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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 方 廣 佛 華 嚴 經
第四會
修因契果生解分
差別因果周
夜摩天宮 如來放兩足趺光 功德林菩薩 入菩薩善思惟三昧 十行法門
二十一, 十行品
제21 十行品 39
1. 공덕림(功德林)보살이 삼매(三昧)에 들다 39
2. 부처님이 가피를 내리다 39
(1) 가피(加被)의 인연을 말하다 39
(2) 부처님의 가피(加被)가 하는 일을 말하다 40
(3) 가피의 상(相)을 보이다 41
① 말의 가피 41
② 뜻의 가피 41
③ 몸의 가피 41
3. 공덕림보살의 열 가지 보살행 42
(1) 보살행의 근본을 말하다 42
(2) 열 가지 행의 이름을 열거하다 42
(3) 제 1 환희행(歡喜行) 43
① 보살은 모든 것을 다 베푼다. 43
②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베푼다. 43
③ 보시의 행을 밝히다 44
④ 깨달음으로 회향(廻向)하는 보시(布施) 46
⑤ 보시의 인(人)과 법(法)이 다 공(空)함 46
⑥ 인(人)과 법(法)이 공(空)한 이익을 밝히다 47
⑦ 법의 보시를 행하기를 원하다 47 (4) 제 2 요익행(饒益行) 48
① 계(戒)를 가지는 행(行)을 밝히다 48
② 섭율의계(攝律儀戒) 49
③ 섭중생계(攝衆生戒) 50
④ 섭선법계(攝善法戒) 51
⑤ 더욱 수승한 행을 닦을 것을 생각하다 53
(5) 제 3 무위역행(無違逆行) 53
① 인욕행을 밝히다 53
② 원한과 침해를 참는 인욕 수행 54
③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인욕 수행 56
④ 법의 이치를 관찰하는 인욕 수행 56
⑤ 인욕을 수행하는 의미 57
(6) 제 4 무굴요행(無屈撓行) 57
① 정진행을 밝히다 57
㉮ 열 가지의 정진 58
㉯ 과오를 떠나다 58
② 정진을 수행하는 이유 58
㉮ 일체중생을 위한 정진 수행 58
㉯ 일제 불법을 알기 위한 정진 수행 59
③ 다시 문답으로 정진행을 밝히다 60
④ 정진행으로 일체중생에게 열반을 얻게 한다. 62
(7) 제 오 무치란행(無癡亂行) 62
①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 62
② 경계에 나아가도 어리석음과 산란함이 없다 62
③ 선정으로 바른 생각을 성취하고 온갖 법을 듣는다. 63
④ 선정 수행의 인과를 밝히다 64
⑤ 선정을 성취하면 온갖 음성도 산란케 하지 못한다. 65
⑥ 온갖 음성에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65
⑦ 모든 장애를 떠나다 66
⑧ 선정을 닦은 보살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66
⑨ 청정을 얻다 67
⑩ 선정(禪定)의 공덕 67
⑪ 중생들을 더욱 이익케 할 것을 생각하다 68
(8) 제6 선현행(善現行) 68
① 반야바라밀의 행 68
② 삼업(三業)을 보이다 69
③ 이치로써 사상(事相)을 알다 70
④ 이치와 사상이 걸림이 없다 70
⑤ 이치를 따라서 자비를 일으키다 71
⑥ 내가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면 누가 교화하겠는가. 71
⑦ 나만 이 법을 알면 다른 중생은 어찌 되겠는가 72
⑧ 중생들을 먼저 교화하라 72
⑨ 이와 같은 보살을 섬기면 깨달음을 이루리라 73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
二十一, 十行品 2
(9) 第七無着行
方便波羅密
① 世界에 對한 無執着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無着行고 佛子야 此菩薩이 以無着心으로 於念念中에 能入阿僧祗世界하야 嚴淨阿僧祗世界호대 於諸世界에 心無所着이니라
(9) 제7 무착행(無着行)
- 방편(方便)바라밀을 닦다 -
①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나 마음에 집착이 없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무착의 행인고, 불자야, 이 보살이 집착 없는 마음으로 생각생각 중에 능히 아승지세계에 들어가서 아승지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되 모든 세계에 마음에 집착하는바가 없느니라.
大方廣佛華嚴經
卷 第 二十
품수로는
二十一, 十行品 2
제 二十一번째 十行品 2번째 단락이죠.
(9) 第七無着行이라
無着行이라고 하는 거는
중생들하고 같이 살아가면서도 중생놀음 하면서도
생사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아교처럼 착 달라붙어가지고 점착돼가지고 있지 아니하고
같이 물에 빠졌는데 물에 빠져가지고 같이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듯이 그런 것이고
또 조금 전에 했다시피
아주 편안하고 참선하고 방석 위에 앉아 있고 대중 공양 잘 들어오고
달짝지근~하니 그래 앉아 있고 싶잖아요?
그래도 그런 열반에 주착하지 아니하고
잘 먹고 잘 살려고 우리가 중노릇 하는 건 아니니까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 행을 뭐라고 하겠습니까?
무착행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는 십지보살에 올라가면 무상방편지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 4단계를 이렇게 나누죠?
淨心地 具戒地 無上方便地 不動地 色自在地 心自在地
이렇게 나오잖아요?
여기는 무상방편지가 되겠습니다.
이 무착행이... 그러니까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고 어디요?
생사에도 머무르지 않기때문에 이것을 무착행이라 하는데
자기 거울 한 번 보십시오.
얼마나 밝고 환~합니까? 오늘도?
아니 우리 자기 거울
환~하니까 여기까지 찾아왔겠지. 보현사
안그렇겠습니까?
컴컴하면 이렇게 여기 못왔겠지.
택시도 타고 KTX도 타는 놈이 있어요.
환~한 놈이 한 놈이 있다니까
그놈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이 송장을
그놈 하고 잘 살면 재미 있는 거죠.
아주 그냥 명징한 거라.
깨끗해요. 환~해
그놈이 말도 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눈도 깜짝거리고 맛도 보고
별 희한한 짓을 다 하면서도
거기에 안이비설신의에 떨어져버리면 점착돼버리면 그놈이 안보이고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이면 바로 무착행이고 그렇습니다.
그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입니까?
앞에 선현행에서, 그죠?
선현행에서 반야바라밀이 충분히 지혜의 등불이 밝기 때문에
무착행을 할 수가 있는 것이요.
행이 점점 깊어지는 거죠.
어지럽지 않으니까 선현행이 되는 것이고 지혜가 나오는 것이고
지혜로우니까 집착하지 않는 것이고
집착하지 않으니까 존중 받을 행이 또 나타나고 진실되고
그렇게 쭉쭉 나오겠죠?
움직이지 않고
이익이라든지 손해 보는 데에 대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제 무착행이 완성된 거죠. 사실은
그런데 우리는 예민하잖아요? ㅎㅎ
사과 주는데 옆에 사람 줄 때
좀 잘 익은 것 이 사람 주고 못익은 것 이 사람 줘봐요.
"나는 그것 안주느냐?"
하고 입이 이만큼 튀어나오게 돼 있어요. ㅎㅎ
方便波羅密
① 世界에 對한 無執着이라
佛子야 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 無着行가 佛子야 此菩薩이 以無着心으로 於念念中에 能入阿僧祗世界하야 嚴淨阿僧祗世界호대 於諸世界에 心無所着이니라
(9) 제7 무착행(無着行)
- 방편(方便)바라밀을 닦다 -
①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나 마음에 집착이 없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무착행인가, 불자야, 이 보살이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생각생각 중에 능히 아승지세계에 들어가서 아승지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되 모든 세계에 마음에 집착하는바가 없느니라.
그러니까 항상 화엄경은
크게 시작해서 잘잘~하게 이렇게 끊어갑니다.
마치 한입 입에 넣어놓고
우적우적 씹어가지고 부서지면 잘잘~한 것처럼
중생심에 우리는 조금만 이렇게 어디
비싼 도자기 하나라도 남에게 선물했으면 평생토록
"내가 그것 그 사람 줬다 아니가? 니 알제?"
ㅎㅎㅎ
만나는 사람마다 그것 하나 줬다고 생색을 내는데
여기는 뭐라고 해놨습니까?
아승지세계~
뭐 어쩔 것이요? 그러면?
저는 맛있는 것 누가 이렇게 하든지 또 좋은 것 가지고 오면 이럽니다.
한 번 이렇게~ 받고 난 뒤에
"계속 이래 하시도록!~" ㅎㅎㅎ
화엄 사상에 입각해서 계~속 하시도록~!
한 번 받고
'아휴~! 감사합니다."
끝내야 될 줄 알고 딱 한 번 줄거라고 가져왔잖아요?
예를 들어서 봉투를 두툼~하게 가져왔잖아요?
그러면 딱 갔다놨는데
"계~속 하시도록!" ㅎㅎㅎ
기회를 만들어서... 참 난감하시겠죠?
그런데 화엄경을 읽어버리면
'아! 그게 그 뜻이구나'
아무리 유위법으로써는
그렇게 바치는 그 마음이 정말 무위법이라 그러면
그 마음을 향해서 하는 말을 제대로만 알아듣는다면
서로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맛있어도 맛있었다 말하지 마라 그러고
맛없어도 맛없다 말씀하지 마라 그랬죠.
그 다음에
아승지 세계를 청정하게 장엄하되 모든 세계에 마음에 집착하는바가 없느니라.
이런 정도니까 우리한테 중생의 그런 옹졸한 마음을 푹~ 잡아째버리는 거죠.
그냥 한방에 강제로 그냥
우리는 좁쌀같은 마음이 보대끼고 있다가 확! 잡아 찢어지는 거라.
화엄경 읽다가... ㅎㅎ
② 三寶供養에 對한 無執着
往詣阿僧祗諸如來所하야 恭敬禮拜하며 承事供養호대 以阿僧祗華와 阿僧祗香과 阿僧祗鬘과 阿僧祗塗香末香과 衣服珍寶와 幢幡妙蓋諸莊嚴具의 各阿僧祗로 以用供養하나니 如是供養은 爲究竟無作法故며 爲住不思議法故니라 於念念中에 見無數佛호대 於諸佛所에 心無所着하며 於諸佛刹에 亦無所着하며 於佛相好에 亦無所着하며 見佛光明하고 聽佛說法에 亦無所着하며 於十方世界와 及佛菩薩所有衆會에 亦無所着하며 聽佛法已하고 心生歡喜하야 志力廣大하야 能攝能行諸菩薩行호대 然於佛法에 亦無所着이니라
② 삼보를 공양하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다
아승지 여래가 계신 데 나아가 공경하고 예배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되, 아승지 꽃과 아승지향과 아승지 화만과 아승지 바르는 향과 가루향이며, 의복과 보배와 당기와 깃발과 일산과 모든 장엄거리를 각각 아승지로써 공양하나니, 이렇게 공양하는 것은 지음이 없는 법을 끝내기 위함이며, 부사의한 법에 머물기 위한 연고니라. 잠깐잠깐 동안에 수없는 부처님을 뵈옵되 부처님에게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 세계에도 집착이 없고, 부처님 잘생긴 몸매에도 집착이 없고,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데도 집착이 없으며, 시방의 세계와 부처님과 보살과 모인 대중에게도 집착이 없고, 불법을 듣고는 환희한 마음을 내고 뜻과 힘이 광대하여, 모든 보살의 행을 능히 가지고 능히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함이 없느니라.
② 三寶供養에 對한 無執着이라
② 삼보를 공양하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다
불전에 다기라도 하나 사올려놓으면
그것 평생~ 그냥 공덕비까지 새겨가면서 한다. ㅎㅎㅎ
어떨 때는 범어사 종이 있습니다.
범종 있지요?
종에다가 이름을 빽빽~ 하게 써놨어요.
칠 때마다 '아프겠다' 싶어요.
ㅎㅎㅎㅎㅎㅎㅎ
종에다가 뭐 하려고 이름을 새기노...
종에다가 비천상이나 새기고, 그죠?
부처님생이나 새기고...
그 뭐 심정은 알겠어요.
그러나 그게 전부 유위 집착심이라.
이 산하대지에 내 이름 조각 하나 남든지 안 남든지
내 머리카락 하나라도 안 남고 정말
廓落太虛空확락태허공에 鳥飛無影迹조비무영적이라.
저 허공에 나르는 새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나가듯이
그렇게 한 세상 내 끝났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해야지...
그 다음에
② 三寶供養에 對한 無執着이라
往詣阿僧祗諸如來所하야 恭敬禮拜하며 承事供養호대 以阿僧祗華와 阿僧祗香과 阿僧祗鬘과 阿僧祗塗香末香과 衣服珍寶와 幢幡妙蓋諸莊嚴具의 各阿僧祗로 以用供養하나니 如是供養은 爲究竟無作法故며 爲住不思議法故니라
② 삼보를 공양하지만 마음에 집착이 없다
아승지 여래께서 계신 데 나아가서
一佛二佛三四五佛 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
아승지 여래께 나아가서 공경하고 예배하고 받들어 섬기고 공양을 올리되, 아승지 꽃과 한량없는 향과 아승지 화만과 아승지 바르는 향과 가루향이며, 의복과 보배와 당기와 깃발과 일산과 모든 장엄거리를 각각 아승지로 공양하니, 이렇게 공양하는 것은 지음이 없는 법을 끝내기 위함이며, 부사의한 법에 머물기 위한 까닭이니라.
究竟無作
究竟은 완벽하다.
無作法, 지음이 없는 바
그러니까 究竟無作法이라, 그렇게 보는 게 안낫겠습니까?
究竟涅槃 하듯이 그죠?
無作이라는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무위입니다. 無爲
無作爲로 이랬고
랜덤 무작위라 이렇게 하잖아요? 그죠?
작위함이 없다 이거요.
조작함이 없는 퍼펙트하게 조작함이 없는
이 허공 같은 건 어떻게 만들 수도 없잖아요?
究竟無作이잖아요?
그런 뜻이고
如是供養은, 이와같은 공양은 究竟,
끝났다 이거죠.
완전히 끝나기는 끝난 것인데
완벽하게 그냥 아무 하자 없이 조작 없는 법이 위함이며
住不思議에, 부사의에 머물기 위한 법인 까닭이다.
이렇게 해야 그게 낫겠네요.
부사의한 법에 머물기 위한 연고이니라.
於念念中에 見無數佛호대 於諸佛所에 心無所着하며 於諸佛刹에 亦無所着하며 於佛相好에 亦無所着하며 見佛光明하고 聽佛說法에 亦無所着하며 於十方世界와 及佛菩薩所有衆會에 亦無所着하며 聽佛法已하고 心生歡喜하야 志力廣大하야 能攝能行諸菩薩行호대 然於佛法에 亦無所着이니라
잠깐잠깐 동안에 수없는 부처님을 뵈옵되 부처님께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무착이며, 모든 부처님 세계에도 집착이 없고, 부처님 잘 생긴 몸매에도 집착이 없고,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데도 집착이 없으며, 시방의 세계와 부처님과 보살과 모인 대중에게도 집착이 없고, 불법을 듣고는 환희한 마음을 내고 뜻과 힘이 광대하여, 모든 보살의 행을 능히 가지고 능히 행하면서도 부처님 법에 집착함이 없느니라.
우리 흔히 무착스님이 문수 친견하려고
동지날 팥죽 끓이다가 문수보살이 등장했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이름이 참 거기서 문수한테 집착해버리면
집착스님이지 무착스님이 못되잖아요? ㅎㅎ
아니면 죽 끓이다가 문수한테 붙어버리면
서장에 나오던 죽착스님이 되든지 竹着合着하든지
죽착스님이 되든지 그래 되는데...
이름 참 잘 지었죠?
그러니까 니가 문수든지 아니든지간에
문수 빰을 후려갈기면서도 집착하는 바가 없었다.
無所着이니라.
그게 다~ 화엄경 여기 나오는 소리구만...
이걸 그냥 얘기해놓으면 사람들이 재미 없으니까
없는 무착스님 등장시키고
없는 문수보살 등장시켜가지고
없는 가마솥에 동지 팥죽까지 끓여가면서 ㅎㅎ
그냥 이렇게 점심 잡숫고 나서 이빨 이래 쑤셔가면서
그러니까 아~주 우리같이 둔한 학인이 있으니까 그것 가르친다고
어떤 노스님이 그냥 얘기 하나 지어내신 것 같아요.
꼭 제가 심청이 얘기 지어내듯이... ㅎㅎ
남 가르치려면 하나씩 이렇게 지어내야지 어떻게 할거요.
그 다음에
③ 長劫修行에 對한 無執着
此菩薩이 於不可說劫에 見不可說佛이 出興於世하고 一一佛所에 承事供養을 皆悉盡於不可說劫호대 心無厭足하야 見佛聞法과 及見菩薩衆會莊嚴에 皆無所着하며 見不淨世界호대 亦無憎惡하나니 何以故오 此菩薩이 如諸佛法而觀察故니 諸佛法中에 無垢無淨하며 無闇無明하며 無異無一하며 無實無妄하며 無安隱無險難하며 無正道無邪道니라
③ 장구한 시간을 수행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이 보살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말할 수 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심을 보고, 낱낱 부처님 계신 데서 섬기고 공양하기를 말할 수 없는 겁이 다 하도록 마음에 만족함이 없으며,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듣고 보살과 모인 대중의 장엄을 보더라도 다 집착함이 없으며, 부정한 세계를 보고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나니, 무슨 까닭인가. 이 보살이 부처님 법과 같이 관찰하는 연고이니, 불법 가운데는 때 묻음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고 다름도 없고 하나도 없고 진실함도 없고 허망함도 없고 편안함도 없고 험난함도 없고 바른 길도 없고 삿된 길도 없느니라
③ 長劫修行에 對한 無執着이라
"내가 이래 봐도 長坐不臥 30년 했어요."
이런 사람들 있잖아요?
앉은뱅이 안된 게 다행이다 이거죠.ㅎㅎ
장좌불와 했든지 안했든지 자기 하고 싶으면 장좌불와도 하고, 그죠?
우리처럼 장와불좌도 하고...
누워가지고 일어나지도 안하고...ㅎㅎㅎ
그거는 각자 자기 하는 대로 하는 것이죠.
여기는 39년 이런 정도가 아니고
長劫이니까 어느 정도 세월이겠습니까?
세세생생에 장좌불와도 그냥 집착이 없는 것입니다.
此菩薩이 於不可說劫에 見不可說佛이 出興於世하고 一一佛所에 承事供養을 皆悉盡於不可說劫호대 心無厭足하야 見佛聞法과 及見菩薩衆會莊嚴에 皆無所着하며 見不淨世界호대 亦無憎惡하나니 何以故오 此菩薩이 如諸佛法而觀察故니 諸佛法中에 無垢無淨하며 無闇無明하며 無異無一하며 無實無妄하며 無安隱無險難하며 無正道無邪道니라
③ 장구한 시간을 수행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이 보살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말할 수 없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을 보고,
우리는 한두 스님 조금 큰스님 밑에만 좀 있었다 이러면
목에 힘이 뻣뻣~하게 들어가지고
신도님들도 그렇찮아요?
"나는 누구 스님 모십니다!"
이러면 자기가 그 스님처럼 돼버린다.
옛날에 큰절에 있으면 이제 조실 스님이 마음에 안들면
시자를 두드려 패잖아요?
그러면 조실스님께서 그러죠.
"시자를 패는 것은 조실을 때리는 것 하고 똑같다."고... ㅎㅎ
조실하고 시자 하고는 동급인가 봐요.
낱낱 부처님 계신 데서 섬기고 공양하기를 말할 수 없는 겁이 다 하도록 마음에 만족함이 없으며,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듣고 보살과 모인 대중의 장엄을 보더라도 다 집착함이 없으며, 부정한 세계를 보고도 미워하는 생각이 없나니,
그러니까 부정한 세계라고 하는 거는 쉽게 얘기하면
아까 생사의 세속적인 세계들 아니겠습니까? 그죠?
무슨 까닭인가. 이 보살이 부처님 법과 같이 관찰하는 연고이니, 불법 가운데는
불법 가운데는, 불법 중에는, 諸佛法中에는, 불법 가운데는,
왜 진도가 안 나가노 이게...
불법 가운데는 어떻습니까?
그렇죠. 정확하게 얘기해놨죠.
여러분들께서 大乘讚 어른스님 3대 선시 들어보셨죠?
거기 보면 14과송이 나옵니다. 그죠?
誌空和尙이 직지에 보면
여러분들 책에 보면 14과송이라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산란과 고요가 둘이 아니며
색과 공이 둘이 아니며
부처님과 중생이 둘 다 아니다.
옛말씀에 경허스님께서 그렇~게 만행무궁하시니까 옆에서
"스님~ 도를 깨치시면 삐딱하게 걷다가도 똑바로 걷는데
스님은 똑바로 걷다가 왜 삐딱하게 걷습니까?"
이렇게 경허스님께 물으니까
"바람은 멈추었는데 파도는 일렁인다."
이렇게 대답을 했죠.
그러면서 또 한 말씀 더 하십니다.
"邪道가 깊으면 正道가 깊다. 邪가 깊으면 正도 깊다. 사심이면 정심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거는 이제 邪와 正을 다 초월한 세계에서 말씀하신 것 같아요.
지금 이 구절에 해당하겠네요.
때 묻음도 없고 깨끗함도 없고
그러니까 不生不滅이요 不垢不淨이요 不增不感이요 以無所得故기 때문에
應無所住 而生其心이기 때문에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다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는 것을
원효스님께서는 부동을 그렇게 해석하죠.
빛도 빼버리고 그림자도 빼버리고
그런 것을 우리 다른 말로 화두라고 얘기하죠. 우리 흔히
그냥 밀고 당겨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게 무슨 뜻인가 저게 무슨 뜻인가 잔머리 굴려가면서
이렇게 의거나 思量卜度사량복탁 하지 말며
이런 얘기 나오잖아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어둠도 빼버리고 중생도 빼버리고
밝음 부처도 빼버리고 나서 중간에 남는 것이 뭐냐?
本來無一物이니라.
다름도 없고 여러가지도 없고 한 개도 없다.
一도 없고 多도 없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듯이
진실함도 없고 허망함도 없다
心本淨이요.
마음은 본심이라고 하는 본래부터 청정해서 없는 것이고
妄本空이라.
망심도 본래 텅 비어 있다. 허망함도 없고
편안함도 없고 험난함도 없다.
아까 처음에 시작할 때 무착행을 뭐라고 말씀드렸죠?
편안한 열반에 안주하지도 않고 험한 생사의 길에 물들지도 않는다.
이게 무착이라 했죠.
바른 길도 없고 삿된 길도 없느니라
제대로 된 무착행이 이제 잘 설명이 됐네요.
불법 중에는~ 이렇다 이러면서 설명이 된 것 같습니다.
④ 種種萬行에 對한 無執着
菩薩이 如是深入法界하야 敎化衆生호대 而於衆生에 不生執着하며 受持諸法호대 而於諸法에 不生執着하며 發菩提心하야 住於佛住호대 而於佛住에 不生執着하며 雖有言說이나 而於言說에 心無所着하며 入衆生趣호대 於衆生趣에 心無所着하며 了知三昧하야 能入能住호대 而於三昧에 心無所着하며 往詣無量諸佛國土하야 若入若見하고 若於中住호대 而於佛土에 心無所着하며 捨去之時에 亦無顧戀하나니라
④ 온갖 만행(萬行)을 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보살이 이렇게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되 중생에게 집착을 내지 않고, 모든 법을 받아 지니되 모든 법에 집착을 내지 않고, 보리심을 내어 부처님 머무시는 데 머물되 부처님 머무시는 데 집착을 내지 않고, 비록 말을 하나 말에도 집착함이 없고, 중생 갈래에 들어가되 중생 갈래에 집착함이 없고, 삼매를 알아서 들어가고 머무르되 삼매에 집착함이 없고,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나아가 들어가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 가운데 머물기도 하되 부처님 국토에 집착함이 없고, 버리고 갈 적에도 그리워하지 아니하느니라.
④ 種種萬行에 對한 無執着이라
菩薩이 如是深入法界하야 敎化衆生호대 而於衆生에 不生執着하며 受持諸法호대 而於諸法에 不生執着하며 發菩提心하야 住於佛住호대 而於佛住에 不生執着하며 雖有言說이나 而於言說에 心無所着하며 入衆生趣호대 於衆生趣에 心無所着하며 了知三昧하야 能入能住호대 而於三昧에 心無所着하며 往詣無量諸佛國土하야 若入若見하고 若於中住호대 而於佛土에 心無所着하며 捨去之時에 亦無顧戀하나니라
④ 온갖 만행(萬行)을 하더라도 마음에 집착이 없다
보살이 이렇게 법계에 깊이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되 중생에게 집착을 내지 아니하고, 모든 법을 받아 지니되 모든 법에 집착을 내지 않고, 보리심을 내어 부처님 머무시는 데 머물되 부처님 머무시는 데 집착을 내지 않고,
참 이 부처님 머무시는 佛所住라고 하는 거는
그냥 곱게 넘어가서는 되지 않을 말 같죠?
참 거룩하기도 하고 참 하늘 같기도 하고 깨끗하기도 하고
넉넉한 것이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그냥 글자로 그냥 佛所住, 부처님 머무는 바, 이렇게 하지마는
다른 문장들 하고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죠.
부처님이 住於佛住라, 부처님이 머무시는 데 머문다.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비록 말을 하나 말에도 집착함이 없고,
不住色布施요 不住聲香味觸法布施라.
중생 갈래에 들어가되 중생 갈래에 집착함이 없고, 삼매를 알아서 들어가고 머무르되
삼매에 들어가고 삼매에 머물고 삼매에 나오지만
그 삼매에 대해서 집착함이 없고,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나아가 들어가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 가운데 머물기도 하되 부처님 국토에 집착함이 없고,
욕심이 떨어진 사람들은
부처님 국토도 보고 부처님 법신도 보고, 그렇게 하죠.
중생 가운데서 보는 거죠. 사실은
그런데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부처님을 보고도 중생으로 봐버리고
아주 극락에 앉아가지고도
"아휴~ 힘들어죽겠다!"고 그냥 그렇게 하죠. ㅎㅎ
동화사 앉아가지고도 그냥 불평 불만이 많죠.
거기는 극락 국토잖아요. 극락 국토
범어사 앉아가지고도 불평 불만이 많고
좀 모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되는 거라. 사실은...
조금만 철 들고 영리한 사람 같으면
아침마다 산새가 울어주지~ 밤마다 별이 떠주지~
바람은 왜 그리 시원하고...
한량없는 부처님 국토에 나아가 들어가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그 가운데 머물기도 하지만 부처님 국토에 집착함이 없고, 버리고 갈 적에도 그리워하지 아니하느니라.
捨去之時에 亦無顧戀이라
뒤돌아보고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연모하고
철사줄에 꽁꽁 묶인 채로~ ㅎㅎ
그렇게 하더니만...
捨去之時에
그냥 한 번 가면
黃鶴一去에 不復返이라는 말씀 있잖아요?
黃鶴은 , 누른 학은
一去에, 한 번 떠나면
不復返이라,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
騰王閣에 올라서 黃鶴一去에 不復返이라 하는 얘기처럼
저는 이걸 의신골에 이래~ 앉아가지고 한 번 느껴봤습니다.
이런 얘기는 숱하게 많은데
자기가 이제 한 번 느꼈을때는 그 감정이 참 오래 가는가 봐요.
한 번 뒤돌아보면 그렇습니다.
지리산 의신골에 스님들 한 5~6명 이렇게 앉아가지고
자질구리~하게 교재 편찬인가 그것 한다고
2박 3일인가 얼마인가 해가지고
책 이게 맞나 틀렸나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런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심 공양하고
지리산 의신골 계곡이 얼마나 너릅니까? 그죠?
커~ 잖아요?
여름에 봇물이 돼서 내려가는데
양말을 벗고 다리를 좀 걷어올리고 물에다 발을 담그고
물은 저~~기 끝없이 흘러 내려가는데
문득 그 생각이 들어요.
한 번 내 발에 스쳤던 물은 이제 다시는 못 만나잖아요?
그리고 내 얼굴 스쳐가는 바람도 다시는 못 만나고...
그것만 그렇겠어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죠.
만나도 그 사람이 아니라.
매일 만나는 사람도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지만
집착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매~일 새로운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에 대한 집착이 엔간히 떨어졌다는 거죠.
일이든지 뭐든지 매일 새롭잖아요?
밥도 매일 똑같은 밥 한 번도 없고
반찬도 똑같은 반찬, 김치도 매~일 익어갑니다.
諸行은 無常하고 諸法은 無我라.
그러니까 그런 걸 대충만 알면
捨去之時에
아~! 지리산 그 물 잘 있는가...?
잘 있기는 뭘 잘 있어. ㅎㅎ
있기는 있겠지.
한상 변해가면서 있겠지.
변하는 데에 대해서 他化自在라.
남이 변하는 데 대해서 자유자재 할 수 있다면
십지 보살이 이제 돼가는 거죠.
見道라, 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이제 갖춰지는 거죠.
他化自在라.
자기 변화도 인정 못하는데 남의 변화를 어찌 인정하노... ㅎㅎ
아파야 되고 늙어야 되고
생로병사를 돌아야 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인정이 조금씩 돼 가죠.
지공화상(誌公和尙) 14과송(科頌)
- 일명: 불이송(不二頌) -
1. 菩提煩惱不二(보리번뇌불이) 보리와 번뇌가 둘이 아니다.
衆生不解修道(중생불해수도) 중생은 도를 닦을 줄 모르니,
便欲斷除煩惱(변욕단제번뇌) 곧장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
煩惱本來空寂(번뇌본래공적) 번뇌는 본래 텅 비고 고요한데,
將道更欲覓道(장도갱욕멱도) 도를 가지고 다시 도를 찾으려 하는구나.
一念之心卽是(일념지심즉시) 한 순간의 마음이 바로 이것인데,
何須別處尋討(하수별처심토) 무엇 때문에 딴 곳에서 찾아야 하는가?
大道曉在目前(대도효재목전) 큰 도는 눈 앞에 밝게 드러나 있지만,
迷倒愚人不了(미도우인불료) 뒤집혀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
佛性天眞自然(불성천진자연) 불성은 자연 그대로 꾸밈이 없으니,
亦無因緣修造(역무인연수조) 닦아서 만들 까닭이 없다.
不識三毒虛假(불식삼독허가) 탐진치 삼독이 헛된 가짜임을 알지 못하고,
妄執浮沈生老(망집부침생노) 망녕되이 집착하여 생노병사를 따라 흘러다니네.
昔時迷日未晩(석시미일미만) 옛날 어리석을 적에는 아직 늦지 않다고 여겼는데,
今日始覺非早(금일시각비조) 오늘 비로소 깨달으니 일찍지가 않구나.
2. 持犯不二(지범불이) 지키고 어김이 둘이 아니다
丈夫運用無礙(장부운용무애) 대장부는 움직이고 씀에 막힘이 없으니,
不爲戒律所制(불위계율소제) 계율에도 제약받지 않는다.
持犯本自無生(지범본자무생) 계율을 지키고 어기는 일이 본래 생기지 않는데,
愚人被他禁繫(우인피타금계) 어리석은 사람이 그 규칙에 묶이는구나.
智者造作皆空(지자조작개공) 지혜로운 자에게는 조작함이 모두 공(空)이지만,
聲聞觸途爲滯(성문촉도위체) 성문(聲聞)은 부딛히는 족족 막히는구나.
大士肉眼圓通(대사육안원통) 대승(大乘) 보살의 육안은 두루 통하지만,
二乘天眼有翳(이승천안유예) 소승(小乘)의 천안(天眼)은 막혀서 보지 못하네.
空中妄執有無(공중망집유무) 공(空) 속에서 망녕되이 ‘있음’과 ‘없음’에 집착하여,
不達色心無礙(부달색심무애) 색(色)과 심(心)이 서로 막히지 않음을 알지 못한다.
菩薩與俗同居(보살여속동거) 보살은 세속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니,
淸淨曾無染世(청정증무염세) 깨끗하기만 할 뿐 더러운 세속이란 없네.
愚人貪著涅槃(우인탐착열반) 어리석은 사람은 열반을 탐내고 열반에 집착하지만,
智者生死實際(지자생사실제)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생사(生死)가 곧 실상(實相)이다.
法性空無言說(법성공무언설) 법의 본성은 공(空)하여 말할 것이 없고,
緣起略無人子(연기약무인자) 인연(因緣)하여 일어나니 사람이라곤 전혀 없다.
百歲無智小兒(백세무지소아) 백살을 먹어도 지혜가 없으면 어린아이고,
小兒有智百歲(소아유지백세) 어린아이라도 지혜가 있으면 백세 노인과 다를 바 없다.
3. 佛與衆生不二(불여중생불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衆生與佛無殊(중생여불무수) 중생과 부처는 다름이 없으며,
大智不異於愚(대지불이어우) 큰 지혜는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네.
何須向外求寶(하수향외구보) 어찌하여 밖에서 보물을 찾는가?
身田自有明珠(신전자유명주) 자신 속에 본래 밝은 보배구슬 있는데.
正道邪道不二(정도사도불이) 바른 길과 삿된 길은 둘이 아니고,
了知凡聖同途(료지범성동도) 범부와 성인이 같은 길 위에 있음을 분명히 알아라.
迷悟本無差別(미오본무차별)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본래 차별 없고,
涅槃生死一如(열반생사일여) 열반과 생사(生死)가 하나로서 같다.
究竟攀緣空寂(구경반연공적) 인연으로 일어나니 마침내 텅 비고 고요한데도,
惟求意想淸虛(유구의상청허) 다만 의식으로 생각하여 깨끗하고 빈 것을 찾는구나.
無有一法可得(무유일법가득) 얻을 수 있는 법(法)은 하나도 없으니,
翛然自入無餘(소연자입무여) 막힘 없이 저절로 무여열반에 들어가네.
4. 事理不二(사리불이) 사실과 이치가 둘이 아니다
心王自在翛然(심왕자재소연) 마음은 자재하고 막힘 없으며,
法性本無十纏(법성본무십전) 법의 본성에도 본래 아무 번뇌가 없다.
一切無非佛事(일체무비불사) 모든 것이 부처의 일 아님이 없는데,
何須攝念坐禪(하수섭념좌선) 어찌하여 생각을 거두고 좌선해야 하는가?
妄想本來空寂(망상본래공적) 허망한 생각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니,
不用斷除攀緣(불용단제반연) 인연을 끊거나 물리칠 필요가 없다.
智者無心可得(지자무심가득) 지혜로운 자에게는 얻을 마음이 없으니,
自然無爭無喧(자연무재무훤) 저절로 싸우지도 않고 떠들지도 않는다.
不識無爲大道(불식무위대도) 할 일 없는 대도(大道)를 알지 못하면,
何時得證幽玄(하시득증유현) 어느 때에 그윽한 진리 깨달을 수 있을까?
佛與衆生一種(불여중생일종) 부처와 중생은 같은 씨앗이니,
衆生卽是世尊(중생즉시세존) 중생이 곧 세존(世尊)이다.
凡夫妄生分別(범부망생분별) 범부는 망녕되이 분별을 내어,
無中執有迷奔(무중집유미분) 없음 속에서 있음을 붙잡고 어지러이 헤매네.
了達貪瞋空寂(요달탐진공적) 탐진치 삼독이 텅 비고 고요함을 분명히 알면,
何處不是眞門(하처불시진문) 어느 곳인들 진리의 문 아니겠는가?
5. 靜亂不二(정란불이)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둘이 아니다
聲聞厭諠求靜(성문염훤구정) 성문은 시끄러움을 싫어하고 고요함을 찾으니,
猶如棄麪求餅(유여기맥구병) 마치 밀가루를 버리고 빵을 구하는 것과 같다.
餅卽從來是麪(병즉종래시맥) 빵은 본래 밀가루인데,
造作隨人百變(조작수인백변) 조작하면 사람에 따라 백 가지로 달라진다.
煩惱卽是菩提(번뇌즉시보리) 번뇌가 곧 보리이고,
無心卽是無境(무심즉시무경) 마음이 없으면 경계도 없다.
生死不異涅槃(생사불이열반) 생사는 열반과 다르지 않고,
貪瞋如焰如影(탐진여염여영) 탐냄과 성냄은 불꽃 같고 그림자 같구나.
智者無心求佛(지자무심구불) 지혜로운 사람은 부처를 찾는 마음이 없지만,
愚人執邪執正(우인집사집정) 어리석은 사람은 삿됨과 올바름에 집착한다.
徒勞空過一生(도로공과일생) 쓸데 없이 애써며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만,
不見如來妙頂(불견여래묘정) 여래의 묘한 정수리는 보지 못한다네.
了達婬慾性空(요달음욕성공) 음욕(淫欲)의 본성이 공임을 밝게 통달하면,
鑊湯鑪炭自冷(확탕로탄자냉) 가마솥의 끓는 물과 화로의 숯불이 저절로 식을 것이다.
6. 善惡不二(선악불이) 선과 악이 둘이 아니다
我自身心快樂(아자신심쾌락) 나의 몸과 마음은 상쾌하고 즐거워,
翛然無善無惡(소연무선무악) 자재하게 선도 없고 악도 없다.
法身自在無方(법신자재무방) 진리의 몸은 자재하여 정해진 곳이 없으니,
觸目無非正覺(촉목무비정각) 눈에 보이는 것마다 바른 깨달음 아닌 것이 없다.
六塵本來空寂(육진본래공적) 여섯 가지 대상이 본래 텅 비고 고요한데,
凡夫妄生執著(범부망생집착) 범부는 망녕되이 집착을 한다.
涅槃生死平等(열반생사평등) 열반과 생사는 평등하니,
四海阿誰厚薄(사해아수후박) 세상에서 누가 부처고 누가 중생이겠는가?
無爲大道自然(무위대도자연) 할 일 없는 대도(大道)는 스스로 그러하니,
不用將心畫度(불용장심화탁) 마음을 가지고 그려 보고 헤아려 볼 필요가 없다.
菩薩散誕靈通(보살산탄영통) 보살은 제멋대로 굴어도 신령스러이 통하니,
所作常含妙覺(소작상함묘각) 하는 짓이 늘 묘한 깨달음을 머금고 있네.
聲聞執法坐禪(성문집법좌선) 성문(聲聞)은 법(法)에 집착하여 좌선을 하니,
如蠶吐絲自縛(여잠토사자박)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해내어 스스로를 묶는 것과 같도다.
法性本來圓明(법성본래원명) 법의 본성은 본래 두루 밝으니,
病愈何須執藥(병유하수집약) 병이 나았는데 어찌하여 약에 집착하는가?
了知諸法平等(요지제법평등) 모든 것들이 평등함을 밝게 알면,
翛然淸虛快樂(소연청허쾌락) 자재하고 맑고 텅 비어서 유쾌하고 즐겁다.
7. 色空不二(색공불이) 색과 공이 둘이 아니다
法性本無靑黃(법성본무청황) 법의 본성은 본래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은데,
衆生謾造文章(중생만조문장) 중생이 거짓으로 무늬를 만드는구나.
吾我說他止觀(오아설타지관) 내로라 하며 남에게 지(止)와 관(觀)을 말하지만,
自意擾擾顚狂(자의요요전광) 자신의 의식은 어지럽게 미쳐 날뛴다.
不識圓通妙理(불식원통묘리) 두루 통하는 묘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何時得會眞常(하시득회진상) 어느 때에 참되고 영원한 것을 알 수 있으리오?
自疾不能治療(자질불능치료) 스스로의 병은 치료하지도 못하면서,
卻敎他人藥方(각교타인약방) 도리어 남의 병에 약을 처방하네.
外看將爲是善(외간장위시선) 겉을 보면 이 사람을 좋다고 오해하지만,
心內猶若豺狼(심내유약시랑) 마음 속은 오히려 승냥이나 이리와 같다.
愚人畏其地獄(우인외기지옥) 어리석은 사람은 지옥을 두려워 하지만,
智者不異天堂(지자불이천당) 지혜로운 사람은 천당과 다르다고 여기지 않네.
對境心常不起(대경심상불기) 경계를 대하여 마음이 한결같아 움직이지 않으면,
擧足皆是道場(거족개시도량) 걸음 걸음이 모두 도량(道場)이라네.
佛與衆生不二(불여중생불이)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닌데,
衆生自作分張(중생자작분장) 중생이 스스로 나눈다.
若欲除卻三毒(약욕제각삼독) 탐진치 삼독을 없애고자 한다면,
迢迢不離災殃(초초불리재앙) 재앙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
智者知心是佛(지자지심시불)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이 곧 부처임을 알지만,
愚人樂往西方(우인요왕서방) 어리석은 사람은 서방정토에 가기를 좋아한다.
8. 生死不二(생사불이)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다
世間諸法如幻(세간제법여환) 세간의 모든 것들은 환상과 같아,
生死猶若雷電(생사유약뢰전) 삶과 죽음도 천둥이나 번개와 같다.
法身自在圓通(법신자재원통) 진리의 몸은 자재하게 두루 통하여,
出入山河無間(출입산하무간) 온 세계에 끊임 없이 드나든다.
顚倒妄想本空(전도망상본공) 뒤집어진 허망한 생각은 본래 공(空)이고,
般若無迷無亂(반야무미무란) 반야의 지혜에는 헤맴도 시끄러움도 없다.
三毒本自解脫(삼독본자해탈) 탐진치 삼독이 본래 스스로 해탈이니,
何須攝念禪觀(하수섭념선관) 무엇 때문에 생각을 거두어 선관(禪觀)을 행할 필요가 있겠는가?
只爲愚人不了(지위우인불료) 어리석은 사람이 밝지 못하기 때문에,
從他戒律決斷(종타계율결단) 저 계율(戒律)을 따라서 결단한다.
不識寂滅眞如(불식적멸진여) 적멸(寂滅)인 진여(眞如)를 알지 못한다면,
何時得登彼岸(하시득등피안) 어느 때에 피안(彼岸)에 오를 수 있을까?
智者無惡可斷(지자무악가단)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끊어야 할 악(惡)이 없고,
運用隨心合散(운용수심합산) 움직여 사용함에 마음을 따라 모이거나 흩어진다.
法性本來空寂(법성본래공적) 법의 본성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不爲生死所絆(불위생사소반) 삶과 죽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若欲斷除煩惱(약욕단제번뇌) 만약 번뇌를 끊어 없애고자 한다면,
此是無明癡漢(차시무명치한) 이 사람이 바로 밝음 없는 어리석은 자이다.
煩惱卽是菩提(번뇌즉시보리) 번뇌가 곧 보리(菩堤)이니,
何用別心禪觀(하용별심선관) 어찌하여 마음을 차별해 선관(禪觀)을 할 필요가 있으랴?
實際無佛無魔(실제무불무마) 실상(實相)에는 부처도 없고 마귀도 없으며,
心體無形無段(심체무형무단) 마음의 본바탕에는 모양도 구분도 없다.
9. 斷除不二(단제불이) 끊어 없앰이 둘이 아니다
丈夫運用堂堂(장부운용당당) 대장부의 움직여 씀은 당당하니,
逍遙自在無妨(소요자재무방) 오고 감에 자재하여 막힘이 없다.
一切不能爲害(일체불능위해) 어떤 것도 방해가 될 수 없으니,
堅固猶若金剛(견고유약금강) 굳기가 마치 다이아몬드와 같다.
不著二邊中道(불착이변중도) 이쪽 저쪽에 머물지 않고 중도(中道)를 가니,
翛然非斷非常(소연비단비상) 자재하여 끊어짐도 아니고 이어짐도 아니다.
五欲貪瞋是佛(오욕탐진시불) 다섯 가지 욕망과 탐내고 성냄이 곧 부처이며,
地獄不異天堂(지옥불이천당) 지옥과 천당이 서로 다르지 않다.
愚人妄生分別(우인망생분별) 어리석은 사람은 망녕되이 분별을 내어,
流浪生死猖狂(유랑생사창광) 삶과 죽음 속에서 흘러 다니며 어지럽게 미쳐 날뛴다.
智者達色無礙(지자달색무애) 지혜로운 자는 색(色)에 통달하여 장애가 없으나,
聲聞無不恛惶(성문무불회황) 성문(聲聞)은 혼란스럽게 헤매고 있다.
法性本無瑕翳(법성본무하예) 법(法)의 본성에는 본래 허물도 장애도 없는데,
衆生妄執靑黃(중생망집청황) 중생이 망녕되게 집착하여 푸르니 누르니 하네.
如來引接迷愚(여래인접미우) 여래는 어리석은 중생을 이끌기 위해,
或說地獄天堂(혹설지옥천당) 지옥이나 천당을 말하기도 하지만,
彌勒身中自有(미륵신중자유) 미륵불이 자신 속에 본래 있는데,
何須別處思量(하수별처사량) 어찌 딴 곳에서 헤아릴 필요가 있겠는가?
棄卻眞如佛像(기각진여불상) 참되고 변함 없는 부처의 모습을 버린다면,
此人卽是顚狂(차인즉시전광) 이런 사람이 바로 뒤집어져 미친 사람이다.
聲聞心中不了(성문심중불료) 성문(聲聞)은 마음 속에서 깨닫지 못했으므로,
唯只趁逐言章(유지진축언장) 오직 언어 문자를 뒤쫓을 뿐이다.
言章本非眞道(언장본비진도) 언어 문자는 본래 참 도가 아니니,
轉加鬪爭剛彊(전가투쟁강강) 싸움만 더욱 거세게 만든다.
心裏蚖蛇蝮蝎(심리원사복할) 마음 속에 살모사와 독사가 있으니,
螫著便卽遭傷(석착변즉조상) 쏘아 붙이면 바로 상처를 입는다.
不解文中取義(불해문중취의) 글자 속에 있는 뜻을 취할 줄 모르면,
何時得會眞常(하시득회진상) 어느 때에 참되고 영원한 진리를 알 수 있으리오?
死入無間地獄(사입무간지옥) 죽어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들어가,
神識枉受災殃(신식왕수재앙) 정신과 의식이 헛되이 재앙을 받는다.
10. 眞俗不二(진속불이) 진리와 세속이 둘이 아니다
法師說法極好(법사설법극호) 법사(法師)는 설법을 지극히 잘 하지만,
心中不離煩惱(심중불리번뇌) 마음 속에서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하고,
口談文字化他(구담문자화타) 입으로 문자(文字)를 말하여 남을 교화하지만,
轉更增他生老(전갱증타생노) 오히려 그들의 생로병사만 더욱 증가시킨다.
眞妄本來不二(진망본래불이) 참 마음과 허망한 생각은 본래 둘이 아닌데,
凡夫棄妄覓道(범부기망멱도) 범부는 허망한 생각을 내버리고 따로 도를 찾는다.
四衆雲集聽講(사중운집청강)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여 강설(講說)을 듣고,
高座論義浩浩(고좌논의호호) 법좌(法座)에 높이 앉아 뜻을 논하는 것이 거침없으며,
南座北座相爭(남좌북좌상쟁) 남쪽 강단과 북쪽 강단이 서로 싸우기도 하니,
四衆爲言爲好(사중위언위호) 사부대중은 말솜씨 때문에 좋아한다.
雖然口談甘露(수연구담감로) 비록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하지만,
心裏尋常枯燥(심리심상고조) 마음 속은 늘 매말라 있네.
自己元無一錢(자기원무일전) 자기에게는 원래 한 푼도 없으면서,
日夜數他珍寶(일야수타진보) 밤낮으로 남의 돈만 헤아리고 있구나.
恰似無智愚人(흡사무지우인) 마치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아서,
棄卻眞金擔草(기각진금담초) 진짜 금은 내버리고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다.
心中三毒不捨(심중삼독불사) 마음 속에서 탐진치를 버리지 못하면,
未審何時得道(미심하시득도) 어느 때에 도를 얻을지 알 수 없다.
11. 解縛不二(해박불이) 풀리고 묶임이 둘이 아니다
律師持律自縛(율사지율자박) 율사(律師)는 계율을 지켜 스스로를 묶는데,
自縛亦能縛他(자박역능박타) 스스로를 묶는 자는 또한 남도 잘 묶는다.
外作威儀恬靜(외작위의염정) 밖으로는 행동거지가 조용하고 고요하지만,
心內恰似洪波(심내흡사홍파) 마음 속은 마치 큰 파도가 치는 것 같다.
不駕生死船筏(불가생사선벌) 생로병사의 뗏목을 타지 않고,
如何度得愛河(여하도득애하) 어떻게 애욕의 강을 건널 수 있으랴?
不解眞宗正理(불해진종정리) 참된 근본의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면,
邪見言辭繁多(사견언사번다) 삿된 견해와 말만 어지럽게 많을 뿐이다.
有二比丘犯律(유이비구범율) 두 비구가 계율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便卻往問優波(변각왕문우파) 곧 우파리(優波離)에게 가서 묻는다.
優波依律說罪(우파의율설죄) 우파리는 계율에 따라 죄를 말하지만,
轉增比丘網羅(전증비구망라) 비구의 번뇌만 더욱 증가시킨다.
方丈室中居士(방장실중거사) 좁은 방 안에 살고 있는 거사(居士)인,
維摩便卽來訶(유마변즉래가) 유마(維摩)가 곧 와서 꾸짖으니,
優波黙然無對(우파묵연무대) 우파리는 입을 다물고 대답 못하고,
淨名說法無過(정명설법무과) 유마의 법을 말함에는 허물이 없다.
而彼戒性如空(이피계성여공) 저 계율의 자성(自性)은 허공 같아서,
不在內外娑婆(부재내와사바) 안팎의 사바세계 어디에도 있지 않다.
勸除生滅不肯(권제생멸불긍) 생멸을 제거함을 긍정하지 말 것을 권하노니,
忽悟還同釋迦(홀오환동석가) 문득 깨달으면 진실로 석가모니와 같을 것이다.
12. 境照不二(경조불이) 경계와 비춤이 둘이 아니다
禪師體離無明(선사체리무명) 선사(禪師)는 몸소 무명(無明)을 벗어났으니,
煩惱從何處生(번뇌종하처생) 번뇌가 어디에서 생길 것인가?
地獄天堂一相(지옥천당일상) 지옥과 천당이 하나의 모습이고,
涅槃生死空名(열반생사공명) 열반과 생사가 헛된 이름일 뿐이다.
亦無貪瞋可斷(역무탐진가단) 끊어야 할 탐진치도 없고,
亦無佛道可成(역무불도가성) 이루어야 할 불도(佛道)도 없다.
衆生與佛平等(중생여불평등) 중생과 부처가 평등하니,
自然聖智惺惺(자연성지성성) 저절로 성스런 지혜가 뚜렷하구나.
不爲六塵所梁(불위육진소염) 육진(六塵)에 오염되지 않으니,
句句獨契無生(구구독계무생) 말씀마다 오직 무생법(無生法)에 계합한다.
正覺一念玄解(정각일념현해) 바르게 깨달으면 한 순간 그윽하게 풀려나니,
三世坦然皆平(삼세탄연개평) 과거 현재 미래가 고르게 모두 평등하다.
非法非律自制(비법비율자제) 법에도 계율에도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주관하니,
翛然眞入圓成(소연진입원성) 자재하고 진실하게 원만한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絶此四句百非(절차사구백비) 사구(四句)와 백비(百非)를 끊어 버리면,
如空無作無依(여공무작무의) 허공과 같아 할 일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다.
13. 運用無礙(운용무애) 부리고 씀에 막힘이 없다
我今滔滔自在(아금도도자재) 나는 지금 두루 두루 자재하여,
不羡公王卿宰(불선공왕경재) 왕후(王侯)와 장상(將相)도 부러워 하지 않는다.
四時猶若金剛(사시유약금강) 사시사철 마치 금강석 같이,
苦樂心常不改(고락심상불개) 고통과 즐거움에도 마음은 한결같아 변함이 없다.
法寶喩於須彌(법보유어수미) 진리의 보물은 수미산 보다도 크고,
智慧廣於江海(지혜광어강해) 지혜는 강이나 바다 보다도 드넓다.
不爲八風所牽(불위팔풍소견) 어떤 장애에도 끄달리지 않으니,
亦無精進懈怠(역무정진해태) 정진(精進)도 게으름도 없다.
任性浮沈若顚(임성부침약전) 본성에 맡겨 떴다 가라앉았다 하니 마치 뒤집힌 것 같지만,
散誕縱橫自在(산탄종횡자재) 제멋대로 이리저리 막힘 없이 자재하다.
遮莫刀劍臨頭(차막도검임두) 설령 칼날을 목에 갖다 대어도,
我自安然不釆(아자안연불변) 나는 스스로 편안하고 분별하지 않는다.
14. 迷悟不二(미오불이) 헤맴과 깨달음이 둘이 아니다
迷時以空爲色(미시이공위색) 헤맬 때에는 공(空)을 색(色)이라 여기고,
悟卽以色爲空(오즉이색위공) 깨달은 때에는 색(色)을 공(空)이라 여긴다.
迷悟本無差別(미오본무차별) 헤맴과 깨달음이 본래 다르지 않고,
色空究竟還同(색공구경환동) 색과 공이 결국 같은 것이다.
愚人喚南作北(우인환남작북) 어리석은 사람은 남쪽을 말하고 북쪽을 말하지만,
智者達無西東(지자달무서동) 지혜로운 사람은 동쪽과 서쪽이 달리 없음을 잘 안다.
欲覓如來妙理(욕멱여래묘리) 여래(如來)의 묘한 도리(道理)를 찾고자 하는가?
常在一念之中(상재일념지중) 늘 한 순간 속에 있도다.
陽焰本非其水(양염본비기수) 아지랑이는 본래 물이 아닌데,
渴鹿狂趁怱怱(갈록광진총총) 목마른 사슴은 미친 듯이 쫓아가느라 바쁘다.
自身虛假不實(자신허가불실) 자신이 허망하여 진실되지 못하니,
將空更欲覓空(장공갱욕멱공) 공(空)을 가지고서 다시 공을 찾으려 한다.
世人迷倒至甚(세인미도지심) 세상 사람들은 헤매고 뒤집힘이 지극히 심하여,
如犬吠雷哄哄(여견폐뢰홍홍) 마치 개가 천둥 소리에 시끄럽게 짓는 것 같구나.
思量卜度사량복탁
선가귀감(禪家龜鑑)
有一物於此하니 從本以來로 昭昭靈靈하야 不曾生不曾滅이며 名不得狀不得이로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않았고 죽지도 않으며, 이름 지을 수도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
佛祖出世가 無風起浪이로다.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오심은 마치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然이나 法有多義하고 人有多機하니 不妨施設이로다.
그러나 법에도 여러 가지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틀이 있으므로 여러 가지 방편을 벌이지 않을 수 없다.
强立種種名字하야 惑心惑佛惑衆生이라 하니 不可守名而生解하고 當體便是니 動念卽乖니라.
굳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서 마음이다, 부처다, 중생이라 하였으나
이름에 얽매어 분별을 낼 것이 아니다. 다 그대로 옳다. 그러나 한 생각이라도 움직이면 곧 어그러진다.
世尊이 三處傳心者는 爲禪旨요 一代所說者는 爲敎門이라 故로 曰 禪是佛心이요 敎是佛語니라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가 되고, 한 평생 말씀하신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是故로 若人이 失之於口則拈花微笑가 皆是敎迹이요
得之於心則世間序言細語가 皆是敎外別傳禪旨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에서 잃어버리면 꽃을 드신 것이나 방긋 웃는 것이 모두 교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교 밖에 따로 전한 선지가 될 것이다.
吾有一言하니 絶慮忘緣하고 兀然無事坐하니 春來草自靑이로다.
내가 한 마디 말을 할까 한다.
생각 끊고 반연을 쉬고 일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니 봄이 오매 풀이 저절로 푸르구나.
敎門은 惟傳一心法하고 禪門은 惟傳見性法하니라.
교문에는 오직 한 마음 법만을 전하고 선문에는 오직 견성 하는 법만을 전하였다.
然이나 諸佛說經은 先分別諸法하고 後說畢竟空하되
祖師示句는 迹絶於意地하고 理顯於心源이니라.
그러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에는 먼저 모든 법을 가려 보이시고, 나중에 空한 이치를 말씀하셨다. 조사들의 가르침은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고 이치가 마음의 근원에 드러났다.
諸佛은 說弓하고 祖師는 說絃하시니 佛說無碍之法은 方歸一味라
拂此一味之迹하야사 方現祖師所示一心이니
故로 云庭前柏樹子話는 龍藏所未有底라 하니라.
부처님은 활같이 말씀하시고 조사들은 활줄같이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 걸림 없는 법을 설하신 것은 바로 한 맛에 들어감이다.
이 한 맛의 자취마저 떨쳐 버려야 바야흐로 조사가 보인 한 마음이 드러내게 된다.
그러므로 "뜰 앞에 잣나무이니라'고 한 화두는 용궁의 장경에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故로 學者는 先以如實言敎로 委辨不變隨緣二義가 是自心之性相이며
頓悟漸修兩門이 是自行之始終然後에 放下敎義하고 但將自心現前一念하야
參詳禪旨則必有所得하리니 所謂出身活路니라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써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 따르는 두 가지 뜻이 곧 마음의 본 바탕과 형상이고, 단박 깨치고 오래 닦는 두 가지 문이 공부의 시작과 끝임을 자세히 가려 알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교의 뜻을 내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이 뚜렷이 드러난 한 생각으로 써 참선한다면 반드시 얻은 바가 있을 것이다.
大抵學者는 須參活句요 莫參死句어다.
대저 배우는 이들은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사구를 참구하지 말아야 한다.
凡本參公案上에 切心做工夫하되 如鷄抱卵하며 如猫捕鼠하며
如飢思食하며 如渴思水하며 如兒憶母하면 必有透徹之期하라.
무릇 공안을 참구하되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기를 마치 암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이하며,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하고, 주린 사람이 밥 생각하듯 하며,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하며, 어린애가 엄마 생각하듯 하면 반드시 꿰뚫어 사무칠 때가 있을 것이다.
參禪엔 須具三要니 一은 有大信根이요 二는 有大憤志요
三은 有大疑情이라 苟闕其一하면 如折足之鼎하야 終成廢器하니라.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큰 신심이고, 둘째는 큰 분심이며, 셋째는 큰 의심이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이 소용없는 물 건이 되고 말 것이다.
日用應緣處에 只擧狗子無佛性話하되 擧來擧去하며 疑來疑去에
覺得沒理路 沒義路 沒滋味하야心頭熱悶時가 便是當人放身命處며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도 오직 "어찌하여 개한테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라고 한 화두를 끊임없이 들어,이 치의 길 끊어지고 뜻 길이 사라져 아무 맛도 없어지고 마음이 답답할 때가 바로 그 사람의 몸과 목숨을 내던질 곳이며, 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대목이다.
話頭를 不得擧起處에 承當하며 不得思量卜度하며 又不得將迷待悟하며 就不可思量處하야 思量하면
화두를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알아맞히려 하지도 말고, 생각으로 헤아리지도 말라.
또한 깨닫기를 기다리지도 말고 더 생각할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 생각하면
心無所之함이 如老鼠入牛角하야 便見倒斷也하리라 又尋常에 計較安排底도 是識情이며
마음이 더 갈 곳이 없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으로 들어가다가 잡히듯 할 것이다.
또 평소이런가 저런가 따지고 맞춰 보는 것이 식정이며
隨生死遷流底도 是識情이며 怖惶底도 是識情이어늘
今人이 不知是病하고 只管在裡許하야 頭出頭沒하나니라
생사를 따라 굴러다니는 것이 식정이며, 무서워 하고 갈팡 질팡하는 것도 또한 식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 병통을 알지 못하고, 다만 이 속에서 빠졌다 솟았다 할뿐이다.
此事는 如蚊子가 上鐵牛하야 更不問如何若何하고 下嘴不得處에 棄命一簒 하면 和身透入이니라.
이 일은 마치 모기가 무쇠로 된 소에게 덤벼드는 것과 같아서,
함부로 주둥이를 댈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떼어놓고 한 번 뚫어 보면 몸뚱이 째 들어갈 것이다.
工夫는 如調絃之法하야 緊緩에 得其中이니 勤則近執着하고 忘則落無明하리니 惺惺歷歷하고 密密綿綿이니라.
공부는 거문고 줄을 고르듯 팽팽하고 늦음이 알맞아야 한다.
너무 애쓰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無明에 떨어지게 된다.
성성하고 역력하게 하면서도 차근차근 끊임없이 해야 한다.
工夫가 到行不知行하며 坐不知坐하면 當此之時하야
八萬四千魔軍이 在六根門頭伺候라가 隨心生起하나니 心若不起하면 爭如之何리요.
공부가 걸어가면서도 걷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는 줄 모르게 되면,
이 때 팔만 사천의 마군이가 六根 문 앞에 지키고 있다가 마음을 따라 온갖 생각이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무슨 상관이 있으랴.
起心은 是天魔요 不起心은 是陰魔요 或起或不起는 時煩惱魔?
然이나 我正法中엔 本無如是事니라
일어나는 마음은 천마요 일어나지 않는 마음은 음마요,
혹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도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
그러나 우리 바른 법 가운데에는 본래 그런 일이 없다.
工夫가 若打成一片則縱今生에 透不得이라도 眼光落地之時에 不爲惡業所牽이니라.
공부가 한 고비를 넘긴다면 비록 금생에 깨치지 못하더라도
마지막 눈감을 때에 악업에 끌리지는 않을 것이다.
大抵參禪者는 還知四恩이 深厚摩아 還知四大醜身이 念念衰朽摩아 還知人命이 在呼吸摩아
대저 참선하는 이는 이렇게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것을 알고 있는가? 네 가지 요소로 구성 된 더러운 몸이 순간 순간 썩어 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의 목숨이 숨 한번에 달린 것을 알고 있는가?
生來値遇佛祖?아 及聞無上法하고 生希有心?아 不離僧堂하여 守節?아
不與隣單으로 雜話?아 切忌鼓扇是非?아
일찍이 부처님이나 조사 같은 이를 만나고서도 그대로 그대로 지나쳐 버리지 않았는가? 높고 거룩한 법을 듣고서도 기쁘고 다행한 생각을 잠시라도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공부하는 곳을 떠나지 않고 수도인다운 절개를 지키고 있는가? 곁에 있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잡담이나 하며 지내지 않는가? 분주하게 시비나 일삼고 있지 않는가?
話頭가 十二時中에 明明不昧?아 對人接話時에 無間斷?아
見聞覺知時에 打成一片?아 返觀自己하야 捉敗佛祖?아
화두가 어느 때나 또렷또렷 하게 매하지 않는가?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도 화두가 끊임없이 되는가?
보고 듣고 알아차릴 때에도 한결같은가?
제 공부를 돌아볼 때 부처와 조사를 붙잡을 만한가?
今生에 決定續佛慧命?아 起坐便宜時에 還思地獄苦?아
此一報身이 定脫輪廻?아 當八風境하야 心不動?아
금생에 꼭 부처님의 지혜를 이룰 수 있을까?
앉고 눕고 편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육신으로 윤회를 벗어날 수 있는가?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올 때에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此是參禪人의 日用中點檢底道理니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하면 更待何生度此身이리요 하니라.
이것이 참선하는 이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때때로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 어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내 몸을 이생에 못 건지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濟度하리요"
學語之輩는 說時似悟나 對境還迷하나니 所謂言行이 相違者也라
말을 배우는 무리들은 말할 때에는 깨친 듯하다가도
실지 경계에 당하게 되면 그만 아득하게 된다.
이른바 말과 행동이 서로 틀리는 것이다.
若欲敵生死인댄 須得這一念子를 爆地一破하야사 方了得生死하리라.
만약 생사를 막아내려면 이 한 생각을 탁 깨뜨려야 비로소 생사를 벗어나게 될 것이다.
然이나 一念子를 爆地一破然後에도 須訪明師하야 決擇正眼이니라.
그러나 한 생각을 깨친 뒤에라도 반드시 밝은 스승을 찾아가 눈알이 바른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古德이 云 只貴子眼正이요 不貴汝行履處라 하니라.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다만 자네의 눈 바른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지 자네의 행실을 보려고 하지 않네"라고 하였다.
願諸道者는 深信自心하야 不自屈不自高니라.
바라건대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마음을 깊이 믿어, 스스로 굽히지도 말고 높이지도 말아야 한다.
迷心修道하면 但助無明이니라.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는다는 것은 오직 무명만을 도와줄 뿐이다.
修行之要는 但盡凡情이요 別無聖解니라.
수행의 요결은 다만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뿐이지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없는 것이다.
不用捨衆生心이요 但莫染汚自性하라 求正法이 是邪니라.
중생의 마음을 버릴 것 없이, 다만 자성을 더럽히지 말라.
바른 법을 찾는 것이 곧 바르지 못한 邪道니라.
斷煩惱가 名二乘이요 煩惱不生이 名大涅槃이니라.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이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큰 열반이다.
虛懷自照하야 信一念緣起無生이어다.
모름지기 마음을 비우고 스스로 비춰 보아,
한 생각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사실은 일어남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諦觀殺盜淫妄이 從一心上起하면 當處便寂이니 何須更斷이리요
죽이고 도둑질하고 음란하고 거짓말 하는 것이다.
한 마음 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살펴보라.
그 일어나는 곳이 곧 비어있는데 무엇을 다시 끊으리요.
知幻卽離라 不作方便이며 離幻卽覺이라 亦無漸次니라.
환상인 줄 알면 곧 여읜 것이라 더 방편을 지을 것이 없고,
환상을 여의면 곧 깨친 것이라 또한 닦아 갈 것도 없다.
衆生이 於無生中에 妄見生死涅槃이 如見空花起滅이니라
중생이 나는 것 없는 가운데서 망령 되게 생사와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菩薩이 度衆生入滅度나 又實無衆生이 得滅度니라.
보살이 중생을 건져 열반을 들게 했다 할지라도 실은 열반을 얻은 중생이 없는 것이다.
理雖頓悟나 事非頓除라.
이치를 단박에 깨칠 수 있으나, 버릇은 한꺼번에 가시어지지 않는다.
帶狀修禪은 如蒸沙作飯이요 帶殺修禪은 如塞耳叫聲이요 帶偸修禪은 如漏 求滿이요帶妄修禪은 如刻糞爲香이니 縱有多智라도 皆成魔道니라
음란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지으려는 것 같고,
살생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제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으며,
도둑질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새는 그릇에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 같고,
거짓말하면서 참선하는 것은 똥으로 향 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비록 많은 지혜가 있더라도 다 악의 길을 이룰 뿐이다.
無德之人은 不依佛戒하며 不護三業하며 放逸懶怠 하야 輕慢他人하며 較量是非로 而爲根本하니라.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을 지키지 않는다.
함부로 놀아 게을리 지내며, 남을 깔보아 따지고 시비하는 것을 일삼고 있다.
若不持戒면 尙不得疥癩野干之身이온대 況淸淨菩提果를 可冀乎아
만약 계행이 없으면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는데,
하물며 청정한 지혜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欲脫生死인댄 先斷貪欲과 及除愛渴이어다.
생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탐욕을 끊고 애욕의 불꽃을 꺼버려야 한다.
無碍淸淨慧가 皆因禪定生이니라.
걸림 없는 청정한 지혜는 다 禪定에서 나온다.
心이 在定則能知世間生滅諸相하니라.
마음이 정에 들면 세간의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모든 일을 다 밝게 알 수 있다.
見境心不起가 名不生이요 不生이 名無念이요 無念이 名解脫이니라.
어떤 경계를 당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을 나지 않음이라 하고,
나지 않는 것을 무념이라 하며 무념의 상태를 해탈이라 한다.
修道證滅이 是亦非眞也요 心法本寂이 乃眞滅也라
故로 曰 諸法從本來로 常自寂滅相이라 하니라.
도를 닦아 열반을 얻는다면 이것은 또한 진리가 아니다.
心法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알아야 그것이 참 열반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본래부터 늘 그대로 열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貧人이 求乞이어든 隨分施與하라 同體大悲가 是眞布施니라.
가난한 이가 와서 구걸하거든 분수대로 나누어 주라. 한 몸 처럼 가엾이 여기면 이것이 참 보시니라.
有人이 來害어든 當自攝心하야 勿生瞋恨하라 一念瞋心起하면 百萬障門開니라.
누가 와서 나를 해롭게 하더라도 마음을 거두어 성내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각 성내는데에 백만 가지 장애의 문이 열린다.
若無忍行하면 萬行不成이니라.
만약 참는 일이 없다면 보살의 六道萬行도 이루어질 수 없다.
守本眞心이 第一精進이니라.
본바탕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 첫째 가는 정진이다.
持呪者는 現業은 易制라 自行可違어니와 宿業은 難除라 必借神力이니라.
진언을 외우는 것은 금생에 지은 업은 비교적 다스리기 쉬워서 자기 힘으로도 고칠 수가 있지만 전생에 지은 업은 지워 버리기가 어려우므로 반드시 신비한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이다.
禮拜者는 敬也요 伏也니 恭敬眞性하고 屈伏無明이니라
예배란 공경이요 굴복이다. 참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念佛者는 在口曰誦이요 在心曰念이니 徒誦失念하면 於道無益이니라.
염불이란 입으로 하면 송불이요, 마음으로 하면 염불이다.
입으로만 부르고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도를 닦는 데 아무 도움도 없다.
聽經은 有經耳之緣과 隨喜之福하며 幻軀는 有盡이나 實行은 不亡이니라.
경을 들으면 귀를 거치는 인연도 있게 되고, 기쁨이 따른 복도 짓게 된다.
물거품 같은 이 몸은 다할 날이 있으나 참다운 행은 헛되지 않는다.
看經은 若不向自己上做工夫하면 雖看盡萬藏이라도 猶無益也니라.
경을 보되 자기 마음속을 돌이켜 봄이 없다면 비록 팔만대장경을 다 보았다 하더라도
아무런 보탬이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學未至於道하고 衒耀見聞하야 徒以口舌辯利로 相勝者인댄 如厠屋塗丹攫 이니라.
배워 도를 이루기 전에 남에게 자랑하려고 한갓 말재주만 부려 서로 이기려고 한다면
마치 변소에 단청하는 것과 같다.
出家人이 習外典하면 如以刀割泥하야 泥無所用이요 而刀自傷焉이니라.
출가한 사람이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칼로 흙을 베는 것과 같아서
흙은 아무 소용도 없는데 칼만 망가지게 된다.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非求名利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 이다.
佛云, 無常之火가 燒諸世間이라 하고 又云, 衆生苦火가 四面俱焚이라 하며 又云 諸煩惱賊이 常伺殺人이라 하니라 道人은 宜自警悟하야 如救頭燃하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덧없는 불꽃이 온 세상을 태운다" 하셨고,
또 "중생들의 고뇌의 불이 사방에서 함께 불타고 있다" 하셨으며,
또 "모든 번뇌의 적이 항상 너희들을 죽이려고 엿보고 있다" 하셨다.
그러므로 수도인은 마땅히 스스로 깨우쳐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 해야 한다.
貪世浮名은 枉功勞形이요 營求世利는 業火加薪이니라
세상의 뜬 이름을 탐하는 것은 쓸데없이 몸만 괴롭게 하는 것이요,
세상의 잇속을 따라 허덕이는 것은 업의 불에 섶을 더 보태는 것이다.
名利衲子는 不如草衣野人이니라.
이름과 재물을 따르는 납자는 초의를 걸친 야인만도 못하다.
佛云하사대 云何賊人이 假我衣服하고 稗販如來하야 造種種業고 하시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도둑들이 나의 옷을 빌려 입고,
부처를 팔아 온갖 나쁜 업을 짓고 있느냐"고 하셨다.
於戱라 佛子여 一衣一食이 莫非農夫之血이요 織女之苦어늘 道眼이 未明하면 如何消得이리요.
아! 불자여. 그대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이 농부들의 피요, 직녀들의 땀이거늘,
도의 눈이 밝지 못하다면 어떻게 삭여 낼 것인가.
故로 曰 要識披毛戴角底?아 卽今虛受信施者是니라 有人은 未飢而食하고 未寒而衣하니 是誠何心哉아 都不思目前之樂이 便是身後之苦也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털을 쓰고 뿔을 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그것은 지금 신도들이 주는 것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거저 받아먹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 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배고프지 않아도 또 먹고, 춥지 않아도 더 입으니 이 무슨 심사일까? 도대체 눈앞의 쾌락의 바로 후생이 괴로움인 줄을 생각지 않는구나.
故로 曰 寧以熱鐵로 纏身이언정 不受信心人衣하며 寧以洋銅灌口언정
不受信心人食하며 寧鐵投以身이언정 不受信心人房舍等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이르기를 "차라리 뜨거운 철판을 몸에 두를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옷을 입지 말며, 차라리 쇳물을 마실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음식을 먹지 말고, 차라리 끊는 가마솥에 뛰어들지언정 신심 있는 이가 주는 집에 거처하지 말라" 한 것이다.
故로 曰 道人은 進食을 如進毒하고 受施를 如受箭이니 幣厚言甘은 道人所畏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에 독약을 먹는 것같이 하고, 시주를 받을 때에는 화살을 받는 것과 같이 하라"고 한 것이다. 두터운 대접과 달콤한 말은 도를 닦는 사람으로서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故로 曰 修道之人은 如一塊磨刀之石하야 張三也來磨하고 李四也來磨하야
磨來磨去에 別人刀는 快하되而自家石은 漸消라 然이나 有人은 更嫌他人이 不來我石上磨하나니 實爲可惜이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도를 닦는 사람은 한 개의 숫돌과 같아서 장 서방이 와서 갈고, 이 서방이 와서 갈아 가면 남의 칼은 잘 들겠지만 나의 돌은 점점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도리어 남이 와서 돌에 칼을 갈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故로 古語에 亦有之하니 曰 三途苦가 未是苦라 袈裟下失人身이 始是苦也라 하니라.
그러므로 옛말에 또한 이르기를 "삼악도의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가사를 입었다가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 참말 고통이다"라고 하였다.
乭哉라 此身이여 九孔常流하고 百千癰疽에 一片薄皮로다 又云 革囊盛糞하야 膿血之聚가 臭穢可鄙라無貪惜之는 何況百年將養이나 一息背恩이니라.
우습다, 이 몸이여.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고,
백천 가지 부스럼 덩어리를 한 조각 엷은 가죽으로 싸 놓았구나. 또 가죽 주머니에는 똥이 가득 담기고, 피고름 뭉치라. 냄새나고 더러워 조금도 탐나거나 아까울 것이 없다. 더구나 백년을 잘 기른다 해도 숨 한 번에 은혜를 저버리고 마는 것이랴.
有罪卽懺悔하고 發業卽懺愧하면 有丈夫氣象이요 又改過自新하면 罪隨心滅이니라.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곧 부끄러워 할 줄 알면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마음을 따라 없어질 것이다.
道人은 宜應端心하야 以質直爲本하야 一瓢一衲으로 旅泊無累니라.
도인은 마땅히 마음을 단정히 하여 검소하고 곧은 마음으로 써 근본을 삼아야 한다.
한 개의 표주박과 한 벌의 누더기 옷이면 어디를 가나 걸릴 것이 없다.
凡夫는 取境하고 道人은 取心이니 心境을 兩忘하면 乃是眞法이니라.
범부들은 눈앞의 현실에만 따르고, 수도인은 마음만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마음과 바깥 현실 두 가지를 다 잊는다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법이다.
聲聞은 宴坐林中이나 被魔王捉하고 菩薩은 遊戱世間이나 外魔不覓이니라.
성문은 숲 속에 편히 앉아서도 마왕에 붙잡히고, 보살은 세간에 노닐어도 외도와 마군이 보지 못한다.
凡人이 臨命終時에 但觀五蘊皆空하야 四大無我요 眞心無相하여 不去不來니 生時에도 性亦不生하고 死時에 性亦不去라 湛然圓寂하고 心境이 一如라 但能如是直下頓了하면 不爲三世所拘繫니 便是出世自由人也라 若見諸佛이 無心隨去하며 若見地獄이라도 無心怖畏니 但自無心하면 同於法界니 此卽是要節也라 然則平常은 是因이요 臨終은 是果니 道人은 須着眼看하라.
누구든지 임종할 때에는 다만 五蘊이 다 빈 것이어서 네 가지 원소가 나 라고 할 것이 없고, 참마음은 모양이 없어 가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다. 날 때에도 성품은 또한 난 바가 없고, 죽을 때에도 성품은 또한 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다만 이와 같이 단박 깨친다면 삼세 인과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이 곧 세상을 뛰어난 자유인이다.
만약 부처님을 만나더라도 따라 갈 마음이 없고, 지옥에 가더라도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다만 스스로 무심하게 되면 법계와 같이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요긴한 것이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좋은 씨를 심고 임종할 때에 좋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 곳에 주의하여야 한다.
凡人이 臨終命時에 若一毫毛라도 凡聖情量이 不盡하고 思慮를 未忘하면
向驢胎馬腹裡하야 托質하며泥犁碻湯中에 煮雜 하며 乃至依前再爲瘻蟻蚊猛 이니라.
사람이 임종할 때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성인이다 범부다 하는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되면 나귀나 말의 뱃속에 끌려들거나 지옥의 끊는 가마 속에 처박히게 되며, 혹은 개미나 모기 같은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禪學者가 本地風光을 若未發明則孤超玄關을 擬從何透리요 往往斷滅空으로 以爲禪하며 無記空으로 以爲道하며 一切俱無로 以爲高見하나니 此는 冥然頑空이니 受病幽矣니라 今天下之言禪者가 多坐在此病이니라
참선하는 사람이 본래 면목을 만약 밝히지 못한다면 높고 아득한 진리의 문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왕왕 어떤 이는 아주 끊어 없어진 빈 것으로써 참선을 삼기도 하고, 무엇이라 말할 수 없이 빈 것으로써 도를 삼기도 하며 일체 모두 없는 것으로써 높은 소견을 삼기도 하나니 이것은 컴컴하게 비기만 한 것이라 병든 바가 깊다. 지금 천하에 참선을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이런 병에 걸려 있다.
神光이 不昧하여 萬古徽猷로다 入此門來에 莫存知解어다.
거룩한 빛 어둡지 않아 만고에 환하여라. 이 문안에 들어 오려면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黃鶴樓(황학루)
崔顥(최호)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은 이미 황학 타고 떠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곳엔 황학루만 남아있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 번 가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 구름만 천년 동안 하릴없이 떠돈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력력한양수) 맑은 날 강 건너 한양나무들 또렷한데
芳草萋萋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싱그러운 풀밭은 앵무새 섬을 덮고 있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가 저무는데 우리 고향 어디쯤 있을까,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물안개 강 위에 피어올라 나는 시름겹다.
- 崔顥 : 최호(?-754년 졸)는 하남성 開封 사람이다. 723년 진사에 급제하여 司勳員外郞(사훈원외랑)을 지냈다.
전기 시는 閨情(규정)을 많이 짓고 표현이 경박하였으나, 후기에는 邊塞(변새)를 겪어 시풍이 웅혼 분방한 것으로 바뀌었다. 최호는 武昌(무창)에 놀러갔다가 황학루에 올라 이 절창을 이루었다. 전하는 말에, 李白도 황학루에 올라 시를 지으려 하다가 최호의 이 시를 보고, "눈앞에 경치 있어도 말할 수 없으니, 최호 읊은 노래가 위에 있기 때문이라.(眼前有景道不得, 崔顥題詩在上頭)"고 탄식했다 한다. 송 嚴羽(엄우)는 『창랑시화』에서, "당인 7언 율시 가운데 최호의 <황학루>가 첫째다."라 하였다.
- 黃鶴樓 : 황학루는 무창에 있는데, 長江과 漢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황학루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辛씨 주점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술을 좀 얻어 마시자고 했으므로 주인은 큰 사발로 대접했다. 이러기를 반년간, 주인은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고 그냥 마시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은 주인에게 술값이 많이 밀렸지만 돈이 없다고 하면서 대신에 주점의 벽에 노란 두루미를 그려 주고는 떠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을 마시러 온 손님들이 박자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면 벽의 두루미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소문이 나서 주점은 크게 번창했다. 10년쯤 되자 신씨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슬며시 나타났다. 피리를 꺼내어 부니 흰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노란 두루미가 벽에서 튀어 나왔다. 그 사람은 두루미의 등에 걸터앉아 구름을 타고 날아갔다. 그 사람은 신선이었던 것이다. 신씨는 그곳에 누각을 세우고 황학루라고 이름 지어 이것을 기념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_()()()_
執着...
이 놈이 참~ 무서운 놈이지요..
착 달라 붙어가지고 떨어질 줄 모르니 말입니다.
지선화 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우와! 이번 녹취록을 다 읽어 내는 데는 무려 5번 이상 방문한 것 같네요
몇번이나 졸음이 와서 쉬기도 하고 잠자러 가기도 하고...
녹취록을 작성한 지선화님은 어떻게 해냈나요 감탄감탄
에궁 보고 싶기까지 하네...
강의해 주신 용~~~학 스님, 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