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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안나의 소원
https://www.youtube.com/watch?v=PL5_7KI2nFM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주님의 성전을 찾으신 우리 모든 성도님과 혹 성전을 찾지 못하고 채널앞에서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분들에게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은혜 충만한 시간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은 함께 교독한 말씀을 중심으로 안나의 소원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누가복음 2장에는 특별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칼로 네 마음을 찌르는 듯 하리라고 마리아에게 저주와 같은 축복을 한 시므온이 있고요.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될 여 선지자 안나가 있습니다.
이 두 분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요? 두 분 다 나이가 많았다는게 첫 번 공통점이고요.
시므온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다고 했습니까?
아! 그의 나이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주의 구원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과 구원을 품에 안고 이제 종을 평안이 놓아 주신다는 말씀을 볼 때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고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여 선지 안나의 나이는 얼마라고 했습니까?
아! 그녀의 나이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기록이 있죠?
눅 2:36-37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나가 있는데 나이가 어떠하다고 합니까?
그냥 늙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늙었더라 합니다.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까? 아주 많았다는 것입니까? 아주 많았다. 얼마나 많았을까요?
정확한 계산은 아니드래도 대충 계산해 볼수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숫자가 나오는 것을 합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어떤 숫자가 나옵니까? 예 7년이 나옵니다.
이 7년은 어떤 해입니까?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살았던 해.
그리고 칠년 후에 남편과 사별을 합니다. 그리고 과부로 몇 년을 살았습니까? 84년을
그럼 84년과 7년을 합하면 얼마가 됩니까? 91이 되죠.
아홉 살에 결혼하였다고 하면 100세가 될 것이고, 열아홉살에 결혼하였다면 110세가 될 것이고 그렇게 계산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상당히 나이가 많았다.
그렇게 나이가 많아서 눈이 잘 보였을지 희미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현직 제사장도 알아보지 못하였던 메시야를 알아보았다는 것 은혜입니까?
우리 교회에도 연로하신 분이 계시는데 지금은 코로나와 그분의 건강으로 인하여 교회에 나오시지 못하시고 계시지만 우리 이종연모친을 위하여 기도 많이 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친님은 교회 나오시어서 함께 앉아 계시는 것만 보아도 은혜가 되지 않습디까
강건하시어서 오래 토록 자리를 지키며 함께 주의 날을 준비하도록 기도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도 선지자 안나 처럼 나이는 그렇게 많지 않아도 안나와 같은 은혜를 받기를 원하십니까?
안나와 시므온은 초림을 기다렸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초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닌 지구 최고의 영광의 날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입니까?
아담 이후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사모하였던 날이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입니다.
우리는 그런 영광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구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 최고의 시간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임박한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초림 때 그 당시 제사장들과 종교인들이 다 그리스도를 몰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그럴까요?
저는 아들과 딸이 태어났을 때 둘 다 목회자가 되길 소망하였습니다.
그 소망을 따라 아들은 목사가 되었고 딸은 그렇게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딸 보다 목사인 아들 걱정이 더 많이 됩니다.
목사로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 성전에 있다가도 어떻게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서도 그분이 누군지 몰랐다.
그 말씀을 오늘 시대에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까?
목사 일을 하면서, 성도를 섬긴다고 하면서,
주님의 재림이 가깝습니다 라는 말씀을 전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위해 준비합시다 라는 말씀을 전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눈은 멀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주님 초림 당시 제사장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을 하였습니다.
날마다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어린양을 번제단 위에 드리면서,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어린양의 피를 받아 번제단 뿔에 바르고 성소 휘장에 뿌리면서도, 그 양의 원형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사탄이 한편으로 성공한 듯 보였습니까?
종말의 때에도 사탄은 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얼마의 성공을 거두었던 전력이 있기에 종말의 때에는 온 힘을 기울여서 이 교회의 지도자들을 공략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날마다 말씀을 보면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님의 재림을 전하면서도 본인의 눈은 감겨 져 있을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딸의 구원보다 목사인 아들의 구원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교회의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고요.
저는 이 교회를 떠나시는 목사들을 볼 때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어떻게 십 년 이상 목회를 하면서 또 어떤 분들은 평생 목회를 하면서 어떻게 성경의 이해가 거기까지 뿐이었는가 생각할 때 마음이 많이 아프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재림교회의 앞날이 때로는 걱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재림교회의 성도들의 수준이 성경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들을 생각하니 얼마나 더 걱정이 되는지
사랑하는 성도님들 목사들 연약하다고 나무라지 마시고 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품어주시고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의 일 한다고 하면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그 당시 많은 사람들 눈에 그렇게 띄지 않았던 두 사람은 그리스도를 알아 보았습니다.
날마다 예수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성소 봉사를 행하였던 제사장들은 몰라 모았는데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시대의 소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시소 55 “이 겸손한 경배자들은 예언을 헛되이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의 관원과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들 또한 그들 앞에 귀한 예언의 말씀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주의 길로 행하지 않고 있었으며 저들의 눈은 생명의 빛을 보기 위해 열려 있지 않았다”
이 겸손한 경배자들은 예언을 헛되이 연구하지 않았다
이 겸손한 경배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예 시므온과 안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예언을 연구한 사람들이라 합니까?
예, 예언을 연구하되 헛되이 연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눈은 열려있지 않았다고 합니까? 이스라엘의 관원과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들도 예언은 가지고 있었지만 순종하지 않았고 생명의 빛을 보기 위해 그들의 눈은 열려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누구는 열려 있었고 누구는 감겨 있었다는 말과 같은 말씀입니까?
우리 성도님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시므온과 안나와 같은 눈을 가지시길 소망해 봅니다.
소망만 해서 안 되겠죠?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눈이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눈들로 준비되길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초림을 맞이하였던 안나의 신앙을 좀 배워 보려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믿음의 준비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소망합니다.
성경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성전을 떠나지 아니한 믿음
먼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한 안나의 믿음에 대하여 좀 살펴보려 합니다.
누가복음은 여선지 안나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눅 2: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성경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선지 안나가 어디를 떠나지 않았다고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년세가 많아서 할 일이 없어서 성전을 떠나지 않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라는 말씀 앞에 팔십 사년 이라는 용어는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살았던 햇수를 그렇게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안나의 생활의 한 면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를 합니다.
무엇을 떠나지 않았던 삶이라는 말씀일까요? 성전을 떠나지 않았던 삶,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모두가 다 성전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럼 성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씀은 어떤 말씀일까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 당하였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몸도 마음도 다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되어 간 사람들 중에 믿음을 지켰던 청년들이 바벨론 왕궁에서 특별한 일을 부여 받아서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살았던 사람을 우리는 압니다.
누굽니까? 예 다니엘입니다.
성경은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저는 이 짤븐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이 말씀의 배경이 어떤지 여러분들 다 잘 아시죠?
지금 나라는 바벨론 나라가 아닌 폐르샤 나라입니다.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벨론에서 오랫동안 총리의 일을 보았던 다니엘을 등용하여 총리로 삼았습니다.
다리오 왕 시대에는 총리가 한명이 아니었고 삼명이었습니다.
메대파사의 전국도가 120도라서 그들을 다스리도록 총리셋을 두었는데 그중에 한명이 다니엘이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명은 아마도 지금까지 총리일을 해 왔던 사람들이었고 다니엘은 새로 기용된 신임 총무였을 것입니다.
두 총리가 신임총리를 기뻐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유가 많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점령한 바벨론의 망한 나라의 전직 총리였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고요.
다음으로는 바벨론의 총리로 있었지만 그의 출신은 그 먼저 망한 이스라엘의 포로출신이었다는 것이 또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틈을 보아 왕에게 고하여서 총리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지만 다니엘은 어떤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까?
단 6:4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그래서 다니엘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하여 30일동안 기도하지 못하도록 왕을 충동하여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어긴 사람은 사자굴에 넣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법도 누구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까?
다니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다니엘의 기도의 습관이 어떠하였다고 합니까?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저는 오늘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다니엘의 기도의 습관을 본받자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니엘의 기도의 습관 우리가 본받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기도할 때 무엇을 생각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합니까?
그런 말씀 있습니까? 예 예루살렘으로 향한 열린 창에서 기도하였다.
다니엘은 이국땅에서도 무엇을 생각하였다고요? 예루살렘을 생각하였다.
저는 이런 사람이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혹 안식일에 교회를 비우실 때 여러분들이 계시는 장소에서 창을 열고 장유교회 쪽을 바라보시면서 기도해 보셨나요?
그럼 분들이 있다면 정말 장유교회를 떠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유교회보다 더 잊지 말아야 할 교회가 있습니다.
어딥니까? 하늘 성소입니다. 하늘 성소를 하늘 교회라고 해도 될까요?
하늘 성소에 누가 계십니까?
아버지 보좌 앞에서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버지 그를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기도가 있기에 지금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딜 가시드래도 마음은 장유교회를 떠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진짜 장유교회 성도라면 화요일도 금요일 저녁도 교회를 나올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여서 나오시지 못할찌라도 마음은 어떻게 하여야 되겠습니까?
화요일 저녁 금요일 저녁 예배시간에 티비 앞에 앉아 계신다면 그래도 우리 장유교회 성도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이름뿐인 성도가 되지 말길 바랍니다.
지금은 어디서라도 예배에 참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교회에서처럼 그런 은혜는 없을지라도 현대 과학의 산물을 이용하여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를 떠나지 말길 바랍니다.
특별히 예수그리스도를 떠나시지 말길 바랍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눅 11: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모우는 자리에 서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헤치는 자라고 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일에 함께하지 아니하면
이 말씀을 우리 교회에 적용을 해 볼까요?
여러분들이 교회일에 협력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헤치는 것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까?
이곳에 헤치는 것은 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죠.
예배시간에 우리가 함께하지 않으면 모이는 것을 헤치는 행위가 된다고 이해할 수 있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제가 심한 말씀을 드리나요?
아 참 두려운 말씀 아닙니까? 저의말이 아니고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진짜 복음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일주일에 세 번 주님과 약속한 날 다 주님 앞에 나와서 우리 함께 주님을 예배하게 되길 소원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형편이 그러하지 못하신 분들은 집에서 장유체널 유튜브를 통하여 함께하길 소원합니다.
그것도 안 되시는 상황이라면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하셨으면 합니다.
누가 그렇게 살았다는 말씀입니까? 다니엘이 그렇게 살았고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안나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안나는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살았고 안나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지금은 편안한 쉼을 누리고 있을 것이지만 주님 오시는 그날 안나의 소원은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안나가 가진 소원처럼 교회를 떠나지 않는 삶을 사셨다가 주님 오시는 날 안나의 소원처럼 우리의 소원들이 다 이루어지는 은혜에 참여하게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함으로 섬긴 사람
이제 안나의 두 번째 신앙의 모습을 찾아 보겠습니다.
눅 2:37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겼다.
주야로 기도함으로 섬겼다는 말씀은 또 어떤 말씀일까요?
섬긴다는 말씀은 그래도 이해가 좀 되지만 밤낮으로 금식한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글자 그대로 밤낮으로 금식하는 것으로 이해 하기가 힘든 말씀이지 않습니까?
금식이 무엇인지 이해하시면 그 답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금식이 무섯입니까? 단식은 무엇입니까?
구약 레위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민 29:7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월 10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에 한번씩 가지게 되는 속죄일입니다.
그날에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성회로 모이고 마음을 괴롭게 하라 그리고 아무 노동을 하지 말라.
안식일로 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날은 제 칠일 안식일 외에 일곱절기 안식일 중 한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안식일인데 어떤 안식일 같습니까? 기쁨의 안식일 같습니까? 괴롬의 안식일 같습니까? 왜 괴롬의 안식일 같습니까? 괴롭게 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렇습니까?
이 괴롭게 하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괴롭게 라는 말씀과 금식이 함께 나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 58:3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유태인들의 문장이 대구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죠?
그럼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라는 말씀과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라는 말씀이 어떤 말씀이라는 것입니까? 같은 말씀이다.
그럼 금식과 마음을 괴롭게 한다는 의미는 어떠합니까? 같은 것이다.
그럼 금식은 어떤 것을 가지고 금식이라고 합니까?
지난번 이사야서를 공부하면서 금식과 단식에 대하여 약간 들으셨죠.
기억하시나요? 잊으셨나요?
단식은 그냥 단순하게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단식이고요.
금식은 기도의 목적을 가지고 행해지는 단식을 가지고 금식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진정한 금식은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 58:6-7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금식은 어떤 것이라고요?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저는 이 말씀의 의미를 두가지로 이해를 합니다.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전한 복음을 내가 실천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함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이고요.
우리가 복음을 전함으로 사탄의 결박에 묶여 있던 사람 사탄에게 압제 장하는 자들을 풀어주는 것이고요,
그러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주린자들에게 식물을 나누어 주고요 유리하는 빈민을 못본채 하지 말고요 벗은 자를 보면 입히고 골육의 어려운 처지를 모른체 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해 주실 것이라 합니다.
사 58:8-9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아래 이사야 58장 6-7절은 방법이고요. 위의 8-9절은 그런 것의 결론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바라시는 분들 이 말씀대로 사시고 이 말씀을 펴놓고 주장하시길 바랍니다,
누가 이러한 삶을 살았다는 말씀입니까? 여선지 안나가 다시 말씀을 올립니다.
눅 2:37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은 마음이 항상 예수그리스도께 향하여 있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복음을 전하고 전한 복음처럼 살고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모두의 삶이 이런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님 오시는 날 안나와 같은 사람이 영접함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세가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열처녀의 비유이고요.
두 번째는 달란트의 비유이고요.
세 번째는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열처녀의 비유에서는 기름을 준비하라는 말씀이고요.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기름을 가진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고요.
양과 염소의 비유는 그 일이 여기 네 형제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시여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릴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오셨습니다.
그 자기가 무엇일까요?
자기라고 하니까 우리가 자기라는 표현을 흔하게 사용하니까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을 느끼지 못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우신 자기는 우주의 주인이시고요, 우주의 왕이시고요, 우주룰 만드신 창조주 이시고요, 우주를 붙잡고 계시는 유지자 이시고요, 만물에게 생명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고요, ,예수께서 비우신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은 얼굴이 들어나는 일들은 하기가 쉬워도 얼굴이 나타나지 않는 천한 일은 대부분 싫어하죠,
그런데 예수그리스도 우주의 주인이시고 왕이신 분께서 낮고 천한 우리 우주에 우리는 통에 물방울만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같은 나를 위해 자기를 버리셨다는 것을 매일 몇 번만이라도 생각하면 여러분들 자리에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어떻게 다른 곳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화요일 금요일 교회 나오지 않고 배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안나는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안나에 비하면 훨씬 더 많은 빛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아기 예수를 만났지만 우리는 그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지금도 하늘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과 다시 오실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도 감동을 받지 않으면 그당시 제사장들과 수 많은 유대인들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나의 마음을 두드리시는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시고 정말 믿음의 사람들로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진짜 마음을 괴롭게 하여 우리가 드려진 기도들 다 응답받고 우릴 데리러 오시는 주님의 재림의 날 그 영광중에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을 뵙게 되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도 안나처럼 성전을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길 소원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우리도 금식하면서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그렇게 안나처럼 살다가 우릴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그 영광중에 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뵙게 되길 소원하오니 우릴 준비시켜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눅 2:36-38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 된 지 팔십사 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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