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31 주일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마르 12,2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다 율법 학자들은 구약성경의 율법서(토라), 즉 모세오경에 등장하는 율법을 모아 정리했더니, ‘~하라’는 긍정 명령이 248개, ‘~하지 마라’는 금지 명령이 365, 모두 합해 613가지 계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유명한 랍비들도 이 613개의 율법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랍비 힐렐은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네 이웃에게도 하게 하지 말라. 이것이 법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다만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황금률과 비슷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또 다른 유명한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아키바라는 랍비는 레위 19,18을 토대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모든 법의 원칙이다.”고 말했습니다. 랍비 샴마이는 모든 계명을 빠짐없이 준수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문인 신명 6,4-5의 ‘쉐마 이스라엘’을 인용하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29ㄴ-30)
모든 유다인들은 적어도 하루에 두 번, 즉 아침과 저녁에 이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경건한 유다인들은 모세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이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이마와 왼쪽 팔에 성구갑을 붙들어 매고 다녔고(신명 4,8-9 참조), 옷자락에 술을 달고 다녔습니다(민수 15,37-39).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레위 19,18을 인용하시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전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우리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전임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분리할 수 없고, 이 두 계명은 한 계명입니다.” “하느님 사랑없는 이웃 사랑은 맹목(盲目)이고 이웃 사랑없는 하느님 사랑은 공허(空虛)합니다.”
이러한 의미에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12.20-21)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 12,34) 그러나 이 말씀은 완전한 칭찬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는 않지만,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는 있지만, 하느님 나라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완전히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이중 계명을 머리로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신행합일(信行合一)].
야고보 사도가 증언하듯이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야고 2,17)이고,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죽은 믿음’과 ‘죽은 사랑’은 우리의 구원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야고 2,20 참조). 사도 요한도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말합니다.
사랑에 대한 글을 함께 나누며 오늘의 강론을 갈무리합니다.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고,
종교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찾지만
사랑은 그 두 가지, 곧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이다.
가장 미련한 것은 사랑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고
가장 슬픈 것은 사랑을 해보지 못하는 것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으로 나누는 사랑이고
가치 있는 사랑은 오직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헌신적인 사랑은 되돌려 받을 생각 없이 하는 사랑이다.
아름다운 사랑은 두 영혼이 하나가 되는 사랑이며
용기 있는 사랑은 사랑하고픈 사람과 나누는 사랑이며
순간의 사랑은 마음이 배제된 사랑이고
영원한 사랑은 마음이 합치된 사랑이며
끝없는 사랑은 죽음에 이르러서까지 나누는 사랑이다.
애절한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비굴한 사랑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사랑이고
외로운 사랑은 짝사랑이며
아쉬운 사랑은 미련이 남는 사랑이다.
고독한 사랑은 혼자서 나누는 사랑이다.
첫댓글 아멘
신부님 강론 말씀 잘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주간 동안 묵상 하면서 지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