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장독대/이영순
정겨운 돌담이 경계선을 이룬 장독대
농익은 내 어머니의 꿈으로 배를 채운
항아리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항아리 하나 하나엔
피붙이들을 향한 사랑이란 이유로
비워내지 못한 내 어머니의 젊은 날이 아직도
허우적거리며 발효醱酵 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하나 둘 자신들의 둥지를 찾아 떠난
그리움만 맴돌고 있는 휑한 공간에
어머니가 뿌려 놓은 꽃씨들이 자라
철을 따라 피고지며 보초步哨를 서고 있다
문득 정갈함에 끌리어 뚜껑을 열어 본
항아리는 파란 하늘을 담고 있고
어머니의 정제된 눈물만큼이나 짭쪼름함이
성긴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 온다
가을날의 기도/이영순
백로白露의 날개에
업혀 온 소슬바람
묵언으로 피워낸 찬서리 꽃
비록 곁에 서늘함으로 머물지라도
당신을 향한 열정과 그리움의
온도는 식지 않게 하시고
탱글하게 살이 오른 가을 햇살에
달콤함으로 자신을 숙성시키는
둥근 넉넉함의 사과를 닮게 하소서
그리하여 시간이 훼방을 놓는
가슴 시린 설움으로 계절의 행간에
누군가 외로움의 눈물짓는 자 있거든
나!
그를 향해 달콤한 사과향기로 쓰는
위로의 편지가 되게 하소서
봄의 서곡/이영순
긴 겨울밤 어둠을 밀어내는
물레질에 손끝은 아려 오고
목젖은 허연 쉰소리로 울어댑니다
서리 서리 떨리는 손놀림으로
자아낸 실타래
몇 개인지 기억조차 할 수 없고
파충류로 조류로도 간주되지 못한
시조새의 슬픔이
화석을 깨고 비상하는 꿈을 꾸듯
짧은 봄날의 아쉬움으로 떨던 은매화향이
아직은 빗장 풀지 못한
시린 삶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그리움의 전설/이영순
밤새 어둠속을 유영遊泳하던
물안개가 눈뜨는 아침
한 폭의 수묵화水墨畵가
호수위에 펼쳐진다
미처 내려놓지 못한
햇살 한 줌이 따라오고
코로나 왕관으로 위장한 우한 폐렴앞에
곱사등이 되어 버린 삶
사월, 하나님이 펼치는 꽃잔치는
봄날의 환희歡喜를 불러오고
초록빛 계절이 춤을 추며 달음질하여도
떠나보내지 못한 그리움이
미련으로 눈물짓고 있다
이제 다시 한 줌 햇살을 불러오는
아침이 온다면 나는
새벽을 몰고 온 물안개가 눈을 뜨는 동안
여름날 호숫가를 밝히는 꽃불이 되어
그대 곁에 서 있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