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규의 시세계는 민중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개인적 의미, 사회적 의미, 존재론적 의미의 세 가지 층위가 결합의 축으로 변증법을 지향한다. 각 시편은 추상적인 상상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을 드러내고 체험의 진솔성을 생동하는 언어로 묘사한다. 이러한 구체적 본질이 생존의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시의 힘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인 의미의 시작품은 다음과 같다.
거울 속 시계는 6시부터 거꾸로 돈다
홍화꽃 색으로 입술을 그리는 금홍
머리가 엉겅퀴덤불로 헝클어진 이상
노을빛 화장냄새로 체취가 밴 방안에
절망의 수위로 어둠이 차오른 공허 속
이상이 박제가 되어 홀로 앉아있다
13인 아해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골목이 목젖을 잠근 밤의 적막 속에서
노래방 도우미로 나간 금홍을 그린다
달하 노피곰 도더샤, 비는 정읍사 같은
실업의 날들에 여인네 마음을 떨치고
만월로 정보지 구인란에 밑줄을 그린다
-「이상, 현실을 읽다」전문
이상을 지금, 여기, 나로 되살려 고백자의 진술로 패러디한다. 과거 인물과 문학적 유산에서 비평적 거리를 견지하며 21세기 실업자 이상을 그린다. 현실에서도 이상은 퇴폐적 탐미주의자이며 박제된 허무주의자다. 노래방에 나가는 금홍이에게 기생하며 뜻 없는 날을 보내는 정읍사 여인 같은 나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시인은 무위도식하는 이상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고 생존에 뜨거운 핏줄로 밑줄을 긋는 새날의 전망을 바라보는 자로 재창조한다. 이상이 전철에서 행상을 하는 능동형의 인물로(「윷놀이」), 시적 화자를 소로 비유해 고삐를 끌고 충실한 하루치의 삶을 위해 새벽 인력시장을 찾아 노동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으로(「인력시장에서」) 적극적인 사회의 존재로 그린다.
또한 사회적 의미의 시작품은 다음과 같다.
검은 상복처럼 입성에 때 낀
태자가 왕조의 노을빛에
긴 그리메를 늘인 채 걷고 있다
성골의 후예임을 드러내는
불거진 광대뼈와 첨성대 위에 뜬
북극성처럼 형형한 눈빛
은행나무가 단풍든 금관을 씌워주며
알알이 익은 눈물방울을 떨군다
천년 사직을 일으키소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소서
땅바닥에 그림자를 엎드려 통곡하는
가로수들이 한 발 한 걸음마다
곱게 물든 낙엽을 깔아준다
군왕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도에
가슴 속에서 성덕대왕신종이 울립니다
만 백성을 지키지 못한 죄인입니다
어찌 하늘을 우러를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깊이 숙인 걸음에 옥쇄가 찍힌다
왕조를 하직할 게 아니라
왕권을 부흥시키겠다는 결의가
발자국에 돋을무늬로 되살아난다
머리 푼 바람이 태자의 큰 뜻을 읽고
서라벌로 파발마를 달린다
햇무리를 두른 환두대도의 칼날을
어둠이 칼집 속에 고이 품는다
밤하늘에서 폭포가 용틀임하듯 쏟아지는
황금달빛의 물보라가
선왕들의 별자리를 새겨놓는다
혈맥이 뜨겁게 파동 치는 지문으로
역대 왕의 이름을 짚으며
노숙자사내가 금강산골짜기 같은
서울역 지하도의 유배지에 든다
-「마의태자」전문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태자이다.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한 왕조와 한 가계는 등가성으로 비유가 가능할 것이므로 마의태자와 노숙자는 동병상련의 친연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노숙자에게 성골의 혈통을 부여하여 존귀한 존재로 인식한다. 노숙자로의 전락은 나태와 방탕으로 인한 개인적 차원이 아닌 풍요를 이룬 근대 산업의 원리와 구조가 파멸적인 재앙인 사회적 근원으로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 사회’에서 파생한 것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현실의 마의태자는 부정적 자기 동일성에 머물지 않고 좌절에서 반전을 꾀한다. 노숙자가 역대 왕의 이름을 짚는 것은 영화에 대한 낭만적 향수가 아니라 새 생의 결의를 다지는 행위로 독자들은 그의 앞날을 희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집 제목으로 정한 존재론적 의미의 시작품을 보자.
전지적 하늘을 일인칭시점으로 나네
자유로운 구속으로 그물매듭을 엮은
점묘법으로 화폭을 채운 새떼
시간을 떠메고 공간을 이동하네
많다는 것(多)은
두 겹의 석양(夕)을 포개놓은 어둠처럼
서로의 관계가 낯설다는 것이네
울대를 진동시키는 울음소리가
사시 눈길의 해석에 노래로 오독되네
웃음이 비웃음으로 어긋나는
대화 속 고독한 독백체
내이에 도돌이표를 그린
양쪽 귀에 솟은 섬을 오가는 도래지에서
낱알을 두고 날카로운 부리를 세우네
모래주머니에 쌓은 집을 허물고
착지점에서 비상하는 긴 여정의 서사
날갯죽지에 빗금으로 뻗은 힘줄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며
달빛 속 태음력을 넘기네
생의 퍼즐을 풀지 못한 채
자전하는 다트 판에 화살로 꽂히는 새
점수판에 찍힌 영(靈)으로
조감도를 펼친 천체에서
새파란 별 한 점이 반짝이네
-「철새의 일인칭」전문
이 작품은 존재론적 세계관을 부정의 언어로 드러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단독자’로서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말하고 있다. 철새의 군집은 맹금류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생존의 수단일 뿐 개체는 고되고 외로운 여정을 치열하게 영위할 수밖에 없다. 조화로운 진실 속에서의 존재가 아니라 불화를 겪는 것으로 묘사하고 왜곡된 관계인 소통의 단절로 타자가 해석된다. 생존의 조건에 따른 공간 이동은 자신의 몸에 축적 지도를 새기며 한 계절을 지내고 떠나야 하기에 모래로 지은 집같이 안주는 불안하고 낱알을 두고 경쟁하여야 하며 새로운 도래지로 도달해야 할 미래로 떠날 수밖에 없다. “달력 속 태음력을 넘긴”다는 것은 포식자를 피해 밤에 이동하는 생의 내력을 그린 것이다. 니체가 말한 ‘고통의 드라마’ 속에서도 존재의 비의를 알지 못하고 실존은 문제의 형태로 남게 된다. 자전하는 다트 판이란 지구의 자전에 대한 비유이고 영은 현생에서 제로를 뜻하는 무상성을 나태내고 한자로 표기한 영(靈)은 후생에서 영혼의 영원성을 말하는 중의적 표현을 사용했다. 철새의 일생이 본원으로 회귀한 신생의 별로 청색 반점처럼 우주율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다. 삶은 매순간 사건을 발생시키고 사건은 서사를 구축하는 구조로 단편 서사시 같은 느낌을 준다.
맹문재 문학평론가는 서상규 시인의 폭넓고 깊은 ‘비유의 시학’에 주목을 하고 있다. 자기 체험처럼 육화시켜 따스한 시선으로 드러낸 다양한 비유는 인간학적 성찰에서 발생한 인간의 미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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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을 시를 만드는 사람(maker)으로 인식했다. 그와 같은 면은 “시인은 운율을 만들기보다 플롯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확인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말을 통해 시인은 작품의 플롯을 만드는 일을 운율을 만드는 일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시학』에서 내세운 주제는 플롯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의 문제였는데, 시인을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 다시 말해 시의 제작자로 본 것은 주목된다.
서상규 시인의 경우에 특히 시를 만드는 면이 느껴진다. 시인은 가난한 살림을 영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해 사회의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일용공, 청소부, 실업자, 심지어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노숙자 등을 시작품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시인의 시세계는 우리 시문학사에서 이어져온 민중시 혹은 노동시의 범주로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 형식이 기존의 민중시 혹은 노동시와는 차원이 다르기에 주목된다. 시의 형식은 행이나 연은 물론이고 어휘, 분위기, 어조, 운율, 비유, 상상력, 구두점, 문맥, 이미지 등 다양할 수 있는데, 서상규 시인의 시세계에서는 특히 비유가 관심을 끈다. 비유의 폭이 넓고도 깊어 기존의 민중시 혹은 노동시에 비해 한층 더 환기력을 띤다. 시작품으로 담은 대상들의 인간 가치를 보다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맹문재(시인,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