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뒤 1767년에는 참판에서 지중추부사로 추천을 받아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 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그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그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그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그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에게 ‘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淸選考
* 풍산의 우렁골 … 전의이씨의 유적들
풍산에서 남동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 우렁골, 바로 예안이씨와 전의이씨의 세거지가 보인다. 예안이씨와 전의이씨. 원래는 한 성씨였으나, 일찍부터 본을 따로하여 전개되어 내려왔다. 그리고 두 성씨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풍산의 우렁골에 입향하여 오래도록 세거하여 오고 있다.
"풍산읍 소재지에서 동쪽, 나즈막한 산을 등지고 안동지방에서 전의이씨와 예안이씨가 5백년간 세거하여 오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통칭 예안이씨 마을로 알려져 있으나, 동리 중간의 작은 골짜기에 전의이씨 야소헌 이화(1421-1489; 시호는 양정)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영가지》에 판서를 지낸 이웅이 안동에 우거하여 왔고, 아들 화는 무용이 있어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화의 동생 강의 처 의성김씨(도만호 천의 따님)의 정려사적도 열녀 조에 올려있다." 서주석씨의 기록이다.
서주석씨에 의하면 우렁골에 먼저 입향한 것은 전의이씨이다. 세조시대에 전의이씨인 이화가 만 년에 안동으로 내려와 풍산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화는 정승 정창손(1402-1487)의 사위가 되어 세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 내려와 침류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7대손 산두(호 나졸재)는 문과에 급제하여서도 청빈하게 지냈는데, 영조의 지우를 얻어 지중추부사가 되고, 기로소에도 들었으며, (영조가) 화원을 내려보내 초상도 그리게 하였다. 뒤에 풍암서원에 제향되었으나, 서원은 철폐되고 '어필영정각'만 남았다. 그리고 양정공 화를 모신 사당 지산사(존경사)와 후손 문한의 저택 일성당도 있다." 역시 서주석씨의 기록이다.
서주석씨가 위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류정은 우렁골 중간마을의 깊은 골짜기 속에 있다. 산을 남쪽에 두고 북쪽의 시내를 향해 자리잡은 것이 우렁골의 일반적 마을 배치이므로, 중간마을 깊은 골짜기라고 하는 것도 남쪽의 산 능선을 향해 뻗어 들어간 골짜기 끝을 말한다. 산은 높지 않다. 차라리 구릉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정도이다. 산의 흙은 모래가 많이 섞여있으며, 참나무 외에는 다른 나무를 보기 어려웠고, 풀도 별로 자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산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골짜기 끝, 동쪽 산의 능선 위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침류정이다.
침류정으로 오르는 좁고 나직한 길은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참나무 잎과 솔잎이 반반씩 섞인 낙엽이다. 소나무는 주변 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침류정 앞에는 여러 백년은 묵었을 소나무 하나가 늠름한 자태로 버티고 서 있었다. 솔잎은 그 소나무로부터 떨어져 침류정의 기와지붕 위에, 침류정으로 오르는 경사진 길 위에,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밝은 갈색의 참나무 낙엽과 진한 주황색의 마른 솔잎은 궁합이 잘 맞는 짝인 듯 싶었다. 그것들의 어울림은 침류정 주변을 전체적으로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침류정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으며,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침류정의 앞쪽 낮은 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현판 아래쪽으로 보이는 마루의 살창에는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원이 중첩되고, 음 양이 서로 교차하면서 표시되어 있는 태극문양이 세 개 붙어 있었다. 침류정 아래, 계곡의 바닥쪽으로는 양정공 이화를 모신 '존경사'라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문이 잠긴채였다. '존경사'의 위쪽으로는 '어필영정각'이 있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어필영정각'은 이산두의 영정을 모신 집이다. '어필영정각'은 울타리와 대문을 새로 만든 모양이었는데, 바깥 대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의 문들은 빠짐없이 잠겨 있어서 '영정'을 볼 수는 없었다. '어필영정각'의 목재와 위쪽의 흙 벽에는 페인트칠을 하였던 것 같은데, 페인트칠이 벗겨지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필영정각'은 영조가 이산두의 화상을 그리게 한 것과 연관이 있다. 《실록》에 의하면 이산두의 화상이 그려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영조는) 기사(耆社)에 새로 들어온 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기사의 여러 당상들을 불러 본사(本社)의 연회(宴會) 때 영남인으로 나이 90여세가 된 이산두(李山斗)란 자가 있었는지를 묻고, 화사(畵師)에게 그 초상을 그려 가지고 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사에 들어갔는데, 그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했었다.'고 하였다." '어필영정각'은 아마도 그 때 그려진 이산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집인 모양이었다. '침류정'과 '어필영정각'이 있는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의 중간쯤 되는 곳에는 '일성당'이 있다. '일성당'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 집은 서기 1680년 경 이문한 선생께서 세운 민가주택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 집으로 조선조 전통민가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집의 이름을 '일성당'이라 한 것은 외당에 독서실을 배치하고 하루하루를 반성한다는 뜻으로 현판을 계첨하였기 때문이다." '일성당'은 새로 보수를 하였고, 벽면에는 흙칠을 하여 산뜻하게 꾸몄다. 바깥채로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위쪽으로는 마름모꼴의 살창이 세 개 마련되어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쪽으로는 고방이 붙어 있었는데, 고방의 위쪽으로는 작은 원형의 살창이 세 개 붙어있기도 하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왼쪽으로는 작은 사랑채가 붙어 있었는데, 사랑채의 왼쪽 끝에 있는 작은 마루 앞 뜰에는 길쭉한 섬돌이 놓여 있었다.
바깥 마당의 길쪽으로는 아담한 규모의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있고, 문짝은 닫히지 않게 되어 활짝 열려있는 모습이었다. 하긴 문짝이 닫힌다고 하여도, 그 효용성은 없었다. 문짝의 기능은 효과적인 차단에 있을 것인데, 이 변소는 이미 차단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이 다 무너지고, 흙벽의 속 뼈대를 이루었던 수수깡 엮은 것도 뜯겨져 나가버린 부분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여러개의 사각형 창을 일부러 벽면에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위로 세 개, 아래로 세 개, 수수깡 흙벽을 뚫고 만들어진 창(?)들은 위와 아래 2열로 늘어서서 변소 안쪽을 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나마 길쪽으로는 새로 손을 보아서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는데, 그것이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 놓은 것이라놔서, 변소의 고전적 품격을 유지하는데는 조금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우렁골에는 5백년 전의이씨의 삶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우렁골에서의 전의이씨의 삶은 종가를 중심으로 하여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렁골에서 우리는 전의이씨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내려왔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는 있었지만, 종가와 종가의 삶, 종가의 역사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이문한의 일성당 뿐이었는데, 이 집에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그 집에서 전개된 삶이 우렁골 전의이씨의 역사를 얼마큼 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 전의이씨 상계의 역사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예안이씨는 전의이씨에 속한다. 전의이씨의 한 갈래가 갈라져나와 예안이라는 관향을 따로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안이씨의 상계는 전의이씨의 상계와 일치한다고 하겠다. 전의이씨는 고려초로부터 시작된다. 많은 성씨들이 그러하듯이 전의이씨도 고려태조의 건국과정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부터 혈족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이다. "고려 태조 조에 3한을 통합할 때 익찬2등공신이고, 3중대광이며, 태사를 지냈고, 전산후이다. 시호는 성절이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족보》의 <전의이씨세계> 부분에 1세로 기재되어 있는 이도에 관한 기록이다.
"《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태조가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할 때 금강의 홍수 때문에 남쪽으로의 진출 길이 막힌 것을 공께서 강을 건널 계책을 주도적으로 제출한 공이 크므로 도(棹)라는 이름을 내렸다." 역시 《족보》의 기록이다. 이렇게 고려왕조의 창업에 일정한 공을 세움으로써 이도는 전의이씨의 시조가 된다.
이도의 아들 이강은 정용위대장군이고, 이강의 아들 이수영은 병부상서이다. 1세 이도 이하 5세 이윤관까지, 전의이씨 세계는 단선으로 흘러 내려간다. 6세에 이르러서야 의, 신, 순 등 세 명의 아들이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세 이후 8세까지의 묘소는 모두 실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전의이씨의 상계가 외형상으로는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명료성을 띠는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여 준다. 다른 대부분의 성씨의 상계가 다 그러하듯이, 전의이씨의 상계도 '남겨진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찾아진 역사'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리라는 말이다.
전의이씨의 6세로 기록되어 있는 의, 신, 순 등 3형제도 의와 신은 후손이 전하여지지 않고, 셋째인 순의 후손만이 전하여진다. 이순의 아들은 천이다. 천은 자가 수덕이고, 호가 동암수이다. 정헌대부로 천양대장군이며, 문하평장사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장군 이천이 수군을 이끌고 남하, 고종 병진년(1256)에 온수현(아산군)에서 몽고병을 무찌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백여명을 탈환하였다고 한다." 역시《족보》의 기록이다.
이천은 자원, 혼, 자화 등의 세 아들을 둔다. 이자원은 직문한서인데, 정순대부 성균관대사성으로 추봉되었다. 배위는 안동김씨이다. 이혼은 초명이 자분이고, 처음의 자가 거화였다. 나중에는 자를 태초로 바꾸었으며, 호는 몽암이다. 고려 고종 임자년(1252)에 출생하여 향년 61세로 충선왕 임자년(1312)에 죽었다. "원종 시대에 17세로 급제하여 … 정승으로 치사하였다. 예안백으로 봉하여졌으며, 시호는 문장이다."《족보》의 기록이다.
이자화는 지밀직사사 선부전서이다. 이들 이천의 세 아들 중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첫째 이자원과 둘째 이혼이다. 이자원은 전의이씨 8세로 종계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으며, 배위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언충을 두었다. 이언충은 자가 입지이고, 호가 운제이며, 원종 계유년(1273)에 출생하여 1292년에 사마시에 장원을 하고, 1294년에 문과에 급제를 한다. 그는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를 역임하였으며, 충숙왕 무인년(1338)에 66세로 타계한다. 시호는 문의이다. 그는 처음 부인 광주김씨와 나중 부인 남양홍씨 등, 두 명의 부인에게서 다섯 아들을 둔다.
이언충의 첫째아들은 광기이다. 그는 광정대부 정수문학을 지냈다. 그의 후손들은 전의이씨 종계의 흐름을 이어나가서 대사성공파를 이룬다. 이언충의 둘째아들은 광익이다. 이광익은 세 아들을 두는데, 그 중 둘째인 사례의 아들이 전의이씨 안동 입향조 되는 웅이고, 웅의 둘째 아들이 풍산의 우렁골에 터를 잡은 화이다. 이화의 부인은 정창손의 딸이고, 이화는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전의이씨에서 예안이씨로
예안이씨의 《족보》가 상계로 전의이씨 세계를 포함하게 된 것은 <예안이씨족보>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의 일이다. 안동 예안이씨의 시조인 사직공 이필간의 16대손이 되는 이준영이 <사직공파족보>의 <서문>에서 적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예안이씨족보>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 서울의 집을 떠나 남하하여 안동부 풍산현에 은거하신지라 대대로 전하여진 문적 한 장도 없었으니 어찌 족보 간행의 생각인들 하였으랴! 다만 우리 예안이씨가 전의 이태사의 자손이라는 것을 풍문으로만 들어오면서, 그 고증을 찾기 위하여 한없이 고심하다가 1650년대에 이르러 고산(이유장) 종선조께서 선부조의 유지를 받들어 국내 저명한 가문의 문헌을 찾아다니시다가 마침내 한양의 정사문(시술)이라는 대학자가 있어 이름난 사족의 계보는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학자를 찾아가서 그분이 수록하여 놓은 문자 중에서 우리 제학(이익) 선조가 전의 이혼(태사공 8세손)의 손자이며, 언승의 아들로써 본관을 예안으로 이적하였다는 사적의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찾아다니던 문적이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지니, 고산선생의 반가운 심정을 어찌 필설로서 다 기록하며, 자손들 또한 그 즐거움이 어떠하였으랴! 그러나 미흡한 것은 제학공께서 예안으로 이적하신 연유에 대한 근거의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천만이다. 그 후 선생께서 기호, 영호 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종친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빠짐없이 편답(두루 돌아다님)하여 그 손록(후손들의 기록)을 수합해서 선생 주관으로 간행한 것이 숭정 을묘(1675)보로써, 예안이씨의 초보(처음 족보)이다."
예안이씨의 최초 족보는 이렇게 하여 출현한다. 다른 성씨의 족보들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안이씨를 전의이씨의 상계에 구체적으로 연결시키시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현존하는 예안이씨의 족보에 의하면, 예안이씨의 시조는 이익이다. 이익은 자가 입우이며, 보문관 제학이고, 예안백에 봉하여졌다. 《족보》는 제학공 이익을 전의이씨 10세 손으로 기록한다. 《족보》의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전의이씨세계>에 의하면, 이익의 세계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이천의 둘째아들 이혼에게로 연결된다.
우리는 이혼이 '예안백'에 봉해졌었다는 기록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때부터 전의이씨의 한 갈래인 이혼의 후손들은 예안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혼은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둔다. 장자는 언승인데, 대장군이다. 언승은 <전의이씨세계>에 별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대장군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배위조차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족보》의 <전의이씨세계>에 의하면 언승은 1남1녀를 둔다. 그 중 아들이 이익인 것이다.
이익은 전의이씨의 10세이면서 예안이씨의 1세이다. 그가 자신의 조부인 이혼이 그러하였듯이 예안백으로 봉하여지는 것은 전의이씨의 한 갈래가 예안으로 본관을 따로 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조부와 손자가 거듭 예안백으로 봉하여지게 된 인연을 소중히 여긴 탓이라고 하겠다.
* 예안이씨의 역사 … 우렁골 입향을 중심으로
예안이씨의 1세인 이익은 언양김씨와의 사이에서 변을 낳는다. 이변은 성균관 제주를 지냈으며, 배위는 문화유씨이다. 이변은 1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송이다. 이송은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숭정대부 판중추군부판서이다. 고려 우왕 무진년(1388)에 전법판서 직책에 있었는데, 염흥방의 일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 등과 함께 한 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성군에 봉해지고 삼사좌사가 되었다. 이인임의 심복 임견미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모함하여 축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하였으며, 백성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 1387년 그의 종 이광이 전 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강탈하자 이에 분개한 조반이 이광을 잡아 죽이므로, 조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조반과 그 가족을 잡아 순군옥에 가두고 상만호의 지위를 이용하여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이에 그들의 행패를 미워하던 우왕 및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하여 그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염흥방 관계 기록이다.
"…고려 32대 우왕 무진년(1388) 정월 12일 판서(제학공의 손자 송)공께서 인척인 염흥방의 화에 연좌될 시, 애기 형제 분(천과 온)이 계시어 불과 10세 전후의 유소년이었으나 연좌의 화를 면할 수 없었는데, 한 산승이 어여삐여기사 암혈(석굴)에 숨겨주어서 신명을 보전하여…" <사직공파족보 서문>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이송이 염흥방의 일에 연루된 것은 인척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송의 후 부인이 곡성염씨였던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송은 천과 온, 두 아들을 두었다.
이천의 자는 자견이고, 호는 백곡이며, 또 다른 호는 불곡이다. 고려 우왕 병진년(1376)에 태어나서 조선 문종 신미년(1451)에 죽었다. 향년은 76세였다. "태종 임오년(1402) 무과에, 경인년(1410) 중시에 급제. … 공조참판 자헌대부 판중추원사 병조판서 호조판서 도절제사를 거쳐 보국 숭록대부로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시호는 익양이다." 족보의 기록이다.
이온은 태종시대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해서 판군기감사에 이르렀으며, 증직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의 직책을 하사받았다. 이온은 2남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신과 시이다. 이온의 장자인 신은 세종시대(143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군자감 주부를 지냈고, 죄찬성을 증직으로 받았다. 5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효간, 의간, 보간, 필간, 석간 등이다. 우렁골의 예안이씨들은 네째 필간의 후손들이다.
이신의 네째 아들인 필간은 자가 충문이고, 부사직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족보》에는 태어난 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중종 갑술년(1514)에 타계한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배위는 평산신씨이다. 영, 전, 훈, 령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들, 이필간의 아들들이 풍산으로 낙향하여, 우렁골에서 예안이씨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개되어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형제분(천과 온)께서 환로에 올라 가세를 정돈하고 한양에 세거하신 지 불과 백년 여, 중종 기묘년(1519) 조정에 또 사화가 일어나서 수많은 선비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시고 생진공(영), 참봉공(전), 생원공(훈) 3형제분께서 상의하시고, 벼슬에 대한 욕심을 파기하시는 한편, 시 한 수를 남기고 서울 집을 떠나 남하하여 안동부 풍산현에 은거…" <사직공파족보 서문>의 기록이다.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인데 커다란 마을 속 어디에 한 몸 의지할 곳 있으랴 세상에 떠돌며 이름을 날리는 것을 즐기는 바 아니니 남쪽으로 내려가 약초캐며 사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으리."
그들 형제들이 서울을 떠나면서 남긴 시는 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시가 이들 형제 중 누구의 것인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
어쨌든 이들 삼형제는 예안이씨의 우렁골 입향조가 된다. 이들 삼형제 중 맏이인 이영은 자가 사호이며, 성종 임인년(1482) 출생이다. 그는 1507년 생원 진사 양시에 급제하나, 1519년에 일어난 사화를 보고는 더 이상 과거학에 몰두하지 않고 우렁골로 낙향하게 된다. 배위는 진성이씨인데, 참봉 은의 따님이고, 참군 흥양의 손녀이다. 이영과 진성이씨의 사이에서는 3남1녀가 태어난다.
이영의 맏아들인 숙인은 자가 극인이고 호가 대은이다. 중종 경오년(1510)에 출생하여 갑오년(1534)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관의 천거로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그는 집현전 참봉공 숙인파의 파조가 되는 것으로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숙인의 아들은 공인데, 자가 공보이고, 호가 율원이며, 1533년에 나서 1612년에 죽었다. 공은 1567년 생원시를 거쳐서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지만 주어지는 벼슬을 다 물리치고 취임하지 않았다. 문집이 있으며, 풍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영의 둘째아들은 종인이다. 종인의 자는 안중이고, 배위는 창령조씨이며, 후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이훈의 셋째아들인 사인의 장자 진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그는 종인파의 파조로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이영의 셋째아들은 대인이다. 대인은 자가 경시이고, 군자감 정을 역임하였다. 배위인 청주정씨와의 사이에서 창을 낳았다. 창은 자가 국보인데 장사랑이다. 대인은 《족보》에 군자감 정공 대인파의 파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영의 후손들은 여러 파로 나뉘어진다. 우렁골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묶어서 백파로 지칭한다. 풍산의 우렁골에 입향한 예안이씨 3형제 중 둘째인 전은 자가 무선이고 호가 근재이다. 성종 병오년(1486)에 출생하여 기축년(1529)에 타계하였다. 유학 경전에 해박하여서 참봉에 천거되었다.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이전은 유인, 홍인, 공인 등 3형제를 두었다. 이전의 장자 유인은 자가 원중이고, 음사로 출사하여 현감을 지냈다. 중종 임오년(1522)에 출생하여 1576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동래정씨이고, 후 배위는 고령박씨이다. 그는 2남3녀를 두었다. 그의 큰아들은 호인데, 자가 여기이고, 호가 곡강이며, 종사랑을 역임하였다. 유인은《족보》에 음사 현감 유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전의 차자 홍인은 자가 경회이고, 호가 풍은이다. 중종시대(1525년)에 태어났다. "향리의 의병장이 되어 구담지역에서 왜적을 방어함으로써 왜적이 안동을 범할 수 없었다. 갑오년(1594)에 진중에서 타계하였다."《족보》의 기록이다.《족보》에는 그가 충신의장공 홍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전의 3자 공인은 직장이고,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그는 공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전의 후손들은 이 외에도 여러 파로 나뉘어진다. 우렁골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중파라고 부른다.
풍산의 우렁골에 입향한 예안이씨 3형제 중 세째인 훈은 자가 형지이다. 1489년에 출생하여 1552년에 타계하였다. 갑자년(1504) 생원시에 급제한 기록이 보인다. 윤인, 순인, 사인, 희인, 성인, 존인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이훈의 장자 윤인은 자가 백고이고, 1519년에 나서 1579년에 타계하였다. 참봉을 지냈으며, 배위는 진성이씨이다.《족보》에는 윤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차자 순인은 자가 요부이고, 1521년에 출생하여 1586년에 타계하였다. 참봉이며,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형제중 넷째인 희인의 둘째아들 총을 양자로 맞았다. 총은 호가 시은당이며, 1555년에 나서 1628년에 죽었다. 통훈대부 군자감 주부로 문집이 있다. 순인은 《족보》에 순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3자 사인은 부장이며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인 진은 바로 위의 형 순인의 양자로 나갔고, 둘째 당이 후사를 이었다. 사인은 《족보》에 사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4자 희인은 자가 대원이고 1527년에 출생하여 1572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순흥안씨이다. 《족보》에 회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5남 성인은 1529년에 나서 1574년에 죽었다. 배위는 경주손씨이다. 《족보》에는 성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6남인 존인은 존인파로 기재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네 딸만이 나온다. 후사를 누가 이었는지, 아니면 후사가 단절되었는지 《족보》를 통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훈의 후손들은 이 외에도 여러 파로 나뉘어진다. 이들은 모두 하나로 묶여서 계파로 불리워진다. 우렁골의 예안이씨들은 이렇게 입향조인 3형제들의 후손들이다. 이들의 삶은 우렁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 일대에 펼쳐져 전개되어 내려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오래도록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 풍산의 우렁골 … 예안이씨의 유적들
종가라는 개념은 그저 혈연적 연계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종가는 혈족의 흐름과 오래된 집, 그리고 그 오래된 집이 위치하는 지역이 역사적 관계 속에서 한데 얽혀 만들어내는 문화적 의미체이다. 오래된 집이 있고, 그 집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삶이 여러 문화와 유적들을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한 가문의 혈손들이 그 집이 중심에 놓여진 문화에 대하여 심리적 귀속감을 느낄 때, 종가는 생생한 의미를 갖추어낸다. 집만이 있고 삶은 없다든지, 삶만이 있고 집이 없다든지 하다면, 종가는 그저 형식적 존재성만을 가질 뿐, 생생한 의미를 갖추어내지 못한다.
풍산의 우렁골. 이곳이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라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중간마을에 전의이씨가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배제한다면, 우렁골과 그 주변 마을은 온전히 예안이씨들의 삶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의이씨와 예안이씨가 사실상 같은 성씨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의이씨들이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굳이 나누어서 볼 필요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집성촌을 이루며 오래 살아 내려온 우렁골의 예안이씨들이 오늘날도 종가의 문화 속에 놓여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풍산의 우렁골에는 종가의 역사와 종가가 있기는 하지만, 종가의 삶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전의이씨의 유적들을 여럿 살펴보았지만, 우렁골에는 예안이씨의 유적들이 더 많다. 우렁골의 예안이씨 유적들은 묘소와 사당, 그리고 종가들로 대표된다. 우렁골에서 만나게 되는 예안이씨의 묘소 중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하는 것은 영의 것이다. 이영이 우렁골 예안이씨 입향조들 중의 맏이라는 점은 앞에서 밝혀놓은 바 있는데, 그의 묘소를 우리는 우렁골의 윗마을과 중간마을 사이의 길을 따라 쭉 올라가서 골짜기의 끝 부분에 있는 새못골 마을에서 만날 수 있다. 진입로 주변 어딘가에 예전에 못이 있었다고 하여 그 마을의 북쪽 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이영의 묘소이다. 이영의 묘소 오른쪽에는 그의 아들 숙인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는 손자 이공(율원)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이영은 아들과 손자를 좌 우에 거느리고 새못골의 산록에 오랜 세월동안 평화롭게 누워있는 것이다.
"거기가 와우산이지요." 나중에 이영의 종가가 있는 마을에서 만난 이희용씨가 말하였다. "삼대분의 묘소를 쓴 곳이 와우의 젖꼭지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요. 안산에는 종인 할배 산소가 있지요." 이영의 묘소가 있는 아래쪽, 산기슭이 평지와 이어지는 곳에는 사당이 하나 서 있다. 사당은 경덕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사직공과 그 윗대 묘소는 다 서울에 있지요. 서울에 있는 재사를 각심사라 합니다. 사직공의 혼백만 가져다 별묘를 지은 것이지요." 우렁골 예안이씨 입향조 형제들의 부친인 부사직 이필간을 모신 묘당을 짓고 경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경덕사는 1미터가 좀 넘어보이는 축대 위에 높이 서 있다. 경덕사 안에는 큰 소나무가 하나 버티고 서 있고, 그 울타리 밖 축대 위에는 세 그루의 중소나무들이 부채살 모양으로 퍼지며 어울려있다. 경덕사는 검은색과 흰색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목재는 검은색으로 착 가라앉아 있고, 석가래 끝의 원형 부분은 흰색 회칠을 하여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경덕사 아래쪽에는 여러채의 집이 있다. 그 집들 중의 하나에는 이용갑이라는 노인이 산다. 우리가 그 집을 찾아 들어갔을 때, 노인은 때묻은 두건을 서둘러 쓰고 우리를 맞았다. "경덕사는 우리한테 14대조, 그러니까 3파 웃대 어른의 사당이지."이용갑 노인이 말하였다. "소화 17년도에 일본서 몸 다치고 소화 18년도에 고향에 들어와 그때부터 쭉 이렇게 살고 있다." 중파의 13대 손인 이용갑 노인은 그렇게 소화연대의 과거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84세라지만 아직 정정한 모습이었다.
"백파 종가는 한절골에 있지." 우리는 한절골로 가 보았다. 나직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 한절골에서 우리는 두채의 집과 한 명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우렁골 예안이씨 백파의 종가이다. 안내판에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이라고 적혀있는 이 집은 경북민속자료168호이다. "이 집은 조선 중종시 부사직을 지낸 이필간의 아들 이영 공이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낙향, 중종 20년(1525)경 건립한 안동 거주 예안이씨 맏집이었으나 1925년 현 소유자의 선친이 매입하여 사랑채를 수리하였다고 한다."안내판의 기록이다.
"증조부 때 팔았습니다." 한절골에서 만난 이희용 씨가 말하였다. 수백년 전해 내려온 종가를 팔았다면 살림이 여간 고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빈손 털고 일어날 정도의 곤궁함에 빠져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백년 가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갈무리해 두고 있는 종가를 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절골 예안이씨 백파의 종가에는 지금 사람이 살지 않는다. 종가는 종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종손이 아닌 그 다른 사람도 여기 살지 않는 것이다. 백파의 종가는 여기저기 보수의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인지, 오래된 집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 집에서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끈 것은 두멍과 성주였다.
부엌 한쪽에서 두멍을 발견하고 감탄을 연발한 것은 사진을 찍던 김복영 씨였다. "요새 이런걸 보기 어려운데…" 부엌 한쪽 땅바닥에 깊이 묻혀있는 큰 독을 가리키면서 김복영씨가 말하였다. 나는 그것의 이름도 몰랐고, 용도도 몰랐다. 그것이 옛날에 부엌에 수도가 없었던 시절에 물을 길어다 채워놓고 쓰던 그릇이며, 이름이 두멍이라는 사실을 나는 김복영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성주는 마루의 들보 아래, 동쪽 벽 쪽에 매달려 있었다. 여러겹의 한지를 겹쳐 접고, 겉에 비닐같은 것으로 싸서 잘 묶어서 매달아 놓았는데, 그을름이 잔뜩 묻은 것이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는 느낌이 역력하였다.
그 집을 팔고 나서 우렁골 예안이씨 백파의 종손은 그 아랫집으로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그 아랫집은 윗집보다는 낮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서, 윗집 마당에서는 아랫집의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이 아랫집의 주인인 종손은 이희동씨라 하였다. 62세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각심사의 일에 관여한다고 아랫집을 지키고 있는 이희동씨의 사촌동생 이희용씨는 말하였다.
"세 파의 종손 중에서 백파와 중파의 종손은 다 서울 살고, 계파의 종가에는 종손이 살고 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구 살다 들어왔어요." 이희동씨가 말하였다. 중파와 관계된 유물로는 '곡강정'과 '충효당'을 들 수 있다. 곡강정은 보수공사가 한창인데, 그 주변에서는 두릅나무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파를 여는 이전의 장자가 이유인이고, 이유인의 장자가 곡강정의 주인인 이호라는 점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중파의 맏집의 흐름 속에서는 곡강정만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종가는 지켜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 우렁골에서 볼 수 있는 충효당파 종가는 중파의 둘째집이 전해 내려온 종가이다.
"이 집은 예안이씨 16대 손으로 안동에 처음 들어온 근재 이전의 둘째아들 풍은 이홍인(1528-1594)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써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 ㅁ자형 몸체와 ―자형인 쌍수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체는 홑처마의 납도리집이고, 쌍수당은 중층 팔작지붕이다."안내판의 기록이다. 길에서 경사진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쌍수당이 앞에 나타난다. 우람하고 조금쯤 몸체가 휜 기둥이 떠받들어 주고 있는 누각! 북쪽 방향에는 쌍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서쪽 방향으로는 백원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쌍수당은 보수한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하여 무너져가고 있었다. 쌍수당과 안채는 다같이 자연석으로 쌓은 토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안채는 2층의 토대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쌍수당보다 춤이 낮지만, 그렇게 나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쌍수당과 안채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목질의 착 가라앉은 색감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안채의 대문 쪽 목판은 옹이부분의 송진이 황색으로 변해서, 마치 맹수의 휘번덕이는 눈이 목판 위에 여럿 박혀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뒷산 참나무 사이에서 이는 바람이 소슬하게 충효당집 안으로 불어들고, 주인이 집을 비운 충효당집의 텃밭에서는 모진 겨울을 이기고 남은 파들의 푸른 빛이 서럽게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곳은 예안이씨 계파의 종가이다. "이 건물은 예안이씨 이훈(1486-1552) 선생의 종택으로 중종20년(1525) 무렵에 건립되었다. … 일반적으로 ㅁ자형 주택의 안채는 대청이 중앙에 놓이고, 좌우로 상방과 안방이 대칭적으로 구성되는데 비하여 이 집은 대청이 좌측에 놓이고 안방이 중앙 쪽으로 나오면서 상방이 대청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특히 안동 지방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형태이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구에서 돌아왔다는 종손은 출타 중이고, 대청마루의 기둥 위에는 문패만이 혼자 매달린채 집을 지키고 있다. 대청마루의 안쪽에는 살평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대청마루 한쪽 벽에는 '을묘 각소 유사'라는 제목 아래 7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파, 강보, 강보소위, 내가, 내가소위, 용정, 마애. 그것들은 아마도 계파의 혈손들이 퍼져나간 지역과, 작게 갈라진 파의 단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렁골의 예안이씨!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유적들만 덩그란히 남아서 객을 맞고 있는 것은 우리시대 종가의 현상을 증거하여 주는 일종의 푯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렁골의 전의이씨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뒤 1767년에는 참판에서 지중추부사로 추천을 받아 이듬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찍이, 시위(試?)에 들어가 강(講)을 하였는데 한 자를 잘못 읽었음을 깨닫고 강이 끝나면서 이 사실을 실토하자, 대관이 놀라면서 남이 알지 못하는데 스스로 밝히려 하느냐고 하였다.
그는 남이 비록 알지 못한다고 하여 나 자신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경탄하였다. 남포군수(藍浦郡守)로 천거되어 외직으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에는 겨우 초옥 몇 칸만 남게 되었는데, 남들은 그가 새로 관직을 떠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기로소에 들어갔을 때 영조는 그를 자주 볼 수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공인에게 그의 도상(圖像)을 그려 오라 하고, 원손에게 ‘九十歲像’이라는 네 글자를 쓰게 하였다. 시호는 청헌(淸憲)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榜目 嶺南人物考 淸選考
* 풍산의 우렁골 … 전의이씨의 유적들
풍산에서 남동쪽을 향해 시선을 돌리면 우렁골, 바로 예안이씨와 전의이씨의 세거지가 보인다. 예안이씨와 전의이씨. 원래는 한 성씨였으나, 일찍부터 본을 따로하여 전개되어 내려왔다. 그리고 두 성씨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풍산의 우렁골에 입향하여 오래도록 세거하여 오고 있다.
"풍산읍 소재지에서 동쪽, 나즈막한 산을 등지고 안동지방에서 전의이씨와 예안이씨가 5백년간 세거하여 오는 마을이 있다. 이곳은 통칭 예안이씨 마을로 알려져 있으나, 동리 중간의 작은 골짜기에 전의이씨 야소헌 이화(1421-1489; 시호는 양정)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영가지》에 판서를 지낸 이웅이 안동에 우거하여 왔고, 아들 화는 무용이 있어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며 화의 동생 강의 처 의성김씨(도만호 천의 따님)의 정려사적도 열녀 조에 올려있다." 서주석씨의 기록이다.
서주석씨에 의하면 우렁골에 먼저 입향한 것은 전의이씨이다. 세조시대에 전의이씨인 이화가 만 년에 안동으로 내려와 풍산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화는 정승 정창손(1402-1487)의 사위가 되어 세조 때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만년에 벼슬을 버리고 안동에 내려와 침류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7대손 산두(호 나졸재)는 문과에 급제하여서도 청빈하게 지냈는데, 영조의 지우를 얻어 지중추부사가 되고, 기로소에도 들었으며, (영조가) 화원을 내려보내 초상도 그리게 하였다. 뒤에 풍암서원에 제향되었으나, 서원은 철폐되고 '어필영정각'만 남았다. 그리고 양정공 화를 모신 사당 지산사(존경사)와 후손 문한의 저택 일성당도 있다." 역시 서주석씨의 기록이다.
서주석씨가 위의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침류정은 우렁골 중간마을의 깊은 골짜기 속에 있다. 산을 남쪽에 두고 북쪽의 시내를 향해 자리잡은 것이 우렁골의 일반적 마을 배치이므로, 중간마을 깊은 골짜기라고 하는 것도 남쪽의 산 능선을 향해 뻗어 들어간 골짜기 끝을 말한다. 산은 높지 않다. 차라리 구릉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정도이다. 산의 흙은 모래가 많이 섞여있으며, 참나무 외에는 다른 나무를 보기 어려웠고, 풀도 별로 자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산이 양쪽으로 펼쳐지는 골짜기 끝, 동쪽 산의 능선 위에 서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침류정이다.
침류정으로 오르는 좁고 나직한 길은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참나무 잎과 솔잎이 반반씩 섞인 낙엽이다. 소나무는 주변 산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침류정 앞에는 여러 백년은 묵었을 소나무 하나가 늠름한 자태로 버티고 서 있었다. 솔잎은 그 소나무로부터 떨어져 침류정의 기와지붕 위에, 침류정으로 오르는 경사진 길 위에, 지천으로 떨어져 있었다. 밝은 갈색의 참나무 낙엽과 진한 주황색의 마른 솔잎은 궁합이 잘 맞는 짝인 듯 싶었다. 그것들의 어울림은 침류정 주변을 전체적으로 화사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침류정은 굳게 문이 닫혀 있었으며, 안내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았다. 침류정의 앞쪽 낮은 담 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현판 아래쪽으로 보이는 마루의 살창에는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원이 중첩되고, 음 양이 서로 교차하면서 표시되어 있는 태극문양이 세 개 붙어 있었다. 침류정 아래, 계곡의 바닥쪽으로는 양정공 이화를 모신 '존경사'라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역시 문이 잠긴채였다. '존경사'의 위쪽으로는 '어필영정각'이 있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어필영정각'은 이산두의 영정을 모신 집이다. '어필영정각'은 울타리와 대문을 새로 만든 모양이었는데, 바깥 대문은 열려 있었지만 안의 문들은 빠짐없이 잠겨 있어서 '영정'을 볼 수는 없었다. '어필영정각'의 목재와 위쪽의 흙 벽에는 페인트칠을 하였던 것 같은데, 페인트칠이 벗겨지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어필영정각'은 영조가 이산두의 화상을 그리게 한 것과 연관이 있다. 《실록》에 의하면 이산두의 화상이 그려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영조는) 기사(耆社)에 새로 들어온 사람의 초상(肖像)을 그리도록 명하였다. 기사의 여러 당상들을 불러 본사(本社)의 연회(宴會) 때 영남인으로 나이 90여세가 된 이산두(李山斗)란 자가 있었는지를 묻고, 화사(畵師)에게 그 초상을 그려 가지고 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사에 들어갔는데, 그 얼굴을 미처 보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했었다.'고 하였다." '어필영정각'은 아마도 그 때 그려진 이산두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만들어진 집인 모양이었다. '침류정'과 '어필영정각'이 있는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의 중간쯤 되는 곳에는 '일성당'이 있다. '일성당' 앞에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 집은 서기 1680년 경 이문한 선생께서 세운 민가주택이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 집으로 조선조 전통민가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집의 이름을 '일성당'이라 한 것은 외당에 독서실을 배치하고 하루하루를 반성한다는 뜻으로 현판을 계첨하였기 때문이다." '일성당'은 새로 보수를 하였고, 벽면에는 흙칠을 하여 산뜻하게 꾸몄다. 바깥채로부터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위쪽으로는 마름모꼴의 살창이 세 개 마련되어 있었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오른쪽으로는 고방이 붙어 있었는데, 고방의 위쪽으로는 작은 원형의 살창이 세 개 붙어있기도 하였다. 안채로 들어가는 문의 왼쪽으로는 작은 사랑채가 붙어 있었는데, 사랑채의 왼쪽 끝에 있는 작은 마루 앞 뜰에는 길쭉한 섬돌이 놓여 있었다.
바깥 마당의 길쪽으로는 아담한 규모의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져 있고, 문짝은 닫히지 않게 되어 활짝 열려있는 모습이었다. 하긴 문짝이 닫힌다고 하여도, 그 효용성은 없었다. 문짝의 기능은 효과적인 차단에 있을 것인데, 이 변소는 이미 차단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이 다 무너지고, 흙벽의 속 뼈대를 이루었던 수수깡 엮은 것도 뜯겨져 나가버린 부분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여러개의 사각형 창을 일부러 벽면에 만들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위로 세 개, 아래로 세 개, 수수깡 흙벽을 뚫고 만들어진 창(?)들은 위와 아래 2열로 늘어서서 변소 안쪽을 빤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나마 길쪽으로는 새로 손을 보아서 속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다행이었는데, 그것이 시멘트 블록으로 쌓아 놓은 것이라놔서, 변소의 고전적 품격을 유지하는데는 조금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우렁골에는 5백년 전의이씨의 삶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우렁골에서의 전의이씨의 삶은 종가를 중심으로 하여 이어져 내려온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렁골에서 우리는 전의이씨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내려왔다는 증거를 포착할 수는 있었지만, 종가와 종가의 삶, 종가의 역사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것은 이문한의 일성당 뿐이었는데, 이 집에는 지금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서, 그 집에서 전개된 삶이 우렁골 전의이씨의 역사를 얼마큼 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도는 없었다.
* 전의이씨 상계의 역사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예안이씨는 전의이씨에 속한다. 전의이씨의 한 갈래가 갈라져나와 예안이라는 관향을 따로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안이씨의 상계는 전의이씨의 상계와 일치한다고 하겠다. 전의이씨는 고려초로부터 시작된다. 많은 성씨들이 그러하듯이 전의이씨도 고려태조의 건국과정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부터 혈족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이다. "고려 태조 조에 3한을 통합할 때 익찬2등공신이고, 3중대광이며, 태사를 지냈고, 전산후이다. 시호는 성절이다." 《예안이씨 사직공파 족보》의 <전의이씨세계> 부분에 1세로 기재되어 있는 이도에 관한 기록이다.
"《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태조가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할 때 금강의 홍수 때문에 남쪽으로의 진출 길이 막힌 것을 공께서 강을 건널 계책을 주도적으로 제출한 공이 크므로 도(棹)라는 이름을 내렸다." 역시 《족보》의 기록이다. 이렇게 고려왕조의 창업에 일정한 공을 세움으로써 이도는 전의이씨의 시조가 된다.
이도의 아들 이강은 정용위대장군이고, 이강의 아들 이수영은 병부상서이다. 1세 이도 이하 5세 이윤관까지, 전의이씨 세계는 단선으로 흘러 내려간다. 6세에 이르러서야 의, 신, 순 등 세 명의 아들이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2세 이후 8세까지의 묘소는 모두 실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전의이씨의 상계가 외형상으로는 분명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명료성을 띠는 기록으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하여 준다. 다른 대부분의 성씨의 상계가 다 그러하듯이, 전의이씨의 상계도 '남겨진 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찾아진 역사'로 이해하는 편이 옳을 것이리라는 말이다.
전의이씨의 6세로 기록되어 있는 의, 신, 순 등 3형제도 의와 신은 후손이 전하여지지 않고, 셋째인 순의 후손만이 전하여진다. 이순의 아들은 천이다. 천은 자가 수덕이고, 호가 동암수이다. 정헌대부로 천양대장군이며, 문하평장사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장군 이천이 수군을 이끌고 남하, 고종 병진년(1256)에 온수현(아산군)에서 몽고병을 무찌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백여명을 탈환하였다고 한다." 역시《족보》의 기록이다.
이천은 자원, 혼, 자화 등의 세 아들을 둔다. 이자원은 직문한서인데, 정순대부 성균관대사성으로 추봉되었다. 배위는 안동김씨이다. 이혼은 초명이 자분이고, 처음의 자가 거화였다. 나중에는 자를 태초로 바꾸었으며, 호는 몽암이다. 고려 고종 임자년(1252)에 출생하여 향년 61세로 충선왕 임자년(1312)에 죽었다. "원종 시대에 17세로 급제하여 … 정승으로 치사하였다. 예안백으로 봉하여졌으며, 시호는 문장이다."《족보》의 기록이다.
이자화는 지밀직사사 선부전서이다. 이들 이천의 세 아들 중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첫째 이자원과 둘째 이혼이다. 이자원은 전의이씨 8세로 종계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으며, 배위인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언충을 두었다. 이언충은 자가 입지이고, 호가 운제이며, 원종 계유년(1273)에 출생하여 1292년에 사마시에 장원을 하고, 1294년에 문과에 급제를 한다. 그는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를 역임하였으며, 충숙왕 무인년(1338)에 66세로 타계한다. 시호는 문의이다. 그는 처음 부인 광주김씨와 나중 부인 남양홍씨 등, 두 명의 부인에게서 다섯 아들을 둔다.
이언충의 첫째아들은 광기이다. 그는 광정대부 정수문학을 지냈다. 그의 후손들은 전의이씨 종계의 흐름을 이어나가서 대사성공파를 이룬다. 이언충의 둘째아들은 광익이다. 이광익은 세 아들을 두는데, 그 중 둘째인 사례의 아들이 전의이씨 안동 입향조 되는 웅이고, 웅의 둘째 아들이 풍산의 우렁골에 터를 잡은 화이다. 이화의 부인은 정창손의 딸이고, 이화는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 전의이씨에서 예안이씨로
예안이씨의 《족보》가 상계로 전의이씨 세계를 포함하게 된 것은 <예안이씨족보>를 처음 만들었을 때부터의 일이다. 안동 예안이씨의 시조인 사직공 이필간의 16대손이 되는 이준영이 <사직공파족보>의 <서문>에서 적고 있는 바에 의하면 <예안이씨족보>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의 사정은 다음과 같다.
"… 서울의 집을 떠나 남하하여 안동부 풍산현에 은거하신지라 대대로 전하여진 문적 한 장도 없었으니 어찌 족보 간행의 생각인들 하였으랴! 다만 우리 예안이씨가 전의 이태사의 자손이라는 것을 풍문으로만 들어오면서, 그 고증을 찾기 위하여 한없이 고심하다가 1650년대에 이르러 고산(이유장) 종선조께서 선부조의 유지를 받들어 국내 저명한 가문의 문헌을 찾아다니시다가 마침내 한양의 정사문(시술)이라는 대학자가 있어 이름난 사족의 계보는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그 학자를 찾아가서 그분이 수록하여 놓은 문자 중에서 우리 제학(이익) 선조가 전의 이혼(태사공 8세손)의 손자이며, 언승의 아들로써 본관을 예안으로 이적하였다는 사적의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찾아다니던 문적이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지니, 고산선생의 반가운 심정을 어찌 필설로서 다 기록하며, 자손들 또한 그 즐거움이 어떠하였으랴! 그러나 미흡한 것은 제학공께서 예안으로 이적하신 연유에 대한 근거의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천만이다. 그 후 선생께서 기호, 영호 양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종친이 거주하는 지역이라면 빠짐없이 편답(두루 돌아다님)하여 그 손록(후손들의 기록)을 수합해서 선생 주관으로 간행한 것이 숭정 을묘(1675)보로써, 예안이씨의 초보(처음 족보)이다."
예안이씨의 최초 족보는 이렇게 하여 출현한다. 다른 성씨의 족보들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예안이씨를 전의이씨의 상계에 구체적으로 연결시키시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의 일이다. 현존하는 예안이씨의 족보에 의하면, 예안이씨의 시조는 이익이다. 이익은 자가 입우이며, 보문관 제학이고, 예안백에 봉하여졌다. 《족보》는 제학공 이익을 전의이씨 10세 손으로 기록한다. 《족보》의 앞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전의이씨세계>에 의하면, 이익의 세계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 있는 이천의 둘째아들 이혼에게로 연결된다.
우리는 이혼이 '예안백'에 봉해졌었다는 기록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때부터 전의이씨의 한 갈래인 이혼의 후손들은 예안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혼은 안동김씨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둔다. 장자는 언승인데, 대장군이다. 언승은 <전의이씨세계>에 별 기록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대장군이었다는 기록 외에는 배위조차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족보》의 <전의이씨세계>에 의하면 언승은 1남1녀를 둔다. 그 중 아들이 이익인 것이다.
이익은 전의이씨의 10세이면서 예안이씨의 1세이다. 그가 자신의 조부인 이혼이 그러하였듯이 예안백으로 봉하여지는 것은 전의이씨의 한 갈래가 예안으로 본관을 따로 쓰게 되는 계기가 된다. 조부와 손자가 거듭 예안백으로 봉하여지게 된 인연을 소중히 여긴 탓이라고 하겠다.
* 예안이씨의 역사 … 우렁골 입향을 중심으로
예안이씨의 1세인 이익은 언양김씨와의 사이에서 변을 낳는다. 이변은 성균관 제주를 지냈으며, 배위는 문화유씨이다. 이변은 1남1녀를 두었다. 아들은 송이다. 이송은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숭정대부 판중추군부판서이다. 고려 우왕 무진년(1388)에 전법판서 직책에 있었는데, 염흥방의 일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1375년(우왕 1) 권신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정몽주 등과 함께 한 때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서성군에 봉해지고 삼사좌사가 되었다. 이인임의 심복 임견미 등과 함께 많은 문신을 모함하여 축출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하였으며, 백성의 토지와 노비는 물론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 1387년 그의 종 이광이 전 밀직부사 조반의 토지를 강탈하자 이에 분개한 조반이 이광을 잡아 죽이므로, 조반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조반과 그 가족을 잡아 순군옥에 가두고 상만호의 지위를 이용하여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이에 그들의 행패를 미워하던 우왕 및 최영, 이성계 등에 의하여 그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염흥방 관계 기록이다.
"…고려 32대 우왕 무진년(1388) 정월 12일 판서(제학공의 손자 송)공께서 인척인 염흥방의 화에 연좌될 시, 애기 형제 분(천과 온)이 계시어 불과 10세 전후의 유소년이었으나 연좌의 화를 면할 수 없었는데, 한 산승이 어여삐여기사 암혈(석굴)에 숨겨주어서 신명을 보전하여…" <사직공파족보 서문>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이송이 염흥방의 일에 연루된 것은 인척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이송의 후 부인이 곡성염씨였던 것과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송은 천과 온, 두 아들을 두었다.
이천의 자는 자견이고, 호는 백곡이며, 또 다른 호는 불곡이다. 고려 우왕 병진년(1376)에 태어나서 조선 문종 신미년(1451)에 죽었다. 향년은 76세였다. "태종 임오년(1402) 무과에, 경인년(1410) 중시에 급제. … 공조참판 자헌대부 판중추원사 병조판서 호조판서 도절제사를 거쳐 보국 숭록대부로 승진하여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시호는 익양이다." 족보의 기록이다.
이온은 태종시대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해서 판군기감사에 이르렀으며, 증직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의 직책을 하사받았다. 이온은 2남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신과 시이다. 이온의 장자인 신은 세종시대(143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군자감 주부를 지냈고, 죄찬성을 증직으로 받았다. 5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효간, 의간, 보간, 필간, 석간 등이다. 우렁골의 예안이씨들은 네째 필간의 후손들이다.
이신의 네째 아들인 필간은 자가 충문이고, 부사직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족보》에는 태어난 해에 대한 기록은 없고, 중종 갑술년(1514)에 타계한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배위는 평산신씨이다. 영, 전, 훈, 령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들, 이필간의 아들들이 풍산으로 낙향하여, 우렁골에서 예안이씨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전개되어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형제분(천과 온)께서 환로에 올라 가세를 정돈하고 한양에 세거하신 지 불과 백년 여, 중종 기묘년(1519) 조정에 또 사화가 일어나서 수많은 선비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시고 생진공(영), 참봉공(전), 생원공(훈) 3형제분께서 상의하시고, 벼슬에 대한 욕심을 파기하시는 한편, 시 한 수를 남기고 서울 집을 떠나 남하하여 안동부 풍산현에 은거…" <사직공파족보 서문>의 기록이다.
"어둠 속에서 우왕좌왕 하는 것이 세상의 모습인데 커다란 마을 속 어디에 한 몸 의지할 곳 있으랴 세상에 떠돌며 이름을 날리는 것을 즐기는 바 아니니 남쪽으로 내려가 약초캐며 사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으리."
그들 형제들이 서울을 떠나면서 남긴 시는 위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이 시가 이들 형제 중 누구의 것인지는 나로서는 확인할 방도가 없다.
어쨌든 이들 삼형제는 예안이씨의 우렁골 입향조가 된다. 이들 삼형제 중 맏이인 이영은 자가 사호이며, 성종 임인년(1482) 출생이다. 그는 1507년 생원 진사 양시에 급제하나, 1519년에 일어난 사화를 보고는 더 이상 과거학에 몰두하지 않고 우렁골로 낙향하게 된다. 배위는 진성이씨인데, 참봉 은의 따님이고, 참군 흥양의 손녀이다. 이영과 진성이씨의 사이에서는 3남1녀가 태어난다.
이영의 맏아들인 숙인은 자가 극인이고 호가 대은이다. 중종 경오년(1510)에 출생하여 갑오년(1534)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관의 천거로 집현전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그는 집현전 참봉공 숙인파의 파조가 되는 것으로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숙인의 아들은 공인데, 자가 공보이고, 호가 율원이며, 1533년에 나서 1612년에 죽었다. 공은 1567년 생원시를 거쳐서 1573년에 문과에 급제하지만 주어지는 벼슬을 다 물리치고 취임하지 않았다. 문집이 있으며, 풍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이영의 둘째아들은 종인이다. 종인의 자는 안중이고, 배위는 창령조씨이며, 후 배위는 동래정씨이다. 이훈의 셋째아들인 사인의 장자 진을 양자로 들여 후사를 이었다. 그는 종인파의 파조로 《족보》에 기재되어 있다.
이영의 셋째아들은 대인이다. 대인은 자가 경시이고, 군자감 정을 역임하였다. 배위인 청주정씨와의 사이에서 창을 낳았다. 창은 자가 국보인데 장사랑이다. 대인은 《족보》에 군자감 정공 대인파의 파조로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이영의 후손들은 여러 파로 나뉘어진다. 우렁골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묶어서 백파로 지칭한다. 풍산의 우렁골에 입향한 예안이씨 3형제 중 둘째인 전은 자가 무선이고 호가 근재이다. 성종 병오년(1486)에 출생하여 기축년(1529)에 타계하였다. 유학 경전에 해박하여서 참봉에 천거되었다. 배위는 남양홍씨이다.
이전은 유인, 홍인, 공인 등 3형제를 두었다. 이전의 장자 유인은 자가 원중이고, 음사로 출사하여 현감을 지냈다. 중종 임오년(1522)에 출생하여 1576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동래정씨이고, 후 배위는 고령박씨이다. 그는 2남3녀를 두었다. 그의 큰아들은 호인데, 자가 여기이고, 호가 곡강이며, 종사랑을 역임하였다. 유인은《족보》에 음사 현감 유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전의 차자 홍인은 자가 경회이고, 호가 풍은이다. 중종시대(1525년)에 태어났다. "향리의 의병장이 되어 구담지역에서 왜적을 방어함으로써 왜적이 안동을 범할 수 없었다. 갑오년(1594)에 진중에서 타계하였다."《족보》의 기록이다.《족보》에는 그가 충신의장공 홍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전의 3자 공인은 직장이고,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그는 공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전의 후손들은 이 외에도 여러 파로 나뉘어진다. 우렁골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중파라고 부른다.
풍산의 우렁골에 입향한 예안이씨 3형제 중 세째인 훈은 자가 형지이다. 1489년에 출생하여 1552년에 타계하였다. 갑자년(1504) 생원시에 급제한 기록이 보인다. 윤인, 순인, 사인, 희인, 성인, 존인 등 여섯 아들을 두었다. 이훈의 장자 윤인은 자가 백고이고, 1519년에 나서 1579년에 타계하였다. 참봉을 지냈으며, 배위는 진성이씨이다.《족보》에는 윤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차자 순인은 자가 요부이고, 1521년에 출생하여 1586년에 타계하였다. 참봉이며,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형제중 넷째인 희인의 둘째아들 총을 양자로 맞았다. 총은 호가 시은당이며, 1555년에 나서 1628년에 죽었다. 통훈대부 군자감 주부로 문집이 있다. 순인은 《족보》에 순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3자 사인은 부장이며 배위는 안동권씨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인 진은 바로 위의 형 순인의 양자로 나갔고, 둘째 당이 후사를 이었다. 사인은 《족보》에 사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4자 희인은 자가 대원이고 1527년에 출생하여 1572년에 타계하였다. 배위는 순흥안씨이다. 《족보》에 회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5남 성인은 1529년에 나서 1574년에 죽었다. 배위는 경주손씨이다. 《족보》에는 성인파의 파조로 기재되어 있다. 이훈의 6남인 존인은 존인파로 기재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네 딸만이 나온다. 후사를 누가 이었는지, 아니면 후사가 단절되었는지 《족보》를 통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훈의 후손들은 이 외에도 여러 파로 나뉘어진다. 이들은 모두 하나로 묶여서 계파로 불리워진다. 우렁골의 예안이씨들은 이렇게 입향조인 3형제들의 후손들이다. 이들의 삶은 우렁골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 일대에 펼쳐져 전개되어 내려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오래도록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 풍산의 우렁골 … 예안이씨의 유적들
종가라는 개념은 그저 혈연적 연계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종가는 혈족의 흐름과 오래된 집, 그리고 그 오래된 집이 위치하는 지역이 역사적 관계 속에서 한데 얽혀 만들어내는 문화적 의미체이다. 오래된 집이 있고, 그 집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된 삶이 여러 문화와 유적들을 만들어내고, 그리하여 한 가문의 혈손들이 그 집이 중심에 놓여진 문화에 대하여 심리적 귀속감을 느낄 때, 종가는 생생한 의미를 갖추어낸다. 집만이 있고 삶은 없다든지, 삶만이 있고 집이 없다든지 하다면, 종가는 그저 형식적 존재성만을 가질 뿐, 생생한 의미를 갖추어내지 못한다.
풍산의 우렁골. 이곳이 예안이씨의 집성촌이라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중간마을에 전의이씨가 분포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배제한다면, 우렁골과 그 주변 마을은 온전히 예안이씨들의 삶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전의이씨와 예안이씨가 사실상 같은 성씨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의이씨들이 그 사이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굳이 나누어서 볼 필요도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렇게 집성촌을 이루며 오래 살아 내려온 우렁골의 예안이씨들이 오늘날도 종가의 문화 속에 놓여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풍산의 우렁골에는 종가의 역사와 종가가 있기는 하지만, 종가의 삶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전의이씨의 유적들을 여럿 살펴보았지만, 우렁골에는 예안이씨의 유적들이 더 많다. 우렁골의 예안이씨 유적들은 묘소와 사당, 그리고 종가들로 대표된다. 우렁골에서 만나게 되는 예안이씨의 묘소 중 우리가 주목하여 보아야 하는 것은 영의 것이다. 이영이 우렁골 예안이씨 입향조들 중의 맏이라는 점은 앞에서 밝혀놓은 바 있는데, 그의 묘소를 우리는 우렁골의 윗마을과 중간마을 사이의 길을 따라 쭉 올라가서 골짜기의 끝 부분에 있는 새못골 마을에서 만날 수 있다. 진입로 주변 어딘가에 예전에 못이 있었다고 하여 그 마을의 북쪽 산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이영의 묘소이다. 이영의 묘소 오른쪽에는 그의 아들 숙인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고, 왼쪽에는 손자 이공(율원)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이영은 아들과 손자를 좌 우에 거느리고 새못골의 산록에 오랜 세월동안 평화롭게 누워있는 것이다.
"거기가 와우산이지요." 나중에 이영의 종가가 있는 마을에서 만난 이희용씨가 말하였다. "삼대분의 묘소를 쓴 곳이 와우의 젖꼭지 부분에 해당한다고 해요. 안산에는 종인 할배 산소가 있지요." 이영의 묘소가 있는 아래쪽, 산기슭이 평지와 이어지는 곳에는 사당이 하나 서 있다. 사당은 경덕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사직공과 그 윗대 묘소는 다 서울에 있지요. 서울에 있는 재사를 각심사라 합니다. 사직공의 혼백만 가져다 별묘를 지은 것이지요." 우렁골 예안이씨 입향조 형제들의 부친인 부사직 이필간을 모신 묘당을 짓고 경덕사라는 현판을 내걸었다는 말이라고 하겠다.
경덕사는 1미터가 좀 넘어보이는 축대 위에 높이 서 있다. 경덕사 안에는 큰 소나무가 하나 버티고 서 있고, 그 울타리 밖 축대 위에는 세 그루의 중소나무들이 부채살 모양으로 퍼지며 어울려있다. 경덕사는 검은색과 흰색이 기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귀족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목재는 검은색으로 착 가라앉아 있고, 석가래 끝의 원형 부분은 흰색 회칠을 하여 유난히 두드러져 보인다.
경덕사 아래쪽에는 여러채의 집이 있다. 그 집들 중의 하나에는 이용갑이라는 노인이 산다. 우리가 그 집을 찾아 들어갔을 때, 노인은 때묻은 두건을 서둘러 쓰고 우리를 맞았다. "경덕사는 우리한테 14대조, 그러니까 3파 웃대 어른의 사당이지."이용갑 노인이 말하였다. "소화 17년도에 일본서 몸 다치고 소화 18년도에 고향에 들어와 그때부터 쭉 이렇게 살고 있다." 중파의 13대 손인 이용갑 노인은 그렇게 소화연대의 과거로부터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84세라지만 아직 정정한 모습이었다.
"백파 종가는 한절골에 있지." 우리는 한절골로 가 보았다. 나직한 산들로 이루어져 있는 마을. 한절골에서 우리는 두채의 집과 한 명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우렁골 예안이씨 백파의 종가이다. 안내판에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이라고 적혀있는 이 집은 경북민속자료168호이다. "이 집은 조선 중종시 부사직을 지낸 이필간의 아들 이영 공이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낙향, 중종 20년(1525)경 건립한 안동 거주 예안이씨 맏집이었으나 1925년 현 소유자의 선친이 매입하여 사랑채를 수리하였다고 한다."안내판의 기록이다.
"증조부 때 팔았습니다." 한절골에서 만난 이희용 씨가 말하였다. 수백년 전해 내려온 종가를 팔았다면 살림이 여간 고단하지 않았을 것이다. 빈손 털고 일어날 정도의 곤궁함에 빠져들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백년 가문의 역사를 고스란히 갈무리해 두고 있는 종가를 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절골 예안이씨 백파의 종가에는 지금 사람이 살지 않는다. 종가는 종손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고, 종손이 아닌 그 다른 사람도 여기 살지 않는 것이다. 백파의 종가는 여기저기 보수의 흔적이 엿보이기 때문인지, 오래된 집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았다. 그 집에서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끈 것은 두멍과 성주였다.
부엌 한쪽에서 두멍을 발견하고 감탄을 연발한 것은 사진을 찍던 김복영 씨였다. "요새 이런걸 보기 어려운데…" 부엌 한쪽 땅바닥에 깊이 묻혀있는 큰 독을 가리키면서 김복영씨가 말하였다. 나는 그것의 이름도 몰랐고, 용도도 몰랐다. 그것이 옛날에 부엌에 수도가 없었던 시절에 물을 길어다 채워놓고 쓰던 그릇이며, 이름이 두멍이라는 사실을 나는 김복영씨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성주는 마루의 들보 아래, 동쪽 벽 쪽에 매달려 있었다. 여러겹의 한지를 겹쳐 접고, 겉에 비닐같은 것으로 싸서 잘 묶어서 매달아 놓았는데, 그을름이 잔뜩 묻은 것이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매달려 있었다는 느낌이 역력하였다.
그 집을 팔고 나서 우렁골 예안이씨 백파의 종손은 그 아랫집으로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그 아랫집은 윗집보다는 낮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어서, 윗집 마당에서는 아랫집의 지붕을 볼 수 있었다. 이 아랫집의 주인인 종손은 이희동씨라 하였다. 62세로 서울에 거주하면서 각심사의 일에 관여한다고 아랫집을 지키고 있는 이희동씨의 사촌동생 이희용씨는 말하였다.
"세 파의 종손 중에서 백파와 중파의 종손은 다 서울 살고, 계파의 종가에는 종손이 살고 있지요. 할아버지 할머니가 대구 살다 들어왔어요." 이희동씨가 말하였다. 중파와 관계된 유물로는 '곡강정'과 '충효당'을 들 수 있다. 곡강정은 보수공사가 한창인데, 그 주변에서는 두릅나무가 지천으로 심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파를 여는 이전의 장자가 이유인이고, 이유인의 장자가 곡강정의 주인인 이호라는 점은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중파의 맏집의 흐름 속에서는 곡강정만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종가는 지켜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지금 우렁골에서 볼 수 있는 충효당파 종가는 중파의 둘째집이 전해 내려온 종가이다.
"이 집은 예안이씨 16대 손으로 안동에 처음 들어온 근재 이전의 둘째아들 풍은 이홍인(1528-1594)의 후손들이 사는 집으로써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 ㅁ자형 몸체와 ―자형인 쌍수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몸체는 홑처마의 납도리집이고, 쌍수당은 중층 팔작지붕이다."안내판의 기록이다. 길에서 경사진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 바로 쌍수당이 앞에 나타난다. 우람하고 조금쯤 몸체가 휜 기둥이 떠받들어 주고 있는 누각! 북쪽 방향에는 쌍수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서쪽 방향으로는 백원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쌍수당은 보수한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하여 무너져가고 있었다. 쌍수당과 안채는 다같이 자연석으로 쌓은 토대 위에 올라앉아 있다.
안채는 2층의 토대 위에 올라앉아 있어서, 쌍수당보다 춤이 낮지만, 그렇게 나직하게 보이지 않는다. 쌍수당과 안채를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목질의 착 가라앉은 색감이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안채의 대문 쪽 목판은 옹이부분의 송진이 황색으로 변해서, 마치 맹수의 휘번덕이는 눈이 목판 위에 여럿 박혀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뒷산 참나무 사이에서 이는 바람이 소슬하게 충효당집 안으로 불어들고, 주인이 집을 비운 충효당집의 텃밭에서는 모진 겨울을 이기고 남은 파들의 푸른 빛이 서럽게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 곳은 예안이씨 계파의 종가이다. "이 건물은 예안이씨 이훈(1486-1552) 선생의 종택으로 중종20년(1525) 무렵에 건립되었다. … 일반적으로 ㅁ자형 주택의 안채는 대청이 중앙에 놓이고, 좌우로 상방과 안방이 대칭적으로 구성되는데 비하여 이 집은 대청이 좌측에 놓이고 안방이 중앙 쪽으로 나오면서 상방이 대청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특히 안동 지방에서만 나타나는 특이한 형태이다."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대구에서 돌아왔다는 종손은 출타 중이고, 대청마루의 기둥 위에는 문패만이 혼자 매달린채 집을 지키고 있다. 대청마루의 안쪽에는 살평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대청마루 한쪽 벽에는 '을묘 각소 유사'라는 제목 아래 7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파, 강보, 강보소위, 내가, 내가소위, 용정, 마애. 그것들은 아마도 계파의 혈손들이 퍼져나간 지역과, 작게 갈라진 파의 단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우렁골의 예안이씨!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유적들만 덩그란히 남아서 객을 맞고 있는 것은 우리시대 종가의 현상을 증거하여 주는 일종의 푯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우렁골의 전의이씨 역시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