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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는 축복
(2187.2023.4.9.부활절)
요20:19-23
할렐루야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 주일입니다. 부활절은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기쁜 날이고 소망의 날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단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으로 멈춰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부활을 친히 새롭게 체험하며,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과 함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기독교 신앙에 중심이 되는 두 기둥입니다.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 즉 부활의 종교입니다. 약2000년전 예수님께서는 당시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악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신을 경건한 사람인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날마다 생각하고, 날마다 말하고, 날마다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성도에게 기쁨과 소망이자 동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성령의 능력이신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성령의 능력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하나님이 땅에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낸 사건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사명을 다 마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부르시기 위해서 부활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오늘 아침에 말씀으로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주님과 영원히 함께 동행하시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작은 혀에 권세가 있고, 혀에 능력이 있습니다. 격려와 칭찬과 같은 좋은 말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모두 칭찬과 격려의 말을 자주 사용하여야 하는 것이지 저주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혀를 가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채 단어 하나만 잘 못사용해도 엄청나게 서운하고 섭섭하게 만들게 됩니다. 나는 그런뜻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받아들이는 상대방은 마음에 상처를 입기 때문에 단어 하나라도 신중하게 생각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작은 혀로 인하여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우리도 서로에게도 ‘칭찬과 격려’의 말로 옆 사람에게 ‘평강의 축복을 받으세요’ 서로에게 귀중한 축복을 빌어 주시기 바랍니다.
1.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빈 마음에 평강을 채워주셨습니다.
부활은 생명이며, 희망이며, 능력입니다. 부활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 앞에서 절망하고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요20:19절‘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했습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그들이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그들이 그렇게 능력을 펼치며 회개를 외치며 천국을 외치던 그들이었는데 초라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한 발짝도 전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위축됐고 숨겼고 세상과 담을 쌓았고 밖에 없었고 예수님을 잃으면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사역에서도,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이 없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게 먹히든지 타협하든지 예수님을 가지면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거룩한 제사장이요, 생명운동의 거점입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그에게 하나님이 있고, 천국이 있고, 세상에게 인생에게 줄 것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19절에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문들은 닫혔고 밀폐된 곳이지만 예수님은 뚫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벽을 뚫고, 닫힌 문을 통과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실의 사람들에게, 절망의 사람들에게, 낙담의 사람들에게, 불안해하는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가리킵니다. 그 날은 안식 후 첫날 그러니까 지금의 주일이었습니다. 그 날 새벽 부활하신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같은 날 저녁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말씀합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도 같은 일을 할는지 모른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믿음이 돈독해지고 난 뒤에 비로소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 되지는 않을까? 우리의 자녀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늘 두려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을 바로 그 때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늘날에도 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잃고, 직장을 잃고, 믿음의 잃고, 오늘날에도 두려움, 절망, 불안함, 낙담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이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다 이기시고 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들이 어떤 아픔과 어떤 어려움과 어떤 두려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은 그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지치고, 또 고통 당하고, 병들고, 외롭고, 가난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그 자리에도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실패 만난 제자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두려워하는 제자 들을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 주님이 지금도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을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 이 성전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벌써 주님이 먼저 오셔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께서 이 자리에 찾아오신 것 정말로 믿으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감사하시면 ‘아멘’ 하겠습니다. 생명을 주고, 소망을 주고, 꿈과 비전을 주시기 위해서, 비록 문이 닫혀 있더라도 그 가운데 오셨잖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이’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인류에게 찾아오셔서 못자국 난 손과 발,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게 하십니다.
제자들이 두려움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두려움과 공포가 다 사라지고 이제 그 마음 안에 새로운 평안과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어서 20절‘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하고 그리스도가 주시는 참된 평안함의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마음의 평안을 주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시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마음에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에 평강이, 일터에 평강이, 날마다 강물처럼 넘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강은 히브리 말로 ‘샬롬’입니다. 무기가 있고, 권세가 있고, 또 건강이 있고, 물질이 있어서 그런 힘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평강, 그것은 온전한 평강이 아닙니다. 그것은 샬롬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평강, 샬롬은 무엇이냐? 하나님 은총에 의해서 오는 평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평화. 이것이 참 평안이요, 참 샬롬인 줄 믿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조건적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나라간 모든 반목과 전쟁이 사라져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느낄 수 있고, 모두가 다 누릴 수 있고, 모두가 다 줄 수 있는 이런 평강, 이런 샬롬. 이런, 예수님의 부활은 이와 같은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말씀으로 상주감리교회를 찾아오신 하나님 은총과 은혜와 사랑과 축복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주시는 평강,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믿음의 부활과 확신을 가져야 평강이 찾아옵니다.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은 봄이라는 계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교회력에서 부활절은 봄을 상징하는 춘분과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춘분이 지난 후 보름달이 뜬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주일을 교회는 부활절로 지키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절은 크리스마스처럼 날짜가 정해져 있지를 않습니다. 올해의 부활절이 다른 때보다 좀 이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춘분이 지난 후 보름달이 다른 때보다 빨리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춘분이 와서 어둠의 기운이 물러가는 것을 완연히 느낄 수 있고, 계절적으로도 만물이 새롭게 소생하는 계절에 부활절을 맞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생명의 기운을 자연을 통해서도 한 번 느끼고 깨달아 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의 부활은 마치 봄과 같은 것입니다. 봄이 오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들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우리의 몸과 마음이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바라보는 산과들에는 이제부터 새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옷차림도 겨울보다는 가볍고 화려해집니다. 봄은 우리를 가만히 두지를 않습니다. 새벽기도 마치고 남산을 두바퀴 돌면서 한바퀴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산위에 올라가보니 봄이 오는 기운을 느끼려는 듯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는 봄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봄에 불어오는 바람은 우리를 들뜨게 하기도 하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영감을 우리에게 불어 넣어 주기도 합니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마치 봄과 같아서 예수님 자신에게도 그렇고 우리의 삶에도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킵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 당시 그와 함께 지내던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오늘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에도 무한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날 안식 후 첫날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오늘 부활하신 예수가 나의 주님이심을 예수 이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나의 인생을 책임 질 수 없음을 나는 예수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음을 그래서 나의 인생을 오로지 예수에게만 맡기고 의탁하는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새롭게 하는 자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부활하셔서 나의 주님이 되신 예수를 마음으로부터 찬양하고 경배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축복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20절‘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그들에게 있던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세세토록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우리의 심령 깊숙한 곳까지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심령 가운데 서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는 너무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옮겨졌습니다. 인봉한 돌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이 그 앞을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은 무덤에서 옮겨지고,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가 예수님의 몸을 쌌던 모습 그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전혀 세마포를 푼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그대로 세마포 밖으로 빠져나오셨던 것입니다. 또한 천사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여자들에게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증거들만으로도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보다 더 확실하고 더 직접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몸소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경우가 세 번 나옵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셨습니다. 같은 날 저녁에는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예수님은 특별히 도마를 위해서 또다시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신 것은 그가 예수님을 몹시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은 그들을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도마에게 보이신 것은 그의 믿음을 돈독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생기는 현상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기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제일 먼저 ‘마음의 평안’이 생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평강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우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니 그 마음에 평강의 축복이 넘칩니다.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에게는 마음에 참된 평안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만이 마음에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 문제입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서부터 주홍같이 붉은 죄를 흰눈같이 희게 하셔서 마음에 참된 평안을 갖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강은 죄악의 세력을 정복하고 주신 마음의 평강입니다. 승리자가 가지는 평강입니다. 더 이상 괴롭힐 자가 세상에서는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당당하게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위하여 전도하고 봉사하는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주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할 때에 참된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십니다. 선한 목자로서 자기 양떼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면서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면서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십니다. 이렇게 선한 목자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참된 평강을 맛보며 삽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예배드리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께도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너희에게 나의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허락하시며 이 세상을 살아 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참된 평안과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가실 때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여러분의 빈 마음에 가득 채우고 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에게 평강을 선포하시면서 평강을 주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의 확실한 증거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영만이 아니고 육체까지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과 상처를 가지신 채로 부활하신 것은 부활의 생생함을 알리는 뜻이 더 강했습니다.
사53:5-6절에‘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했습니다. 이 같은 부활의 확신이 후일에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초와 아픔을 다 당하시고 죽으신 사실과 약속하신 대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데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이 상처야말로 고귀한 흔적입니다.
제자들은 일생동안 이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라는 제자가 없었습니다. 그 뒤에 도마는 그 소식을 믿지 않았습니다. 25절‘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합니다. 이 일 때문에 도마는 의심쟁이가 되고 별로 좋지 않은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엇을 의심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믿지 못하고 의심을 하긴 했지만 그는 아주 솔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끔보면 사람들은 체면이나 위신 때문에 허세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말과 행동이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도 많습니다. 모르면서도 아는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없으면서도 있는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비하면 도마는 정직하고 솔직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도마는 체험적인 신앙을 원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는 것을 본 이상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바로 믿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 손가락으로 못자국을 만져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의 확신을 갖고 싶었습니다. 체험적 신앙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체험이 없는 신앙은 기초가 없는 집과 같아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도마도 다른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이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직접 듣는 체험과 기쁨을 누리고 싶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저 멀리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 전파하다가 그곳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주님을 만난 체험이 도마로 하여금 복음의 불모지인 인도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에 순종하며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3.부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눅24:32절‘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마음이 뜨거워 져야 합니다. 속죄의 감격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성령의 임하심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뜨거워져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으로 뜨거워 져야 합니다.
신령한 영의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눅24:30-31절‘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눈이 열려서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근심과 걱정에 싸여서 낙심과 좌절 속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잘 풀어서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졌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며,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의 성령이 임하여 있어도 깨닫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심령의 문이 닫혀져 있고 영안이 닫혀져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축사하시고 주시는 떡을 먹고서야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요6:35절‘예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생명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영안이 열려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의 인생길이 180도로 변화되어 되돌아오는 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서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속의 길이요, 정욕과 낙망과 불신앙의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은 신앙의 길이요,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이요, 소망의 길입니다. 그렇게도 그립던 고향집을 지척에 두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올라가는 길은 어려운 길이요, 고난의 길이요, 순교의 길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져 영의 눈이 열렸는데 아직도 근심과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달려가서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라고 증거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완전히 변화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행함이 뒤따르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진정한 필요를 아셨습니다. 제자들의 필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이 가장 필요로 한 것은 무엇이지요?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잃어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에 대한 상실을 겪어 본 제자들이 가장 갈망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의 최고 필요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에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잃은 제자들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표류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없는 우리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방황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주님은 ‘성령충만함을 받으라’ 명하셨습니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님의 숨입니다. 22절‘숨을 내 쉬며’ 인간의 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22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체험적인 신앙으로 끝나지 않고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요14:26절‘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지금 곧 떠날 것이고, 이제 앞으로는 나 대신 성령이 와서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고, 너희를 인도할 것이고, 너희를 가르칠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령속에 ‘성령을 받는 체험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로 하여금 능히 하게 하십니다. 행1:8 말씀처럼, 성령님이 임하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습니다. 이에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일을 힘 있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16:7 말씀처럼,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시리라는 약속을 재차 밝히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났습니다. 요20:26 말씀처럼 그 때도 제자들은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령님을 받았다면 그들이 함께 모여 문들을 닫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들이 성령님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행2장을 보면에 오순절 날에 제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50일, 곧 승천하신지 10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대로 그들 모두가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이 그들에게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 때부터 비로소 그들은 담대하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때는 예수님이 앞으로 곧 그들에게 성령님의 충만함을 주시겠다고 재차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요20:23절‘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놀라운 권세를 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말한다든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네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하고 임의대로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복음을 들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대사로 보내시면서 죄 사함의 권세를 우리에게 위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대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님도 주셨고, 죄 사함을 선포하는 권세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생활원칙이 분명한 것처럼 신앙생활도 확실해야 합니다. 애매한 태도는 곤란합니다. 도마는 자기가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봄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확실히 체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도마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로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마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실이란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의 저울에 달아보아서 치우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진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말도, 행동도, 사랑도, 물건도, 겉과 속이 다릅니다.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진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아쉬운 시대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다 진실합니까?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떳떳하게 ‘우리는 진실하다’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 상주감리교회에 다는 사람이란 간판을 달고 삽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 양심대로 사는 사람, 선한 사람, 좋은 사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참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 볼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 보아야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솔직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다’우리도 도마와 같은 이런 신앙을 마음중심에서부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살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계란을 삶아서 나누어 드릴텐데 여러분이 그 계란을 집에가서 장조림 해서 드시지 마시고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귀한 믿음의 보화들을 가지고서 세상에서 승리하며 위대한 복음 증거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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