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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14:1-23) 명상법과 십자가 복음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참 좋은 아침입니다.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에스겔14장 말씀으로 함께 합니다. 우리는 1-5절까지 같이 읽습니다.
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로 가는 모든 자에게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수효대로 보응하리니
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말미암아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명상법과 십자가 복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명상요법이라고 들어보셨지요? 원래는 인도에서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석가모니 붓다가 불교를 창시했을 때부터, 도를 깨닫기 위한 방법으로 명상과 요가가 아주 활용되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불교뿐만 아니라 특별히 힌두교가 요가에 강한 활용도를 보이고 있는데 다 도를 깨닫기 위한 방법입니다. 1960년대 이후에 오쇼 라즈니쉬가 인도의 철학자로 이 분이 자발푸르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계시다가 1990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이 분이 '명상캠프'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면서 약물 치료의 부작용에 대해서 불만을 느끼고 있던 서양의 의사들이 특별히 스트레스와 관련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 명상요법을 도입하게 됩니다. 대체 의학이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것이 이제는 의학 분야뿐만이 아니라, 워싱턴정가라든지 유럽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대단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실제로 하루에 10분이고 20분이고 시간을 내서 명상을 하게 되면 효과를 보는 겁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고 행복감을 느끼고 또 명상이 끝난 뒤에 오히려 당면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 더 명확하고 투명한 통찰력을 얻게 되고 효과를 보게 됩니다.
명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을 외향에서부터 내면세계로 바꾸는 겁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있다고 하면, 마음이 지금 바깥쪽으로 쏠리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등 마음 외부에 대해 붙잡혀 있던 마음을, 그 외부의 문제로부터 자유롭게 떼면서 내부의 세계로 몰입하게 해서, 그 내부세계에 무한히 확장되어지는 무한대의 세계, 영원한 세계로 접목을 시키는 겁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념무상이라고 이야기하고, 노자의 사상을 따르는 도교에서는 영원무궁한 허(虛)의 세계, 도(道)라고 이야기하지요. 그 도의 세계와 일치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가나 명상법의 요체는 삶의 문제로부터 마음을 격리시켜 내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쉬게 해주는 거예요. 지금 삶의 문제의 중압감들에 의해서 억압을 받고 있는 마음을 스트레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마음을 분리시켜요. 삶의 문제로부터 그 마음을 떼 내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십자가 복음을 제로원의 원리를 따라 설교할 때에, 사람들마다 제 턱 밑에 받치고 ‘아니 십자가에서 이 세상 삶에 대해서 죽으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라고 대들었던 것인데, 명상은 2500년 전부터 아예 그렇게 해왔던 거예요. 삶의 문제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해줌으로 통하여 격리됨을 통하여, 오히려 중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보다 더 밝고 맑은 통찰력을 얻게 해줄 수 있고 마음이 쉼을 얻게 되고, 거기서 마음이 행복감을 찾게 되고 원기를 회복해서 나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런 명상의 방법을 서양 사람들이 어떻게 이용하고 있느냐?
하버드 의대의 허버트 벤슨이라는 교수님이 계세요. 이 허버트 벤슨 교수님께서 당신에게 찾아온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서 만드신 아주 간단하고 손쉬운 명상요법이 있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어떤 단어든지 하나의 단어를 생각해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랑, 평화,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허버트 벤슨 교수님이 추천하는 단어는 그냥 아무 의미가 없는 ‘옴’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조용한 곳에 가서 돈 문제, 회사 일, 직장 문제, 결혼 문제 등 여러 가지 일이 복잡한 가운데 그냥 격리된 장소에 들어가서 가부좌를 하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옴’이라는 말을 외치면서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잡념들이 떠오를 때마다 ‘옴’하면서 그 생각을 다 누른다는 거예요.
이 ‘옴’이라는 소리로 잡념을 누르면서 점점 내가 호흡을 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겁니다. 코로 숨을 마시고 그것이 폐로 들어오고 배로 들어온다는 느낌을 가지면서 공기를 느껴요. 호흡에 집중하는 겁니다. 이렇게 10분이고 20분이고 명상을 하는 거예요. 계속 호흡자체에 집중을 하는 겁니다.
또 잡생각이 나면 ‘옴’하는 거예요. 마치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잖아요. 목탁을 두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입으로는 경전을 외우고 손으로는 목탁을 두드리는데 잡념을 없애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념무상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자, 이러한 명상이 기독교가 지배했던 서구 사회에 대단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치욕적인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마음 문제의 전문가가 기독교이지 않습니까?
제 1계명이 뭡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음이 제일 먼저 나오는 거예요. 제 1계명의 첫 단어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에요. 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한 마디의 구절 속에서, 명상요법이 지향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함과 동시에, 명상요법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달할 수 없는 것까지 다 포함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마음의 문제를 잃어버렸어요. 전부 기독교의 관심이 마음 바깥세상에서 어떻게 돈 문제에서 승리하느냐? 교회를 시작했으면 어떻게 부흥을 이루어 내느냐? 어떻게 형통하느냐? 어떻게 자식들의 문제가 잘 풀려 가느냐? 어떻게 무병장수 하느냐? 전부 외향적인 관심에 쏠려버리고 말았어요. 마음 문제는 불교가 가져가 버리고, 힌두교가 가져가 버리고, 서양 사람들 달라이 라마가 돌아다니며 강연하면, 그 서양 사람들이 빽빽한 도시 안에 몇 만 명씩이 모여서 달라이 라마의 강연을 듣습니다.
달라이 라마 강연의 핵심이 뭐냐? 불교의 사성제예요. 고집멸도(苦集滅道), 네 개의 성제인데 그 중에서 ‘멸’만 이야기합니다. 멸이 뭐예요? 마음에서 지금 관심을 끌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제거하라는 거예요. 마음에서 삶의 문제를 제거하면 너희가 마음의 평안을 얻고 도와 연결이 될 수 있고,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열광하고 있는 것인데 정말 환장할 일이죠.
여러분!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명상법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이 세상 삶의 문제로부터 마음을 다 모아드려야 합니다. 마음을 다 모아드린다는 것 이게 바로 명상법이 추구하고 있는 핵심 방법이에요. 마음에서 문제를 격리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무상무념의 세계다. 도교가 영원무궁한 도다.’라고 이렇게 막연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인격적 상대자로 관계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들은 무상무념의 세계다. 정말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고 있는 목적은, 무상무념의 세계자체를 묘사하는 것보다도, 무상무념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이 세상의 현실 문제로부터 마음을 격리시킨다는 거예요.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거기에 지금 완전히 매료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기독교의 잘못 아니겠어요? 명상법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없는 상태에서 막연한 영원성, 막연한 신의 세계, 막연한 허의 세계를 향하여 마음을 집어넣으려고 애쓰는 겁니다.
이 삶의 문제에 얽혀있는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서 목탁을 두드리고 ‘옴’하고 호흡에 집중하는 거예요. 호흡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돈 문제를 잊어버리잖아요. ‘내가 숨을 쉬는구나.’라고 하면서 ‘옴’하는 동안에 자식 문제를 잊어버릴 수 있잖아요. 건강문제에서부터 떠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순간만이라도. 잘 되지도 않아요. 저도 흉내를 내봤어요. 잘 되지도 않고 이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상태에서 삶의 문제로부터 격리되어 마치 무한한 바다에 물방울 하나 떨어지듯이 자아라고 하는 것이 해소되어 버립니다. 해소되는데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죄의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는 거예요.
죄의 문제가 뭡니까? 끊임없이 이 세상의 삶의 문제를 붙잡게 하고 그것을 생각하게 하고 계획하게 하고 의도하게 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끊임없이 삶의 문제를 향하여 발현되게, 생겨나도록 하는 죄의 근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옴’하는 말 한마디 한다고 해서, 현실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허락하신 사건이 뭡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복음 사건입니다. 십자가복음에서 내가 돌아가신 주님과 함께 나를 동일시할 때에, 돈 문제 앞에서 십자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내가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돈 문제로부터 격리되는데, 무한한 바다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처럼 내가 해소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네가 돈 문제 앞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그 돈 문제에 대해서 내가 생각하고 내가 느끼고 내가 계획하고 의도하면 다 죄가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표현하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 붙잡고 죽는다고 할 때에 그 십자가의 약속을 따라서 너는 이 세상을 창조한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겁니다.
명상법이 현실 문제로부터 떨어진 마음이, 알 수도 없는 막연한 허의 세계에 자기를 던짐으로써 허가 다 해소되어 버리고 없어져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들은 영원한 진리와 일체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망상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당신을 드러내시기 전까지는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찾아갈 수도 없어요. 단지 이들이 삶의 문제를 벗어나면, 이 세상에서 느끼고 세상을 생각하는 차원과는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요. 마치 벽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는데, 그 사람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는 관계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세계에 계신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관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세상으로부터 해탈을 추구하지만 잘 되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죄의 힘 때문에.
죄의 힘이라는 건 끊임없이 이 세상의 자식이든, 돈 문제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마음에 담게 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시험은 이삭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 특이한 표현을 씁니다. 우리가 읽은 3절에 보면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까지는 그냥 ‘우상 숭배’라고 말을 했지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인다는 표현을 씁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 숭배를 행위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 보는 겁니다. 마음에 불상을 담았다고 보는 겁니다. 마음의 문제로 보는 거예요.
예를 들어 불상이 멋있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담은 게 아닙니다. 우상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은 불상 앞에 절을 할 때에 자식 문제 때문에 절을 하면 자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사업 문제 때문에 절을 하면서 기원하게 되면 돈을 마음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을 똑같은 의미를 다른 표현을 쓰는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다.'라는 게 어려운 말인데, 쉽게 말하면 에스겔서 7장 19절에 보면 똑같은 표현이 나와요.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다'라는 말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예언을 하면서 “은을 길거리에 버리며, 금을 오물처럼 여기게 될 것이다.”라는 표현이 나와요. 그래서 그 금과 은이 바로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게 되는 내용입니다. 금과 은을 추구하고 좋아했던 것이.
그러니까 우상을 마음에 들였다는 이야기는, 금과 은을 향하여 내 얼굴을 집중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내 얼굴이 금과 은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동안에, 마음에 금과 은이 들어와 있었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담무스 신을 섬겼다는 겁니다. 태양신을 숭배하고.
자, 오늘의 기독교의 문제를 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희한한 말이 있어요. 마음에 우상을 들여놓고 그 우상을 들이게 되었던 이유, 너희가 진짜 좋아하는 것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면서 내 앞에 두었다는 이야기는 금과 은을 향해 달려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께 묻기 위하여 여호와 앞에 나왔다는 거예요. 선지자 앞에 나왔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 나왔다는 것을 대신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우상을 담고 그리고 금과 은을 좇아가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교회의 교인들의 현실 아닙니까?
인도에서 시작한 요가와 명상법을 따라 마음을 수련하며 마음을 통제해서 행복을 얻겠다는 사람들이, 정말 좁쌀 알 만 한 효과를 보면서 뭐라고 말하는 줄 아십니까?
‘문제를 탐구하지 말아라. 문제에 집착하지 말아라. 오히려 당신 자신의 탐구를 경주하라. 자신을 연구하라.’라고 말합니다. 문제를 연구하지 않고 나를 연구하면서 나를 집중하고 내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볼 때에 문제도 사라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판이에요. 지금. 이게 바로 오쇼 라즈니쉬가 갖고 있는 사상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은, 교회에 오면서 하나님께 나오면서 마음에 우상을 담고 나옵니다. 그게 금이든, 은이든, 자식이든, 건강이든, 진짜 이 세상의 연예인이든, 누구든, 우상을 담고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담은 채로 내가 얼굴을 향하여 좇아가고 이루고 싶은 것들, 소원들을 향해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 묻는 것은 솔로몬이 물은 것과 달라요.
솔로몬은 일천번제 후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일천번제를 통하여 자기의 모든 생각을 다 죽인 상태입니다. 자기의 의도와 계획과 모든 걸 번제를 통해 죽인 상태에서 자기 생각이 없기 때문에 비어 있는 공간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원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인들이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미 다 정해 놓았습니다. 금을 얻어야 하고 은을 얻어야 하고, 내 자식이 어느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내 인생이 성공해야 하고 형통해야 합니다. 이미 마음에 다 채워 놓고 요가에서도 하지 않고, 명상하는 사람들조차도 거부하는 그런 너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도 마음에서 문제를 비우려고 하는 판에,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이 그 문제를 가슴에 담고 마음에 담고 나와서, 이미 자기가 다 결정한 채로 하나님께 묻습니다.
‘하나님 내가 결정한 이것을 인가해주시옵소서. 내가 결정한 방향대로 성취해야 되겠는데 성취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라고 마음에 담고 나오는 것이에요.
주님의 십자가가 뭐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삶의 문제가 마음에 담겨져 있는 상태를 가지고 교회에 나왔다가, 주님의 십자가가 선포되면서 십자가에서 다 번제로 그 문제를 안고 있는 내 마음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전체가 자유롭게 되어서, 심지어는 내 몸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내 피와 살 같은 자식으로부터도 자유롭고, 그 사람이 없으면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애인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당장 망할 것 같은 사업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워져서 하나님께로 가는 겁니다.
여러분! 하버드 의대에 허버트 벤슨 교수님이 뭐라고 했냐면, 20분 동안 ‘옴’하면서 세상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을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은 뒤에 1분 동안 일상적인 일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일어나 세상으로 나가 살라는 이야기를 해요. 아, 정말 창피해요. 이런 말이 먹히는 것 자체가 창피한 거예요. 미국 사회에서 서양 사회에서.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내 마음에 담겨져서 나를 억누르고 있는 내 마음을 옥죄고 있는 모든 문제들로부터 내 마음이 죽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죽은 마음, 하나님을 향하여 다 살아서 하나님께만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서 평강을 누리세요.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상을 1분 동안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는 대로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같이 살면 되는 것이지요.어떻게 십자가 복음을 놔두고 또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그 막연한, 정말 좁쌀 알 만 한 효과가 있을지도 모를 하나님의 자기 계시도 없고, 죄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는 그 막연한 미신 같은 명상이라는 것에 목을 매도록 해야 되겠느냐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마음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시면, 이 삶의 문제는 다 저절로 해결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명상 요법에 우리의 마음을 맡기는 시대적 흐름이 팽배해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나의 마음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여, 이 삶의 문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며 감사하고 하늘 기운으로 행복할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십자가복음을 들었으니 이제는 나가서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엉뚱한 길로 들어서서 되도 않는 삶을 살아가는 저들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