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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발점에서
겨울산이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냐!
절로 탄성이 나오는 맑고 차가운 겨울날 90명의 산우들 틈에 끼어 백두대간의 한 구간을 또 갔다. 눈이 있어 조금은 미끄러움에도 무사히 갔다. 가는 길은 또한 소망을 가진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앞쪽에서 다음 구간에 속한 도솔봉이 수려한 자태로 손짓하고 그 너머에선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등 소백산의 준봉들이 얼굴을 내밀어 반겨주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소백산산행을 예비하는 구간이다.
12월 16일, 9시 56분 예천과 단양의 경계인 저수재에 버스가 90인의 산객들을 내려 놓는다.
2. 산에서 희망을 구하다.
처음은 구배가 제법 있는 경사길이다. 그 경사길을 힘들게 올라 첫 번째 핏치를 올라가니 해발 1,080.6m의 촛대봉이다. 여기서 못 견디고 아이젠을 찬다. 네발 달린 아이젠인데 부드러운 눈에서는 발이 깊숙히 박히지 않고 발 사이가 좁아서 몸의 균형을 잡기에 좀 부족하다. 짚신형으로 된 신형을 마련해야 할 듯하다.
걷기 좋은 완만한 길을 만난다. 힘이 덜 드는 이런 길을 걷다 보면 여느 때처럼 상념이 솟는다. 끝없는 생각 속으로의 침잠이다. 오늘의 화두는 건강이다. 며칠전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를 되씹는다. 우선 비만에다가 고혈압, 지방간, 갑상선, 위염, 거기다 고지혈증의심과 담낭의 폴립까지 종합해서 7가지나 지적을 받아 조금은 우울하다.(영자의 전성시대는 이걸로 끝인가?) 60년 가까이 부려먹었으니 크게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야속하기도 하다. 7-8년을 두고 이루어진 수없이 많았던 산행과정도 이들 신체의 고장을 막기엔 무력했었던가? 아마도 무절제하게 즐겼던 술과 안주가 죄일 듯하다. 기름진 안주에 곁들였던 달콤 쌉살했던 술, 그때 거기에 곁들여졌던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그걸 맘껏 즐긴 업보이겠지. 무릇 모든 결과엔 원인이 있는 법. 이제부터라도 술은 끊어야 한단다.
희망의 불을 계속 지피려는 나를 본다. 이렇게 오는 빨간불을 어떻게 하면 희망의 녹색 라이트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산에 답이 있지나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신성한 산속에서 공리적인 생각에만 빠져있음을 깨닫고 피식 웃는다.(그까이꺼 죽으라면 죽어야하겠지)
오늘은 저 앞에 있는 도솔봉이 희망이다. 색즉시공, 거기선 삶과 죽음에 구별이 없다거늘....
3. 눈길
9:57 저수재(847m)에서 시작한 산행은 10:42 투구봉(1,080m)을 지나 10:59 시루봉(1,110m)을 오른다. 오늘의 최고봉이다. 길엔 하얀 눈이 축복처럼 쌓여있다. 올겨울 들어 가장 볼만한 눈이어서 반갑고도 즐겁다. 푹신한 눈길이지만 그밑엔 얼어있는 곳도 있어 제법 미끄러운 길이다. 아이젠을 했지만 4발의 작은 것으론 푸슬푸슬한 눈에서는 힘을 쓰지 못한다. 공기는 차지만 바람이 없어 견딜만하다. 거칠게 내쉬는 숨이 공기 중에서 하얗게 변해 아름다운 흔적이 된다.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일갈한다.
‘눈 덮인 겨울산이란 이리도 아름다운 것이냐?’
11:21 1,084봉을 지나고 11:31 배재에 도착하여 잠시 숨을 돌린다. 11:55 싸리재를 지나고 조금 더 가다가 식사를 하는 산님들을 만나 같이 식사를 한다. 김밥을 꾸역꾸역 밀어넣었다. 방울아찌님이 소중하게 지니고 오신 막걸리를 한잔 권한다. 이 술을 먹어야 할까? 신체검사 결과통보후 첫 번째 잔이다. 감사히 받아서 주저하며 마신다. 술과 건강의 대결인가? 이율배반의 오묘한 긴장감마저 흐른다. 그런데 술맛은 좋다!
13:11 멋쩍게 키가 큰 송전탑을 지나 계속해서 가니 뱀재가 나오고 공터가 나온다. 여성산님들이 공터에 쌓인 눈이 좋아서 누워보기도 하고 장난을 치신다. 사진을 찍어본다.
4. 도솔봉
이번 산행의 [저수재-투구봉-솔봉-묘적령]구간은 이 구간대로 경치가 뛰어나지만 앞에 도솔봉이 있어서 더욱 든든한 길이다. 다음 구간에서 작은 백두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백산의 산줄기가 시작되고 서민들이 꿈꾸는 천국인 도솔천에서 이름을 따온 도솔봉을 만나게 되는 곳이다.
도솔천은 석가모니 부처가 머물다가 이 세상으로 오신 곳이며 현재에도 미륵보살이 그곳에서 수 억만년 후 미래에 중생을 제도하러 이 땅으로 오실 때를 기다리며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붓다가 머물고 있던 도솔천이란 어떠한 곳일까? 도솔천은 불교의 우주론에 의하면 욕계에 속하는 천계(天界)이다. 인간계 바로 위에 사천왕천, 삼십삼천, 야마천이 순차적으로 놓여있고 야마천 바로 위에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도솔천은 천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여겨지는데 미래의 붓다(미륵)가 거주하고 있으므로 경건한 불자들은 그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게 된다. 도솔천이라는 이름은 즐거움이 가득차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다른 정보에 의하면 지족(知足)과 안분(安分)을 뜻한다고도 한다. 모두 이상향이 가져야 할 필수조건들이다.
그렇다면 도솔천은 천계(天界)의 상상 속에만 있고 이 세상(地界)에는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소백산의 남쪽 자락 백두대간 마루금에 우뚝 솟아 있는 봉우리가 도솔봉이요,(고창의 선운산을 도솔산이라고도 부른다. 광양의 백운산에도 도솔봉이 있다고 한다.) 조상들은 불교의 파라다이스를 하늘에다 모셔놓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땅으로 가져와서 우리 곁에다 두기를 기원한 것이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 산과 강을 지상최고의 낙원으로 여겼기에 거기에 걸맞는 이름을 물색하다 보니 불교의 낙원인 도솔천의 이름을 현실에 차용했다고나 할까? 그리하여 해발 1,314m의 소백산 도솔봉은 우리네 산하에 우뚝 솟아 우리를 부르고 있었다. ‘오라, 와서 파라다이스를 맛보라.’ 도솔봉은 외친다.(그러니 내가 안 갈 수 있나?)
5. 더 큰 천국 소백산
13:59 솔봉에 도착했다. 오늘의 산행도 대단원에 이르렀다. 솔봉에 올라 지나온 쪽을 돌아보면 가장 높았던 시루봉과 거기서 뚝 떨어진 아래에 배재가 가늠된다. 반대로 앞을 보면 묘적봉과 도솔봉이 손짓하고 그 뒤로 펼쳐진 산맥에서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을 분별해낼 때 쯤 내 가슴은 벅차 오른다. 오늘 산행의 클라이막스다.
‘그래, 오길 잘 했어. 여기가 천국인 걸.’
소백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의 칼바람은 마치 첫 키스의 날카로움 같다고나 할까? 그리고 국망봉에서 느끼는 마의태자의 회한은 산객을 애국자로 만들어 비분강개하게 한다. 마의태자가 망한 국가인 신라의 도성(國)을 멀리서 나마 바라보기(望) 위해 힘들여 올랐던 봉우리여서 국망봉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다. 지금이라도 그 봉우리 정상석 앞에 서면 국회가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
‘잘 해, 잘 들 하란 말이야.’
비로봉 가기 전에 만나는 연화봉은 두개나 되는데 연꽃처럼 따뜻하고 자비로운 소백의 품을 표현해 주고 있다. 소백이야말로 비로자나와 연화장세계가 유토피아 국가와 어울려 도솔천에서 시작한 파라다이스가 더 확장되는 소위 ‘더 큰 천국’이 아니겠는가? 정상의 그 거센 바람은 나의 이 부조리하고도 유한한 삶을 희망으로 승화시키는 정화의 바람이리라.
6. 피날레
14:54 묘적령(1,019.8m)에 도착하여 오늘의 대간길은 다 밟았다. 여기서 우측으로 탈출하여 휴양림의 버스까지 가면 된다. 도솔봉과 소백 산줄기의 감상은 오히려 이곳 탈출로에서 더욱 고조된다. 약간 비껴서 보기 때문이리라. 무릇 온갖 일들 조금 비켜나야 잘 보이는 게 진리이거늘...
15:59 옥녀봉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여 6시간의 산행을 끝냈다. 시끌벅적하고도 유쾌한 송년회와 대간완주기념식이 거행되었다. 또 권해지는 술, 이 넘은 긴장하며 건강이란 놈이 볼 새라 훔치듯이 몰래 홀짝 홀짝 마신다. 모순덩어리의 이 넘, 물색모르고 죽음의 유혹에 굴복하여 술잔과 입을 맞춘다..
‘커, 거 참 달다.’(정녕 이것이 죽음의 키스런가?)
-후기-
캄캄한 밤이다. 원형의 캄캄한 방 속에 혼자 갇혀 있었다. 앞으로 가는 길엔 문이 열개쯤 있나 본데 모두 빨간 불이 켜져 있어 통과불가이다. 고혈압 통과금지, 지방간 통과금지, 고지혈증 통과금지, 위염... 등등으로 빨간 불이 켜져 있고 앞으로 가는 문들은 모두 닫혀 있다.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갑자기 천정의 해치가 열리고 불빛이 비추어 온다.(그분은 빛이시니) 그분께서 도우러 오셨다. 구원은 수평이 아니라 한 차원이 다른 수직으로 일어나는 걸 몰랐다.
‘이리 올라 오너라. 영생을 주마.’ 그 분이 밧줄을 던진다.
‘영생이라고요. 그렇다면 이제 준비하라고요?’(아직 할일 많은데.)
이넘,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영생은 안 됩니다. 이 생을 주십시오.’ 이악스럽다.
‘대간도 끝났지 않았냐? 이제 볼 건 대강 다 보았지 않냐?.’ 그분이 말씀하셨다.
‘땜방 구간도 있고, 이북의 대간은 어쩝니까?’ 볼멘 소리로 주장을 편다.(사실 이넘은 아직 영생의 준비는 안되었다.)
그분과 싱갱이하다 잠이 깨었다. 땀이 온몸을 축축하게 적셔 놓았다. 역시 간이 약해진 건 사실인가 보다.
(다음 번 꿈에는 호남정맥과 낙동정맥도 있다고 그분께 말씀드려야겠다. 낙남정맥도...)
첫댓글 백두대간 일단 마감을 축하드림니다....근데 걍 맨입으로 지나치시려나?....ㅎㅎㅎ
술이 죽음으로 이끄는 키스라는 걸 염두에 둡시다. 사이다 한 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