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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창12장-25징)
오늘은 아브라함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으며,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100년을 변함없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Photo : ) 하나님의 소명을 받는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표상이며 조상입니다. 사람들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는 이미 하란에 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올라온 것은 몇 살 때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노아가 세상을 떠날 때 아브라함은 60세였습니다. 그때 하란으로 올라왔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입니다.
지금도 하란 우르파에 가면 아브라함이 태어났던 동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아브라함 기념교회가 있고, 욥이 살았던 곳과 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태어나서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가 혼잡해졌을 즈음에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갈대아 우르에 가서 살았습니다.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업이 잘 안되어 고향으로 낙향했습니다.
(Photo : ) 아브라함의 이동 경로
고향 하란에 와서 10년 정도 살고 있을 때 아브라함이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데라는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후에 205세까지 살다 죽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아브라함이 자기 아버지 데라가 장사하려고 많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모두 때려 부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노아 홍수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노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우상을 만들어 팔던 아버지 데라의 가정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알게 되었을까요? 유대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달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듬어 찾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계신 것은 확실하다고 믿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만나주셨다는 이야기가 유대 역사에 나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죄는 아주 큰 죄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단번에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세리 마태도 역시 예수께서 부르실 때 단번에 응답하고 나온 인물들입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사명을 당시에는 몰랐지만 상당히 세월이 흐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는데 당장 이삿짐부터 챙겨 가지고 대문을 나서라고 하면 당장 그렇게 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갈 길을 모르고 응답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훗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쓴 것이 아니고, 아들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야곱에서 요셉으로, 요셉에서 그 후손들에게 쭉 이어져 오다가 나중에 모세가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잘 모릅니다. 또한 그가 책을 쓴 것도 아니기에 우리가 아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예수님도 책을 쓰지 않았고,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도 책을 쓰지 않았습니다. 진짜 위대한 인물들은 책을 쓰지 않았고 훗날에 누군가 그의 삶을 책으로 쓰도록 살았습니다.
노아 홍수 사건 이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이유는 니므롯의 선동으로 인해 하나님의 이미지가 더욱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되시며,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전능하심과 신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참된 복을 받으려면 아브라함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 영화, 명예, 권세를 다 누렸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을 모르면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오신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독교인들고,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살에 얻은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정도의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는 서로 독생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창세 이후로 친구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Photo : ) 모리아 산의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자신의 소유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일절 양보했던 자였습니다. 조카 롯과 함께 가까이 살다 보니두 집안의 목자들이 서로 싸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선택권을 조카에게 먼저 양보하였습니다. 양보 정신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양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물질 관계와 인간관계를 어느 것을 더 중요시 하는가 하나님께서 달아보였던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세 가지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첫째로 물질 관계, 둘째로 인간 관계, 세째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세가지 관계 중 어느 관계를 제일 소중히 여기는지 시험하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고, 인간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물질은 따라오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는 물질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니까 물질이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디를 가든지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디 가든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을 쌓았다는 말은 예배를 성실히 드렸다는 말입니다. 예배에 실패하고 인생이 실패한 자가 바로 가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다음 아브라함은 대단한 담력의 사람이었습니다. 담력이 없었더라면 타향 팔레스타인 땅에 감히 발을 붙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인권이 보장되지도 않았던 시대, 치안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만일 어떤 일이 벌어지면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고 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을 겁쟁이로 보면 안 됩니다. 기독교는 겁쟁이는 따라 갈 수 없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라 간다는 것은 용기와 담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살렘 왕이며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일조의 조상은 야곱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따라 드린 것이 아니라, 율법이 생기기 500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손님 접대를 잘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아예 길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들어오던 자입니다. 아내 사라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손님이 오면 살진 송아지를 잡아 대접을 했습니다. 어떤 남편이 그렇게 손님을 데리고 집에 온다면 이혼을 하고도 열 번은 더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반가워하고 손님을 잘 대접을 하는 것은 복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다 보면 천사도 대접하고 하나님도 대접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중보기도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를 가지고 매달린 자가 아니라 남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했던 자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 명까지 하다가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더 이상 내려오지 못하다가 차마 조카 롯을 살려 달라는 말을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심정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엎으시는 중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시고 조카 롯을 구해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실한 삶은 옆에서 그의 삶을 지켜 보던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랄의 아비멜렉은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을 찾아와 상호조약을 맺자고 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을 불신자들이 볼 수 있을까요? 불신자들이 기독교인들을 비방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충성되고 신실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우리가 거룩한 삶과 깨끗한 삶을 살면 불신자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전혀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재를 키우고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기른다는 것은 참으로 거룩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길리우고 연습시킨 자가 318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가 다메섹의 엘리에셀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신실하였는지 그의 삶을 보면 때로는 아브라함 보다 믿음이 더 좋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 목회자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알아보려면, 그 교회 사찰 집사에게 물어보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른 318명은 아브라함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이 얼마나 믿음이 충성스러웠는지 이삭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상속자가 되었을 정도로 충성스러웠던 자였습니다. --------------------------------------------------------------- 아브람에게 임하신 하나님 [창세기 12:1-5]
오늘 말씀을 보면, 아주 오래 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람의 삶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그 전과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그의 삶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그를 통해서 온전히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임하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삶에 임재하셔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임재의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는 아브람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의 강림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임재하실 때에 우리의 삶에 요구하시는 것과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계획하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계획, 뜻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70평생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에 맞추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마다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습니다. 아브람과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계획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계획을 하기도 하고, 몇 년 계획을 세워 놓고 살기도 합니다. 가족을 돌봐야 했습니다. 짐승들을 돌보아야 했었고, 종들도 있었습니다. 집안에 할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매년 마다 정해진 일들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자신의 계획과 다른 자신과 관련된 또 다른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에75년 동안 살면서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계획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자신으로부터 온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처음 듣는 신으로부터 온 계획이었습니다. 그것은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로부터의 계획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인 것입니다. 비전은 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 바로 계획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전에는 나의 삶의 목적이 나로부터 왔는데,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옴을 깨닫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살아갔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세우신 계획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비전으로, 이상으로 삼고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아브람과 같은 사람에게도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이야 아브람이 대단해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 당시의 모습으로 본다면 별볼일 없는 노인이었을 것입니다. 나이는 75세가 되었습니다. 어떠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면서 살기에는 나이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람에게는 75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아브람에게도 하나님은 커다란 계획이 있으셨습니다.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간에 하나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비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전에 맞추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 없다면, 그리고 내가 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 더욱 간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그것에 초점을 맞출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의 첫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음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2. 또한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에 아브람과 하나님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만남은 아브람의 입장에서는 전혀 계획된 것이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주도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 계획을 안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가능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이 많다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를 주도해 나가실 때에 비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분의 뜻을 알려주신 것은 한없는 은혜 가운데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알려주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삶을 살아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께서 특별히 쓰시고자 하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에도 예수님은 손수 사람을 찾아서 나서셨고,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갈릴리 바다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를 부르셨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스승이 손수 제자를 찾아서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에 이것은 참 이례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스승과 제자는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가서 스승으로 삼는 것입니다. “랍비여, 선생이여,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직접 찾아가십니다. 그리고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삶의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셨고, 이를 주도해 나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도권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서 참된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영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예수님을 스스로 찾아서 왔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다른 많은 종교 중에서 기독교를 선택했고, 하나님께로 와서 그분을 믿고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 내 인생의 판단과 주도권도 내게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가 아니라, 내 방식대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아직도 내가 주인이 되고, 하나님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때에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도적으로 부르셨고, 이제는 나의 계획과 주도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주도권을 맡기고,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완전하고 유한한 내가 인생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그 주도권을 내어 드리고, 나는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을 봅니다. 나를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부르심에 목적대로 이끄셔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실 것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주신 계획은 아브람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들에게 주시는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이 이룰 큰 민족은 단순히 혈통적인 민족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민족’은 ‘고이’라는 히브리어를 쓰는데, 이것은 혈통적인 민족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암’이라는 단어와는 다릅니다. ‘암’은 혈통을 중심으로 한 혈연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의미하지만, ‘고이’는 영역 중심의 국가 개념과 그 나라에 속한 백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큰 민족’은 단일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적인 민족만을 염두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믿음의 자손들이 이룰 거대한 나라를 계획하시고, 그 믿음의 자손들이 창대케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통해서 세계의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원대한 계획을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주시는 비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계획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통해서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확장되기를 소망하며 그 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또한 하나님은, 그로 인해서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복은 땅의 모든 족속을 복되게 하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복은, 자기 자신의 풍요로 안락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착취하고, 불행하게 하는 복이 아닌 것입니다. 아브람으로 인해서 다른 족속들이 복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궁극적인 복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구원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진정한 복의 내용입니다.
아브람이 세상적인 풍요를 복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을 따라서 갔다면, 아브람은 그곳을 떠날 이유가 별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살고 있던 갈대아 우르는 가나안 땅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풍요로운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복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복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이었다면, 이제 그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요, 아브람은 그 복을 누리고, 그 복을 전하는 자로 되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한 아브람이,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떠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명령합니다. 아버지의 고향과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그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고향에서도,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떠나도록 하십니다. 사실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보호해 줄 사람들을 떠나는 것은 무척 두려운 일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안내해 줄 사람이고 도와 줄 사람들인 것입니다. 평생 동안 가까이에서 그의 힘이 되어줄 사람들입니다. 그 동안 그렇게 살았습니다. 가족도, 돈도, 모든 것들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이제 그 동안 믿고 의지했던 것들을 뒤로 하고, 이제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갈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전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림을 경험한 아브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믿고 의지했던 것들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계획과 비전을 향해서 더욱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은 우리의 삶을 목적과 방향을 바르게 바꾸어 놓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서 우리는 삶의 목표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더 궁극적이고 가치가 있음을 믿고서, 그분의 계획에 관심하며, 그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가장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어서 큰 민족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크고 강해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의 복이 누려지고, 또 그것으로 온 민족을 복되게 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진정한 복임을 깨닫고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온 민족이 구원받는 복을 누려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고대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계획에 더욱 관심을 가지시고, 확인하시고, 그 목적에 헌신하시는 삶이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 아브람의 부르심(창세기 12:1~9) - 피영민 담임목사
서론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별됩니다. 창세기 1~11장까지를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인간, 죄, 국가, 구원 그리고 가정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정상적이고 견고하게 되려면 창세기 1~11장까지를 사실로 믿어야 됩니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신화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창세기 1~11장은 신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12~50장까지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네 명의 족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네 명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로부터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의 장이라고 말하는데 8~22절까지를 바로 이 네 사람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네 사람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신앙의 모범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인물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더 중요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름이 두 가지입니다. 아브람이라는 이름도 있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도 있습니다. 왜 이름이 두 가지냐면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주셨는데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이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약성경에 일흔네 번이나 등장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오늘은 창세기 12장 1~9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첫째, 아브람을 부르신 부르심이 어떤 부르심이었는지 둘째, 부르시면서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 셋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람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Ⅰ. 하나님의 부르심은 반복된 부르심이다
창세기 11장 32절과 12장 1절을 볼 때 하나님이 하란에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처럼 보입니다. “데라는 이백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창 11:3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아버지가 죽은 후 하란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7장 2~3절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행 7:2~3). 아브람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은 하란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입니다.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이지 하란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본래적인 부르심과 반복된 부르심이 있습니다. 본래적인 부르심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의 70세 되던 해에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에서 나올 때는 아버지가 계시니까 아버지를 따라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까지 먼 길을 온 것입니다. 그리고 하란에서 지체를 하니까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이 또 다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 번 부르시고 순종하지 아니하면 또 다시 부르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택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끈질깁니다. 사람이 불순종하고 지체한다고 해서 하나님은 좌절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응답하지 않고 지체하면 또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나서에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40일 후에 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원수 같은 니느웨가 망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풍랑을 보내셔서 요나는 3일간 물고기 뱃속에 있게 되었습니다. 3일 후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놓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이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욘 3:1~2).
아브람이 하란에서 지체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체하고 있는 아브람을 계속해서 또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아브람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면 결국 본인이 손해를 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택한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온전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여러 번 부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응답할 때까지 우리가 지체하고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부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르셔서 구원해주신 그 사랑에 항상 감격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Ⅱ. 하나님의 부르심은 풍성한 약속을 동반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브람에게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는 부르심에 동반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여섯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아브람 인생의 가이드가 되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어떤 곳이 좋은지를 가르쳐 줍니다. 여행지가 어떤 곳인지 잘 몰라도 가이드만 있으면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이드가 되어주신다니 얼마나 감사한 말씀입니까?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시 32:10). 가이드 되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슬픔이 오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둘러 진을 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 각 사람 인생의 가이드가 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겠고 영적으로는 교회라는 하나님 나라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창 12:2). 아브람은 75세임에도 아직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99세까지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나이는 89세였는데 이때 이미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27). 사람이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제가 막내아들이 보라고 해서 ‘블라인드 사이드’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산드라 블록(Sandra Bullock)이라는 여자가 주연으로 나왔는데 이 여자가 나온 영화 중에서 최고로 연기를 잘한 영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내용이냐면 몸집이 큰 흑인 아이가 나오는데 아버지는 죽었고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라 오갈 데가 없는 아이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이 아이가 셔츠 하나만 입고 돌아다니니까 산드라 블록이 자기 집에 데려가서 재워준 것입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산드라 블록의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운동에 재능이 있는 것을 알고 미식축구를 하도록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아이가 ‘마이클 오어’라는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가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운동을 잘 해도 공부를 못하면 안 됩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학점을 받아야 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흑인 아이에게 가정교사를 붙여 미시시피 대학에 가게 되는데 미시시피 대학 정문의 돌비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의 내용도 훌륭하고 감동적이었지만 대학 정문 앞에 이렇게 위대한 말씀을 기록해놓았다는 것이 가장 큰 감동이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했던 아브람과 사래에게 하나님은 이삭을 선물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해 아브람이 이스라엘이라는 대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약속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큰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고 있는 가족 구원, 질병 치료, 사업, 자녀 등의 문제들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와도 포기하지 마시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해도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네게 복을 주어" (창 12:2). 하나님이 아브람을 대할 때 마다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오늘 우리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웃으시고 복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창 12:2).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아브람의 이름 즉, 아브라함은 위대한 이름입니다. 왜 위대합니까?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 41:8).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름 앞에는 하나님의 벗이라는 위대한 수식어가 붙어있습니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CNN에 나와서 "내 친구 피영민 목사가 강남에서 목회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저는 하루아침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구라고 부르시니까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4-15).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시니까 아버지의 뜻을 다 가르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섯째,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2). 복을 받는 것만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람 때문에 우리까지 복 받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 복의 근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양심적으로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면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이 다 복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화의 근원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면 갚지도 않고 자신은 한번도 사지 않으면서 매번 밥을 얻어먹는 그래서 만나면 피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만나면 항상 행복해지고 복이 되는 그런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 모두 여러분을 통해 복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을 만난 보디발의 집안이 복을 받았고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세워져서 애굽은 7년의 흉년 가운데 살아남았습니다. 다니엘을 등용한 바벨론도 다니엘의 지혜로 큰 복을 받았고 믿음 있는 계집종을 만난 문둥병자 나아만은 병을 치료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의 근원이 되게 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여섯째, 특별한 보호의 약속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3). 우리가 세계역사를 보면 기독교를 핍박하고 저주했던 나라치고 잘 된 나라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를 환영하고 축복하는 나라는 대부분 다 잘삽니다. 오늘날 한국의 분위기가 자꾸 교회와 목사들을 나쁜 쪽으로 몰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한국을 망하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목사들은 완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잘못도 있고 허물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복의 근원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향해 완전하지 않다고 욕을 퍼붓고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초래하는 행동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여섯 가지 약속을 의지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도록 격려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갈 3:14).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임한 줄로 믿습니다.
Ⅲ.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에게 믿음의 반응을 일으키는 유효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종류의 부르심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부르심과 유효적인 부르심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향해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면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일반적인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한 자를 부르시면 반드시 믿음이라는 반응을 이끌어 내십니다. 이것을 유효적인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을 때 눈으로만 봐서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브람의 믿음이 시험에 봉착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노아가 저주한 함의 후손인데 그들이 그 땅에 이미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과 그의 가족들로는 그들을 물리치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가능해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들어간 곳은 세겜 땅입니다. 세겜은 선생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당시 이방 종교의 제사장들이 선생 노릇을 하면서 예언하던 곳이었습니다. 소위 신탁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소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람의 믿음을 격려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창12:7). 아브람이 하란에 있을 때가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주님의 사랑의 방문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주님의 방문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20세기 초 영국 웨일즈에 큰 부흥이 일어났는데 그 부흥은 한 장돌뱅이로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장돌뱅이는 평생 봇짐을 지고 물건을 팔러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장사를 하다가도 12시만 되면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70세가 넘은 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일가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었던 그가 늘 웃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12시만 되면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인사하고 가셔서 너무 즐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무 기쁜 나머지 다른 환자들을 전도하기 시작했고 그 병원에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외롭고 슬프고 괴로워도 죽지 마십시오. 주님이 한번만 방문해주시면 문제는 다 해결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땅을 네게 주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보여도 아브람은 내 생애 중에 안 이뤄지면 내 후손 세대에라도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그 땅에서 장막을 치며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아브람의 믿음대로 하나님이 이루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살아가면서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눈으로 볼 때는 어려워 보여도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의 가이드가 되시고 나를 복주시며 나를 복의 근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고아의 아버지라는 조지 뮬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일에 대해서 믿으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불가능한 일에 대해서 믿으라고 요구하신다.” 지금 필요한 것이 있는데 자신의 힘으로 얻을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문이 있게 되면 해결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
가나안 땅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었습니다. 여호수아 때의 가나안 땅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애굽은 마귀의 상징이고 광야는 세상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방황하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마귀의 종 되었던 사람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아브람 때에 저주받은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던 가나안 땅은 세상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세상을 상징하는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실 것이고 내 생애 중에 이 땅을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나를 위해 천국에 본향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9~10).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아브람의 생애 중에 자기 부인이 묻힌 땅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다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위해 더 좋은 본향을 예비해주셨다고 믿고 나그네처럼 살아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여행하는 순례자입니다. 여기서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순례 길 끝에 돌아갈 본향이 없다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돌아갈 본향이 없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면 얼마나 슬프고 괴로운 인생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갈 본향을 준비해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국에 틀림없이 들어갈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어 살면서 믿음을 행사하여 예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배우다(창세기 12장 1~9절) - 이 병권 목사
새해를 맞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작년보다는 나은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합니다. 스스로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반영하듯이 새해가 되면 헬스클럽이나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이 특별히 더 많아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듯이 새해를 맞아 시작한 새로운 시도는 지속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에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본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하거나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에 저항하며 전에 해본 적이 없던 새로운 것을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변화에 대해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성향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강해진다고 합니다.
익숙한 것을 떠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에 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경우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서, 자신의 의지로 새로운 일을 시도한 경우가 얼마나 있습니까?
아마도 그런 일은 많지 않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편하고 어색하며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커다란 변화를 앞에 두고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변화를 거절하느냐? 그러한 선택의 때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앞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에 직면해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아브람은 ‘변화’를 선택할 수 있었고, 아니면 ‘안정’을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아브람의 선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 아브람에게 믿음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 아브람을 통해서 자신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아브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그에 대한 신상정보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람은 상당히 큰 도시인 갈대아 우르란 곳에 살던 평범한 남자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고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지역 출신의 사래라는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두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에게 유일한 걱정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11:30에서 알 수 있듯이, 아내인 사래가 임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인데, 여호수아 24:2에 의하면 데라는 원래 하나님을 믿지 않던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아마 아들인 아브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역사적인 일이 시작됩니다. 어느 날, 아브람은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될 한 사건을 경험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1절에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 명령을 들은 아브람은 어땠을까요? ‘아니 조상 때부터 대대로 살아온 정든 땅을 떠나라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여기는 아브람의 안정된 생활이 있는 곳입니다. 친한 친구들, 든든한 친척들이 있는 곳입니다. 오랜 경험으로 쌓아온 삶의 방식과 익숙한 문화가 있는 곳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 정들고 편안한 고향, 이 고향을 떠나는 것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이곳을 떠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지를 알려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우선은 그곳에서 먼저 보따리를 챙겨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울까요? 아내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이곳에서 지금까지 쌓아왔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 사회적 기반이나 경제적인 것들은 어떻게 하나?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 한숨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익숙한 것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안전한 곳을 떠나 알 수 없는 어딘가로 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예상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힘들고 불편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나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합니다. 요즘처럼 추운 날에는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미 새가 때가 되었을 때 어린 새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듯이, 때로는 우리에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참된 축복의 경험을 위해 지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말고 나오라고 도전하십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정말 복된 삶을 위해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그곳에 멈추어 있지 말고, 나의 계획에 동참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와 만족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새로운 영역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새로운 목표를 위해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온통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살아왔는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인생의 의미와 참된 가치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그 방향으로 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람이 느꼈을 갈등과 고민을 헤아려보십시오. 그는 아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을 거듭했을 것입니다. 꼭 떠나야만 하냐고, 다른 방법은 없냐고, 하나님께 되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에게 이렇게 어려운 명령을 주셨을까요? 아브람을 괴롭히려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복을 전할 한 민족을 세우기 위해 아브람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향한 놀라운 구원의 계획 가운데 아브람을 사용하시려고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고민과 갈등이 생길 때, 선택의 어려움 가운데 우리가 더 마음을 쓰고 집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서, 우리를 안내해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라’는 명령을 하시고 이어서 2절에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그 약속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내가 너의 이름을 크게 떨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이 세 가지 약속 다음에 또 하나의 명령이 이어지는데 그것은 ‘복이 될지라’, 즉 ‘복이 되라’는 말입니다. ‘가라’는 명령과 ‘복이 되라’는 명령은 서로 원인과 결과로 연결됩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람이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 복이 될 수 없지만, 명령에 따라 떠나면,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명령에 따른 약속, 부르심에 대한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이 되라’는 명령은 3절에 나오는 두 가지 약속을 통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에게 복을 내리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사람에게 저주를 내릴 것을 말씀합니다. 아브람을 지원하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는 자들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무시하거나 핍박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자들은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약속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복이 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고 지키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자손을 넘어서 모든 사람에게 복을 베푸실 것입니다. 갈3:8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
이것이 아브람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그가 순종했을 때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는 축복에 대해서 아브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나서 그분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나그네의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땅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대로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살 것인가?’ 그냥 머문다면 편안함과 안락함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사는 것처럼 일시적인 즐거움과 순간적인 재미와 피상적인 행복을 가끔씩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새로운 성장이나 영향력,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사명감이나 진정으로 가치 있는 영적인 축복,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경험하기 힘들 것입니다.
둘 다를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에는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일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아브람은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과연 이 약속은 믿을만한가? 아니,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정말 신뢰할만한 분이신가? 그리고 이 약속은 내 인생을 걸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브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겠습니까?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복을 전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했습니다. 4절에 보면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순종의 걸음을 내디딘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과 사도행전7:2을 통해서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하란에 잠시 거하다가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것과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에 대해 크게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다루고 있고, 부르심에 대한 아브람의 순종에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75세입니다. 그 나이에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땅으로 가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 나이에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브람은 나이라는 장애물을 뛰어 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만져지지 않는 말씀을 좇아 길을 떠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본문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보이는 상황이나 현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굳게 믿었기에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얻은 모든 소유와 사람들을 이끌고 미지의 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하여 아브람은 마침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이 살고 있었고, 아브람이 살기에 결코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방법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약속을 확인시켜주십니다. 아브람이 지금 밟고 있는 땅을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겁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아브람이 그 땅에 도착하자, 바로 그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아브람을 격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할 때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나 쉽지 않은 상황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때에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시며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에 따라 순종의 걸음을 걷고 있다면 눈앞에 상황과 관계없이 우리는 믿음으로 그 걸음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은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거주지를 옮겨가면서 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아브람은 자신을 부르시고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은 결국 예배로 이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아브람의 모습은 그의 삶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거대한 남쪽 지역인 남방을 향해 이동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말씀을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나그네로서 계속 여행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아브람의 이 이야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람의 순종이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순종으로 반응했습니다. 자신의 현실적인 상황과 어려움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던 것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이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하여, 고향과 친척과 정든 곳을 떠나 나그네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아브람의 순종을 방해할 만한, 다른 것을 선택할 만한 충분한 핑계거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브람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환경을 뛰어 넘게 하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을 순종으로 이어가게 하는 것,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여러분에게 그러한 믿음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우리 주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여러분이 믿음으로 순종해야 할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브람은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아브람을 부르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 각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더 풍성히 누리는 인생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뒤로하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전한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신뢰함으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신앙의 모험을 해보라고 도전하십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지금까지 해오던 안이한 신앙생활, 이를테면 주일날 한 번 교회 왔다 갔다 하는 종교생활에서 떠나 보다 헌신할 것에 대한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태도의 변화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늘 상황이나 주변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아서 짜증내고 원망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면, 이제 믿음으로 반응하고 환경에 상관없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왕따가 되지 말고, 자신을 꽁꽁 감싸며 고립 시키지 말고, 사람들과 함께 하며 친밀한 관계를 개발하라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세상적인 문화와 가치관, 잘못된 습관에서 단호하게 떠나라는 부르심, 나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어떤 일을 중단하라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일, 정말로 하기가 꺼려지는 불편한 일에 대한 시도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믿음의 결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일, 내가 가진 물질과 시간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분에게 그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나 자신의 고집에서 떠나라는 부르심,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한 신앙에서 벗어나 좀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다른 사람을 돌아보며, 배려하라는 부르심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여러분을 쓰시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십시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보다 우리의 믿음을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신앙연륜이 오래되어도,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아무리 귀한 직분을 맡아도, 아무리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이 알아도,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열정적으로 말해도,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분의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에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 없는 평범한 삶으로 끝날 수 있었던 그의 인생이 인종과 시대를 뛰어넘어 온 인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삶의 시작은 바로 떠나라는 부르심에 대한 순종에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순종함으로써 축복의 삶은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절벽 가까이로 나를 부르셔서 다가갔습니다. 절벽 끝에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더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절벽에 겨우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를 절벽 아래로 밀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그 절벽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제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요한 바다를 순항하는 인생을 살기 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때때로 우리를 폭풍 가운데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겪는 상황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상황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가 달라지고 믿음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더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순종하는 것, 바로 이런 순종이 우리의 삶을 보다 더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익숙해진 잘못된 습관들, 불신앙의 태도들, 희생하지 않고 받으려고만 하는 마음자세들,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행동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그 축복을 나눠주는 인생이 되기 위해, 더 높은 부르심을 향해 믿음의 발길을 떼십시다. 안전에 대한 유혹을 떨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과감히 순종하여 믿음의 걸음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 그 중심에 서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아침입니다. 떠나야 할 때입니다. 이제 그만 이불 속에서 나오십시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축복의 삶이 시작되는 겁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달콤함에 빠지지 말고, 적당한 행복의 품에 갇혀서 길들여지지 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가 속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창세기 12장 1~4절) - 김홍도 목사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려는 오늘 “아브라함의 순종”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순종하는 성도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도 없고 그보다 더 축복 받는 생활이 없습니다. 그런데 순종이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에 무조건 순종한 데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런 일이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떠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입니다. 부모 형제들이 있고 땅도 있고 집이 있는 하란, 평안히 안일하게 살 수 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다 버리고 과감하게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목적지를 가르쳐 주면서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지를 알면 그나마 순종하기가 쉬울텐데 어디로 가라는 말씀도 없이 무조건 다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려면 이유 따지고, 이해득실을 계산해 보고, 자기 뜻에 맞아야만 순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란에 정착하기 전에는 갈대아 우르에 살았는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본래 앗수르 족속이었는데 달을 숭배하고 우상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란에 살면서도 우상 장사를 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 데라가 죽자, 그 죄악된 장소 하란을 박차고 떠나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부모 형제들과 함께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형제들과 친척들이 붙잡으며 떠나지 말라고 하는데도 용감히 박차버리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큰 계획과 복을 가지고 명령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하신 이런 엄청난 복을 예비하시고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곳을 떠나지 않으면 이 엄청난 복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큰 섭리와 계획이 성취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명령을 하실 때는 반드시 복과 상급을 예비해 두시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어려운 명령일수록 그만큼 큰 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 때문에 복을 얻을 것이다”는 말씀은, 그의 후손 가문에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되어 세계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고 축복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떠나야 할 자리, 죄의 유혹을 받는 자리에서 과감히 떠나야 예비하신 복을 받습니다. 시편 1편 1~2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 순종하지 못하고 친척을 다 떠나라고 했는데 조카 롯을 데리고 갔습니다. 자식도 없으니 너무 허전했던 모양입니다. 창세기 12장 4절에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적인 불순종이 아브람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하게 했습니다. 훗날 아브람의 집 종들과 롯의 집 종들과 싸우고 다투는 일이 발생했고, 결국 롯은 아름다운 땅 요단 들을 차지했고 아브람은 섭섭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순종할 바엔 100% 순종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된 새해가 되려면 죄악된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다윗은 시편 119편 115절에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애굽을 떠나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내어 쫓으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두 번째 어려운 명령에 순종한 것은, 여종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는 명령인데 이것도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해 주셨는데도 100세가 가깝도록 주시지 않으니까 사라가 잔머리를 굴려서 고안한 것이, 여종들 중에 하갈이란 여자가 인물이 예쁘고 똑똑하니까 “내가 눈감아 줄테니까 당신이 동침해서 아들을 하나 보자”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은 것이 “이스마엘”인데, 그 다음부터 후에 낳은 이삭을 이스마엘이 괴롭히고, 여종 하갈이 주모 사라를 멸시하니까 하나님께서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인하여 “깊이 근심하다가” 드디어 결단을 내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끊임없이 피 흘리고 싸우는 것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각을 잘못해서 범죄한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려운 결단을 내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자기 아내 사라는 늙고 쭈글쭈글한 할머니인데 하갈은 젊고 싱싱한 여자이니 육신적으로 얼마나 사랑하고 정이 컷겠습니까? 이삭을 낳기 전에 처음으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으니 얼마나 정이 들고 사랑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인정사정 보지 않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았습니다. 참으로 순종하기 힘든 일인데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고 참으로 죄악된 일이라면 결단을 내려서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죄악을 청산하지 않고는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해선 안됩니다. 목사로서 제일 입장이 곤란한 것은 죄악된 생활을 여전히 하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고, 예배 봐 달라고 하고 축복 기도 해 달라고 할 때입니다. 더욱이 헌금도 두둑히 내놓고 책 사 보라고 목사한테 봉투를 내놓을 때, 집어던지고 나오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면 그나마도 교회에 안나올 것 같고 참으로 입장이 곤란할 때가 많습니다.
죄는 깨닫는 즉시 속한 시일 내에 끊어버리고 청산해야 합니다. 그래야 먼 미래에 불행을 막을 수가 있고 슬픔과 근심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잔꾀와 인간의 조급함 때문에, 인간의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촉진시켜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불화와 큰 근심과 슬픔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잘못된 생각이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피 흘리는 전쟁이 계속되게 한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일수록, 하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불법과 죄악을 용서는 하되 그 죄의 대가를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치루는 법입니다. 알고 지은 죄가 그래서 무섭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심판이 없는 것은 사후에 무서운 심판과 형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가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31~32절에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큰 불행과 고통을 당하기 전에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끊고 돌아서야 합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악한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마음속에 죄악된 생각을 뽑아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했지 “행실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범죄케 할 때 생각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것쯤은 괜찮다고 합리화시킵니다. 시편 66편 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왕, 가장 큰 복 받은 다윗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부하 장군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이 죄를 숨기려고 충성된 우리아 장군을 죽게 한 무서운 죄를 범하고 난 뒤 큰 고통과 슬픔을 당했습니다. 그는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시편 32편 5~6절에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더니 홍수가 범람하는 것 같은 환난과 시험이 닥쳐와도 다 막아낼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와 함께 복도 같이 받으리라고 착각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잘못된 생활, 크리스찬으로서 합당치 못한 습관을 다 끊어 버립시다.
3. “독자를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명령도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 세 번째 명령, 마지막 명령은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100세나 되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에 모래알과 같이 번창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주신 아들인데 번제로 잡아 바치라고 하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핑계 대지 않고, 반항하지 않고, 아들을 데리고 3일 길을 가서 장작더미 위에 아들을 묶어 놓고 칼을 들이댔습니다. 이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 낳게 하신 하나님이 태운 재에서 다시 살리실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믿음으로 이미 결단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22장 16~17절에 보면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고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고, 22장 1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셨습니다.
일류 대학일수록 그 시험이 어려운 것 같이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을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을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어려운 명령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사실 가장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아들을 바칠 각오를 했는데, 하나님은 산양을 준비해 두었다가 대신 드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시험해 보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큰 복을 주실 사람에게 보통 사람이 순종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실 때가 있습니다. 제일 귀한 것, 제일 사랑하는 것, 하나밖에 없는 것, 내 생명과 같은 것을 바치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그것은 안 됩니다.” 하고 불순종하면 하나님도 실망하시고 축복의 손을 거두시고 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정성을 표시하기를 원한다면 제일 첫 것(The First)을 언제나 바치기로 힘써야 합니다. 자기가 쓸 것 다 쓰고 나중에 드리는 것은 같은 양의 물질이라도 정성의 무게가 크게 차이가 납니다. 잠언 3장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가장 좋은 것(The Best)을 드리도록 항상 힘써야 합니다. 마음에 큰 것, 중간 것, 제일 작은 것, 세 가지 생각이 들 때 언제나 제일 큰 것, 제일 좋은 것을 드리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고 우리의 바치는 손길을 유심히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 것(The Last)을 드릴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사르밧 땅의 과부가 마지막 두 식구의 생명과 같은 것은 것을 드렸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마지막 남은 생활비 전부를 드렸을 때 주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Benny Hinn 목사님은 그 마지막 남은 것이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축복의 열쇠가 되는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하는데, 제일 첫 번에 드려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제일 새 돈으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면 감사 헌금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거짓은 안 통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것이라도 드리십시오. 굶어도, 빚을 져도 드리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각오로 헌금 생활 해보지 않으면 기적과 축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늘 간증하는 바이지만, 저희 가족이 피난 생활 때 십일조를 드리다 쌀이 떨어지면 못하고 또 하다간 못하다가, 하루는 일곱 식구가 굶으면서 십일조를 드렸더니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을 꼭 믿고 실천해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체 십분의 일” 온전한 십일조로 드리면서 복빎을 받았습니다. 축복 받는 중요한 비결이 십일조 드리는 것입니다. ----------------------------------------------------------------------------------- 보쌈 당하는 사래(창세기 12장 10-20절) - 왕대일/감신대학교 교수
아브람이 가나안 남부 네겝 쪽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이 화근이었다(창 12`:`9). “그 땅에 기근이 너무 심해서”(키 카베드 하라압 바아레츠, 창 12`:`10) 아브람이 도저히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아브람의 동리에, 하나님의 사람이 들어가 살던 곳에 굶주리고 고달픈 비극이 몰아 닥쳤으니 말이다. 얄궂은 하나님. 그래, 아브람을 가나안 땅까지 불러오셨으면, 아브람이 그 험한 길을 거쳐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까지 했으면, 아브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지, 그가 장막을 치고 사는 동리에 ‘샬롬’을 주실 일이지, 기근을 들게 할 게 뭐람.
아브람의 향(向)애굽
하나님의 사람이 사는 곳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는 것은 믿음 없는 눈으로 보기에는 이상하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도우시는 신이 아니던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 12`:`2)라고 약속하시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복의 근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에 ‘복’(브라카)과는 거리가 먼 ‘질이 나쁜’(라아) ‘기근’(라압)이 설치게 되었던 것일까?
고난에는 뜻이 있다. 무릇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커 가는 과정에는 고난이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자신의 사람으로 다듬어 가실 때에 종종 고난과 시련의 바람을 일게 하신다. 고난 중에 한없이 낮아져 낮은 곳에 괴는 은총의 샘을 맛보게 하기 위해서다. 고난 중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그런 식으로 다듬고 계신다. 그랬기에 가나안 땅 남부(네겝)에 심각한 기근이 들었던 것이다. 배고픔을 통해서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일깨워 주시려고 했던 것이다(참조 신 8`:`3, 마 4`:`4).
아브람의 결정은 뜻밖이다. 그 시대, 그 고장에 살던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더럭 이집트로 내려가기로 결심하였다. “애굽에 우거하려고”(개역), “애굽에 거류하려고”(개역개정판), 아니 “이집트에서 얼마 동안 몸 붙여서 살려고”(표준새번역) “향(向)애굽”을 결심한 것이다. 신앙생활의 공식은 출애굽에서 시작되는데, 아브람은 그것도 모른 채,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아브람이 꿈꾸고 있는 것은 이집트 땅에서 꾸려가는 나그네살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나그네살이를 하고자”(봐예레드 아브람 미츠라에마 라구르 샴, 창 12`:`10).
따지고 보면 인생은 누구나 나그네다. 나그네로 왔다가 나그네처럼 떠난다. 아브람이 먹거리를 찾아서 이집트로 내려가 거처를 정하려고 한다는 소식도 그리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 쳐다보는 가나안에 비해서 이집트의 나일강에는 언제나 물이 넘치지 않은가! 아브람이 또 이집트 땅에 아주 자리잡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아브람은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지내려고”(라구르) 할 뿐이다. 잠시 머물다가 사정이 나아지면 도로 가나안으로 올라가려고 했다는 속내가 그 말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나그네살이를 할 곳이 따로 있지, 왜 하필이면 이집트일까? 가나안 땅 남부 네겝에서 이집트의 국경까지가 그리 멀지 않기에, 내친 김에 이집트까지 가고자 했던 것일까? 잠시 피하려고 하는 것뿐인데, 어떨까 싶어, 아브람은 아무 생각 없이 가나안 남부에 살던 김에 이집트까지 내려가고야 말았다. 하나님의 사람이 당하는 실수가 여기에 있다. 땅의 먹거리를 구하기 위해 하늘 양식을 뒤로 버리는 착각을 범하는 것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집트로 내려가 잠시 “몸을 붙이려고” 하는 아브람의 남행(南行)에는 이런 아픔이 도사리고 있었다.
보쌈 당하는 사래
나그네가 된다고 하는 것은 정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을 좇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기개가 드러나 있다. 나그네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가는 자다. 그런 점에서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던 아브람의 인생은 되새겨 볼 만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아브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물지 못했다. 한 사람의 인격으로, 한 사람의 남편으로,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아직 여물지 못했다.
이집트로 내려가면서 아브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걱정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브람은 사래가 너무 예쁘다는 것이 마음에 크게 걸렸다. 사래는 아브람보다 열 살 아래다(참조 창 17`:`17). 그래 지금 사래의 나이는 육십오 세다(비교 창 12`:`4). 그런 사래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훗날 사람들은 “하늘 아래 숨 쉬는 모든 여인은 그 누구도 사래와 비교할 수 없었다”(Genesis Apocryphon)고 기억하였다. 오죽했으면 시인 롱펠로우(Henry W. Longfellow)가 “아브람이 사래와 함께 이집트로 갔던 날, 그 땅의 색깔은 사래의 아름다움으로 밝아졌다” 하고 노래했을까!
하지만 본문을 찬찬히 들여다보라. 아브람은 사래가 예쁘다고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기보다는, 사래의 미모 때문에 자기가 죽게 될까 봐 더 걱정하고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내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요”(창 12`:`12).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요”(베하레구 오티 베오탁 엑하이유)!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 국경에 들어서면서 아브람의 속마음은 사래 걱정이 아니라, 자기 목숨 걱정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꾀.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창 12`:`12-13).
못난 사람. 그래, 남편이란 자가 자기 살길부터 궁리하다니. 가나안 땅 세겜에서 들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로 던져 버리고, 눈앞에 닥친 “살아 남기”에만 급급한 불신앙의 졸개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아브람이 사래에게 무엇이라고 지껄이고 있는가?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가 아닌가! 아내 덕에 좀 살아 보자고 궁리하는 아브람의 꼬락서니를 생각해 보라. 아내는 남의 집에서 성(性)의 노리개가 되건 말건, 자기 목숨만 붙어 있으면 된다는 심보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사래는 기가 막혔다. 왜 아브람이 불신앙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는가? 루터는 그것을 이렇게 해석했다. “아브람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시야에서 몽땅 벗어 버렸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아브람이 이집트 땅에 들어서자 과연 이집트 남정네들이 사래를 흠모하기 시작하였다. 사래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래 옆에 함께 있는 사내는 그 여인의 오라비처럼 보였다. 아브람과 사래가 서로 오누이처럼 행동했을 테니까.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의 등장을 급하게 바로에게 알렸다. 급기야 바로의 신하들이 사래를 바로의 집으로 “끌고 가 버렸다”(봐툭카흐 하잇샤 벧 파르오, 창 12`:`15b). 사래가 보쌈 당한 것이다! 아브람의 말이 씨가 된 것이다.
사래의 침묵, 그 말 없음의 뜻
사래는 말이 없었다. 남편 된 자가 자기를 누이라고 부르겠다고 우기는데도, 자기 남편이 우려했던 대로 자신이 보쌈 당할 때에도 사래는 아무 말이 없었다. 답답하다. 사래가 무엇인가 말했을 텐데, 무슨 소리라도 외쳤을 텐데, 왜 사래가 한 말이 성서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이것도 여성차별적인 이유인가?
따지고 보면 사래는 원래부터 말이 없었다. 아브람이 여태껏 잘살아 오던 고장을 떠나서 다른 고장으로 훌쩍 이민가자고 할 때에도 사래는 말이 없었다.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에서 얼마 동안 몸붙여 살자고 제안할 때에도 사래는 말이 없었다. 당시 사회가 워낙 가부장적인 사회였기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무슨 대꾸를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말이다. 남편은 결정하고, 여자는 그것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던 사회였으니까.
그러나 이번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아브람이 사래에게 한 제안이 무엇인가? “당신을 나의 누이라고 한 이상, 누가 와서 당신을 데려다가 자기 아내로 삼겠다고 해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소” 하는 소리가 아니던가? 아브람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가면서 사래에게 한 이 말은 씹으면, 씹을수록 기가 막힌다. 하긴, 아브람과 사래 사이가 실제로 누이-동생 간이었으니, 아브람이 사래더러 ‘지금부터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하고 대꾸할 수도 있다. 누이를 누이라고 말하려는 것뿐인데, 그것이 무슨 그리 큰 책(責)을 잡힐 일이 되느냐고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아무리 자기가 당시 풍속을 따라 촌수로 누이에 해당하는 여인을 자기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해도, 지금은 어디까지나 어엿한 남편과 아내 사이인데, 아브람의 처지가 그렇게 편안하지 못하다고 해서, 그런 관계를 손바닥 뒤집듯 이야기하라니, 그것이 거짓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아브람은 또 지금 지극히 이기적인 계산만을 하고 있다. 사래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는 덕에 자기도 좀 편히 살아 보자는 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게 웬 얼빠진 자의 소리인가? 도대체 제정신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사래가 이번만큼은 아브람에게 무엇이라고 대들며 따져야 했다. “도대체 인권유린도 유분수지. 당신이 자랑하는 하나님 신앙은 어디에다 저당 잡히고 이다지도 내게 험한 말을 할 수가 있소” 하면서 울부짖어야 했다. 욥에게 대들던 욥의 아내처럼 말이다. 속된 말로 바가지를 박박 긁어야 했다. 팔려갈 수도 있는 자기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펑펑 울면서라도 자기 미모를 탓하기라도 해야 했다. 그런 지경인데도 사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브람의 짓거리에는 두 가지 잘못이 들어 있다. 하나는 자기 아내를 버리는 파렴치한 짓, 둘째는 다른 사람으로 간음하는 죄를 짓게 하는 뻔뻔스런 짓이다(비교 출 20`:`17, 마 5`:`32). 이웃의 아내는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자기 아내를 탐내게 해서도 안 된다. 정조를 그리도 중요하게 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아브람이 사래에게 했던 짓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폭력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한 여인을 불행으로 내모는 난폭한 짓이었다. 아브람은 사래의 보쌈 당함을 즐기려 하는, 그래서 자기만의 이득을 챙기려 하는 모리배(謀利輩)로 전락하고 있었다.
사래의 침묵은 아브람의 폭력을 고발하려는 본문상의 장치다. 흑백 사진의 대조처럼 침묵하는 한 사람(여자)과 소리치는 한 사람(남자)의 대조가 본문에는 묘하게 깔려 있다. 사래의 침묵은 아브람의 세속주의를 고발하려는 본문상의 수단이다. 힘없이 자기 것을 빼앗기는 사람(여자)과 힘있는 자에게 더부살이를 해서라도 자기 것을 더 많게 하려는 사람(남자)의 대조가 본문에 아로새겨져 있다.
사실 아브람은 사래를 바로의 궁중으로 들여보내고 나서 횡재를 하였다. 양 떼, 소 떼, 암나귀, 수나귀, 남녀 종과 낙타를 얻었다. “바로가 그 여인을 보고서 아브람을 잘 대접하여 주었다. 아브람은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창 12`:`16). 잠시 살기 위해 이집트 국경을 넘어온 한 나그네가 굉장한 부자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길들이시는’ 이야기다. 이래저래 아브람 이야기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배워야 할 대상이다. 좋은 것은 닮아야 하고, 나쁜 것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하고.
아브람의 출애굽
이상한 것은 이 일로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집안에 무서운 벌을 내리신 것이다(창 12`:`17). 왜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셨을까? 왜 아브람을 치시지 않고, 어찌해서 바로에게 벌을 주셨을까? 죄는 아브람이 먼저 지었는데, 무슨 연유로 바로를 벌주셨을까? 아니, 죄를 먼저 지은 자는 아브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애꿎은 바로부터 하나님은 벌하시는가? 대낮에 남의 아내를 붙잡아 온 죄를 묻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옳다. 그러나 순서가 뒤바뀌었다. 먼저 아내를 버린 자를 심판하고, 그러고 난 다음 폭력을 쓴 자를 벌하셔야 도리다. 적어도 그것이 상식에 맞는 순서다.
바로라는 이름은 이집트어로 ‘큰 집’이란 뜻이다. ‘큰 집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큰 집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었다. 바로는 남성이다. 그러니 취하고 싶은 여성이 있으면 누구든지 취할 수 있었다. 그는 이집트 사회의 왕이자 신이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벌을 내리신 것은 가진 자에 대한 하나님의 채찍이다. 권력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다. 하나님은 약자의 허물보다도 강자의 실수를 더 크게 나무라신다. 가진 것을 이용해서, 권력을 이용해서, 지위를 이용해서 “나그네 된 자”의 하나밖에 없는 보물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를 하나님이 벌주려고 하신다. 바로에게 내린 하나님의 벌주기는 생명을 돈(물질)으로 맞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였던 것이다.
이제 아브람이 하나님의 꾸중을 들을 차례다. 하나님은 바로의 입을 통해서 아브람을 꾸짖으신다. 바로의 입을 통한 아브람 꾸짖기가 그 다음 순서다.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창 12`:`19).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였느냐?” 죄지은 자의 쓴 열매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뜻밖의 순간, 뜻밖의 자리에서, 뜻밖의 사람에게 정곡을 찔리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다. 아브람의 뻔뻔스러움을 바로가 공박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바로의 입을 통해 아브람을 꾸짖으시는 뜻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이방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양약으로 삼아야 했던 모양이다. 하나님은 비신앙인을 들어서 신앙인을 나무라신다(참조 렘 25`:`9). 신앙인에게 비신앙인은 일종의 참고서다. 교과서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참고 사항들을 엮어 놓은 책과도 같다. 이스라엘을 이방 사회의 틈새 속에 섞여 살게 한 하나님의 숨은 의도가 이에 드러난다. 바로의 아브람 꾸짖기! 그 꾸짖음 앞에 고개 숙인 아브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길들이시는 고도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향애굽’을 아브람의 ‘출애굽’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기에 있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 풍성하다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은혜를 더 풍성히 하려고 죄를 지으라는 소리가 아니다. 한 번의 실수는 은혜로 메워 주시지만, 거푸 반복되는 실수는 엄히 다스리신다. 아브람은 바로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의 사래를 보쌈 당하게 하지 말라!” 그 소리를 듣고서야 아브람은 출애굽의 여정에 오르게 된다. --------------------------------------------------------------------------------------- 인생에 기근이 올 때 (창 12:10~20) - 맹일형 목사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창 12:17)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 항상 좋은 일과 즐거운 일만 생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생각지도 않았던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들이 우리 앞에 불쑥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때때로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시련들을 어떻게 대처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고 삶의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인생에 다가오는 이런 시련들을 넉넉히 이겨내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근에 따른 아브라함의 선택
본문을 보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등장합니다. 큰 믿음의 소유자로 알고 있는 아브라함에게도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예기치 못한 기근이 닥쳐왔다는 것입니다.(10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까지 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최상의 조건을 구비하고 계셔야 할 것 같은데 정작 그에게 나타난 현실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땅은 주인이 없는 곳이 아니라 이미 가나안 원주민들이 정착하여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가나안 정착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이리저리 쫓겨 다닐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9절) 그런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그 땅에 기근까지 닥쳐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10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에 큰 나라인 애굽에 대해 “내려갔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으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그가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문제는 기근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고난이나 시련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구하면 그것은 이미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끌어안고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정말 내게 큰 문제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인간적인 선택으로 파생된 문제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아내인 사라의 문제로 겁이 났습니다.(11절) 혹시 자기를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움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자신의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이는 것이었습니다.(12~13절) 아브라함은 또 다시 이러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현실을 대처하려 했습니다. 물론 사라가 이복누이기는 하지만(창 20:12), 법적으로는 엄연한 부부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 사실을 숨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해결을 위해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생각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현실은 항상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런 자세로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잔머리로는 절대 승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잘 되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이 잘 된다면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잔머리나 굴리며 살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보다 믿음이 잘 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십시오, 자기는 절묘한 전략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일이 점점 꼬이기 시작합니다. 사라의 출중한 미모가 애굽인들의 눈길을 끌었고, 결국 그 소문이 왕궁까지 전해져서 바로가 사라를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14~15절) 아마 바로는 사라와 결혼까지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아브라함은 배우자가 될 사람의 오빠라는 명분으로 애굽왕 바로에게 많은 하사품을 받아 부자가 되었습니다.(16절) 요즘 식으로 말하면 돈벼락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그런 모든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빼앗기고 그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전후 사실을 밝히고 모든 것을 무를 수도 없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절대로 혼자서 해결하려 하거나 사람을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십시오. 바로 여기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실수에 개입하신 하나님
불행 중에 참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아브라함이 이렇게 망쳐놓은 사태를 하나님께서 직접 수습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으면 쥐어박고 내팽개쳐버리고 싶었을 텐데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고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택하신 백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독생자를 주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수렁에 빠진 아브라함을 구하기 위해 드디어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17절) 성경에는 분명히 명시되지 않아서 그 ‘큰 재앙’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 큰 질병이 내렸을 것이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바로 왕은 기겁을 했고 곧 아브라함을 불러들입니다. 바로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엄청 분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세 번이나 문책을 합니다.(18~19절) 어찌하여 그런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문책 앞에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가정을 해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닥쳐왔을 때 아브라함이 만약 믿음을 굳게 지키고 땅을 고수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것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은 기근 중에 굶어 죽었을까요? 아마 하나님은 팔짱끼고 구경만 하지는 않으시고 분명히 그를 도와주셨을 겁니다.
혹시 속으로 이런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아예 기근이 들지 않게 도와주시면 되지 않나?”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의 때에 우리의 믿음을 보시기 위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믿음을 굳게 지키고 결단하면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위기’는 ‘위대한 기회’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서 먹게 하신 하나님! 허허벌판 광야에서 이스라엘 수백만 명을 40년 동안 만나로 먹여주신 그 하나님! 그분께서 아브라함도 분명히 지켜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모습은 정말로 아쉬움이 큽니다.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그 앞에서 당당하게 믿음으로 맞서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면 하나님이 당연히 역사하셨을 것인데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쓸데없이 고생하고, 망신당하고,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된 비싼 인생 수업료를 지불하고 만 것입니다.
인생의 기근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때
여러분! 우리는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하고,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시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바로 그때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하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이 없다고 낙심하다가 세상길로 가고 마는데,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없던 길도 새로 만들어주십니다.
사도행전 16장 19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던 사도 바울은 매질로 인해 심한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낙심하지 않고 한밤에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옥문이 다 열리고, 발에 채워졌던 차꼬까지 다 풀려지게 되었습니다. 옥문이 열린 것을 본 간수장은 죄수들이 다 도망한 것으로 알고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를 제지시키고 그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밤에 간수장은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고 그와 온 집안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간수장의 가정과 루디아의 가정이 합력해서 빌립보교회를 세우게 되었고, 빌립보교회는 유럽 선교의 전초기지가 되어 놀라운 일들을 계속 펼쳐나갔습니다.
우리의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우직하리만치 믿음을 지키고 결단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가뭄이 올 때, 기근이 닥쳐올 때 믿음으로 결단하십시오. 세상으로 도망가지 말고, 사람을 찾아다니러 기웃거리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로 달려가십시오. 하나님 품 안으로 뛰어 들어가십시오.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십시오. 그래서 아브라함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말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애굽에서 아브람[창세기 12장10-20]
♣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0-13: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고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그 땅에 기근이 심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강우량도 적지만 내린 빗물을 저장할 만큼 땅이 찰지지 못했습니다. 비가 오면 바로 홍수가 나서 질퍽거리는 땅으로 변하고 금방 빗물이 스며들어 말라버리기 때문에 비가 오는 시기로 인해서 그 해 농사를 좌지우지하는 지역입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는데, 아주 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1-2년 정도 비가 오지 않아서 땅이 바싹 말랐다고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이 땅을 약속 받은 아브람이 가뭄이 심했다고 해서 금방 살길 찾아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아브람에게 닥친 첫 번째 시험이었을지도 모를 기근의 어려움에 바로 넘어졌음을 보게 됩니다. 신앙은 이론과 실제가 참으로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고심 끝에 애굽행을 결정했을 것이지만, 삶의 현장에서 말씀대로 적용하며 살아가는 일이 조금만 노력하고 약간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아브람을 신중하게 결정하고서도 만일을 위해서 철저한 준비를 거쳤습니다. 그 중에서 자신의 위험과 아내 사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에 다 이르렀을 때에 아브람은 사래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아브람 나이가 75세를 넘었고 사래는 환갑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늙은이가 주책 맞게 아내를 아리따운 여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 중에서 눈에 띌 정도로 돋보이는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이러한 안목이 자기의 아내였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이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라고 한 것은 정말 사래가 사람의 눈의 띌 정도로 매혹적인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의 불안은 바로 사래의 아리따움 때문에 남편인 자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자고 말했습니다. 사래도 아브람의 의견에 동의한 모양입니다. 사실 사래는 아브람의 이복 누이였습니다(20:12). 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보호해야 할 사래를 목숨을 빼앗길 것을 염려해서 누이라고 속인 것은 비겁한 짓이었습니다.
14-20: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아브람이 애굽에 도착했을 때에 애굽 사람들은 사래의 아리따움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과연 환갑이 훨씬 넘은 여인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다시 질문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고운 피부를 그대로 유지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요즈음 5, 60대의 성형 수술이 유행이라 할머니도 40대처럼 팽팽한 피부를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고대에서 그런 성형 수술이 있을 리 없고, 주름진 얼굴은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여인의 아름다움의 척도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반드시 반반한 얼굴만으로 평가되지는 않습니다. 품위와 기풍 그리고 기혼 여성의 풍성한 자태가 훨씬 더 여성다움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무조건 얼굴이 예쁘거나 날씬하고 젊어야 아름답다고 하지 않고, 지혜롭고 품위 있으며 기혼 여성의 여유로움과 존경 받을 만한 도덕성을 갖춘 여인을 최고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꼽았다는 점에 있습니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내면의 품성에서 우러나온다는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사래의 아리따움은 세계적이었습니다. 온 애굽에 소문이 퍼져 애굽 왕궁에까지 들어 갔고 이윽고 애굽의 바로마저도 사래의 아리따움을 보고자 했을 정도였습니다. 사래를 보자 더 이상 망설임도 없이 바로는 그녀를 공식적으로 처첩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아브람은 꿀 먹은 벙어리 양, 제대로 된 변명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고 아내를 빼앗겨버렸습니다. 신부 값으로 아브람에게는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 그리고 낙타에 이르기까지 하사되었습니다. 아브람은 기근 때문에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갑자기 애굽에서도 내노라하는 부유 계층이 되었습니다.
아브람은 철저히 실패한 것입니다. 분명히 여호와께서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축복하셨던 약속을 까맣게 잃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버렸습니다. 그는 벌을 받아야 마땅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계획이 무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위기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아브람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파기할 수 없으십니다.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기 위해 바로의 궁에서 사래를 구해내야 하신 것입니다.
원래 간음죄의 형벌은 문둥병에 걸리는 재앙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17절에는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고 하였기 때문에 무슨 재앙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중대한 죄악인 점을 감안할 때, 애굽에 피부병이 창궐했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바로에게 직접 그의 잘못을 일깨워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에게 아브람의 마지막 결정을 맡기신 것은 아브람의 죄책감과 왕의 분노가 정당하다는 점을 인정하게 됩니다.
아브람은 당장에 바로의 호출을 받고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바로의 책망은 마치 여호와께서 아담을 책망하실 때처럼 들립니다. 어찌하여 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어찌하여 내게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고 거짓을 말하였느냐고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이때처럼 자존심 상하고 창피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는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고 호통치면서 아브람에게 애굽에서 떠나라는 추방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브람이 이와 같이 애굽에서 겪은 수모와 창피함은 출애굽 사건의 전형적인 모형을 제시한다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가나안 땅에서 기근이 들면 예외 없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역사적인 사건들을 비추어볼 때 타당한 제안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아브람을 구해내신 분은 여호와이셨듯이, 이스라엘 역시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출해내셨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기근 때문에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그에게도 시험이었지만, 여호와께도 시험이 될 수 있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람은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파할 능력을 가진 자였음에도 그는 바로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굴종적인 자세로 여호와와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심판과 저주가 따라야 옳았으며, 아브람의 불신앙은 죽음(재앙)을 불러왔습니다. 그럼에도 실제로 저주받은 자는 아브람이 아니고 바로와 그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복의 근원인 아브람과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셨다는 반증입니다. 아브람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호하고 살 길을 내셨습니다. 아브람의 불신앙에도 여호와의 약속을 깨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맘 놓고 죄를 저질러도 된다는 말인가? 항상 어긋난 신앙을 가진 자는 이런 질문을 하기 마련입니다. 지금은 사회생활(직장, 사업 등)을 해야 하니, 나중에 은퇴한 후에야 조용히 신앙생활 할 랍니다. 점잖은 어떤 고급 공무원(대기업 사장)의 변명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무슨 절간에서 수양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붙잡고 계시지만, 그에게 수도 없는 시련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의 믿음이 나중에 독자 이삭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림을 주저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 기근과 타협과 섭리(창세기 12:10-20)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내린 기근과 그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 그리고 이 모든 기근과 아브람의 타협을 뛰어넘어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Ⅰ.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올 수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의 부름을 받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 왔을 때 환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보다 힘도 세고 강력한 가나안 족속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면 아무 문제없도록 가나안 사람들도 정리해 주시고 농사도 잘 되도록 준비해 주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한 아브람과 그 가족은 곧 오히려 더 큰 시련을 만납니다. 그 땅에 큰 기근이 내린 것입니다(창 12:10). 태양은 뜨겁고 비가 오지 않아 땅이 갈라지고 곡식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뭄으로 사람들이 고통 받고 기근으로 굶주렸습니다.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9:4절에 보면 가나안 족속은 그들의 악함 때문에 그 땅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신 9:4).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심판을 내리신 것은 정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가나안 족속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부패한 족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3:17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의 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 때문에 땅과 자연이 고통당하고 저주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의 기근은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극심한 죄의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근의 고통은 가나안 족속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아야 했던 하나님의 백성 아브람과 그의 가족들도 함께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도 때로는 하나님이 세상에 내리는 심판을 겪으며 함께 덩달아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온 것은 가나안 족속에게나 아브람에게나 동일한 사건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한 순간에 믿음도 커지고 모든 일이 하나님 뜻대로 잘 될 것을 기대하지만 막상 현실은 기대하는 것처럼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일로 피곤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데도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주시지 않는 것 같고 도우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의심이 생깁니다. 내가 제대로 믿고 있기는 한 것인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분인가 하고 믿음이 약해지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땅, 약속하신 땅에도 기근이 올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가 나 때문이든 아니면 가족이나 다른 사람 때문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삶의 터전인 가정에, 사업에, 직장과 인간관계에 기근과 같은 고난은 얼마든지 올 수 있습니다.
Ⅱ. 기근과 타협하는 것은 더 많은 타협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아마도 아브람의 가족들 중에 왜 이런 험한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와서 고생하느냐고 불평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람은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남쪽에 있는 먹을 양식이 풍부한 애굽 땅으로 기근이 지나갈 동안만 내려가 있기로 결정하게 됩니다(창세기 12:9) 그런데 여러분, 남쪽으로 내려오는 아브람의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애굽에서 자신의 생명이 자기 아내 때문에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60세가 넘었음에도 미모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사래의 동안 미모의 비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은 사래가 아이를 낳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늙지 않았다, 함의 후손이 애굽 사람과 셈의 후손인 사래는 인종이 틀리기 때문에 나이를 잘 몰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래의 아름다움을 본 애굽 사람들이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 남편인 자신을 죽일 것을 두려워했던 아브람은 사래(아브람의 이복 여동생)를 여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떠나 기근을 피해 내려오게 된 애굽 땅에서 목숨의 위협을 당하고 자기 아내를 부정하는 거짓말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래는 애굽왕의 후궁으로 선택되었고 아브람은 왕에게 자기 아내를 후궁으로 내어준 대가로 큰 재물을 얻게 됩니다(창 12:15-16).
아브람은 가나안 땅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결국 하나님 주신 땅의 경계를 벗어나 애굽에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기근의 문제는 해결 받지만 하나님 주신 더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아브람은 처음에는 애굽땅까지 내려 올 계획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일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방향을 잘못 잡고 타협하니까 자기 목숨도 위험해지고 거짓말도 하게 되는 점점 더 잘못된 곳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기근과 같은 세상의 문제들과 고난의 상황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고 타협하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 아브람처럼 하나님 약속을 떠나면 안 됩니다. 당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을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 말씀을 떠난 삶이 더 궁핍하고 고통스런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애굽으로 내려가면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잃어버리고 삶의 축복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애굽으로 가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떠나 선택한 그곳이 더 큰 시험과 고통과 상실의 땅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Ⅲ.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아브람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 하신다
아브람은 이제 자기 힘으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기근을 피해 하나님 약속을 잠시 떠났다가 돌아가려고 했지만 이제 애굽에서 아내도 빼앗기고 자신도 애굽에서 언제까지 살아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바로의 후궁이 된 아내를 되찾아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포기한 그 순간에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왕의 집에 큰 재앙을 내렸습니다(창 12:17). 무슨 재앙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재앙을 통해서 사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바로 왕이 깨달았습니다(창 12:18).
그리고 이제 아브람의 신앙도 회복되었습니다(창 13:3~4). 아브람의 신앙도 회복되고 가정도 회복되고 물질은 덤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가나안의 기근과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를 빼앗기는 경험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섭리 속에서 아브람을 지키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가장 적당한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비록 실수했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는 도리어 아브람의 실수와 위험이 축복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내가 비록 부족하고 때로는 실수를 해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는 하나님 약속이 금방, 한 순간에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지만 주신 말씀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순서가 있고, 단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아브람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은 어렵습니다. 아브람이 순종해서 가나안 땅에 왔지만 약속의 땅에도 기근이 왔습니다. 또 하나님께 순종하며 산다고 해서 모든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불순종과 타협의 길은 더욱 고달프고 위험한 길입니다.
여러분, 가나안 땅의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간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길이 고달프다고 해서 불순종의 길로 가면 행복해집니까? 믿음 생활하는 것, 교회 생활하는 것이 좀 힘들고 사람 때문에 피곤하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예배자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섭리 가운데 도우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로마서 11:29),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로마서 1:6)
오늘 우리 각자의 신앙에 세상의 기근과 같은 문제들 때문에 타협하고 뒤로 물러선 것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우리 믿음도 회복되고 삶의 문제들도 회복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을 내 누이라고 합시다” (창12:10-20) - 조성기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삼고 있는 것이 남자한테 극히 위험한 일이던 시대가 있었다. 아니, 사회계약에 따라 법 체계가 정교하게 잘 짜여 있는 현대에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두었다가 그 삶이 비극으로 치달은 남자의 사례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미인박명이 아니라 ‘미인부박명(美人夫薄命)’인 셈이다. 아리따운 여인은 남자에게 있어 ‘황홀한 위험’이다.
유대인이 믿음의 조상으로 떠받들고 있는 아브라함 또한 참으로 아리따운 여인 사라를 아내로 삼고 있었다. 그들 부부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과 사래였다. 한 가정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뜻인 그들의 이름이 세상 만방의 아버지요, 어머니라는 뜻인 아브라함과 사라로 바뀌기까지 그들은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본토와 일가친척을 떠나는 이별의 아픔도 겪고, 이방의 땅에서 가뭄을 맞아 생활고도 겪고, 전쟁도 겪고, 자식이 없는 서러움도 겪었다. 그런 어려움들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가슴 아파 한 사건은 부부가 생이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다른 남자가 사라를 아내로 취함으로써 겪게 된 생이별이었다. 그들 부부 중 누가 더 마음이 아팠을까.
아브라함은 큰 축복의 약속에 의지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여호와께서 지시한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축복받기는커녕 가뭄으로 말미암아 굶어 죽을 판이었다. 아브라함은 식솔들을 이끌고 남쪽 애굽으로 내려갔다. 나일강이 흐르는 애굽은 그 당시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애굽이 가까워지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애굽 남자들이 사라의 미모에 반하여 자신을 죽이고 사라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었다. 그 불안은 애굽 국경을 넘어서자 거의 공포로 바뀌었다.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어떻게 아내한테 이야기해야 하나, 아브라함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을 내 누이라고 합시다” 비굴한 남편
결국 아브라함은 조심스럽게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리따운 여인이오.” 사라는 남편이 새삼스럽게 왜 이런 말을 하나, 의아해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곧 사라는 비참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애굽 남자들이 당신이 내 아내인 것을 알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갈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누이라고 하오.”
“누이라고 하면 애굽 남자들이 더 쉽게 나를 자신들의 아내로 삼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내 아내라고 하나 내 누이라고 하나 애굽 남자들이 당신을 자신들의 아내로 삼으려고 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오. 내 말은, 내 아내라고 하면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갈 것이지만 내 누이라고 하면 내 목숨만은 살려둘 거란 말이오. 내 부탁대로 하여 제발 내 목숨을 살려주시오.”
사라가 그토록 비굴한 남편의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남편의 목숨이 위태롭다니 사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브라함 ‘아내 상납’ 목숨 구걸
천사의 계시를 듣고 있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위). 메소포타미아 우르파에 있는 아브라함의 성소.
과연 아브라함 일행이 애굽으로 들어서자 애굽의 도시는 사라의 미모로 인하여 술렁거렸다. 시정잡배의 입방아에 오르더니 권력가들과 부호들이 사라를 놓고 침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도 사라를 아내로 두었다가는 최고권력가인 바로 손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사라를 차지하고 싶었지만 아브라함과 같은 두려움 때문에 사라를 바로에게 상납하기에 이르렀다.
‘바로의 대신들도 그(사라)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당시에는 한국판 요정 같은 것이 없었겠지만 그 비슷한 연회석상에서 바로와 대신들이 사라의 미모를 화젯거리로 삼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다음 구절에서 바로가 사라 때문에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선물로 주었다고 하였다. 바로가 그 선물들을 사라의 오라비라는 아브라함에게 혼인 예단으로 준 것일까. 아니면 첫날밤을 지낸 후에 며칠, 혹은 몇 달을 두고 아브라함을 후대하여 그 선물들을 준 것일까.
성경은 바로와 사라가 부부로서 교합한 사실을 차마 기록하지 못하고 건너뛰고 있다. 아브라함이 사라 덕분에 부자가 되었다는 구절 바로 그 다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하는 구절이 이어진다.
바로가 사라와 교합하기 직전 바로의 집에 재앙이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뒤에 이어지는 바로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로는 사라를 아내로 취하여 몸을 섞었음이 분명하다.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하여금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낯선 땅으로 갈 때마다 두려워 실수 되풀이
바로에게 아내를 상납한 아브라함은 밤마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지고 편안해지긴 하였지만 그 마음은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자였다면 여종의 몸을 희롱하며 학대하였을지도 모르고, 애굽의 매춘굴을 헤매며 괴로운 심사를 달랬을지도 모른다.
사라는 밤마다 바로의 몸을 받아들이면서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왕후로서의 안락함과 호화로움 같은 것은 사라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라가 ‘금병매’에 나오는 반금련처럼 교활한 여자였다면 바로에게 아브라함이 자신의 남편이라고 고백하여 아브라함을 죽이도록 한 후에 왕후로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자기 목숨 구하겠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남자와 다시 살아보았자 무슨 낙이 있겠느냐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사라가 바로의 궁에 있는 날이 길어지면 아브라함의 가정은 그야말로 파탄에 이를 것이므로 여호와께서 급히 개입하여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려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한테 돌려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있은 연후에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저질렀던 잘못을 또 되풀이한다. 그때 아브라함은 남방으로 이사하여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주하였는데 이와 같이 남쪽으로 내려갈 때마다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 아브라함이 남쪽 남자들을 다른 지역 남자들보다 더 두려워한 것일까.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번에는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여 아내로 삼으려고 하였다. 아마도 첫날밤을 보내려 한 날 밤이었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혼인잔치를 하며 술을 많이 마셨는지 사라와 교합을 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 모양이다. 그때 여호와께서 꿈속에 나타나 아비멜렉에게 무서운 경고를 하였다. 사라의 몸을 범하면 죽여버리겠다고 겁을 준 것이다. 아비멜렉은 아무 잘못도 없는 자를 죽이시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면서도 다음날 이른 아침에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보낸다.
아비멜렉이 자신을 속인 데 대해 항의하자 아브라함이 한 말이 걸작이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인하여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또 그는 실로 나의 이복누이로서 내 처가 되었음이니라.’
말하자면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은 사람들을 속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라는 아내이면서 누이이기 때문이다.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둔 자가 낯선 땅으로 가게 될 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살 길을 찾았다는 것은 그 시대가 얼마나 험악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리고 그런 시대에는 가장 권력이 강한 자가 가장 아리따운 여인을 아내로 삼았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요즘 시대에는 아리따운 여자를 아내로 둔 남자를 공공연히 죽이지는 않지만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지닌 자들이 아리따운 여인들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실제로 아리따운 여인을 잃은 남자들이 폐인이 되어 죽기도 하니 지금도 아브라함의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히 유효하다 할 것이다. 불안한 아브라함들은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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