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에 자원봉사로 우리 문중의 소윤공 종중에 일을 돕고 있다가 2018년 8월 7일 남양주시에서 봉행되는 광해군(光海君)의 기신제(忌辰祭)에 참석하게 되었다. 아들과 딸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문화류씨인 내가 무슨 사유로 광해군의 제사까지 참석하는가 하고 물었는데, 그 사유는 광해군의 왕비인 문성군부인이 문양부원군에 봉호되었던 류자신의 딸로서 우리 문화류씨이기 때문에 우리 종중에서는 매년 많은 종원들이 참석하였던 것이다.
금년에도 전체 참석인원이 대략 90명 내외이었는데 우리 문화류씨 종원이 30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충효과 목종(睦宗) 정신이 투철한 우리 문중의 전통으로 경향각지에서 누구의 강요도 없이 자발적으로 참석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대종회 회장이 아헌관을 맡았고, 대종회 류종현 상임부회장, 소윤공종중 류우상 회장등 대전에서도 8명이 참석하였다.
이 기신제는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소속의 광해주숭모회(光海主崇慕會)에서 주관하고 남양주시문화원 등의 후원을 얻어 진행한다고 한다. 처음 참석한 행사에서 조선의 15대 왕으로 15년간 재위한 임금에 대한 예우나 절차가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9번지에 대군(大君)의 예로써 조성되었다는 묘는 광해군과 왕비인 문성군부인이 나란히 쌍분(雙墳)으로 조성되었는데, 가파른 비탈에 봉분 앞의 제절(祭砌)도 좁아서 제사지내기에도 너무 협소하여 웬만한 가문의 산소보다도 보잘 것 없었다.
‘남의 집 제사에 대추 놓아라 곶감 놓아라’라는 속담도 있으니 참견할 일을 아니지만 진설된 제수가 좀 특이하였다. 육류나 과일이 전혀 없고 다식이나 한과와 같이 모두 사람이 가공하여 만든 제과(製菓)가 진설되어 있었다. 제사는 홀기에 의해 엄숙하게 진행되었으나 다른 왕들에 대한 제사에는 헌관들이 관복을 입고 제를 올리는데, 폐위된 왕이라서인지 제복(祭服)도 관복(官服)이 아닌 평범한 유복(儒服)이었다. 초헌관도 남양주시 문화원장이 맡았는데 지위상으로 초헌관에 걸맞는 지위이었는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아서 광해군에 대하여 아주 상식적인 부분만 알 뿐이므로 평가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세자시절에 맞이한 임진왜란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임란이 끝난 후에 전후 복구에 크게 기여하였고,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구제하고, 중국대륙의 명청 교체 시기에 탁월한 외교 정책으로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한 공이 지대하다고 생각된다.
광해군의 죄(罪)가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아우를 죽임)라고 하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자로 태어난 것이 큰 불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흔히 역모로 몰려 처형된 사건이 빈번하였으니 살제(殺弟)는 큰 죄가 되지 못하고, 폐모(廢母) 역시 극심한 당파싸움으로 생긴 당시 상황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주도적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仁祖)나 그 신하들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부질없는 명분을 주장하다가 청나라의 침략을 유발하여 온 국토가 피폐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삼전도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치욕적인 겨레의 역사를 만든 것과 비교해 보면 광해군의 실정(失政)은 오히려 아주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각계 각층에서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재직 중의 크나큰 잘못으로 탄핵을 당하고 형법상 처벌을 받은 대통령도 ‘전대통령’의 예우가 있다. 따라서 국사편찬위원회 아니면 별도의 시호도감이라도 설치하여 광해군에 대한 신원 회복을 논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