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이득주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꿈에 그리던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삶은 계란과 용돈 200원을 가방 깊숙이 넣어 주셨다. 나는 이른 저녁을 먹고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8km 떨어진 학교로 갔다. 내일 새벽 수학여행을 떠나기 때문에 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아이들은 학교 근처에서 잠을 자야 했다.
이미 선생님께선 교문 앞에서 먼저 온 아이들과 함께 기다리고 계셨다. 십여 명의 아이들은 선생님을 따라 시장 변두리에 있는 선생님의 전셋집으로 갔다. 우리가 몰려가자 사모님은 반갑게 나와 맞아 주셨다. 처음 본 사모님은 시골에서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우리 어머니보다 얼굴이 훨씬 예쁘고 젊으셨다. 좁은 방에 십여 명의 아이들이 들어가니 방은 금세 콩나물시루가 되었다. 사모님은 언제 시장에 다녀왔는지 과자와 과일을 한 바구니 내주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그 시절 과자와 과일은 명절에나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우리는 염치도 없이 주는 대로 큰 누에가 뽕잎 먹듯 다 먹어 치웠다.
우리들은 신이 나 한참 떠들다 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갔다. 선생님께서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하셔서 하는 수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남자애들은 선생님과 윗방에서 자고, 여자애들은 사모님과 안방에서 잤다. 처음 가는 수학여행이라 마음이 설레 잠이 오지 않았다. 이불속에서 친구들과 소곤소곤 떠들다가 나도 모르게 살며시 잠이 들었다.
한숨만 잔 것 같은데 깨어보니 사모님은 벌써 아침 준비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연탄불 위에 올려놓은 양동이에서 더운물을 떠다 주며 세수를 하라고 하셨다. 학교서는 무섭기만 했던 선생님이 오늘은 이렇게 인자하실 줄이야…. 모여 앉아 사모님께서 퍼 주는 따끈한 쌀밥을 배부르게 먹었다.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사모님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로 갔다. 푸름이 짙게 드리워진 미루나무 사이로 상큼한 새벽 공기가 가슴속으로 밀려들었다.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 먼저 나와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재잘거렸다. 잠시 후 우리를 태우고 갈 전세버스 두 대가 학교 운동장에 도착했다. 반별로 인원 점검을 마치고 교장 선생님의 환송 연설을 들은 후, 우리는 차에 올랐다. 버스 좌석이 부족해서 몇 명은 교실에서 가져온 나무 의자에 앉았다. 버스는 하얀 흙먼지를 날리며 신작로를 신나게 달렸다. 누런 벼 이삭과 활짝 핀 코스모스가 우리들의 수학여행을 축하해 주는 듯 이리저리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로수 사이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 와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한 달 전, 선생님께서는 초등학교 생활의 마지막 기념이 될 수학여행을 서울로 간다고 하셨다. 여러분 모두 부모님께 말씀을 잘 드려 600원씩 타 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에 수학여행을 간다는 학생은 별로 없었다. 그 후 선생님께서는 시간 날 때마다 수학여행 갈 사람을 조사했지만,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예상보다 간다는 사람이 적자 못 가는 사람은 수업이 끝난 후, 교실에 남으라고 하셨다. 반 전체 65명 중 55명이 남았다. 한 명씩 선생님께 불려 나갔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누가 반대를 해서 못 가냐?”고 물으시기에 “할아버지 때문이라.”라고.” 했다. “몇 년 전 고모도 수학여행을 안 보내 주셨기 때문에 나도 못 갈 것 같다.”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장남이라 막내 고모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다.
선생님과의 상담을 마치고 힘없이 집으로 왔다. 수학여행에 대하여 다시 얘기해 봤자 할아버지한테 혼만 날 것 같아 숙제만 하고 일찍 잤다. 다음날 선생님은 버스 두 대를 예약했는데 아직 반도 안 찼다며 아침부터 걱정을 하셨다. 오늘은 한 시간 일찍 수업을 끝내 줄 테니 집에 가서 부모님 일손도 도와드리고, 어깨도 주물러 드리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저녁 먹을 때 잘 말씀드려 보라고 하셨다. 쪽빛 하늘이 높기만 하던 가을날, 선생님의 애타는 심정도 모르는 채 우리는 한 시간 일찍 집에 간다는 것이 마냥 좋아 신이 났다.
집에 와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했지만, 부모님은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내일 담임 선생님께 또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걱정이 앞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종례 시간, 선생님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못 간다고 대답했다. 수학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친구들 과반수가 못 간다고 했으니 창피하거나 기가 죽을 일도 아니었다.
며칠 후, 청소 당번이라 교실에 남아 청소를 하는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다. 선생님은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수학여행비는 선생님이 내줄 테니 일단 가는 것으로 하자.” “돈은 추수가 끝나고 천천히 가져와도 된다.”라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눈만 깜박깜박하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저녁을 먹고 해콩을 까고 계신 어머니께 선생님의 말씀을 전해드렸다. 어머니는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더니, 그런 방법도 다 있구나.” “선생님 월급도 얼마 안 될 텐데 미안해서 어쩐다니?”하고 말끝을 흐리셨다.
그날 밤엔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이 우리 집 안마당을 더 환하게 비추어 주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어렵사리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다.
전세버스는 넓은 합덕 들판을 지나 신례원역에 도착했다. 난생처음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가을 풍경을 바라보며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친구들과 함께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다. 간식이래야 고작 찐 계란이나 삶은 밤이 전부였다. 열차는 세 시간쯤 걸려 서울역에 도착했고, 우리들은 역 근처에 있는 어느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이튿날, 사자의 눈이 무섭기만 한 창경원, 조그만 다람쥐가 숲 속에서 춤추고 있던 청와대, 담배제조창, 신문사 등을 구경했다. 가는 곳마다 모두 신기하고 꿈속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저녁에는 여관 앞에서 뽑기 장사를 구경하며 동생들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주머니를 둬져 보니 돈이 없었다. 어머니가 이장 댁에 달려가 어렵게 꾸어다 주신 돈인데….
여관으로 돌아와 가방을 여기저기 다 뒤져봐도 돈은 나오지 않았다. 저녁밥도 못 먹고 혼자 엉엉 울기만 했다. 담임 선생님이 달려오셨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선생님은 우리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모두 눈 감아.” “돈 가져간 사람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러면 용서해 준다.”고 말씀하셨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지만, 손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가 나신 선생님은 벌칙으로 우리 반 모두의 외출을 금지했다. 다음날 새벽, 선생님은 나를 조용히 복도로 부르시더니 돈 200원을 주머니에 넣어 주셨다. “다 잊어버리고 먹고 싶은 것 사 먹고 동생들 선물도 사다 주거라.” 하셨다. 그러잖아도 선생님의 배려로 어렵게 수학여행을 왔는데 또 걱정을 끼쳐드려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곰곰 생각해 보니 돈은 친구들이 가져간 게 아니라, 여관 앞에서 뽑기 장사를 구경할 때 소매치기를 당한 것 같았다.
형편이 어려웠던 60년대, 박봉에도 불구하고 제자를 위해 수학여행비와 용돈까지 챙겨 주셨던 선생님의 깊은 사랑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제 수학여행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난해 선생님을 찾아뵙고 수학여행 이야기를 꺼냈더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 나에게는 참으로 고마우신 선생님이다. 그 시절 200원이면 정말 큰돈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을 지금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
(한국수필 201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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