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사
중국과 차이나
중국(中國)이란 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 시각에서 나온 말이다. 즉, 천하의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지배자를 천자라고 칭하여 지배자는 나라의 가운데 있어야 하며, 그가 지배하는 지역을 중국이라고 부르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중국을 차이나(China), 또는 지나(支那)라고 부른다. 차이나나 지나는 일반적으로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진(秦, Chin)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알고 있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진이 바로 중국을 칭하게 되었고, 여기에 a, 또는 e를 붙여 영어의 China, 또는 불어의 Chine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로 표기할 때 支那(지나)라고 하여 일본은 중국을 지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즉, 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지나란 불경의 해석에서 '문물이 발달한 나라'를 가리키는 뜻으로 되어 있어 중국의 문물이 발달했기 때문에 중국을 가리킨다는 설과, 인도 산스크리트어〔梵語〕에 '지나란 변방 지방'이라는 의미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즉, 인도의 변방에 있었던 중국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이전에 이미 불경이나 인도의 고전에 '지나'란 말이 나와 있고, 그 '지나'란 단어가 중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China도 진(Chin)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인도의 고전이란 비록 기원 후에 편집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를 가리키지만 그 내용은 기원전 5세기에 이루어진 것인데, 여기에 지나란 말이 나온다. 또, 헤브라이 인의 『구약 성경』 「이사야의 서」에 따르면 '이들 멀리 시니(지나의 음역)에서 온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구약 성서의 경우 기원전 12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이루어졌으므로 당연히 진시황의 통일 이전이다.
그리고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에서 China란 말이 기원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고대 서방 사람들은 중국을 지칭해 Seres라고 불렀는데, 그 말은 그리스어로 비단이라는 ser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 a를 붙여 Sera가 되었고, 이 말이 중국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은 중국의 비단과 함께 주요 수출품이었던 도자기에서 연유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자연 지리 오늘날 중국 영토의 전체 면적은 약 960만㎢인데, 동쪽 헤이룽〔黑龍〕 강과 우쑤리〔烏蘇里〕 강의 합류점으로부터 서쪽으로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우차(烏恰, 오흡)현의 파미르 고원에 이르기까지 약 5200㎞, 남쪽 난사〔南沙〕 군도의 청무안사〔曾母暗沙〕부터 북쪽 모허〔漠河〕 이북의 헤이룽강에 이르기까지 약 5500㎞이다. 미국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하고, 일본의 약 30배,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쳐 48배에 이른다. 중국은 아시아의 동쪽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육지로는 우리 나라·러시아·몽골 인민 공화국·카자흐스탄·타지키스탄·아프카니스탄·파키스탄·인도·네팔·부탄·미얀마·라오스·베트남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그 길이는 약 2만 2천㎞이다. 해안선은 발해만으로부터 황해, 동중국해, 남중국해에 걸쳐 1만 8천㎞에 달하고 있으며, 일본·필리핀·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전국의 면적 가운데 산지가 33%, 고원이 26%, 구릉이 10%, 분지가 19%, 그리고 평야는 12%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지형은 서쪽의 해발 4000m 이상이 되는 칭하이성과 티베트의 칭짱〔靑藏〕 고원이 있다. 다음으로 해발 2000m에서 1000m에 이르는 운귀 고원, 내몽고 고원, 황토 고원, 타림 분지와 중가리아 분지, 쓰촨 분지가 있으며, 다음으로 해발 500m에서 1000m에 이르는 동북 평원, 화북 평원, 창장 중·하류의 평원이 있어,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낮아지고 있는 형태(西高東低)의 세 계단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지세 따라서, 하천은 대부분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데, 황해로 들어가거나 동중국해로 들어가는데, 황허〔黃河, 5464㎞〕와 창장〔長江, 양쯔(揚子)강, 6300㎞〕이 대표적이며, 화이〔淮〕수·첸탕〔錢塘〕강이 있고, 남중국해로 들어가는 주(珠)강 등이 있다. 그리고 동북쪽 태평양으로 들어가는 헤이룽강을 경계로 러시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또,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호수가 분포되어 있는데, 비교적 큰 것은 칭하이성의 칭하이〔靑海〕호가 4538㎢ 장시성의 포양〔鄱陽〕호가 3976㎢, 후난성의 둥팅〔洞庭〕호가 3915㎢이다.
중국의 주요 산맥과 하천 분포도 서쪽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컫는 히말리아 산맥에서 북동쪽으로 톈산〔天山〕 산맥, 알타이 산맥, 대싱안링〔興安嶺〕 산맥을 축으로 러시아·몽골 인민 공화국과 남동쪽은 톈산 고원을 경계로 동남 아시아의 라오스·미얀마와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내부는 다시 쿤룬 산맥, 탕구라 산맥, 바옌카리 산맥, 치렌 산맥이 있다. 그리고 그 안으로 다시 남북으로 타이항〔太行〕 산맥이 놓여 있고, 동서로 친링〔秦嶺〕 산맥, 난닝〔南嶺〕 산맥, 우이〔武夷〕 산맥이 놓여 있으며, 둥베이〔東北, 만주〕 평원, 화베이〔華北〕 평원, 창장 중·하류 평원이 있다. 이 밖에도 타클라마칸 사막과 고비 사막이 있으며, 타림 분지와 웨이수이〔渭水〕 분지가 있다. 대체로 허난〔河南〕성과 허베이〔河北〕성은 황하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고, 후난〔湖南〕성과 후베이〔湖北〕성은 둥팅호를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며, 산둥〔山東〕성과 산시〔山西〕성은 타이항〔太行〕 산맥을 기준으로 나뉘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밖에도 화둥〔華東〕·화시〔華西〕·화난〔華南〕·화중(華中) 지방으로도 나뉘고 있다.
화둥은 산둥·장쑤·안후이·저장·푸젠·장시성과 상하이 시를 가리키고, 화시는 창장 상류의 충칭시와 쓰촨성 일대를 가리킨다. 화난은 주강 유역으로 광둥과 광시좡족 자치구를 가리키고, 화베이는 허베이·산시·베이징시·톈진시 일대를 가리키며, 화중은 창장의 중류, 즉 후베이·후난성 일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가 만주라고 지칭하고 있는 랴오허 이동 지역을 둥베이 지방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의 행정 구획과 그 기원 오늘날 중국의 행정 구획은 4개 직할시, 5개의 자치구, 22개의 성(대만을 포함하면 23개 성), 두 개의 특별 행정구로 되어 있다. 직할시란 베이징〔北京〕,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충칭〔重慶〕을 가리키며, 인구가 1천만 명 이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큰 도시로 국무원(중앙 정부)의 직할을 의미한다. 자치구란 중국의 소수 민족 정책의 하나로 인구 2백만 명 이상이 집중되어 살고 있는 지역인데, 내몽고(內蒙古) 자치구, 닝샤후이족〔寧夏回族〕 자치구,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 광시좡족〔廣西壯族〕 자치구, 시짱〔西藏〕 자치구를 가리킨다. 성(省)은 명·청대 이래의 행정 구획을 답습한 것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허베이〔河北〕, 허난〔河南〕, 산둥〔山東〕, 산시〔山西〕, 산시〔陝西〕, 간쑤〔甘肅〕, 칭하이〔靑海〕,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쓰촨〔四川〕, 안후이〔安徽〕, 장쑤〔江蘇〕, 장시〔江西〕, 저장〔浙江〕, 푸젠〔福建〕, 광둥〔廣東〕, 구이저우〔貴州〕, 윈난〔雲南〕, 하이난〔海南〕성을 가리킨다. 이 밖에 타이완〔臺灣〕성이 있다. 특별 행정구란 중국의 통일 전선 정책의 하나인 '한 나라에 두 체제(一國兩制)' 아래 자본주의적 체제를 50년 동안 보장해 주기로 한 특별 행정구로, 영국의 식민지이었다가 1997년에 되돌려받은 홍콩과 구룡(九龍) 반도에 설치한 홍콩 특별 행정구, 1999년에 포르투갈로부터 되돌려받은 마카오 특별 행정구를 가리킨다.
중국의 행정구역 등급
행정구역
| 기본
| 인구 집중 지구
| 상위 자치제 직할
| 정주민족
| 비정주민족
| 성급
| 성
| 직할시
| 특별행정구
| 자치구
| 내몽골 자치구
| 지급
|
| 부성급시
|
|
|
| 지구
| 지급시
| 성도
| 자치주
| 멍
| 현급
| 현
| 현급시
| 시할구
| 자치현
| 기, 자치기
| 향급
| 향
| 진
| 현할구, 가도
| 민족향
| -
| 촌급
| 촌
| 행정촌
| -
| -
| -
|
예를 들면 지린성(1급)은 9개의 지급 행정구역(2급)으로 이루어진다. 8개는 시이고 1개는 자치주이다.
№
| 이름
| 한자
| 병음
| 면적(K㎡)
| 인구(2010)
| 시청소재지
| 부성급시
| 1
| (장춘시)
| 长春市
| Chángchūn Shì
| 20571.00
| 7,677,089
| 난관 구
| 지급시
| 2
| (백성시)
| 白城市
| Báichéng Shì
| 25692.29
| 2,033,058
| 타오베이 구
| 3
| (백산시)
| 白山市
| Báishān Shì
| 17473.73
| 1,295,750
| 훈장 구
| 4
| (길림시)
| 吉林市
| Jílín Shì
| 27659.79
| 4,414,681
| 촨잉 구
| 5
| (요원시)
| 辽源市
| Liáoyuán Shì
| 5140.45
| 1,176,645
| 룽산 구
| 6
| (사평시)
| 四平市
| Sìpíng Shì
| 14382.34
| 3,386,325
| 톄시 구
| 7
| (송원시)
| 松原市
| Sōngyuán Shì
| 21089.38
| 2,881,082
| 닝장 구
| 8
| (통화시)
| 通化市
| Tōnghuà Shì
| 15607.80
| 2,325,242
| 둥창 구
| 자치주
| 9
| (연변조선족자치주)
| 延边朝鲜族自治州
| Yánbiān Cháoxiǎnzú Zìzhìzhōu
| 43509.10
| 2,271,600
| 옌지 시
|
9개의 지급 행정구역은 다시 60개의 현급 행정구역(3급)으로 나뉜다.
창춘시는 부성급시로 6개의 시할구, 3개의 현급시, 1개의 현을 관할한다. -6개의 시할구는 창춘 도시 지역에 4개(난관 구 南關區, 콴청 구 寬城區, 차오양 구 朝陽區, 얼다오 구 二道區,루위안 구 綠園區) 창춘 근교 및 외곽 지역에 2개(솽양 구 雙陽區, 주타이 구)가 있으며, 3개의 현급시(九台區, 위수 시 榆樹市, 더후이 시 德惠市,) 와 1개의 현(눙안 현 農安縣)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4급인 향과 진으로 구성된다. 다민족 국가 중국은 여러 민족이 통합되어 형성된 다민족 국가이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한족과 55개 소수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일찍이 중국의 고대 사서에는 주변 민족에 관한 기술을 중국 역사서에 포함시켜 중국이 하나의 단일 민족이 될 수 없음을 예견하였다. 진·한대의 흉노나 위·진·남북조 시대의 오호나 수·당대의 돌궐, 오·송대의 거란족이나 여진족 등은 끊임없이 중국의 장성을 넘어 내지로 들어왔다. 그리고 중국을 지배하면서도 중국화 되어 '하나의 중국인'으로 통일되었다.
즉, 하나의 중국인이란 '한족(漢族)'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 중국인의 대부분을 지칭하고 있다. 중국 전체의 인구수로 보면 94%를 차지하여 압도적으로 많은데,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40~50%에 불과하다. 또, 중국은 인구가 많고 땅이 넓다지만, 여기서 인구가 많다는 것은 한족을 지칭하는 것이고, 땅이 넓다고 하는 것은 소수 민족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족 이외의 이른바 소수 민족은 중국 안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중국화 될 수밖에 없지만, 우선 이들에게 적당한 정책을 펼 수밖에 없는 실정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소수 민족에 대한 특별 정책을 표방할 수밖에 없다.
1953년에 각 지방 정부에 신고된 민족은 400여 개, 1964년에 조사된 민족의 수는 183개로 나타나 아직도 정확한 민족 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중국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56개의 다민족 국가라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한족 이외에 55개의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었다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1990년에 조사된 인구 조사를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그리고 1999년의 조사에 따르면 12억 5,909만 명이었고, 2005년의 인구수를 표시한 컴퓨터의 화면상에는 13억을 조금 넘었다고 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3억을 훨씬 넘는다고 한다(대만의 약 2000만 명은 포함되지 않음.).
조사를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인구조사(2010년)
民族
| 总人口
| 男性人口
| 男性比重(%)
| 女性人口
| 女性比重(%)
| 男女性别比(%)
| 合计
| 1,332,810,869
| 682,329,104
| 51.19
| 650,481,765
| 48.81
| 104.90
| 汉族
| 1,220,844,520
| 625,032,848
| 51.20
| 595,811,672
| 48.80
| 104.90
| 壮族
| 16,926,381
| 8,689,488
| 51.34
| 8,236,893
| 48.66
| 105.49
| 回族
| 10,586,087
| 5,373,741
| 50.76
| 5,212,346
| 49.24
| 103.10
| 满族
| 10,387,958
| 5,401,812
| 52.00
| 4,986,146
| 48.00
| 108.34
| 维吾尔族
| 10,069,346
| 5,097,594
| 50.62
| 4,971,752
| 49.38
| 102.53
| 苗族
| 9,426,007
| 4,870,328
| 51.67
| 4,555,679
| 48.33
| 106.91
| 彝族
| 8,714,393
| 4,456,382
| 51.14
| 4,258,011
| 48.86
| 104.66
| 土家族
| 8,353,912
| 4,307,260
| 51.56
| 4,046,652
| 48.44
| 106.44
| 藏族
| 6,282,187
| 3,155,625
| 50.23
| 3,126,562
| 49.77
| 100.93
| 蒙古族
| 5,981,840
| 2,999,520
| 50.14
| 2,982,320
| 49.86
| 100.58
| 侗族
| 2,879,974
| 1,511,959
| 52.50
| 1,368,015
| 47.50
| 110.52
| 布依族
| 2,870,034
| 1,455,720
| 50.72
| 1,414,314
| 49.28
| 102.93
| 瑶族
| 2,796,003
| 1,458,842
| 52.18
| 1,337,161
| 47.82
| 109.10
| 白族
| 1,933,510
| 978,998
| 50.63
| 954,512
| 49.37
| 102.57
| 朝鲜族
| 1,830,929
| 910,535
| 49.73
| 920,394
| 50.27
| 98.93
| 哈尼族
| 1,660,932
| 863,370
| 51.98
| 797,562
| 48.02
| 108.25
| 黎族
| 1,463,064
| 756,992
| 51.74
| 706,072
| 48.26
| 107.21
| 哈萨克族
| 1,462,588
| 747,368
| 51.10
| 715,220
| 48.90
| 104.49
| 傣族
| 1,261,311
| 625,176
| 49.57
| 636,135
| 50.43
| 98.28
| 畲族
| 708,651
| 383,213
| 54.08
| 325,438
| 45.92
| 117.75
| 傈僳族
| 702,839
| 355,374
| 50.56
| 347,465
| 49.44
| 102.28
| 东乡族
| 621,500
| 317,490
| 51.08
| 304,010
| 48.92
| 104.43
| 仡佬族
| 550,746
| 289,369
| 52.54
| 261,377
| 47.46
| 110.71
| 拉祜族
| 485,966
| 247,667
| 50.96
| 238,299
| 49.04
| 103.93
| 佤族
| 429,709
| 216,439
| 50.37
| 213,270
| 49.63
| 101.49
| 水族
| 411,847
| 213,644
| 51.87
| 198,203
| 48.13
| 107.79
| 纳西族
| 326,295
| 162,635
| 49.84
| 163,660
| 50.16
| 99.37
| 羌族
| 309,576
| 156,539
| 50.57
| 153,037
| 49.43
| 102.29
| 土族
| 289,565
| 148,055
| 51.13
| 141,510
| 48.87
| 104.63
| 仫佬族
| 216,257
| 110,516
| 51.10
| 105,741
| 48.90
| 104.52
| 锡伯族
| 190,481
| 99,571
| 52.27
| 90,910
| 47.73
| 109.53
| 柯尔克孜族
| 186,708
| 94,645
| 50.69
| 92,063
| 49.31
| 102.80
| 景颇族
| 147,828
| 71,318
| 48.24
| 76,510
| 51.76
| 93.21
| 达斡尔族
| 131,992
| 64,866
| 49.14
| 67,126
| 50.86
| 96.63
| 撒拉族
| 130,607
| 66,281
| 50.75
| 64,326
| 49.25
| 103.04
| 布朗族
| 119,639
| 61,230
| 51.18
| 58,409
| 48.82
| 104.83
| 毛南族
| 101,192
| 52,836
| 52.21
| 48,356
| 47.79
| 109.26
| 塔吉克族
| 51,069
| 26,112
| 51.13
| 24,957
| 48.87
| 104.63
| 普米族
| 42,861
| 21,433
| 50.01
| 21,428
| 49.99
| 100.02
| 阿昌族
| 39,555
| 19,751
| 49.93
| 19,804
| 50.07
| 99.73
| 怒族
| 37,523
| 18,907
| 50.39
| 18,616
| 49.61
| 101.56
| 鄂温克族
| 30,875
| 14,668
| 47.51
| 16,207
| 52.49
| 90.50
| 京族
| 28,199
| 14,416
| 51.12
| 13,783
| 48.88
| 104.59
| 基诺族
| 23,143
| 11,744
| 50.75
| 11,399
| 49.25
| 103.03
| 德昂族
| 20,556
| 10,039
| 48.84
| 10,517
| 51.16
| 95.45
| 保安族
| 20,074
| 10,016
| 49.90
| 10,058
| 50.10
| 99.58
| 俄罗斯族
| 15,393
| 7,284
| 47.32
| 8,109
| 52.68
| 89.83
| 裕固族
| 14,378
| 7,325
| 50.95
| 7,053
| 49.05
| 103.86
| 乌孜别克族
| 10,569
| 5,673
| 53.68
| 4,896
| 46.32
| 115.87
| 门巴族
| 10,561
| 5,261
| 49.82
| 5,300
| 50.18
| 99.26
| 鄂伦春族
| 8,659
| 4,033
| 46.58
| 4,626
| 53.42
| 87.18
| 独龙族
| 6,930
| 3,349
| 48.33
| 3,581
| 51.67
| 93.52
| 赫哲族
| 5,354
| 2,651
| 49.51
| 2,703
| 50.49
| 98.08
| 高山族
| 4,009
| 2,029
| 50.61
| 1,980
| 49.39
| 102.47
| 珞巴族
| 3,682
| 1,803
| 48.97
| 1,879
| 51.03
| 95.96
| 塔塔尔族
| 3,556
| 1,899
| 53.40
| 1,657
| 46.60
| 114.60
| 未识别民族
| 640,101
| 334,908
| 52.32
| 305,193
| 47.68
| 109.74
| 入籍外国人
| 1,448
| 557
| 38.47
| 891
| 61.53
| 62.51
|
참고로 2001년 3월에 소집된 제9기 전국 인민 대표 대회 제4차 회의에서 결정된 제10차 5개년 국민 경제 사회 발전 계획(2001~2005)에 따르면 인구를 13억 3천, 2010년까지 14억 이내로 제한하기로 하였다. 한편, 소수 민족 가운데 조선족의 증가율을 보면 1953년에 111만 명, 1964년에 133만 명, 1982년에 176만 5204명이었으므로, 2005년에는 20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 소수 민족의 분포 지역을 살펴보면, 북쪽에 21개 소수 민족으로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만족, 조선족, 회족, 위구르족 등 12개 민족이 있고, 그 밖의 민족은 목축을 주로 하고 있다. 남쪽에 있는 34개 민족은 좡족이 목축과 농업을 겸하고, 경족이 어업을 주로 하는 것 외에 32개 소수 민족은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언어 중국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기 때문에 언어도 여러 종류일 수밖에 없다. 이를 크게 분류해 보면, 차이나 티베트 어족(한어, 캄타이어, 티베트어, 먀오야오어파), 알타이 어족(터키어, 몽골어, 퉁구스어파), 오스트리아 아시아 어족(와파라웅어파), 소수의 인도·유럽 어족(러시아어 타시크어파)으로 나눌 수 있다.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의 사용은 헌법에 의하여 보장받기 때문에 보호, 육성되고 있다. 소수 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행정관서나 도로의 표지는 그들의 문자를 우선으로, 한자를 병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옌비엔은 공항에 '연변 延邊'이라고 한글과 한자로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대다수가 한족이기 때문에 한족이 사용하는 한어(漢語)는 전국을 대표하는 언어로 여러 민족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어는 크게 관화 방언(官話方言, 베이징어 서북 방언, 동북 방언, 후베이 방언 등), 오방언(吳方言, 쑤저우 상하이 저장방어), 민방언(閩方言, 민북 민남방어), 월방언(粤方言, 광저우·광둥어), 객가(客家) 방언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관화 방언이란 화북, 화중 지방을 중심으로 직업과 계층에 관계없이 폭넓게 사용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이를 중심으로 1930년대 중화민국에서 국어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55년부터 중국 정부는 '국어(國語)'라는 말 대신에 '보통말(普通話)'이라고 하여 전국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로 보급하고 있다. 특히, 방송과 텔레비전으로 인하여 이제는 어느 지방에 가더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인터뷰 등에서 사투리를 심하게 쓰거나 말을 잘 못하는 경우도 있어 자막(字幕)으로 처리하고 있다. 현재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세계적으로 화교를 포함하여 약 14억 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약 20억 인구가 사용하는 영어 다음의 파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무기로 한자와 함께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문자(한자) 문자란 언어와 같이 사람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끈을 묶는다든지 부호와 같이 표시에 불과하다. 단지 언어는 사람의 기억에 한계가 있고, 전할 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후대에 전해 줄 수 있는 문자보다는 믿음성이 훨씬 떨어진다. 물론 문자의 경우도 시대에 따라 쓰는 방법이 변하기 때문에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중국 문자는 한자이다. 그리고 한자의 기원은 은에서 사용된 갑골 문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문자로 기록된 은의 역사부터 우리는 역사 시대로 간주한다. 그러나 역사 시대 이전인 선사 시대의 신석기 시대 토기 가운데에서도 어떤 뜻을 의미하는 부호나 어떤 것을 상징하는 그림이 보이고 있어, 이를 도문자(陶文字)라고 하여 한자의 기원으로 보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한자의 기원은 대부분 갑골 문자라고 한다. 갑골은 이전부터 은허에서 출토되었으나 1899년에 국자감 제주 왕의영(王懿榮)이 처음으로 문자로 보았고, 해석은 1904년부터였다. 현재까지 파악된 글자는 대략 4500자 정도이며(현재 소장된 갑골의 수는 중국 97,611편, 대만과 홍콩 30,293편, 국외 12국가에 26,700편을 소장하고 있어 모두 154,604편), 해독이 되는 글자 수는 1700자 정도이다. 대체로 갑골 문자의 구성은 한자의 상형(象形), 지사(指事), 가차(假借),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등 육서(六書)의 규칙을 갖추고 있다. 상형은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문자 발명의 최초 단계이다. 예를 들면 일(日) - , 월(月) - , 목(木) - 과 같은 것이다. 지사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상(上)은 로, 하(下)는 와 같은 것이다. 가차는 상형과 지사로 불충분할 때 상형자의 소리를 빌려 같은 음의 다른 사실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갑골문의 來자는 로 처음에는 소맥(小麥)의 이름이었다. 형성은 가차에 하나 더하여, 같은 음의 글자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아 편방(偏旁)을 첨가한 것으로, 예를 들면 사(祀)의 경우 라 쓰는데, 왼쪽은 뜻이고 오른쪽은 음에서 취한 것이다. 회의는 두 글자의 뜻을 합성한 것이며, 전주는 한 글자를 다른 뜻으로 전용한 것으로 즐거울 락(樂)을 풍류 악(樂)으로 쓰고 있는 경우이다. 갑골 문자와 함께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銘文)도 있는데, 이는 갑골 문자와 같은 계열로 서주 시대의 청동기에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한자 발전의 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즉, 갑골 문자가 그림 그리듯이 그리는 것이라면, 금문은 그리기보다는 쓰는 글자이며 부호적인 성격이 점차 강하였다. 또, 시대가 뒤로 갈수록 간단해졌다. 전국 시대에 각국은 문자 쓰는 방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오히려 같은 글자라도 쓰는 방법이 서로 달랐다. 대체로 이를 대전(大篆)이라고 하며, 진시황이 전국을 통일한 다음 이사(李斯)에게 문자를 통일시켜 나온 것이 소전(小篆)이다. 이와 동시에 민간에서 예서(隸書)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고문자를 간단하게 하자는 운동의 결정체로서, 전한 중기 이후에 예서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므로 전국 시대부터 전한 중기까지 적어도 약 200년 동안 전서와 예서가 함께 쓰였다. 현재 발견된 예서는 간독(簡牘)이나 백서(帛書)와 석비(石碑)에서 보이고 있다. 그리고 예서를 홀로 사용하게 된 것을〔예변(隸變)이라고 함.〕 한자 발전에서 고금문(古今文)의 분수령으로 보고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행서(行書)와 초서(草書), 해서(楷書)가 나왔다. 각 서체의 비교갑골문 갑골문 금문 전서 예서 행서 초서 해서
한자는 획수가 많기 때문에 정자로 쓰려면 복잡하고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1923년에 음에 따라 로마자를 채택하자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30 년대에 중국 공산당 인사들이 라틴 자모로 하자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38년에 국민 정부가 금지시
그 후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다음, 중국 문자 개혁 연구 위원회를 성립시키고 번잡한 글자〔번체(繁體)〕를 간단한 글자〔간체(簡體)〕로 바꾸는 작업을 하였다. 그 결과, 1956년부터 간체자의 표준 격식을 공포하여 1988년에 상용자 2500자를 완성하였으며, 상용한자 6700자를 정하였다. 대체로 한자의 수는 한대에 나온 『설문(說文)』에 9000여 자, 위·진·남북조 시대의 『옥편(玉篇)』에 2만 자, 송대의 『자전(字典)』에 3만 자, 청대에 나온 『강희자전 (康熙字典)』에 4만 5천 자가 수록되었다. 그런데 한자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쓰여 한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쓰는 한자 이외에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쓰는 한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글자의 수는 더 많다. 또, 붓으로 쓰는 한자쓰기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는데, 중국은 서법(書法), 우리나라는 서예 (書藝),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부른다. 문자는 문화의 인프라 여서 세계적으로 한자를 표준화하기 위하여 2001년 1월 말에 중국 최대의 정보 기술(IT) 기업 북대방정 집단(北大方正集團)에서 우리 나라와 일본, 베트남에서만 사용되는 한자를 포함하여 65,000자의 한자를 수록한 데이터 베이스를 내놓았다. 중국정부도 그 해 9월에 국가 표준의 한자를 21년 만에 개정하여 약 4배 증가된 27,500자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소프트를 탑재하지 않은 프린터의 출하를 금지시켰다.
상하이 와이탄의 야경
중국사의 시대 구분 역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시대 구분이다. 왜냐 하면 오랜 역사를 무 자르듯 자를 수 없지만, 몇 가지 특성을 가지고 나누어 보면 전체를 이해하는 데 훨씬 쉽기 때문이다.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주장도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에 의하여 왕조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기 때문에 일찍이 왕조에 의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중국의 정사(正史)인 24사이다. 사마천(司馬遷)에 의하여 쓰인 『사기(史記)』의 경우는 고대부터 사마천의 생존 시기인 한 무제(武帝) 때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통사적인 서술이 되었으나, 이후 『한서(漢書)』나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처럼 어느 특정 왕조 또는 시대만을 기술한 단대사적인 서술을 하였다. 따라서, 중국사의 경우 제일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왕조에 의한 시대 구분이다. 그러나 역대 중국의 많은 왕조를 그대로 모두 나열할 수 없기 때문에 전후 특징적 관계를 기준으로 이를 몇 왕조씩 묶어 놓았다. 예를 들면 선진사(先秦史), 진한사 (秦漢史),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 수·당 오대사(隋唐五代史), 송사(宋史), 요·금·원사(遼金元史), 명·청사(明淸史), 중국 근·현대사(中國近現代史) 등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분류를 '왕조사에 의한 시대 구분'이라고 한다.
중국사의 시기구분과 역대 왕조의 변천
3분법
| 4분법
| 왕조사
| 단대사
| 멸망 연대
| 중국 고대사
| 중국 고대사
| 선진사
| 삼황 오제
|
|
| 하(夏)
|
|
| 상(商)- 은(殷)
|
| B.C. 1046
| 주(周)
| 서주(西周)
| B.C. 771
| 동주(東周)
| 춘추(春秋)
|
| 전국(戰國)
| B.C. 221
| 진한
| 진(秦)
| B.C. 206
| 한(漢)
| 서한(西漢)
| 8
| 동한(東漢)
| 220
| 중국 중세사
| 위·진·남북조사
| 삼국(三國)
| 위(魏)
| 촉한(蜀漢)
| 오(吳)
| 265/263/280
| 진(晉)
| 서진(西晉)
| 316
| 동진(東晉)
| 420
| 남북조
| 북조
| 북위(北魏)
|
| 535
| 동위(東魏)
| 서위(西魏)
| 550/557
| 북제(北齊)
| 북주(北周)
| 577/581
| 남조
| 송(宋)
|
| 479
| 제(齊)
|
| 502
| 양(梁)
|
| 557
| 진(陣)
|
| 589
| 수·당 오대사
| 수(隋)
| 618
| 중국 중세사
| 당(唐)
| 907
| 오대 (五代)
| 후양(後梁)
|
| 923
| 후당(後唐)
|
| 936
| 후진(後晋)
|
| 946
| 후한(後漢)
|
| 951
| 후주(後周)
|
| 960
| 중국 근세사
| 송·요·금·원사
| 송 (宋)
| 요(遼)
| 북송(北宋)
|
| 1125/1127
|
| 금(金)
| 남송(南宋)
|
| 1233/1279
| 원(元)
| 1369
| 명·청사
| 명(明)
| 1644
| 청(淸)
| 1840
| 근대사
| 최근세
| 근
| 1912
| 중화민국(中華民國)
| 1949
| 현대
| 중화 인민 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
| 대만
| 중국사의 시대 구분 (중국사, 2008.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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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의 시대 구분 (중국사, 2008. 6. 20) 그런데 서양에서는 분기법, 즉 고대, 중세, 근대와 같이 시대를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일본 학자들이 중국사를 시대 구분한 것이 이른바 '3분기법'과 '4분기법'이다. 3분기법의 경우 세 가지 주장이 있는데, 하나는 고대(전국 말까지)· 중세(진한~명 말)·근대(청대 이후)로, 그 기준은 중국 황제 제도의 성립과 그 발전을 중심으로 보아 그 준비기를 고대, 발전 유지된 중세, 청대 이후는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근대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법은 1950년대 동경의 신진 젊은 학자들의 의견을 대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의 문제점은 중세가 지나치게 길게 잡혀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한 때까지를 고대, 오대 시대까지를 중세(또는 중고 시대), 송대 이후를 근세로 보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서양의 고대가 로마 제국의 멸망까지 본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사에 있어서 진한 시대가 바로 중국의 고대 통일 제국이기 때문 이었으며, 삼국 시대부터 오대까지의 특징을 귀족 사회로 보고, 송대 이후는 귀족 문화의 몰락과 서민 사회를 배경으로 황제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에 특징을 두고 있다. 또다른 하나는 당 말까지의 고대, 명 말까지의 중세, 그 이후를 근대로 보고 있다. 이 의견은 역사학 연구회가 채택하고 있는 구분법으로, 사회·경제사를 바탕으로 보는 유물사관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 의견에 따르면 당 말까지 노예 제도가 행해지고, 송대부터 대토지 소유제가 행해졌다고 보고 있다. 특히, 유물사관에 의한 시기 구분은 1949년에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일본의 젊은 연구자들을 고무시켜 유행된 방법이며, 동경 대학을 중심으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가리켜 '동대파(東大派)'라고 부른다. 4분법의 경우는 처음 3분법이 제기되었을 때 전국 시대까지를 상고, 당 말까지를 중고, 명대까지를 근고, 청대 이후를 근세로 보았다. 그러나 3분법의 두 번째 시기 구분을 정리하여 고대 제국의 성립인 한대까지를 고대, 당 말까지를 귀족 사회로 보고 중세, 오대·송대 이후 청대의 아편 전쟁 이전을 독재 군주 체제로 보아 근세로 보았으며, 여기에 아편 전쟁 이후 서양의 침략과 중국의 근대화 과정을 최근세사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구분 방법은 주로 경도 대학을 중심으로 채택되어 4분법을 '경대파(京大派)'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도 분기법에 의한 시대 구분이 도입되었는데, 제일 처음 제기한 사람은 1901년의 양계초(梁啓超)였다. 그는 원고(전국 시대까지), 근고세(건륭 말년), 근대세(건륭 말년 이후)의 3분법으로 설명하였다. 이후 고대(전국 말), 중세(당대까지), 근대 초기(명대까지), 근대(청대)로 하거나 상세, 중세, 근세, 현세로 구분하는 학자도 있다.
1910년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전파되고, 1920년대부터 공산주의 운동이 전개되면서 1930년대에 유물사관에 의한 시대 구분 논쟁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유물사관에 의한 시대 구분은 노예 사회, 봉건 사회, 자본주의 사회, 공산주의 사회로 나누는데, 중국에서 어느 시대까지가 노예 사회이고, 언제부터 봉건 사회이며, 자본주의 사회가 언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가 쟁점이었다. 특히, 중화 인민 공화국이 수립된 다음에도 시대 구분 문제는 역사 연구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다. 참고로, 중국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채택하고 있는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의 경계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로 되어 있으며, 아편 전쟁 이후, 즉 근대는 반봉건·반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봉건 사회의 시기가 너무 길기 때문에 이를 네시기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는 진한 시기로, 그 특징을 중원 지역에서 봉건 사회의 성장 시기로 보고 있다. 두 번째는 삼국 양진 남북조와 수·당 시기로, 그 특징을 봉건 사회의 발전 시기로 보고 있다. 즉, 오랜 기간 민족 간의 투쟁과 대규모 민족의 유동과 이주로 원래의 봉건화를 더욱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오대 이후 원 말까지로, 특징을 중국 봉건 사회의 진일보한 발전 시기라고 한다. 즉, 5대 10국에 이어 요·서하·금과 송의 북송·남송 그리고 원의 중국 통일로 동북에서 서북, 다시 서남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이 기본적으로 중국 봉건 사회에 편입되었으며, 한족과 각 민족 사이에 또 한 차례 새로운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남 경제가 북방 경제를 능가하게 되었으며, 장강 중·하류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네 번째는 명대에서 아편 전쟁 전까지이다. 이는 중국 봉건 사회가 쇠퇴하는 시기로 지주와 소작인의 의부 관계가 전 시대보다 비교적 약했기 때문이다. 즉, 전호도 지주를 선택할 수 있었고 지주의 불법적인 사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특히, 인구세가 토지세에 편입되어 토지가 없으면 인구세를 부담하지 않아도 되었다.
1950년대에 중국은 사회주의로 사상을 개조한 다음, 마르크스와 모택동의 사상을 근간으로 역사를 연구하도록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시대 구분에 관한 문제였다. 따라서, 중국 고대사의 시기 구분과 중국 근대사의 시기 구분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중세'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고대사의 경우 아편 전쟁 이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노예 사회와 봉건 사회를 고대로 보고 있다. 한편, 1840년 아편 전쟁 이후를 근대사로 보고 있으며, 이 시기의 특징은 서양 세력의 진출과 그 세력의 확장으로 인하여 중국 사회가 서양 세력에 의하여 반 식민지화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물론 중국에서는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른바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큰 성과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구중국의 몰락 과정으로 보고 있다. 그 때문에 반봉건·반식민지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아편 전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 역사는 여러 차례 큰 변화가 나타났다. 크게는 청조의 멸망을 초래한 신해혁명과 오늘날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가져온 중국 공산당의 공산주의 운동이 있다. 때문에 어느 시기까지가 근대사이고 현대사인지의 문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의견이 있게 되었다. 하나는 청조가 타도되는 1911년의 신해혁명을 중심으로 중화민국 수립 이전까지를, 다른 하나는 1919년의 5·4운동을 계기로 나타난 정치·사회 운동을 배경으로 성립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혁명을 중시하여 5·4운동 이전까지를 근대로 보고 있다. 특히, 후자의 입장에서는 신해혁명을 자산 계급 혁명 또는 구 민주주의 혁명이라 부르고, 자신들의 것을 프롤레타리아 혁명 또는 신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하여 구분하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의견에 따르면 중화민국사가 현대사의 시작이고, 후자의 의견에 따르면 5·4운동 이후가 현대사의 시작이다.
이처럼 현대사의 시작에 두 가지 의견이 있는 반면에, 끝나는 시기에 대하여도 의견이 분분하다. 광범위하게 오늘날까지 포함시켜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의 수립 이전까지를 현대사로 하고, 이후는 당대사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후자의 것을 택한다면 이를 각각 나누어 중화민국사와 중화 인민 공화국사로 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중화민국사의 시작이 1912년이기 때문에 1919년부터 보려는 견해와 상충되기도 한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에 중화 인민 공화국사라는 용어가 많이 등장하면서 근대사의 범위가 밑으로 내려와 중화 인민 공화국 수립 이전까지로 하고, 그 이후를 중화 인민 공화국사로 하자는 의견이 보편화되고 있다. 출처 중국사, 2008. 6. 20. 표제어 전체보기 <세계 각국사 시리즈> 중국사 상권. 이 책은 중국 문명의 발생에서부터 북방민족이 중국화 되어 오늘날 중국 역사를 형성하게 되기까지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살펴보는 개설서이다.
출처 : 저자 신승하 고려대학교 사학과 졸업. 대만대학 역사연구소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고려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근대 중국의 서양인식> <중국근대사> <중국사학사> 등
Written by Francisco Sun/선 봉 주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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