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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사와 온달∙평강 로맨스 길 여행기
가을의 끝자락, 초겨울의 문턱에 옛 고구려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온달 평강 로맨스 길’을 걷기 위하여 춘천의 모 걷기모임 회원들은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난다. 춘천에서 오전 8시에 출발하여 중앙고속도로와 38번 59번 국도를 달려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에 있는 ‘구인사’에 11시가 되어 도착하였다. ‘구인사’는 대한 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이며 전국에 160여개의 사찰을 관장하고 있고 신도가 수 백만명이나 된다. 강원도에는 춘천 삼운사, 원주 성문사, 강릉 삼개사, 삼척 삼산사, 동해 만리사 등 31개의 사찰이 있다. 우리나라 4대 불교 종단의 하나인 천태종을 다시 창건 하신 분은 삼척 노곡면 상마읍리 봉촌마을 출신 ‘박준동(朴準東) 상월원각대조사’이시다. 상월대조사님은 15세 때 출가하여 수 년 동안 바랑을 메고 여러 명산대찰을 찾아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고 태백산 기슭 옛 신라의 원효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석굴에서 솔잎과 쑥 등으로 연명하시다가 1942년 가을에 깨달음을 얻고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백자동에 있는 소백산 국망봉을 중심으로 장엄하게 늘어선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연화봉 아래에 손수 칡덩굴을 얽어 삼간 초암을 지으신 다음 세속의 왕래를 끊고 수행에만 전념하신 끝에 대도를 성취하여 구인사를 창건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셔서 천태종의 발원지인 천태산 수선사와 국청사를 찾아서 우리나라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와 고려 시대까지 존치하다가 조선 때 억불숭유 정책으로 없어진 천태종을 다시 부활하기로 발원하고 우리나라에 오셔서 천태종을 550년 만에 다시 창립하셨다. 비롯하여 대조사전, 광명전, 지관당, 향적당, 관음전, 삼보당, 범종루(종각), 총무원, 인광당, 도향당, 수련관, 장문실, 사천왕문, 일주문, 중앙박물관 등 50여동의 건물들이 골짜기 경내를 꽉 메우고 있으며 하루에 불자 만 여명이 숙식을 할 수 있다. <대조사전 앞에서> 우리 일행은 구인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 공양을 하고 구인사를 출발하여 보발재(그드너머재) →방터→온달산성→온달관광지를 경유하는 걷기 코스, 약 12㎞를 3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보발재에서 방터로 향하여 가는 오르막길 왼쪽으로는 멀리 해발 1,440m의 소백산과 국망봉에 옅은 구름이 산허리를 감싸고 있는 초겨울 산의 아름다운 정취를 감상하면서 기다란 오르막 산길을 한발 한발 힘겹게 오르니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모두들 겉옷을 벗는다. 산길은 갈색 낙엽들이 포근한 이불 같이 쌓여 있어 발걸음을 옮길 때 마다 바스락 바스락 거리며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었고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구불구불한 길이지만 위험한 길은 아니었다. 산길 중간에 화장실과 자동차 차단기, 홍살문, 주차장도 있었고 쉴 수 있는 의자를 만들어 놓은 소나무 숲 쉼터가 있어 잠시 쉬었다가 내리막길을 걸어서 방터 쪽으로 향하였다. 방터 쪽으로 내려가는 길옆에 ‘화전민촌 입구’ 팻말이 보였다. 화전민촌을 복원하여 놓았다고 한다. 산이 많은 우리 강원도에는 이곳 보다 더 많은 화전민 주택이 있었고 현직에 있을 때 같은 과에 있는 산림계의 ‘화전정리사업’과 ‘독가촌정리사업’을 도우며 고생하였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다시 방터에서 계속되는 약간의 내리막길을 걸어서 주차장에 도착하니 온달산성으로 가는 샛길이 나타난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한참동안 걸어서 올라가니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로맨스가 담겨 있다는 ‘온달산성(溫達山城)’의 제일 높은 성벽이 보인다.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은 서북쪽으로는 남한강 상류와 영춘면 소재지가 저 아래 보이는 절벽을 끼고 있는 해발 427m의 산 정상에 축조되어 있다. 온달산성은 경사진 변형 사다리꼴 모양으로 성의 둘레는 683m이고 성벽의 높이는 3∼4m 인데 높은 곳은 8.5m나 되는 곳도 있으며 납작하고 반듯한 검은 색깔의 정판석으로 축성되어 있었다. 산성에는 동문과 남문, 북문 터가 남아 있으나 북문터 부근의 일부분은 붕괴 되고 있어 안타까웠다. 온달산성은 고구려의 온달장군이 신라군과 한강 유역의 패권을 놓고 싸우다가 전사한 ‘아단산성(阿旦山城)’이 이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6세기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전까지는 남한강 유역이 고구려의 땅이었는데 신라가 침범하여 점령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영양왕은 이 지역을 다시 찾기 위하여 온달장군에게 군사를 내 주어 혈전을 벌였으나 결국 목적을 이러한 전설을 기반으로 이 산성이 ‘온달산성’이라고 명명 되었고 사적 제 264호로 지정하고 있다. <온달산성 안에서> 온달산성에 서 있으니 옛날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를 초 중 고교시절 역사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고 동화책으로도 읽고 여성국극단의 연극과 영화를 본 어릴 때의 기억들이 떠올라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시 되새겨본다.
「온달(溫達 559년∼590년)은 고구려 25대 평원왕 때 사람이다. 얼굴은 울퉁불퉁하여 우습게 생겨 용모가 괴상하였으나 마음씨는 고왔다. 평양성 변두리 산 아래 살면서 집이 가난하여 늘 밥을 구걸하여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다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을 신기도 하고 맨발로도 다니니 아이들의 놀림을 받고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당시 평원왕에게는 세 왕자와 울보인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평강공주는 어릴 때부터 자주 울기를 잘해서 평원왕은 “네가 울기만 하여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보내야 하겠구나.”고 왕이 농담 삼아 공주가 울 때 마다 자주 꾸짖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자란 평강공주가 16살이 되어 시집을 갈 나이가 되었기에 귀족 고씨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자 공주는 “아버지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낼 것이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서민들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데 지존하신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대왕의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감히 대왕의 명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대왕께서 늘 말씀하시던온달에게 시집을 갈 것입니다.” 라고 하니 평원왕은 크게 노하여 “네가 내 명을 거역하니 내 딸이 될 수 없구나, 어찌 궁궐에서 같이 살 수 있겠느냐? 네가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고 하며 공주를 궁궐에서 쫒아 낸다. 공주는 자기가 갖고 있던 금붙이 여러 개와 노리개, 옷감 등 값비싼 물건과 어머니 왕비가 몰래 준 금반지 금팔찌를 가지고 몸종도 없이 홀로 궁궐을 나와서 바보 온달이 산다는 집을 찾아 먼 길을 걸어서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서 온달의 집에 찾아 간다. 누추하고 쓰러져가는 토굴 같은 움막집에는 눈이 멀고 옷이 남루한 늙은 온달의 어머니가 혼자 있었다. 공주는 가까이 가서 절하고 아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온달의 어머니는 “내 아들은 가난하고 추잡하니 귀한 분이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아녀자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남다르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토끼 틀과 같습니다. 틀림없이 귀한 집 아녀자일 텐데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파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공주는 바로 온달을 찾아 나선다. 산 밑에 이르렀을 때,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온달을 만난다.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소녀는 온달에게 시집을 오려고 찾아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온달은 놀라서 물러서며, "이 곳은 어린 아녀자가 다닐 수 있는 곳이 못 되는데 너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온달은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린다. 공주는 온달을 뒤따라 와서 이날 밤은 집 앞 나무 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움막집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나는 귀신이 아니고 나라 임금님의 공주’라는 신분을 밝히고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에게 온달의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한다. 온달은 아무 말이 없으나, 어머니는 "내 아들은 몹시 못생기고 비렁뱅이며 글도 배우지 못하여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놀리는 천치로 공주와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의 신분 차이인데 절대 공주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은 몹시 가난하여 귀한 분이 거처할 곳이 못 됩니다."라고 거절하자 공주는 "가난한 것은 내가 가져온 얼마 되지 않은 금붙이를 밑천으로 온달이 열심히 일하면 가정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고 배우지 못한 것은 지금 부터라도 열심히 무엇이던지 배워서 머리를 깨우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면 신분의 차이는 금세 없어질 것이고 부부 간의 정이 있으면 얼마든지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 부터 임금께서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신다고 수 없이 말씀 하셨고 나도 온달에게 시집을 오기로 마음을 먹고 시집갈 나이가 되어 이렇게 찾아왔으니 저를 받아 주십시오.“ 라고 간곡히 말하며 온달 모자에게 애걸하니 온달 어머니와 온달은 평강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상 경례로 간단한 결혼 예를 올려 부부의 연을 맺는다. 온달의 아내가 된 평강공주는 금붙이를 팔아서 밭과 집을 사고 말, 소 그리고 옷가지, 이불 등을 사들이어 일상생활의 용구를 모두 갖추고 노비를 구하여 남부럽지 않은 평민 가정으로 꾸민다. 말을 사올 때 평강공주는 말 시장에서 비싸지 않은 임금이 타다 버린 허약한 말을 사오라고 하여 이 말을 잘 가꾸었더니 훌륭한 준마가 되었다. 공주는 말의 본질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 시킨 것이다. 한 가족이 된 평강공주는 온달에게 학문과 예절을 가르치고 지혜와 몸가짐을 갖도록 내조하고 무술도 가르치기 위하여 궁중의 막리지에 버금가는 벼슬아치에게 부탁하여 무술이 뛰어난 무사를 데리고 와서 말 타기, 활쏘기, 칼 쓰기, 창던지기 등 여러 가지 무술을 가르치니 온달은 열심히 배워 훌륭한 무사가 된다. <온달장군 동상 앞에서>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삼진 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에 전국 사냥 대회를 개최한다. 이 때 부터 본격적인 봄 농사준비에 들어가게 됨으로 농사를 시작하기 전 이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무명의 무사들이 이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여 출세하여 보려고 참가 하게 된다. 무과의 등용문 이라고 할 수 있는 대회이다. 이날은 낙랑의 언덕 산에 모여 사냥 대회를 하고, 그 날 잡은 멧돼지와 사슴, 꿩 등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 지낸다. 왕과 여러 신하,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참여하고 지방에 주둔해 있는 장군과 무사들도 모여 든다. 온달도 말을 타고 참가하여 사냥 대회가 시작하자 항상 다른 무사 보다 빨리 달리고 짐승도 제일 많이 잡아서 온달을 따를 자가 없어 우승을 한다. 평원왕이 우승한 무사에게 상을 주면서 이름을 물었더니 온달이라고 하므로 자기 딸 공주가 궁궐에서 쫓겨나서 시집간 바보 거지라던 온달이 훌륭하게 성장하여 무사가 된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란다. 이 사냥대회 후에 온달은 정식으로 무사의 명칭을 얻게 된다. 그 후 중국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땅인 요동으로 쳐들어오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무제 군사를 맞아 싸운다. 이 전투에 함께 참전한 온달이 선봉이 되어 용감하고 날쌔게 싸워 적군 백여 명을 베어 죽이니 고구려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총공격하여 크게 이긴다. 전쟁에서 온달이 제일 잘 싸웠고 온달 때문에 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기에 왕은 가상히 여겨 감탄하면서 "이 사람이 내 사위다."라고 크게 외치며 부마로 인정하니 모든 군사가 엎드려 경의를 표한다. 궁궐에 돌아와 왕은 예를 갖추어 정식으로 부마로 맞아드리고 대형(大兄)이란 벼슬을 내린다. 이후 온달은 왕의 총애가 더욱 깊어지고 위엄을 갖추어 품위 있는 어엿한 장군이 된다. 평원왕이 죽고 그 아들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이 새 임금께 아뢰기를, "신라가 한수(한강)지역 우리나라 땅에 침입하여 자기나라 영토로 만들고 백성들을 핍박하고 재물을 빼앗아 못살게 하여 백성들이 원통하게 여기며 늘 부모의 나라인 우리 고구려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군사를 내 주신다면, 나가 싸워서 신라에 빼앗긴 한수지역 우리 땅을 반드시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니, 영양왕이 흔쾌히 승낙한다. 전쟁터로 떠날 때 온달은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안 하겠습니다".라고 대왕께 맹세를 하고서 전쟁터에 출전하여 아단산성에서 신라의 진흥왕이 보낸 군대와 혈전을 벌이다가 신라군이 쏜 날라 가는 화살(流矢)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다. 영양왕과 장병들이 온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내려 하였으나 시신을 넣은 관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온달장군이 고구려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인 것이다. 할 수 없이 평강공주가 전쟁터 까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장군께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편안히 돌아갑시다." 라고 말하며 슬피 애도하자 그제야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내게 된다. 온달은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온달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영양왕 23년에 일어난 ‘수나라 양제’가 30만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친입하였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크게 패하여 겨우 2,700명의 군사만 데리고 도망가게 하여 크게 승리한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과 함께 큰 공을 세웠을 것이다.」
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온달전에 나오는 기록을 현대의 말로 풀이하고 살을 붙여서 이야기 한 것이지만 삼국사기에서도 명문으로 꼽히는 글이란 것이다. 이 설화에는 당시의 국민들에 대한 애국심, 충성심, 무용심 등이 잘 나타나 있고 요즘도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 시련을 겪은 후 숭고한 인물로 변한다는 입지전적 이야기는 흔히 들을 수 있는데 바보 온달의 이야기는 처의 힘을 빌렸지만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백제의 ‘무왕설화’도 같은 맥락의 설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 자주 우는 여자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낸다는 말과 남자 아이에게는 호랑이가 너를 잡으러 문 앞에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시집가는 딸에게 부모들이 ‘너는 평강공주 같이 남편을 잘 보필하여 훌륭한 남편이 되게 내조를 잘 하여야 한다.’ 라고 일러주기도 하였다. 평원왕의 하나 밖에 없는 귀엽고 부와 영화와 명예를 다 가지고 있는 일국의 공주가 엄청난신분 격차를 뛰어 넘어 자신을 내 던지고 굳은 의지로 시장 바닥에서 구걸하던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맹장으로 키우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들에게 사랑을 받는 주인공이며 요즘 세상의 젊은이들이 돈 많은 재벌가나 판검사, 의사, 권력 있는 상대를 찾아 결혼하려는 것과는 비교가 되는 일인 것이다. 이혼이 많은 지금의 현실에서는 아내의 말에 순종하는 바보 온달과 바보를 장군으로 만든 울보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온달산성을 둘러보고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동상과 영화 드라마 세트장인 궁궐 같은 건물, 온달동굴 안내시설이 있는 온달관광지로 내려왔다. 온달산성에서 온달관광지로 내려오는 길 약 1㎞ 되는 거리는 거의 목재 테크로 만든 가파른 계단길이다. 온달관광지에서는 매년 온달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온달관광지 외부 주차장 한쪽 편에서 해단식 겸 피로를 풀기 위한 막걸리 파티를 하고서는 오후 5시경에 춘천으로 향하였다. 춘천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온달과 평강공주가 아름답게 살아가는 꿈을 꾸면서 춘천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가니 집사람이 평강공주처럼 반갑게 맞아준다.☺
출발 일시, 장소 (경유지) 11. 14 (토) 08:00 동성 아울렛~08:20 시청 앞~08:30 한국통신~08:40 영통입구~08:50 신갈 2.산행경로(약11km, 3시간 소요) 보발재 → 방 터 → 온달산성 → 온달관광지 (7.9km) (2.3km) (0.9km) 3.준비물 우천시 대비 등산용 장비, 중식, 식수, 여벌 옷 4. 회 비 : 2만원(커플은 3만원) ※ 종료 후 약간의 주류 제공 ★ 소백산 자락길 6구간(온달 평강 로맨스 길) 소백산 자락길(6구간) 소백산 자락길 6구간은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오는 길이다. 산책로 아래 굽이치는 남한강의 아름다운 경치가 탐방객을 따라 다닌다.
산길을 걸으며 화전민의 삶을 엿볼 수 있고 강가에서 피어나는 물안개가 운치를 보태는 6구간은 임산물 채취체험을 겸할 수 있으며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하면서 붙여진 온달산성의 역사탐방과 온달관광지를 관람할 수 있다.
영남의 진산이라 불리는 소백산자락을 한 바퀴 감아 도는 소백산 자락길은 전체 길이가 143km(360리)에 이른다. 모두 열 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고,각 자락은 평균 거리가 12km(30리) 내외여서 약 3~4시간이 소요되므로 하루에 한 자락씩 쉬엄쉬엄 걸을 수 있어 리듬이 느껴진다. 더구나 열 두 자락 모두 미세한 문화적인 경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자세히 살펴보면 자락마다의 특징이 발견되어 색다른 느낌의 체험장이 될 수 있다. 소백산자락길은 경북 영주시, 봉화군, 충북 단양군, 강원도 영월군의 3도 4개시·군에 걸쳐져 있다. 올망졸망한 마을 앞을 지나기도 하고, 빨갛게 달린 과수원 안길로 안내되는 가하면, 잘 보존된 국립공원 구간을 통과하기도 하여 아기자기하므로 대부분 따가운 햇볕에 노출되는 다른 곳의 걷는 길과는 차별된다. 특히, 국립공원 구역이 많아 원시상태가 잘 보존되어 숲의 터널에서 삶의 허기를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돌돌 구르는 시냇물과 동행할 수 있어 신선하다.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의 봉우리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소백산자락은 명산에 걸맞게 대찰을 품고 있는 불교문화 유적의 대표적인 곳 중의 하나에 속해 있어 부석사를 위시한 성혈사, 초암사, 비로사, 희방사, 구인사 등등의 불교유적지 탐방의 재미도 쏠쏠하다. 3도 접경 행정구역을 달리한 생활문화의 특징까지 감상할 수 있음은 보너스이다.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때 사람이다.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맑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시장간을 왕래하여 사람들이 그를 바보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었으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울보여서 사대부의 아내가 되지 못하니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야 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자란 공주가 혼기가 되어 정말로 온달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남편을 당대 최고 장수로 만들었다. 장수가 된 온달은 군사를 이끌고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고 출정하였으나 아단성 아래서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 장군의 결의가 너무 굳어 장사를 지내려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며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라는 평강공주의 달램에 비로소 관이 움직였다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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