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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타 |
“법화경을 믿는 사람은 겨울과 같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되느니라.”(어서 1253쪽)
1275년 5월,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이 유명한 말씀을 묘이치니에게 보내셨다. 깊은 산속, 눈이 몰아치는 혹한의 미노부에 들어가 첫 겨울을 나신 이듬해였다.
설국(雪國)의 벗에게는 이 성훈이 더욱 마음 깊이 와닿는다. 더구나 박해의 계절을 꿋꿋이 견뎌낸 동지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겨울은 반드시 봄이 된다. 아니 ‘겨울이 반드시 봄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이케다(池田) SGI 회장은 가장 추운 계절에 아키타로 달려왔다.
“내가 왔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내가 다시 지휘하겠습니다. 함께 한번 더 해봅시다!”
1982년 1월 10일부터 15일까지 SGI 회장은 극적인 ‘눈 속의 아키타 지도’를 한다.
나는 이케다 문하생이다
제1차 종문사건은 악역의 중들이 법의(法衣)의 권위를 내세워 학회의 사제(師弟)를 분단하기 위해 계략을 꾸민 사건을 말한다.
1977년 무렵부터 가장 격심하게 공격당한 곳이 동일본에서는 이곳 아키타였다. 특히 현의 북쪽에 있는 노시로, 남쪽에 있는 오마가리에 불어닥친 박해의 폭풍우는 극심했다.
1978년 종문사건의 폭풍우가 매섭게 몰아칠 때, 이토 에이키치(제3아키타총현 부총현장)는 현(現) 다이센시의 미나미오마가리부장이 되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슨 말을 들어도 반론하지 마라, 참아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무슨 말을 들어도 말입니다.”
중들은 승속화합을 바라는 동지의 진심을 저버리고 학회를 중상하는 잡지를 한 손에 들고 학회를 비난하며 “탈회하지 않으면 장례식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등 위협을 했다. 어제는 동지였던 사람이 오늘은 손바닥을 뒤집듯 떠나갔다.
선배가 창백한 얼굴로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에이키치에게 말을 꺼낸 적도 있다.
사건의 전모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에이키치는 학회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에이키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어떤 일이 있든 절에는 가지 않아요.” “이케다 선생님의 문하생이니까 떠나지 않습니다.”
그 뒤 탈회자들의 준동과 싸우고, 동요하는 동지를 지키기 위해 날마다 한결같이 지역을 뛰어다녔다.
‘SGI 회장이 온다’는 소식은 에이키치에게도 ‘봄’을 가져왔다.
1월 12일, 오전 10시가 넘은 무렵 우유판매점을 운영하는 자택의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아내 지야코(아키타황금현 부부인부장)가 ‘중대한 소식’을 전했다. 에이키치가 SGI 회장과 함께하는 간담회 자리에 갑작스럽게 초대받은 것이다.
“여보, 바지 좀 꺼내줘!” 에이키치는 허둥거리며 어울리는 옷으로 얼른 갈아입고 아키타 시내로 차를 몰았다.
이윽고 간담회 장소에 뛰어들어갔지만, 유감스럽게도 간담은 이미 끝나 있었다.
SGI 회장은 “기다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갑시다” 하고 말을 건넨 뒤 버스에 올랐다.
당시 SGI 회장은 이동하는 중에도 간담과 격려 그리고 업무를 할 수 있도록 버스를 이용했다.
에이키치도 버스에 동승했다.
SGI 회장은 시내를 시찰하고 일단 아키타문화회관(현 아키타중앙문화회관)에 간 뒤 다시 간담회에 참석했다. 여기에 에이키치도 함께했다.
에이키치가 앉은 자리는 SGI 회장의 곁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SGI 회장이 있었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다.’ 에이키치는 적당한 때를 보고 큰맘 먹고 앞으로 나갔다.
“미나미오마가리지부의 이토입니다!”
‘오마가리’라는 말을 듣고 SGI 회장은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번에 종문문제로 걱정을 끼치고 고생을 하게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에이키치는 가슴이 벅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 잘 지냅니까?” 하고 묻는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네! 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분들은 더 기운차게, 더 굳게 단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동지를 늘리며 분발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SGI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것이 제일입니다!”
에이키치가 웃자 “그런 의기가 중요합니다!” “고생을 하게 했지만, 한번 더 힘냅시다.” 하고 격려했다.
수년 동안 한 고생이 보답 받는 순간이었다.
에이키치의 장남 노부유키가 아버지에게서 이 역사를 새삼 확실히 들은 때는 1990년 연말이었다.
종문이 SGI 회장을 법화강 총강두직에서 쫓아내면서 제2차 종문사건이 발발했다.
에이키치는 “‘지금까지도 견뎌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괜찮다’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하고 말한다.
“우리 지부에서 제2차 종문사건으로 탈회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철저히 가정방문을 했기 때문이지요.” 하고 아내 지야코가 말한다.
노부유키는 청년부 리더로서 ‘헤이세이(平成) 종교개혁’ 때 투쟁하고, 제3아키타총현 남자부장 등을 역임했다.
‘눈 속의 아키타 지도’로부터 30주년이 되기 직전인 2011년 10월, 미나미오마가리지부의 지부장이 되었다.
30년 전, SGI 회장이 아키타에서 쓴 ‘지부증(支部證)’이 다시 이토 가족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래도 지금 겪는 어려움은 아버지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쑥스러워서 말은 못했지만, 아버지 같은 지부장이 되고 싶습니다.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투쟁하신 마음을 우리가 이어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이키치는 이렇게 말하는 노부유키를 엄하고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보물이 된 흰색 방한복
미나미오마가리지부처럼 악승과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 다이센시의 니시센보쿠지부에도 SGI 회장이 쓴 지부증이 있다. 그리고 이 지부에는 ‘보물’이 하나 더 있다. SGI 회장이 입었던 흰색 아노락(방수가공한 후드가 달린 방한용 외투)이다.
1월 13일, 눈이 오는 하늘 아래서 SGI 회장과 동지들은 기념촬영을 하고, 몇번이나 되풀이해 승리의 함성을 올렸다.
눈보라에 가슴 펴고 자 나가자…….
점점 더 많이 내리는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 ‘인간혁명의 노래’를 불렀다.
1월 14일, SGI 회장 부부는 동지가 손수 만든 가마쿠라(눈으로 만든 집)에 갔다. 이런 황금의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스승이 입은 아노락이다.
기념촬영에는 니시센보쿠지부의 수많은 벗도 밤새 내린 함박눈 속을 헤치며 힘차게 달려왔다.
니시센보쿠지부에는 종문사건과 싸운 ‘삼총사’라 할 만한 존재가 있다.
사건 당시의 지부장인 사카모토 료마(아키타황금현 부현장), 1982년 당시 지부장인 니시야마 히데타카(아키타황금현 부현장), 지구부장 고마쓰 슈이치(니시센보쿠본부 부본부장)다. 모두 칠십, 팔십 고개를 넘었지만,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1월 15일 오후, 니시센보쿠지부 동지는 6일 동안의 격려를 마치고 아키타공항으로 가는 SGI 회장을 배웅하러 갔다.
이들은 집에서 SGI 회장의 방문이 성공하기를 기원하거나 회사 사정 등으로 기념촬영에 오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서 기다릴 때, SGI 회장이 탄 버스가 다가와 눈 앞에서 멈춰 섰다. SGI 회장은 일어서서 두 손을 흔들었다. 니시야마의 아내 야스코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모두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힘내겠습니다! 분발하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계속 손을 흔들며 배웅했지요.”
다음날 니시센보쿠지부에 흰색 아노락이 도착해 동지는 더욱 감격했다. 지금도 그 옷은 니시야마 집에 있다. 해마다 1월을 맞으면 지부의 동지는 한 사람 한 사람 옷을 보며 스승의 온기를 느끼고 서로 결의를 확인한다.
SGI 회장은 아키타를 방문했을 때, 공항에서 회관에 도착할 때까지 9개 장소에서 걸음을 멈추고 ‘거리 좌담회’에 뛰어들었다. 그 봄을 불러오는 격려는 공항에 돌아가는 길과 아키타를 떠난 뒤 그리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눈 속의 아키타 지도’ 30주년에 SGI 회장은 이렇게 읊었다.
아 아키타
위대한 아키타에
승리 있으라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 왕자(王者)로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