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 푸념 -
비단 거미
촘촘한 그물코
바람도 떨고 있다
날카로운 눈빛 번뜩이며
숨 삭이고 밤낮을 기다린다
한 뼘 하늘이 가까운 곳에서
모래처럼 깔린 별들과
묵언의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데
새벽이 밤을 삼킨다
짊어진 숙명이 외톨이라
비단옷으로 몸뚱이 둘러 감고
허기 달래줄 먹잇감 노려보지만
검불만 목매단다
간단없는 지상의 파노라마
마음 끌리긴 해도
원초적 본성을 잃지 않으려고
헐거워진 그물코 손질한다
*고석근: ‘부산시인’ 시 등단(2015), ‘시와 수필’ 수필등단(2008), 수상으로 제1회 현봉 문학상, 청솔 문학상 등이 있고, 시집 ‘음각과 양각의 시간’등 다수, 수필집으로 ‘삼세번’, 현 경호문학회 회장
사장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곳엔 화가 잔뜩 난 사장과 옆에서 거드름을 피는 A업체 대표와 직원 몇, 그리고 연희를 비롯한 우리직원, 그 옆에 그녀가 초조하게 앉아있었다. 사장은 다짜고짜 내게 화를 냈다.
“최 과장! 이 수송 계약서에 당신이 사인했지, 그러면 붙임서류에 통관서류도 있을 거잖아. 서류가 잘못되었으면 되돌려보내야지 왜 당신 마음대로 전결이야? 내게 보고도 하지 않고.”
사장은 서류를 거의 던지다시피 했다. 옆에 있던 우리 과 직원들의 얼굴이 굳어갔고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나는 대충 어떤 사안인지 일단 서류부터 살펴보았다. 이틀 전에 그녀가 통관한 수출통관서였다. 기억이 났다. K 관세사 한수가 그날 이 건은 한시가 급하므로 빨리 수송계약을 맺자는 바람에 솔직히 나도 세세하게 검토하지 않고 내 전결로 처리한 사항이었다. 이제야 서류를 보니 세번번호에 문제가 있었다. 그 물품에 적합한 번호로 신고해야 했으나, 그녀도 급한 나머지 비슷한 번호로 신고한 게 문제였다. 이런 경우 A업체는 통관비와 수송비가 필요 이상으로 더 나오기 때문에 항의하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내 잘못을 인정했다.
“사장님과 A업체 대표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서류를 꼼꼼하게 확인해야 했는데 모두 제 불찰입니다.”
“그래서 어떡할 거요?”
수송계약을 체결할 때마다 잡음이 많은 A업체 대표였다.
“이미 부두와 필리핀 쪽 에이전트와는 사전 약속이 되어있어 세관에 정정신고는 하지 못합니다. 오늘 밤 출항 아닌가요?”
“아니! 내 말은 운송비를 깎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이 말입니다. 이건 전적으로 저 아가씨와 당신이 잘못한 거잖아요.”
그러자 사장이 쩔쩔매는 태도로 A업체 대표에게 빌었다.
“요즘 운송 단가가 낮아서, 더는 안됩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20%로 하시죠? 우리도 힘듭니다. 대표님.”
사장이 그에게 저자세로 나가자 나는 화가 났다.
“사장님. 이 업체는 예전에도 사소한 것을 트집 잡아 운송비를 깎은 전례가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대로 진행하는 대신, 필리핀에서 수입통관 시 정상적으로 정정 신고하여 환급받으면 됩니다.”
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운송비를 환급받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면서 확인서 등 제출할 서류가 많은 게 문제였고, 환급금도 70% 정도였다. 내 말이 끝나자, A업체 대표가 불같이 화를 내었다.
“뭐라? 환급? 어디서 말도 되지 않은 조건을 내걸어! 이봐요. 사장님. 이 친구가 내 말을 못 알아듣나 본데, 이 건은 그냥 취소합시다. 그리고 취소와 동시에 나는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과 세관법을 어긴 저 아가씨와 최 과장을 고발하겠소.”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유희는 그 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장이 내게 호통쳤다.
“이봐! 최 과장. 왜 그래? 당장 대표님께 사과드려! 그리고 K관세사 통관 담당 아가씨! 당신도 빨리 사과해!”
사장이 내게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제가 뭔데 남의 사무실 여직원에게 사과하라는 강압적인 지시에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야! 유희 씨. 그럴 필요 없어. 아니, 그러지 마! ”
내가 고함을 지르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어찌할 줄 몰라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사장이 내 팔을 잡았지만, 나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A업체 대표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씨팔! 운송 안 하려면 때려치워. 당신 물건 아니더라도 운송할 물량은 차고 넘쳐. 이런 돈 몇 푼에 찾아와서 이 난리를 피워?”
그러면서 나는 테이블에 있던 컵을 들어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야! 최 과장! 당신이 뭔데 남의 사무실 아가씨를 두둔하는 거야? 저 아가씨랑 뭐라도 돼?”
사장의 말에 나는 크게 소리쳤다.
“예, 됩니다.”
“뭔데?”
나는 애인입니다, 하고 말할 뻔하다. 겨우 정신이 들어 A업체 대표와 일행에게 재차 고함을 쳤다.
“20% 할 거야 안 할 거야? 안 할 거라면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그제야 연희를 비롯한 직원들이 사장의 눈짓에 따라 날 잡아 밖으로 끌었다. 나는 이왕에 미친 짓 한 것, 더 미치기로 했다.
“뭐? 고발한다고! 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 예전에 통관 안 된 것을 몰래 컨테이너에 집어넣은 것 내가 몇 번 적발했어. 그래도 좋은 게 좋다고 내가 눈감아 준 게 얼만데. 좋아! 같이 맞고소 한 번 하자. 나도 이판사판이다.”
그때 외근 나갔다가 나처럼 급하게 들어 온 부장이 상황판단을 하고 날 아예 빌딩 밖으로 잡아끌었다. 나는 못 이긴체하고 그를 따라 대포 집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나는 유희가 걱정되었다.
회사 앞 대포 집에서 부장과 함께 술을 마시다 부장이 사장에게 보고할 게 있다면 들어가 버렸다. 나는 아까의 결과가 궁금하여 들어가면 연희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휴가를 이렇게 망쳤다, 생각하고 이왕에 이렇게 된 것 아까 외나로도에서 못 마신 술까지 마시기로 작정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해 있는데 입구에 연희가 보였다. 이미 퇴근 시간을 넘긴 시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희의 뒤에는 그녀가 있었다.
“과장님! 수고하셨어요.”
활짝 웃는 연희에 비교하면 그녀는 풀죽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됐어?”
“잘 끝났어요. 사장님과 그쪽 대표가 20%가 아닌 15%로 합의했어요. 그쪽 대표가 완전히 기죽어서 우리 모두에게 사과도 했답니다. 이게 모두 과장님 덕분이에요. 그런데 과장님!”
“왜 그런 얼굴로 봐?”
“정말 대단하셔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오늘 과장님을 다시 봤어요.”
나는 연희의 말을 듣고 잠시 우쭐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영 불편한 모습이었다. 하긴, 아침부터 우리 사장실에 붙들려 온갖 협박과 회유를 받은 그녀였다. 이해가 되었다.
“자, 여기요.”
연희가 봉투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사장님이 주신 금일봉이에요. 과장님께 대신 전해주라면서, 내일 하루 더 쉬어도 좋다는 말씀도 하셨어요.”
연희의 말에 나는 비로소 외나로도에서 급하게 달려온 보람이 생겼다.
“오늘 우리 셋이서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얘! 유희야.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다 끝난 일인데. 과장님! 뭐 하세요. 빨리 유희에게 술 한잔 안 따르고? 난 시킬 안주 고를게요.”
연희의 말에 나는 급하게 잔을 비우고 그녀에게 건넸다.
“마음고생 많이 했지?”
“아니에요. 정말 고마웠어요. 오늘.”
그녀는 비로소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야! 오늘 우리 셋이 뭉치는 것 정말 오랜만이네. 그치? 유희야. 그런데 과장님!”
연희가 날 쏘듯이 바라보았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아까 사장님이 유희와 무슨 사이냐고 물었을 때 과장님은 뭐라고 대답하려 했어요?”
그 말에 나와 유희는 연희가 무슨 말을 하나싶어 그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무슨 말?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에이! 어찌 그런 말씀을. 제가 말해볼까요?”
연희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넘쳤다. 그녀는 갑자기 남자 톤으로 크게 말했다.
“무슨 사이긴요? 한때 사랑했던 사이입니다!”
연희의 말에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옆에 있던 유희도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그만하라는 시늉을 했다.
“떽! 이놈. 별소릴 다 한다.”
나는 연희에게 그렇게 말은 했으나, 그리 싫지 않은 흉내였다. 그녀는 한술 더 떴다.
“그런데 아까 보니, 과장님과 유희는 사랑했던 사이가 아닌 것 같아요.”
이번에도 동시에 나와 그녀는 연희의 입에 집중했다.
“아무래도 둘은 아직 진행형 같아요.”
그러자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극구 부인했다. 나는 그녀의 의도를 알고 아니라고 분명히 연희에게 말했다.
“어서 안주나 먹어. 조금 더 시킬까? 이왕이면 왕파전도 시켜 줘?”
나는 그 자리에서 어색함을 떨치려고 일부러 소란을 피웠다. 연희의 말대로 오랜만에 그녀를 비롯한 세 명이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다 보니, 그녀에 대한 그간의 서운함과 불안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 잔을 마시고 맛이 간 연희를 택시에 태워 보낸 후. 나는 오랜만에 중앙동 거리를 걸어서 그녀의 원룸으로 함께 가고 있었다. 그녀가 대담하게 내 팔짱을 낀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밤이 되자 낮의 더위는 저만치 물러갔고 바람도 선선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전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봉변을 당할 뻔했어요.”
그녀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거든. 아까 그 업체 대표는 원래 그런 놈이었어. 거래업체는 안중에 없고 제 사익만 챙기는 전형적인 악덕 업주야. 평소에 별렀는데 그대 덕분에 오늘 시원하게 풀었지 뭐야. 그러니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내게 긍정의 표시를 하는 그녀를 보니 오늘따라 매우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팔짱 낀 그녀의 허리를 한쪽 팔로 감쌌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두툼한 가슴에 손에 닿고 말았다.
“오늘은 아닙니다.”
그녀는 내 팔을 가볍게 걷어 내었다. 마침 그녀의 집 근처였다. 나는 그녀를 기습적으로 안아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는 안긴 손으로 내 등을 몇 번 치는가 싶더니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이건 반칙이에요.”
그녀가 떨어지면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바뀌어 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내일도 휴가죠?”
“그래, 연희 말대로 포상휴가지 뭐.”
“그럼, 나도 휴가 낼까요?”
그녀의 말에 나는 활짝 웃었다.
“너의 대표, 지금쯤 미국에서 왔겠지. 내가 전화해 줄까?”
“뭐예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 있어 봐요. 제가 지금 문자 보내볼게요.”
나는 그녀가 한수에게 문자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릴 때까지 그녀의 곁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잠시 후 한수의 가능하다는 문자가 왔다.
“야호! 잘 되었어. 내일 우리 어디 갈까?”
“인근 계곡에 가면 좋겠어요. 요새 낮에 더워서 특별히 시원한 곳이면 더 좋구요.”
나는 모처럼 그녀와 함께 보낼 내일이 아주 기대되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제가 그곳에서 먹을 김밥을 준비할게요.”
“김밥도 만들 줄 알아?”
내 말에 그녀는 눈을 흘기면서 가슴을 마구 때렸다. 역시 사랑은 천국과 지옥은 매일 매일 번갈아 가면서, 찾아오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