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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너와마을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삼척 신리의 너와집
글·사진/주진순, 김희채(국립수목원 산림문화교육연구실)
외진 곳이지만 옛 정취를 간직하고 산촌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강원도 삼척의 너와집을 탐방해 본다.여기에 현대문명과는 단절된 선사시대의 생활 흔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리의 너와집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현대 도시속에 살면서 언젠가는 조용하고 쾌적한 전원에서 살기를 꿈꾼다. 특히 나이 든 분일수록 도심의 복잡한 교통과 소음 그리고 환경오염으로 가득한 회색도시를 벗어나 공기 좋고 쾌적한 곳에서 자연과 함께 말년을 보내기를 동경한다.
이번에는 나무와 자연이 잘 어우러진 산촌 중에서 현대문명에 뒤진 외진 곳이지만 옛 정취를 간직하고 산촌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강원도 삼척의 너와집을 탐방해 보기로 했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는 너와집(너새집, 송판집, 널기와집, 板瓦家)은 우리나라 화전(火田)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화전경작은 기원전 3세기경 나목식가옥(螺木式家屋)의 양식이 오늘날의 화전민 부락에 남아 있는 것으로 이미 마한시대에 화전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시작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확대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전민의 생활상 및 가옥 등이 잘 보전되어 있는 마을로 삼척시에는 도계읍 신리, 신기면 대이리, 가곡면 동활리, 노곡면 상마읍리, 평창군에는 진부면 동산2리, 강릉시에는 연곡면 부연마을, 인제군에는 북면 용대리가 있다. 이 밖에 월정사의 말사인 지장암 사고사(史庫寺), 상원사(上院寺)의 2채는 주택이 아닌 건물에‘너와’를 인 것이 이채롭다.
우리는 전통가옥 형태를 구분할 때 흔히 지붕재료에 의해 구분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붕은 주변에서 습득이 용이한 재료를 사용하게 된다. 특히 강원도 산간마을에는 이러한 재료적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너와집의 지붕재료로 소나무가 사용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삼척시 도계읍 신리마을 주변에는 지금도 상당히 우량한 소나무림이 분포되어 있다.
이곳 신리에는 1975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김진호씨의 너와집이 있는데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어 산촌문화 연구 및 산촌생활 체험을 위해서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이밖에 1989년에 중요민속자료 221호로 지정된 이종옥씨의 너와집이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고 병자호란 때 이주해 온 이래로 11대째라 한다.
너와집의 형태는 일(一)자집이 많고 평면구성은 홑집, 겹집, 3겹집(양통집) 등 다양한데 신리의 너와집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형태로 거의 정방형이다. 내부공간이 용마루 아래에 세 줄로 나란히 이어져 있는 사방집으로 사랑방, 작은방(고방), 도장(웃방), 안방, 부엌, 외양간, 변소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외양간이 집 밖에 따로 위치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집 안의 한곳을 차지하고 있어 독특한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외양간이 부엌과 통하고 있는 것은 산간벽지이므로 살쾡이, 늑대 등의 산짐승으로부터 가축(소)을 보호하고 겨울에 보온을 하기 위해서이다.
이 집의 출입 형태는 일반주택과는 달리 집의 정면이 아닌 좌측면의 사랑방과 외양간 사이에 있는 보칸 즉, 쌍여닫이 판장문을 이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출입구 공간에 사랑방이 놓여 있는 우리나라 가옥의 배치적 특성과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건물 내의 사랑방 앞에는 사랑방으로 통하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쇠죽을 끓이는 동시에 사랑방의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만들어져 있다. 아궁이 좌측에는 쌍여닫이 판장문이 있어 환기 및 채광에 쓰인다.
건물의 중앙에는 집 안의 방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어 작은방과 안방으로 출입할 수 있으나 안방을 통해서만 출입할 수 있는 도장방은 곡식을 저장하는 내부에 있는 창고의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외부의 여자손님이 방문했을 때 숙소로 이용되기도 한다.
봉당 공간은 겨울철 실내작업을 할 수 있는 장소로 이곳에 화티가 있다. 화티는 높이 약 70cm, 길이 약 90cm 정도의 크기로 취사가 끝난 후 불씨를 보관하는 곳으로 아침에 꺼내 쓰는데 만약 불씨가 죽으면 집안이 망한다 하여 잘 보호한다.
부엌과 봉당 사이는 벽이 2/3 정도 가로막고 있는데 이 벽체에 두둥불을 설치하였다. 이 두둥불은 원시적인 조명장치로 이곳에 관솔불을 놓아 부엌과 봉당 공간을 밝혔다. 봉당 공간의 외양간 쪽에 채독과 김칫독이 놓여 있는데 채독은 싸리로 만든 식량 저장용 독으로 싸리를 항아리처럼 배가 부르게 엮고 바닥을 네모진 널빤지로 막아 소똥을 바른 위에 진흙을 덧발라 말린 것으로 콩이나 감자 등을 저장하는 도구이다. 김칫독은 피나무속을 완전히 파낸 뒤에 풀을 이겨서 발라 국물이 새지 않도록 한 통나무 그릇이다. 두께 5cm, 높이 150cm 정도로 극심한 추위에도 보온이 잘되어 김치맛이 좋다고 한다.
그리고 가늘게 꼰 새끼를 엮어 만든 주루막은 현재의 배낭과 같은 것으로 곡식을 나를 때와 낫 같은 도구 및 점심을 넣어 메고 다니는 도구이다. 또한 설피는 살피라고도 하며 일종의 설화(雪靴)로 눈에 빠지거나 미끄러지지 않게 신발 위에 덧신도록 만들었다. 이밖에 방우리, 중태, 작두, 베틀, 가마니틀, 창, 낫, 도끼 등도 잘 정돈되어 있다.
기둥, 보, 도리는 사괘맞춤으로 정교하게 짜 맞추었으며 도리의 아래에 장혀를 대어 보강하였다. 기둥은 약 170mm 정도의 방형기둥을 사용하였으며 도리는 약 150~230mm 정도의 굵기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주위에 이용할 수 있는 대경재의 소나무들이 많아 집의 부재로 사용하기에 풍족하여 평야지대의 집들과는 달리 큰 치수로 제작되고 치목기술 또한 같이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
지붕의 너와는 200년 이상의 적송을 톱으로 70cm 길이로 자르고 토막을 세워 도끼로 쪼개 놓은 널빤지이다. 크기는 일정치 않으나 20~40cm, 두께 5cm 내외로 잘라 용마루 쪽으로부터 끝을 조금씩 물리면서 두 겹으로 이었고 용마루 부분은 굴피로 이었다. 그리고 너와와 굴피가 바람에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큼직한 돌과 통나무 누름목을 지붕 위에 올려 놓았다. 지붕틀은 고미보 위로 대공을 올린 후 그 위에 종도리를 놓고 양쪽으로 서까래를 올린 후 너스레를 걸어 너와가 빠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보통 기와지붕은 10년 동안 손을 안 대면 잡풀이 자라고 이끼가 끼어 퇴락되지만, “굴피 10년, 너와 100년”이라는 말이 있듯이 너와에는 풀이 자라거나 이끼가 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너와 한 장의 수명은 보통 5년 내외이며 기와지붕을 수리할 때처럼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썩은 것을 갈아 내고 새것으로 바꾸어 끼운다.
집 안 봉당이나 부엌에서 지붕을 올려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하늘이 보일 정도로 틈새가 있어 비가 들어올까 걱정이 된다. 그러나 비가 오면 너와가 젖어 팽창되면서 틈을 막아 주기 때문에 비가 새지 않는다고 한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집 뒤쪽에 있는 굴뚝으로 빠지지 못한 연기가 너와 사이로 뿜어져 나오므로 집 안쪽의 너와들이 새까맣게 탄화되어 너와의 수명을 늘리기도 하지만 집 밖에서 볼 때 마치 지붕이 불에 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뜨거운 여름에는 통풍이 잘되어 시원하므로 이들 지붕에서 산간민들의 슬기로움을 엿볼 수 있다.
화전경작이 불로 비롯되었듯이 불씨를 귀중히 다루고 질병 치료, 기원 형태 등을 샤머니즘에 의존하는 것은 그만큼 화전민 생활이 원시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970년대의 화전 정리 이후에 많은 너와 가옥이 현대적인 건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원시시대의 문화 형태가 잘 보존되어 목기문화지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현대문명과는 단절된 선사시대의 생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신리의 너와집을 통해 우리는 자연과 함께 호흡한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있는 김진호씨의 너와집(민속자료 제33호)
너와집 지붕 구조
너와지붕 합각부
중도리 대공 가구
사랑방 앞 쪽 마루
건물의 중앙에 집 안의 방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마루
화티, 두둥불
식량 저장용 채독(왼쪽)과 김칫독(오른쪽)
너와집 평면도(출처:국립박물관)
신리의 너와집 찾아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