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次
삼가 남명, 아계의 시에 차운한다
甁窩 李衡祥
병와 이형상
杜宇聲乾月上遲 소쩍새 울음 하늘의 달을 머물게 하니
玉壺氷澈淡相宜 옥항아리 얼음같이 맑은 달과 서로 어울리네.
鸎梭亂擲方陰際 꾀꼬리 나무 그늘 사이를 어지러이 오갈 즈음
蝶夢偏驚未雨時 호접몽(胡蝶夢)을 중도에 깨니 비 내리기 전이네.
山似觧冠頭愈眞 산은 갓을 벗은 것 같아서 머리가 더욱 참되고
水疑投紱路常馳 물은 인끈을 벗어 던졌는가 의심되니 물길은 늘 치달린다.
愁來更凭危欄矚 근심이 생겨 다시 위태로운 난간에 기대어서 보니
晩節孤松遠益奇 만년의 외로운 솔은 멀수록 더욱 기이하네.
*호접몽: 장자 제물론
詞臣逸士短長吟 글하는 신하(이산해)와 은둔하는 선비(조식)의 짧고 긴 읆조림,
閙熱何人更碎金 시끄러이 누가 다시 좋은 시를 짓는가.
龜縮平生相玩意 평생 움츠리는 거북과 서로 사랑하기를 뜻하였는데
至今山色滿溪深 지금 산빛은 깊은 시내에 가득하네.
甁窩先生文集卷之十五 / 祭文
祭安學諭 后靜 文
성균관 학유 안후정 제문
嗚呼。始吾之赴于慶也。午憩于永境之淸潭下。縹緲新進。風致雅淡。揖讓而前。卽吾君敬也。班荊一餉語。固已多之。及到官次。兄以事來訪於公堂。簿牒堆頭。雖不能討盡肝肺。其所怡悅之忱。非若傾蓋之但愛其貌而未究其心也。
아! 처음 내가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는 길이었습니다. 점심 때 영천 땅인 청담(淸潭)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멀리서 오는 신진 관리의 모습이 우아하고 맑았는데 읍을 하며 인사하고 내 앞에 왔는데 바로 나의 벗인 군경(君敬, 성재 안후정의 자)이었습니다. 반형(班荊, 옛 친구)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경주 관아에 도착한 뒤에 형은 일로 관아에 찾아왔을 때 공무가 쌓여 있어서 비록 깊이 토론을 다할 수가 없었지만 기쁨에 젖었습니다. 만약 서로 뜻이 맞는 사이가 아니고 그 겉모습만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다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청담(淸潭): <영천군전도>(1872)에 고을 서쪽 3리에 있던 청통역(淸通驛)이 나온다. 청담은 청통역 부근의 서천을 말하는 것 같다. 서천과 남천이 합수한 아래쪽에 동경도(東京渡)가 있었다. 경주의 별칭이 동경이므로 동경도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병와는 청담에서 점심을 먹고 쉬다가 동경도를 건너서 경주로 갔을 것이다.
*반형(班荊) : 옛 친구를 만난 기쁨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오거(伍擧)가 채(蔡)나라 성자(聲子)와 세교(世交)를 맺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우연히 정(鄭)나라 교외에서 만나 형초(荊草)를 자리에 깔고 앉아서[班荊] 옛날이야기를 주고받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傳 襄公26年》.
旣以罷官寓永。來往之頻。款洽之私。幾乎再閱歲矣。或山而遊。或川而釣。我出兄隨。兄居我訪。未曾一旬而不面也。于斯際也。年事累歉。我尤窮矣。桂而兄薪之。玉而兄炊之。使我百口得免於傷廉害義者。雖不足以槩兄之義。若其渾室之感。不敢以朋友之饋而少其謝也。
경주 부윤 관직에서 파직되고 영천에 살면서 빈번하게 내왕하며 두터운 정의로 거의 두 해를 보냈습니다. 혹은 산을 유람하고 혹은 강에서 낚시를 하며, 나의 나들이에 형이 따르고 형의 거처에 내가 찾아갔으니 일찍이 얼굴을 보지 않고 열흘을 넘긴 적이 없었습니다.
농사가 흉년들어서 나는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계수나무로 땔감을 해야 하고, 옥으로 밥을 지어야 하였습니다. 나로 하여금 백 명이 염치를 상하고 의리를 해치게 하는 것을 면하게 한 것은 비록 형의 의리로는 부족하여도 그 온 집안의 감사함으로는 감히 붕우가 먹여 살리는 것에 사례를 적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수나무로 땔감: 땔감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소진(蘇秦)이 초(楚)나라에서 유세할 때 초왕(楚王)에게 “초나라는 양식이 옥보다 귀하고 땔감이 계수나무보다 귀하다.” 한 데서 유래하였다. 《戰國策 楚策3》.
逮吾之奉檄入海也。兄以十數壺榼。餞別於浩然亭。愍我之行。頗邑邑有可憐色。其後覆書中。亦多致脉脉意思。余又怪兄之心弱。雖於儕流間。憂兄之氣而慮兄之壽。實未覺其至此之促而反爲永訣之語也。近觀諸友書。有若致疑乎天命之未究者。而吾意則有所不然。
내가 제주 목사 임명장을 받들고 제주도로 가게 되었을 때 형은 열 몇 동이의 술을 들고 와서 호연정(浩然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준 것은 나의 제주행을 연민하며 답답하고 가련히 여겼는데 그 뒤에 답장 편지 가운데에 또한 말 없는 의사가 많았습니다.
나는 또한 형의 마음이 나약함을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비록 같은 또래이지만 형의 기운을 걱정하고 형의 목숨을 우려했습니다. 실로 이렇게 촉급하게 긴 이별의 말을 하게 될 줄을 몰랐습니다. 근래 여러 벗들의 편지를 살펴보니 천명을 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 있는 같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凡人脩短。已定於墮地之初。況兄虛脆。本非壽骨。彭殤菌鶴。都付造物者處分。而一槩繩之曰自我戕生。兄或冤之耶。所不可知者。天之畀兄旣如是不濁。早年蜚英。似非窮苦薄命之相。而乃反厚其賦而嗇其報。旣折了四十四年之浮生。又至於一命而止。所謂天者誠難諶而理者誠難測也。
평범한 사람도 단명하게 되는 것은 추락하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인데 하물며 형이 헛되이 나약해졌겠습니까. 본래 장수할 몸이 아니었습니다. 800살을 산 팽조나 요절한 어린 아이, 하루살이나 학이 모두 조물주의 처분에 달린 것이지만 한 가지로 가늠해보면 스스로 생명을 해친 것이라 하면 형이 혹 억울하겠는지요? 알 수가 없는 것은 하늘이 형에게 준 것이 이와 같이 탁하지 않았습니다. 이른 나이에 재능을 떨쳐 궁핍하고 고생하며 명이 짧은 상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물주로부터 부여 받은 것은 두터웠으나 결과는 인색하여 44년의 뜬 인생이 좌절하여 한 생명이 그치게 되었으니 이른바 하늘이라는 것은 진실로 참뜻을 알기 어렵고 진실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비영(蜚英) : 비영등무(蜚英騰茂)의 준말로, 명성과 실제가 훌륭하게 서로 부합되는 것을 말한다. 《漢書 司馬相如傳下》.
最是立石之盃。蓼島之漁。不可得以復接。他日還鄕。誰與晤語。解榻而無所待也。出門而無所適也。則吾之中夜疚懷。時或流涕者。曷維其已。身縻絶海。奠酹不親。臨發包香。語不成緖。山陽客恨。只此一盃酒永訣。君敬其擧之。嗚呼哀哉。
입암(立巖)에서 술을 마셨고, 요도(蓼島)에서 물고기 잡이 했던 일은 다시 할 수가 없으니 뒷날 영천으로 돌아가면 누구와 더불어 마음 터놓고 대화하겠습니까? 걸상을 내려도 그대를 기다릴 바가 없게 되었고, 나들이를 가도 갈 데가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한밤중에 슬퍼하고 때때로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어찌 그칠 수가 있겠습니까? 몸은 바다 가운데 섬에 매여 있으니 임시로 향을 싸서 보내고 말은 두서가 없습니다. 산양(山陽)의 객이 된 것이 한스럽습니다. 단지 이 한 잔의 술로 길이 결별하니 군경은 드십시오. 아, 슬프도다.
*산양(山陽)의 객: 한유는 당(唐) 중기의 사람으로 감찰 어사(監察御史) 때에 궁 안에 저자를 두는 것을 상소하며 극론(極論)하여 산양령(山陽令)으로 좌천된 일이 있다. 이형상이 제주목사가 와 있음을 말한다.
*입석(立石): 1700년 4월 19-23일에 이형상, 안후정, 박성세 3인은 여헌 장현광이 머물며 명명한 28경이 있는 입암 여행을 하였다(<입암유산록>).
*요도(蓼島): 영천의 남천과 북천이 합수한 지점의 아래쪽에 호계천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금호강과 만나는 지점에 요도라는 하중도(河中島)가 있었다(<영천군전도(1872)>).
*해탑(解榻): 걸상을 내림. 환대. 후한 때 진번(陳蕃)이 예장 태수(豫章太守)로 있을 적에 특별히 걸상 하나를 마련해 놓고는, 서치(徐穉)가 찾아올 때에만 반갑게 맞으면서 내려놓았다가 그가 돌아가면 다시 올려놓고 아무에게도 내려 주지 않았던 고사를 인용한 구절이다. 《後漢書 卷53 徐穉列傳》.
甁窩先生文集卷之十六 / 墓碣
安佐郞令人崔氏墓碣銘
좌랑 안증의 부인 영인 최씨 묘갈명
廣州安嶒。字曰士謙。遠祖邦傑。始麗梅鹽。鎭國將軍。君號廣陵。世代綿遠。譜牒無徵。其後有綏。侍御之爵。九代曰祉。秩高光祿。軍器判事。上護軍銜。八代曰壽。亦臻廊巖。匡靖大夫。都評議使。七代曰海。綽紹芳趾。階至奉善。寢園署令。六代曰器。奉順嘉命。典農判事。奕世華胄。五代國柱。閤門祗候。神虎中郞。國亡名昭。高祖諱崗。始仕聖朝。召村察訪。獻陵異數。曾祖淑良。典獄主簿。祖諱普文。引儀而止。考諱曰覯。孝行純至。佔畢門徒。通谷幽蘭。官榮司諫。號稱苔巒。槩其蟬聯。而又揚藻。妣曰金氏。系出珍島。司正諱渚。是外王考。弘治甲寅。公始生世。庚子。司馬。戊申。登第。朝散華級。刑曹佐郞兼春秋館。大抵韜鋩。世與心違。卷懷還鄕。亭築玩龜。若將終老。南冥鵝溪。互詠其操。志槩平生。此足可述。俄除穀城。未赴旋歿。嘉靖癸丑三月之昔。配以崔氏。月城其籍。都事叔强。寔公妻父。乙丑子月六日淪婺。兄子宗慶。取以爲嗣。舊有樂石愼齋攸記。今皆剝落。殆不可讀。雲仍愴心。要余更錄。永川菁堤。厥有酉壙。勿毀勿傷。雙玉之藏
첫댓글 좋은 자료 잘 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