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공원등 출장 길
한탄강오토캠핑장(경기 연천군 전곡읍 선사로 76)
유일순대국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한다.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金鐘五)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113·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아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해마다 10월 16일을 전승(戰勝) 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좌측에 보이는 6.25시계
철원 노동당사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官田里)에 있는 옛 조선노동당의 철원군 당사 건물이다.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다. 기획재정부 소유이며 철원군수가 관리한다.
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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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송읍 돼지고기 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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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불고기
정일품식당(강원 철원군 갈말읍 호국로 43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