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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지 않으면
호2:2
오늘날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데 필요한 것들, 세상에서 힘이 되고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켜주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들을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러한 것을 주시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과 형편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풍족하게 잘 살면 사랑을 받은 것이고, 힘들고 어렵게 살면 사랑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음란과 음행을 제하라고 하십니다. 3-4절에 말하고 있습니다.그렇치 않으면 벌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지하던 세상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던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심으로써 그동안 자기 수중에 있던 것들이 누구로부터 주어졌는가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벌거벗은 자처럼 되게 하셔서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수중에 있는 것과 타인의 수중에 있는 것을 비교하니 마치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외면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까? 그러나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것이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인가를 안다면 하루 세끼의 양식을 공급받으며 지금 생존해 있는 것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십니다. 2절에서 ‘어미’는 이스라엘 나라를 가리키며 ‘너희’ 즉 자녀들은 이스라엘의 각 개인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그들의 어미와 쟁론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쟁론하다’라는 히브리어 ‘리브(רִיב)’는 ‘다투다, 애원하다, 변호하다(plead, strive, contend)’ 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2절에서 아내인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인 음행을 저질러서 하나님과의 결혼관계를 더럽혔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의 어미를 법정에 고소하라는 말입니다.
2절‘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어미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너희 어미와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쟁론하고 쟁론하라’고 말합니다. ‘쟁론’이라는 말은 악한 행동을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서 법정에 끌고 간다는 말입니다. 싸움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릇된 행동을 중단하도록 강력히 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은 이 말씀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법정으로 데리고 가라, 너의 어미를 법정으로 데려가라’ 법정으로 왜 갑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정으로 가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2절을 다시 보십시오. 음란과 음행, 그리고 더러움의 문제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더러움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에게서 정결함이 사라졌다면 이 더러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날마다 법정으로 끌고 가야 합니다. 더러운 것과 맞서 싸워 없애야 합니다. 음란과 음행은 가장 잘 잠식해 들어가 그리스도인을 사로잡아 버리는 무서운 죄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싸워서 쫓아내야 합니다. 요즘 부끄러운줄 모르고 더러움에 빠져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드러내 놓고 더러움에 빠져 삽니다. 돈 몇푼을 위해서 자신을 더러움에 내어주는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얼굴에서, 곧 가장 잘 드러나 보이는 곳에서 또 숨겨진 곳에서 행해지는 음란과 음행입니다. 이것들을 도려내어 제거해야 합니다.
2절에 사용된 음란과 음행에는 더 깊은 영적인 가르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삶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부정에 대한 고발입니다. 아니 상주감리교회 성도인 저와 여러분의 영적인 부정에 대한 고발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영적인 부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위하여 영적인 군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평생 과제는 투쟁하며 사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너무도 아름답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너무도 자주 우리를 넘보는 더러운 것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영적인 존재는 영적인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도전이 우리에게 날마다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라는 말씀은 공식적으로 결혼관계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적인 ‘이혼’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혼의 순결함이 더럽혀져서 부부관계는 유지하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순결한 관계가 끝났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버리려는 목적으로 흩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남은 자들을 심으셔서 구원하고 회복시키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라는 말씀에서 ‘얼굴’은 밖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상태를 말하며 ‘유방 사이’는 감추어진 내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내면과 외면이 모두 우상숭배와 탐욕과 모든 불의의 죄로 더럽혀졌음을 드러내시면서 그것을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3절‘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고 말씀합니다.
‘나던 날’과 ‘벌거벗긴다’는 것에 대하여 에스겔 16장에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너를 돌아 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하고 내가 너로 들의 풀 같이 많게 하였더니 네가 크게 자라고 심히 아름다우며 유방이 뚜렷하고 네 머리털이 자랐으나 네가 오히려 벌거벗은 적신이더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더 사랑하거나,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또는 생각이 성경적이지 않고 세상적 사고방식에 젖어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오늘날은 크리스천)에게 ‘음란한 아내’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되는 하나님을 배반하여 살아가던 그 죄를 회개하라고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고멜의 부정을 통한 북 이스라엘의 죄악 고발과 징계를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의 행음하는 죄악은 곧 바알 우상 섬기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음행도 음행이지만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음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멸망의 큰 원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시켜보면 이 말씀은 먼저는 이방신을 경계하심이요, 아울러 골3:5에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하신 말씀대로 세속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다 치고 우리 상주감리교회 믿는 성도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진실로 회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태어날 때처럼 벌거벗긴다
호2:3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 준다고 외치며 히히덕 거리는 그들을 향해서 무엇이라 선포하십니까? 회개치 않으면 버림받는다는 경고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면 무엇을 들 수 있을까요? 많은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만 고르라면 ‘벌거벗김’을 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벌거벗김을 당해 보셨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종종 부모님의 경고에 의해서 벌거벗김을 당해서 밖으로 내쫒김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께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셨는데 어머니의 그 요구를 뒤로 하고 자지가 하고 싶은 것 제 마음대로 행했을 때 어머니는 여러 차례 경고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경고를 무시하고 또 제 뜻대로 행동하게 되면, 어머니께서 ‘이 놈 도저히 안되겠다’하시고는 홀딱 벗겨서 내 좇아 버립니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벌겨 벗김을 당해 좇겨나니 비록 보여줄 것 없는 어린 아이였지만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지 대문 앞에서 단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모두 손가락질 합니다. ‘저놈 저거 얼마나 말을 안 들었으면 벌겨 벗겨서 좇겨 났나’하면서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몸은 더 웅크러 들고 더 구석진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정말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은 그런 징벌이었습니다. 차라리 엉덩이 100대 맞는 것이 훨씬 견딜만한 그런 일입니다.
최근 우리는 완벽하게 벌거벗김을 당한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북한 공산당의 2인자였던 장성택이라는 사람입니다. 며칠 전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는 그런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보니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인자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고 그 뜻대로 살았으면 그의 말년이 편안했을텐데 자기 잘났다고 자기 힘 있다고 자기 능력 있다고 내가 아니면 너희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니 그 자리를 보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분노만 사고 내어 쫓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수거해 가버립니다. 심지어 그의 목숨까지도 빼앗아 버립니다. 완벽하게 벌거벗김을 당한 것입니다.
어떤 벌거 벗김입니까? 나던 날과 같은 때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장 비참하게 만들겠다는 표현입니다. 태어나던 날처럼 벌거벗기면 어떻게 됩니까? 갓 태어난 아기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의 핏덩이에 불과합니다. 온통 새빨갛고 쪼글쪼글한 것이 아무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던 날과 같이 벌거 벗게 만든다는 것은 정말 볼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이 선포는 하나님을 떠나 다른 우상을 섬기는 음란을 버리지 않는 자들을 향한 이 선포 벌거벗기겠다는 이 선포는 쉽게 말하면 누리고 있는 것 다 빼앗아 아무 것도 없는 처음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잘되고 있는 것 다 중단시켜 초라한 처음 때와 같이 만든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신앙의 최고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신앙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다마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그의 손에 창조된 우리의 입술에서 고백되어져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3-4절의 원리는 태어날 때에 손에 금을 쥐고 태어나는 아이는 하나도 없고, 멋진 옷을 입고 나오지도 않으며 세상의 권세나 뛰어난 학식을 갖춘 아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벌거벗은 몸으로 세상에 나오며, 그나마 벌거벗은 몸을 받아줄 사람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신세로 세상에 태어납니다. 즉 그 동안 자라면서 누렸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여인(이스라엘) 태어나던 날이 어떤 날입니까?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뒤에 이스라엘의 12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에 갔다가 요샙이 죽은 뒤에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날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을 구출해 내셨던 것입니다. 즉 그들이 태어나던 날은 아직 애굽에서 힘든 노역으로 죽지못해 살던 때를 말합니다. 이처럼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태어날 때의 상태는 ‘애굽의 종살이’를 뜻하는 ‘마귀의 종’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엡2:3-5절에 우리는 본질상 진노(마귀)의 자녀로 태어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을 얻게(출애굽)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얻지 못한 상태로 다시 되돌아가게 한다는 말입니다. 즉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고, 돼지가 깨끗이 씻었다가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가는’ 그러한 상태로 버려두신다는 말씀입니다. 벌거벗은 어린 아이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즉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것은 ‘죽음’을 뜻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음란을 제하지 않으면 3절‘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합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라도 해서 깨닫게 된다면 그것은 은혜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척박한 광야를 걸어보신 분이라면 다시는 그런 땅을 밟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얼마나 뜨겁고 얼마나 척박한지 모릅니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물 한 모금 제대로 찾을 수 없는 곳이 이스라엘의 광야이고 마른 땅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오아시스 같아야 되지 마른 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소망이 없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서 바랄 것이 없는 인생으로 즉 쓸모없는 인생 궁핍이 철철 넘치는 가난한 인생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광야’나 ‘마른 땅’은 모두 고통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났던 곳은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애굽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은 ‘마른 땅’이었습니다. 또한 출애굽하여 40년간 그들이 생활했던 곳 역시 ‘광야’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이 없는 광야에서도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셔서 그들에게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즉 광야생활을 하고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께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시고 하늘의 양식을 공급해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이스라엘 즉 하나님 대신에 그들 앞에서 세웠던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은 모두 광야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죽어갔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도 보았고, 쓴 물이 단물로 변하여 마실 수 있는 기적을 끊임없이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는 광야만 보였고, 마른 땅만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아시스 앞에서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며 사막과 같은 광야생활을 스스로 택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같은 환경 속에서 함께 살아갈지라도 찬송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스스로 눈을 가리고 생수를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어둡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광야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는 가인과 같은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내버려두셔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그것은 우준하게 되어 광야와 같이 메말라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길로 걸어가게 하신다고 하니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호2:4
음란을 제하지 않는 자에 대한 징벌은 그 징계가 나 자신에게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 즉 내 자식대로까지 이어진다고 선포하십니다. 4절‘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음란한 자 즉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떡과 물과 양털 삼과 기름과 술들을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니 주더라’하며 하나님을 떠나는 배은망덕한 자들의 자식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우리 부모님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식들에 대한 생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리라 뽀니다. 그것은 ‘나는 좀 고생하더라도 나는 좀 어렵게 살더라도 내 자식만큼은 잘 되야 한다’는 것이 자식에 대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합니다. 어떤 힘든 일이든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 걸고 합니다. 뼈가 부서지고 으스러져도 자식만 잘 된다면 ‘나 하나쯤의 고생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하면서 자신을 불태우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일 것입니다.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식 안 되길 바라는 부모가 있습니까? 해가 뜨나 해가 지나 오직 한 마음으로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소망하고 기대해도 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하나님을 인생 최고의 자리에 모시지 않을 때라는 것입니다. 즉 오늘 말씀 식으로 말하면 음란을 제하지 않을 때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내리시는 복은 자손 대대로 내려가게 되어 있는데,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민16장에 레위지파의 제사장이었던 고라, 다단, 아비람이 족장 250명과 함께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자들이며 하나님께서 그들과도 함께 하시는데 왜 모세와 아론만 하나님 앞에서 리더가 되어 그들의 왕처럼 행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목회자를 욕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땅이 갈라져 그들과 그들의 가족과 모든 자녀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산채로 음부에 빠뜨려 죽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합세했던 250명에게는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다 태워죽였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긍휼히 보지 않으시는 이유가 자녀들이 음란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즉 어미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상태에 빠져있었고, 이스라엘 개개인 역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전혀 다를 바없이 하나님의 미움을 받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나 자신이 어떤 공동체 속에 속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항상 점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떨어질 상황이 눈에 보이면 속히 그곳에서 부터 나와야 합니다. 소돔성에 살고있던 롯도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지체하자 천사들이 억지로 끌어서 그의 가족들을 나가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롯과 그의 가족을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속해있는 공동체와 또한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우리는 잘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기도해주는 이의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떠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떠나는 것을 포함하여 마음이 떠난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 상태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리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그 순간, 사람들 앞에서 리더의 말을 무시하며 자기 주장을 하는 그 순간이 바로 그를 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영의 영식을 제공해주고 여러분 곁에서 제일 많이 기도해주는 영적 지도자를 무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엄한 경계의 말씀을 버리고 이방 나라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이방 나라의 힘을 더 의지하며 자기의 생각대로 해줄 우상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즉 결혼한 여자가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면서 남편보다 다른 남자를 더 좋아하고, 남편의 말은 듣지 않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남자를 데려와서 그와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있는 남편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아내 뿐만이 아니라 자녀들까지 모두 아버지가 싫어하는 더러운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와서 더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당장에 그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외치는 호세아의 말을 듣지 않고 세상 것을 따라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고멜과 그 오랜 세월동안을 살게 하시며 호세아 선지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셨던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의 모습을 통해, 또 그의 자녀들의 이름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반드시 점검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처럼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내가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던 것은 무엇입니까? 물론 이것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내 힘과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그 결과 태어날 때처럼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벌거벗은 상태와 영적 갈급함에 목말라서 죽어가면서도 죽는 줄 모르고 혼자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우준하게 살아가고, 또한 자녀들을 통해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이렇게 다가옵니다. 내 손에 아무 것도 없게 만드시거나, 영적으로 죽에 해서 영직 멘토가 주위에 없어지고 지혜가 없이 자기 지혜와 자기 지식과 상식으로 살아가게 하시거나, 자녀의 문제를 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할 것은 회개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회개한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회개하라고 하면 기분만 나쁩니다. 회개하라고 하는 사람이 더 밉기만 하고 ‘당신이나 먼저 회개해’라는 마음이 생기며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결국 회개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환난을 거듭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 가운데 고난이 있습니까? 고통이 줄을 이어 매어 달려 있습니까? 하는 일이 막히고 힘이 들고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칩니까? 그 삶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울분을 토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잘못 보였으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미워하시면 내가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아가나’하는 분 있습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분 있다면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라도 여러분을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 곁에 두기 위해 그렇게 해서라도 함께 교제하기 위해 그 일들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저 그런 일은 없는 것입니다. 왔다가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깊은 계획과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징계와 고난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여러분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의 이 사랑을 확인하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멜로 본 인간의 마음
호2:5
거짓에 속임을 당한 마음입니다. 호2:5절‘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고멜이 세상 남자들에게 유혹 당한 모습을 묘사하신 말씀입니다. 온갖 아름다운 말로 고멜을 꾑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어떻게 합니까? 호2:6-7절‘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호세아가 가시로 그 길을 막았던 것처럼 이것은 우리를 찌르는 여러 고난들을 가리킵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먹은 후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거부한 결과 역시 혹독했습니다. 바울도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사탄의 가시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내게 주신 사명을 가시가 오기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잠5:3-6절‘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 그는 생명의 평탄한 길을 찾지 못하며 자기 길이 든든하지 못하여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느니라’했습니다. 그리고 담으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막았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앞길을 막으십니다. 세상 것이 우리를 만족하게 할 것 같지만 반대입니다. 믿는 자가 세상을 사랑함은 영육 간의 고통입니다.
호2:5절은 북이스라엘이 범죄하게 된 이유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범죄와 죄를 범하게 된 이유를 그 자녀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낱낱이 밝힙니다. 하나님은 범죄 한 자들에 대해서 직접적인 관계를 피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9:9-12절‘그 때에 내가 돌판들 곧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돌판들을 받으려고 산에 올라가서 사십 주 사십 야를 산에 머물며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두 돌판을 내게 주셨나니 그 돌판의 글은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것이요 너희의 총회 날에 여호와께서 산상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이니라 사십 주 사십 야를 지난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돌판 곧 언약의 두 돌판을 주시고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여기서 속히 내려가라 네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도를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었느니라’
본문에서도 자신의 아내로 대하지 않고 ‘그들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셨는데 범죄한 자들과 함께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줍니다. 북이스라엘의 범죄는 자신의 필요를 따라 신앙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주하던 가나안은 아브라함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다신을 섬기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금하고 하나님만 섬기게 하셨습니다. 출20:3,22:20절에 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신들이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바알’은 농사를 주관하는 신으로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고, ‘아세라’는 다산을 약속했습니다. 그들은‘여호와’를 전쟁의 신으로만 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있을 때만 하나님을 부르고, 가뭄이 오면 바알 신전을 찾고, 자식을 원할 때는 아세라에게 절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긴 것이었습니다. 마치 남편도 사랑하고 이웃 남자도 사랑하는 것이 잘못이듯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버린 것과 같습니다. 고멜이 자신의 필요를 따라감으로 음행을 범하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줄 이방신을 섬김으로 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는 이유는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우상에게 절하므로 스스로의 가치를 내동댕이치고 창조주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주의 나라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먼저’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없는 마음입니다. 호4:6절‘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 지식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리킵니다.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들 마음에도 말씀이 없으면 타락합니다.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 하나님 멀리 하면 시험이 찾아온다. 성령을 대적하면 용서 받지 못한다. 오직 예수 말고는 구원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등의 말씀들이 마음에 있으면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해도 두려워서 회개합니다. 말씀이 없는 곳에 사탄이 찾아옵니다.
마12:43절‘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못했는데 ‘물 없는 곳’은 광야나 사막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귀신은 사람 속에서 편안함을 얻는데 거처가 없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과 그 말씀을 떠나 빈집이 되면 귀신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들어오되 저보다 더 악한 일곱을 데리고와 함께 삽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그 말씀을 떠난 죄인의 마음입니다.
심판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향해 권면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우리를 예수 안에서 사흘 만에 일으키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상하시고 찔리시고 피 묻은 예수님의 모습처럼 죄인된 심령은 만신창입니다.
호6:1-3절‘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했습니다.
사1:5-6절‘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했습니다. 마치 죄인의 마음은 한센씨 병과 같습니다. 온 몸이 상하고 터지고 눈까지도 멀어버립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그러나 고멜은 죄인일지라도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상징인 호세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호세아’는 예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고멜’이라는 이름은 ‘끝, 마지막,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마지막이 아니고 완성적 의미의 마지막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선택과 예수님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에 죄인된 우리들이 의인이 되고 복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악된 마음을 바라보며 낙심하지 말고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고 모시고 그 복음에 서서 늘 성령충만하심으로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와 사랑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시와 담의 은혜
호2:6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 방법을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이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모든 것을 간섭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섭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특히 사사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주변 나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간섭을 싫어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간섭을 싫어하고 학생들은 선생님의 간섭을 싫어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환영해야 할 간섭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마귀가 간섭하면 망하게 되고 도적이 간섭하면 손해가 나지만, 하나님의 간섭은 생명이고 은혜입니다. 비록 채찍과 징계일지라도 살리고 은혜주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환영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그 조건 한 가지만으로 하나님은 누구든지 간섭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내가 잘 나서, 내가 똑똑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내 자신의 노력으로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심해도, 아니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해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찾아내서 다시 사랑과 긍휼로 돌보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면서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그 사역을 멈추지 않으시고 선한 자에게는 은혜로운 간섭을, 악한 자에게는 공의의 간섭을 하셨습니다.
가시와 담은 보호와 예방의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2:6절‘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여기서 가시는 범죄 한 인간이 견디기 어렵게 괴롭히는 고통과 환란의 도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연애하는 자를 따라갔더니 만 날 수 있었다’,‘내가 했더니 되더라.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더라’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깨워 주십니다. ‘그래, 네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겠다.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못하게 하겠다. 그래도 네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래서 이제는 음행하는 자들이 아무리 연애하는 자를 찾아 나서 보아도 찾을 수 없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햇빛과 비, 바람과 공기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시로 길을 막으시면 뚫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담을 쌓아 장애물을 만들기 시작하시면 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놓치는 것이 음란과 음행입니다. 영적인 간음입니다.
잠26:9절‘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하며 고통을 의미하고 사34:13절‘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라 하여 저주를 의미하며 고후12:7절‘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질병을 가시라 하였습니다.
이 가시는 성도가 깨닫지 못할 때, 가는 길이 잘못 되었을 때, 교만할 때 옵니다. 가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런 환란, 어려움을 당하게 하여 육신이 원하는 길을 가지 못하게 막는 길을 말합니다. 그리고 담 은 장애물, 경계선, 속박, 무서운 환란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행동을 못하도록 제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믿음 생활하는데 가시, 높은 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시가 찌르면 아프고 담이 높으면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장애물이 사랑의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내게로 돌아 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사랑의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영혼이 죽는 방향으로 나갈 때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개입하십니다. 곧 징계를 통한 간섭입니다.
욥기 1장을 보면 사단이 여호와 앞에 나타나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물어보십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 그러자 사단은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하고 사단에게 욥을 자랑하십니다. 그러자 사단이 그때부터 욥을 송사하기 시작합니다.
욥1:9-10절‘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욥의 사업에 보호의 울타리를 둘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울타리로 둘러주셔서 복을 받아 잘되니까 욥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냐고 송사하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의 여정에 성도의 가정과 사업과 영혼에 보호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살면서도 그 사랑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도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 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보다 애굽이나 앗수르를 의지하면 국가적으로 더 큰 유익이 되리라고 생각을 하였고, 애굽의 신이나 앗수르의 신을 섬기면 더 많은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남편인 하나님을 버리고 간부인 우상과 이방 국가를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내로 부름 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음행 하는 것을 보고만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앞길에 가시를 두고, 담을 쌓아, 그들의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큰 고통에 처하게 되었고, 고통 속에서 비로소 남편인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해내고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고 하게 된 것입니다.
분명 우리 앞에 난관이 있습니다. 문제도 있고, 장벽도 생기고, 고민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만 생각하면 답답하고 골몰히 따지면 머리가 아프고 복잡합니다. 내 삶에 늘 홍해가 있고, 여리고가 있습니다. 산 넘어 산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다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절하고 낙망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런 우리의 인생에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들어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과 돌보심과 은혜가 필요한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우리의 신앙에, 우리의 소원에 하나님의 간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순간순간 참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간섭을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시와 담을 둔 궁극적 목적
호2:7
오늘날 우상숭배 하는 많은 사람이 우상을 위해 돈을 바칩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헌금을 많이 걷는다고 욕을 하지만 교회에서는 헌금으로 선교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우상을 위해 사용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남편이 가정을 위해 중동에 나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보내주니까 아내가 그 돈으로 바람을 피운다면 남편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과 금을 우상에게 가져다주고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그와 같았을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결과로 형편이 비참해진 현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시와 담을 두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호2:7절‘저가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저희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저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고멜이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다 가시에 찔리고 또 바알과 아세라를 따라가다가 담에 머리를 부딪쳐서 깨지고 피가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든 것입니다. 위대한 선지자인 남편과 자녀들을 두고 바알과 아세라와 연애하는 자를 따라간 것 때문에 형편이 비참해진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준 것들을 가지고 우상숭배를 하니까 모두 뺏어버린 것입니다. 하늘이 땅에 응하지도 않고 땅이 곡식에 응하지도 않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땅이 하늘에게 비를 달라고 해도 주지 않고 곡식이 땅에게 물을 달라고 해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형편이 비참해졌습니다. 형편이 비참해지자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남편 호세아 옆에 있었을 때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며 다시 남편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상을 따라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알듯이 탕자가 유산을 들고 나와 다 탕진하고 돼지의 사료로 쓰이는 쥐엄열매를 먹어야 할 만큼 형편이 비참해지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일꾼들도 자신보다 형편이 나았다며 아버지 집의 일꾼으로라도 가서 얻어먹고자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는 이유는 쾌락과 풍요 때문입니다. 고멜은 바알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주신 분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떡과 물과 양털과 삼과 기름과 술까지 모두 주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바알과 아세라가 연애를 해서 비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따라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는 것입니다. 호2:8절‘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이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실로 돌아오는 ‘행동적인 회개’를 하게 하십니다. 탕자나 고멜 모두 돌아가려고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결코 죄와 우상으로부터 떠나가야겠다고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돌이키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십니다. 고멜이 돌아오니까 남편 호세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몸을 더럽힌 것이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느냐면서 박대하지 않았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을 다시 받아주었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받아줬듯이 하나님께서도 우상숭배하고 배역했던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받아주시고 축복하십니다. 호2:14-15절‘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 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말씀으로 위로하십니다. 말씀으로 타이르고 위로하시며 모든 것을 다 회복시켜주십니다. 없어도 되는 포도원을 등기해서 저의 포도원이라며 주시는 것입니다.
아골 골짜기에도 ‘소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호수아 7장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였을 때 그것이 아간의 범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아간과 그 가족들을 모아놓고 돌로 쳐서 죽인 곳입니다. 고통의 장소, 괴로움의 장소에서 소망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다가 형편이 비참해지고 아골 골짜기와 같이 괴로움이 있는 분이 계신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고 생각만 하지 마시고 행동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으로 바뀌게 되고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시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해주십니다. 우상에게 기도하면 우상이 들어줄까요? 우상이 기도를 들어줄 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호2:21-22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답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하리라’하나님께서 하늘에 응답하여 구름을 주시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여 비를 주고 땅은 곡식에 응답하여 수분을 주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는 유교, 불교, 선교, 샤머니즘 등이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명절만 되면 제사를 지내고 자식 장가보내려고 날을 받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한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계속한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우리를 벌거벗기시고 광야처럼 만들어 결국 목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상숭배 하는 이유는 쾌락과 물질의 유혹 때문입니다. 하지만, 쾌락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물질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상의 유혹에 빠지지 마시고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소망의 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잘해서 의로운 사람이 됐다거나 거룩한 사람이 됐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간증을 하더라도 내가 잘했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더라고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가 잘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주시지 우리가 무엇을 잘했다고 복을 주십니까? 우리에게 의가 있고 거룩이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죄를 막아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랑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나의 자랑, 나의 의,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복이 있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야할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등 돌리게 됩니다. 마음에 탐욕을 품고,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소망을 이루려 한다면, 이는 이미 하나님을 배역한 자입니다. 그 안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정숙한 신부에게 하나님께서 상 주시며, 이 땅에서도 위로를 부어 주십니다. 신자의 참 행복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데서 옵니다. 방탕하고 불결한 고멜을 그토록 사랑한 호세아의 사랑과 같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골수에 사무치는 깊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어떠한 모습이든지,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더라도, 기다리시는 주님께 돌아가 용서받으며,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를 망각 하지 말자
호2:8-10
이스라엘 민족은 실로 하나님께 커다란 축복을 받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의로운 통치를 받는 자들 이었을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많은 물질적 축복도 받아 누렸던 복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듯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축복의 선물을 받아 누렸던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 한탄과 진노와 저주를 발하고 계심을 목격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한없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축복에 보답하기는 커녕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을 가슴아프게 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릭효ㅚ ㅅ어도여러분 오늘 아침에 엄청난 은헤의 축복을 입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악으로 갚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있어서는 안될 패역한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8절을 보면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은과 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바알을 위해서 썼다는 것입니다. 풍요의 신을 따라 살며 그저 자신의 풍요로움만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 신앙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아까운 줄 모르고 전혀 엉뚱한 곳에 엄청난 돈을 사용한다면 그런 사람은 신앙인 다운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실을 망각하거나 그것에 대해 무지해서, 아니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9절에 나타난 이런 일이생깁니다.
1.하나님 말씀의 실재를 경험치 못하게 됩니다.
여기 ‘내 곡식을 도로 찾으시겠다’에서 곡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빼앗으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말씀 망각증을 가리키는가?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를 경험치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 결과 성경의 놀라운 말씀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이 느껴지게 됩니다. 지켜주신다 하셨는데 지켜주신 것 같지도 않고, 사랑해 주신다고 했는데 사랑해 주신 것 같지 않고, 위로해 주신다 했는데 위로도 없고, 채워주신다 하셨는데 채움도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허상처럼 내게 다가옵니다. 일점 일획도 틀림이 없이 살아 역사하며 내게 적용될 말씀이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이 다가옵니다. 이것이 주신 곡식을 도로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전부 도로 찾고 찾으시며 도로 빼앗아 가실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원래 그것들이 누구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부 다 ‘내 곡식, 내 새 포도주, 내 양털, 내 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성령 충만과 능력을 잃게 됩니다.
9절에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그랬습니다. 여기 새 포도주는 신약에서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시겠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거두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성령을 거두어 가십니다. 다윗은 51:11절‘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기도했습니다. 아론도 모세를 비방하다가 성령이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살전5:19절‘성령을 소멸치 말며’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론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멸되는 은혜가 있는가 하면 소멸되지 않는 은혜가 있습니다.
8절 보면 기름이 나옵니다. 이 기름은 감람유로서 이것도 역시 성령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새 포도주만 거두신다 하셨지 기름을 거둔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그 임재의식은 거두어 가셔도 우리를 인치시고 중생시키시고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그 구속의 은혜는 거두지 않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 따라가면 성령의 은사와 능력과 그 임재의식은 사라집니다. 히12:14절‘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3.성령의 아름다운 열매와 행실이 사라집니다.
9절 하반절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하셨습니다. 여기 양털과 삼은 의복으로서 성도에게 입혀지는 의의 상징입니다. 여기 양털은 겨울옷이요, 삼은 여름옷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도 겨울옷과 여름옷이 있어요. 그것은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아는 전천후 신앙입니다. 우리 성도들 이런 전천후 신앙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을 빼앗으신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아름다운 그 행실이 사라짐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히9:14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입니다. 양심으로 죽었다는 뜻은 범죄할 때 양심이 가책되어 성령이 소멸됨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행실들이 사라짐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안의 행실도 기쁨의 행실도 사랑의 행실도 절제의 행실도 온유의 행실도 마음의 여유도 사라집니다. 이것은 틀림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는 나의 죄를 속하신 보혈 공로에도 서야 하지만 둘째는 하나님을 잘 경외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지원을 받아 더 확신에 설 뿐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가능해집니다. 신앙은 이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 것이고, 내가 풍성하게 사용하는 것들이 다 하나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4.인간의 추한 것들이 밖으로 드러납니다.
10절‘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여기 수치는 범죄한 죄악의 상태를 시사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습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된 본질이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아주 추한 인간의 근성 본질 전의 내 모습 이게 나오지 않아야 하는데 나오려고 합니다.
성령으로 살아지지 않고 육체로 살아지려고 합니다. 이게 다 하나님을 멀리한 결과입니다. 10절에서는 완벽한 수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한 부끄러움입니다. 아무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양털과 삼이 사라져 버려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수치라는 말은 보통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타락한 상태에서의 수치를 말합니다.
스캔들입니다. 그러나 요즘 세상은 그 정도 가지고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니 더 문제입니다. 그런데 옷을 입지 못하고 벌거벗는 수치를 당한다는 것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옷을 벗은 채로 다니며 활동할 수 없기 때문에 벌거벗음의 수치는 활동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일 할 수가 없고 나설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우리의 새로운 삶을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고 하여 옷 입는 것으로 비유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존재가 됩니다. 부끄러움이 없어지게 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로서 여러분들은 부끄럽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수치스럽게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2
호2:11-13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더 엄청난 일이 생겨납니다. 하나님 멀리 떠나면 하나님께서 온갖 은혜의 잔치를 베풀어주시는데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데 나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 있고 겸손하면 작은 일에도 혹은 박해를 받아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잘못되어 있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설교하시고 안수하셔도 은혜가 오지 않습니다. 대신 헛생각만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1.좋은 은혜의 잔치도 나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절‘내가 그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수치가 더 깊어지면 모든 기쁨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더 무섭습니다. 수치감은 점점 더 우리 삶의 희락을 빼앗아 갑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그네 같은 삶에서 기쁨마저 없으면 정말 무슨 낙으로 살까요? 성경은 희락과 기쁨이 사라지고 더 나아가 모든 절기와 명절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절기와 명절은 기쁨과 즐거움을 얻는 시기뿐 아니라 비전과 희망을 재확인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좋은 은혜의 잔치도 나에게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11절에 이상의 절기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내신 모든 은혜와 축복의 절기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예표요, 주관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시는 다양하고 충만한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폐하신다는 것은 그러한 축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멀리 떠나면 하나님께서 온갖 은혜의 잔치를 베풀어주시는데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씀에서 은혜를 받는데 나에게는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어 있고 겸손하면 작은 일에도 혹은 박해를 받아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나 잘못되어 있으면 예수님이 오셔서 설교하시고 안수하셔도 은혜가 오지 않습니다. 대신 헛생각만 꾸역꾸역 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유월절이든, 칠칠절(오순절)이든, 초막절이든 모든 절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전해지는 비전을 재삼 확인하는 기간입니다. 절기를 지내며 희망이 솟구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에 함께 하셨음을 확인하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려갈 힘을 얻는 기간이 바로 모든 명절과 절기입니다. 이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너무 끔찍합니다. 즐거움이 없는 삶도 참을 만합니다. 그러나 희망과 비전이 없는 개인, 가정, 교회, 또는 희망을 포기해 버린 가정과 교회는 비참합니다. 희망과 비전이 없으니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습니다. 포기하면서 사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2.하나님이 주신 축복도 사라집니다.
12절에 여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과수로서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멀리 하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사라집니다. 영의 복만이 아니라 육의 복도 그렇습니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거칠어집니다. 열매가 사라집니다. 거기에서는 아무것도 거둘게 없습니다. 풍성하게 살려고 했는데 들짐승이 먹어도 시원찮은 삶으로 탈 바꿈하고 만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살고만 있겠습니까? 여기서 포기하겠습니까?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겠습니까? 아닙니다.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간단한 해답은 처음으로 돌아가 ‘알아야 할 것을 알면서 살면’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을 하면서 살면 됩니다.
3.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가까이 한 만큼 그렇게 하십니다.
13절에 여기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이 말씀에서 발견되는 원리는 정비례의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만큼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만큼 은혜를 누릴 것이고, 그 만큼 패역했다면 그만큼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믿음대로의 원리입니다.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만 성화와 축복은 노력한 만큼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모든 은혜의 복음으로 다가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가까이하면 말씀의 실재를 경험합니다. 성령 충만과 능력을 받습니다. 성령의 열매와 온갖 축복과 형통이 임합니다. 대책이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는 13절에 나와 있습니다. ‘저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을 따라 내가 저에게 벌을 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엉뚱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연애하면서 산 것에 대해 하나님이 벌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무슨 대책 있는 삶이 발견됩니까? 이스라엘이 바알과 연애를 했습니다. 연애하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우리의 새로운 출발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시 하나님과 연애하면서 살자’는 뜻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자는 말입니다. 호세아가 애틋한 연애의 감정을 가지고 다시 살아 보자고 역설적으로 외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연애하면서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한번 살펴보면 좀더 정확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앙의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애하는 자의 삶은 첫째 ‘아름다운 것으로 장식하는 삶’입니다. 연애하는 사람은 사귀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름답게 꾸밉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은 정말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이런 저런 것으로 우리를 아름답게 다듬어 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다른 것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연애하는 자를 따라가는 삶’이 연애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나는 그 사람만 좇아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든 그대가 있는 곳이면 따라가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연애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고백이 아닙니까? 하나님만 따라가십시오. 바알을 좇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이신 하나님만 따라가는 삶이 바로 새 출발의 삶입니다.
세째는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는 삶, 하나님 한분만 생각하는 삶’입니다. 바알을 연애하니까 다른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도 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연애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다른 것들은 이제 잊어버리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이 당신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서서히 더하는 것이 보람이며 아름다운 일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도 날마다 더 나은 삶은 우리의 신앙에도, 경제에도, 건강에도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우리는 매일매일 더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욱 노력하고, 날마다 기대할 수 있는 내일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내일을 기대하십시오.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이 펼쳐집니다. 날마다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내일은 우리에게 더하는 더 나은 삶이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헌신이 있는 삶’, ‘나를 태워 향으로 바치는 삶’이 연애자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연애하면서 바알에게 무수한 향을 살라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향을 살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을 드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헌신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저주나 처벌이 아닌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미래의 약속이 있을 것입니다. 소망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속과 안일에 빠져 있다면 회개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한 모든 복을 누리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징계의 축복
호2:14-15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거친 들에서 권면하시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보면 온갖 축복들이 주어지고 있는데 그것은 거친 들의 권면의 결과입니다. 그럼 거친 들의 권면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러한 축복이 나타날까요? 징계가 주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1.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기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위로하겠다고 했습니다. 14-15절은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후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회복의 예언은 그들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께서 취소하실 것임을 전제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철저히 형벌을 가하실 것입니다. 다만 그 형벌은 그들을 영원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형벌의 과정을 통해 그들을 변화시고 회복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본 단락의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앗수르를 사용하여 심판하시고, 또한 유다를 바벨론으로 심판하신 이후 이스라엘 자손의 남은 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것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시대에 성취될 것입니다. 이 가운데서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위로하겠다’파격적인 사랑의 음성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고치기 위해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라도 회복시키시며 위로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거친 들’은 ‘광야’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어 결혼 관계에 들어간 이후 그분을 의존하고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장소입니다(출 13: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광야로 데려가신다고 한 것은 과거 그들이 순전하게 하나님을 따랐던 그 상황으로 돌이키실 것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그곳은 오직 하나님과 이스라엘만의 은밀한 장소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첫사랑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조상들은 광야 40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신 8:1-4). 광야 생활 당시 선민들은 비록 척박한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만나와 메추라기, 그리고 여러 이적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놀라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광야는 진정한 은혜와 사랑의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광야로 인도하신다’ 는 것은 그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순수하게 따랐던 상황으로 다시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고, 그들에게 현실적으로 척박한 환경을 조성하여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죄악된 모습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실 것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광야는 은혜와 사랑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훈련과 연단의 장소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독과 좌절, 사업의 어려움과 명예 훼손의 아픔 등은 우리를 단련시키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을 때로는 거친 들로 데리고 가시는 것은 우리에게 첫사랑을 회복시켜주고자 함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말로 위로하실 것’ 이라고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돌같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은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새로운 영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들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자신의 율례를 행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 ‘말로 위로하고’란 ‘저희 마음에 말하고’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징계를 받은 후의 아름다운 영적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사람은 완악하여 징계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 깊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채찍은 말씀이 마음 깊이 파고들게 합니다. 잠22:15절‘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잠23:13-14절‘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약속대로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피를 뿌려 새 언약을 완성하셨습니다. 눅22:20절‘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이제 예수께서 하늘 보좌로부터 파송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들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고멜처럼 방탕하고 부정한 나, 내게 주신 건강과 가정과 사업과 청춘과 모든 것을 마음껏 세상 쾌락을 위해 낭비해버린 나, 이런 나를 기어코 찾아오셔서 회복시켜 주시는 새 언약의 중보자 예수님의 위로의 사랑! 이 놀라운 은혜가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15절에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그랬습니다. 귀한 포도원을 얻는 축복입니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대개 교회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포도원은 술람미가 솔로몬을 만났듯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만나시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움을 통해서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좀 더 좁은 의미에서 포도원은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주었다란 성도는 고난을 통해서 더 주님을 가까이 하며 기도한다는 교훈입니다.
징계란 무슨 결과를 줍니까? 15절‘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여기 아골 골짜기는 아간이 하나님이 금지한 물건을 도적질하고 돌에 맞아 죽은 저주의 장소입니다. 여기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아골 골짜기는 바로 율법의 돌에 맞아 철저히 정죄되고 심판 받은 타락한 우리 인간의 영적인 모습입니다. 그 무더기가 곧 우리들의 무더기입니다. 그런데 왜 징계가 소망을 줍니까? 그것은 징계가 신앙으로 돌아오게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징계 받고 예수님께로 오면 삽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15절‘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계속됩니다.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아골 골짜기는 ‘괴로움의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곳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직후 가나안 정복의 문턱에서 좌절의 쓰라린 경험으로 울고 분노했던 곳입니다. 이곳은 그들이 여리고성을 함락하여 진멸한 직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도록 한 물건을 아간이 훔친 것 때문에 아간과 그의 가족들이 백성의 돌에 맞아 죽었던 장소요 시체들 위에 돌무더기가 쌓였던 곳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정원은 황폐해져 있습니까? 12절‘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사랑도 부족하고 감격도 메말랐습니다. 우리의 기도 소리는 싸늘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입술에 사랑의 노래와 열정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회복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 홍해 해변에서 소고치며 기쁨의 노래를 부르던 미리암과 여인들처럼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온 몸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징계의 결과
호2:16-20
16-17절‘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했습니다. 바알 우상은 세상 것을 사랑함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회개하고 회개해도 스스로는 버릴 수 없는 어떤 사랑의 대상 그것이 바알입니다. 그러나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징계는 주님만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히12:9-10절‘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했습니다.
18절‘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여기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들은 육신의 정욕이나 사탄과 죄악의 상징들입니다. 또 활과 칼이나 전쟁은 여러 가지 갈등과 시험입니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안팎의 완전한 평강을 시사합니다. 히12:11절‘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징계는 우리가 천국에 가기까지는 여러 가지로 바꾸어 가며 사실상 떠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동반자가 있어야 우리의 천국 길은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온전하게 되기까지 그의 일생에 따라다녔던 징계가 그러한 바와 같습니다. 확실한 사실은 날이 갈수록 더 풍성한 은혜와 평강으로 넘친다는 것입니다.
19-20절‘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여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장가드신다는 것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냥 장가가 아니라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과 진실함으로 장가든다 하셨으니 최고의 서비스를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징계의 결과는 행복과 형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임재 의식적으로도 함께 하시는 은총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부부의 사랑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도 그렇게 사랑해 주십니다. 본문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라는 구절이 세 번 반복된 것은 결혼 사실을 최상급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앞선 2절에서는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혹독한 심판을 당하였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전혀 새로운 결혼 관계로 들어가 영원히 그 관계를 지속하실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러한 결혼 관계는 과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맺었던 언약(출 24:1-8)을 통해 들어갔던 결혼 관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옛 시내산 언약에서 시작된 결혼 관계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부정행위(배교와 범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깨어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실패의 책임을 물어 이스라엘 자손을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시고 이방 땅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시는 극한 환난을 내리셨습니다. 훗날 하나님께서 회복된 이스라엘과 맺으실 새 언약은 과거와 달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완전한 결혼 관계를 이룩할 것입니다. 본문은 이 사실을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그리고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부부의 사랑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본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굳이 결혼 관계로 표현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계약이나 언약은 당사자 간의 사랑이 없이도 이행 가능하지만, 결혼이라는 관계는 부부 사이의 사랑이 없이는 이행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겠다 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 언약 관계를 맺으신다는 의미만 아니라 그들과 완전한 한 몸처럼 연합을 이루고(창2:24)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영원토록 지켜나갈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신약에서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신약의 교회는 한 몸이면서 뜨거운 사랑의 관계를 영원토록 지켜나갈 신랑 신부의 관계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은 신부된 참 교회(=해를 옷 입은 여자, 계 12:1)에게 장가들되 본절에서 언급한 5가지 결혼 지참금을 신부에게 지급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있을 어린 양의 혼인잔치의 성격이 어떠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지참금은 ‘공의(체데크)’ 인데, 이것은 그분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행위라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님의 완전성입니다. 둘째 지참금은 ‘정의(미쉬파트)’ 인데, 주님께서 정당한 절차를 밟아 흠이 없는 면모를 갖춰 장가드실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지참금은 ‘은총(헤세드)’인데, 주님은 신부되는 자기 교회에게 성실함으로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넷째 지참금은 ‘긍휼히 여김(라함)’인데, 이것은 어원상 어머니의 자궁이나 사람의 내장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회복된 이스라엘을 마음이 탈 정도로 뜨겁게 사랑하시고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고 풍족히 채워주시는 분으로 그들에게 장가드실 것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지참금은 ‘진실함(에무나)’인데, 주님의 거짓 없는 진실성, 영원히 변치 않으심, 참된 진리 등을 나타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이상의 다섯 가지 지참금을 가지고 교회에게 장가들어 한 몸 되셔서 영원토록 사랑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20절에서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라고 하신 것은 신부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결혼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육체적으로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게 되고 그분의 진심을 알고 그분의 뜻을 깨닫고 영원히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가 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는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관계입니다. 지금은 비록 괴롭고 어려운 환경 때문에 주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주님의 위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키워야 합니다. 주님은 이 절망의 골짜기,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삼아 주실 약속을 주셨고, 이제 부활의 영으로 오셔서 그 약속을 이루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위로의 사랑이고 회복의 사랑입니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리라’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부부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영원한 사랑과 영원한 안전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요10:28절‘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인 저와 여러분에게 예쁘게 봐 줘야할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의 사랑이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파격적인 주님의 사랑입니다. 기억합시다. 우리는 변하지만 그분은 불변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은총(헤세드)의 남편이십니다.
우리 속에 주님 없이 살고자 하는 유혹이 올 때마다,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압력을 행사해 올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이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면 신앙의 절개와 순결을 지킨 성도들을 영원한 사랑의 반려자로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친히 영원한 남편이 되셔서 영생복락의 나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날을 바라보면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이모로 저모로 우리가 은혜 받고 복 받는 길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징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징계인 줄 알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십시다. 그래서 약속하신 모든 복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호2:21-23
서로 응답하는 복이 있게 됩니다. 서로 마주쳐 울리는 삶이 복됩니다. 대꾸 없는 삶은 불안합니다. 대화가 안되면 평안이 없습니다. 그것은 일치가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 하늘에 응하시고, 하늘은 땅에,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그리고 그 풍성함이 이스르엘에게 임하겠다는 것입니다. 멋진 복입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들이 더 확실하게 하나님의 땅에 심기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가 때로는 세상과의 타협, 그리고 이방 종교와의 타협을 통해서 육신적인 안정과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할 사실은 어떠한 형태이든 하나님을 떠나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모든 일을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이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행복을 안겨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떠난 자리라면 포기하는 지혜로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용서하시는 하나님
이스르엘의 뜻은 흩어 버리신다는 뜻임과 동시에 씨를 뿌린다 그래서 결국 심는다는 뜻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응하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심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심어 주셨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복을 받은 우리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가지를 알려 주면서 이장을 맺고자 합니다.
호2:23절‘내가 나를 위하여 그녀를 땅에 심고 긍휼을 얻지 못하였던 그녀에게 긍휼을 베풀며 내 백성이 아니었던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며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복지에 들이고 긍휼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하나님백성 아니었던 자를 너는 내 하나님백성이라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생의 기업부여, 관계회복으로 나타난 하나님사랑과 만복을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23절에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복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나와 있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이런 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은 우리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사는 것은 날 위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목표가 이것입니다. 복을 누림도 가정과 사업을 꾸려 나가는 것도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도 그렇게 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을 창조한 목적이 그분을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명백하게 알아야 합니다. 이스르엘에 응하는 곡식과 포도주, 기름의 풍성함, 그들에게 주어지는 이 모든 축복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방법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항상 자비를 베푸십니다. 요나 선지자는 사실 하나님의 이런 성품이 싫어서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알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늘 괴롭히는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치 않으면 멸망시키겠다는 말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니느웨 백성들이 듣지 못하도록 도망한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는 것은 좋은데 남들이 용서받는 것은 싫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방백성들에게도 그러는데, 자기백성인 이스라엘에게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의 죄를 책망하면서도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내가 너희를 받아주겠다고 하십니다.
호2:21-22절‘그 날에 내가 응답하리라’,‘응답 하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듣다’, ‘응답하다’(사58:9)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의 기도를 듣고 은총과 축복을 내리심으로써 응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사막이 불모지가 되고,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가지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그 사막에 다시금 비가 오기 시작하면 땅도 살아나고, 식물들도, 동물들도, 사람들도 살 수 있습니다. 버려진 땅이 가치 있는 땅으로 바뀌어 집니다. 땅이 살아야 인간이 살 수 있습니다. 땅이 살 수 있는 것은 하늘에서 비가 와야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면, 땅에서 수증기가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백성들이 이 땅에서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복을 구하면, 그때에 하나님은 하늘에게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게,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게 응답하여 수확이 풍성하도록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러한 축복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신28:1절이하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입니다.
그 미래의 은총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땅의 소산물에 명을 내리시고 차례로 응하게 하시는 것이었읍니다. 즉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을 내리기 위하여 일사불란하고도 철두철미하게 작동하게 될 것이라는 아주 멋진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도 한술 더 뜨셔서 그와 같은 축복의 정도는 바로 ‘이스르엘에 응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르엘’은 아합 왕조가 이방 군대에 멸망당한 곳으로서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에 있어서는 저주의 대명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와 같은 이스르엘에 ‘응하도록’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은, 이전에 받았던 벌을 상응하고 남음이 있도록 더욱 크게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분명히 잘못하고 있을 때조차 그저 잘한다는 칭찬만 해주고 매사에 달래어주는 사탕발림 식으로 자식을 키우시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그랬다가는 점점 더 버릇만 나빠지고 결국 자녀다운 자녀, 아니 사람다운 사람조차 못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녀를 그런 식으로 망치거나 잃어버리실 분이 결코 아니신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이신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신자라 할지라도 때로는 ‘거친 들’로 쫓아내어서 톡톡히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 지금은 아골 골짜기 같은 고난을 당하지만, 이것은 내가 너희들 영혼을 살리기 위해 정신 차리라고 잠시 내리는 매에 불과하다. 일단 너희들이 내게로 돌아오게 되면 너희들은 오히려 이 고난으로 인하여 나에게 더욱 감사하게 되고 너희들에게는 갑절의 축복으로 갚아질 것이다’라는 너무나도 자상하고도 좋은 말씀의 위로를 바로 그 ‘거친 들’에 까지 친히 찾아오셔서 들려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로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그 어떤 슬픔과 고통 중에 있다 할지라도 넉넉히 이겨내고 소망을 지킬 수 있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모든 신자들은 바로 이런 체험을 늘 하면서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당할 때는 아파서 울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그 매로 인하여 자신의 지난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되며 따라서 한 걸음 더 성화되어지는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게 되면, 오히려 그런 연단 중에도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리게 되는 경험을 참된 신자들은 반드시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3절‘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우리가 어떤 사람을 도와주려고 할 때 하는 말이 ‘내가 심어 줄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백성을 심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심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라’는 ‘씨를 뿌린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회복시킨다는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다음에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호1:7-9절까지의 말씀과는 반대입니다.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