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59호
"지광국사현묘탑비"
고려시대 부도비를 대표하는 걸작.
지광국사께서 열반에 드신 지 18년 만인
고려 선종 2년(1085년)에 완성.
넓은 지대석 위에 힘차고 당당한 귀부가 놓이고
훤칠하고 장대한 비신이 거북 등에 곧게 서 있으며
그 위로 화려한 상륜부가 얹혀있다.
지대석의 구름무늬 위에 거북이 올라앉아 있는데
긴 목을 쭉 빼고 서쪽을 응시하고 있는 용머리의 목에는
물고기 비늘이 조각되어 있다.
바둑판처럼 조각된 거북의 등에는
칸칸마다 임금 왕자가 수놓아져 있다.
비신 바깥쪽으로 보상당초문을 조각하여 돌린 것만도
섬세하고 화려한데
그 양 측면으로 운룡을 깊게 새겨
생동감이 넘친다.
거북 등에 새겨진 王자는 국사로서 최고의 예우를 갖춘 유일한 사례이다
사대부의 갓 모양으로 생긴, 이수에 해당하는 상륜부는
연꽃과 구름 문양 등이 귀꽃에 이르기까지
조밀하고 현란하게 조각되어 있어
매우 화려하다.
비신의 맨 위에는 안상을 파고
그 안 중심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를
좌우로는 계수나무 밑의 토끼와
발이 셋 달린 새를 새겨 달과 해를 상징하였으며
그 주위로는 산과 구름, 비천, 봉황 등이 새겨져 있어 화려하기 그지없다.
안상 주변에도 온통 화려한 보상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구슬을 사이에 두고 희롱하는 두마리의 용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
원래 기단 네 모서리에 사자상이 1구씩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지금은 서울 세종로의 구 중앙박물관 뜰에 안치되어 있는
'지광국사부도'는 너무 아름답고 화려하여
미인박명 이듯이 일제 강점기때 일본 오사카 까지 반출되었다가 되돌아 왔으며
625 동란 때 파손되어 1975년 복원된
파란만장했던 부도이다.
기존의 부도와는 달리 탑처럼 네모난 형태의 특이한 부도인데
2층의 탑과 같은 모양에 '페르시아'풍의 창과 짧게 늘어진 커튼이 매우 이국적이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새로운 양식을 선보이며
우리나라 부도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중앙박물관 이전 시 논란이 많았으나
파손을 우려하여 현 경복궁 터에
외로히 자리하고 있다.
<인용>
'한국문화유산 답사회'의 '답사여행의 길잡이 7권'
"경기 남부와 남한강" 중에서.
◆지광국사(984~1067)
지광국사 해린(海麟)의 속성(俗姓)은 원씨(元氏), 자(字)는 거룡(巨龍), 아명(兒名)은 수몽(水夢)으로 원주(原州) 출신이다.
984년(성종 3)에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불교에 뜻이 깊어
법천사(法泉寺) 관웅(寬雄) 밑에서 수학(受學)하였고, 관웅이 개경(開京)으로 감에 따라 준광(俊光) 밑에서 삭발수도하였다.
해린이란 법명(法名)은 관웅이 붙여준 것이다.
999년(목종 2) 16세에 용흥사(龍興寺) 관단(官檀)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1005년(목종 8) 왕륜사(王輪寺) 대선장(大選場)에서 담경(談經) 시험을 보았는데,
그 뜻이 심오하고 법문(法文)도 출중하여 왕이 대덕(大德)이라는 법계(法階)를 내렸다.
1010년(현종 1) 법천사로 돌아가는 길에 도강(都講)인 진조(眞肇)를 만나 역산법(曆算法)을 배웠고,
1014년(현종 5)에 대사(大師)가 되었다.
1021년(현종 12) 개경 중흥사(重興寺)에서 설법하였는데, 논리·문장력·음운학(音韻學)의 실력이 대단하였다.
1021∼1030년 사이에 중대사(重大師)가 되었고, 덕종(德宗) 연간(1031∼1034)에 삼중대사(三重大師) 수좌(首座)가 되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의하였는데, 왕의 우대가 각별하였다.
1045년(정종 11)에 승통(僧統)이 되었고,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궁궐(宮闕)로 초빙되어 유심(唯心)의 묘의(妙義)를 강의하였다. 1054년(문종 8) 법상종의 총본산이었던 현화사(玄化寺)에 이석(移錫)하여 보수공사를 지휘하였고,
경전(經典)도 판각(板刻)하였다. 1056년(문종 10) 왕사(王師)가 되었고, 다음해에 국사(國師)가 되었다.
1059년(문종 13) 내전(內殿)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의 제일설법주(第一說法主)가 되었다.
1067년(문종 21)에 법천사로 돌아와 얼마 안 있어 입적하였다.
명봉산(鳴鳳山) 법천사 동쪽에서 다비(茶毗)하였는데, 문종이 깊이 애도하여 지광(智光)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고
원주창고에 있던 양곡으로 경비에 충당토록 하였다.
해린의 탑비는 1085년(선종 2)소현(韶顯)의 주관아래 세워졌는데, 제자로는 현화사(玄化寺)의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문종의 아들인 도생승통(道生僧統) 석규(釋窺), 수좌(首座)는 경현(慶玄) 등 1,370여명이 있다.
해린은 유학(儒學)과 노장(老莊), 역산(曆算)도 익혔으며 박학하고 문장도 뛰어났다.
그가 고려 불교계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시기는 73세에 왕사가 되어 84세로 법천사로 하산할 때까지로,
이후 법상종은 현종(顯宗)대에 현화사가 창건됨으로써 전성기를 맞게 된다.
즉 해린은 고려 법상종 중흥의 주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에 대해서 그가 강의한 것으로 화엄경에 나오는 유심묘의(唯心妙義)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법상종과 함께 당시 불교계에서 중요시되는 경전을 망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화사를 보수하고 경판(經板)을 판각하는 데 총지휘를 하였음을 볼 때 당시 귀족 불교계를 총괄하고 있었다.
첫댓글 측면 문양에 용트림이 정말 멋집니다.
맨위 새 돌들로 복원한 모습을보니
남대문 복원 그림과 아주 흡사하네요~
또 다시 천년의 세월이 해결해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