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수심결] ⑥
‘돈오’에 집착말고 정진에 힘써야
돈오란 본래 성품에는 번뇌가 없고 한량없는 지혜가 스스로 갖추고 있어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차별이 없음을 말하며 점수란 본 성품이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습기는 갑자기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서 성인의 태를 기르는 것을 오래하여 부처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잔칫날 같이 걸고 푸짐했던 장날이 파하고 나니 항구는 다시 북적 거린다. 하루의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 붉은 해는 뱃머리에 걸려 있고 저 건너 피안의 섬으로 귀향하는 사람들이 서둘러 반야의 배에 오르고 있다. 섬으로 통하는 길은 금진과 신평 두 개의 배터가 있고 반야의 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것도 차별함이 없이 모든 것을 실어 나른다. 여기에는 돈오와 점수도 없고 더디고 빠름은 다만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아직 발심이 되지 않는 어리석은 범부는 사대로 몸을 삼고 생각으로 마음을 삼아 끝없이 밖으로 부처를 찾아 헤매다가 문득 선지식이 지시하는 한 마디 인연으로 만년 동굴의 어둠이 일시에 밝아지듯 지고 있던 물지게의 통 밑이 확 빠진 것처럼 돈오하게 되는데 이는 곧 견성이요 성불이니 더 이상 닦음을 요하지 않는다. 하는 일마다 공을 이루어 수행이 곧 불행인 것이니 념념이 물들어 오염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이치가 이러하여 생사가 없는 도리를 분명히 깨달았지만 생사가 흐르는 것은 아직 익혀온 버릇을 갑자기 없애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 암바라는 여인이 문수보살에게 묻기를 생사 없는 도리를 분명하게 깨달았는데 어째서 생사가 흐르는 것이냐고 물으니 문수보살이 대답하기를 아직 힘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죽순이 대이기는 분명한데 당장 뗏목으로 쓸 수가 없는 것과 같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모든 기관이 갖추어진 것은 어른과 다름이 없지만 시간이 지나야 완전한 성인이 되는 것과 같다.
『육조단경』에서 말한 닦아 증득하는 바는 없지 않으나 물들어 오염될 수 없다는 말은 곧 무념으로 티끌만큼도 닦고 배우는 마음이 없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촛불 켜고 향 사르는 일이 그대로 불행(佛行)인 원수(圓修)라고는 하지만 닦아 증득하는 바가 없지 않다는 말에 허물구가 있으니 돈오점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돈오돈수의 돈오와 돈오점수의 돈오는 이치로는 조금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돈오점수의 ‘돈오’를 ‘해오’로 단정하는 것은 안된다.
더욱이 돈오돈수의 ‘돈오’와 돈오점수의 ‘돈오’를 완전한 깨달음의 구경각이라 하여 살림살이로 삼아 더 이상 나아가지도 못하고 알음알이를 내어 보림한다고 하면 끝내 구경에는 이를 수 없으므로 종문의 난적이라고 선지식이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눈물겨운 자비심으로 극언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아직 길가는 흔적이 남아 있어서 허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길가는 일이 바로 집안 소식을 드러내는 일로써 세월이 필요할 뿐이다.
위와 같이 두문은 번뇌가 본래 공하기 때문에 수행 자체를 부정해 버리고 번뇌가 곧 해탈이라고 하는 자들의 병폐를 없애고 또한 번뇌가 공한 줄 모르고 끊고 닦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사람들을 함께 지양하는 살아 있는 법문이다.
이러한 공부의 이치를 분명히 알고 있는 선지식은 인연 따라 돈오돈수의 깃발을 높이 들어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끝까지 향상 일로를 제시한 것이며 때로는 돈오돈수를 이야기하며 낮은 근기를 격발시켜 구경에 이르도록 하여 다같이 일심중도의 한 바다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좌선을 하다가
그만
졸음에 빠진 오후
갑자기
허공을 찢는
꿩의 울음소리
거금선원장 일선 스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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