. 앗시리아가 에돔을 쳐서 종속시켰으며 그 후 느브갓네살이 공격하였다. Nabateans의 이주민들도 에돔을 약하게 하였으며 Judas Maccabeus에 의하여 수천의 에돔인들이 몰살당하였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손을 에돔 위에 펴서 사람과 짐승을 그 가운데서 끊어 데만에서부터 황무하게 하리니 드단까지 칼에 엎드러지리라"고 한 에스겔 25장 13절의 예언에 관하여 Floyd Hamilton은 다음과 같이 증거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데만, 현대의 Maan,은 아직도 번성하는 타운으로 에돔의 동쪽 경계를 타고 자리잡고 있다. 데만 만이 오로지 이 지역에서 사막이 아닌 곳이다. 얼마나 놀라운 성경의 예언인가! 역사적으로 주변 국가들로부터 계속적인 침략을 받아 왔던 이 지역에서 오로지 데만 만이 아직까지 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결과이다. 하나님만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 수 있으며, 성경에 나온 모든 예언서는 하나님의 책인 것이 확실하다."
신약에 나온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 성취의 몇 가지 예들
대부분의 성경독자들은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성경 예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예언은 A.D.70년에 성취되었다. 그런데 성경에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들이 있다. 신약 성경에는 갈릴리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던 옛 도시들-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의 멸망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마태복음 11장 20-24절에 예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가 두로와 시돈보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에는 이 도시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멸망할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역사적으로 이 도시들이 성경 예언대로 멸망되었음을 정확히 증명할 수가 있다.
George Davis는 그의 책 Bible Prophecies Fulfilled Today에서 가버나움이 A.D. 400년경에 지진으로 멸망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고라신과 벳새다도 그 때 멸망되었다.
"고대 벳새다는 갈릴리 바닷가 기슭에 위치하였던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A.D. 700년경 Albalid 1세가 겨울 왕궁을 지으려고 했던 곳이다. 15년간 그의 일꾼들이 성을 쌓았지만 왕이 죽음으로 인해서 완성되지 못하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자리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오늘날에는 몇 기초석들과 미완성된 모자이크 바닥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Davis는 가버나움의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회당은 폐허가 된 도시의 잔여물들과 같이 땅속에 매장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 고대 회당을 다시 재현시키려 하여 몇 개의 벽들이 다시 세워지고 기둥들이 원래 있던 곳에 다시 건설되었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다시 폐허가 되어버렸다."
3. 역사적 지리학이 증거하는 성경
다신교나 미신들이 갖고 있는 증명할 수 없는 신화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온 복음서는 예수님을 실제로 피와 육체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람들과 접촉했으며 실제로 존재했던 지역들을 거닐었던 인물로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특정 지역에서 특정 시간대에 실제적 공간 안에 살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예수님 당시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서 알 수 있다. 복음서에 기술된 역사에 일치하는 자세한 기록들과 지역적 설명들은 성경이 단순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지역에서 어떤 특정 종류의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곳에 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 사건과 관계된 태도와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역사적 지리학은 이렇게 사건과 지역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재난으로 가족을 다 잃은 친구 집을 방문하게 된다면 그곳에서 자기 가족의 자랑 같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대화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만약 어떤 지역에서 어떤 특정 사건이 과거에 일어났다는 것을 안다면 그곳에 가셨을 때 그 사건과 어울리는 말씀을 하실 것이며, 그렇게 하셨다면 그 기록은 실제로 예수께서 그 지역에 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인성에서 예수께서는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다. 나인성은 남 갈릴리의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그 북쪽 언덕을 넘어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지역이 나온다. 이곳 사람들은 엘리사가 베푼 기적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그와 비슷한 기적을 행하심으로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입증할 수 있었다. 나인성의 사람들은 "선지자가 우리 중에 다시 일어났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문하셨도다"라고 화답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 85%이상이 이스라엘 바깥에 살고 있었으며, 알렉산드리아와 이집트에도 많은 수의 옛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집트에 친구와 친척들을 두고 있었다.
예수님의 고향이 나사렛이었다는 사실은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이곳은 20-30 가구만이 살고 있었던 미천한 동네였다. 이 사실은 이곳에서, 1세기 때 형성된, 묘지에 23개의 묘를 발견함으로 확인되고 있다. 나사렛은 조세푸스나 구약, 또는 탈무드에도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으며, 요한복음 1장 46절에 "나사렛에서 어찌 좋은 것이 나올 수 있으랴"라고 한 나다나엘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둘째로, 나사렛은 제즈릴 언덕이 보이는 높은 산등성이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적 특징은 누가가 나사렛에 관하여 쓴 내용과 어울리고 있다.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누가복음 4:29).
셋째로, "나사렛의 앞마당"이라는 뜻을 가진 제즈릴 언덕은 므깃도 평지 또는 아마겟돈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250번 이상이나 전쟁을 치렀던 곳이며, 비록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지구 역사의 마지막 영적 전쟁도 같은 이름을 갖고 있는 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어졌다. 이곳은 적들이 접근할 수 있는 7개의 길이 있어서 전투를 벌이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시면서 이 계곡 사이를 여러 차례 걸으셨을 것이며, 이러한 경험이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52) 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성경 기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그들이 살고있던 환경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께서도 당시 살고 계셨던 환경과 연관된 말씀을 하심으로 듣는 자로 하여금 생생한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다. 예를 들어서, 9000 피트나 되는 큰 바위산 헤르몬 산 앞에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헬라어로 Petros, 돌] 내가 이 반석 [헬라어로 Petra, 큰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6:18)고 말씀하셨다. "음부의 권세"란 랍비들의 언어로 이방인의 도시를 의미한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선교의 사명이 이방인의 힘을 앞지를 것이라는 예언을 그리이스-로마의 판테온 (만신전)에 제사 드리기 위하여 절벽을 파내어 만든 헤르몬산 등벽 아래서 하신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후에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헤르몬산 앞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였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38) 대부분의 강은 작은 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요단강은 그렇지 않다. 헤르몬산의 눈이 녹아 내리면서 막대한 양의 물이 헤르몬산 아래로 쓸며 내려간다. 그곳에 직접 갔을 때에 이렇게 만들어진 샘들이 10피트가 넘는 양의 물을 내려보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그 계셨던 환경과 어울려 힘있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언덕위로 자리잡은 여러 도시들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물길을 따라서 산 아래 자리잡은 대부분의 도시들과는 달리 갈릴리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는 동쪽의 강한 성 가말라의 불빛을 볼 수 있고, 이러한 광경은 "너는 세상의 빛이니 산 위에 있는 집이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신 마태복음 5장 14절의 말씀을 제자들의 마음에 깊숙이 새기기에 적절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주변에서 여러 신비한 기적을 행하셨다. 이 곳에는 Cichlidae 종에 속하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피나는 입"이라고도 불린다. 이 물고기는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수와 나일강, 갈릴리 바다에서만 발견되는 희귀종이다.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치고 있는 Jim Fleming 박사는 다음과 같이 이 물고기의 특성을 설명한다.
"이 물고기의 암컷은 알들이 부화되기까지 알들을 입안에서 보호한다. 알들이 조금씩 자라남에 따라서 가끔 알들을 밖으로 내보내는데, 위험이 다가오면 빨리 다시 입안으로 빨아들인다. 이 암컷은 굶주려 죽기 바로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는데 그 이유는 먹이를 먹을 때 알들이 같이 빨려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능 때문에 이 고기를 히브리어로 '어머니 고기'라고 부른다. 알들이 다 부화되어 나간 후에도 이 고기는 본능적으로 어떤 다른 대용 물을 입안에 넣고 다닌다. 오늘날 조약돌이나 콜라 병 뚜껑을 입에 넣고 있는 고기들이 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고기의 가장 대중적인 이름은 바로 '베드로의 고기'이다. 그 이유는 마태복음 17장 24-27절에 기술된, 베드로가 낚은 한 세겔 동전을 머금고 있었던 바로 그 물고기 이야기 때문이다."
갈릴리는 화산지역이었다. 화산암들이 이 지역 전체에 널려있었기 때문에 여름이면 가시나무들이 쉽게 자랄 수 있었다. 예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였을 때 화산암으로 대조를 이룬 이 지역적 환경은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벳바게(Bethphage)는 올리브산 옆 예루살렘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의 이름은 이른 철에 열리는 무화과나무 열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이 과일은 히브리어로 phage (fah-gay)라고 하며, 이른 봄 첫 잎들이 나오는 때에 열린다. 여러분은 마가복음 11장 12-14절에 나온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이야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 때는 무화과를 따는 시기가 아니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이 무화과는 헬라어로 sukon이라고 하여 다 익은 무화과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나무는 잎이 무성하였으므로 분명히 철 이른 무화과(phage라고 불리는, 먹을 수 있는 과일)가 열려있었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열매 없는 이 나무를 보시고 예수께서는 겉과 속이 다른 외식주의자에 관한 실물교훈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4. 고고학이 증명하는 구약성서
고고학이 성경의 신성성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성경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이야기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는 있다. 고고학이 성경 비판론자들의 이론들에 대하여 큰 공헌을 세웠으나, 성경이 영감 받은 책이라는 것을 완전히 증명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이 실제적이고 논리적이었다는 것을 고고학을 통하여 알게 됨으로 성경 말씀의 정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위를 통하여 성경의 영감 성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열게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과 고전학자들의 증언
1. 고고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F. Albright : "고고학이 실제적으로 구약성서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2. Yale 대학의 Millar Burrows : "고고학은 여러 케이스를 통하여 근대 비평가들의 논리가 가상적이고 실제적이 아니며, 역사적 발전단계를 인위적으로 적용했음을 증거 하였다..."
3. Merrill Unger : "구약성서 고고학은 모든 나라들을 다시 발견했으며, 중요한 인물들을 다시 소생시켰다...""
4. Frederic Kenyon : "지난 19세기 후반기를 휩쓸었던 성경 회의론 자들의 비판에 관하여 고고학이 그 허구성을 증명함으로서 고고학은 그 권위를 확립하였다."
구약을 증명하고 있는 몇 고고학적 증거들
1. "Black Stele" : "모세 오경을 정말로 모세가 기록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구약 비평가들이 갖고 있었던 가장 큰 이슈들 중 하나였다. 모세 당시에 글씨가 존재하지 않았었으며, 만약 있었다고 할지라도 거의 이용되지 않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세 오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고 그 이후에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Black Stele"이 발견되어짐으로 이러한 논리가 무너지게 되었다. 이 비석에는 쐐기 모양의 글자들로 함무라비의 법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으며, 이것은 적어도 모세가 태어나기 3세기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측정되었다.
2. 헷 족속 (Hittites) :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창 15:18-20). 성경비평가들은 아브라함 당시에는 헷 족속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구약 성서 외에는 이 족속에 관한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지금은 1200년의 헷 족속의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3. Ebla : 로마 대학의 Paolo Matthiae와 Giovanni Petinato에 의하여 시리아 북쪽 지역에서 Ebla라고 불리는 서판을 발견하였다. Tell Mardikh 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 196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1968년 Ibbit-Lim 왕조의 상이 발견되었다. Ebla는 B.C. 2300년경에 세력을 펼치던 나라로서 약 260,000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으며, B.C. 2250년에 Nara-Sim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1974년 이래로 17,000개의 Ebla와 관련된 서판들이 발견되었다.
Ebla 서판이 성경학적으로 갖고 있는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세 시 대에는 쓸 수 있는 글씨가 제정되기 전이라고 성경 비판론자들이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가 썼다는 모세 오경이 실제로 모세의 글이 아니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모세가 살았었던 그 지역에 존재하였던 Ebla 나라의 서판은 모세가 나기 1000여년 전의 법과 풍습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가상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 서판에 기록된 법률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규율들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구약의 신명기가 다른 책들보다도 더 늦게 기록되었었다는 주장이 틀렸음이 밝혀졌다.
또한 Ebla 서판이 밝힌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창세기 14장을 증거한 것이다.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 (창 14:1,2). 창세기 14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되어졌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5 도시의 왕들과 싸워서 이긴 이야기를 하나의 소설처럼 여겼었다. 그런데 Ebla 서판은 위에 기술된 5나라의 이름을 창세기에 기록된 그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나라들이 있었던 지역의 풍습과 연대들도 기록하고 있어서 창세기 14장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를 증거 하였다.
4. Mari 서판 : 마리 서판의 발굴이 Andre Parrot의 지도아래 1933년에 시작되었다. 유프라테스 중부에 위치한 마리는 북서쪽지방의 셈족 부조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1936년 M. Parrot은 B.C.17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되는 수 천 개의 설형문자 서판들을 발견하였으며, 이 서판들은 창세기에 나온 부조들의 생활문화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창세기 24장 10절에 나오는 나홀성의 이야기가 하란과 같이 마리 서판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마리의 왕이었던 Arriyuk은 실제로 창세기 14장의 아리옥과 같은 사람이었으며, 벤쟈민도 마리의 한 족속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William F. Albright)
5. Nuzi 서판 : Nuzi는 이라크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지역인데, 이 곳에서 발견된 서판들은 부조시대의 사회적, 법적 배경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부조의 이야기들 중에는 임신을 하지 못하는 부인이 시종을 남편에게 주어 아이를 낳게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그렇게 하였으며, 후에 야곱의 두 아내도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부조시대 때에 행하던 이러한 풍습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고 몇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되어졌다. 그러나 Nuzi 서판의 기록은 이러한 결혼 풍습에 관한 법이 그 때 당시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Nuzi 서판에 기록된 신랑 Shennima와 신부인 Kelim-ninu의 결혼 서약에서 아내가 임신에 실패하게되면 시녀가 남편의 둘째 부인이 될 것이라는 계약을 한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풍습은 다른 시대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오직 부조시대에만 존재하였던 풍습이었다.
6. 소돔성의 문 : 창세기 19장 7-8절에 보면 악한 사람들이 롯의 집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이 닫힘으로 들어가지 못한 이야기가 나온다. Keil과 Albright의 조사에 의하면 B.C. 2200-1600년경 사이에는 무겁고 강한 문을 집집마다 설치했다고 한다. B.C. 900-600년경에는 대부분의 개인집들이 커튼이나 문이 없는 둥근 게이트를 썼었으나, 롯의 시대에는 경찰의 힘이 충분하지 않아서 강한 문을 사용했었다고 한다.
7. 요셉의 역사 : 창세기 37장 28절에 보면 요셉이 은 20개를 받고 팔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은 20개가 그 때 당시 노예를 파는 적절한 값이었을까? K. A. Kitchen의 연구에 의하면 은 20개는 B.C. 18세기 때 노예를 파는 평균값이었다고 하며, 그 전에는 주로 은 10-15개 정도로 노예 값을 매겼다고 한다. 그러므로 은 20개에 요셉이 팔렸다고 하는 기록은 시대적 정확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흉년이 들어 요셉의 가족들이 이집트로 이사갔다는 성경의 기록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Beni Hasa의 무덤에 셈 족속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가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요셉이 노예에서 수상으로 올라가는 사건은 그 때 당시 가능하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으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여 나일 지방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가나안 사람 Meri-Ra는 왕의 갑옷 드는 사람이 되었고, 또 다른 가나안 사람 Ben-Mat-Ana는 통역관의 높은 직위를 얻었으며, 셈 족속의 Yanhamu는 Amenhotep의 부수상 직위를 얻어 삼각주 지역의 곡창지대를 관리하는, 흉년 때에 요셉에게 부여된 비슷한 일을 하게 되었다." (Howard Vos)
8. 낙타 : 어떤 학자들은 창세기 시대에 낙타를 썼다고 기록한 것은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여 B.C. 2000년경부터 이미 낙타가 사용되고 있었음이 발견되었다. 구 바벨론 시대에 있었던 페소포타미아의 기록을 보면 낙타의 사육과 사용에 관한 기록이 발견되며, Nuppur에서 발견된 수메르의 기록에도 낙타의 사육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B.C. 25-24세기에 있었던 나라 Mari의 옛 집터에서 낙타 뼈가 발견되었으며, 그 외에도 B.C. 2000-1200년경의 것으로 판정되는 팔레스타인 집터에서도 발견되었다.
9. 라기스 문서 : 예레미야 34:6,7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 모든 말씀을 예루살렘에서 유다왕 시드기야에게 고하니라. 때에 바벨론 왕의 군대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남은 모든 성을 쳤으니 곧 라기스와 아세가라. 유다의 견고한 성읍 중에 이것들만 남았음이더라." 이스라엘은 느브갓네살에게 쓸데없는 반역을 저질렀다. 유대는 이 반역에 가담하지 않았다. 예레미야는 계속 싸우기만을 고집하는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항복하라는 경고를 보냈다. 이 반역의 마지막날이 왔다. 히브리 백성의 독립의 가능성은 예루살렘에서 35마일 떨어진 두 전초기지인 라기스와 아세가의 방어에 달려있었다. 이때 라기스에서는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자세히 적은 편지를 발송했다. 이 편지를 라기스 문서라고 부르며, 이 편지의 발견은 구약을 연구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라기스 문서에 적힌 언어는 완전한 고대 히브리어였다. 이 문서를 통하여 예레미야의 정확한 시대를 발견했으며, 이 안에 기술된 사회적, 정치적 상황들이 예레미야가 기술한 것과 완전히 어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Albright)
5. 고고학이 증명하는 신약
● 누가복음 : 누가복음 2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 시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를 다 호적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비평학자들은 그 때 당시 호적은 없었으며, 구레뇨도 수리아의 총독이 아니었고, 모든 사람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하지도 않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첫째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로마는 정규적으로 세금 등록을 실시하였고 또한 매 14년마다 호적을 실시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정말로 아구스도의 영으로서 시작된 것이며, 첫 번째로 시행된 때는 B.C. 23-22, 또는 B.C. 9-8 년경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둘째로, 구레뇨는 B.C. 7년과 A.D. 6년경, 모두 2번 총독의 자리에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안디옥에서 발견된 비문과 조세푸스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셋째로, 이집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에 보면 호적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호적 할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서 어떠한 이유로든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서 살고 있는 자들은, 호적에 상관된 가족 등록을 하고,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땅들이 원래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 가야할 필요가 있다."
● 빌라도 : 1961년까지는 빌라도에 대한 역사적인 자료들이 충분하지 못하여 단지 성경에 나와있다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기록이 없었다. 그런데 두 이태리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의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발굴하여 가로 2피트, 세로 3피트 정도 되는 라틴어로 된 비석을 발견하였다. Antonio Frova가 처음 이 비석을 읽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다 총독 빌라도가 티베리움을 가이사랴의 시민들에게 선사하다." 이 비석은 빌라도가 실제로 살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고고학적 기록이었다.
● 나사렛 : 여호수아 19장 10-15절에는 스블론 자손들이 거할 땅들의 이름들이 나온다. 그런데 나사렛은 이 이름들 중에 없다. 조세푸스는 갈릴리 지역의 45개 마을들의 이름을 기록하였지만 거기에도 나사렛은 없다. 탈무드에도 62개의 마을들이 나오지만 여기에도 나사렛은 빠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나사렛이라고 하는 동네가 실존하였는가?" 하고 비평가들이 질문을 한다.
1962년 Michael Avi-Yonah가 가이사랴에서 행한 발굴 작업에서 3개의 조각난 비석들 중 2개를 발견하였는데, 이 비석을 나사렛 비석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나사렛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첫 비문이다. 이것을 통하여 나사렛이라는 동네가 A.D. 1세기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근대 나사렛의 발굴은 나사렛에 로마시대 훨씬 이전부터 정착 자들이 있었다는 것과 또한 나사렛이 아주 작은 동네였다고 밝히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여왕은 그 자리에 교회를 지었고 그곳이 예수의 가족들의 거주지였다고 여겼다.
● 가버나움 :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마 2:1) 그 곳에서 예수께서는 지붕을 뜯고 내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위의 말씀과 마가복음 1:29-34절을 같이 볼 때 예수님의 집은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 딸려있는 집 (Insulus : 여러 개의 방이 있는 바깥채)인 것처럼 보인다. 베드로의 어업이 번영하였다면 베드로의 집은 다른 보통 집들보다 조금 커서 여러 명의 사람들이 그곳에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성경에 나온 이러한 집의 구조가 실제로 그 때 당시 존재하였을까?
고고학자들이 가버나움의 자리를 발굴하였을 때 이렇게 생긴 Insulus가 발견되었다. 비잔티움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거룩하다고 생각되어지는 곳 위에 팔각 교회당을 지었는데 이렇게 지어진 교회가 가버나움에서 발견되었고 그 교회 아래서 Insulus라고 불리는 바깥채의 잔여가 발굴되어져 마가복음에 기술된 집의 형태가 실제였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 베데스다 연못 : A.D. 1세기경, 구 예루살렘 북동쪽 4분의 1지점에 베데스다 ("새 도시")라는 도시가 있었다.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되어지는 St. Annes 교회 근처를 발굴하는 작업이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F.F. Bruce는 이 발굴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발굴을 통하여 베데스다 연못이 발견되었는데, 이 연못은 쌍둥이 연못으로 남-북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두 연못 사이를 바위가 막고 있고, 그 주위를 "포르티고"라고 불리는 네 현관이 둘러싸고 있다. A.D. 333년경에 이곳을 방문하였던 보르도 순례자들은 그곳에서 쌍둥이 연못을 보았다고 적고 있다. 쿠무란에서 발견된 청동 두루마기에도 히브리말로 "Beth-esh-dathain" (두 개의 샘터)라고 베데스다 연못을 설명하고 있다.
● 맷돌 : 가버나움은 화산지역으로 화산암을 이용한 생활 기구들이 많이 쓰였다. 한 좋은 예는 가버나움 발굴 시 발견된 맷돌이다. 가버나움에서는 화산암으로 맷돌을 만들었으며 다른 지역으로도 수출을 하였는데 이 맷돌은 두 사람이 같이 돌리게 되어있다. 이 사실은 누가복음 17장 35절에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갈릴리 배 : 1986년 1월 아마추어 고고학자 Moshe와 Yuval 형제는 Kibbutz Ginosar과 Moshava Migdal 사이 갈릴리 해변에서 B.C. 1세기부터 A.D. 1세기경에 쓰였던 갈릴리 사람의 배를 발견하였다. 이 배는 고기잡이와 사람, 화물 운송용 등 다목적으로 쓰였던 배인데, 길이가 27 피트, 넓이가 7-1/2 피트로서 13명을 태울 수 있는 배였다. 이 배의 구조를 통하여 그 당시 가뭄으로 갈릴리 호수가 깊이가 낮았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성전 :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마가복음 13:1) 예수님의 제자들만이 성전의 아름다움을 찬탄한 것은 아니다. 탈무드는 "헤롯의 성전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름다운 건물을 아직 보지 못했다.."라고 어느 랍비의 말을 적고 있다. 이 성전이 있었던 곳은 25-30개의 풋볼 경기장을 합친 크기의 지역으로 고대 시대에 있었던 것 중에서 가장 크며, 벽의 높이는 주변 건물들 보다 10층 이상 더 높았다. 벽을 쌓을 때 사용된 돌들 중 가장 작은 것들만 해도 2-5톤이나 되며, 큰 것들은 고대 어느 시대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큰데 그 길이가 40피트, 넓이가 10피트, 무게가 400톤이나 된다. 이러한 크기의 돌들로 만들어진 웅장한 성전을 보며 "네가 이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의 마지막을 비교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주변 환경과 잘 융합되어 있다.
● 빈 무덤 : "여자들이 갈세 파수꾼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하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가로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 (마태복음 28:11-15)
실제로 이 소문은 총독의 귀에 들어갔다. 로마 황제는 이 소문을 듣고 팔레스타인에 법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포고는 라틴어로 쓰여진 후 헬라어로 번역되어 유대의 모든 도시들에 붙여졌다. 1878년에 나사렛에서 흰 대리석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진 글귀가 발견되었다. "시저의 법령이라. 모든 무덤들과 묘지들은 그들의 조상들과 어린이들, 또한 가족들의 제사를 위하여, 또한 그것들을 만든 사람들의 의지를 존중하여 어떠한 장애 없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어떤 자가 그것들을 무너뜨리거나 매장된 것을 빼내거나, 악의를 품고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또는 무덤의 문을 바꾸면, 우리의 신들과 제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법정이 세워져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죽은 자를 존중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방해는 절대적으로 금지되어야 하며, 만약 이 법을 범하면 중형에 처할 것이다."
이 비석은 1세기초의 글씨체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비석이 A.D. 50년 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로마 중앙 정부가 아그립바가 죽기 전까지는 갈릴리 정부를 관할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포고는 A.D.44년 이후의 것으로 판정되어진다. 글라디우스가 A.D. 41년부터 54년까지 총독으로 있었으므로 그가 이 글을 쓴 것이 확실하다. A.D. 49년, 글라디우스는 로마로부터 모든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몰아내었다. 지금도 현존하는 A.D. 41년경에 쓰여진 글라디우스의 편지를 보면 그가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시리아로부터 바다를 통하여 오는 모든 유대인들의 방문을 금지 시켰다. 만약 이 법을 어기면 "나는 그러한 자들을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질병을 퍼뜨리는 자로서 취급하겠다"고 하였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질병"은 바로 로마 제국 전체에 자라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Blaiklock에 제공한 다른 여러 증거들을 통하여 글라디우스가 유대나 시리아의 지도자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증가에 관한 경고의 편지를 받은 것이 틀림없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문제들을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그 날부터 염려해 왔으며, 이에 영향을 받은 글라디우스가 후에 위와 같이 작은 일에 전에 없는 중형을 부과하는 포고를 내리게 된 것이다.
● 요한복음 : 복음서들 중에서 성경 비판론자들에게 가장 믿을 수 없는 책으로 비판받는 복음서가 바로 요한 복음이다. 비판론자들은 요한이 쓴 글들과 복음서는 헬라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최근에 출간된 Atlantic Monthly에는 "적당히 적힌 일대기와 피상적으로 씌어진 헬레니즘 철학"이라고 요한 복음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사해사본은 이 문제에 관하여 다른 빛을 제공한다.
Allegro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쿰람 도서관은 요한의 글들에 관한 연구와 그에 관하여 오랫동안 지속되던 잘못된 관념들이 갖고 있던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교정하는데 큰 역활을 하였다. 요한은 더 이상 헬레니즘에 가장 많이 물들었었던 전도자로서 여겨지지 않으며 그의 모든 생각들은 유대 종파주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극히 팔레스타인적인 사상이며 그가 쓴 모든 자료들은 복음주의 전통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제 요한을 헬레니즘 철학이나 그노시스주의에 영항을 받지 않았던 순수 유대적인 사람으로서 인정하게 되었고, 요한이 자세히 기술한 예루살렘의 지리학적 배치나 예루살렘의 멸망 전의 상황을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요한은 요한복음 3:23절에 침례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침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고 적고 있는데 애논의 의미는 "샘터"이고 이곳은 실제로 살렘(Salim)에서 1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마을이다. 요한은 또한 2장 1절에 "갈릴리 가나"라고 하여 시돈 옆 가나와 확실히 분리하였고, 4장 5-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셨다고 간단히 기록하지 않고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고 놀랍도록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예언된 예수의 부활
예수께서는 자신이 돌아가신 후 3일만에 부활하시겠다고 예언하셨다. 이러한 선언은 4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12제자들 모두를 데리고 가셨으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곳에서 인자가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인자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모욕을 주고 십자가에 못박으리라. 그리고 3째 날에 부활하리라."(마 16: 21 참고)고 하셨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부활과 기독교 신앙 자체는 같이 살던지 같이 죽는다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하나만 간직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예수의 부활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고린도전서 15:13-17).
우리는 지혜로운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의 구세주 예수를 믿음으로 일부러 자신을 무식과 무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도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예수의 부활에 관한 문제를, 고대 역사를 연구하듯, 공부해야 한다. 초대 교회는 사실을 기초로 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강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 자신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심으로 그들에게 실제적인 부활에 대한 증거를 주셨다. 누가는 tekmerion라는 단어를 썼는데 "제시할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Wolfhart Pennenberg는 독일에 있는 Munich 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이다. 그는 믿음과 역사의 관계에 관한 문제점을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께서 정말로 부활 하셨는지 아닌지는 피할 수 없는 역사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에 관한 대답은 역사적인 증언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모든 증거들은 모든 선입견이 제거된 정직하고 역사적으로 공평한 방법으로 제시되어져야 한다."
6번의 재판
예수께서는 총독 빌라도 앞에 재판 당하기 위하여 불려 나오셨다. 역사적인 증거를 통하여 총독 빌라도는 매우 잔인하고 무정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Philo는 기록하기를 "빌라도는 예심도 없이 행한 셀 수도 없는 포악한 행동과 사형집행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당하신 중요한 재판은 6번이었다. 대 제사장 안나스 앞에서 한번, 가이사 앞에서, 산헤드린 앞에서, 빌라도 앞에서, 헤롯 앞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다. 산헤드린 회는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23명으로 구성된 회는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권한이 있었고, 71명으로 구성된 다른 회는 정부 단체와, 대 제사장, 성전과 관련된 재판을 하는 기관이며, 중범 죄들은 다루지 않았다. 예수의 재판을 다룬 산헤드린 회는 유대 각 도시에 제정된 23명으로 구성된 그 회였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유대 법정에서 3번, 로마 법정에서 3번 재판 받으시고 유대 지도자들에 의하여 십자가형을 선언 받으셨으며, 특별 보호법을 적용, 돌아가신 후에 그의 무덤을 지켜 시체가 도둑맞지 못하도록 계획되었다.
십자가
십자가형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알렉산더 대제이며, 지중해 연한 지방, 특별히 이집트와 카르타고에서 사용되었다. 로마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도입한 것은 카르타고 사람들의 영향일 것이라고 여러 자료들이 제시하고 있다. 십자가에 의한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비참한 고문이다. 예루살렘 포위 때 티누스의 고문이었던 역사가 조세푸스는 십자가형을 직접 목격한 후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무참한 죽음이다"라고 적고 있다.
채찍
십자가형이 선고된 후 피고인은 법정에서 결박당하게 된다. 그리고 옷이 벗겨지고, 채찍 때리는 자에 의하여 심한 채찍을 맞게된다. 플래그룸이라고 불리는 채찍은 억센 손잡이와 가죽끈으로 되어있는데, 그 가죽끈에는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뼈들과 납덩이들이 달려있다. 유대인들은 법적으로 40번 이상 채찍질을 할 수 없게 하였다. 40번 이상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바리세인들은 그들의 엄격한 규율준수 정신에 입각하여 39번 채찍질을 하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혹시 실수로 한번 더 때릴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제한됨 없이 마음대로 채찍질을 하였다. 이 채찍질은 단순히 살을 때리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가죽에 달려있는 뼈들과 납덩이들이 살을 가르고 근육을 갈라서 등 전체가 그 형태를 잃어버리게 되며, 뼈가 보이게 되는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
많은 사람들이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신약 성서의 기록에 대하여 의문을 표명하였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Harvard Theological Review에 J. W, Hewitt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십자가형을 집행 할 때에 죄인의 발에 못을 박았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팔과 발을 십자가에 끈으로 매었을 뿐이다.... 신약 성경에 기록한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옳지 않은 기록이다. 그 때 당시 십자가형에 못을 썼다는 것은 전설적인 이야기다. 만약 못을 썼다면, 이 못이 살과 뼈를 갈라서 몸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8년 개혁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있었다. 고고학자 V. Tzaferis는 이스라엘 정부의 지원아래 예루살렘 북쪽 스코프스 산 가까이 있는 Giv'at ha-mivtar에서 네 개의 동굴 무덤을 발견하였다. 그곳 한 무덤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죽은 것이라고 믿어지는 한 시신을 발견하였는데, 그 발 뼈는 7인치의 철 뼈로 뚫린 자국이 있으며, 무릎 뼈는 부서져 있었다. 이 발견으로 십자가형에 못이 쓰였다는 신약 성경의 기록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음이 밝혀졌다.
무릎 뼈를 꺾는 이유
십자가형 집행 시 보통 죄인의 무릎 뼈를 꺾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형에 대하여 연구를 해야만 한다. 군인들은 먼저 죄인의 손목 바로 앞 조금 들어간 자리에 못을 박는다. 그리고 다리를 같이 포개서 큰못을 그 위에 박는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sedecula라고 부르는 의자를 십자가 뒤에 붙여서 조금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한다.
Truman Davis 의사는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의 몸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팔에 힘이 빠지면서 온 몸의 근육에는 큰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이 고통은 몸을 위로 올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잔혹하다. 팔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으므로 흉근은 완전히 마비되고 늑간 근육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으나 내쉬지는 못한다. 예수는 몸을 들어올려 조금의 호흡을 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결국에는 이산화탄소가 폐와 혈관을 가득 채우고, 고통은 부분적으로 가라앉는다. 가끔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위로 밀어서 숨을 내쉬고 조금의 산소를 들어 마신다."
얼마 후, 피 순환의 결핍으로 뇌와 심장의 기능이 마비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발을 밀어서 몸을 위로 들어올려 피가 몸 위쪽으로 순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형 집행자가 이러한 고통의 시간을 줄이려 할 경우에는 형을 받는 사람의 무릎을 곤봉으로 쳐서 꺾어 빨리 숨이 끊어지도록 하는데, 그 이유는 무릎을 꺾어서 몸을 들어올려 흉근을 피지 못하게 함으로 질식시키기 위함이다.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은 모두 다리를 꺾였지만, 예수의 경우는 다리를 꺾기 전에 이미 숨지셨다.
피와 물이 나온 이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복음 19:34) Davis 의사는 이 현상을 심장 부근의 물 같은 액체가 터져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사실은 예수께서 십자가형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심낭에 있는 액이 심장을 압박함으로 심장이 파열되어 숨지셨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큰 돌
마태복음 27장 60절에 마태는 예수께서 장사된 무덤 입구를 큰돌을 굴려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 16장 1-4절에 이 돌이 아주 큰 것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영국 캠브리지 도서실에 소장되어 있는 Bezae 비문에 적힌 마가복음 16장 4절에 관한 삽입구에는 "예수가 무덤에 누여지니, 요셉이 무덤의 문을 20명의 남자도 굴릴 수 없는 큰돌로 막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 조지아 공업 대학 교수들이 이스라엘에 가서 직접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예수님 당시 쓰였던 무덤의 문의 크기는 4-1/2에서 5피트 정도이고 이 정도의 입구를 막으려면 적어도 1-1/2이나 2톤 무게의 바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돌을 어떻게 요셉 혼자서 옮겼을까? 이 질문의 답변은 간단하다. 요셉은 단지 돌을 한번 밀어 굴러 내려가게 했던 것이다. 이 돌은 무덤 입구를 바라보는 조금 경사진 곳에 쐐기를 써서 고정시켜놓았기 때문에, 단지 쐐기를 빼면 저절로 무덤입구로 굴러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로마 군인들의 경계
유대 지도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것을 보고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정치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 행정자들 모두가 예수를 영원히 무덤에 있게 하고자 하였다. "주여 저 휴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적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유혹이 전보다 더 될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하라 하거늘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3-65)
만약 이 파숫군들이 성전 호위병들이었다면 이들은 모두 270명이었다. 성전 호위군은 10명으로 구성된 27개의 소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앉아 있거나 기대어 있을 수도 없었고, 만약 근무 중 조는 경우에 발각되면 심하게 매맞고 옷에 불을 지르는 형을 받을 정도로 성전 호위군의 규율은 엄격하였다.
헬라 학자 A.T. Robertson의 의하면 "너희에게 파숫군이 있으면"이라고 빌라도가 한 말은 오직 로마 군병들을 가리키며 성전 호위병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라틴어 형태를 갖고 있는 koustodia는 Oxyrhynchus 파피루스에 기록된 대로 로마 군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로마군병들은 우리가 보통 성경이야기 책에서 볼 수 있는 사진에서처럼 무덤 옆에 한 두 명의 군인들이 치마를 입고 서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로마 호위병들은 4명에서 16명 단위의 소대를 이루고 있으며 한 명이 6피트 지역을 방어하도록 훈련받았다. 16명 소대원이 한 쪽에 4명씩 사방을 지켜 총 36야드를 지키게 하였다.
인봉
"저희가 파숫군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하니라." (마태복음 27:66) 이 기록은 다니엘 6장 17절의 기록과 비슷하다. "이에 돌을 굴려다가 굴 아구를 막으매 왕이 어인과 귀인들의 인을 쳐서 봉하였으니 이는 다니엘 처치한 것을 변개함이 없게 하려함이었더라." (다니엘 6:17)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였으며 인도 최고위원회 회원인 Henry Sumner은 "인봉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법적 권위를 제정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인봉하는 작업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중요성은, 이 인봉하는 일이 로마 정부가 그 안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는 증거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빈 무덤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는 한 사실은 바로 빈 무덤이다. 유대와 로마, 모두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갖고 있다. 이 기록들은 역사가 조세푸스의 글에서와, 15세기 Toledoth Jeshu라고 불리는 유대문학에서도 발견되어진다. Justin Martyr의 Dialogue With Trypho에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지중해 연한의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어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왜곡시키려 했었다고 적고 있다. 역사가 Ron Sider은 결론을 내리기를 "만약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 모두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그 빈 무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일요일 아침에 여인들이 향품을 갖고 무덤으로 갔다고 마가복음 16장에 기록하였다. 만약 이 여인들이 예수의 무덤을 로마 병정들이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그곳에 갔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이 여인들은 금요일에 예수의 시체가 십자가에서 내려져 매장지로 옮겨진 것을 보았지만, 로마 군인들이 시체를 확인하고 무덤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토요일 오후부터이기 때문에 베다니 외각에 살았던 이 여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심
어떤 사건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것이 기록될 당시에 그 안에 기록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살아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을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고전 15:3-6) 위 바울의 기록을 보면 예수의 부활 후 그를 본 사람들의 대부분이 위 글이 쓰여질 당시 살아있었다고 하였으므로 이 기록은 역사적 사실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여러 곳에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Wheaton 대학의 교수 Merrill C. Tenney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렇게 나타나심이 평범한 일이 아니다. 이들 중 어느 두 명도 비슷하지 않다.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이른 아침에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는 여행자에게는 오후에, 제자들에게는 저녁에 나타나셨다. 마리아에게는 밖에서 나타나셨으나 그 때 마리아는 혼자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는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또한 바울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오백여명의 사람들에게 나타나시기도 하였다. 그 반응도 각각 달랐다. 마리아는 감정에 휩싸였으며, 제자들은 놀라움에 두려웠고, 도마는 처음에 믿지 않았으나 직접 본 후에 그를 경배하였다. 모든 경우가 각각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으며 예수의 부활에 대한 다른 성격의 반응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 후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사실이 단지 평범한 전설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적의를 품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부활 후 그의 제자들과 그를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이러한 말을 함으로 그들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증인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려고 한다.
어느 누구도 사울이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나타나심으로 그는 인생을 바꾸는 일이 일어났다. 바울은 그 때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에 관한 힘있는 증인이 될 수 있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처음 나타나심이 여인들에게라는 사실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한 여인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아마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투심를 일으켰을 것이며, 또한 유대 법으로 여인들은 법정에서 증인도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신 것은 이 나타나심이 부활을 꾸미기 위하여 일부러 조작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 힘
부활을 증거 하는 가장 큰 증인들이 있다면 그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그들의 생활을 변화시킨 초기 기독교인들일 것이다. 그들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어떠한 생각과 힘을 갖고 그토록 머나먼 지역까지 여행을 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려고 하였을까? 그들에게 이렇게 함으로서 어떠한 이익이 있었을까? 그들의 노력이 그들에게 어떠한 부나 사회적 지위도 주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무섭고 혹독한 핍박뿐이었다.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들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매서운 환난과 고난을 매일 통과하여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전에 경험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하고 죽음의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의 가족들은 예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그의 형제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창피하게 생각하였다.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바리세인들의 친구였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예수를 우습게 생각하고 조롱하였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가족에게 망신을 주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후 어떠한 일이 그의 가족에게 생겨났는가? 우리는 그들을, 사도행전 1:13-14절에 기록한대로, 성령을 기다리며 모여있던 다락방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의 글이 신약 성경의 한 편을 이루고 있는데 (야고보서) 그는 이렇게 그의 글을 시작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 1:1) 후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돌에 맞아 순교 당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야고보에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고린도전서 15장 7절에 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겁많은 제자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예수께서 겟세마네 뜰에서 군병들에게 붙잡히셨을 때 그의 모든 제자들은 도망가 버렸다. (마태복음 26:56 참고) 예수께서 재판 받으실 때에 베드로는 3번이나 그를 부인하였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 제자들은 다락방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이렇게 겁 많은 제자들의 모든 성격을 변화시키는 일이 일었났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담대함을 갖게 되었다. 예수를 3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을 만큼 그의 인생은 변화되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후에 열두 제자에게...보이셨나니." (고린도전서 15:5-6)
기독교인들을 심하게 핍박하던 바울은 유대의 광신자요 그리스도인들을 혹독히 미워하던 자였다. 그는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잡고자 허가서를 발급 받았다. 그는 기독교회들을 참혹하게 파괴하였다. 그러나 그는 살인자에서 선교사로 변화함을 받았다. 그는 가장 혹독한 핍박자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 교회의 포교자로 바뀌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초기교회의 신자들처럼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신뢰를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믿음은 단지 신화와 전래되는 이야기들 위에 쌓여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빈 무덤과 죽음에서 부활하사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현대 과학으로 증명되는 성경
성경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한번도 지구가 평평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비평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7:1절에 나온 "네 모퉁이"를 보고 성경이 지구를 사각형이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이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요한계시록 7:1)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성경절에 나오는 "네 모퉁이"는 동, 서, 남, 북을 의미하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어휘가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우리가 흔히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 성경 기자들도 우리처럼 "상황적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단순한 언어로 기술하지 않았다면 그 의미가 모든 사람들에게 확실히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오늘 아침에 지구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아서 태양을 뜨게 하였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성경은 인간이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천년전에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욥기 26:7절에는 지구가 우주의 공간 안에 매달려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지구가 우주의 공간 안에 매달려 있으려면 이 지구를 붙잡고 있는 어떠한 힘이 존재해야만 한다. 성경에는 "매달려"있다고 함으로 어떠한 끈이 이 지구를 잡고 있다는 인상을 풍기지만 이 말씀은 바로 모든 항성들을 그 궤도에 잡고 있는 힘이 우주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26:10절에는 "그가 수면에 둥근 경계(circular horizon)를 그으셨으며.."(영문직역)라고 말씀하심으로 지구가 둥글다고 말하고 있고, 이사야 40:22에는 "둥근 지구 (circle of the earth)"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잠언 8:27절에도 "궁창(circle)으로 해면을 두르실 때에"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31, 34절은 둥근 지구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눅17:31,34) "그 날"과 "그 밤"이 똑같은 사건을 설명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이 의미는 인자의 나타나는 시기가 어느 지방에서는 밤이고, 다른 지방에서는 낮이 될 것이라는 것이며, 이것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낮과 밤이 동시에 지구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지구가 네모지고 평평하다면 어찌 낮과 밤이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사야 55:9절에는 끝없는 우주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우주와 비교하고 있는 이 말씀은 셀 수 없는 은하계로 수놓은 우주의 끝없음을 말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3장 7절에는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라고 하였다. 간수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없어지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말로 말하면 이 성경절은 땅과 하늘에 있는 모든 물질들과 에너지는 어떠한 경우에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 순화되어 그 근본 상태를 유지한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어떻게 비가 형성되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에 성경은 물이 어떻게 순환하는지도 설명하고 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1:7) 한국어 성경의 번역은 조금 이해하기 어렵게 되어있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는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는 완전히 채워지지 않고, 이 물은 다시 그 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라고 쓰였다. 즉, 이 말씀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이 다시 증발되고 비가 되어 다시 강물을 만든다는 것이다.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시편 102:25-27) 성경은 모든 물질과 에너지의 보존법칙을 말함과 동시에 그 혼란의 상태가 증가한다는 혼란증가의 법칙도 말하고 있다. 이 법칙은 과학적으로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혼란의 상태를 증가시키고 있어서 이대로 지속될 경우에는 언젠가 완전 붕괴의 상태로 도달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피가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되지 못하던 고대나 중세사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레위기 17:15~16을 통하여 피를 통하여 병균이 옮긴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다. 세상에 병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때는 겨우 몇 백 년 전이다. 중세시대에 의사들은 사람을 수술할 때에 손에 묻었던 피를 하나의 영광스러운 상징으로서 생각하였고, 그 피를 씻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수술함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숨지게 되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성경은 이미 오래 전에, 피를 묻히거나 죽은 짐승들을 만졌을 때에는 그 부위를 깨끗이 씻고 저녁까지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말씀은 태양광선이 균을 죽인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으며, 병균이 접촉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의학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