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 시는 취미(翠微·1590~1668)대사가 동악 이안눌(東岳·李安訥·1571~ 1637)과 함께 뱃놀이를 하면서 화답한
시(敬次東岳李先生安訥泛江集赤壁賦字韻)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조의 사회는 극심한 배불(排佛)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이념이 계속된 조선조의 5백
여 년을 지난 오늘의 불교가 어떻게 이렇듯 폭넓은 민중의 종교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하는 회의 아닌 경이로움으
로 회고될 때도 있다. 이러한 회의나 경의에 대한 대답은 당시 큰스님들이 큰 선비들과의 지기적 교분의 일면이 크게
작용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취미대사는 당시의 이름 있는 선비 곧 고급관리와의 교분이 남달랐으니 그 이름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장유
(張維)와 같은 이는 재상이면서도 대사를 청하여 결사(結社) 강론하려 하였지만 대사는 굳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
았다. 재상의 힘으로 선사를 여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산문을 지켜 도덕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여 그랬으니 이에 장
유는 대사를 더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대사의 이러한 사귐의 자세가 당시의 속사들과 격의 없는 사귐을 유지하여 불도의 진작에 이받게 되었으니 위의 시
에서 보이는 시의도 두 사람의 막힘없는 인간미를 엿볼 수가 있다. 소동파의 적벽강 놀이는 그 놀이 자체의 풍요로움
도 유명하겠지만 거기에서 쓴 적벽부가 만고의 절창이다. 이 놀이를 비긴 뱃놀이의 시로 승속을 뛰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