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8월 12일(방중모임 첫 번째)
참여: 정은선, 한문순, 홍혜경, 김윤정, 김지은
본문: 눅5: 12~32
1. 병과 죄
당시 유대사회는 병 걸리는 원인을 죄라고 보았다. 그들은 부모의 죄가 3대는 자녀들에게로 넘어간다고 여기기도 했고, 또 생활에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빼곡하게 지켜야 할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얼마나 죄짓지 않기 위해 애쓰는지 혀를 내두르게 되는데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를 보면 병의 원인을 죄라는 입장만은 아닌거 같다. 실제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에 대해 그 사람과 부모의 죄가 아닌 그 맹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나타나기 위해서라 했다. 장애나 질병, 자신의 어려움, 부족함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 책도 그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 씌여졌다. 분만실에서 아이의 장애를 확인해도 부모가 아이를 기쁨으로 받을 수 있다는 걸 처음들을 땐 놀라웠지만 요즘엔 받아들여진다.
2. 예수는 누구인가
죄를 용서한다는 말이 더 어려울까? 들고 일어나 걸으라는 말이 더 어려울까? 눈에 보이는게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지라 들고 일어나라는 말이 더 어렵게 생각된다. 그러나 치유보다 죄용서가 어렵고, 죄 용서는 하나님만(구약성경상)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구원하고 심판하시는 분이다. 관련하여 적절하게 기후변화 언급도 있었다(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나타나고 예수가 바로 그 분, 하나님이라고 하면 놀랍고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획기적이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거였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현대에서 시간을 거슬러 성경속 당시의 사람들의 입장을 살피며 예수를 보니, ‘광부가 캐내듯’ 알아내려는 적극으로 읽으니 유익하다. 그 시대에 예수를 하나님이 보내신 자, 메시야로 믿기 어려워하는 바리새인들과 대화해나가며 등장하는 한센병자와 중풍병자 레위와 세리를 통해 예수가 무엇을 했으며, 예수가 누구인지를 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을 밟았다. 과정에서 메시야로 믿기 어려워하는 바리새인들과의 장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성경을 이해한 큰 즐거움을 공유했다. 오늘 성서공부방에서 나눈대로 바리새인처럼 자신이 알던 바로 판단하느랴 구약성경에서 말하던 메시야가 예수라고 믿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구체적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그 사람과의 경험을 통해서는 믿기 쉽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건 개인적인 경험인데, 이를테면 내가 생각하는 어른의 정형을 완전히 깨부순 사람이 있었는데 가정을 깰지, 돌아와야할지 묻자 그 분이 내가 생각하는 어른처럼 힘을 쓰지도 않고, 신묘한 말로 나를 홀리지도 않고, 이제까지의 신뢰와 권위로 나를 누르면서 내 말 따르라고 하지 않았다. 힘이 빠진 목소리로 어떻게 행해야 할지 일러주었는데 나는 귓등으로 들었다. 이 말 듣고 알트루사 나가서 다른 생각할거고, 다른 행동할 수도 있다고 말하자 그거도 이해한다고 하셨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그 힘 빠진 목소리가 간절한 목소리였다는 걸 듣게 되었다. 이 사람을 만나고나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있고나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사랑이 뭔지 살아내지 못하다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기가 쉬웠다. 이 발언이 있고나서 제자가 되는 삶도 얘기되었다.
3. 예수가 지금 우리가 사는 곳에 나타났다면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예수가 누구인지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는 본문을 읽으니 당연히 우리가 예수를 지금 이 세상 내가 사는 한 곳에서 마주쳤다면 어떨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만나면 나의 한계를 맞닥뜨리는 지점에서 놀라기도 하고 두려워할 것이다. 신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순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가 촤악 펼쳐지고 죄가 드러날 것이다. 이런 양심적인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가 일반 사람들과 다른 내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고 따라다니면서 살피고 물어보고 했을 것이다. 예수를 주목할 만한 힘이 없어서 예수를 잘 알지 못하면서 예수로 인해 생기는 변화의 흐름에 의심하고 불편해했을 것이다 등 자신의 삶의 자세가 드러나는 답변이었다.
4.예수는 왜 배제된 자들을 택하시고 가까이 하려 하셨을까?
예수는 병자나 세리나 당시 사람들의 기준에서 인간취급받지 않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일깨우고 친구처럼 대하셨다. 왜 그들을 가까이하고 우리를 가까이했는지 입으로는 말하지 않은 단어 ‘예수의 사랑’을 서로 느꼈다.
정리소감
8월 둘째주 수요일이 오늘인지 까맣게 잊었다. 시댁어른과 공항에서 만나는 약속과 주인집 할머니와의 열무김치 협동작전으로 분주했다. 늦은 시간에 들어가기 뻘줌했지만 그래도 모임에 들어가니 주고받는 얘기들이 진지했다. 내가 분주했다는걸 알아주는 친구와 그래도 모임을 까먹은건 잘못했다며 말하는 친구들이 고맙다. 그 분주하고 뻘줌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고요하게 서로 말하고 들을 수 알찼다.
여러 사람이 같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하니, 혼자 읽고 혼자만 알고 있는 성경말씀인줄 알았던 때와 전혀 맛이 달랐다.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성경 여러인물들과의 관계에 질문을 던져 알아가는 맛이 대단했다. 질문을 던질 줄 아는 학생으로 만나니 새롭게 모람들 얼굴 한명 한명을 보게 되었다.
예수가 한센병자를 고치니 사람들이 줄줄 따르는 인기인이 되기도하고, 중풍병자를 고치고 레위를 부르고 세리와 식사를 하기도 하신다. 이 기적과 사람들이 가까이하려하지 않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남다른 행보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바리새인들은 비방과 정죄를 한다. 왜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길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데 바리새인들과 같이 사회지도층으로 일반대중의 신앙을 이끌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눈앞의 기적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비방하는가? 나 자신도 그런경우가 될 때가 많다. 특히 내가 뭘 한다고 할 때 만남의 현실을 놓칠 때가 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반응하는가 자주 되새겨봐야겠다.
[이번 정리는 제가 들어간 중간부터 제가 개인으로 정리한 기록에 의지하여 했어요. 저 같은 경우 카페기록을 남길 때는 ‘줌기록파일’을 듣고 정리하는데 이번엔 그마저도 없어서 순전히 저의 기억입니다. 제가 성경모임에서 참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로 얘기하며 피드백하는 것이에요. 예로 위의 예수를 만나면 나자신이 죄인이라고 두려워할것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양심적이다 이런 피드백이에요. 저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순수하고 꼬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감탄했거든요. 요런 상호작용을 남기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다보니 쫌 저의 기록들이 있는 그대로의 나눔과 또 질서정연한 정리와는 거리가 있을 수 있어요.
이번정리는 특히 저의 기록만으로 풀어쓴거라 더 저의 느낌과 나눠지지 않을 수 있어요. 모임 참여했던 분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덧붙여주시고, 또 읽으시는 분들이 이건 누구의 느낌이냐 물어주시면 답할게요. 그렇다면 ‘공유하기 위한 기록정리’에 더 가깝게 되지 않을까요?]
첫댓글 정리를 읽으니 모임에서 한 얘기인지, 지은씨가 느낀 느낌인지 구분하기 좀 어려웠어요.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그 사람과의 경험을 통해서는 믿기 쉽다.>로 시작하는 문장과 이하의 내용이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한 얘기일까? 지은씨 경험일까? 생각했습니다. 교회 나가는 시작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믿음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을것 같아서요. 내 생각에 모임에서 얘기를 옮기고 지은씨의 느낌부분은 따로 구분하는 부연설명이 필요할 거라 생각합니다. 오간 이야기들이 궁금해집니다. 글 감사해요.
제선샘
꼼꼼하게 읽어줘서 고마워요. 문장이 여러 문체로 끝나는게 제가 이 글쓰면서 어려웠던거에요. 사람들이 말하는 각자의 문체도 정리못하겠어요. 글을 올려 놓은 상태에서 고민해보게요. <...> 얘기 제가 모임내에서 한 얘기인데요, 제선샘이 생각하시는 믿음의 시작은 무엇일지 얘기해주시는건 어떻습니까?
부연설명이 들어가는건 좋은 생각이네요.
제선샘
믿음의 관계를 맛보지 않은 상태보다, 믿음의 관계가 있을 때 믿기쉬웠다라는 제 경험에서 얘기한거에요. 개인경험인데 마치 일반다른 사람들도 그럴것이다 라고 쓴 부분은 수정합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믿음의 시작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제 얘기와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지은 김 분명치않아 물어본것에 대한 대답 고마와요. 지은씨 질문댓글을 여러번 읽어보며 나도 댓글로 대답하기 보다는 성경모임에서 얘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