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영의 그림으로 배우는 자기계발 전략]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사제의 정 빗댄 소나무와 잣나무
사람의 됨됨이는 어려울 때 빛난다.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을 때에는 주변에 사람들이 붐빈다. 하지만 지위를 잃고 빈털터리가 되면 어떤가. 모른 척한다. 표정이 싸늘하다. 인간적으로 연결된 관계가 아닌 까닭이다. 일로서 맺어진 관계에서는 더 그렇다. 이용가치가 없으면 쉽게 멀어진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는지 모른다. 사람을 알려면 등산을 함께 해보라. 산이 높고 등반 과정이 힘들수록 효과적이다. 본성은 더위에 땀 흘리듯이 저절로 발톱을 드러낸다. 함께 역경을 헤쳐 온 이들은 다르다. 그들의 우정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적인 신뢰와 애정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추사체’로 유명한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우선 이상적(1804∼65)의 관계도 세파에 흔들리지 않았다. 사제 간의 변함없는 의리 또한 걸작이다.
‘한 지붕 세 가족’의 행복한 조화
대사성과 형조참판을 지낸 추사는 1840년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승승장구하다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사연이야 어찌되었건 사람들의 태도는 돌변한다. 권세가 있을 때 끈끈이처럼 달라붙던 사람들이 추사가 귀양 가자 모두 고개를 돌렸다. 추사는 울분을 삼켰다. 권력무상. 55세부터 63세까지, 유배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때 ‘세한도’를 그렸다. 옆으로 긴 화면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대칭되게 배치했다. 그 사이에 오두막 한 채를 앉혔다. 왼쪽 화면에는 글씨를 가득히 썼다.
언뜻 보면 ‘세한도’는 심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문인화의 이념으로 보면 다르다. 문인들은 형식보다 내용과 정신을 중시했다. 이 작품은 그림과 글과 글씨가 한데 어우러져, 서화일치의 절정을 연출한다.
추사는 이런 ‘세한도’를 오직 한 제자에게 보냈다. 왜 그랬을까.
‘어린왕자’의 마음과 ‘세한도’의 아름다움
조형적인 요소부터 살펴보자. 먼저 잣나무와 소나무의 조화다. 흥미롭게도 ‘세한도’에는 인적이 없다. 오두막(에 있을 것 같은) 주인은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는다. 큰 여백이 작품을 더 적막하게 만든다. 그런 가운데 엄격하게 배치된 몇 그루의 나무가 눈에 띈다. 우리는 이 나무를 통해서 오두막 주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부처님이 들어 보인 연꽃처럼, 오두막 주변에 세워둔 나무는 주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주인은 구구절절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거두절미!). 대신 바깥에 세워둔 나무만으로도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특히 오른쪽의 소나무는 포즈가 심상치 않다. 가지가 휘어져 있다. 만약 이 휘어진 가지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세한도’는 평범한 그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무의 직립은 상승하는 기운을 상징한다. 하지만 추사는 나무들의 강건한 수직성에 변화를 준다. 고개를 수그리듯이 소나무 가지를 안쪽으로 휘어지게 그린 것이다. 잣나무와 소나무가 연출하는 직선과 곡선, 긴장과 풀림의 조화가 빛나는 순간이다.
다음으로 오두막의 창(窓)이다. 만약 창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림이 갑갑하지 않았을까. 대개 관람자의 시선은 네 그루의 나무를 지나 오두막으로 향하고 다시 창을 향해 ‘줌인’한다(나무→오두막→창). 외형적으로 보면 시선의 중심은 창이다. 하지만 그 시선은 다시 한 번 창에서 바깥으로 분산 배치된다. 오두막 주인의 ‘마음의 대역’으로 보이는 나무로 분산되는 것이다(창→오두막→나무). ‘세한도’는 이런 시선의 집중(구심력)과 분산(원심력)의 균형이 절묘하다.
이런 그림은 ‘어린왕자’처럼 마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 어린왕자가 빈 상자 그림에서 양의 존재를 느끼듯이. 마음의 눈이 아니면 양도, 오두막의 주인도 볼 수가 없다.
한결같은 제자에게 바친 그림
‘세한도’의 감동은 작품에 구현된 조형미에서만 발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림을 낳은 사연도 향기롭다. ‘세한도’를 받은 사람은 이상적이었다. 그는 권력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제자의 예를 다했다. 역관으로 있으면서 두 차례나 북경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주었다. 그런 이상적의 인품을 추사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했다. 그래서 화면 오른쪽에 “날이 추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고 적었다. 얼마나 외롭고, 고마웠으면 제자에게 이런 글과 그림을 보냈을까.
‘세한도’의 오른쪽 나무에 눈길이 오래 머무는 데는 까닭이 있다. 두 그루의 나무가 젊은 제자와 연로한 스승을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머무는 자리는 달랐을지언정 그들의 의리는 추사체처럼 강건했다.
추사는 ‘세한도’라는 화제 옆에 이렇게 적었다. ‘우선시상(藕船是賞)’. 우선 이상적이 완상하라는 뜻이다. ‘세한도’는 단순한 문인화가 아니다. 먹물처럼 진한 의리의 결정체다.
/artmin@hanmail.net
■‘키포인트’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는 인생 최고의 재산이다. 넥타이와 구두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우정과 의리는 돈 으로 살 수 없다. 친구가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자신이 먼저 해주자. 친구는 곧 나다. 친구에게 잘 하는 것은 자신에게 잘 하는 것이다. 우정의 ‘세한도’는 그렇게 그려진다.
■도판 설명=추사 김정희, ‘세한도’, 종이에 수묵, 23.7×69.2㎝ 조선시대, 개인소장(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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