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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비평]
세르반테스- 카톨리시즘의 위기와 위기 시대의 문화적 정체성김춘진
1. “나는 나로다”(Yo soy quién soy)
문학사가 피달(Menéndez Pidal)은 세르반테스가 보여준 스페인적 기질의 일단을 “고귀한 귀족적 기품”에서 찾았다. “귀족적 기품”은 『샤를마뉴의 순례』(Pélerinage de Charle Magne)와 같은 서사시에서 16세기 아리오스토의 『성난 오를란도』(Orlando Furioso)에 이르기까지 서사적 주제에 희극적인 것을 개입시키는 혼종 전통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돈키호테』에서도 여전히 박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뒤늦게 결실을 맺는 스페인의 지적 분위기는 근대의 문턱에서 유럽 기사문학의 마지막 꽃을 피웠다. 그리하여, 신시대가 전개될 때, 한 위대한 예술가가 그 영원한 이상과 쉽게 부서져버릴 찰나적 현실 사이의 갈등을 가슴깊이 느끼면서 그러한 갈등의 민중적 희극성 너머로 그 속에 항구히 박동하는 향수에 사무친 귀족적 기품을 문학화할 수 있었다. 가장 희극적인 것 속에서 가장 귀족적 이미지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스페인인들과 마찬가지로 세르반테스에게 생래적으로 타고난 귀족적 기품 덕택이었다는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 항구히 박동하는 ‘귀족적 기품’은 세네카(Lucius Anaeus Seneca, BC. 3-65)를 낳은 스페인인들의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스토아 정신과 연결된다. 돈키호테에게서 금욕적이면서도 투사적인 삶과 자유의지를 추구한 세네카의 정신과의 근사성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페인 태생의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스토아철학 전통을 관념적이기보다 실천적이고, 지적이기보다 의지적인 전통으로 전환시키면서 지식보다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사회적인 것을 경시하고 개인주의를 지향한 냉소적 희랍 고전주의 철학 전통보다는 한결 현실주의적이었다. 스토아가 주장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이상을 따르지 않고 불굴의 투사적 의지로 그것을 대신하려 했다. 단순히 자연의 순리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자연과 운명을 극복하는 개인의 힘과 의지를 강조한 세네카 철학의 면모에 돈키호테의 이상과 기사 역정의 모습이 닮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의 견해는 피달처럼 단순하지 않다. 『돈키호테』의 의미는 확고부동한 귀족적 기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귀족적 기품의 불안정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허구의 편력기사이며 그의 세네카적 투지는 기사소설에 미친 늙은이의 광기인 까닭이다. 그래서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희랍이래 유럽 문화의 본질이 안정성과 확실성 그리고 명료성을 지향해 가는 데 있었던 것에 비하면 스페인 문화의 본질은 불안정성, 불확실성과 애매모호성을 지향하는 것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새로운 가치와 낡은 가치 사이에서 언제나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역동성은 스페인 예술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쉽게 감지된다. 그런 맥락에서 해석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돈키호테』는 스페인 문화와 예술의 특질을 웅변해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도 세르반테스를 개념적이고 해석적인 서술가인 셰익스피어와 비교하면서 차이는 그렇게 풍요로운 암시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도 메시지를 명시적으로 개념화하지 않는 데 있다고 했다. 세르반테스 자신도 『돈키호테』 서문에서 그리고 작중 인물 산손 카라스코를 통해 2부 1장에서 『돈키호테』가 읽는 사람마다 뜻을 달리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돈키호테가 보여주는 것은 희극적 광기인가, 비극적 진실인가? 산초는 순진한 바보인가, 분별 있는 현실주의자인가? 『돈키호테』는 카톨릭적인가, 에라스무스적인가? 그러나 『돈키호테』를 둘러싼 이 모든 물음은 무엇보다 주인공 돈키호테의 존재의 불확실성이나 정체성 불명에 기인한다. 애매모호함을 화두로 삼는다면 『돈키호테』는 ‘나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주인공 자신의 물음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며, 부단한 자기정체성 찾기 과정의 소설이다. 그것은 지리적 구체성과 인물과 서사의 사실성에 치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이름만은 소설 내내 불투명하다는 데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주인공 키호테의 이름은 알론소 키하노, 케하노, 케사다 등 때에 따라 달리 불리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기사소설 속의 허구 인물과 동일시한다. 편력기사 돈키호테는 허구일 뿐 진실된 아이덴티티일 수는 없다. 1부 5장에서 돈키호테는 톨레도 상인들에게 둘시네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선언할 것을 강요하다가 뭇매를 맞고 만신창이가 된다. 그 때 그를 구하러 온 이웃 페드로 알론소에게 자신을 만투아 백작이나, 발도비노스나 아빈다라에스로 자처하면서, “나는 나로다”(Yo soy quién soy)라고 천명한다. ‘나는 나’란 기사로서 생각하고 행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암시하는 포괄적 정의라고도 할 수 있지만, 역설적으로 ‘나’의 아이덴터티에 대해 아무 것도 정의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한 불확실성이 돈키호테가 스스로 내세우는 허구의 자기 정체성과 실제의 사회적 정체성 사이의 괴리에서 비롯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편력기사를 부인하고 나면 돈키호테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시대착오적 광기는 정체성 부재의 돈키호테에게 던져진 무엇보다 절박한 문제 ‘나는 진정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구 인물의 문제이기 이전에 바로 세르반테스 자신의 문제의식이었다. 세르반테스의 자기 확인은 훌리안 마리아스(Julián Marías)가 말하듯이 궁극적으로 존재에의 갈망이다. 좌절의 늪에 빠진 스페인에서 우수에 찬 영원한 패자 돈키호테는 죽어가면서 자신에 대한 확신과 열광으로 가득찬 평가를 내린다. 세르반테스가 쓴 대로 읽는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읽는다면, 세르반테스에게 ‘나’는 어쨌든 포기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더욱 중대한 것은, 그 ‘나’는 영원한 ‘나’라는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그저 돈키호테처럼 ‘나는 나로다’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항구적으로 누구일 것인지를 아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결정적인 말이며, 세르반테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인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작업은 자신의 확고부동한 정체성, 즉 ‘영원한 ‘나’’를 찾으려는 집요한 의지의 모범적 예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르반테스 한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와 시대를 같이 살아간 모든 스페인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토수복전쟁(Recounquista) 과정과 카톨릭왕조의 성립 과정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유지되어 왔던 민족적 일체성과 카톨릭주의의 정체성은 유럽사의 지평의 확장과 종교개혁 등 세계관의 변화 앞에 혼돈에 빠져들었고, 이 혼돈의 세기에 스페인인들의 역사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 제기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세르반테스는 그러한 스페인인들의 물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2. 카톨리시즘과 에라스무스주의 스페인인들의 역사적 전통이나 문화적 정체성은 무엇보다 카톨리시즘을 근간으로 한다. 스페인 카톨리시즘은 다른 기독교 문화와 달리 영웅적이며 전투적이다. 그것은 수난과 유린, 피정복과 정복의 오랜 역사에서 길들여진 것이다. 그러한 정복과 피정복의 역사 속에서 스페인 문화는 독일의 스페인학자 포슬러(K. Vossler)가 지적한 대로 개방적이고 혼합적인 특징의 역동성을 보이게 되었다. 포슬러에 의하면 그 역동적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스페인의 정치적 통일, 즉 하늘을 향해 닿아 있는 메세타 고원의 봉건적 카스티야와 땅과 바다에 닿아있는 풍요로운 부르주아 왕국 카탈루냐의 결합은 그때까지 외세의 식민지나 전장으로 유린당하기만 했던 무정체성의 스페인이 세계사적 사건의 주역이 될 수 있는 힘을 결집해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지중해와 아프리카를 제패하였고 유럽을 다스리며 아메리카를 정복한 스페인인들의 영웅주의 정신이 꽃피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스페인의 문화적 혼혈의 역사는 훨씬 더 오래고 광범위하며 영웅적 전사의 전통도 그만큼 장구하다. 게르만 문화와의 혼합이 불과 3세기에 미치지 못했다면 아랍 문화와의 동화의 역사는 무려 8세기간 지속되었다. 또한 스페인 민족의 영웅적 전사의 역사는 로마제국의 침략에 응전했던 누만시아의 혈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며 8세기간의 기나긴 성전이자 국토수복전쟁 또한 영웅주의와 전사 정신의 역사였음에 틀림없다. 아랍 회교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구축한 성전에 이어 스페인 혼혈문화의 에너지와 전투적 영웅주의 정신을 결집한 카톨리시즘의 열광은 15세기말부터 아메리카로 뻗어나갔다. 스페인 민족의 에너지는 카톨리시즘의 열광적 복음화와 궤적을 같이했던 것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을 카톨릭의 맹주로 군림하게 했으며 펠리페 2세는 카톨릭의 수호자로 회교와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응징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영웅적 전사의 정신과 열광적 신앙이 결합된 카톨리시즘의 울타리를 세르반테스라고 초탈해 있을 수는 없다. 누구도 그를 카톨릭을 거부한 이단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으며, 완전한 종교개혁주의자라고 단정할 수 없었으며, 기독교 밖의 인문주의자라고 정의하지 못한다. 세르반테스는 종교 혁명가는 아니었다. 카톨릭을 부인하고 개혁을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엄연히 카톨릭 교회의 질서와 이념 아래 있었다. 죽기 직전 카톨릭 신자가 행할 수 있는 최후의 신앙행위인 프란시스코 교단의 삼품성직자(terciario)가 되었다. 카살두에로 (J. Casalduero)에 의하면 편력기사로서의 모든 시련 뒤에 카톨릭에 귀의하며 맞는 돈키호테의 최후는 현세에 대한 환멸은 물론 현세의 구복보다 내세의 구원과 행복을 지향하는 바로크 시대의 카톨릭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세르반테스에게서 카톨리시즘의 구체적 표현을 검토한 것은 허튼(Lewis J. Hutton)이었다. 1부 마지막장 카톨릭 교리에 이슬람 교리를 섞은 이단의 장난에 놀아난 그라나다 대주교의 납상자 이야기나, 종교적 타락과 사악함으로 희생된 산 후안(San Juan de la Cruz)을 추모하는 1부 19장의 횃불 행렬 에피소드, 그리고 풍부한 설교조의 담화들을 그 예시로 들고 있다. 『돈키호테』는 희극적이고 해학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카톨릭 세계 안에 중심을 두고 있다. 산손 카라스코는 『돈키호테』를 “가장 흥미롭고 유익한 책으로 카톨릭적이 아닌 불경한 단어나 생각은 한치도 찾아볼 수 없다”(II, 3)고 평가한다. 미쳐 있던 돈키호테도 임종을 앞두고 제정신으로 돌아와 카톨릭 의식으로 고해를 행한다(II, 74). 그의 광기와 기사 편력은 카톨릭의 규범으로부터의 일시적 일탈이며 일과성의 일화로 판명되는 것이다. 도로테아가 연인 페르난도에게 주지시키는 것도 그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것이었다(I, 28). 스페인 문화 전체가 카톨리시즘을 중심 배경으로 하는 마당에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배경이 카톨리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카톨릭교회는 세속과 분리되어 단순히 정신적 구심체에 머물러 있어 왔던 것이 아니다. 사회 권력의 중추였으며 역사를 움직여온 핵심적 이데올로기였다. 특히 세르반테스의 시대에 카톨릭의 역할은 어느 시대보다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교황의 윤허를 얻어 성 이그나시오 로욜라(San Ignacio de Loyola, 1491-1556)가 창설한 예수회는 주로 스페인인들을 주축으로 반종교개혁을 주도했거니와 모로코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선교사업을 세계적으로 확장하며 스페인을 카톨릭 세계의 중심이요 교회 권력의 막부가 되게 했다. 그러므로 세르반테스의 카톨리시즘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종교적 성향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분석이어야 한다. 탁월한 스페인 문학자요 세르반티스트인 카스트로(A. Castro)는 기독교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모호한 태도를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세르반테스의 종교적 태도가 세기말적 모호성을 보이는 것으로 카톨릭 교리에 정면으로 맞서거나 또는 무조건적으로 동의하지도 않으면서 교회주의와 합리주의 정신이 복합된 미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세르반테스는 여전히 반종교개혁 정신보다는 에라스무스주의에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세르반테스는 모호한 종교적 태도를 보여준다. 분명 그는 카톨릭적이다. 그 점은 반복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변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그만한 재능의 다른 인물들과 같은 한도 내에서 그렇다. 그는 카톨릭 신도이며 독실하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의 일부요 자식이라는 교리를 내세우고 내세와는 무관하게 현세에서의 내재적 규율을 갖는 도덕을 제창한다. 카톨릭의 일부 신앙 태도나 종교적 관행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그의 기독교정신은, 보다시피, 종종, 트리엔트 종교회의보다는 에라스무스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카스트로의 입장을 정리해보면, 세르반테스는 에라스무스주의적이지만 여전히 카톨릭적이다. 또한, 엄연히 독실한 카톨릭 신도이면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요 자식’이라는 탈종교적 자연주의를 내세우며 이단적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세르반테스의 종교적 입장이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알론소(Amado Alonso)가 돈키호테를 모범적 카톨릭 신도라고 규정한 것이나 바타욘(Marcel Batallon)이 세르반테스의 에라스무스주의를 단정한 것이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보면 세르반테스에게서 카톨리시즘을 부인할 수 없는 것처럼 에라스무스주의 또한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종교혁명가가 아니라는 것이 카톨릭 질서의 수호자라는 말은 아니며 그에게서 비판적 카톨릭 정신마저 부인하게 하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그는 카톨릭 질서 안에 있는 생동하는 기독교 정신의 소유자였다. 카톨릭 교회의 수구적 질서 안에서 교회와 이념의 시대적 한계를 통찰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르반테스의 기독교 정신이 의식이나 형식보다 영혼과 정신을 연마하는 덕성의 강조에 기울어져 있다면, 그것은 에라스무스주의의 영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앙의 외형적 의식이나 허세를 배격하고 진리의 단순성을 믿은 에라스무스는 “주여, 모든 이의 가슴에 성령이 거듭나게 하소서, 그러면 이 외양의 불행들은 멎을 것입니다...주여, 이 혼돈에 질서를 가져다주소서, 당신의 성령이 서글프게도 혼탁해진 도그마의 바다 위에 퍼지게 하소서”라고 간구했다. 또한, 전투적 복음 정신이나 이적을 이룬 성인들에 대해서보다 청빈과 정신의 풍요를 가르친 사도 바울에 대한 존경심도 돋보인다. 『돈키호테』에서도 종교 의식은 물론 기독교 성인들에 대해서도 조롱 섞인 풍자가 적지 않은 것에 비하면 바울에 대한 예찬은 예외적이다. 2부 58장에서 바울은 “쉼없이 주의 밭을 가는 일꾼이요, 하늘나라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은 뭇 사람들의 박사요, 예수님이 친히 가르친 학자와 선생들의 박사”라고 숭배하고 있다. 관용의 정신 또한 세르반테스가 분명하게 언급한 기독교적 덕목이다. 카스트로는 세르반테스의 용서와 화해의 정신이 무엇보다 에라스무스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에라스무스가 『경귀집』(Apotegmas)에서 “용서는 복수보다 나은 것”이라고 적고 있듯이 산초는 돈키호테가 장례식 희극 극단과 싸우는 것을 말리며 “나으리,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기독교인답지 못한 것인 즉, 누구에게도 복수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II, 17). 「견공들의 대화」에서도 용서와 관용의 정신은 베르간사의 입을 빌어 표현된다. “의도적인 복수는 잔인한 것이요 개운치 않은 행위”라고 말이다. 요컨대 세르반테스의 인문주의 정신은 에라스무스의 종교개혁 정신과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에라스무스주의 운동이 스페인 교회에 의해 이단으로 핍박받기 시작할 무렵 세르반테스가 대학 입학 준비과정에서 에라스무스주의자 오요스(López de Hoyos)를 스승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돈키호테』의 일부가 종교재판 검열의 대상이 되어 왔던 점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발데스(Juan de Valdés)나 비베스(Luis Vives) 등 대표적 인문주의자들이 곧 에라스무스주의자들이었던 것처럼, 세르반테스의 문학 또한 에라스무스 사상의 영향 아래 얻어진 인문주의 정신의 결실이라는 것은 크게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기사소설을 비난하고 진실성 있는 문학을 추구하려는 문학적 태도에서 뿐만 아니라 정통 카톨릭 정신과 인문적 자유주의 정신을 화해시키려 했던 종교적 입장에서도 확인된다. 그렇다고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결실을 에라스무스의 사상적 궤적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스페인 근대 문학에 미친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중시한 탁월한 히스패니스트(hispanista) 중의 한 사람 바타욘은 세르반테스를 에라스무스의 이름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등장한 스페인 에라스무스 정신 최후의 상속자로 지칭하면서도, 『돈키호테』나 「견공들의 대화」는 현실과 허구, 경험적인 것과 가상의 것 사이의 경계에서 벌이는 환상의 유희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느끼게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알보르그(Alborg)는 세르반테스 시대의 다른 모든 작품들이 현실을 비추는 편린들에 불과하다면, 『돈키호테』는 ‘당대의 모든 사상과 문제, 경향, 장르, 감수성과 세계관의 멋진 종합’이라고 말했다. 바타욘이 말하는 새로운 ‘무언가’는 어떤 식으로든 알보르그가 말하는 멋진 종합’과 상통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가 에라스무스주의 정신의 상속자이면서 그것을 극복하고 초월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당대의 사상과 세계관을 종합해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저 문학이 종교나 사상과 다를 수밖에 없는 어떤 것, 논리를 뛰어넘는 상상력이나 환상 같은 것을 의미하는가? 다양한 가치관과 이념의 혼융을 가리키는 것인가? 이점에서 하츠펠트(Hatzfeld)의 해석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세르반테스를 르네상스보다 바로크와 관련지은 하츠펠트는 『돈키호테』에서 가장 정제된 반종교개혁 정신을 발견한다. 사실, 스페인 반종교개혁 정신은 양면적인 것이다. 반종교개혁을 순전히 카톨릭의 보수 반동의 이념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영혼이 없는 의식,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력이 없는 공허한 스콜라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으니 말이다. 세르반테스는 스페인 반종교개혁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 한 반종교개혁을 주도하면서 동시에 이그나시오의 경직된 사상에 비판적일 수 있었던 몬타노(Arias Montano), 루이스 데 그라나다(Fray Luis de Granada), 루이스 데 레온(Fray Luis de León) 등의 사상과 같은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라스무스적이면서도 에라스무스주의의 시대적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으며, 반종교개혁의 물굽이를 타고 가면서도 비판적 인문주의 정신을 견지할 수 있었던 데서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생명력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는 스페인의 역사와 전통을 관통하는 문화적 에토스를 검증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를테면 새로운 것에 대한 진취적 야심만큼 새로운 것에 대한 혐오나 두려움이 스페인인들의 에토스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카톨리시즘과 에라스무스주의, 반종교개혁과 바로크 예술, 그리고 근대의 개벽 과정을 관통하는 스페인 문화의 정신적 뿌리와 세르반테스의 지적 에스프리가 어쩔 수 없이 교차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르테가가 말하는 애매모호함의 문화 또는 알보르그가 말하는 세르반테스의 예술적 ‘종합’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3. 카톨리시즘의 위기와 정체성의 위기 그러나 ‘종합’이 의미하는 것은 완성이나 완결만이 아니라 이종혼합의 혼돈과 불확실성의 전조일 수 있다. 상치하고 모순되고 불화하는 이질적 요소들을 통일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의 해결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단계의 문제의 시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시대적 갈등과 모순을 종합할 수 있었던 조화로운 상상력 가운데서도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다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세르반테스는 위기시대의 작가였다. 그 무렵 스페인은 서구의 역사적 위기의 한 가운데 있었거니와 위기는 안팎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안으로는, 유태인과 이슬람인들과의 인종적 종교적 갈등과 거기에서 비롯된 순수 혈통의 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한 16-17세기 반종교개혁 시대는 카스트로의 말대로 인종과 종교에서 발단된 계급적 대립이 극도로 심화된 ‘갈등의 시대’(Edad conflictiva)였다. 또한, 밖으로는 스페인이 온 국력을 다해 지켜온 카톨릭 유일주의가 위기에 봉착해있었다. 지중해 평정을 통해 이슬람 이교 세력은 성공적으로 견제했지만, 기독교 내부로부터 일어난 균열의 조짐인 종교개혁운동과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였다. 합리주의와 종교적 다원주의가 득세해감에 따라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위협받고 카톨릭 유일절대주의의 세계관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으며, 스페인인들의 종교적 이상은 좌절을 겪게 된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우수의 기사 돈키호테의 시대착오적 편력과 절망적 모험을 통해 위기 시대의 스페인인들의 좌절과 환멸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편력기사 돈키호테의 변신은 절망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필사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던 영광의 시대가 쇠퇴해간 절박한 상황에서 전사 전통의 스페인인들이 자기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무인의 시대가 지나가 버린 돈키호테의 시대에 무인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존재 이유를 되찾는 것은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국토수복과 아메리카 정복과정을 통해 보여준 전사 정신과 카톨릭정신은 스페인인들의 포기할 수 없는 정체성의 일부였거니와, 그것은 저항하기에 벅찬 역사의 위기를 맞아 과거 회귀적 복고주의 정신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 위기의 징후와 복고적 정신은 『돈키호테』에서 뿐만 아니라 모범소설 중의 하나 「엑스트레마두라 노인의 질투」의 알레고리로 그려져 있다. 카톨릭 왕국의 맹주를 자처해온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이 극심한 의처증 노인이 쌓은 폐쇄적 성채의 붕괴로 알레고리화 되어 있거니와, 젊은 아내를 외부와 차단시키려는 노인의 필사적 노력은 위기의 역사적 현실 앞에 자기 방어를 위하려는 필사적 몸부림으로 읽혀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의 노인 카리살레스는 물려받은 재산을 탕진한 뒤 아메리카와의 대표적 무역도시였던 세비야로 나아갔고, 거기서 다시 아메리카로 가 20년만에 상당한 재산을 모아 스페인으로 돌아오게 된다. 모아놓은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줄 후손의 필요를 느낀 카리살레스는 배우자를 찾다가 68세의 나이에 열서너 살 된 레오노라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부인이 된 레오노라를 다른 뭇 남성들의 유혹에서 차단하기 위해 노인은 집을 철옹성의 감옥처럼 만들었다. 옷 만들어주는 남자의 접근까지도 막으려 레오노라와 체위가 근사한 다른 여자를 모델로 쓸 정도로 철저한 아내 관리를 하는 카리살레스이고 보면, 집의 요새화는 말할 것도 없다.
제집에 수컷이라고는 짐승 새끼 하나 들여놓지 못하게 했으니, 제아무리 분별있고 신중하다고 생각하는 분이라도 이 늙은이 펠리포(카리살레스)가 보안을 위해 어떤 단속을 더 할 수 있었겠는지 말할 수 있으면 말해 보시오. 어느 고양이도 그 집 안의 쥐새끼들을 쫓아 들어갈 수 없고, 그 안에서는 어느 수캐 짓는 소리도 들을 수 없소. 모든 것이 암컷들이라는 종자요. 낮에는 생각하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노인은 제 집의 순찰대요 보초요 제가 사랑하는 것의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였소.[...]<br />어느 수도원도 그처럼 닫힌 곳은 없으며, 어느 수녀도 그처럼 꼭 갇혀있지 못할 것이며, 어떤 사과도 그처럼 잘 지켜지지 못할 것이오. [...] 이 모든 것은, 잘 보다시피 내가 많은 값을 치르고 얻은 것을 탈없이 안전하게 향유하면서 살수 있게 하고, 그녀가 내게 어떤 공포스러운 질투심도 생각이 미치지 않도록 하게끔 하기 위한 내 자신의 노력들이었소.(106-107) 창문은 가려지고 문에는 이중 자물쇠가 채워지고 수컷이라고는 얼씬도 못하는 금남의 집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집은 운명의 침입자를 막아내지 못했다. 풍류에 능한 세비야의 한량 로아이사는 타고난 노래와 연주 솜씨를 발휘해 집을 지키던 흑인 하인의 빗장을 풀었고 몇 겹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고 마침내는 레오노라의 침실 열쇠까지 손에 넣었다. 그래도 레오노라의 완강한 거부로 목적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레오노라가 남자와 같이 누워있던 장면이 발각되자 노인에게는 복수심이 타올랐다.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카리살레스는 자신이 쌓은 성벽 안에 인간의 본성을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욕망 때문에 신의 뜻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신이 내리려는 징벌을 인간의 수고로 막을 수는 없었기에, 내 소망이 좌절로 끝나고, 내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끊어가는 독소를 만든 제조인이라는 것이 과장만은 아니오.(133)
결과적으로 그는 “누에처럼 제가 죽을 집을 스스로 지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엑스트레마두라 노인의 질투」는 한 노인과 나이어린 여자 사이의 불합리한 결혼 풍속에 대한 풍자 이상의 무언가 스페인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다. 즉, 로마 치하의 기원 2세기 무렵 이베리아 반도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 서고트 왕국을 거치고 아랍 치하에서 8세기 동안 국토수복을 위한 대 회교 성전을 치르면서 건설해온 카톨릭 왕국의 견고한 철옹성으로도 종교혁명과 카톨릭의 쇠퇴를 막을 수 없었던 스페인인들의 역사적 절망감을 빗대고 있는 것이다. 카리살레스가 스페인 내륙 엑스트레마두라에서 남쪽 세비야로 진출한 국토수복 전쟁의 전사인 동시에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 아메리카의 풍운아로 스페인 전사의 일생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그의 좌절은 스페인 전사의 영웅주의 전통의 좌절이자 카톨리시즘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변화를 요구하는 역사의 흐름 앞에 카톨릭 교회는 갈수록 폐쇄적이 되고 폐쇄적 성채는 균열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카리살레스가 레오노라를 지키기 위해 몇 겹의 빗장을 걸어잠근 집도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표출 앞에 무력했던 것처럼 말이다. 결과적으로, 카리살레스는 레오노라를 은폐하고 기만하려 했지만 바로 자신의 모든 노력에 의해 스스로 기만당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바로크적 환멸과 우수가 배어 있다. 바로크는 현실의 모순을 리얼리스트들처럼 지우려하지도 않고, 낭만주의자들처럼 거부하지도 않으며, 다만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인다. 카리살레스의 좌절이 바로크적 우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스페인 식민제국과 카톨리시즘의 붕괴 위기를 우화적으로 읽어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늙은 카리살레스가 자기 과오를 인정하는 것처럼 노쇠하고 낡은 스페인 제국의 역사가 퇴장의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제국의 몰락과 교회의 균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유일 이념으로 지켜져온 스페인인들의 세계관과의 동요는 물론 자기 정체성의 위기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리살레스가 쌓은 성채의 붕괴는 카톨릭 스페인의 정치적 몰락은 물론 자기 정체성의 역사적 위기에 대한 명백한 알레고리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다. 4. 『돈키호테』와 「유리 학사」
정체성의 위기는 세르반테스의 소설에서 변신의 주제로도 나타난다. 『돈키호테』의 서사적 초점도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변신에서 찾을 수 있다. 루치아노나 아풀레이우스가 『황금 나귀』를 통해 전승시켰고 세르반테스의 시대에 널리 퍼졌던 변신(metamorfosis)은 『돈키호테』는 물론 「유리 학사」, 「사기 결혼과 견공들의 대화」와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와 같은 새타이어적인 소설에 흔히 쓰이는 기법이었다. 변신은 사회에 대한 풍자나, 사물을 새롭게 통찰할 수 있는 혁신적 퍼스펙티브를 찾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에게 있어서 그것은 무엇보다 정체성의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체성 모색의 과정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유리 학사」에서도 토마스의 사물에 대한 분별과 예지 그리고 현실에 대한 초인적 통찰력은 스스로를 유리 인간으로 보는 미치광이로의 변신을 통해 가능해지고 있다. 토마스의 변신은 이탈리아 순례여행이 끝나 살라만카에 돌아올 무렵, 말하자면 그의 지적 성장이 정점에 이를 무렵이었다. 마침 그곳에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 다녀왔다는 한 무당 여인이 있어 뭇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토마스도 여행 견문에 있어 자기와 견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녀를 직접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토마스에게 한 눈에 반했고, 유혹을 거부하는 그의 마음을 제 뜻대로 움직일 목적으로 묘약을 지어주었다. 그 약을 먹고 난 토마스는 실성했고, 자신의 몸이 유리로 되어 있어 함부로 다룰 수 없다는 미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광기에도 불구하고 온통 기지와 예지에 찬 신통한 경구들을 토해냈다. 그는 유리로 만들어진 박식한 사람 ‘유리학사’가 된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또 다른 반전을 이룬다. 성(聖) 헤로니모 교단의 한 수사로부터 유리광(狂) 병을 치료받은 토마스는 정상인의 생활로 돌아오지만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유리 학사, 즉 미쳐 있을 때의 토마스로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피해 디에고와 결별하고 떠나왔던 플랑드르로 다시 돌아간다. 이점에서 「유리 학사」의 테마가 당시 널리 유행했을 뿐만 아니라 세르반테스에게 주요한 문제의식 중의 하나였던 ‘문무논쟁’으로 간주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유리 학사」의 주제를 전적으로 문무논쟁에 한정시킬 수는 없다. 토마스에게서 문의 취약성이 유리의 유약성으로 비유되고 그의 군 복귀로 무의 우위가 확인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문무논쟁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토마스의 무로 이룬 성공, 즉 “죽어 남긴 사려 깊고 용기 있는 무인으로의 명예” 또한 그의 ‘덕’으로 지키고 쌓아온 문의 좌절을 상쇄시켜줄 것 같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리학사」의 문무논쟁이 소설의 결말과 달리 반어적으로 읽힐 수 있는 것임은 『돈키호테』의 경우와 다를 바 없다. 보르헤스가 탁월한 상상력으로 「돈키호테의 저자 피에르 메나르」에서 우리에게 시사해준 것처럼 무의 승리를 구가한 돈키호테의 담화는(1부 28장) 이미 20세기의 메나르식 독서로는 무의 승리로 도치되고 있는 것이다. 문무논쟁과는 다른 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토마스를 통해 풍자되고 있는 것이 지적 오만이 빚는 어리석음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디오게네스에 근사한 인물이다. 디오게네스로 대변되는 냉소주의 전통은 인간의 지적 욕구에서 모든 미혹과 어리석음이 비롯되며, 특히 삶을 연극의 무대로 환원시켜 배우의 역할을 다하는 것으로 인간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며, 인간이 명예나 쾌락의 소유욕에 사로잡혀 그 노예가 되고 그 때문에 원시 상태에 인간이 누릴 수 있었던 진실, 정직, 단순성이나 영혼의 자율성을 박탈당하고 개인의 자유와 자기완성을 방해받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포르치오네(Alban K. Forcione)는 세르반테스의 태도를 에라스무스 정신과 연결지으면서 디오게네스의 비판적이고 자유주의적 사유 태도와 기독교의 이타적이고 공민적 사유정신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이제 더 이상 ‘문재(文才)는 가치가 없으므로, 완력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위해’ 플랑드르로 떠나게 되었고 마침내 문명으로 불멸을 구하는 구도의 길을 시작했던 그곳에서 무인으로 불멸을 얻게 된 토마스는 분별 있고 용감한 군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된다는 「유리학사」의 결말이 바로 그것을 입증해준다. 여기서 세르반테스는 사회를 비판하고 교정시키는데 있어 비인간적 냉소주의보다 인도주의적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는 원칙을 에라스무스와 공유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똑같은 결말에 대해서도 전혀 입장을 달리하는 해석이 가능하다. 『돈키호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리학사」의 의미도 구조적으로 열려있음이 분명하다. 에라스무스적인 만큼 반종교개혁의 흔적도 만만치 않다. 토마스의 광기를 지식에 대한 욕망이 초래한 타락이요 원죄에 의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읽는다면, 주인공이 동료 발디비아와 동반하는 여생을 통해 무예로 영생의 길을 얻었다는 「유리 학사」의 결말은 바로크적 내세지향주의가 깔려 있음을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 “무모한 아첨꾼들의 욕심을 키워주고 움츠린 덕망가들의 설자리를 없애는, 몰염치한 도박꾼들을 부추기면서 겸양 있고 분별 있는 자들을 굶주려 죽게 하는” 궁정 현실에 대한 토마스의 환멸도 바로크적인 것이요, 주인공의 기나긴 이태리 여행은 종교적 순례인 동시에 종교를 도덕으로 전화시키는 반종교개혁 시대의 정신적 모험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의 상충을 해결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보수반동적 스콜라주의의 부활이면서 동시에 스콜라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스페인 반종교개혁의 이중성의 결과인 것인가? 그 역사적 이중성을 근대적 의미로 해석해낼 수는 없는 것인가? 『돈키호테』의 경우뿐만 아니라 「유리 학사」에서도 세르반테스의 의도야 여하튼 텍스트의 의미는 무한히 반전될 수 있고 확장될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단서 중의 하나는 토마스의 광기에 있다. 서사의 전개나 의미의 반전이 유효하게 진행되는 것은 토마스의 이중적 정체에 기인한다. 때로는 정상적이고 때로는 광적일 수 있다는 것이 토마스를 유리 학사로 만든 것이다. 이점에서 「유리학사」는 『돈키호테』와 구조적으로 근사하다. 광인 토마스는 일상에서 소외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일상의 인간을 초월한다. 미친 토마스가 범부들에게 쏟아내는 재기는 광기라기보다는 범인 위에 군림하는 예지이다. 그가 다양한 직업들에 대해 토해내는 독설은 가히 범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토마스의 광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돈키호테의 광기를 천재성과 상통하는 것으로 이해시킨 우아르테 산 후안(Huarte de San Juan)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 근대의 지적 우수를 보여준다. 그 지적 우수는 광기인 동시에 통찰력이라는 데서 비롯된다. 산 후안에 의하면 광기와 천재성은 인체의 생화학적 불균형 상태를 의미한다는 데서 일치한다. 물론 『유리 학사』에서 그의 광기는 치유될 대상이고, 종국에는 치유를 통해 일상 생활과 공민적 삶으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점에서 세르반테스에 의해 여전히 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돈키호테에 대한 것에는 못 미칠지언정 토마스도 연민의 대상이다. 일상적인 것을 멋대로 착각하고 멋대로의 환상에 젖어 낡은 갑옷과 투구를 쓰고 기사인양 편력하는 편집증적 돈키호테에게서 인간적 연민과 동정을 느끼는 것처럼 토마스가 거리의 범부와 소년들에게 쏟아내는 재담과 기지에도 불구하고, 제 몸을 유리라고 말해 뭇 소년들의 돌팔매질을 당하며, 제 몸이 깨질까 두려워 손으로 물을 떠 마시고, 처마가 내려앉지 않을까 하는 기우에 길 한 가운데로만 다니며, 유리처럼 밀집을 뒤집어쓰고 자는 토마스에게서, 그리고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미치광이로 쫓기는 주인공에게서 돈키호테에 못지 않은 우수와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그가 광인이기 이전에 한 인간임을 의미한다. 주인공의 광태에 대한 독자의 단호한 배격이 아니라 그와의 동일시 가능성에 대한 묵시적 동의를 의미한다. 그것은 진실이 평상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광기를 통해 더 잘 확인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동의인 것이다. 여기서 이성적 주체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성과 광기 사이에서 유리학사와 돈키호테는 정체성을 시험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스페인인들이 인지한 스페인인들 자신의 정체성 위기를 짚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돈키호테』나 「유리학사」의 지적 분열은 이상과 현실, 규범과 실제 사이의 극단적 괴리를 경험하던 시대, 반종교개혁의 주도 세력인 예수교회마저 카톨릭적 아이디얼리즘의 양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던 위기의 시대를 반영한다. 한편으로 절대적 신심과 신앙의 실천적 강령이 다른 한편으로 종교 권력의 타락과 세속화가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만이 아니었다. 예수교회의 절대적 신앙과 화려한 권위는 스페인 사회에 만연된 궁핍하고 참담했던 세속적 현실과는 너무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 종교적 이상과 세속적 현실 사이에서 스페인인들은 돈키호테나 유리학사처럼 환상과 정체성의 혼돈을 체험할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인들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 귀결이었다. 돈키호테나 토마스가 현실과 이상의 극단적 괴리를 체험하는 이중적 실존상황의 희극배우였다면 스페인인들 또한 그 이중적 현실을 박진감 넘치게 체험한 배우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배우들이야말로 언제나 무대 밖의 자신, 진정한 ‘나’의 정체성을 추궁 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돈키호테나 유리학사는 바로 스페인인들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세르반테스의 문제의식을 대변해주는 인물들인 것이다. 5. 바로크적 에토스
『돈키호테』와 「유리학사」의 특징은 이성과 비이성 사이의 갈등과 긴장에서 비롯된 서사적 역동성에 있다. 그러한 역동성의 미학은 「사기결혼과 견공들의 대화」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만하려는 자가 기만당하는 배반과 반전의 서사는 「사기 결혼」에서도 되풀이된다. 소위 캄푸사노와 학사 페랄타의 재회에서 시작되는 「사기 결혼」은 결혼한 캄푸사노가 친구 페랄타에게 에스테파니아라는 여자와의 사기 결혼 과정과 그녀에게서 얻은 매독으로 40일간의 치료를 받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여자에게 기만당하는 것은 캄푸사노였다. 온 몸을 가리고 반지 낀 하얀 손의 일부만으로 그를 유혹한 에스테파니아에 이끌려 그녀가 주인이라고 속인 집에 들어가 결혼식을 올린다. 진짜 집주인이 돌아오자 그녀는 캄푸사노의 금목걸이를 훔쳐 달아난다. 속은 것은 분명 남자이다. 그러나 뒤이은 캄푸사노의 고백은 상황을 반전시킨다. 에스테파니아가 훔쳐간 금목걸이는 가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은 원점에서 다시 반전을 일으킨다. 먼저 속임수를 시작한 것은 캄푸사노였으니 말이다. 그는 “속이려다가 속임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속인 에스테파니아도 속임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반전의 반전, 역설, 상황의 교차가 일으키는 불안정성이야말로 바로크 문학의 미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르네상스기의 균형과 조화 그리고 명료의 미학에 대해 불균형과 부조화 그리고 심미적 역동성을 생산한다. 의미의 반전과 역동성은 이어지는 「견공들의 대화」에서 극대화된다. 캄푸사노는 그를 배신한 에스테파니아로부터 얻은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원에 입원하고 있던 중 어느 날 밤 병원을 지키는 두 마리 개가 침대 밑에서 자신들의 인생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적어두었는데, 잠시 오수에 들면서 친구 페랄타에게 흥밋거리로 읽어 볼 것을 권유한다. 페랄타는 그것이 믿을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라고 반박하면서도 호기심에 끌려 읽는다. 이야기는 베르간사 견공의 자전적 고백으로 시작된다. 그의 체험은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요약된다. 세비야의 푸줏간에서 백정의 정부에게 고기를 날라주는 심부름 개로 지내던 중, 정부의 불륜을 방해하다 죽음의 위협을 느껴 피신하고는 목동들과 만나며, 그 양치기들의 횡령에 언제나 자신이 희생양이 되는 데 대한 불만을 느껴 도망쳐 나와서는 세비야 상인의 아들을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했다. 학부모들의 항의로 학교에서 쫓겨나와 만나게 되는 주인은 순사였으며, 무고한 외국인을 갈취하는 순사와 헤어져서는 서커스단의 곡예수로 일하게 되고, 거기서 한 마녀를 따라 집에 갔다가 그의 출생 배경에 대해 듣게 되며, 최면에 취한 그녀의 추악한 모습을 피해 도망친 곳은 집시들 공동체였으며, 마침내 시피온을 따라 들어오게 된 곳이 바로 그 병원이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최면에 빠진 언어와 현실 사이의 환상적 공간에서 생겨난다. 학사는 개들의 대화를 들었다는 소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베르간사도 개에 불과한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여보게 시피온, 그대가 말하는 것이 들리고 내가 말하는 것도 분명한데, 나는 그걸 믿을 수가 없네. 우리들이 말한다는 것은 자연의 한계를 지나치는 것일 테니 말이네.” <br /><br /> “맞는 말일세, 베르간사. 게다가 우리가 말할 뿐만 아니라, 이성을 가진 것처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기적일 것 같네. 들짐승과 인간이 다른 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이성적이요, 짐승이 비이성적이라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일세.”(299)
「사기 결혼」과 「견공들의 대화」에서 의미의 혼란이 언어의 환상과 의미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말로 이성과 비이성 사이의 논리적 차별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이성을 지녔다는 것이요 언어를 통해 이성적으로 현실을 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그 인과적 관계를 혼란에 빠트린다. 캄푸사노는 견공들이 나눈 대화가 “개들이라기보다는 장부들에 의해 나누어진 이야기 같아서, 내가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르게 나도 어쩔 수 없이 내가 꿈꾸는 것이 아니며 개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던 것이다.(294)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허구에 대한 메타 담화는 누누이 되풀이된다. 마침내 “학사가 「대화」의 읽기를 마친 것과 소위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완전히 동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학사는 소설의 진실 여부에 대한 논쟁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대화가 꾸민 것이요 전혀 일어난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너무 구성이 잘되어서 소위는 두 번째 이야기를 계속해도 되겠네.”<br />“의견이 그렇다면, 내가 기운을 얻겠네, 그리고 개들이 말을 했는지 아닌지 그대와 따지지 않고 그걸 써보도록 하겠네.”(356)
견공들의 대화가 허구 속의 허구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것이 문학인 한 허구라기보다 진실임을 가장하고 주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든 것은 서사적 실험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기사소설의 천재적 패러디였던 『돈키호테』가 지금까지 씌어진 최상의 기사소설이었던 것처럼, 『모범소설』은 이전의 스페인과 유럽의 소소설(novella)들에 대해 비판적이고 교정적이고 패러디적이며, 획기적으로 혁신적인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프로그램인 동시에 그때까지 씌어진 최고의 소설이요 모든 언어와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빼어난 작품이다. 그 획기적 혁신은 심지어 다른 장르(철학적, 교육적, 희곡적, 연극적, 시적, 구비적 등)의 모든 소설적 소재를 이용하고, 독창성과 근대성을 추구하면서 적절히 소설 형식으로 현재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소식,’ 즉 어떤 사건의 새로운 국면이라는 소설(Novella)의 원 의미에다가 세르반테스는 『모범소설』을 통해 훨씬 혁신적인 의미를 추가한다. 즉, 독창성, 내용과 의사소통 및 표현 형식의 혁신 말이다. “나는 카스티야어로 최초의 소설을 썼노라”는 그의 확신에 대해 다른 의문이 있겠는가? 창작의 독창성을 추구하는 실험이기는 하지만 사기 결혼의 기만이 누구에게도 귀책될 수 없는 불안정한 결말, 마녀의 질투로 인간이 개로 변신해 태어났다는 신비에 쌓인 베르간사의 출생배경, 그리고 그 불안정한 결말이나 말하는 개들의 신비에 대해 더 이상 진위의 논쟁을 접어둔 데서 비롯된 불확실성 앞에서 겪는 당혹감은 분명 바로크의 미적 체험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미적 체험은 세르반테스의 작품들이 놓여진 역사적 상황의 지적 체험과 분리될 수 없다. 아무리 창작의 실험과 독창성과 혁신을 강조하더라도 그 실험과 혁신에 내포된 역사적 맥락의 가치가 폄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견공들의 대화」가 현실과 환상의 불확실한 교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의 이름으로 보장받은 영혼의 불멸을 박탈당한 스페인인들의 우수를 반영한다. 그 지적 우수는 『돈키호테』가 보여주는 그것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기의 시대에 드러난 스페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는 위기와 불확실성의 시대에 앞으로 나아가기보다는 더욱 과거에 집착하는 복고적 정신이나 중세의 봉건적 스페인에 대한 향수가 한 자리를 잡고 있다. 비이성적이고 신비주의적 상상에 매달리는 바로크적 에토스도 그 한 자리로 꼽힐 수 있다. 「사기결혼과 견공들의 대화」가 보여준 이성과 비이성의 긴장은 기독교 이성이 자연주의 이성으로 대체되고 불완전하게 봉건적이었던 중세를 청산하고 근대를 맞이하게 된 역사적 현실에 대해 반응하는 스페인인들의 바로크적 에토스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6. 근대의 우수
그러나 바로크적 에토스는 환원한다면 바로 근대의 징후 중의 하나이다. 유리학사도, 엑스트레마두라의 노인도 심지어 견공들조차도 신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섭리의 세계에 대해 비이성의 세계를 대체시킨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신의 섭리에 근거한 확고부동의 질서가 아니라 혼돈스럽고 동요하기 쉬운 불안정한 무대 위에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형이상학적 회의와 존재의 불안 또는 인간 스스로의 사유 능력의 한계를 짚고 있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그것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적 회의주의와 견주어 생각할 수 있다. 토마스가 스스로를 유리 인간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의 접근을 기피하는 것이나, 카리살레스가 쌓은 상상의 성벽이 자연의 법칙 앞에 무력화되는 것이나, 견공들로 하여금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도용하게 하는 것이나 기존의 인식 질서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암시한다.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임의적이고 주관적 사유에 갇혀있던 것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절대적 진실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신을 인간의 지적 능력 안에 가두고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세상에 밝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광기에 의해서이다. 광기가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기독교적 전통의 통일적 질서가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근대인의 우수가 드리워진다. 『돈키호테』와 모범소설들은 바로 그 근대의 지적 우수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토대요 목적론적 귀착지로서의 기독교 신앙이 회의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 실존적 불안의 원인일 수 있다. 루카치는 『돈키호테』를 가리켜 기독교의 신이 인간 곁의 세계를 떠나기 시작하는 문턱의 작품이라고 지적했다. 『모범소설』의 주인공들 또한 돈키호테에 못지 않게 인식체계의 혼돈과 형이상학적 질서의 동요를 보여주는 것이요 기독교와의 불가피한 불화를 시사하는 것이다. 지적 신뢰감과 회의주의, 종교적 믿음과 실존적 불안이 뒤엉킨 것이 문학과 사상의 특질을 이룬 세르반테스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돈키호테』나 모범소설들이 보여준 비이성의 이성이란 바울의 어리석음에서와 같은 단순한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주장하면서 현학을 배격하고 비이성적 힘의 생명력을 강조한 에라스무스나, 철학자들보다 더 철학적 요청에 어울리는 참다운 습관과 말의 태도를 보이는 ‘시골 촌부들’에 대한 몽테뉴의 예찬이나, 리어왕을 호된 시련 끝에 인간의 선한 본질에 대한 구원의 발견에 이르게 한 셰익스피어의 바보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확산된 사유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동기와 창조 정신은 근대적 사유 태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근대적 사유는 종교적 가치관과 현실 사이의 불화를 초래했고 우울증과 같은 사회 심리적 변화 징후의 근원이 되었다. 돈키호테는 물론 자신을 유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자처하는 유리 학사도 당대 유행하던 우울증을 앓고 있는 보편적 인물 유형이었다. 그의 우울증은 영혼을 담기 지탱되어야 할 육체가 깨지지 않을까 하는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의 권위에 이미 균열이 생기고 종교적 회의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 믿음이 사회 질서의 확고한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진원으로 동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유리 인간 주제는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유럽에 보편적으로 유포되어 있었다. 그것은 당시 유럽인들이 겪는 우울증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리병 우울증을 다룬 최초의 저술은 1561년 화란인 의사 레비너스(Levinus Lemnis)에 의해서였다. 세르반테스의 「유리 학사」도 17세기 전 유럽에 광범위한 반향을 일으켜, 많은 모방 작품들을 발생시켰다. 중요한 것은 유리 병 우울증이 나타나게 된 형이상학적 배경이다. 그것은 기독교적 전통의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기 근대 유럽에 확산된 우울증, 조바심과 여타의 정신적 질병은, 마음의 병이라는 것이 정신의 경험적 지식의 영역(의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영혼의 완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인간 행동의 심리학적 설명에 싹트기 시작한 관심을 거부했던 신학자들이 부추긴 죄의식과 무력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 ‘유리 인간’이 당시 유행이었든, 문학적 창작이었든, 또는 정말 신경증적 창조물이든, 그 미혹은 어느 종교나 사회 상황이 지배하는가에 상관없이 서유럽 전체에 나타난, 죽음와 죽음 뒤의 삶에 대한 종교적 염려에서 기인했던 것 같다.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강박관념이 죽는다는 것과 죽어 그가 나온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데 대한 두려움을 가리켰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믿는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에게는 구약 문학의 흙으로 빚은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져 영혼을 풀어놓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일으켰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은 그들의 존재를 일종의 활동하는 죽음으로 잘못 생각했는데, 그중 누군가가 그들의 딜레마에서 히브리 종말론(육체의 죽음, 삶의 종말)과 요한 계시록의 종말론(심판의 날에 육체의 부활)의 혼동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근대의 위기 징후는 『돈키호테』의 광기나 유리 학사의 공연한 기우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나이어린 아내를 지키기 위해 온갖 잠금 장치를 다한 엑스트레마두라 노인은 인간 본성의 자연적 힘을 막지는 못했다. 이성과 스콜라적 논리의 잠금 장치로 폐쇄된 그의 집은 본능적 감성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견공들의 대화」는 인문주의적 사유의 한계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마녀의 아들로 다른 마녀의 시기를 받아 개로 태어났다는 베르간사의 출생 배경도 의문이기는 하지만, 개를 통해 인간의 현실을 해석하고 비판하게 한 것은 인간의 이성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근대란 무엇인가. 그것은 중세 또는 고대와 비교되어 정의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근대의 패러다임 중의 하나는 모더니티, 즉 근대의 틀을 구획해내려는 열망이라고 할만큼 근대는 불완전하게 정의된 개념이다. 그 불완전한 정의가 내포하고 있는 근대의 인식론적 패러다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근대 과학철학의 근본 주제 중의 하나는 논리주의와 역사주의의 구별이라고 일컬어진다. 형식논리의 완결성에 의존하는 논리주의에 반해 역사주의는 과학 일반과 특정과학을 동시에 평가할 수단으로 보편 타당한 방법론적 인식의 규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근대는 주관성과 객관성이 혼동되는 시대이다. 코놀리의 말을 빌리면 “진리와 진실의 합법성 자체가 위협당하는 은밀한 주장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한 혼돈의 시대는 유럽을 카톨릭적 가치 질서와 프로테스탄트적 가치 질서로 양분시킨 30년 전쟁(1618-1648)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강화 조약은 신교의 공인으로 기독교의 다원주의를 확립시켰다. 혼돈의 시대는 17세기를 풍미한 스페인식 백가쟁명에서도 예고되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쇠락해가는 조국을 구하겠노라는 미몽 아래 비현실적이고 공허한 묘책고안자(arbitrista)들이 수없이 들끓고 정신나간 망상들이 뒤범벅을 이루었던 17세기 스페인이야말로 ‘모든 진리와 진실의 합법성 자체가 위협 당하는 은밀한 주장의 시대’의 출발을 웅변해주는 것인지 모른다. 물론 그러한 혼돈의 시대의 역사는 유럽 정치 역학의 구조적 변화에 기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서구 문명과 아메리카 인디언 문명의 혼혈 통합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가치변화와 문화적 절충주의의 출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카톨리시즘의 중심을 이루어 온 스페인인들에게 역사적 변화의 상징적 결과는 정체성 혼란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르반테스가 보여주는 것은 객관성과 주관성이 흔들리는 혼돈과 위기의 시대의 도래였다. 종교적 양심이 분열되고 절대적 섭리가 흔들리는 가운데 스페인인들의 주체적 자아가 분열과 동요를 겪을 수밖에 없었음은 물론이다. 돈키호테에서 느껴지는 지적 우수는 기독교의 균열이 심화되어 가는 현실에서 존재의 좌표가 흔들리는 스페인인들의 고독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회의하는 데카르트 식의 근대적 사유와 상통하는 것이다. 요컨대, 세르반테스가 제기한 스페인인들의 정체성 위기는 근대성의 위기라는 말로 환원될 수도 있는 것이다. 7. 미소네이스모(Misoneísmo)의 패러독스
어떤 사조적 배경이나 역사적 상황에서 잉태된 것이든 예술정신의 고차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적 경구를 빌리지 않더라도 역사적 구체성만큼 시적 보편성을 여하히 창출해내는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불후성은 에라스무스주의를 넘어 바로크 이데올로기를 넘어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 인간 정신을 담고 있다는 데 있다. 세르반테스는 단순히 애국주의자가 아닌 보편주의 정신의 소유자이며, 단순히 반종교개혁 시대의 카톨릭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 시대를 넘는 자유로운 비판적 사유능력의 소유자였다. 그것이 『돈키호테』나 『모범소설』에서 시대를 꿰뚫어 근대를 예고하는 지성의 밑바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고정 불변의 도그마에 매몰되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역동적 정신을 의미한다. 소설의 의미도 새롭다는 말에서 기원한다. 세르반테스가 스스로 스페인 최초의 소설가임을 자처할 때도 새로운 시대맞이라는 뜻을 염두에 두었을 듯하다. 소설로 역사의 변화를 타고가며 동시에 변화하는 역사를 예언할 수 있으리라는 자부심의 표현이었을 듯도 하다. 그러나 그 모든 쇄신과 진취적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에 담겨 있는 또 하나의 정신적 단층이 새 것에 대한 혐오와 저항인 미소네이스모와 복고주의 정신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사실, 세르반테스의 문학은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새로운 기독교 문화와 이미 소진해가는 기독교 문화 사이의 갈등에서 태어난 것이다. 카살두에로(Joaquín Casalduero)에 의하면 『돈키호테』는 스페인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과거의 신앙과 새로운 의지, 고딕 시대의 편력 기사와 왕실 기사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요컨대 세르반테스의 예술적 가치는 새 것과 낡은 것의 만남 사이에서 초래된 갈등과 긴장을 표현할 미적 양식을 찾아냈다는 데 있다. 바로크 시대의 정신적 긴장에서 드러나는 전통적 에토스 미소네이스모를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것은 새 것과 낡은 것의 단순한 조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극단적 부조화와 대립을 통해 새로운 예술적 지평을 여는 것을 의미한다. 새 것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낡은 것을, 이성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이성적인 것을, 현실에 대해서는 극단적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대립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과 비현실, 이상과 실제 사이의 극단적 진동을 체험하는 가운데서 세르반테스의 상상력은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돈키호테와 산초의 만남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들은 극단적 이상주의자들인 동시에 극단적 현실주의자들일 수도 있는 정신적 역동성과 긴장감을 웅변해준다. 또한 돈키호테에게는 “생각하는 것, 보는 것이나 상상하는 것은 모두 사실처럼 보였고 그가 읽은 바대로 일어나는 것처럼 여겨졌으니”(I, 2), 상상력이 오히려 현실 이상의 힘을 갖게 되는 불확실하면서도 역동적인 세계가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유리학사도, 질투심 많은 엑스트레마두라의 노인도 양극단 사이를 진동하는 역동적 예술 정신의 피조물들임은 물론이다. 경험과 상식의 궤를 언제든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의 결실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예술적 결정은 정신적 공허를 담고 있다. 극단 사이를 진동하는 역동적 미학은 ‘모순의 일체화’(Coincidentia oppositorum)라는 의미를 비우는 언어의 수사 양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비이성과 환상, 공허와 환멸과 같은 비본질적 세계를 지어내는 바로크 미학의 근간이다. 모순의 일체화는 기이하고, 변덕스럽고, 과장되고, 허구적이며, 감각적이고, 표피적이며, 스펙터클하며, 의식적이고, 형식지향적이며 매너리즘적인 예술을 불가피하게 한다. 과장된 극화와 공허한 형식주의는 창과 방패의 관계처럼 상극적인 현실과 비현실을 조화시키려는 상상력의 모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 이성의 세계와 비이성적 상상의 세계 사이의 극단적 거리만큼 모순의 미학에 진동하는 정신적 공허의 크기는 비례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실험은 채워질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갈증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한 갈증은 정신적인 것만은 아니다. 갈증의 근원은 세르반테스가 살아온 사회의 부조리 속에 자리잡고 있다. 갈증의 표현을 강요한 모순의 예술은 부조리한 사회의 그럴듯한 거울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명예에 집착하고 내실을 결여한 스페인 체통문화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벤토스(Rubert De Ventós)도 스페인 문화의 특질을 바로크적 에토스로 설명하면서 그 특징을 명예와 체통 중시에서 찾고 있다.
특질적으로, 스페인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크적이며 카톨릭적이다. 한가지 경우는 스페인인들의 명예이다. 명예를 갖는 것은 개별자의 독립적 내면을 갖지 않는 것이다. 존재 전부가 ‘남들이 어떻게 말할까,’ 위엄, 품위, 이미지, 외양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겉모습의 어떤 손상도 내적 위기를 수반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밖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며,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고 명예만 있기 때문이며, 책무는 없고 내면의 수치심만 있기 때문이다. 이 허구적 문화의식과 이율배반적 에토스가 유태인과 무어인들과의 인종적 대립과 종교적 갈등 속에서 배양되고 조물된 것임은 물론이다. 대립과 갈등의 무대에서 카톨리시즘은 스페인인들의 문화적 허위의식을 지탱해준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이었다. 그것은 위엄인 동시에 허영이었다. 카톨리시즘은 스페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허와 실 양면적 가치를 보여준다. 스페인 카톨릭 정신의 본질이, 베니그노 후아네스(Benigno Juanes)가 지적했듯이, 각 개인 안에 그리스도가 육화되어 있다는 믿음의 전통, 즉 인간이 단순히 육체와 영혼의 혼합물이 아니라 이미 신이 깃들어 있는 신성화된 육체라는 믿음의 전통이라면, 그 육화된 신성이야말로 스스로를 현실주의의 굴레에 얽매이게 하는 것인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고 쇄신해가는 초월적 구원의 정신을 함께 담고 있는 이중적 관념임에 틀림없다. 스페인 역사는 기독교의 세속화와 초자연화 사이의 부단한 진동과 각축의 장이었다. 여기서 리얼리즘과 아이디얼리즘이 간단없이 교차해온 스페인 역사의 밑바탕을 볼 수 있게 된다. 스페인 카톨리시즘은 때로는 스페인인들의 꿈과 이상이요 신념의 보루였으며, 때로는 복고적이고 수구적 이념이었다. 이베리아반도를 수복하고 이슬람을 정복할 무렵 어느 시대보다 진취적이었던 기독교 성전의 역사가 있었는가 하면, 반종교개혁과 종교재판의 보수적 이념의 역사도 되새겨 볼 수 있다. 카톨릭 정신의 이중성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부단한 진동의 역사 속에 만들어진 스페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또한, 카톨리시즘의 이중성의 역사에서 세르반테스의 문학정신의 뿌리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세르반테스가 보여주는 것은 스페인 민족의 동일성이나 문화적 정체성이 카톨리시즘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넘어 스페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이념에 의해서든 강제력에 의해서든 스페인은 오랜 세월 동안 이교도들을 제압하고 카톨릭의 패권을 확립하고 역사적 정체성을 유지해왔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군사력과 국제적 정치력도 쇠퇴하고 카톨리시즘의 절대주의가 위협받기 시작할 무렵, 스페인인들이 그들의 정신을 지배해왔던 카톨리시즘은 무엇이고, 스페인의 민족적 아이덴터티는 무엇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세르반테스의 문학적 상상력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과거의 역사적 정체성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회의인 동시에 위기의 시대에 새로이 정립되어야 할 새로운 의미의 자기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그것은 카톨리시즘의 위축을 전향적으로 수용하는 시도이기도 했던 트리엔트공의회 이후의 바로크 정신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인문주의정신은 물론 반종교개혁의 시대 정신을 비판적으로 내면화할 예술적 역량을 지녔던 세르반테스가 보여준 것은 한 편력기사의 복고주의적 향수뿐만 아니라 다가오는 시대의 근대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카톨릭은 스페인의 도그마에서 탈피하여 유럽화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고, 스페인의 역사는 유럽과 아프리카, 카톨릭과 회교와 유태교에 더해 프로테스탄티즘과 공존하는 역사가 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그 새로운 역사의 틀 안에서 복고적 미망에 의지해 살아온 스페인인들이 새로운 자기 정체성 모색을 시도해야 했던 것은 역사적 필연이었다. 사실, 정체성이란 항구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시간과 역사적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고 만들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그 역동적이고 가변적인 정체성은 어떤 본질이라기보다 역사의 힘과 정신의 변전과정에서 만들어지고 발견되는 것이다. 스페인 카톨리시즘은 그것을 지키려는 힘만큼 그것을 극복하려는 힘에 의해서도 역사적 변화를 겪어 왔다. 카톨리시즘은 스페인 문화를 폐쇄적으로 만들어 온 뛰어넘을 수 있는 한계요 굴레였던 것만은 아니다. 세르반테스의 비판적 인문주의 정신은 스페인 카톨리시즘의 자기극복과 쇄신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세르반테스의 예술정신에 숨어 있는 한가지 의미는 스페인적 에토스나 국지성을 뛰어넘는 보편정신이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을 극복할 수 있는 한가지 단서가 된다. 스페인인들이 매달리고 취해 있던 복고주의와 카톨리시즘의 전통을 통해 역사적 현재의 의미와 미래의 가능성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복고주의와 미소네이스모는 그것이 극단적일 때 오히려 통찰과 예지의 지적 에스프리를 발산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조차 조롱과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는 철저하고 극단적인 자기반성을 통해 돈키호테가 과거 기사세계의 미망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미소네이스모를 통해 미소네이스모를 극복하는 세르반테스 문학의 패러독스를 확인하게 된다. 이 점에서 세르반테스는 미래의 우나무노와 교감한다. 돈키호테를 불멸을 추구하는 스페인인들의 이상으로 추앙했던 우나무노에게도 미소네이스모의 전통은 물론 미소네이스모에 용해되지 않고 극복해낼 수 있는 세르반테스의 역설적 정신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 이래 탈카톨릭화 시대의 스페인인들의 문화적 정체성의 일단을 웅변해주는 너무도 스페인적인 카톨릭 정신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고야(F. Goya)의 그림을 두고 평가한 스페인 문화의 특징, 즉 반문화적인 문화의 한 단편을 확인시켜주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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