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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기왕에 죄인에겐 죄가 최고다>의 줄거리:
어거스틴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이 제2의 복음이라 했답니다. 죄는 영원한 멸망의 이유가 됩니다. 죄는 또한 죽기전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이미 모든 불행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우리가 또렷이 느끼어 알고 늘 그 죄인됨의 의식을 잃지않을 때 죄는 세상에서 내게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을 앞당겨 사는 열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기왕에 죄인에겐 죄가 최고다
(마9:1-13)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기왕에 죄인에겐 죄가 최고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기왕에 죄인에겐 죄가 최고다’
먼저 이 제목에서 우리가 생각될 수 있는 오해들을 좀 제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죄가 최고다’라는 말은 우리가 행위로 범죄를 하는 것, 그 범죄가 최고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범죄는 내 존재의 인격 됨 안에 들어있는 그 죄의 열매고 싸인입니다.
내가 죄인 됨의 증상이 범죄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 범죄가 최고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범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의 존재가 죄 사함 받은 뒤에도 죄 값이 하얗게 다 치러진 뒤에도 우리의 죄인 됨은 남아있습니다.
죄인 됨은 남아있지만 범죄가 우리에게서 나타나면 안돼요.
그러므로 ‘죄인에겐 죄가 최고다’라는 이 말은 나의 죄인 됨을 자각할 때 내가 느낄 때, 그 죄인의 의식과 고백이 최고라는 얘기죠.
자, 여러분!
이러한 오해를 먼저 분명하게 제거하고, 그리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으로 인해서 죄 속에서 태어나지 않습니까?
그러니 ‘기왕에 죄인이면 죄가 최고다’라는 말은 죄인인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 중에 최고라 이겁니다.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유익한 것이 죄라는 것이에요.
내게 학력이 있습니다, 학력보다 더 유익한 게 죄라는 겁니다.
내게 어떤 재능이 있습니까? 그 재능보다 내게서 나올 수 있는 것 중에 더 최고로 유익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왜 기왕에 죄인에게는 죄가 최고일까요?
내 학벌보다, 내 인맥보다, 내가 갖고 있는 달란트보다, 내 재력보다, 그 모든 것보다 최고로 내게 유익한 게 죄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죄만 잘 우리가 다룰 수 있으면 정말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돈 벌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큰 프로젝트를 갖고 인생을 멋지게 꽃피워 보겠다고 애쓸 것 없어요.
비전? 그 따위 것을 왜 갖습니까?
긍정의 힘? 망할 징조입니다.
오히려 나를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내 속의 죄를 보는 것이 살 길입니다.
죄라는 것이 기가 막힌 겁니다.
오늘 본문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이 비유는 너무너무 노골적이고 분명한 비유입니다.
상징적이거나 함축된 다른 의미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여기서 말하는 의사는 예수님 당신을 지칭하시는 거고, 병든 자라고 하는 것은 죄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죄인 아닌 사람이 없지요.
여기서 건강한 자라고 하는 것은 의인을 말하는 것인데 의인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무슨 말입니까?
모두가 죄인인데, 병든 자라는 것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는 자고, 건강한 자라는 것은 죄인인데 자기의 죄인 됨에 찌들어있는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상식적인 이야기가 어마어마한 복음의 능력과 복음이 내포하고 있는 은총의 범위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까무러칠 정도로 엄청난 은혜의 바다를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는 겁니다.
그냥 교리적으로 ‘주님의 사역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신다’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 내용을 잘 알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봅니다.
아주 상식적이고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참 복음이 갖고 있는 어마어마한 은총의 세계로 가는 길이 보여요.
우리나라에 치아를 빼고 인공으로 치아를 박아 넣는 임플란트를 처음 소개한 유명한 치과의사가 있습니다.
지금도 대학교수시면서 그 대학에 속한 대학병원의 치과과장님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아내가 집사님이신데 그 분의 치아가 눈에 띨 정도로 자로 잰 듯이 고르고 부자연스럽다고 할 정도로 하얗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하시거나 웃거나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치아를 보면서 ‘야, 그 유명한 솜씨 있는 치과의사의 사모님이라서 다르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편한 자리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대화하는 가운데 치아 얘기가 마침 나와서 어떤 분이 그분께 여쭤보았습니다, 치아를 교정했느냐고.
다들 깜짝 놀랐어요, 충치 하나 없고 자로 잰 듯이 고른 그 모양, 그리고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하얀 치아의 색, 모두 원래 타고난 그대로라는 겁니다.
한 번도 그 유명한 치과의사인 남편의 손길이 닿아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런데 대학병원에 있으니까 많은 친인척들이 그 아내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거예요.
온갖 친척들이 아내의 이름으로 치료를 받는데 정작 당사자는 한 번도 그 유명하고 솜씨 좋은 치과의사의 손길이 닿아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자, 답이 나왔어요.
왜 내가 지금 돈 걱정 하고 있습니까?
왜 내가 지금 자식 때문에 불행합니까?
주님의 손길이 터치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주님의 손길이 내 마음에 닿으면 능숙한 치과의사의 손길이 닿았을 때 완벽한 자연 치아처럼 임플란트가 완성되는 것 같이, 병든 치아가 치료받는 것 같이, 내 마음이 주님의 손길에 의해서 위로받게 되고 천국의 따스함을 느끼게 되고, 천국 티를 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인데, 왜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까?
왜 주님의 손길이 내 마음을 터치하지 못하는 겁니까?
너무 건강해서…, 너무 건강하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살아도 절대로 치과의사 남편의 손길이 그 아내의 치아에 닿지 않는 이유는 그 치아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까? 간단합니다.
내 인격이라는 치아가, 내 심령의 치아가, 내 마음이라는 치아가 건강하기 때문에 그래요.
건강하기 때문에 스스로 이 세상에 대해서 관계하면서 불행해지고 우울해지고 걱정하고 절망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으면 절망할 수가 없고, 우울할 수가 없고, 괴로울 수가 없지요.
여러분,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이 마태복음을 쓴 마태를 부르시는 얘기가 나옵니다.
세리예요, 세리는 매국노로 취급 받았습니다.
로마에 붙어서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들이는데, 로마에서 이 세리들에게 마음대로 세금을 걷을 수 있도록 권한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세금으로 10을 내야 하면 20을 걷어서 10은 자기가 먹고 10을 로마에 바치는 겁니다.
로마에는 바치라는 액수만 바치면 되고 나머지는 얼마를 불러서 자기가 먹든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이를 갈며 미워해야 마땅할 매국노들입니다, 더군다나 선민의 사회에서 완전한 죄인이에요, 선민의 나라에 반해서 살고 있으니까.
그런 죄인들이 같이 주님과 함께 식사자리에 참석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천국의 모습이 어떨 것 같아요?
하나님과 밥 먹는 자리입니다, 상징적입니다마는 같이 식사한다는 게 뭡니까?
만남의 하이라이트예요.
만남이 여러 가지가 있지요,
일 때문에 만납니다, 일도 수백 가지 아닙니까?
은행에 가서 일보고, 백화점 가서 일보고, 거래처에서 일을 보고 … …
이렇게 만남이 있습니다마는 만남의 가장 깊고 좋고 즐거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식사의 만남입니다.
천국이 뭐하는 곳입니까? 하나님과 식사하는 곳이에요.
하나님과 식사하고 하나님 때문에 배불러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근데 오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천국의 모습을 이 땅에 재현시키십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인데 누가 거기에 참여합니까?
마태 이하, 세리들과 죄인들, 죄인들이라고 하면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과 매춘부들이 유대사회에서는 죄인들이에요.
유대의 풍습을 묘사해놓은 할라카라는 책에 보면 죄인이 세리, 매춘부,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그 죄인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천국의 모습인데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실 때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무엇 하나 얻어서 성공하자고 내려오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하늘을 알고 계시고 하늘에서 살던 분에게 이 땅에서 얻고 싶은 것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까지 다 이 땅에 주려고 오신 것이지, 당신이 얻으려고 하신 것이 없어요.
그런데 당신이 와서 주시려고 하늘에서 보따리 보따리 싸갖고 온 모든 것들은 죄인 oriented 된 것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죄인에게 적합한 것들을 보따리 보따리 싸갖고 오신 겁니다.
예수님의 33년의 이 땅 위에서의 존재의 의미, 3년의 공생애의 의미, 복음사건의 의미가 다 어디에 있는가 하면, 전부 죄인에게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죄인이지만 내 인격이 근본적으로 죄에 물들어 썩어있고 죄의 뿌리가 아직 제거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경우에는 주님이 하늘에서 바리바리 싸갖고 오신 모든 은총의 실질적인 효과가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무효, 무효!
여러분,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뭡니까?
죄인 됨의 자각이 없다는 거예요, 아니면 약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죄인 됨의 자각이 어느 정도 깊은가에 따라서 우리가 누리는 은총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기왕에 죄인이에요, 기왕에 죄인이고,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게끔 돼버렸어요.
그래서 기왕에 죄인으로 태어난 이 바닥에서 주님께서 갖고 오신 모든 하늘의 선물들은 다 죄인에게만 필요한 것으로 갖고 왔기 때문에, 내가 죄인 됨의 의식이 어느 정도 깊고 어느 정도 크냐에 따라서 내가 누릴 수 있는 은총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겁니다.
은총을 크게 받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돈 벌 생각하지 마세요, 은총을 받으면 되는 겁니다.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은총을 버세요, 은혜를 버세요, 그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은총과 은혜는 내 죄 됨의 깊이를 보는 정도에 비례하고 크기를 보는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에요.
제일 크고 제일 깊게 보는 게 뭐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실 때 내 존재의 죄 됨, 하나님의 시각에 비춰진 나의 죄 됨, 하나님처럼 보면 가장 깊이 보는 것일 거예요.
그 모습이 바로 십자가에 죽은 모습입니다.
자, 이게 왜 중요합니까?
여러분, 십자가에 달려 죽은 모습대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이건 교리적인 게 아니에요, ‘내가 죄인이라서 십자가에 달렸고 그러므로 내가 죽은 모습이다’ 이렇게 교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죄인 됨이 삶에서 고백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자, 자녀를 상대하고 배우자를 상대하고 있을 때, 그 남편 앞에서, 아내 앞에서, 자식 앞에서, 아니면 사업 앞에서 나의 죄 됨, 내 인생을 두고 나의 죄 됨을 어느 정도로 느끼느냐 하는 것에 은총이 어느 정도로 오느냐가 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자식 앞에서 나의 죄 됨을 너무너무 깊이 봐서 자식에게 말 한 마디 못하고 손 한번 댈 수가 없습니다.
손대면 죄가 묻어날 것 같아서 한 마디 말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총의 물살이 자식과 나를 휩쓸고 갈 것이에요.
은총이 자식을 키워주는 겁니다.
사업을 맡겨주셨는데, 사업 앞에서 내가 너무 죄인이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생각나는 것마다 죄가 묻어나지 않는 게 없고, 소원하는 것마다 죄가 묻어나지 않는 소원이 없어요.
그렇게 느끼고 십자가에 매달려서 ‘나는 사업 앞에서 꼼짝도 못 하겠다’라고 할 때 은총의 바다가 몰려와서 사업장이 은총바다에 떠있게 됩니다.
은총으로 진행이 된다 이겁니다, 은총으로.
여러분, 너무나 많은 피부에 와 닿는 예들이 있습니다.
제가 독일에 있을 때, 독일이 사회복지와 의료보험이 아주 잘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학생들에게도 의료보험 혜택을 다 줍니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가입이 쉽지 않고, 된다고 해도 보험료가 엄청납니다.
일 년 있는 동안 매달 600불씩을 냈습니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정말 싸요, 물론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이지만.
5년 넘게 있으면서 매달 의료보험료를 냈지만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어요. 건강하기 때문에.
가끔 병원을 갔지만 감기몸살 정도로 약 한번 타오는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은총이 이 정도라는 겁니다.
내 죄인 됨을 보는 것이 감기몸살 정도의 병으로 내가 느끼고 살아갈 때 받을 수 있는 은총이 그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한국유학생은 자녀가 셋인가 되었는데 두 아이가 심장이 좋지 않았습니다.
괴팅겐이라는 독일도시에서 아이를 헬기에 태워서 네덜란드로 보내서 거기서 수술을 받고 입원하고 있다가 독일 대학병원으로 다시 와서 거기서 또 치료를 계속 해주고 집에 가서도 계속 치료를 해줍니다.
그래서 그 총액수가 30만 마르크인가 하여튼 어마어마한 돈이 들었다고 합니다.
20년 전 1마르크가 500원 정도 할 때니까 1억 5천만 원이에요, 내가 타온 약은 병이 너무 작기 때문에 기껏해야 10마르크 20마르크 어치 받아왔는데, 병이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 만큼 깊으니까 30만 마르크의 수술을 그냥 해주는 겁니다.
여러분, 이 비밀을 알겠습니까?
의료보험은 감기약 정도의 혜택을 보더라도 건강하게 사는 게 좋아요.
그러나 기왕에 죄인인 바에는, 기왕에 죄라는 죽을병에 걸린 바에는 내 죄를 내 의식이 깊이, 넓게, 크게 보기만 하면 보는 것만큼 은총이 쏟아집니다.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바보처럼.
왜 비전을 갖고 내 인생을 꾸려나가려고 합니까, 바보처럼.
내 죄를 크게 보면 되는 거예요.
내 죄를 깊이 보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깊이 보는 만큼 은총이 쏟아지니까.
심장병은 죽네 사네 하는 병입니다.
내가 이대로는 죽겠구나 하는 정도로 죄를 깊이 보면 살아도 그렇게 멋지게 살 수 없을 만큼 은총이 내려오는 겁니다.
사는 비결이 여기 있다는 거예요.
앞에 중풍병자의 얘기가 나옵니다마는 마가복음에 똑같이 나오니까 그때 자세히 하겠어요.
이 중풍병자의 얘기에서도 요지는 중풍병을 고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너무너무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중풍병이라고 하는 현상을 싸인으로 삼아서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죄를 보는 겁니다.
중풍병은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를 보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안심하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이왕에 진행된 병인데 왜 안심하라고 하셨을까요? 안심하라는 말이 잘 맞지 않아요.
너무너무 두려워하는 그 죄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중풍병을 고치는 것보다 죄 사함 얘기가 먼저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살기 쉽지 않지요,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들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공부했던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에요.
제가 있던 때의 15년 전쯤일 텐데, 지금 숭실대학교에서 은퇴하셨을 것으로 압니다.
철학과 교수님으로 계셨던 분입니다.
그분께서 괴팅겐 대학에서 유학하시는 동안에 폐병에 걸리셨습니다.
폐병이 걸리시는 바람에 괴팅겐에서 유학생활 하는 동안에 나라에서 집을 구해주고 집세를 내줍니다, 치료를 해줍니다, 공부하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모든 경비를 다 대주었습니다.
집에 때때로 간병인이 와서 청소도 해주고 다 해줍니다.
다른 건강한 유학생들은 방학 때면 정말 힘들게 슈투트가르트 벤츠회사나 폭스바겐회사에 가서 아르바이트 하고 난리 칠 때, 폐병 걸리는 바람에 앉아서 나라에서 주는 집, 나라에서 주는 돈 받아 가면서 공부해서 철학박사 학위 받으시고 숭실대학교에서 교수생활 하시다 은퇴하셨습니다, 유네스코 사무총장도 하시고.
야아! 여러분, 죄처럼 좋은 게 없어요.
기왕에 죄인이니까 죄인 아닌 사람이 없으니까, 내 재능 따위 중요한 것 아닙니다.
뭘 할 수 있다 없다 중요한 게 아니에요.
기껏 건강해 봐야 아르바이트 해서 공부할 뿐입니다.
내가 잘났나고 해봐야, 내 재능 갖고 산다고 해봐야 슈투트가르트 벤츠회사에서 뺑이 치면서 아르바이트 하는 삶이에요.
폐병 걸려 봐요, 내가 죄인 됨을 봐요,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모습이 내가 죄인 되었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고 그걸 고백적으로 삶에서 끊임없이 기억하며 살아가라는 겁니다.
자식 앞에서고 사업 앞에서고 내 인생 앞에서고 직장에서고 무엇 앞에서든지 주님의 십자가에서 저렇게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 나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라는 얘깁니다.
그냥 공짜로 살게 되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도 안 움직입니다, 움직일 수도 없어요, 못 박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도 사업도 배우자 관계도 모든 것이 다 은총으로 그냥 살게 되는 겁니다, 그냥.
한번 해 보세요!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바보입니까?
왜 비전을 가져요? 비전 따위를 왜 얘기합니까?
그냥 내 죄를 보면 되는 거예요, 내 죄를 보면.
왜 재능 운운합니까? 왜 학벌 연연합니까? 왜 인맥에 쩔쩔맵니까?
하나님의 바다와 같은 은총, 하나님의 아들이 갖고 오시는 은총의 세계가 있어요.
죄를 보면 그 은총의 바다에 떠내려가는 겁니다.
다른 것 어려운 것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이잖아요, 그래서 복음이잖아요.
어느 정도로 크게 보시겠어요?
자, 자식과 관계합니다, 은총의 바닷물이 들어오려고 합니다, 감기 정도로 내 죄를 봅니다.
할 말 다 해요, 가르칠 것 다 가르쳐요,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살짝 죄송하니까 ‘하나님 잘 인도해 주세요,’ 이건 감기약 받는 거예요.
자식이 난리요동을 치는데도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난 죄인이다’, 정말 십자가에 못 박혀 꼼짝 못합니다.
‘내가 자식에게 말 한 마디 하면 죄가 나가고, 손 한번 대면 죄가 묻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난 자식에게 아무 말도 못한다’라는 죄인 됨을 고백해 보세요.
나와 자식의 관계가 은총의 바다 위에서 물놀이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허튼 데 정력을 낭비하지 마세요.
내 죄를 크게 보는 시합이 신앙의 경쟁입니다.
누가 자신의 죄를 크게 보느냐, 누가 자기 자신을 극악무도하고 썩고 부패한 인간으로 여길 수 있느냐, 어느 정도의 크기로? 이 경쟁입니다.
그리고 삶에서 그 본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십자가에 매달려서 꼼짝 못하는 겁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은총의 급물살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에요.
주님은 죄인 oriented 된 은총을 갖고 오셨습니다.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는 순간 은총도 무효화 돼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총으로 사는 우리들에게는 내 능력보다 내 재능보다 내 학벌보다 내 판단보다 나의 죄인 됨이 최고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그 정도의 크기와 깊이로 나의 죄를 봄으로써 주님께서 이 땅으로 갖고 오신 하늘의 은총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내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복된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