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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 제3권. 중세와 르네상스, Moyen Age et Renaissance 463-
제2장 10세기와 11세기 Le Xe et XIe siècle 488-503
1절 일반적 성격들 - Caractères généraux 488
서방에서 지적인 활동성의 살재적 재장악을 알기 위해서는 11세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매개적인 시대는 비어있는 것도 아니고, 중요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사방에서, 그리고 수도원들에서 또한 성당의 참사원 거주지역들(cloîtres)에서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중심은 흩어졌지만, 거기에서 문화는 동일했다. 오세르(Auxerre [osɛʁ]), 렝스, 파리는 9세기부터 도시의 성당들 주변에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오리약(Aurillac)에서, [스위스 북동부의] 생갈(Saint-Gall)에서, 샤르트르(Chartres)에서 연구는 계속되었다. 우리는 어떤 실질적 난제들의 가운데 재현해야만 한따. 아랍민족들의 동방 정복 이후에 파피루스와 양피지는 매우 드물어서, 도서관들에는 필연적으로 매우 빈약하게 남아있었다. 가장 풍부한 도서관 중의 하나는 생갈의 도서관인데, 860년 경에 400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성의 재개혁은 11세기 말에 종교적 수도원들의 창설과 함께 일치한다. 이 수도원들은 열심히 수고본들을 복사하였다. 그리고 12세기에 랑(Laon [lɑ̃])에 있는 성 뱅상 도서관은 1만1천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488)
사람들은 중기 중세에서 철학적 작품에 관하여 이런 도서관들의 내용을 거의 조금만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생갈 도서관에서는 9세기에 아쀨레이우스(125-170)의 논리학적 저술들을, 카시오도루스(485경-580년경)의, 이지도루스(560-636)의, 베다(672-735)의, 알뀅/알쿠이누스(735-804)의 저술들을, 그리고아라토스(Aratos de Soles, 전315-전240)의 현상들(Les Phénomènes)을 소장하였다. 그 도서관은 10세기에 풍부해져서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 루카누스(39-65)의 파르살(La Pharsale), 스키피온의 몽상(아마도 키케로 원문 스키피온의 몽상에 대한 마크로비우스(370경-430경)의주석서)들이 소장되었다.11세기에는 논리학적 논문들이 보태어졌다. 이런 나열은 우리에게 지적 지평의 협소한 한계들만을 보여줄 뿐이다. 또한 그 때는 문화가 매우 희귀했던 서적들에서 근거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488)
또한 우리는 이런 시대로부터 보에티우스 또는 마르티아누스 카펠라의 쓴글에서여분의 해설들과 (대부분 출판되지 않은) 주석들만을 단지 소유하였다. 크리스트교 학설 바깥의 이런 교육들에서, 변증론은 약간식이나마 온전한 자리를 차지하다. 에릭(Heiric d'Auxerre, 841–876)과 레미(Remi/Rémy d'Auxerre, 841경—908)는 샤르트르에서 862년 경에 가르쳤다. 10세기 초에 삭스의 보보(Bovo de Saxe, s.d.), 그리고 실베스트르(Sylvestre II, 999-1003)란 명칭으로 교황이 되었던(999-1003) 제르베르(Gerbert d'Aurillac, 945/950-1003), 990년에 학교를 개설했던 퓔베르트(Fulbert de Chartres, 952/970-1028) 등은 이런 주석들의 중요한 저자들이다. 11세기 한 문서 자료가, 그들의 수도원에서 우리에게 샤르트르[성당 학교]에서 변증론에 대한 교육 재료들을 남겨주었다.사람들은 여기에서 계속적으로 연구했다. 포르퓌리오스(234-305경)의 Isagoge,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성아우구스티누스의 범주론(알뀅의 전문과 더불어), 보에티우스의 정의들(Définitions), 키케로의 변증론들(Topiques,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쀨레이우스의 해석론, 보에티우스의 변증법적 차이들(Différnces topiques), 수사학에 관한 익명의 작품들, 보에티우스의 분할론들, 제르베르의 논저 추리와 추론의 용법(De rationali et ratione uti) 등이 있다, 결국에는 보에시우스의 범주적(정언적) 삼단논법과 가설적 삼단논법으로 이어진다. (489)
사람들은 그러한 교육이 여러 해 동안 이어져서 어떻게 단절할 수 있는지를 안다. 변증법과 아주 다른 기예는, 만일 사람들이 983년 경에 제르베르의 기하학을 인용할 수 없다면, 거의 잊혀진 것 같았다. 그 기하학은 척도의 방법들이란 면에서 아랍 수학자들의 영향을 배반하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변증론은 주인처럼 지배하고, 그리고 변증론은 정신에게 목적없는 토론의 취향을, 구별들과 분할들의 취향을 제공한다. 이 취향은 중세 철학의 전체를 곧 지배할 것이다.
2절, 베랑제 드 투르의 논쟁 La Controverse de Bérenger de Tours 489
그러나 철학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토론의 기술로서 변증론이라기보다 실재적인 것의 개념작업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으로 만들기를 시도하는 사용법에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보에티우스의 총서가 여러 문제들을, 말 그대로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제기한 것을 상기해보자. 우선포르퓌리오스의 유명한 원문에서 보편자들의 실재성의 문제가 있다. 그러고 나서(아우구스티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세에서 그래도 유명한 문제, 범주들의 적용의 한계의 문제가 있다(이 책 470쪽). 10 범주들 또는 존재의 류들은 감각적 세계에서 만 적용된다. 범주들에 종속된 류들과 종들을 가지고서만 작업하는 변증론은, 따라서 변증론 자체에서 이상 아니듯이, 상위 실재성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때에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재성에 대해 말할 수 있는지를 아느 냐는 것이다. 결국, 보에스의 주석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술적 용어들 중의 몇 용어들을 내비친다. 예를 들어 형상과 물질의 용어, 현실태와 잠재태의 용어를 내비친다. (490)
거기에는 토론의 단순한 기술과 아주 다른 것이 있다. 사람들은 프레데지즈(Frédegis, ?-834)의 허무와 어둠의 편지(Epistola de nihilo et tenebris에서, 논리학 역사가인 프란틀(Carl Prantl, Karl von Prantl, 1820-1888)이 말했던 것처럼, 게다가 충분히 “어리석고 또한 순진한” 소논문임을이미깨달았다. [그런데] 알뀅의 제자인 한 저자(프레데지즈)는 무(le néant)이 현존한다는 것을 지지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무이다(il est neant)라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것은 그것이 있다(est)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490)
제르베르의 추리와 추론의 용법(De rationali et ratione uti)(On That Which is Rational and Using Reason)의 작은 논문은 이런 조잡한 실재론과 다른 의미에서 교육적이다. 포르퓌리오스가 이사고게의 7장에서 말하기를, “추론할 수 있다는(raisonnable) 것은 종적차이를 나타내는 것이고, 이치를 사용하는 것(user de la raison)은 이런 차이로 일컫는 것이다. 그 항이 또한 모든 존재들에 대해 이런 차이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들에 대해 일컫는 것이다.” 사람들은 포르퓌리오스에게 논리적 규칙을 반대했다. 그 규칙은 술어가 상위 외연을 갖기를, 또는 게다가 주어의 외연과 동일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규칙은 여기에서 위반 당하는데, 왜냐하면 추론할 수 있는항이잠세태이고, 이치를 사용하는 것은 잠세태의 현실태이어서, 주어는 자기 술어보다 더 많은 외연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르베르는 대답하기를, 주어의 본질의 일부를 이루는 술어들과 우발적인 술어들을 구별하는데, 전자에서는 마치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질의 부분이라 여기고, 후자에서는 항이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일컬어 질 때, 이치를 사용하는 것처럼 여긴다. 지적된 규칙은 제1종류의 술어들에게서만 가치가 있을 뿐이다.
보편자들의 문제를 분명하게 제기하도록 허락하는 것은 본질적 속성들과 우발적 속성들의 단호한 구별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편자들에 대해 그것들이 실재적인 지를 자문하는데, 보편자들은, 류들와 종들, 즉 동물, 사람들이며, 이것들은 소크라테스처럼 한 개체의 본질적 속성들이다. 이 점에 관하여, 보에티우스의 주석가들은, 마치 위(僞)라바누스 마우루스처럼(사람들은 그에 대해 11세기 초반에 “포르퓌리오스 보다 상위(Super Porphyrium)”의 지위에 두는데 일치하였다), 사람들이 스승에게서 발견한 지표들을,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유래한 지표들을 따랐다. 그들은 보에티우스가 또한 심플리키우스가 말했던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속성들의 연구인 카테고리들은 사물들과 연관 할 수 없으나(왜냐하면 술어적인 아닌 사물들이기에), 단지 단어들에 연관할 수 있는데, 단어들이 사물들을 기호화[의미화]하는 한에서이다. 여기에서 보편자들의 문제에 대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완전히 배어들었던, 해결책이 나온다. 류와 종는 단지 개별자들에 본질적인 술어들의 자격으로만 현존한다. “개별자, 종, 류, 종는 동일한 실재성(la même réalité, eadm res)이다. 보편자들은, 사람들이 가끔 말하는 것처럼 개별자들의 차이 있는 사물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치 물질은 형상에 속하는 것처럼 류는 종에 속하고 종은 개별자에 속한다고 하는 말투들에서, 보에티우스를 매개로 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사유의 메아리처럼 이해한다. (491)
성체(l'Eucharistie)에 관한 논쟁은 11세기 중반에 일어났는데, 이는 변증법의 수준의 놀이로 삼았다.라드베르(Paschase Radbert, 790경-865경)는 축성식(consécration)에서 “성령의 덕분에, 그리고 빵과 포도주의 실체의 덕분에, 크리스트의 신체와 피가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이런 실체화(la transsubstantiation, 신체화)의 이론은 우선전능의 신을 함축하고, 전능의 의지는 어떠한 자연적 규칙에 의해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둘째로 두 눈이 감관들에 의해서 지각되는 것으로부터 근본적인 독립, 그리고 신앙에 의한 지성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볼 수 있는 종(種)에서, 시각과 취향에 의해서 느껴지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 지성에 의해 판단 파악된다.” 베랑제르(Bérenger de Tours, 998-1088)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단어를, 즉 성스런 부호(sign sacré)를 부여했다는 의미에서, 성체가 교회의례이라는 것을 부정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성스런 부호는 우리에게 감각적 현상의 저 넘어에서 지성적 실재성에까지 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합리주의로 즉 신앙의 부정자로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샤르트르의 퓔베르트의 변증법의 교육에 물든 그는 실체화를 사유한다는 것에 이를 수 없었다. 실체화는, 빵과 포도주가 축성식 다음에 재단 위에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부정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런데 긍정 주장은 전적으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것의 일부를 제거한다면,”질문은 암시적으로 제기되다. 독단들을 정식화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모순되게 말할 권리가 있습니까? (491)
베랑제가 끌어들인 수많은 반박들이 모두가 동일한 애매함을 겪는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변증법도 철학도 독단의 성립 속에서 보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에게 말한다.그러나 다른 한편, 사람들은 체화를 주장하는 것에 실재적 모순은 없다고 그에게 제시하고자 애쓴다. 샤르트르에서 그의 동급생이었던 아델망(Adelman de Liège, Adelmannus Leodiensis, 1000경-1060)의 편지는 첫째 방식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 편지는 철학에 대항하는 그의 신랄함 때문에 전적으로 인용되게 될 것이다. “몇몇 타방인들과 고상한 철학자들은 창조자 신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세계와 세계 속에 있는 것들에 관하여, 거짓되고 경멸하는 많은 견해들을 가졌다. 하늘과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땅이 그 자체 급속도로 자전 운동으로 돌고 있다는 것보다, 하늘의 운동을 믿는 자들이, 마치 해변에 있는 나무들과 탑들을 자신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보게 되는 선원들처럼, 속고 있다는 것보다, 더 많이 부조리한 것이 있는가?”헤라클레이데스(Héraclide, Ἡρακλείδης, 전388-310)의 옛 견해를 11세기에 와서야 칼키디우스(Chalcidius ou Calcidius, 4세기경)의 ‘티마이오스’편 주석을 통해서 알게 된다. 게다가 그(아델망)에 의해서 헤라클레이데스의 견해가 “태양은 뜨겁지 않고, 눈(la neige)은 검다”고 믿는 자들의 견해와 동일한 발판 위에 놓이게 된다. 훨씬 더 강력한 이유에서, 독단의 문제거리에 있어서, 감관들도 지성도 우리에게, 사람들이 은총으로부터 나온 음덕에 의해서만, 즉 신앙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것을 파악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492)
이 논재의 마지막에 글을 쓴 알제르(Alger de Liège, 1055경-1132)는 그도 또한 권한의 관점에 서있었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완전히 불완전한 인간의 이법(la raison)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자들에 비우어진 크리스트 자체의 증거들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는 이법와 신앙의 연관을 다음의 비교에 의해 설명했다: 우리의 예지(l’intellect)가 신에 비추어서, 마치 우리 감관들이 지성에 비추듯이, 또는 마치 각 감관이 다른 감관들에 비추듯이, 말하자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그러나 자기[예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도록 하게 갖추어져 있다. 사람들은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정신의 기본적 불연속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동일한 알제르는 자기 논제의 마지막에, 실체화(transsubstantiation)에서 모순이 없다는 것을 제시하고자 원했다. 사람들이 빵의 현전과 크리트트의 신체의 현존을 재단 위에서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연관에서가 아니다. “요소들의 겉보기와 형태에 관하여, 그것은 빵과 포도주로 부터이다. 빵과 포도주가 그 속에서 변화되는 실체에 관하여, 그것은 진실로 고유하게 크리스트의 신체이다.” (492)
결국 동일한 방식으로, 벡크의 신부인 랑프랑(Lanfranc du Bec, 1010-1089)은, “성스런 권한을 포기했고 변증법에 도움을 청했다고” 베랑제를 비난하면서, 그리고 그가 유일한 권한에 의해 논쟁을 해결하기를 선호했다고 선언하면서도, 또 그가 신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변증법적 문제를 제안하기를 바라지도 또한 그러한 문제에 대답하기를 바라도 않는다고 하면서도, 랑프랑은 그래도 역시 그에게, “토론의 규칙들”에 오류를 범하는 잘못들을 제시하고자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베랑제)를 “신적 권능 앞에 자연을 놓아서 마치 신이 자연을 무엇으로든지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되었다고”비난했다. 도그마 속에서 변증법이 모순되게 말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그래도 덜 진실인 것은 아니다. 이런 반면에 사람들은 신앙으로 말하는 지역 종교회들(synodes)의 회합에 의해 문제를 규제 하였고(1050년 로마와 베세이의 종교회의는 베랑제를 단죄하였다. 1059과 1079로마의 종교회의에서 그는 포기각서를 강요받았다), 사람들은 공통 이치[이법]의 규칙들에 따라서 독단을 그래도 효과적으로 생각하도록 애썼다. (493)
3절, 철학의 비판, 11세기 말 Critique de la philosophie à la fin du XIe siècle 493
11세기 말에 특징지워지는 수도원들의 개혁과 금욕주의 운동과 더불어(생생한 신앙은 1095년의 십자군에 이른다), 사람들은 보다 정확한 방식으로 세속적 훈육의 역할을 제하는 필요를 느낀다. 삐에르 다미앙(Pierre Damien, 1007경-1072), 1057년에 오스티 총주교로서 추기경이었는데, 그는 항상 존경들을 은둔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게 하고자 애썼다. 그는 신앙의 문제에서 변증법의 총체적 무능력을 선전하였던 개혁가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변증법은 주인의 권리로 거만하게 파악되지 않아야만 하고, 그러나 변증법은 여주인의 하녀(ancilla domanae)처럼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단죄는 어떤 기회에 나올까? 중요한 것은 변증법적 유명한 논증(메가라학파들이 그것의 저자들이다)인데, 그 논증은 모순의 원리를 수단으로 우연한 미래들의 숙명과 불가능성을 증명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논리의 규칙에 의해 제거된, 신의 전능과 자유를, 즉 신앙의 토대 자체를 보았다. 다미앙은, 규칙들은 삼단논법들에 쓰이게 하기 위하여 발명되었다는 것을, “규칙들은 본질에 그리고 실재성의 질료에 연관이 없으나 토론 속에서 질서(l’ordre)에 연관이 있다는 것”을, 완전한 양식(bon sens)을 지니고서 상기시켰다. 그것은 순간적 확실성에 의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제들과 정의들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미 선언했었다(이 책, 183쪽). 사람들이 삼단논법과 다른 사유방법을 가지지 않는 한, 그 삼단논법을 단순한 기관(organon, 논리도구)의 배열로 환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며, 그 도구로 실재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도구로 만들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94)
단지 기관(논리 도구)의 역할로 축소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쉽다는 변증법의 이외에도, 세속적인 책들은, 특히 마크로비우스(370경-430경)의 ‘스키피온의 몽상’의 주석(Commentaire au Songe de Scipion)은 신과 세계에 관한 학설들을 알게해 주었다. 이 학설들은 직접적으로 크리스트교 학설에 대립되었다. 사람들은 여기서 영혼의 윤회에 관한 퓌타고라스의 사색과 세계의 영혼의 제작 작업에 관한 플라톤의 사색을, 플라톤주의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의 토론을 고려함이 없이, 읽었다. 이로부터 영혼의 불멸성이 영혼의 신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나왔다. 사람들은 지구[땅] 위에는 거주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지역들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기서 보았다. 여기서부터 예수는 모든 인간을 구출하지 못했다는 결론지어야 했다. 그때 변증법과는 아주 다른 것이, 즉 크리스트의 구원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개념작업이, 있었다. 만골(Manegold de Lautenbach, 1030경-1103)(그는 알사스의 수도원에서 임종했다)이 이런 반대자들을 대항하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런 위험한 철학자들에 대해 너무 과도하게 열심힌 독자들에 대항하여, 그는 그들이 악마(diabolique)의 영감에 빠졌다고 선언했다. (494)
이론상으로, 그러한 출발점 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실천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다. 신학은 실체(substantia)와 같은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다. 신학은 이 실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에서 정의(定義)를 요구하러 가려고 애썼다. 만골 그 자신은, 신앙과 몇몇 철학적 학설들의 친근성을 인정하면서, 정치적으로 덕목들에 대한 플로티노스의 분할을 받아들였다. 그가 마크로비우스에게서 발견했던 덕목들인데, 정화하는 덕목들과 정화된 덕목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11세기에, 세속 철학 없이 지낸다는 것과 그 용도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에 대한, 진솔한 무능력(une véritable incapacité)이 드러낸다. (494) (56SKB)
4절, 성 안셀무스 Anselme d’Aoste 495
성 안셀무스(Anselme, Anselmus, 1033-1109) 사유에서 가장 흥미롭개 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노스의 전통을 다시 다룬다는 것이다. 그는 벡크 수도원에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랑프랑(Lanfranc du Bec, 1010-1089)을 계승하여 수도원의 수도원장이었고 1903년에 칸터베리 총주교가 되었다. 그는 랑프랑 다음으로 행한 교육에서, 신앙과 이치(la raison) 사이에 더욱 안정적 균형을 교육하고자 애썼다. 안셀무스의 사유는 매우 분명했다. 성문[쓰여진 것들]과 교회는, 마치 신의 현존과 체화에 대한 독단들처럼, 우리의 신앙에 독단들을 부가한다. 인간은 교회의 권한에 의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치는 우리를 [교회의] 권한에 인도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이 현존할 때, 인간은 더구나 독단들을 사유하는 경향성을, 그리고 독단으로 동기를 찾을 수 있는 경향성을 갖는다. 이사야가 말했듯이(이사야, 7:9), “만일 당신들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의 신앙은 이해하려고 애쓴다(fides quaerens intellectum): 우리가 추론에 의해 진행하면서 이렇게 독단들을 획득할 수 있는 지성은 마치 순수 신앙과 선택된 자들이 신적인 실재성으로부터 가질 수 있는 직접적 통찰사이에서 매개와 같다. 성 안셀무스의 태도 그 자체가 신앙주의[경건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에 매개적이다. 신앙주의는 이치의 정상적인 모든 실행에 거부되는 것이고, 신비주의는 이런 생활로부터 지복의 통찰을 도입하는 것이다. (495)
안셀무스는, 자신의 천재적 힘에 의해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누스 저작들의 성찰에 의해, 이제 플라톤주의의 변증법의 어떤 것을 재발견한다. 신앙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지성에서 통찰로 이끄는 운동은 이런 변증법과 근친성이 있다(p. 113). 이 변증법은 신념으로부터 추론적 반성으로 그리고 추론적 반성으로부터 지적인 직관으로 이끈다.오직 신념이 신앙이 된다. 다시 말하면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 속으로 오는 신학적 덕목이 된다. 그리고 인간의 구원이 의존하는 일체의 도그마가 된다. 게다가 지적 직관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선택받은 자들에게 일치되는 지복의 통찰이 된다. 인간은 주도권을 행하는데도 그리고 목적에 도달하는 데도 무능하다(incapable). 예지(l’intellectus)는 밖에서부터, 신앙으로부터, 자신이 이해해야할 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자료(ce donné)를 따로 하고, 예지는 변증법적 섬세성과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안셀무스는 그 섬세성을 자기 제자들에게, 문법가에 대하여(De grammatico)의 연습들과 같은 연습들에 의해서, 획득하게 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신앙과 분리되어 있는, 가장 그럴듯한 추론도 확실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는 단지 말하기를 그러한 것은 “나에게 나타나는 것”과 같을 뿐이다. (495)
덧붙여 말하자면, 안셀무스의 작품은, 교회의 왕자에 알맞는 실천적 고민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체화의 필연성을 추론들에 의해 제시하면서, 그는 비신앙자[비신자]들의 반대들에게 응답하고자 원했다. 비신앙자[비신자]들은 말하기를, 크리스트교 신앙은 이치(raison, 이법)를 혐오한다고 한다. 이로부터 그의 작품의 특별한 형식이 나온다. 이로부터 그의 작품들의 특별한 형식들이 나온다. 그는 그 자신이 이것을 신성에 대한 독백(Monologion de Divinitatis, 1075-1076)에 앞에서부터 잘 지적했다. 그가 말한 것의 어느 것도 문자[성문]들의 권한 위에 기초되어 있지 않아야 한다. 분명한 스타일로 써야만 하고, 통속적 논증들만을 사용할 뿐이고, 단순한 토론에 만족해야 한다. 그 토론에서 모든 것은 “이법의 필연성과 진리의 명확함” 위에 기초되어 있다. 그것은 시대의 문학적 습관들과 문자[성문]들을 주석하는 봉사들을 전적으로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기에서 어떤 신중함을 가지고 성 안셀무스의 “합리주의”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본다. 이법이 자기의 고유한 힘에 의해 무언가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보려고 애썼다는 것은, 그래도 진실한 것이다. (496)
물론 순수하게 신학적 문제거리들에 관해서이다. 1070년에서 1078년에 까지 순서적으로 쓰여진 신성에 대한 독백(1075-1076)과 신의 현존에 관한 보충 또는 담화(Proslogion seu Alloquium de Dei existentia, 1077-1078)는 한편 신의 자연(la nature, 본성)에 관하여, 다른 한편 신의 현존에 관하여 다룬다. 다음으로 나온 진리에 대하여(De veritate, 1080경)는 신 속에서 모든 진리의 근본적 통일성을 주제로 삼고 있다. 1098년에 완성된 왜 신이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 1098)은 신체화의 동기에 대해 말한다.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이법이 착한 용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이법이 비신자들의 구원과 개종에 쓰일 수 있다는 것 이다. 이법의 자치적 발전과 자기를 위한(pour soi) 발전에 대해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496)
그럼에도 안셀무스의 방법은(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와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이법(이치)의 자연(la nature)에 관하여, 그가 다룬 재료들과 독립적으로 보편적 범위의 결론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선 신성에 대한 독백(1075-1076)에서 그는 플라톤주으의 방법을 재발견한다. 그 방법은, 감관들과 이치에 의해 지각된 닮은 것들의 각 범주들을 위하여, 닮았다는 한에서 사물들이 전적으로 참여하는 하나의 모델의 현존에 따른다는 결론이다.작품 전체는 프로클로스의 신학 원론(Éléments de théologie)의 근본적 정리를 명구(l’épigraphe)로서 옮겨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참조, 이 책 477) “한 계열에서 모든 항들에게 현재하는 하나의 항은 그것들의 하나 속에도 아니라고 모든 것들 속에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앞서 있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성 안셀무스는 선한 사물들이 공통의 본질에 의해 즉 선(le bien)에 의해 그러[선]하다고 보았다. 그 선(le bien)은 그 자체에 의해 선(bien)이며 따라서 더할 나위 없이 최고로 선(bien)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더 많이도 더 적게도 정도차이들을 경험 속에서 허용하는 성질들의 각 범주를 위하여, 최고로 큰 것(un souverainement, 극대)에 또한 절대적 존재에 도달한다. 극대에 의하여 사물들은 크기가 있으며, 절대 존재에 의해 사물들이 있다. 게다가 최고로[절대적으로] 정의로움에 도달한다. 그 최고 정의에 의해 정의로운 것(사물)들이 있다. 사람들은 이 항들에 의해 지칭되는 것은 동일한 실재성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유일한 최고 자연[본성]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497)
이리하여 변증법은 불완전한 다수성들로부터 완전하고 유일한 실재성으로, 다른 것을 통하여(per aliud, 다른 것으로서)로부터 그 자체를 통하여(per se, 그 자체로서)로, 이끈다. 게다가 이 그 자체로서(par soi [per se]) 존재는, 만일 그것이 현존한다면, 그 자체로부터(de lui-meme, ex se) 현존한다. 왜냐하면 그 존재가 하나의원인이라면, 그것은 이(cette) 원인에 비해 열등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주(univers, 세계)는 존재[신]로부터 오며, 존재는 우주를 창조했거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그러나 추론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면 만일 자기 사유 속에 “만들어야 할 사물의 표본과 같은 어떤 것이, 또는 더 잘 말하자면 형상과 같은, 유사성 또는 규칙과 같은 어떤 것이” 없었던 것이라면 불가능한 것이라 여겼을 것으로부터, 생산한다. 이것이 존재와 동일한 신의 말씀이다. 창조된 모든 사물들은 말씀 속에 있고, 이는 마치 작품이 기예 속에 있는 것처럼, 작품이 생산될 때만이 아니라 작품의 현존에 앞서서 또한 작품이 산개된 후에도 있는 것과 같다. (497)
신성에 대한 독백(1075-1076)의 사유에서 상호 침투가 일어나지 않는 두 가지 요소를 분간해 내는 것이 편하다. 한편 플라톤학파의 변증법인데, 이는 일반적 방법으로 감각적인 것에서 지성적인 것으로, 다양성에서 통일성으로, 다른 것을 통하여(per aliud, 다른 것으로서)로부터 그 자체를 통하여(per se, 그 자체로서)로, 진행하는 데 있다. 다른 한편 이런 방법의 종교적 형이상학으로 변형인데, 이것을 이어서 그 자체로서(per se) 존재는 마치 창세기의 무로부터(ex nihilo)로부터 창조하는 신처럼 정의 되고, 가지적 세계는 마치 그의 말씀처럼 정의된다. 여기에 혼동이 있는데, 데미우르고스와 그 표본들[이데아들]과 더불어 티마이오스 그 자체에 의해 확실하게 설명된 것과, 그리고 필론에서부터 아우구스티노스에까지 티마이오스 편을 선전 했으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당화하지 못했던 모든 자들의 의해 설명된 것 사이에 혼동이 있다. (497)
신성에 대한 독백(1075-1076)은 신이 현존한다면 이법은 신에 대해 안다는 것을 규정하였었다. 신의 현존에 관한 보충 또는 담화(1077-1078)(2장과 3장)는 신의 현존을 유일한 논증에 의해 증명한다. 이 논증은 성 안셀무스의 이름을 불멸화하였다. 여기 구절을 보자. “우리가 믿기로는, 너는 어떤 것인데, 보다 더 큰 어느 것도 사유될 수 없다는 것(quo nihil majus cogitari possit)것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라고. 그러한 자연이 현존하지 않는가? 왜냐하면 몰상식한자들이 자기 심장[감정]으로 ‘[자연은] 신이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몰상식한자는 내가 말한 것을 이해한다. 즉 ‘보다 더 큰 어느 것도 사유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은 그가 듣는 것을 이해[포함]한다. 그리고 그가 이해하는 것은, 그가 이런 사물[신, 가장 큰 것보다 큰 것]이 현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지성 속에 있다. 지성 속에 있는 것은 다른 것이며, 현존하다‥…는다른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보다 더 큰 어느 것도 사유될 수 없다는 것’이라는 온존재(Etre)는 유일한 지성 속에 있을 수 없다. 심지어 이런 이유로, 만일 온존재가 유일한 지성 속에 있다면, 사람들은 한 존재(un être)를 실재성 속에 또한 현존하는 그것(lui, 온존재)처럼, 따라서 자기(lui, un être)보다 더 큰 것이라는 그것처럼, 상상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그가 유일한 지성 속에 있었다면, ‘보다 더 큰 어느 것도 사유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존재는 ‘생각할 수 있는 보다 큰 어느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498)
이런 증명, 자연을 통하여 볼 수 있는 섭리의 성찰로부터 멀리 있지만, 신에 관한 성찰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것은 아우구스티노스가 그것[신]에 대해 모델로서 제공했던 것과 같다.그가 말하기를 “어느 영혼도 너보다 더 나은 어느 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너 부패하지 않는다면, 나는 나의 신보다 더 나은 어떤 것을 사유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유의 운동은 동일한 운동이다. 사람들은 확실하게, 사람들이 신의 완전성을 축소함이 없이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신에게 부가할 수 있다. “신과 신으로부터 온 사물들은 전반적으로 최상의 것”이라고 플라톤이 이미 말했다.그리고 그것은 거기서 신에 관한 모든 합리적 사색의 원리였다. 그러나 어디 에서도 사람들은 현존으로 속성을, 즉 누군가 자기의 거대함을 이유로 그리고 자기의 엄청난 완전함을 이유로 현존에게 거절할 수 없는 속성을, 만들고자 생각하지 않았었다. 철학자들에게서 신의 현존은 암묵적으로 인정되었다. 왜냐하면 그 현존만이 어느 정도로 우주에 대한 철학자들의 이미지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운동자 없이 천구들의 영원한 운동이 없듯이, 스토아학자들에게서 우주를 관통하는 로고스[누스, 섭리] 없이 사물들의 완전한 합리성도 없다. 크리스트교에서는 신의 현존이 인간의 구원에 이르러야만 하는 드라마에 의해서 가정되었다. 그리고 신의 현존은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계시된 진리이다. 그런데 성 안셀무스는 신이 필수불가결한 우주의 질서의 기능으로 신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가설에 의해서 계시를 사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안셀무스는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갖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신을 생각하게 허락했던 명상과 동일한 방법에 의해 현존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중대한 근거를 가지고 신을 말했듯이,그것은 본질에서 현존으로 가는 존재론적 증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의 본질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거는 신의 본질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거가 우리 오성 속에 있는 것처럼, 또한 증거가 끈기 있는 명상에서만 발견되는 것처럼, 신의 용어[개념]로부터 출발한다. 증거가 실재적 본질로부터 매우 멀리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 그것의 대상에 대해 현존으로 결론 짓게 하는 것은 이런 용어[개념]이다. (499)
모든 진행방식들은 사람들이 이런 류[상위개념]에 대한 성찰이 가능한 것처럼 주장하는 것을 함축한다. 이런 류의 명상은 신의 용어에 대해 점점 더 명확한 의식을 취하는데 있으며, 또한 그것은 우리의 오성 속에 있다. 아주 중대한 과감함으로써 11세기의 말에 다루어야만 했던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가 가르쳐주는 교육과는 따로, 사람들이 신에 관해 성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마르무띠에 수도원 원장인 고닐롱(Gaunilon, 994-1083)이 몰상식자의 이름으로 성 안셀무스의 증거에 반대하는 논증작업은 전적으로 이러한 이해 위에 기초되어 있었다. 그가 공격했던 것은 아주 진실로 성 안셀무스의 신학적 방법이었다. “신이라는 실재성 자체, 나는 그 실재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심지어 실재성에 닮은 어는 것으로부터도 실재성을 추측할 수조차 없다.” 고닐롱이 이의제기 한 것은 안셀무스의 출발점, 즉 신에 대한 예지 속에 본질(ess in intellectu)이다. 신에 대한 어떠한 용어도 갖지 않은 우리는 그에 대하여 합법적으로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암시적 결론으로, 권한과 계시와는 다른 방법이 신학적으로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예지(intellectus)의 역할의 붕괴이다. 마치 안셀무스의 방법은 신앙과 선택된 자들의 통찰 사이에서 그것을 고정시켰던 것과 같다. (499)
이런 방법으로부터, 성 안셀무스는 진리에 대하여(De veritate, 1080경)에서 새로운 적용방식을 제공한다. 마치 신성에 대한 독백(1075-1076)에서처럼, 그는 그 책에서 특별한 경우에 우리를 다양성으로부터 통일성으로 옮기는 운동을 묘사한다. 그는 여기서 다양한 진리들로부터 출발한다. 그 다양한 진리들(vérités)이란, 언설들의 진리들이며, 견해[여론]들의 진리들, 의지의 진리들(말하자면 곧은 의도), 행동의 진리들(또는 올바른 행동), 감관들의 진리들, 본지들의 진리들이다. 이런 나열은 그 나열 자체만으로도 어떻게 진리의 문제가 성 안셀무스에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진실한 것(le vrai)은 판단에 속할 뿐만 아니라, 또한 진실한 것은 의지에도, 감관들에도, 본질들에도 속한다. 이러한 진리들 전체의 공통 성격은, 어떤 규칙에 부합하는 것이며 또는 곧음(la rectitude)이다. 언어적 언설은 이다[있다]는 것을 기호화하기(signifier)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 언어적 언설이 진실이라는 것은, 언어적 언설이 효과적으로 기호화하는 것일 때이고 또한 언어적 진실이 기호화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때이다. 견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의지가 진실하다는 것은 의지가 곧 감관 속에 인도될 것이라는 때라는 것이며, 감관 속에 의지는 진실이어야 할 때이다.마찬가지로 행동들도 감관들도 그것들 자체들로서 다루어졌을 때, 항상 진리이다. 왜냐하면 감관은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항상 행하기 때문이다. 결국 본지들도 진리인데, 신은 사물들이 가지고 있기를 바랐던 본질을 사물들이 항상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이런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진리하는 용어는 모든 경우들에서 영원히 실체적인 최고 규칙에 관련되어 있다. 진리란, 왜냐하면 진리는 어떤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올바름이 아니라, 왜냐하면 ‘진리이다’이기 때문에 올바름이다. 이런 신중심주의의 합리주의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 합리론이 스토아주의와 신플라톤주의와 더불어 태어났다는 것을 보았다. 신중심주의 합리론에서 이법(이치)은 개별적인 진리들을 초월하며, 이 진리들을 발견하는 내재적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탁월하고 유일한 실재성이며, 진리들은 마치 이 실재성들의 국면들처럼 있다. 신앙과 예지(intellect) 사이의 대비는 무엇보다 신중심주의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법들 사이의 대비라는 것이 안셀무스의 모든 작품들에서처럼, 이 저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두 가지 대비란 한편으로 구원의 크리스트교 신이며, 다른 한편 신플라톤주의의 가지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이다. 하나(전자)는 다른 것(후자)과 똑 같이, 인간적 이법을 하나의 영역으로, - 거기서 이법의 정상적 훈련이 불가능하고 그리고 그 훈련이 관점에서 방향을 바꾸어야 하는 영역으로 - 향하게 한다. (500)
그러나 사람들은 두 신중심주의들 사이에 있는 깊은[심층에서] 발산(la divergence)을 상기한다. 하나는 크리스트교의 신적 드라마인데, 자기 속에 불연속적인 세계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불연속적 세계의 사건들인 창조, 죄, 속죄 등은 자유로운 존재의 예견할 수 없는 주도권(창도력)들에 기인한다. 다른 한편 역사없는 유일한 옹호자의 세계인데, 그것의 질서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질서이다.플라톤주의가 분리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하늘과 땅, 아버지와 아들, 영혼과 신체], 두 자연들을 연결하는 [육]체화 속에서, 그리고 세계 속에 근본적으로 새로운 법칙을 도입하는 체화 속에서,특히 볼 수 있는 발산[분화]이 있다. 그런데 왜 신은 인간으로 만들어지는가?(Cur Deus homo, 1098)에서 성 안셀무스는
fides quaerens intellectum(신앙은 이해하려고 애쓴다)의 자기 방법을 체화의 독단 자체에 적용했다. 그는 크리스트의 죽음으로부터 필연적이고 합리적인 특성을 보게 하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법은, 신-인간이 인간들을 위하여 나타났다가 죽었을 경우에만 인간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고백해야만 한다.왜냐하면 신 만이, 신적 지존을 위배했던 죄진 자를 위하여 만족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안셀무스는, 사람들이 보았던 대로, 크리스트교의 진리를 영원한 질서의 필연적 국면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기에 가정된 죄진 자를, 즉 그 자를 사물들에 대한 플라톤주의자의 통찰로 향하게 하는 일종의 합리적 필연성을, 도입했다. (500) (56RKD)
5절, 로스켈리누스 Roscelin de Compiègne 501
플라톤주의가 크리스트교와 매우 다르다고 할지라고, 그럼에도 플라톤주의는 삼신성의 독단에 필연적인 방법으로 연결된 안셀무스(1033-1109)에게 나타나야 마땅하다. 이때 플라톤주의는 로스켈레누스(Jean Roscelin, 1050경-1121)의 학설의 귀결들을 보게 되었다. 유명론의 꼬리표를 달고 있다고 요약되는 로스켈리누스의 관점들은, 이 모순발언자들(안셀무스와 아벨라르)의 몇몇 드문 발췌문들에 의해서만 알려진 관점들은, 보에티우스(480-524))의 논리학으로부터 태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보에티우스는, 사람들이 기억하기로, 심플리키우스(490-560경)와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들과 여기서 나온 변증론 전체는 사물들에게 아니라, 단어들이 사물들을 기호화한다는 한에서 단어들에게 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사고게는 [문법적인] 다섯 태(voix, 목소리, 또는 態)들을, 또는 사람들이 태들을 표현함에 있어서 항들을 분류할 뿐이었다. 로스켈리누스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았다. 류와 종, 실체와 성질 사이에 변증론이 기여하는 이 모든 구별들은 인간의 담론에 기인한 단지 언어적 구별들이라는 것이다.그러나 로스랭은 실재성으로 기초된 유일한 구별은 개별적 실체들의 구별이라고 덧붙였다.이것이 안셀무스가, 변증론자들의 학설을 세 가지 논문으로 요약한 구절 속에서, 이에 대해 말했던 바로 그것이다. “보편적 실체들은 목소리들[태들]의 숨결일 뿐이다. 색깔은 채색된 물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영혼과 결코 다르지 않다.” 로스랭은 다음처럼 말하고자 한다: 즉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인간을, 흰색과 흰 물체를, 지혜와 영혼을, 따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실제로 소크라테스이고, 흰색은 흰 물체이며, 지혜는 지혜로운 영혼이라는 것이다. 목소리들[태들]과 범주들에 따라서 사물들의 분할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 물체적 부분들로서 물체의 분할이 있다.이 후자의 분할은 아벨라르에 의하면 로슬랭에게는 완전히 임의적으로 또한 협약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즉 집과 같은 모든 물체는 분가분성이다. 집이 실재상으로 기초작업들, 벽들, 지붕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그 부분들의 하나를, 즉 예를 들어 지붕을, 마치 전체의 부분처럼 동시에 마치 세 가지 사물들의 열거에서 구별된 하나의 사물처럼, 고려하는 것이다. (501)
따라서 로스켈리누스는 감정을(그리고 그것은 유명론의 의미이다) 가졌던 것 같다; 즉 변증론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구별들은 언어 속에서만 현존하며, 사물 속에서 현존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삼신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버리도록 하는 스와송 종교회의(1092년)에서 그가 단죄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그는 보에티우스의 견해로부터 모든 귀결들을 끌어냈던 것 같은데,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단어로서 인격(personne)은 합리적 실체를 지칭한다. 이때부터 신 속에는 인격들만큼의 실체들이 있게 된다(삼신론, trithéisme) 아버지와 아들, 생성자와 생성된 자는 두 개의 구별된 실체이다. 세 개의 인격[격위]들은 마치 세 천사들이 따로 구별되듯이, 따로 있게 된다. 그리고 만일 이것들 사이에 통일성이 있다면, 그것은 의지(de volonté)와 역량(de pouvoir)의 통일성일 뿐이다. 이런 견해와 유명론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가? 안셀무스는 우리에게 그것을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그가 이런 변증론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이다. “그들의 정신이 신체적 이미지들 속에 참여한 만큼이나, 그 만큼 그 정신이 이미지들로부터 분간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어떻게 여러 인격들이 특별하게 유일한 인간인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여러 인격들이 유일한 신인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만일 사람들이 말과 그 말의 색깔 사이에 구별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신과 그의 다양한 관계를 구별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람들이 불가분적 인간과 인격을 구별할 수 없다면, 어떻게 크리스트를 받아들인 인간이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 결정적인 원문에 따르면, 삼신론(trithéisme)은 단지 로스랭의 오류들 일 뿐이다. 그의 유명론은 신학 전체를 전복하는 원리였다.왜냐하면 그는 구별해야 하지 않을 곳에서 구별했고, 구별해야 할 곳에서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보았다. 삼신성(Trinité) 속에서 분명한 개별적인 3실체를 보았다. 그는 신의 속성들을 – 선함, 권능 등등 – 신의 실체로부터 구별하기를 원치 않았다.게다가 (셋째 중요 점으로) 그는 예수로 체화된 신적 인격을 그의 인류성으로 구별할 수 없었다. 이 꽁삐에뉴(Compiègne) 성직자에게서는 분명하게 볼 필요가 있다. 즉 로스랭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찌거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를 이유있게 말했듯이, 거기에는 “학파의 문제가 더 이상 아니다, 만일 보편자들이 실재성이라면, 신학자는 오직 정식들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 자체에 관여해야 한다.” (502)
(13:25, 56S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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