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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8강
말씀/ 잠언 16:1-17:28
요절/ 잠언 16:3
인생 경영의 지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모 대학 논술시험에서 감독관의 한시간 일찍 시험지 배부로 엄청난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인생 여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변수입니다. 오래 전 어떤 분은 수능 예비소집에 갔다가 급체로 말미암아 수능을 망쳤고, 결과적으로 경희대로 왔고 경희대 목자의 삶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마음의 계획대로 인생이 펼쳐지면 좋겠지만, 그리 안될지라도 좋은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인내함으로 시간속에서 그것을 체험하는 것, 살아있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느니라” 경영이란 계획, plan입니다. 마음의 계획대로 일을 이루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떤 목자는 40살까지 학문, 50살까지 부, 60살에는 정치로 성공하는 목표를 세우고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교수 자리까지 올랐으니, 어느 정도 목표를 이룬 것 같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의 계획은 S대 항공공학과에 진학하여 비행기를 만들고 우주를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고2 때 아버지의 중풍병이 찾아와서 나의 계획을 완전히 틀어 놓았습니다. 말의 응답은 여호와로부터 나온다는 말씀은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여호와께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어차피 내 계획대로 되지 않을 테니까, 플랜이 필요 없다’는 극단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의 플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좌절할 필요도 없고, 나의 플랜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교만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겸손하면서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하나님은 심령을 감찰하십니다.(2) 사람은 겉모습에 속는데,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는 마음까지 아십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계획을 세웠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여호와께 맡기는 것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그 후에 따라오는 결과를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형들을 살피고 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처음 찾아간 곳에 형들이 없자,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형들의 이동한 장소까지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계기로 애굽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충성했는데, 끔찍한 결과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회의하며 돌아설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애굽에 팔려갔는데도 충성했습니다. 보디발에게 충성하고 감옥생활에서도 충성합니다.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은 눈앞의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아니하고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선하셔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습니다. 심지어 악인까지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였습니다.(4) 이는 악을 정당화하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아주었기에 요셉을 총리로 만들었다는, 그런 논리가 아닙니다. 형들은 끔찍한 악을 행하였는데,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반전시켜 당신의 주권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연을 가장하여 찾아옵니다. 인간의 계산으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4차 방정식, 5차 방정식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우연을 통해 하나님의 큰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러므로 교만을 떨지 말아야 합니다.(5) 스스로 다 안다는 생각, 우리끼리 힘을 합치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교만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는 교만한 인간의 마음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자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겸손은 외적으로 젠틀하게 대하는 자세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판단과 계획이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내적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때마다 인자와 진리로 죄를 사하여 주시고 붙들어주셔야만 여호와를 경외할 수 있고 죄악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6)
나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 내적 준비가 믿음으로 사는 인생 경영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스텝목자로 준비되기 위한 풀타임 목자생활의 첫 번째 훈련도 그러했습니다. 어학이나 신학공부가 아니었고 방언이나 금식 같은 은사훈련도 아니었습니다. UBF용어로 죽은 개 훈련입니다. 반려견 문화가 자리 잡은 요즘에는 합당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30여 년 전에는 ‘죽은 개는 발로 차도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여졌는데, 한마디로 자기가 사라지는 훈련입니다. 이 사람이 다가와서 이것을 해 달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 사람이 저렇게 해 달라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청소, 이삿짐 옮기기, 베이비 시터, 양들과 놀아주기, 서빙, 선교사 맞이하기..., 좋은 표현으로 ‘올라운드 플레이어’, 나쁜 표현으로 잡부역할입니다.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한달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 뒤돌아보면 특별히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생활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던 데서 주와 복음역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훈련입니다. 그런 훈련이 그립거나 여전히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잘못하면 엄청난 오해와 상처를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모습으로든지 여호와께 맡기는 훈련을 받아야 복음의 일군으로 살아갈 출발선에 서는 것입니다. 그 원리만큼은 분명합니다.
나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는 사람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그의 원수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복음의 일군이 맺어야 할 가장 위대한 열매가 관계성 회복입니다. 사람마다 원수가 있습니다. 원수? 하면 ‘북한의 김정은’을 떠올리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김정은에게 상처받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사는 어떤 사람, 사랑과 호의를 기대했는데 정반대의 것을 돌려준 인간, 그로 인해 상처받습니다. 가족 혹은 직장 동료나 학우가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주권을 믿지 못하면 그들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두신 계획의 목표는 화평입니다. 내게 보내신 사람들과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낯가림이 심한, 저 같은 INFP들은 원수가 아닌 새로운 사람들과 화평의 관계를 맺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이 되면 ‘INFP’의 한계를 넘어 화목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적게 버는 비능력자로 살아도 화평할 수 있다면, 많은 돈을 벌어도 어긋난 관계를 풀지 못하며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관계성 회복을 기대하지 못하는 것은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때입니다. ‘저 인간 뻔하다, 내가 다 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9) 여호와는 사람의 계획을 넘어 일하실 수 있습니다. 절대 믿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가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받을 수 있습니다. 사나운 눈과 혀로 상처주던 형제가 어느 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러 올 수 있습니다. 실은 그런 기회들이 왔었는데, 외면함으로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주었더라면’, 마지막 기회를 외면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가끔씩 봅니다. 믿음은 항상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10-15절에는 왕이 자주 등장합니다. 왕, 곧 리더의 경영에 대한 말씀입니다. 10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나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 모조리 감옥에 잡아넣을 수 있습니다. 반면 나에게 아부하는 인간들에게 무한 특혜를 줄 수 있습니다. 왕의 자리에 찾아오는 유혹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붙들어야 공정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17장은 ‘왕은 율법의 등사본을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신17:18-20) 공평한 저울과 접시저울처럼 옳고 그름을 정확히 달아보아야 합니다.(11)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판결은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미워해야 합니다.(12) 의로운 입술, 충신들의 말이 귀에 거슬린다며 멀리하지 말아야 합니다.(13) 리더의 말은 죽음의 사자처럼 무서운 권위를 가져야 하지만, 지혜로운 의견이라면 듣고 바꿀 수도 있어야 합니다.(14) 생명을 주는 것을 기뻐하고, 늦은 비처럼 적절한 때에 은택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15) 돈보다 지혜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16) 17절을 보십시오.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샛길로 다니면 빠르게 유익을 얻는데, 군자는 정정당당하게 바른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영혼을 보전합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거만하면 아무리 탁월한 자라도 넘어지고 맙니다.(18)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좋습니다.(19) 삼가 말씀에 집중하여 좋은 것을 얻어야 합니다.(20) 그러면 명철한 자로 인정받을 것이며, 학식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21) 우리가 성경 공부하는 것, 보통 사람들과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노는 것입니다. 리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았다? 은혜, 진리, 용서, 희생, 섭리..., 세상의 희귀광물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남다른 통찰을 갖게 된 것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그 안에 생명샘을 갖는 것입니다.(22) 물론 미련한 영혼은 생명샘이 아니라 마음을 힘들게 하는 징계거리로 느낄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말씀을 통해 슬기로운 말과 지식을 더합니다.(23) 말씀을 꿀송이처럼 달게 받아들여 당충전처럼 활력을 얻습니다.(24)
세상의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25-30) 25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필경은 사망에 이르는 길이 있습니다. 26-30절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를 찾는 것보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더 가치있게 여깁니다.(26) 불량한 사람은 악을 꾀하며 입으로 거칠고 맹렬한 말을 뿜어내는데, 그것을 강함으로 생각합니다.(27) 패역한 자는 거짓말로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친구를 이간질하는데, 그것을 똑똑한 능력으로 여깁니다.(28) 강포한 사람은 함께 악을 행하자며 그 이웃을 선동하는 것을 리더쉽으로 생각합니다.(29) 30절의 눈짓을 하는 자는 곧 권모술수를 부리는 자이며, 입술을 닫는 자는 침묵으로 눈감아주는 자입니다. 드러나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었으니, 꾀돌이처럼 생각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아보이는데, 실은 사망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백발은 공의롭게 살면서 얻은 장수를 상징합니다. 우리 머리가 하얗게 되기까지 말씀을 좇아 공의롭게 살았다면, 머리에 왕관을 쓴 권력자보다 빛나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 곧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남의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인생 경영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32)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일의 결정은 여호와께 있습니다.(33) 범사에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고 따라가는 자들이 인생 경영에서 진정한 승자입니다.
17장은 마음이 연단된 자들이 누리게 될 축복을 말씀합니다. 17장1절을 읽겠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요즘은 1인 가구시대여서, 제육이 가득한 집을 최고로 여길지 모르겠습니다. 다툴 사람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툼을 감당할 멘탈을 준비하지 못해 나 홀로 세계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연단된 사람은 1절 말씀의 진리를 압니다. 함께 화목하는 즐거움은 마른 떡 하나의 궁핍마저 즐거움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아무리 풍요로와도 함께 하는 사람과 매일같이 싸우며 살아간다면, 그곳이 지옥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빛을 발합니다. 종의 신분을 가졌을지라도 주인의 아들처럼 대우받게 만들 수 있습니다.(2)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듯이,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십니다.(3) 마음을 연단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의 말에 쉽게 휘둘립니다. 사악한 말, 거짓말을 잘 넘아갑니다.(4)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모릅니다.(5) 다른 이가 재앙을 당하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마음을 연단하는 것은 말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뇌물이 보석 같다는 말씀은 보석을 받은 것처럼 기분 좋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뇌물을 주자? 그런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뇌물로 상대방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어 기쁨을 주라는 말씀입니다.(9) 그것이 사랑입니다.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고 거듭하여 들추어내면 친한 친구 사이도 멀어집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죄를 보고 눈감아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맛에 빠지지 말고 돌이켜 회개하기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총명한 사람은 한마디 말을 들어도 매 백대를 맞는 것보다 깊이 새겨들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담은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습니다.
11절의 반역만 힘쓰는 자는 항상 불평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래도 불만, 저래도 불만.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잔인한 사자(lion)를 만나는 것처럼 위험합니다. 그의 불평 바이러스가 내 영혼을 병들일 수 있습니다. 모임에 대한 자부심을 깨고 열정을 꺼뜨리고 삐딱선을 타게 만듭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그런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12) 선을 입었는데, 악으로 갚는 자들이 있습니다.(13) 100가지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한두 가지 서운한 일을 가지고 공격하는 자들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그들의 집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4-20절은 다툼에 대한 잠언입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 둑에서 물이 새면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작은 다툼을 방치하면 큰 비극으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층간 소음이 커져 살인이 되기도 하고 주차 분쟁이 방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대처는 처음부터 다툼을 멈추는 것입니다. 감정 섞인 말을 주고 받으며 갈등의 수위를 높아지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그 자리를 피하든지, 주제를 다른 것으로 돌리든지, 하여간 싸움을 피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투지 않아야 한다고 해서 상대방의 말을 무조건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15절입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거나 의인을 악하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의 미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쉽지 않습니다. 다툼을 피하면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지혜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16) 친구 혹은 위급한 때를 함께 할 수 있는 형제 정도가 악한 것을 악하다 말할지라도, 혹은 의로운 것을 의롭다 말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17) 물론 지혜 없는 사람은 아무나 사람을 의지하다가 낭패를 당합니다.(18)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다툼은 좋은 열매가 아닌 죄의 열매를 맺습니다.(19) 자기 마음을 높여 다투는 것은 파괴를 불러옵니다. 상대방을 파괴하고 자기도 파괴합니다. 마음이 굽은 자, 즉 시선이 삐딱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합니다. 혀가 패역한 자, 속이는 자는 재앙을 만나게 합니다.(20)
21절입니다. “미련한 자를 낳은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 자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할 사람은 아예 낳지도 말라는 말씀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모 보기에 미련하지 않은 자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모의 눈에는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물가에서 뛰노는 어린 아이처럼 어리게 보입니다. 90살 먹은 아버지가 70살 먹은 아들에게 ‘차조심하라, 길조심하라’ 당부하는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부모의 숙명은 근심입니다. ‘화려한 왕궁에 살아도 자녀가 미련하면 낙이 없다’, 솔로몬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자녀의 성장은 시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시간 자체가 해결해주지는 않습니다. 말씀의 감동이 있어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부지런히 기도하고 훈계해야 할 이유입니다. 자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은 부모에게 최고의 양약입니다.(22) 목자에게 최고의 양약도 죄에 눌린 한 영혼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반면 재판관처럼 탁월한 위치에 설지라도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부모의 뼈를 마르게 하는 근심이 됩니다.(23)
24절을 보십시오. 지혜는 명철한 마음을 준비하면 언제든지 배울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마음이 연단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시킬 것은 차고 넘쳤습니다. 하지만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둡니다. 삶의 현장이 아닌 특별한 장소에서, 지금이 아닌 먼 미래가 되어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말씀이 아닌 부와 권력에 희망을 둡니다. 미련한 생각은 아비의 근심과 어미의 고통이 됩니다.(25) 의인을 벌하고 귀인을 정직하다며 때리는, 분별력 제로의 인생을 삽니다.(26)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아끼고 냉철하게 자신과 사람들을 살펴봅니다.(27) 무슨 말을 할지 모를 때에는 잠잠합니다.(28) 이 말, 저 말, 감정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어 다툼을 일으키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을 갖다보면 요동치는 마음이 가라앉고 차분해져서 지혜로운 말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다툼에 빠질 위기를 넘어서는 것이 연단입니다. 한번 두 번 연단을 받을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강해집니다. 여호와의 손길을 따라 마음을 연단받고 열매맺는 복된 자들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